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23. 01:05

삼성 애플 소송의 결과가 나왔다. 삼성이 애플의 아이폰 디자인을 베꼈다는 것이 미국 법원 배심원들의 평결이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이 전문가가 아닌 배심원들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런 평결이 애국심의 산물일 것이라는 평을 내놓았다. 문제가 된 것은 디자인이니, 향후 삼성은 디자인 전문가를 보강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조언도 했다.

이번 소송에서 핵심 이슈는 분명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디자인이 아니라 소비자가 느끼고 체험하는 제품의 이미지나 정체성과 관련된 디자인이다. 우리는 '각이 둥근 네모 모양의 휴대전화가 어떻게 특허가 되느냐'고 따지지만, 이것은 논란이 되는 디자인 특허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지적이다. 분명 미국 법원은 A와 B가 각각은 달라도 전체적으로 흉내를 냈다면 디자인 특허를 침해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을 법적 용어로 '트레이드 드레스(Trade Dress)'라고 한다. 제품 전체의 포장·용기·형태·색깔 등을 종합해서 그 제품만의 독특한 디자인 특성을 그 제품의 정체성이자 핵심 디자인 특허로 보는 것이다. 만일 다른 제품이 이런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유사하게 느껴지게 했다면 특허 보호 대상을 훔쳤다고 간주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디자인 전문가의 생각이 아니라 소비자, 즉 일반인이 그 제품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이다. 기술적으로 완전히 다르다고 하더라도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나 느껴지는 감성에서 비슷하다면 그것은 베낀 것이다. 이는 소비자 심리의 문제이다. 물리적인 디자인이 소비자 개인의 심리와 감성적 체험으로 연결되는 부분이다.

제품의 정체성과 이것을 디자인적 이미지로 전환하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국내 기업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것이다.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디지털 제품의 핵심은 숨어 있는 기술이 아니라 이것을 어떻게 느끼고 보는가의 문제이다. 이제 기업이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은 제품의 기술적 구성도 중요하지만 소비자가 제품을 통해 느끼는 이미지와 정체성이다. 특정 제품의 디자인이 소비자에게 어떤 이미지로 다가오는지,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선진국 기업들은 제품 디자인에서 창의력을 강조한다. 남들과 다른 제품은 단순히 특이한 디자인이나 앞선 기술을 적용한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뚜렷한 정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제품이다. 이에 비해 국내 기업들이 쏟아내는 수없이 많은 제품이 비슷비슷하게 느껴지고 그것이 그것처럼 보인다면, 이제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아무런 정체성도 없는 제품을 베껴낸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애플의 디자인이나 기술은 특별히 뛰어나지 않다. 단지 남들과 분명히 차별되는 제품의 정체성을 디자인과 일반적 기능으로 구현한 것이다. 그를 통해 소비자들이 제품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느끼게 했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기업들이 전자·자동차 등의 제품에서 쉽게 구현하지 못하는 특성이다. 정체성이 뚜렷이 부각되지 못하는 제품이라면 아무리 앞선 기술이 적용되고 멋진 디자인으로 꾸며진들 어디선가 본 듯한, 어떤 것을 따라 한 듯한 '카피캣(복제품)' 수준의 제품이 되고 만다. 중국의 '산자이(복제 짝퉁)'와 그리 다르지 않은 제품을 우리의 일류 기업이 여전히 만들고 있는 것일 뿐이다.



황상민 연세대 교수·심리학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29/20120829010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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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1:04

“성공하려면 섹시해져라”… 섹시 페미니즘 창시자

13일 타계한 헬렌 걸리 브라운은 32년 동안 여성잡지 코스모폴리탄의 편집장을 맡으며 여성의 사회적 성공과 성적 자유를 주장했다. 허핑턴포스트 웹사이트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에나 간다(Good girls go to heaven, bad girls go everywhere).’ 13일 90세로 세상을 떠난 미국 여성잡지 코스모폴리탄(이하 코스모)의 헬렌 걸리 브라운 편집장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착한 여자는 안락한 삶을 살지만 나쁜 여자는 훨씬 많은 선택의 기회를 누리며 산다는 것이다. 브라운은 평생 여성들에게 “나쁜 여자가 돼라”고 설파했다. ‘나쁜 여자는 어디에나 간다’는 자신의 ‘명언’을 2009년 자서전 제목으로 사용했을 정도다.》

브라운이 말하는 ‘나쁜 여자’는 관습에 매이지 않고 돈 명예 사회적 지위 등 남성들이 누리는 특권을 쟁취하는 여성이다. 여성의 성적 매력도 숨길 것이 아니라 적극 이용해야 할 무기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그가 편집장을 맡은 32년 동안 ‘코스모’는 여성의 외모와 성적 매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알려 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기사들로 가득 채워졌다.

73세에 가슴 확대 수술을 받았을 정도로 성형수술 신봉자였던 브라운은 고령에도 뽀얗게 화장한 얼굴로 대담한 의상을 입고 TV 오락 토크쇼에 자주 출연해 ‘섹시한 여성이 되는 법’을 알려 줬다. 여성의 성적 매력을 내세운 브라운 식 ‘섹시 페미니즘’은 그의 이름 ‘헬렌’을 따 ‘헬레니즘(Helenism)’으로 불려 관능적 아름다움을 표현했던 그리스 헬레니즘(Hellenism)을 연상시켰다. 

일명 ‘스틸레토(하이힐) 페미니즘’으로 불리는 브라운 식 페미니즘은 정통 여권 운동가들로부터 ‘사이비’라고 배척받았다. 미국 여권 운동을 개척한 베티 프리단은 브라운을 “안티 페미니스트”라 불렀고 코스모 잡지를 가리켜 “유치한 10대 여성의 성적 판타지로 가득하다”고 비꼬았다. 생전에 여성의 지위 향상을 외쳤지만 그의 사후 여권 운동가들에게서 애도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브라운이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진보적인 동시에 퇴행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야누스적 인물”이라며 “그가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논란이 계속될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많은 여성에게 브라운의 주장은 폭넓은 공감을 얻었다. 특히 일터에서 매일 남성과 부닥치며 살아가는 직장 여성에게는 여권 운동 같은 고상한 이념보다 남성을 적대시하지 않는 현실적 여성관이 설득력이 있었다. 

영화 ‘섹스 앤 더 시티’를 포함해 미국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현대적 여성상은 브라운이 내세운 ‘나쁜 여자’를 모델로 삼은 경우가 많다. 

브라운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성공에 대한 열망과 집착은 여기서 비롯됐다. 1922년 아칸소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열 살 때 아버지가 엘리베이터 사고로 사망한 후 로스앤젤레스(LA)로 이사 가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살았다. LA의 경영단과대학 졸업 후 광고회사 비서로 들어가 톡톡 튀는 광고 문구를 만들어 내는 능력을 인정받아 제작 부서로 옮겼다. 여러 광고회사를 거치며 성공 가도를 걷다가 40대 초반이던 1960년대 초 광고계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여성이 됐다. 

브라운이 1962년 내놓은 책 ‘섹스와 독신 여성’은 당시 보수적이던 미국 사회에 일대 충격을 안겨 줬다. 책에서 여성에게 성적 자유를 누리며 살라고 주장한 그는 “성공을 위해 섹스를 이용했다”는 자신의 경험담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리고 3년 후인 1965년 여성잡지 코스모를 살리라는 특명을 부여받고 미디어그룹 허스트에 영입됐다.

당시 미국의 여성잡지 시장은 전업주부들을 겨냥해 살림과 내조 비결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브라운은 커리어 여성이 크게 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여성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성공한 독립 여성을 모델로 내세운 기사들에 집중했다. 돈 명예 권위 사랑 등 삶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코스모 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남성이 만든 게임의 규칙을 뒤집기보다 그 안에서 여성이 성공하는 비결을 알려 준 브라운과 코스모 잡지는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시대의 보수적 분위기와 맞아떨어져 전성기를 누렸다. 

브라운은 1983년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25인에 선정됐으며 미국의 대표적 오락 토크 프로그램 ‘투나잇 쇼’의 10대 단골손님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그가 처음 편집장을 맡았을 때 발행 부수가 76만 부에 불과했던 코스모는 80년대 초 300만 부로 급증했으며 현재 64개국 판으로 번역 출판되고 있다. 

브라운은 겉으로는 성적 자유를 외쳤지만 사생활은 ‘모범생’이었다. 1959년 결혼한 남편 데이비드 브라운(영화 제작자)이 2000년 사망할 때까지 41년간 동고동락하며 살았다. ‘스팅’ ‘조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등 수십 편의 할리우드 영화를 제작한 브라운의 남편은 아내의 사회활동을 지지하며 후원했다. 이들 부부는 “아이들을 낳아 기르기에 우리는 너무 이기적”이라며 평생 자녀를 두지 않았다. 

여성의 재정적 독립을 중시했던 브라운은 코스모 편집장으로 재직하던 32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점심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을 정도로 검소했다. 브라운은 남편이 사망한 뒤 남편의 모교인 스탠퍼드대와 컬럼비아대에 남편과 자신의 이름을 딴 미디어연구소 건립에 평생 모은 재산 3000만 달러를 기부했다.


워싱턴 정미경 특파원


http://news.donga.com/3/all/20120829/489452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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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1:02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직에서 은퇴한 빌 게이는 요즘 '돈을 쓰는' 제2 인생을 살고 있다. 정확히 말해 전 지구적 이슈에 관심을 갖고 미래를 위한 투자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중심에 원자력이 있다. 최근 게이츠는 특히 차세대 원자로 개발에 적극적이다. 그가 '원자력 전도사'로 나서게 된 이유는 뭘까? IT산업의 제왕이었던 그는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임을 인식했고, 전기를 공급받지 못한다면 곧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게이츠가 인류 복지를 위해 펼치고 있는 화장실사업도 일맥상통한다. 화장실 보급이 '위생뿐 아니라 인간 존엄성의 문제'이듯이 전기나 에너지 부족으로 기본적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는 수십억명의 인구에 필요한 핵심 에너지 기술로 원자력을 택한 것이다.

그가 꿈꾸는 미래를 위해 게이츠는 한국을 전략적 파트너로 선택했고, 필자를 비롯한 국내 전문가들이 지난 8월 16~17일 그가 설립한 테라파워사를 방문했다. 이번 방문에서 테라파워사가 연구 중인 '진행파원자로'와 '소듐냉각고속로' 개발을 위한 협력 방안도 논의했다. 게이츠는 한국이 뛰어난 품질의 전기를 세계에서 가장 싸게 공급하는 국가일 뿐 아니라 UAE 수출을 이뤄낸 원전 선진국임을 인정하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특히 자원도 빈약한 후발국인 한국이 어떻게 세계적인 원전 선진국이 되었는지 신기해하며 놀라움을 표했다.

빌 게이츠와의 만남을 통해 진심 어린 애정으로 지구적 이슈를 해결해 나가고자 하는 그의 강한 의지를 확인했다. 또 여느 원자력 전문가에 뒤지지 않는 지식과 아이디어가 넘치는 진정한 통섭형 인물이 바로 게이츠였음을 알고 감탄했다. 늘 혁신을 꿈꾸는 그의 도전적인 자세와 열정, 그리고 인류애적 마인드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덕목임이 분명하다.

세계 원자력의 역사는 반복되는 도전을 지혜롭게 극복해온 과정이었다. 게이츠가 혁신적 마인드로 위기에 도전해 왔듯이, 지금이 바로 일본 원전사고 이후 침체된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위기를 기회로 삼아 차세대 원자로 개발에 있어서 한국이 세계적 주도권 확보를 위해 적극 나서야 할 때다. 빌 게이츠와의 뜻깊은 만남을 계기로 우리의 선진 원자력 기술이 인류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고, 세계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장순흥 KAIST 교수·한국원자력학회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28/20120828028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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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1:01

[시민편집인의 눈]


스포츠 저널리즘의 진보영역은 재미 추구 + 비평 기능
국가주의·경제효과 등 ‘메가이벤트 신화’에서 벗어나야 

스포츠에 관심이 적은 한국인은 올여름 올림픽 이야기의 융단폭격에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영국이나 독일에서는 선술집인 펍에서 맥주 한 잔 시켜놓고 스포츠 중계방송을 즐기지만 오히려 월드컵이나 올림픽 기간에 중계를 보여주지 않는 술집들도 생긴다. ‘축구 없는 구역’이란 뜻인 ‘풋볼 프리존’이나 ‘올림픽 프리존’ 같은 안내판을 내건다.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소수자 배려 문화’가 없나 싶어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올림픽 프리존’이 있기는 했다. 알고 보니 ‘방마다 대형 티브이를 설치해 올림픽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나.


오랜 기간 세계 주요국 언론들을 모니터링해오면서 내린 결론은 우리만큼 거국적으로 스포츠 메가이벤트에 몰입하는 나라가 없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월드컵과 올림픽의 개최국인 독일과 영국에서도 보도를 절제하면서 스포츠에 관심이 적은 사람들을 위한 갖가지 배려를 했다. 인터넷에서는 <비비시>(BBC)뿐 아니라 <가디언>과 <더 타임스>도 ‘올림픽 감추기’(Hide Olympic) 배너를 클릭하면 올림픽 기사가 사라진 별도 홈페이지로 이동했다. 주최국인데도 올림픽이 머리기사를 차지하는 날은 많지 않았다.


