일본은 오랜 기간 한국 경제의 ‘페이스메이커’였다. 페이스메이커는 마라톤에서 동료의 기록 단축을 위해 함께 뛰는 조력자다. 한국은 “잘살아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웃 나라 일본을 맹추격해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성장했다. 반도체, TV, 스마트폰 분야에서는 이미 전자왕국 일본을 따라잡았다. 최근 국가 신용등급도 사상 처음 일본과 같은 반열인 ‘Aa3’로 올랐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올림픽 성적에서 일본을 앞질렀다.
일본과 거리가 좁혀질수록 고민도 깊어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올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남을 따라가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우리가 앞장서 길을 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내에서는 “이제는 글로벌 기업이나 선진국을 따라잡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재빠른 추격자)’ 전략이 아니라 우리만의 콘텐츠로 승부를 거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선발자)’가 돼야 한다는 메시지”라는 해석이 나왔다.
문제는 방법론이다. 경영컨설턴트 피터 언더우드는 그의 책 ‘퍼스트 무버’에서 “퍼스트 무버의 핵심은 창의성인데 창의성은 도전정신에서 출발한다. 이 점에서 일본은 빵점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중국의 한자를 가져다가 문자로 만들고, 인도 카레를 카레라이스로 바꿨지만 스스로 한자와 카레를 개발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모방과 개선’의 천재 일본이 더는 한국의 페이스메이커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한국처럼 자원이 부족한 나라가 ‘맨땅에 헤딩’하듯 새로운 분야만 기웃거린다고 해서 성공한 선발자가 될 수는 없다. 경영학에서는 ‘선발자의 이익’으로 기술 자원 고객의 선점을 꼽지만 시장 개척에 따르는 실패 위험과 후발자 무임승차와 같은 ‘선발자의 불이익’도 함께 언급하고 있다.
한국형 퍼스트 무버의 제1조건은 우리 속에 내재된 창조혁신 DNA의 발현이다. 한국인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제자(製字)원리를 갖고 있는 한글을 창조한 민족이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을 어여삐 여겨” 세계 각국 문자를 연구하고 우리만의 혁신적 상품인 한글을 창제해 사람들의 행동까지 성공적으로 바꿨다.
제2조건은 시장 판도를 바꾸는 미국식 시스템적 사고다. 에디슨이 위대한 혁신가인 이유는 전구가 아니라 전구의 상업적 사용이 가능한 전력 인프라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애플의 히트작 중 원조는 거의 없다.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까지 창의적으로 활용해 게임의 룰을 바꿨을 뿐이다. 한국이 처음 개발한 MP3를 음악듣기 서비스(아이튠스)를 결합한 아이팟으로 내놓아 판을 바꿨다. 복사기회사 제록스의 그래픽모드에 착안해 매킨토시 컴퓨터 운영체제를 디자인했고, 미국의 팜과 림이 개념을 잡은 스마트폰을 아이폰으로 만들어 성공시켰다.
제3조건은 개방과 협력이다. 1990년대 “왜색문화로 도배될 것”이라는 반발에도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빗장을 과감히 열었다. 지금은 일본이 한국 드라마, 케이팝(K-pop)의 최대 시장이 됐다. 자유무역협정(FTA)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가 한국이다. 일본 경제는 1990년대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며 활력을 잃었으나 부품소재 산업은 여전히 세계 최고다. 대일 무역적자의 80%가 여기서 나온다. 이기동 한일경상학회장(계명대 교수)은 “일본 기업의 투자 유치와 같은 경제 협력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한강의 기적’에서 보여준 기업가 정신이다. 폐선(廢船)을 바다에 가라앉혀 방조제 공기(工期)를 앞당긴 ‘정주영식 물막이 공법’이나 리비아의 국토를 바꾼 대수로 사업과 같은 극한상황 속의 도전이 혁신과 창조를 만들어낸다. 한국형 퍼스트 무버를 굳이 정의하자면 ‘패스트 무버(패스트 팔로어+퍼스트 무버)’쯤 될 것이다.
박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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