<비비시>가 8월4일 상당히 비중 있게 보도한 ‘의족 스프린터 피스토리우스’ 기사도 세 번째로 취급됐는데, 머리기사는 시리아 사태를 다룬 것이었고, 두 번째는 북한 홍수 기사였다. 우리 언론에서는 시리아 사태는 물론 북한 홍수 기사도 올림픽에 밀렸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축구 같은 큰 이벤트가 있을 때 권력층 비리 등 한국 사회 주요 현안들이 언론에서 사라지는 일은 늘 반복된다.


<한겨레>가 올림픽 기사를 세 번만 1면 머리기사로 올리고, ‘용역폭력’ ‘녹조현상’ ‘공천헌금’ 등 현안들을 계속 추적한 것은 의지가 엿보이는 보도태도였다. ‘런던 클로즈업’처럼 특파된 기자가 경기장 안팎에서 주워담아 전해준 읽을거리들도 재미있었다.


그러나 진보신문이 스포츠 저널리즘 영역에서 보여줄 수 있는 차별성인 비평 기능은 너무 약해 보였다. 그런 맥락에서 문화·스포츠 에디터의 칼럼 ‘또 하나의 감동’(16일)은 일부 내용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한국의 언론들도 ‘애국주의나 금지상주의의 틀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고 했는데, 과연 그렇게 평가해줄 만큼 변화한 것일까?


대한체육회는 ‘금메달 10개, 종합순위 10위’를 목표로 잡았는데, <한겨레>에서도 금메달 순위가 곧 종합순위로 통했다. 메달집계표도 금메달순이었다. 미국·캐나다·일본 등이 총메달수로 순위를 매기는데, 한국에서는 <한겨레>만이라도 총메달수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어땠을까? 금메달만 중시하는 건 2등을 ‘실패’로 보는 일등지상주의 소산이다. 금메달 순위로 보면, 학교체육과 사회체육의 기반이 튼튼해 진짜 스포츠 선진국으로 불리는 덴마크가 29위, 스웨덴이 37위, 핀란드가 60위였다.


올림픽에 끼어든 자본의 문제, 특히 엘리트체육과 일등주의를 부추기는 재벌의 올림픽 스타 마케팅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고 합숙을 금하는 등 학교체육을 정상화하려는 학교체육법안에 박용성 체육회장은 신문에 칼럼까지 기고하며 반대했다. 운동만 하던 선수들은 끝내 메달을 따지 못하면 정상적 사회활동을 하기 힘들어 빈민층으로 전락하는 사례가 많다. ‘금메달 따면 부자 되나요?’(11일) 기사에서 ‘올림픽에 열광하는 것은 공정한 경쟁과 공평한 대가’가 ‘올림픽에서는 그나마 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온전한 설명은 아니었다.


전경련이 한국의 메달 28개 중 22개가 10대 그룹이 협회장 등을 맡아 후원한 종목이라고 홍보했지만, 그것은 정부가 학교체육과 생활체육을 방치하고 있는 사이 재벌이 메달을 딸 수 있는 엘리트 중심으로 스포츠를 좌우해왔음을 반증한다. 메달을 딴 선수가 기자회견 도중 도착한 재벌회장에게 인사하고 기념사진까지 찍는 장면은 상업주의와 자본에 예속된 한국 스포츠의 본모습이다.


<한겨레>가 짚어줬으면 했던 또 하나의 관점은 올림픽을 국가대항전으로 몰고 간 국가주의 분위기였다. 올림픽 헌장도 올림픽은 개인간 경기이지 국가간 경기가 아니라고 천명했는데 우리 언론은 메달 획득을 ‘국위선양’으로 찬양하기 바빴다. 국가주의가 극명하게 표출된 것은 축구였다. 축구에는 그렇지 않아도 경기 전에 유독 양국 국가를 부를 만큼 국가주의가 스며들어 있다.


세계 최강과 맞붙은 브라질전 때 든 기분은, 한국이 이기면 또 얼마나 요란하게 한국 사회를 뒤흔들까 하는 걱정이었다. <한겨레>도 이미 ‘4강 신화’로 1면 머리기사(6일)를 장식한 터에 ‘신화’ 다음은 무엇일까? ‘신화’를 낳은 엘리트체육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대다수 국민들은 계속 운동부족 상태에 놓이지 않을까? 한국 사회 모든 현안도 ‘신화’ 속에 묻히지 않을까? 말을 못해 그렇지 ‘거국적 몰입’에 불편해하는 사람도 꽤 있다고 본다. 그런 사람들을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야말로 런던올림픽 개막식이 보여준 ‘다원화 사회’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될 터이다. 한국 승리에 대한 걱정은 흔쾌하게 우리 팀을 응원할 마음을 되찾게 해달라는 소망의 다른 형태일 뿐이다.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한일전을 앞둔 절묘한 시기에 이명박 대통령은 독도를 전격 방문함으로써 축구를 진짜 국가대항전으로 만들어버렸다. 정권이 곤경에서 빠져나오는 데 전쟁 다음으로 유용한 것이 스포츠란 말이 있다. 스포츠에서 정치와 자본을 분리해내는 일은 <한겨레>가 추구해야 할 스포츠 저널리즘의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올림픽이 메가이벤트가 되면서 ‘올림픽의 저주’란 말이 나올 만큼 올림픽 개최국 또는 도시는 대부분 재정위기에 몰렸다. 국제대회를 유치한 영암, 대구, 부산, 인천에서 드러나듯 평창도 ‘경제효과 65조원’은 ‘허풍선’이 될 게 확실하다. 직접경제효과는 세금 투입 효과이니 더 큰 효과를 낼 투자처가 얼마든지 있고, 간접경제효과는 신기루에 가깝다. 국민 세금이 재벌 건설사 등 ‘토건족’ 주머니로 들어가고 주민이 시설 유지 비용을 계속 뜯기는 ‘야바위’나 다름없다. 스포츠 메가이벤트의 신화에서 우리는 언제 깨어날 수 있을까?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491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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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0:59

프러시아 정치사학자인 오토 힌체는 내정의 연장이 외정이고, 외정은 다시 내정을 규정한다는 내정과 외정의 상호결정론(codetermination)을 설파하였다. 상호결정론이 한국보다 더 절절히 들어맞는 나라는 없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국제적 냉전의 산물이고, 국내정치적 갈등보다 국제정치적 요인이 6·25전쟁을 발발케 했으며, 전후 남북 간의 체제경쟁이 한국의 압축적 산업화를 견인하였다.

그런데 해외의존도가 높은 우리에게 성공적 외정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활적인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의 주요 대선 후보들은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지역균형발전 등 내정에 관한 정견과 공약을 발표하면서도 2012년 이후의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대국가전략(Grand National Strategy)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유로존 금융위기의 먹구름이 대한민국에 도달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을 것이고 한중일의 지도자들이 국내 정치적 곤궁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정을 이용하면서 동북아에 영토 갈등이 거세지고 있으며 차기 대통령이 선출될 즈음에는 동북아 안보 체스판의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대만 러시아는 대선을 끝냈고, 한국 미국은 앞두고 있고, 중국과 북한에서 권력세습이 완료되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총선 가능성이 점증하고 있다. 차기 대통령은 동북아 지역을 움직이는 행위자와 구조가 동시에 바뀌는 시점에서 권력을 이어받는다. 따라서 주요 후보들은 이러한 중대한 구조적 변동기에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외정의 방향을 국민들에게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초당적 대국가전략은 다음과 같다. 

해외의존도 높은 한국엔 ‘外政’ 중요


첫째, 대한민국은 지중해시대 대서양시대 태평양시대를 거쳐 도달한 21세기 ‘동아시아 지중해시대’를 여는 주역이 되어야 한다. 유럽의 지중해시대를 이끈 나라가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같은 반도국가였듯이 ‘동아시아 지중해시대’도 반도국가인 한국이 열어야 한다. 동해 남해 서해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면서 태평양과 중국대륙을 연결할 수 있는 반도가 지닌 지정학적 가치를 활용하면 한국은 그리스와 이탈리아가 그랬듯이 동아시아 지중해의 중추국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동북아의 강대국인 중국 일본과 삼각균형체제를 이루지 않고서는 한국은 중추국가가 될 수 없다. 그런데 한국의 국력은 삼각균형을 이야기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하기 때문에 국력을 키워 삼각균형을 구축해야 한다. 그 방법으로 ‘자강을 통한 내적균형(internal balancing)’ 전략을 생각해볼 수 있으나 단시일에 이룰 수 없는 비현실적 전략이다. 따라서 현실적이고 실현가능한 전략은 미국과의 동맹 강화를 통한 ‘외적균형(external balancing)’ 전략이다. 현재 예측 가능한 시간 내에 세계 유일의 패권국으로 남을 미국의 힘을 한미동맹 강화를 통해 더함으로써(호가호위·狐假虎威), 우리는 중국 일본과 거의 대등한 균형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북한과 화해와 협력을 통해 7000만 한반도 경제권을 형성한다면 일본과는 인구수와 시장에 있어서 실질적 균형을 이룰 수 있다.

자주론자들은 한미동맹 강화를 친미, 숭미로 배격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가 일본 중국과 자주적으로 떳떳하게 상대하려면 미국을 등에 업어야 한다. 한미동맹이 강고했을 때 일본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 강변하지 않았고 중국이 동북공정을 벌이지 않았다. 

우리 홀로 자주하겠다면서 한미동맹을 이완시켰을 때 일본과 중국은 우리를 가볍게 대하고 무례한 짓을 하였다. 동아시아의 전통적 외교전략은 원교근공(遠交近攻)이다. 미국은 태평양 너머 있는 먼 나라이고 영토적 야심이 없는 유일한 제국이다. 중국과 일본이 아직도 19세기 제국주의시대의 영토 확장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미국의 힘을 빌려 자주를 확보하는 외적 균형전략을 채택해야 한다. 우리의 자주적 능력을 키우기 위한 ‘자주를 위한 한미동맹’을 지향해야 한다. 

둘째, 모든 후보가 복지를 이야기하고 있으나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다. 증세같이 국민의 주머니를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전하는 방식은 정치적으로 실현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복지재원은 해외에서 마련해야 한다. 

美 등에 업고 ‘한중일 삼각균형’이뤄야


우리는 지중해시대의 베네치아와 제노아 같은 도시공화국들이 해외에 투자해서 벌어들인 돈을 국내로 들여와 시민들에게 복지 번영 자유를 제공한 데서 배워야 한다. 이제 통상국가를 넘어서 해외투자를 통해 밖에서 돈을 벌어와 세금을 올리지 않고 복지기금을 마련하는 투자국가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를 구축하기 위해 중국을 둘러싼 동남아 서남아 중앙아시아 투자를 통해 틈새시장(niche market)을 개척해야 하고 한미동맹이라는 하드파워, 대한민국의 매력을 전파하는 소프트파워, 그리고 공적개발원조(ODA) 같은 경제원조를 통해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끈끈한 관계를 만드는 ‘점성권력(sticky power)’을 결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7000만 한반도 경제권 형성과 궁극적인 통일은 중국을 견제하고 한중일 삼각균형체제를 확립하는 데 필수적이다. 통일은 영토 인구 자원이라는 국력의 3대 요소를 더해줄 것이기 때문에 통일한국이 되어야 한중일 삼각균형체제가 완성될 수 있다.


임혁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http://news.donga.com/3/all/20120828/489203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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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0:56



2005년 8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을 강타해 루이뷔통 같은 명품업체가 초비상이 걸린 적이 있다. 세계 악어가죽 공급의 85%를 차지하는 루이지애나주 양식 악어 150만 마리가 거의 죽어 악어가죽 가격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2만1000 달러(약 2400만원)짜리 루이뷔통 악어가죽 재킷은 생산이 중단됐고 살바토레 페라가모 악어구두 가격도 두 배가량 치솟아 큰 피해를 봤다. 이때 수익을 거둔 이도 있었으니 바로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다. 카트리나에 놀란 플로리다 주정부는 워런 버핏과 ‘허리케인 피해가 발생하면 (버핏이) 40억 달러의 주정부 채권을 매입한다’는 헤지(위험 대비) 계약을 맺었다. 피해 복구 자금줄을 마련해 놓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허리케인은 잠잠했고 버핏은 헤지 계약의 대가로 2억2000만 달러(약 2500억원)를 고스란히 챙겼다.

 『워런 버핏이 날씨시장으로 간 까닭은』이란 책에 소개된 일화다. 최근 지구온난화와 이상기후로 경제기상도가 급변하고 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104년 만의 가뭄과 연일 35도를 훌쩍 넘는 무더위가 지속되는가 하면 난데없이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기도 했다. 이에 따라 국내 산업계도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폭염이 이어지던 얼마 전으로 돌아가 보자. 불황 속에서도 반짝특수를 누린 제품이 꽤 많았다. 한 대형마트의 여름장부를 들여다보면 에어컨은 진열상품까지 동나는 품귀현상을 빚으며 40% 매출 증가를 기록했고 대형 선풍기는 57%, 쿨매트는 100배 이상 판매가 늘었다. 열대야 속 ‘치맥(치킨과 맥주)’을 즐기려는 사람도 늘어 수입맥주가 59%, 치킨은 30% 껑충 뛰었다고 한다. 반면 지구촌 폭염과 가뭄의 여파로 밀·옥수수·대두 가격이 오르면서 이르면 올해 말 밥상물가가 들썩이는 애그플레이션을 경험할 것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

 기업에 날씨는 이제 필수 체크포인트다. 상품마다 잘 팔리는 온도부터 따로 있다. 반소매셔츠는 섭씨 영상 18도부터 많이 팔리고 에어컨은 19도, 아이스크림은 22도부터라고 한다. 온도가 더 오르면 수박(26도), 방충제·물티슈(29도)가 제철을 만난다. 반대로 온도가 내려갈 때는 13도부터 뜨끈한 어묵이 잘 팔리고 스웨터(영하 4도), 오리털 파카(영하 8~10도) 순으로 판매가 늘어난다.


이제 ‘비 오면 짚신장수 아들 걱정, 안 오면 우산장수 아들 걱정’ 식으로 앉아서 날씨만 걱정할 게 아니다. 날씨를 유가나 환율·금리처럼 중요한 경영변수로 인식해야 한다. 나아가 기상이변을 새로운 사업 기회로 활용해야 할 필요성도 엿보인다.


 기상선진국 미국은 기상시장 규모만 9조원이다. 1500억원에 불과한 국내 시장에 견줘 보면 어마어마하다. 1980년대부터 매년 평균 5%씩 꾸준히 성장하다가 카트리나로 수천 명의 피해가 발생한 이후에는 4.5배 수준까지 급팽창했다.

 기상산업은 일자리의 보고이기도 하다. 미국은 기상정보를 다루는 방송·신문 등을 비롯해 기상관측기기, 기상 컨설팅, 기상시스템 개발 등의 분야 4만여 일자리를 만들어 냈다. 폭우나 폭염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해 주는 ‘날씨보험’이나 ‘날씨 파생상품’도 선보이고 있다. 기상이변 피해를 감정하는 ‘기상감정사’, 기상재해를 대비해 주는 ‘재해 컨설턴트’ 등 이색 직업도 생겨나고 있다.

 최근 우리 정부도 다양한 기상산업 육성정책을 내놓고 있다. 올해부터 기상정보를 활용해 피해에 대비하고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에는 ‘날씨경영 인증’을 해 주고 있다. 9월부터는 날씨(weather)와 내비게이션(navigation)을 합친 ‘웨비게이션’도 출시한다. 차량이 있는 지역의 기온과 습도, 안개, 도로 결빙 같은 세세한 기상정보를 제공해 교통사고를 방지한다는 것이다.

 ‘날씨가 세계경제의 80%를 좌우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날씨가 기업활동과 국민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고 있다.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이 그랬던 것처럼 꿇어앉아 기도만 하다간 기상이변의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을 뿐이다. 무쌍한 기상환경 변화 속에 기업경영에 미치는 치명적 위협을 최소화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해 적극 나서야 할 때다.

이동근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161001&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2. 9. 23. 00:54

디자인이란 삶의 방식
'빈자·부자 모두 품위있는 생활'… 핀란드 디자인정신 보여주려 북유럽디자인체험관 짓는 중

한국과 다른 핀란드의 일상
마을마다 주민참여 문화프로그램… 아파트 모든 평수 있어야 건축허가… 3주씩 휴가… 여가엔 문화체험

핀란드 디자인의 특징
자연 중시하고 재활용… 단순하게 만들어 오래 안 질리게… 동네 구석구석 개성적 공예품

핀란드서 한국문화 소개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 때 저 모습이 한국으로 비칠까 걱정… 5년 준비끝 '한국 가정' 특별전


<핀란드 디자인 산책> <북유럽 디자인>이라는 책을 낸 안애경(46 소노안 대표)씨는 핀란드와 한국에서 절반씩 살면서 핀란드에는 한국문화를, 한국에는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문화를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2007년에 핀란드국립박물관이 전관을 통틀어 한해 내내 열었던 '한국의 가정-삶의 방식 특별전'(Korealainen Koti)이 그의 기획이고 한국에서는 올 3월 중순부터 한달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핀란드 디자인전'을 열었다. 

그는 요즘 서울 성북구 성북동 공원녹지에 있는 무허가 폐가를 살려 북유럽디자인체험관을 짓는 일을 하고 있다. 성북구가 건설은 지원하지만 그가 무보수로 설계를 지휘하고 내용물까지 채워 북구의 디자인 정신을 널리 알리고 체험하는 학습장으로 쓰게 된다. 크리스마스 무렵 완공할 예정이다. 2008공공디자인엑스포 아트디렉터를 맡아 직접 설계한 북유럽주제관으로 보여준 감동을 한국의 일상에 녹여내는 작업인 셈이다. 그는 "모든 디자인은 공공디자인이다. 공공디자인이 따로, 행사로 존재하는 한국은 문제있다"고 지적한다. 

_왜 이런 곳을 짓게 됐어요?

"북유럽 디자인, 노르딕 디자인하면 사람들이 어떤 외형을 생각해요. 그런데 디자인이란 삶의 방식이고 철학이고 교육이거든요. 일상에 다 녹아 있어야 해요. 그걸 보여주려면 체험이 중요하니까요."

_구체적으로 뭐를 체험하게 한다는 말이에요?

"북유럽의 품위있는 일상생활 그 자체요. 핀란드에서는 어떤 공공시설에서도 식판에 밥을 먹지 않아요. 접시, 그것도 플라스틱이 아니라 자기로 된 접시가 나와요. 학교에서 급식할 때도 유치원에서도 아주 어린 아이들도 그걸 써요. 깨지면 어떡하냐, 그러니까 조심조심 다루는 걸 익히는 거지요. 집에서도 그래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누구나 품위있는 생활을 누리게 하자는 게 핀란드 디자인 정신이에요. 공공 영역에서는 더욱더. 또 하나는 시민 누구나 공예품을 구상하고 만드는 걸 가르치려고요. 핀란드에는 지역마다 디자인예술센터가 있어서 언제든 공예를 배울 수 있거든요."

_한국에서는 뭐가 다른가요?

"너무 차이가 많이 나서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한국에는 지역마다 대형 문화시설은 많아도 정작 주민들이 참여하는 문화프로그램은 별로 없어요. 핀란드의 디자인예술센터에 가면 노인들이 옛날 방식으로 러그를 짜는 걸 어린이들이 와서 보면서 배우거든요. 전통은 전통대로 살아나고 어려서부터 직접 만들어봤기 때문에 기능적으로도 아주 훌륭한 걸 만들게 되지요. 핀란드에서는 디자이너가 모양만 그리고 예술가라고 거드름 피우는 일은 없어요. 정말 막노동자처럼 직접 만드는 작업도 해요. 그러니까 자기가 써봐서 진짜 편한 물건을 아름답게 만드는 게 가능한 거지요. 핀란드는 아파트도 모든 평수의 형태가 들어가야 건축허가가 나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어울려 살게 만들어요. 그런데도 대문은 똑같은 모양이라서 겉으로 봐서는 크기가 다른지 몰라요. 저는 정말 작은 집에 사는데 사우나까지 있어요. 좁은 집에는 빨래를 널리 힘드니까 지하의 공용공간에 빨래를 널게 설계가 되어 있어요. 돈이 많거나 적거나 쾌적한 삶을 보장하는 거지요. 그런데 한국은 큰 평수의 아파트, 호화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가 완전히 구분되게 지어지고 그 때문에 엄청난 차별을 하게 만들잖아요. 20세기 초 핀란드에 전기나 수도가 보급될 때 가정 먼저 전기 수도가 설치된 게 노동자 아파트였어요."

_약자 우선인건가요?

"아니요. 누가 우선이다 그런 게 없어요. 모두가 평등해요. 노동자들이 일을 잘하려면 쾌적하게 지내야 하니까 거기부터 대접을 해주는 거지요. 한국에서 이해하기 쉽게 노동자라고 말을 하는 거지 핀란드에서는 이런 말도 안 해요. 그냥 이웃이에요. 우리는 뭐든 따로 취급, 따로 대접하잖아요. 핀란드의 이딸라라는 유리공장은 여름철이면 3주간 공장을 닫아요. 전 직원이 다 휴가를 가는 거예요. 미술관도 콘서트홀도 문을 닫고 예술가도 일하는 사람도 휴가를 즐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나라 사람들은 여유시간이 있고 여유시간에는 동네 디자인예술센터에 가서 뭘 배우고 배도 깎고 그림도 그리고 그게 발전해서 축제도 자발적으로 열리고요. 한국은 축제라 하면 지방자치단체에서 억지로 행사를 한다고 돈을 써서 만들어주는 거잖아요."

_그래도 디자인이라는 말을 쓸 때는 외형적인 어떤 특징도 있겠지요.

"자연을 중시하고 재활용을 한다는 점? 우리는 어디를 완전히 깎아내고 뭘 새로 짓는데 핀란드는 길을 만들 때 나무 한 그루가 있으면 그걸 베지 않고 피해서 가요. (서울) 광화문광장이 완성된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어, 나무는 어디로 간 거지? 철마다 꽃을 갈아줘야 하는 잔디밭? 그늘이 없는 광장? 분수에서 아이들이 물장난을 하고 뛰어 놀던데 엄마들이 다 옆에서 지키고 있어요. 왜 그러겠어요? 놀이터는 안전한 곳에 있어야 하잖아요. 길 한복판에 놀이터를 만들면 그걸 만든 사람은 거기서 놀고 싶겠어요? 자기가 놀고 싶지 않은 공간을 왜 만드는 거에요? 보도는 전부 시멘트로 덮여 있고 산에는 데크까지 깔려 있어요. 물건을 만들 때는 매우 단순하게 만들어서 오래 써도 질리지 않게 해요. 물건 하나하나를 귀하게 만드니까 가격이 싼 건 아니에요. 하지만 새 걸 자꾸 사고 바꾸는 게 아니라 대를 물려 쓰니까 비싼 게 아닌 게 되는 거지요. 사람이든 물건이든 귀하게 만들고 귀하게 써요. 핀란드에서는 아직도 딸기가 우리 옛날 시골딸기처럼 작고 시큼해요. 그런데 이게 여름 한철만 나오는데 비싼데도 금방 팔려요. 그 자연의 맛을 1년 내내 기억하면서 귀하게 여기는 거지요. 한국에 와서 놀란 게 마트에서 덤을 준다고 사람들이 필요가 없는데도 그 물건을 사요. 핀란드에서는 그런 건 사기라고 금지돼 있어요. 인기 있다고 다른 물건을 베끼는 것? 부끄럽게 여겨요. 유럽 어디나 똑같은 공산품이 지배하지만 핀란드는 동네 구석구석마다 마을 사람들이 만든 개성적인 공예품이 있어요."

_무엇이 핀란드를 이렇게 남다르게 만든 걸까요?

"결국에는 교육 같아요. 우리나라 교육관계자 분들이 핀란드에 와서 수업참관을 했어요. 핀란드 선생님들은 교재나 시험지를 나눠줄 때 애들한테 일일이 한장씩 나눠줘요. 그랬더니 우리나라 분들이 물어요. 왜 저런 걸로 시간낭비를 하냐, 그 시간에 한 자라도 더 가르치지. 교사가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나눠주면서 아이들과 눈을 맞추는 거잖아요.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관심을 쏟는 게 교육이잖아요. 그런 학교에 왕따가 있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건 안하고 왕따 문제를 해결한다고 또 따로 뭘해요. 핀란드의 판화가인 오우띠 헤이스까넨이 한국에는 미술교과서가 있다니까 그거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같이 하러 가자고 해요. 그 나라 관념으로는 미술을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교과서가 있다는 게 믿을 수가 없는 거지.(웃음) 우리는 남의 그림 베끼는 데생이 미술을 평가하는 척도니까 미술을 잘한다, 못한다가 있잖아요. 미술은 창의성이고 개성인데 못한다는 게 있을 수 없잖아요."

_체육과목에 필기시험까지 있는 거 알면 기절하겠어요.(웃음)

"햇볕 좋은 날 숲 걸어다니는 것, 그런 게 체육수업이에요. 선생님 재량인 거지요. 그렇게 학교에서 지지고 볶고 놀고 집에 와서 또 놀고. 그게 세계 교육 1위인 핀란드 교육이에요." 

_한국도 바꾸려면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까요?

" 디자인은 다 공공디자인이에요. 도시 전체를 쾌적하게 기획하는 것이자 우리가 쓰는 일상용품을 멋지고 편리하게 쓰는 게 디자인이에요. 북유럽 생활용품으로 전시회를 하자니까 어떤 미술관장이 그래요. 백화점에서 파는 데 무슨 디자인이냐고. 디자인이 쓰임새를 중시해서 발전해온 것이 다르니까 상업성 기능성이 있지만 아름다움에서는 아트와 다를 바 없다는 걸 모르는 거지요. 그리고 디자이너라면 양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핀란드가 저렇게 된 것이 디자인은 민주주의다, 모두에게 가장 좋은 삶을 제공한다는 철학을 건축가 알바 알토를 비롯해 모든 디자이너들이 상식으로 믿고 지켰기 때문이거든요. 한국에서는 너무 많은 디자인 프로젝트들이 있어서 돈이 흘러다니지만 정작 사회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 쓰이는지는 모르겠어요. 2008공공디자인엑스포 아트디렉터 제안을 받았을 때도 의아했어요.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의 공공디자인을 모아서 실내에 전시하는 데 그 돈을 쓸 게 아니라 실제로 거리에 대중을 위한 시설물을 만드는 게 낫잖아요. 우리나라는 큰 건물 짓고 간판 바꾸는 게 디자인인 줄 알아요."

_핀란드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어요?

"원래 전공은 회화였는데 이것 저것 다 하니까 한 우물만 파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사회적응이 잘 안됐어요. 94년 여름에 젊은 예술가 교환프로그램을 신청해서 핀란드에 갔어요. 이바스퀼라라는 작은 도시의 디자인예술센터에서 새로운 재료를 실험하는 역할을 했는데 모든 예술적 시도를 다 반겨주더라고요. 1년만에 돌아오니까 거기가 더 고향 같아서 장기체류를 신청하게 됐어요. 장기체류 면접을 경찰관이 하는데 취조하듯이 하지 않고 요즘 어떻게 지내니, 뭘 좋아하니, 이런 걸 친구처럼 묻는 게 참 인상적이었어요. 제가 가던 해에 성수대교가 무너지고(94년 10월) 이듬해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면서(95년 6월) 저 모습이 한국으로 비치는가, 내가 한국인으로 한국을 알리는 일에 나서야겠다고 해서 2002년부터 5년간 준비한 끝에 핀란드국립박물관에서 '한국 가정'특별전을 열게 됐어요. 처음에는 인도전 할 때 한 귀퉁이, 중국전 할 때 한 귀퉁이를 내준다고 했는데 제가 자존심 상해서 안 하겠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한국에 와서 온갖 자료를 다 모았고 핀란드국립박물관장을 2006년에는 핀란드 기금으로 한국에 오게 했지요. 한국이 돈 내서 그런 분들 모셔오는 건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런 프로그램을 기획해서 말하면 우리(한국) 쪽에서는 돈 걱정부터 해요. 이상한 사람들 초청하는 데 쓸데없이 돈을 많이 써왔으니까. 우리 스스로 자부심이 없는 거지요. 우리 문화에는 그들에게 없는 게 있잖아요. 그 분들 전국을 다니면서 동네 김치찌개 된장찌개 먹게 했는데 너무 좋아했어요. 어디 가서 이런 경험을 하겠어요? 한국문화를 알고 나니까 한국으로 전관 전시를 받아들였어요."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8/h2012082621172112370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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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0:52

20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혁명광장에서 북한 노동자 15명과 마주쳤다. 그들은 비를 맞으며 화단 정비 공사를 하고 있었다. 이국땅에서 남루한 옷차림의 북녘 동포들이 허드렛일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기분이 착잡했다. 그래도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온 것은 경계심 가득한 눈길뿐. 허연 피부의 러시아 행인들 때문인지 햇볕에 그을린 북한 노동자들의 얼굴이 유독 시커멓게 보였다.

푸틴과 APEC이 제공하는 기회


북한 노동자의 모습에 혁명광장의 역사가 겹쳐 흘렀다. 러시아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광장이지만 한국인들에게는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의 아픔이 배어 있는 곳이다. 스탈린은 러시아 극동지역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을 느닷없이 혁명광장에 집결시켜 6000km 떨어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으로 쫓아냈다. 수많은 고려인이 짐짝처럼 열차로 수송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러시아 기록에 따르면 17만여 명의 고려인이 사막이나 다름없는 허허벌판에 버려졌다. 강제이주 이듬해 7000여 명, 그 다음 해 4800여 명이 숨졌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과 러시아의 극동은 다른 모습으로 만나고 있다. 북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광장 앞 대로를 지나는 버스는 대부분 현대차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가장 흔한 외국 광고 또한 LG를 비롯한 한국기업 홍보용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다음 달 8, 9일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블라디보스토크에 230억 달러를 퍼부었다. 그의 극동 개발 및 주변국들과의 경제협력에 대한 열망은 5월 취임과 함께 출범시킨 극동개발부에서도 잘 드러난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는 새로 건설된 교량 도로 건물로 활기가 넘쳤다. 정상회의장인 루스키 섬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3.2km의 연륙교는 장관이다. 루스키 섬에는 30개국 정상들이 사용할 회의장과 숙소가 들어섰다.

러시아가 APEC을 계기로 획기적인 경제협력 확대를 바라는 첫 번째 후보가 한국이다. 동아일보 부설 화정평화재단과 러시아 극동연방대가 공동 주최한 국제포럼에 참석한 러시아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한국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했다. 루킨 아르툠 극동연방대 교수는 “러시아의 극동지역이야말로 한국과 가장 효과적인 경제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지역”이라고 강조했다. 러시아가 바라는 한-러 협력은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철도(TKR) 연결, 남-북-러 천연가스관 사업에 머물지 않는다. 미하일 홀로샤 극동기술연구소 소장은 러시아가 추진 중인 거미줄 형태의 교통망 건설 계획을 공개하면서 북극항로와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 고속철 건설사업에도 한국의 참여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서울에서 불과 744km 떨어져 있다. 그 너머에는 극동지역만 따져도 한반도보다 15배나 넓은, 자원이 풍부하고 비옥한 땅이 펼쳐진다. 이런 곳에서 한국을 향해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中日 제치고 달려갈 수 있다


러시아의 극동은 지정학적 이유로도 우리에게 기회의 땅이다. 이양구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는 “러시아와 중국은 절대로 손을 잡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러시아는 2차례 전쟁을 치른 데다 영토분쟁까지 겪고 있는 일본도 신뢰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각축전을 벌여야 하는 한국에 러시아 극동은 ‘단독 찬스’나 마찬가지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방을 점령하라’는 뜻이다. 1863년 처음으로 러시아로 이주한 조상들처럼 러시아의 동방으로 뻗어나가야 진취적인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는 시간이 별로 없지만 내년에 들어설 새 정부는 러시아의 극동을 한국 경제의 도약대로 활용하는 혜안이 있었으면 한다.

방형남 논설위원



http://news.donga.com/3/all/20120825/48864200/1

Posted by 겟업
2012. 9. 23. 00:50

 조광수 성균관대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 교수

최근 정보통신부를 부활시키자는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IT(정보기술) 산업을 스마트 시대의 핵심 산업으로 키울 수 있는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통부를 재건해야 한다는 당위론적인 처방에 앞서 할 일이 있다. 우리나라 IT 산업 위기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그에 맞는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는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산업 패권이 무너지는 줄로만 알았다. 포스코에 카운터 펀치를 맞고 무너진 미국의 US스틸에서부터 미국 산업의 상징인 포드·GM·크라이슬러 등 자동차 빅3의 파산은 이런 예측을 당연시하게 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원천기술 개발, 선택과 집중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IT 산업을 발전시켜왔다. 한국 IT 산업은 미국을 위협했고, 일본을 몰락시켰다. 그것이 자랑스러운 한국의 IT였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서막이 열린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는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은 사용자 경험(UX) 기술을 정점으로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하드웨어, 인프라 등 4개 기술을 융합한 쿼드로버전스로 세계 산업 패권을 되찾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구글·애플·페이스북 등 세계적인 IT 기업은 모두 미국 기업이다. 애플은 인문학을 도입하고, 검색왕 구글은 무인 자동차를 만드는 등 미국 IT 기업들이 세계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그 결과 우리나라 기업이 선도했던 MP3 플레이어 시장은 후발 업체인 애플의 아이팟이 석권했다. 싸이월드는 SNS(소셜네트워킹서비스)의 시조(始祖) 격이었지만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한국에서만 사용되는 사이에, 뒤에 나온 페이스북이 전 세계를 지배했다. 이는 애플의 시리(Siri)처럼 감정을 담은 인공지능 기술에는 혀를 내두르지만 막상 이런 IT 분야를 연구하는 인문사회과학은 존중하지 않는 우리나라 풍토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미국 정부는 미국 IT 산업이 커가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2002년 미국의 국립과학재단(NSF)은 미 상무부의 프로젝트 일환으로 '인간의 수행을 개선하기 위한 나노·생물·정보·인지과학(NBIC) 융합' 정책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는 IT와 인문사회과학을 접목한 애플의 전략과 일맥상통한다. 요즘 삼성이 갤럭시 S3의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인간 중심의 기술'과 같은 것인데, 미국 정부는 이미 10년 전에 이런 전략을 천명한 셈이다. 이처럼 미국이 IT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미래 융합 기술의 본질이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이란 점을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NBIC는 NBI로 변질됐다. 즉 인지과학을 제외한 나노·생물·정보만의 융합 기술 정책으로 바뀌었다. 미래 융합 기술의 본질인 인문사회과학이 부재한 정책이 펼쳐진 것이다. 과학계와 산업계, 관계, 매스컴, 일반인들이 모두 물질적인 과학기술만을 과학기술로 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마트시대의 핵심은 소프트웨어 공학과 운영체제, 프로그래밍 언어 등 IT와 인공지능, 인문사회과학이 접목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현재 미국뿐 아니라 중국과 인도 등 경쟁국들도 비약적인 IT 발전을 이뤄내고 있다. 한국이 IT 산업에서 빠르게 뒤처지고 있는 까닭은 어떤 부처가 있고 없는 문제보다는 인문학적 이해와 깨달음 없이 IT 산업을 추진했기 때문이란 점을 명심해야 한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24/2012082402157.html

Posted by 겟업
2012. 9. 23. 00:48


내 나이 올해 서른. 

대학을 졸업하고 1년 반째 방황을 이어 가고 있다. 나는 진작부터 PD를 꿈꿨다. 하지만 좁은 언론고시의 문이 내게 열릴까 싶어 일반 기업 채용시장도 기웃거린 지 벌써 2년째다. 요즘 들어선 더 혼란스럽다.

‘난 진짜 PD가 되고 싶은 걸까?’ ‘다른 친구들처럼 일반 회사에 들어가면 좋잖아.’ ‘아니야, 그러면 난 분명히 후회할거야.’ ‘막상 다녀 보면 적응할 수도 있어.’ ‘아, 그래도 내 꿈은 PD인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상과 현실을 저울질하는 나. 용기와 결단력이 부족한 탓이지만, 직장 생활 2∼3년 차에도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친구들을 보면 더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대학 시절, 스포츠 전문 기자가 되겠다며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모은 돈을 탈탈 털어 유럽 축구여행까지 다녀온 친구가 있었다. 의지가 얼마나 대단했느냐 하면, 프랑스까지 가서 그 유명한 에펠탑과 개선문은 보지도 않고 내내 축구 경기만 봤다고 했다. 복학 뒤에도 유명 축구단의 서포터스로 활동하고, 블로그에 스포츠 관련 칼럼을 연재하며 차근차근 스포츠 기자로서의 꿈을 밟아 갔다. 그러던 친구는 아버지의 퇴직과 여자친구와의 결혼 문제로 꿈을 접었다. 주변 사람들과 연락마저 끊고 토론 면접, 협상 면접, 프레젠테이션 스킬을 속성으로 익히더니 지난해 가을, 모 화장품 회사에 입사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전국 매장들 영업수치 모아 엑셀만 돌려. 이게 현실이야. 대학 때 배운 전공? 영업지원 부서에서 뭐가 쓸모가 있겠어. 이럴 거였으면 엑셀이나 실컷 배워 둘걸.”

친구는 좋아하는 스포츠를 제때 즐기지도 못하는 일개미가 되어 하루 14시간 이상의 업무를 감내하고 있다. 그 친구는 “막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과정”이라며 마음의 위안을 찾고자 하지만, 아직도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듯했다. 얼마 전 만남에서 스포츠 협회의 채용공고 조건을 이야기하며 말했다. “딱 서른까지만 해볼까?”

남자 나이 서른. 

저마다의 꿈은 있었겠지만, 시간에 쫓겨 주위 등쌀에 밀려 자의 반 타의 반 들어간 회사에서 2, 3년 차를 맞이하는 나이다. 겨우 안정을 찾을 만한 시기지만 미련은 버리지 못한다. 이상을 좇을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

국내 유명 대기업에 8개월 정도 재직했던 한 선배는 서른 살이 되던 해 직장을 과감히 그만뒀다. 본인의 꿈을 찾아 파티를 열어 주는 이벤트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도전이 성공적이지는 못하다. 청년창업 강좌란 강좌는 다 듣고도 2년간 상호를 네 차례나 바꿨다. 

“형 나이가 올해 서른둘이야. 지금도 오락가락하는 매출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아. 좀 더 안정적인 사업을 찾아야 할 텐데…. 회사를 괜히 나왔다는 생각도 들고.”

선배들에게 상담을 청하면 “꿈을 향해 살라”고 말한다. 신문 방송에서도 ‘회사를 관두고 창업에 도전한 젊은 CEO’나 ‘고액 연봉을 포기하고 꿈을 찾은 회사원’의 성공 사례를 띄운다. 하지만 그런 성공이 극히 드물다는 걸 안다. 꿈을 향한 도전이 현실이라는 장벽에 부닥칠 때, 동료들보다 뒤처졌다는 사실에 절망하게 될까 두렵다.

이제 9월, 기업들의 대규모 공채 시즌이 다가온다. 여전히 길을 찾지 못한 못난 나에게도 대학 후배들이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들에게 조언이랍시고 얼마 전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여기저기 묻지 마 식으로 지원하면 후회한다. 나이 서른 돼서 퇴직하고 백수 된 애들 진짜 많아. 첫 직장이 중요하니까 역량과 적성을 고려해서 신중하게 입사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조차도 현실을 직시하자니 한 번뿐인 삶이 너무 아깝고, 이상을 추구하자니 낙오자가 될까 봐 머뭇거려진다. 다시 돌아온 취업 시즌, 9월이 두렵다.


김태영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Posted by 겟업
2012. 9. 23. 00:47

“애플의 미래 밝지 않아… 특허 소송, 혁신의 계기 삼는다면 우리에게 약”

한국 정보통신 분야 기술의 산실인 국책연구기관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을 이끌고 있는 김흥남 원장. 김 원장은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사무소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 “이번 삼성-애플 간 특허 소송을 지적재산권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혁신의 계기로 삼는다면 한국 정보통신산업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정보통신 분야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정보기술(IT) 강국 코리아를 이끌어온 IT의 산실이다. 삼성전자와 애플 간의 특허소송으로 세계 IT업계가 시끌벅적한 요즘, 전자통신연구원을 이끌고 있는 김흥남 원장(56)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김 원장은 지난달 24일(현지 시간) 미국 법원의 애플 특허 승소 판결과 관련해 “한마디로 이제는 기계를 만들어내는 시대가 아니라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시대가 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먼저 양국 법원이 각각 내린 피해배상 액수에 주목했다. 

“한국과 미국에서 잇따라 판결이 내려졌는데 특허침해에 따른 배상판결 액수가 한국법원은 애플이 침해한 2건에 4000만 원이고, 미국 법원은 삼성이 침해한 6건에 1조2000억 원이다. 이 말은 결국 두 나라가 지적재산권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지적재산권 침해에 미국보다 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일을 단지 누가 이기고 졌느냐 하는 법정싸움의 관점이 아니라 지적재산권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그러면서 “이번 미국 소송에서 삼성이 패한 특허들이 대부분 디자인에 집중됐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애플은 바운스 백(화면을 맨 아래까지 내리면 튕겨 화면의 끝을 알려주는 것), 멀티 터치(두 손가락으로 화면을 확대하거나 축소하는 기능), 멀티 택(글자를 터치하면 커졌다 작아지는 기능) 등의 기능을 삼성이 침해했다고 주장한 반면 삼성이 침해당했다고 한 특허는 3세대 이동통신 특허, e메일 전송 기술 같은 기술 분야다. 우리는 흔히 특허라고 하면 기술적인 것만 생각하는데 미국에선 디자인, 유저 인터페이스(컴퓨터를 더 쉽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명령어 또는 기법), 트레이드 드레스(상품 외관 혹은 느낌까지 포괄하는 지적재산권)처럼 분야가 다양하다. 특허를 적용하는 범위가 넓은 데다 이에 대한 가치를 확실히 인정해주니 판결 액수도 천문학적인 단위가 나온 것이다.” 

―미국 배심원단의 전문성, 공평성도 논란이 됐다.

“우리 쪽은 기술적인 것을 이해시켜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더 어려웠다고 본다. 디자인 분야는 모양만 보고도 쉽게 비교하고 판단할 수 있잖은가.” 

―이번 판결에서 ‘트레이드 드레스’ 특허가 화제가 됐다. 

“디자인을 종합적으로 봤을 때 느껴지는 전체적인 모습이나 제품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모습이다. 그 디자인만 생각하면 그 제품이 떠오르는, 디자인 정체성이라고나 할까. 예를 들어 코카콜라병 가운데에 잘록하게 들어간 선은 코카콜라에만 쓸 수 있다. 이걸 베끼면 미국에선 표절로 본다.”

―우리나라도 그런 특허가 있나.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다. 우리나라 특허 정의를 보면 ‘자연 과학을 이용해서 고도화된 새로운 아이디어’라고 되어 있다. ‘고도화된’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그만큼 엄격하게 특허 인정을 한다는 거다. 애플이 침해당했다고 주장하는 ‘모서리가 둥근 디자인’ 같은 것은 우리 문화에서는 (침해로) 인정받기 어렵다.” 

김 원장은 이 대목에서 “기술에는 패스트(Fast) 테크놀로지와 슬로(Slow) 테크놀로지가 있는데 우리도 이제 슬로 쪽에 노력을 더 기울여 양쪽 기술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패스트 기술은 하드웨어, 메모리, 반도체처럼 발전 속도가 빠른 것들이다. 앞서 나가기도 쉽지만 추월당하기도 쉽다. 소프트웨어 분야는 슬로 기술이다. 개발도 더디지만 쉽게 추월당하지 않는다. 명품 가방, 신발 시장도 슬로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디자인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애플의 경우 스마트폰 기기 제작 같은 패스트 분야는 외주(아웃소싱)를 주었지만 소프트웨어나 디자인 개발 같은 슬로 분야는 절대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스티브 잡스는 어떻게 그런 전략을 쓸 생각을 했을까.

“그는 개발자인 동시에 디자이너 쪽에 가깝다. 젊었을 때 동양의 서예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아닌가. 또 잡스는 인류가 글자보다 그림을 먼저 썼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래서 ‘파일을 내려받는 중입니다’라는 글자를 보여주기보다 모래시계를 화면에 띄운 거다. 사람들이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걸 좋아한다는 것을 확신했던 그는 자신의 인문학적 철학에 디자인 기술을 섞어 컴퓨터에 구현했다. 돈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디자인을 통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우리 IT산업의 미래로 화제를 돌려보자. (김 원장은 평소) 글로벌 IT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모바일 플랫폼 개발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해온 걸로 알고 있다. 우선 ‘플랫폼’이란 개념부터 설명해 달라.

“컴퓨터를 쓸 수 있게 해주는 운영체제(OS·operating system) 프로그램이다. 자동차로 말하면 ‘엔진’ 기능을 하는 핵심 기술이다. 소프트웨어 형태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엔진’이라고 할까.”

그의 말이 이어졌다.

“IT 생태계에는 네 가지 구성 요소가 있다. 맨 밑이 통신망(네트워크 인프라)이고, 그 위가 컴퓨터 휴대전화 TV 자동차 같은 기기(하드웨어 디바이스), 그 위가 소프트웨어, 마지막이 게임 같은 콘텐츠 서비스다. 이 4개가 균형 있게 돌아가야 건강한 IT 생태계가 만들어진다. 우리는 통신망, 기기 제조 분야에서는 세계 1등이고 콘텐츠 분야도 나름대로 경쟁력이 있는데 소프트웨어 OS 개발, 즉 플랫폼 경쟁력이 거의 제로다. 플랫폼은 기기와 콘텐츠를 연결하는 접착제 같은 건데 이게 없다보니 4개 분야가 다 떨어져 각개약진하고 있다.” 

그는 애플의 예를 들었다.

“애플은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아이TV, 아이카(car)까지 i시리즈 전략을 세우고 있다. 기기는 모두 다르더라도 같은 플랫폼으로 소비자들이 편하게 사용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휴대전화, TV라는 기계 자체를 잘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는 선두가 되기 어렵다. 그 안에 어떤 소프트웨어를 넣어 얼마나 더 소비자들이 쉽고 재미있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즉 유저 인터페이스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결국 미래 IT는 플랫폼 싸움이다.” 

―애플의 미래를 어떻게 보나. 

“의견들이 다양하지만 나는 애플의 OS가 클로즈드(closed·폐쇄) 플랫폼이라는 점에서 회의적으로 본다. 최근 첨단 기술의 역사를 돌아보면 기술을 폐쇄적으로 운영할 것이냐, 개방할 것이냐의 싸움에서 승리는 ‘개방’ 쪽이었다. 대표적인 게 비디오 테이프 시장에서 소니의 베타 방식과 VHS의 싸움이었다. 베타 방식은 한때 시장점유율이 98%까지 간 적이 있었다. 다른 회사들이 소니에 로열티를 줄 테니 기술을 함께 쓰자고 했지만, 소니는 거절했다. 화가 난 가전 회사들이 연합해 VHS 방식을 만들었고 결국 소니가 백기를 들었다.”

김 원장은 “두 번째가 애플의 매킨토시와 IBM 간 PC 싸움이었는데 애플이 최초로 PC를 내놓은 상황에서 후발 주자인 IBM은 설계도를 공개하는 전략을 써 시장 판도를 뒤집었다”며 ”결국 (기술)개방전략을 택한 IBM이 이겼다”고 했다. 

―어떻든 이번 미국 판결로 삼성은 큰 타격을 입었다. 한국 IT산업의 앞날도 어두운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우리의 경쟁력은 우리나라만큼 IT 환경이 좋은 나라가 없다는 점이다. 한국처럼 기기 보급 속도가 빠르고 인터넷이 잘 터지는 나라가 없다. 미국은 지하에만 내려가도 스마트폰을 쓸 수가 없다. 한국은 무려 3000만 명이 스마트폰을 쓰는 상황에서 최고 통신 품질을 바탕으로 정보 검색, 정보 공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다양한 기술이 나올 수 있는 토대가 탄탄하다. 오죽했으면 구글의 슈미트 회장이 안드로이드 보급의 일등공신이 한국 소비자라며 감사의 말까지 했겠나.” 

그의 낙관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벤처 열풍이 예전같지 못한 상황이 떠올랐다. 식어버린 벤처 열풍에 대한 견해를 묻자 김 원장은 “무엇보다 실패를 보는 눈을 바꿔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국에서는 실패 경험이 있는 벤처라면 오히려 노하우가 쌓였을 것이라고 여겨 금융 지원 등 정책적으로 더 밀어준다. 실패자들이라 해도 계속 실리콘밸리 주변을 돌아다니며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하는 문화가 있지만 우리는 ‘벤처 하다 실패하면 인생 낙오자가 된다’는 두려움이 강하다.”

그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자는 ‘오늘의 애플을 만든 것은 스티브 잡스 혼자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 원장이 말한 실패와 도전을 인정해주는 문화를 바탕으로 한 벤처 캐피털과 정부의 지원, 여기에 실리콘밸리 인재의 산실인 스탠퍼드대 등 산학연(産學硏) 협력체제, 이 모든 것이 합쳐져 결국 애플과 스티브 잡스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김 원장은 “이번 삼성과 애플의 특허 소송 사건을 삼성이나 한국 IT의 위기로 볼 것이 아니라 한국 첨단산업의 갈 길을 연구하는 연구원의 수장으로서 발전을 위한 도약의 계기로 삼겠다”고 했다. 삼성도 이미 “뼈아픈 자기 혁신의 계기로 삼겠다”고 밝힌 바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번 일은 IT 강국 코리아에 독(毒)이 아니라 약(藥)이 될 것이다. 

::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Electronics and Telecommunications Research Institute) ::

1976년 설립된 국내 최대 전자정보통신 연구기관. 전자교환기(TDX) 초고집적 반도체(DRAM) 디지털이동통신시스템(CDMA) ATM교환기, 지상파 DMB, 와이브로(WiBro·고속 휴대인터넷), 3.6Gbps 4세대 무선전송시스템(NoLA) 등을 개발했다. 최근에는 세계 최고수준의 4세대 이동통신시스템 ‘LTE-Advanced’, ‘휴대형 한-영 자동통역기술’, 낮에도 선명한 화질을 보여주는 ‘투과도 조절 투명 디스플레이 기술’, 세계 최초 ‘스마트 선박 기술’을 개발하는 등 IT 강국 코리아의 ‘기술 젖줄’ 역할을 해왔다.

2011년 발간한 연구개발 성과 보고서에 따르면 35년간 총 169조8095억 원의 경제적 효과를 창출했으며 연구원 1인당 논문 건수, 1인당 등록 특허 건수에서 세계 1위를 기록했다. 

김흥남 원장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전산학 박사학위를 받고 1998년 전자통신연구원에 합류해 혁신위원장, 임베디드 소프트웨어 연구단장, 기획본부장을 지냈으며 2009년부터 원장을 맡고 있다.


허문명 기자


http://news.donga.com/3/all/20120902/49064609/1

Posted by 겟업
2012. 9. 22. 20:46

요절시인 이상의 글 가운데 누가복음이 등장한다는 건 정말 의외의 발견이다. 그의 수필 <산촌여정>에 나오는 한 토막의 글은 이렇다. 

"…. 그러나 공기는 수정처럼 맑아서 별 빛 만으로라도 넉넉히 좋아하는 누가복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참 별이 도회에서보다 갑절이나 더 많이 나옵니다. 하도 조용한 것이, 처음으로 별들이 운행하는 기척이 들리는 것도 같습니다." 

이 대목을 내게 메일링 한 미국 워싱턴의 시인 김명희의 주석도 놀랍다. "이상은 '별들이 운행하는 기척'을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사물에 대한 센스는 너무나 날카롭고 섬세하여 없는 소리도 듣는 것입니다. 없는 소리를 듣는다 함은 상상의 세계이겠지요." 


김명희는 이상에 관한한 도사다. 이상의 시 '오감도'(烏瞰圖)를 영역 출간, 미국 출판계에 파문을 일으킨 이상의 권위자로, 이상의 센스를 '없는 소리도 감별해 낼 정도'의 수준으로까지 확대해 읽을 줄 아는 시인이다.




이상도 김명희 교수도 어떻게 별들이 운행하는 기척을 들을 수 있는거지? 


나 소름 끼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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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2. 9. 22. 20:34

폴 베이로츠(1930~99)는 세계 경제사의 심각한 오류를 많이 바로잡은 경제사가다. 그는 서양의 동양 지배가 근대부터 시작됐다는 종래의 신화를 깨고 19세기까지도 아시아가 세계 경제의 중심이었음을 증명해 냈다. 그에 따르면 1750년 전 세계 총생산(GNP)은 1550억 달러(1960년 달러 가치 기준)였고, 그 77%인 1200억 달러가 아시아의 몫이었다. 1860년에도 전 세계 총생산 2800억 달러의 거의 60%인 1650억 달러를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가 차지했다. 1800년의 1인당 총생산은 중국 228달러, 영국과 프랑스가 150~200달러였다. 서양의 팽창 기간으로 알려진 1400~1800년대에 세계 경제는 여전히 아시아의 지배 아래 있었다(안드레 프랑크, 『ReOrient』).

 21세기는 아시아 시대다. 그러나 역사학자들 연구 결과를 보면 21세기에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 시대가 도래한 것이 아니라 19세기 서양에 빼앗겼던 패권을 다시 찾은 것이다.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용들이 그 추진 세력이다. 미국 오바마 정부와 19세기 이래 서양 행세를 한 일본이 서둘러 아시아 회귀를 선언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그 아시아 시대에 노란불이 켜졌다. 아시아 시대를 주도할 한·중·일이 영토와 과거사로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여 어렵사리 맞은 아시아 시대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한·중·일이 아시아 시대를 주도할 능력이 있는가에 심각한 회의가 든다. 한·중·일 갈등의 원흉이 일본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 지배와 중국 침략의 욕된 과거를 정리하기를 거부하는 데서 모든 문제가 생긴다. 독도 영유권 주장은 한반도 통치의 끝자락을 놓지 않겠다는 파렴치다. 일본의 양식 있는 생각 하나로 해결될 수 있는 위안부 문제도 방치돼 왔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일본에 필요한 각성제의 성격을 가진다. 한국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부산·대구 방문과 다를 것이 없다. 그래도 역대 대통령들이 독도를 방문하지 않은 것은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는 현실을 생각해서였다. 문제는 거기에 국내 정치가 끼어든 것이다. 친형과 측근들이 줄줄이 비리에 연루돼 심각한 레임덕 현상을 만난 이 대통령에게는 일본 배려보다는 국내 정치의 국면전환이 더 급했다. 그래도 일본이 그의 독도 방문을 시비하는 것은 심각한 내정간섭이다.

 이 대통령이 여론의 갈채를 업고 내친김에 일본에 자극적인 발언을 쏟아내고, 일본이 과잉대응하며 한·일 갈등이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여론의 장으로 넘어갔다.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둥, 일왕이 한국에 오려면 일왕이 일제 지배의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라는 둥의 말은 틀린 데는 없어도 독도와 위안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될 뿐만 아니라 한국에 어떤 실익(實益)도 가져오지 않는 발언이다.


일본에서 국왕은 정치에 초연하다. 그는 한국에 오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에서도 한국에 가장 우호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일본인들에게 그는 ‘지존’이요 ‘성역’이다. 그에게 한국 대통령이 뜬금없이 종주먹을 휘둘렀다. 일본 여론이 훌렁 뒤집히고, 인기가 바닥을 헤매던 약체의 노다 내각이 그 분위기에 재빨리 편승했다. 연내에 총선을 치러야 할지 모르는 노다에게 이 대통령의 언행은 하늘이 내린 굵은 동아줄 같은 것임에 틀림없다.


 중국과 일본의 댜오위다오(센카쿠) 분규도 위험 수준이다. 두 나라 시민과 정치인들이 댜오위다오 상륙 경쟁을 벌이고, 중국 정부의 묵인 아래 반일 과격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중국 지도부도 예전같이 여론의 민족주의적 요구를 무시할 수만은 없다. 한·중·일 갈등은 아시아·태평양의 질서 개편 과정에 겪는 진통이다. 중국은 미국 주도의 일극체제를 최소한 미·중 양극체제로 바꾸려 하고, 일본은 중국에 아시아의 ‘주요국’ 지위를 양보하지 않겠다고 저항한다. 그 틈에서 한국은 균형자로 존재감을 높여 주역의 하나가 되려고 한다. 그러나 한·중·일에 얽힌 과거사가 협력은 고사하고 합리적 외교를 통한 질서개편을 어렵게 만든다.

 한·중·일 충돌에 미국은 희비가 교차한다. 일본 안보의 탈미국이 멀어지고 중국 견제의 호재를 만나 즐겁지만 한·일 분규가 중국을 시야에 둔 미국의 한·미·일 삼각안보협력체제 구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 문제다. 한·중·일 지도자들이 민족주의적 포퓰리즘 행보를 계속하면 아시아 시대에 켜진 노란불이 빨간불로 바뀔 수도 있다. 지금의 지도자들은 통제력을 잃었다. 시민사회가 이성을 회복해 역사의 역주행을 막고 아시아 시대가 허상으로 끝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131635&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2. 9. 22. 20:33

어느 토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TV를 틀었다. 우연히 맞춰져 있던 채널 EBS에서 방영 중인 어린이용 3D 애니메이션을 멍하니 보다 ‘오오, 재밌잖아?’ 빠져들고 말았다. 작은 섬마을 브룸스타운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누군가 위기에 처한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리더 역할의 경찰차 ‘폴리’, 힘센 소방차 ‘로이’, 지혜로운 구급차 ‘엠버’. 재빠른 헬리콥터 ‘헬리’가 팀을 이뤄 나선다. 매회 10분짜리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로보카 폴리’다.

 뒤늦게 발견한 이 작품, 요즘 아동 애니메이션 시장의 ‘대세’란다. 떼쓰는 아이를 달래려 “자 뽀로로 봐야지” 하던 ‘뽀통령(뽀로로+대통령)’의 시대는 저물고, ‘폴총리(폴리+총리)’가 정권을 잡은 지 꽤 됐다. ‘로보카 폴리’는 지난해 2월 EBS에서 방송을 시작해 평균 시청률 2%대를 꾸준히 기록하고 있는 히트작이다. 아이 키우는 친구들을 만나 물었더니 “폴리 캐릭터 상품 사느라 가계 거덜 날 지경”이라는 한탄이 이어진다. 주인공이 넷이나 되니 세트로 갖추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거다. 그럼에도 ‘로보카 폴리’ 완구는 나오자마자 불티나게 팔려나가 한때 “폴리를 구하는 아빠가 진짜 아빠”라는 우스개까지 돌았다.

EBS 어린이 애니메이션 ‘로보카 폴리’.
 단순명료한 구성과 교훈적인 스토리를 내세운 그동안의 어린이 애니메이션에 비한다면 로보카 폴리는 조금 과장해 ‘아이들용 블록버스터’라 할 만하다. 평소에는 그냥 자동차인 폴리·로이·엠버·헬리는 위기가 닥치면 철컥철컥 몸을 바꿔 로봇으로 변신한다. 할리우드 영화 ‘트랜스포머’를 떠올리게 하는 설정이다. 이런 박진감 있는 구성 탓에 아이들뿐 아니라 엄마까지 함께 즐길 수 있다는 게 이 작품의 강점이다. 아이랑 보고 또 보다 어느덧 팬이 됐다는 30대 초반 엄마의 증언. “운전하다 옆 차로에 앰뷸런스가 지나가는데 나도 모르게 ‘어, 엠버 어디 가니?’ 하고 있더라니까.”


국내업체 로이 비쥬얼이 제작하고 현대자동차가 제작지원한 ‘로보카 폴리’는 후발주자로서 뽀로로가 꽃피운 창작 어린이 애니메이션 시장을 착실히 다져가고 있다. 심지어 요즘 EBS의 ‘아동용 애니메이션 4대 천왕’으로 불리는 ‘뽀롱뽀롱 뽀로로’ ‘로보카 폴리’ ‘꼬마버스 타요’ ‘부릉부릉 부르미즈’가 모두 ‘한국산(産)’이라는 사실은 뿌듯하기까지 하다. 과거 일본·미국 애니메이션의 하청 제작이 주를 이뤘던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산업 구조가 독자적인 스토리텔링을 갖춘 창작 제작 쪽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분 좋은 신호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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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20:32

전남 순천만의 갈대밭에 갔다가 순천만의 상징새인 흑두루미에 관해 참으로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본디 흑두루미는 시베리아에서 겨울에 한반도로 남하해서 비무장지대에서 잠시 머무른 뒤 낙동강 하구인 을숙도에서 수천 마리가 겨울을 났다고 한다. 그런데 낙동강 하구댐이 만들어지고 갈대밭이 없어지자 두루미들은 일본 규슈에 있는 이즈미시로 날아갔다. 이즈미시는 흑두루미의 먹이를 위한 논농사를 지을 만큼 새들의 환경보호에 정성을 들인 결과, 지금은 전 세계에 약 1만여 마리 남아 있는 흑두루미의 90%가 날아오는 유명한 생태 관광지가 됐다.

그러니 순천만에는 흑두루미가 거의 날아오지 않았고, 어쩌다가 들르는 두루미들을 다 합쳐봐야 몇 십 마리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날아오는 흑두루미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점점 순천만을 찾아오는 흑두루미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던 1991년의 어느 날, 순천만에 인접한 농촌 마을에 살던 한 소년이 추수가 끝난 가을 논에서 놀다가 다리를 다친 흑두루미 한 마리를 발견했다. 몸집이 1m쯤 되어 보이는 흑두루미는 날지 못하고 논바닥에서 퍼덕거리고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흑두루미를 집으로 안고 가서 보살펴 줬다. 하지만 집에서 계속 키우기가 힘들자, 오갈 데가 없는 흑두루미를 위해 학교에서는 자연관찰용으로 새들을 기르고 있던 조류사육장에서 살게 해주었다. 소년은 '두리'라고 이름을 붙인 흑두루미에게 여름에는 미꾸라지를 잡아주고 가을에는 메뚜기를 잡아주며 정성을 다해 보살폈다. 세월이 흘러 소년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순천을 떠나자 아무도 두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난 2001년의 어느 날, 그 흑두루미가 우연히 학교에 들른 순천지역 환경보호 단체 회원의 눈에 띄었다. 그로 인해 순천만에도 흑두루미가 날아온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세계적인 희귀조인 흑두루미가 순천만에 날아온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어서 환경단체와 여수 MBC는 즉시 흑두루미를 자연으로 귀환시키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뜻있는 독지가들과 조류 전문가들, 그리고 순천시의 협조로 그 프로젝트는 조용히 진행되었다.

그런데 '두리'는 10년 동안 인간이 주는 모이를 먹고 새장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야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 물고기를 잡지도 못하고 날지도 못했다. 처음에는 두리가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 그물망을 치고 바닥에 흙을 깐 대형 조류장을 만들었다. 조류장 주변에 갈대를 심고 연못도 만들어 최대한 자연적인 환경을 만들어 물가의 피라미나 미꾸라지를 잡도록 했으나 곡류만을 먹어 온 흑두루미는 물고기를 외면했다.

그러나 한 달 정도 물고기 사냥 훈련을 통해 먹잇감을 잡을 수 있게 되자, 이번에는 더 넓게 날 수 있는 대형 골프 연습장을 빌려 손님이 없는 시간에 날기 훈련을 시켰다. 그렇게 5, 6 개월의 훈련을 한 뒤, 겨울에 찾아 온 몇몇 야생 흑두루미 무리에 끼어 넣어 함께 어울리게 했다. 처음에는 무리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던 두리는 차츰 그들과 친해져 마침내 봄이 되자 힘찬 날개짓으로 시베리아를 향해 날아갔다.

'두리 귀환 프로젝트'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노력을 통해 순천만의 뛰어난 갯벌과 갈대의 생태가 알려지게 되었고, 순천시에서 적극적으로 생태 보전을 위해 노력한 결과 지금은 수백 마리의 흑두루미가 찾아오는 아름다운 철새 도래지가 됐다. 순천시는 10여 년 전부터 갈대와 흑두루미로 상징되는 생태 환경 보호가 지역을 먹여 살릴 것이라는 방향을 선택했다.

그러한 방향을 세우게 한 것은 바로 흑두루미 '두리'였다. 야성을 잃은 흑두루미 한 마리를 살려 준 소년의 사랑과 자연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수개월의 공을 들인 시행정가들과 시민들의 자연 사랑이 순천만을 순수 자연 생태를 유지한 아름다운 갯벌로 재탄생시켰다. 그 순천만이 지금은 연간 300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오고, 연간 1,000억원의 경제 효과를 낳는 기적의 보물창고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김명곤 동양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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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20:31

민족주의는 괴물이다. 평소엔 숨어 있어 잘 모른다. 모습을 나타내면 상상 밖의 힘을 발휘한다. 잘 다스리면 폭발적 동력이 되지만, 고삐를 놓쳤을 경우 엄청난 희생을 초래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독일 민족주의를 보면 괴물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1807년 독일 철학자 피히테의 대중 강연 ‘독일 국민에게 고함’은 민족주의를 공동체 발전동력으로 승화시킨 성공사례다. 프랑스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을 점령하자 독일인들은 절망한다. 피히테의 표현에 따르면 “죽은 몸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병 걸린 둥지(몸)로 돌아갈 수 없을까 하고 헛되이 애쓰는 망령”과 같았다.

 그런 독일인에게 피히테는 민족주의를 외쳤다. “여러분이 결연히 분기한다면, 독일인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기념을 약속하는 한 시대가 꽃피어 오르는 것을 볼 것이며, 독일의 이름이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영광스러운 민족으로 드높여지는 것을 볼 것”이라고 외쳤다. 결연히 분기하는 방법으로 교육혁명을 강조했다. 국민교육을 통해 (패전의 원인인) 이기심을 타파하자는 것이다.

 당시 유럽은 근대적 의미의 민족주의와 국민국가가 막 형성되던 시기였다. 프랑스에 짓밟힌 독일은 게르만 민족주의라는 동력에 불을 지펴 통일과 국민국가 형성의 길로 나섰다. 그 결과 64년 만에 프랑스와의 전쟁에 승리해 베르사유 궁전에서 ‘제2 제국’을 선포함으로써 통일의 꿈을 이루었다.


반면 히틀러의 나치즘은 최악의 민족주의로 꼽힌다. 나치즘은 독일 민족주의에 인종주의까지 가미된 파시즘이다. 우수한 독일 민족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독일인의 혈통과 명예를 보호하기 위한 법’을 만들었다. 유대인과 독일인의 결혼을 금지하고, 모든 신랑·신부는 혈통에 관한 증빙서류를 제출하게 했다. 불순한 혈통에 대한 대청소가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다. 열등민족에 대한 지배는 곧 2차 대전이었다. 주목할 대목은 히틀러 역시 민주적 절차로 집권했다는 점이다. 독일 국민은 정치적 선동에 휩쓸려 민족주의란 괴물의 고삐를 놓쳐버렸음을 당시엔 알지 못했다.


 이런 아픈 역사가 있기에 서구에선 ‘민족주의’라고 하면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민족주의를 뜻하는 쇼비니즘(chauvinism) 혹은 징고이즘(jingoism)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배타적 민족주의와 전쟁에 대한 공포심이 널리 퍼져 있기에 유럽통합이란 국경 허물기가 가능했다. 21세기 유럽에선 적어도 국가 차원의 민족주의는 사라졌다.

 반면 최근 민족주의의 화약고로 떠오르고 있는 지역이 동북아시아다. 우리나라와 중국, 그리고 일본. 세 나라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를 지니고 있다.

 첫째, 세 나라는 유구한 민족적 정체성을 자랑한다. 세 나라는 각각의 영토에서 수천 년의 민족공동체를 꾸려왔다.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라 자부하는 중국의 중화민족주의는 긴 말이 필요 없다. 일본은 더 독특하다. 만세일손(萬世一孫)의 천황(일왕)이 다스리는 신국(神國·신의 나라)이라고 생각한다. 민족주의의 토양은 깊고 풍성하다.

 둘째, 결정적으로 세 나라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직접 가해·피해 당사자로서 아직 생생한 기억을 지닌 채 국경을 맞대고 있다. 작은 일에도 아픈 기억에 민족주의가 되살아난다. 특히 국경 문제는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이라 더더욱 민족감정을 자극한다. 중국과 한국에선 민족주의가 독립운동의 이념이었기에 지금도 신성하다.

 셋째, 동북아 지역은 패권이동의 변혁기다. 일본이 가라앉고 중국이 아편전쟁 이후 100년 만에 굴기(<5D1B>起)하면서 힘의 이동이 급속히 이뤄지고 있기에 마찰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일본이 상실감과 중국의 자존심은 화력 좋은 불쏘시개다.

 넷째, 2012년 현시점에서 세 나라는 모두 권력 이양기다. 이명박(MB)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잇따른 발언은 레임덕 대통령의 자구책으로 풀이된다. 일본 노다 총리 역시 민주당 정권의 명운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외교적으로 유약하다”는 비난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10년 주기의 지도부 교체를 눈앞에 둔 중국의 경우 더 민감하다. 과거와 달리 대중적 지지를 의식하지 않고는 권좌에 오르기도, 유지하기도 어렵게 됐다. 중국 네티즌의 민족주의 열기는 폭발 직전이다. 중국은 이런 열기를 적절히 외부로 발산함으로써 내부 단속을 꾀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최악은 ‘정치인에 의한 민족주의 자극’이다. 그런 점에서 MB의 갑작스러운 대일 강경책은 ‘맞는 얘기’지만 ‘바람직하진 않은 행동’이었다. 민족주의라는 괴물의 고삐를 놓치지 않으려면 냉정해야 한다.



오병상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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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20:30

일 관계로 강남에 갔다가, 나간 김에 인근의 한 미용실에 들렀다. 머리를 자르는 동안 헤어디자이너와 이런 저런 대화가 오가기 마련인데, 대화가 막힌 시점에서 미용실의 이름 뜻을 물었다. 발음도 못하겠는, 낯선 단어였던 때문이다. 이름은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였다. 사각사각 가위소리 뒤로, 요즘 상류문화는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라는 설명이 따라왔다. 최근 주변에 새로 생긴 헤어숍 이름은 라틴어라며, 발 빠른 경쟁자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미용실, 미장원이라고 부르면 왠지 격하시킨 것처럼 여겨지는 헤어숍들은 '코지'풍이든 '모던'풍이든 모두 '럭셔리'를 지향한다. 특히 강남으로 갈수록 그런 경향은 뚜렷해져서, 건물이나 실내장식의 위용과 세련됨이 놀라울 정도다. 그런데 이렇게 고급을 표방하고 유행에 민감한데도, 내가 엄마 따라 단발머리를 끊으러 가던 시절부터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실내에 비치된 여성지들이다. 

왜 미용실에는 여성지들만 비치되어 있을까. 두툼한 여성지들 사이에 흔히 '럭셔리 잡지'라고 부르는 무가지들이 추가된 것이 변화라면 변화다. 그럴 때면 헤어숍들의 이른 바 럭셔리 콘셉트라는 게 얼마나 상업적이며 외연에 치우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스스로는 헤어디자이너, 메이크업 아티스트 등의 이름으로 '미용'을 '예술'로 격상시킨 지 오랜데, 고객은 여전히 여성지만 읽는 주부 취급을 하는 것은 아닐까. 머리를 하는 동안에는 생각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라는 것일까. 휴식의 방법은 여성지들 안에만 있는 것일까. 머리를 말고 대기하는 그 길고 지루한 시간에, 선택의 여지없이 묵직한 책들을 집어들 때면 거의 취향을 강요 받는 느낌이다. 물론 여성지의 장점도 있다. 다만 다양성의 존중 차원에서 다른 책들의 비치는 어떤가, 권해보는 것이다. 

얼마 전 <영국은 주말에 오픈한다>라는 책을 출간한 지인으로부터 영국 브라이튼에 있는 한 미용실이 벽면마다 현대사진가의 사진을 걸어 전시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사실 미용실은 사진이든 그림이든, 전시를 하기 좋은 공간이다. '이발소 그림'이라는 말의 다른 측면을 살피면 이발소가 그림이 걸려 공유되는 공간이라는 뜻이 아닌가. (알다시피 요즘 헤어숍들은 남성고객들을 위한 '이발소' 역할도 한다)

전시까지 아니어도 괜찮다. 활자가 빼곡한 책들이야 어렵겠지만, 시각적인 책들은 얼마든지 비치가 가능하다. 화집과 사진집도 좋고, 요즘은 어른들을 위해 나온 수준 높은 동화들도 많다. 생활인으로서의 부분 외에도 지니고 있을 고객들의 다른 측면, 혹은 감성에 접근해보는 것이다. 

류가헌이 사진위주 전시장이니, 여기서는 사진집 이야기만 하기로 하자. 사진집은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시각언어다. 재빠르게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을 가능하게 한다. 금세 그 이미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집안이든, 공공장소에서든 책 한 권에서 이처럼 깊은 층위의 감동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사진집만한 것도 없다. 

또한, 오리지널 전시작이 아니어도 사진집 한 권에는 감동이 고스란하다. 전문 사진가가 찍은 사진이 아닌데도 우리 사진사에 회자되는 사진집 <윤미네 집>은, 한 아버지가 딸이 태어나서 시집가기까지를 기록한 책으로, 일반인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운 책이다. 사진집이 크고 무겁고 가격이 비싸다고 반박한다면, 열화당사진문고를 권할 수도 있다. 1만 원대의 가격, 손바닥만 한 크기의 책 안에 한 사진가의 작품세계가 압축되어 있어 감동의 수위가 높다. 

헤어숍에서 막 머리를 하고 온 주부이면서, 사진집을 출간하는 갤러리 관장으로서 어쩌면 새로운 '판로개척'을 모색하며 이 글을 쓰는 지도 모르겠다. 아무려나, 다음 번엔 어느 헤어숍에서 건 사진집 하나 만나게 되는 날을 꿈꾸며.



박미경 류가헌 갤러리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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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20:29

며칠 전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는 영상을 봤다. 1995년 미국 몬태나주 헬레나에 있는 한 초등학교가 무대였다. 선생님이 5학년생 8명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 인터넷의 미래가 어떨 것 같니?”

 아이들은 이제 막 퍼져나가기 시작한 인터넷에 대해 갖가지 생각을 쏟아냈다.

 “전화기처럼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될 거예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도 채팅을 할 수 있어요.” “내 고양이 사진을 전 세계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돼요”….

 20년이 채 못 돼 아이들의 상상은 정확한 현실이 됐다.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언론들은 순수한 마음이 미래를 예측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기자의 생각은 다르다. 아이들이 미래를 봤다기보다는 우린 당대에 상상하고 꿈꿔온 것들을 하나씩 이뤄내 온 것이다.

 요즘 개인적으로 호기심을 가진 또 하나의 소재가 있다. 최근 화성에 안착한 미국 탐사로봇 ‘큐리오시티’가 보내오는 사진들이다. 화성의 모습은 놀랍게도 지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늘색은 몰라도 잔돌이 깔려 있는 바닥이나 언덕의 모습은 거의 흡사했다. 하늘만 손질하면 지구 어느 쯤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지구 침공을 꿈꾸는 외계인들이 살고 있다고 믿었던 화성은 이렇게 평범한 모습으로 베일을 벗고 있다. 그 평범함이 지구와 화성의 거리를 크게 좁혀놓을 거라는 상상을 해 본다. 전문가들은 15~20년 후면 일반인들의 화성 여행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인류는 상상에서나 존재했던 일들을 하나씩 현실화해 왔다. 20세기에 나온 공상과학 소설을 허황되다고 말할 사람은 더 이상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점에서 지금 우리가 꾸는 꿈도 가까운 미래에 이뤄질 것으로 믿는다. 20년 전 몬태나주 아이들이 미래를 정확히 그렸던 것처럼 화성 여행도 현실이 될 것이다. 상상한 대로 이룰 수 있다는 건 희망이고 축복이다.

 하지만 이런 낭만에 찬물을 끼얹는 뉴스도 이어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이러스의 습격이다. 최근 미국에선 일본뇌염 바이러스와 비슷한 ‘웨스트 나일 바이러스’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올 들어 미국에서만 26명이 숨지고 7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감염됐다. 사스·신종플루·조류독감 등 전 세계를 패닉 상태에 빠뜨렸던 바이러스의 공포는 중단될 줄 모른다. 아프리카에선 치료제도 없는 에볼라 바이러스가 다시 퍼져 지난달에만 수십 명이 죽었다고 한다.

 1958년 노벨생리학상 수상자인 조슈아 레더버그는 “인류의 지구 지배에서 단 하나 위협은 바이러스”라고 했다. 화성에 가고 무한한 꿈을 꾸는 인류지만 눈에 안 보이는 미세한 존재인 바이러스를 정복하지 못하고 있다. 수천 년 싸워왔어도 이길 승산이 안 보인다. 결국 희망과 공포 사이에서 겸허함을 가져야 하는 게 인간의 숙명인 듯하다. 그게 지구가 우리에게 주려는 교훈일지도 모른다.


이상복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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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20:28

고문피해 생존자들의 모임인 ‘진실의 힘’이 국가폭력 피해 치유를 위한 씨앗기금으로 3000만원을 내놓았다고 한다. ‘진실의 힘’은 작년에도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의 심리치료를 위한 센터 ‘와락’ 건립을 위해 2000만원을 출연한 바 있다. 국가폭력의 피해는 결코 개인이 짊어져야 할 일이 아니고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짊어져야 할 책무라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가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2000만원을 생활보호 대상자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내놓은 일도 있었고, 황금자 할머니는 임대아파트에서 힘겹게 지내면서 정부에서 준 위로금과 폐지를 팔아서 모은 1억원을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써 달라고 유언장을 써 놓기도 했다. 또 김복동·길원옥 할머니는 자신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금을 받으면 콩고 등지 세계 각지의 전쟁피해여성을 위해 쓰겠다고 선언하여 ‘나비기금’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사실 이들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은 응당 국가로부터 위로와 보상을 받아야 하고, 가해자 처벌을 요구해야 하고,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리고서 그 대가로 호의호식해온 사람들에게 구상권까지 청구하는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에 의해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망가지고 가족도 제대로 꾸리지 못하고 처참한 가난에 신음하게 되었으면서도 자신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돈을 자기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오늘의 피해자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쾌척한 일 자체는 감동적이다. 이들에게 2000만원은 사회적 공격을 피하기 위해 기업가들이 내놓은 수천억의 기부금보다 값지다. 이들은 이미 도덕적으로 가해자들에게 이겼다. 장차 동참자들도 늘어날 것이다.


한편 우리도 국가나 대기업의 횡포로 피해를 받은 사람들의 권익투쟁에 힘을 보태야 하고 피해자의 고통에 동참해야 한다. 그러나 투쟁에는 함정이 있다. “악마와 싸우다 보면 악마를 닮는다”는 말처럼 권리 요구와 투쟁에만 매달리면, 투쟁의 대의에 소극적인 동료를 원망하거나 투쟁 노선을 둘러싸고 내부에서 분열 대립하기 쉽고, 결국 목표도 얻기 전에 스스로의 육체나 정신 모두를 망가뜨리는 수가 많다. 그리고 눈앞의 투쟁 목표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더 큰 목표나 이상을 놓치는 경우도 많다. 투쟁을 하는 목적은 우선 내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자는 데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억울한 피해자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 있다. 그래서 투쟁의 과정에는 언제나 힘없는 사람들이 서로 격려하고 힘을 얻을 수 있는 대안적 조직문화, 그리고 생산과 건설의 전망까지 어느 정도 바탕에 깔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다소 이상이기는 하지만 투쟁 속에서 새 인간, 관계, 국가, 사회의 싹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통합진보당이나 조직노조 활동이 뒷걸음친 이유는 너무나 명백하다. 폭력 탄압보다 더 무서운 것이 주체의 정신적 무장해제와 파편화다. 이익의 논리가 종교처럼 압도하는 ‘기업사회’는 모든 사람을 경쟁하는 개인으로 파편화한다. 사회관계가 비즈니스 논리로 움직이는 사회에서 가진 사람은 더 갖지 못해 안달하고, 못 가진 사람은 다 잃어버리지 않을까 불안해하기 때문에,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투쟁 구호는 대단히 전투적이지만, 힘들여서 ‘승리’해도 뿔뿔이 흩어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기업형슈퍼마켓(SSM) 반대 운동은 마을 살리기 운동이 되어야 하고, 비정규직 차별철폐운동은 노동자 서로돕기 운동과 결합되어야 한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의 손을 뻗으면 진보가 살 것이고 장차 진보정치도 살아날 것이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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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19:59

왜 일본은 독일처럼 못할까. 군국주의 시절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을 절대로,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는 일본을 볼 때마다 의아했다. 세계가 다 아는 ‘군 성노예’ 배상을 외면하는 일이 얼마나 일본 남자들을 징그럽게 만드는지, 잊을 만하면 독도를 들먹이는 게 얼마나 식민지배 근성을 드러내는지 그들은 모르는 건가, 모르는 척하는 건가.

일왕 언급에 경악…神政국가인가

“아키히토(明仁) 일왕도 한국을 방문하고 싶으면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들을 찾아가서 진심으로 사과하면 좋겠다”는 우리 대통령의 발언에 일본 열도가 뒤집힌 모양이다. 

일본에선 교통사고가 늘어나도 총리가 ‘통석의 염’ 운운하며 국민에게 사과한다는데, 1989년 일왕이 그 말을 했을 때는 그것도 모르고 해석에 골몰했다. 그렇게 어려운 말이나 하려면 안 오는 게 낫다는 언급에 아사히신문까지 “국가 원수로서의 품격을 잃었다고 할 수 있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마호메트를 불경스럽게 그렸다고 이슬람권이 발칵 했을 때를 연상케 한다. 일본이 왕정(王政) 아닌 신정(神政)국가라도 되는 것 같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곧바로 독일제국의 이름으로 이뤄진 모든 죄과를 국가적 차원에서 사죄했고, 물질적 정신적 보상을 해 왔다. 1970년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해 유대인 희생자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사진은 다시 봐도 뭉클하다. 

개인이라면 죄의식이 없을 수도 있다. 유대인 대량학살의 책임자인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도 법정에서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이라고 뻔뻔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독일은 책임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상국가’가 될 수 있었다. 유로존 위기가 닥치자 과거 전쟁으로 못 꺾었던 나라들을 경제로 무릎 꿇게 만든 힘도 여기서 나왔다.

일본이 독일처럼 못 된 이유를 “독일은 1945년을 ‘0시’로 삼아 과거와 완전히 단절했지만 일본은 못 했기 때문”이라고 이언 부루마는 ‘죄의 값’에서 지적했다. 천황제를 통해 자신들이 신의 민족이라고 믿어 온 일본인은 패전 후에도 천황제를 유지함으로써 민족적 우월성을 고수한다. 때론 노골적으로 이웃나라를 멸시하는 것도 이들에겐 당연하다. 명령과 복종을 끔찍이 여기고, 전체주의와 집단의식에 젖어 민주주의와 잘 맞지 않는 기질도 이와 무관치 않다.

10년 전까지 일본처럼 환상 속에 살던 나라가 또 있었다. 합스부르크 황실의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는 오스트리아다. 나치 독일에 기꺼이 합병된 오스트리아는 독일 뺨치게 유대인 학살에 열을 올리고도 패전 뒤에는 ‘나치의 피해자’를 자처했다. 그러고는 영세중립국을 표방하고 경제에 매진해 선진국으로 변신했다. ‘원폭 희생자’라면서, 우리나라보다 더 불쌍하고도 평화를 사랑하는 모습으로 미국과 경제에 매달린 일본과 참으로 비슷하다.

‘많이 아픈 나라’ 증거 같은 행태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나라답게 오스트리아는 불쾌한 기억을 무의식 속에 묻어 두는 ‘억압’ 기제에 능했다. 나치에 협력한 정치인과 관료들이 전후에도 고위직을 차지했고, 학교 역사시간엔 2차대전 전까지만 가르칠 정도였다. 굴욕을 참느니 차라리 할복하는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는 억압 기제의 극단적 발현이다. 만행을 저지른 세대는 의도적으로 과거를 버렸고, 젊은 세대에게는 아예 알리지 않았다. 따라서 진심으로 사과를 할 것도 없는 기형적 상황이 된 셈이다.

사람이 사람을 중히 여기는 인류 보편의 가치와 너무나 먼 이런 나라는 정상국가라고 하기 어렵다. 오스트리아도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쿠르트 발트하임이 나치에 복무했다는 것을 알면서 1986년 대통령으로 뽑는 ‘공범의 시절’이 있었다. 1999년엔 나치 고위직 출신이 낀 극우정당을 제1당으로 만들 만큼 이 나라 사람들은 죄의식 제로 속에 살았다.

이런 나라를 정상국가로 돌려놓은 것이 2000년 유럽연합(EU) 14개 국가의 압력과 미디어였다. 유대인의 집단배상소송까지 쏟아져 엄청난 배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는 고립될 수 없었던 오스트리아는 2002년 총선에서 극우당을 몰락시킴으로써 비로소 독일처럼 됐다는 평가를 얻을 수 있었다.

일본이라고 이런 압력을 안 받는 게 아니다. 미국 캐나다 유럽의회 등 전 세계가 일본의 ‘군 성노예’ 강제행위를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도 국가적 잘못을 인정하고 인류 보편의 가치로 돌아서기는커녕 일왕을 언급한 것만으로도 온 나라가 뒤집어진다는 건, 일본이 많이 아프다는 증거다.

그래서야 우리와 같이 자유민주주의라는 공통의 가치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더구나 올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로 일본이 국제사회에 복귀한 지 60년이 되는 해다. 아무리 평화헌법을 고친다 해도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고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는 한, 일본은 문명사회를 선도하는 국가라 할 수 없다.


김순덕 논설위원


http://news.donga.com/3/all/20120820/487332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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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19:57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에 간다는 얘길 처음 들은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드디어 우리 대통령이 우리 땅 독도에 가는구나! 얼마 전까지 도쿄 특파원으로 일본이 지속적이고 의도적으로 역사 왜곡과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화해 온 것을 지켜본 터라 통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시원한 가슴과는 달리 머릿속에선 아쉬움이 컸다. 정치는 가슴으로 할 수 있지만 국익이 최우선인 외교는 다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앞장서서 미국과 얼굴 붉히고 일본과 ‘외교 전쟁’을 벌이고 동북아균형자론을 역설했던 2005년, 당시 외교통상부 출입기자로서 느꼈던 감정과 비슷했다. 그때도 많은 사람이 가슴 시원함을 느꼈지만 결국 남은 게 뭐 있나.

대통령은 독도 방문 배경을 설명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 조금도 반성과 해결 의지를 안 보이는 일본 정부를 탓했다. 동감이다. 일본은 석고대죄해도 모자란다. 그러나 정말 나무라고 싶었다면 상대를 부끄럽게 만들었어야 했다. 기자 초년병 시절 선배에게 들은 얘기가 있다. 비판기사를 쓸 땐 상대를 부끄럽게 만들어야지 화나게 해선 안 된다고. 외교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독도에 다녀온 뒤 대통령이 쏟아 낸 일련의 발언에선 3년 전부터 준비해 왔다는 전략적 치밀함을 찾기 어려웠다.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영향력도 이전 같지 않다.” “일왕이 또 ‘통석의 염’ 뭐가 어쩌고 이런 단어 하나 찾아서 올 거면 올 필요 없다.” 백번 옳은 말이다. 그러나 옳은 말이라고 아무 때나 여과 없이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외교에선 더욱 그렇다.

외교는 상대가 있고,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근본적 잘못이 일본에 있다 하더라도 잔뜩 화가 난 상대에게 제2, 제3의 말 펀치를 날릴 필요까지 있었나 싶다. 특히 일왕 관련 발언은 일본인 대부분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사족(蛇足)이었다.

대통령은 최고의 외교관인 동시에 최후의 외교관이다. 비장의 무기는 품속에서 슬쩍 꺼내는 시늉만으로 최고의 힘을 발휘한다. 써 버리면 더는 비장의 무기가 아니다. 독도 문제에선 누가 뭐래도 ‘현재 소유하고 있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먼발치서 안달하는 일본으로선 ‘말’로 도발하는 게 고작이다. 우리는 그때마다 상응하는 ‘행동’으로 응징하면 될 일이다. 솔직히 영토 문제는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상황 관리가 중요한 이유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수수깡 베겠다고 보검을 휘두른 감이 없지 않다. 이제 방파제나 해양과학기지 등 독도 문제에서 일본을 압박할 수 있는 외교 카드가 예전 같은 약효를 발휘할지 의문이다.

정 가고 싶었다면 지지율 높고 힘이 있던 임기 초에 갈 일이었다. 그러면 한일 관계가 껄끄러워지더라도 시간을 갖고 소신 있게 풀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레임덕을 맞은 임기 말에 하니 여기저기서 국내 정치용이란 오해를 부르고 다음 정부에 짐을 떠넘겼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한일 관계에서 우리는 역사적 채권자와 같다. 국력은 아직 일본에 비할 바 아니지만 우리나라 대사가 주재국 총리나 장관을 수시로 만나는 강대국은 일본밖에 없다. 총리급 거물이 주미대사로 가도 미국 대통령은커녕 국무장관도 마음대로 못 만난다. 그게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이다. 일본에선 그래도 ‘한국이니까…’라는 뭔가 특별함이 있다. 최근 일본 내 친한파 사이에선 그런 특별 관계가 보통 관계로 바뀌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고 한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경제력만으로는 잴 수 없는 도덕적 역사적 우위를 우리 스스로 약화시킬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윤종구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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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19:51

요즘 국제 뉴스를 검색하다 보면 중국 신화통신의 영문 뉴스가 부쩍 늘었다는 걸 실감한다. 미국발 뉴스를 신화통신 영문 뉴스를 통해 먼저 알게 될 때도 있다. 신화통신은 2010년 24시간 영어 뉴스 채널도 시작했다. 신화통신 사장은 당시 기자회견에서 “중국의 관점에서 국제적인 비전을 보여주려는 정부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국영방송인 CCTV도 24시간 영어 뉴스 채널을 운영한다. CCTV는 2010년 수십명 수준이던 해외 인력을 올해 말까지 280명, 2016년까지는 80개 지국 500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CCTV는 미국 워싱턴에 기자 80명을 두고 있다. 이는 워싱턴에 있는 한국 특파원단 전부를 합한 숫자의 2~3배에 달한다.

CCTV의 해외 진출은 미국을 비롯, 유럽,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태평양 지역 등의 6개 지국을 중심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한다. 이 프로젝트의 명분은 ‘중국 시각으로 국제 뉴스를 전달하겠다’는 것이다. 서구 미디어들이 중국에 대한 편파적인 시각으로 중국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그리는 걸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은 위성TV 방송 ‘알자지라’의 성공을 눈여겨봤다고 한다. 알자지라는 중동과 아랍인 시각에서 국제 뉴스를 보도해 큰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중국의 꿈은 알자지라보다 더 커서 ‘세계적인 미디어 제국’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중국의 ‘국가적 사업’이라는 데 있다. 지난해 신화통신은 미국 뉴욕의 타임스스퀘어 근처에 사무실을 열었고, 타임스스퀘어의 전광판을 임차, 광고도 시작했다. 주요 언론사가 모여 있는 지역에 진출함으로써 국제적인 면모를 한층 강화한 듯했다. 하지만 뉴욕에서 영어로 보도한다 해도 신화통신이 결국 중국 공산당의 선전기구라는 점 때문에 경계의 눈길은 사라지지 않는다.

중국 보도기관들이 권력 감시와 공익 수호라는 언론의 기본 사명을 공유하는지도 의문이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보도기관들이 중국 당국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보시라이 전 충칭시 서기의 스캔들이나 티베트 독립운동 등을 속 시원하게 보도하지 않는다고 본다. 리비아 사태 때도 장기 집권 독재자 카다피 처지에서 보도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래서 중국 보도기관들의 세계 진출 확대에 대한 우려는 더 커지고 있다.

중국 정부는 국영 보도기관들의 해외 진출 프로젝트에 약 8조원을 쏟아부을 계획이다. 광고 시장 사정이 악화돼 세계 유수 언론사들마저 적자에 시달리다 규모를 축소하고 문을 닫는 마당에 이들은 국가 지원을 받으며 거침없이 활동 무대를 넓히고 있다. 사정이 어려운 개도국 언론사에 신화통신 영문 뉴스를 공짜로 제공하고, 언론 자유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베네수엘라 같은 나라에 통신위성을 지원한다. 중국산 뉴스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다. 이런 추세로 가다 보면 기존 언론사들의 활동이 위축된 상황에서 중국 당국의 통제를 받는 보도기관이 만들어낸 중국산 영문 뉴스가 미디어 시장에서 판치는 날이 곧 올 수도 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최근 “정보 전쟁에서 미국이 밀리고 있다”고 한 것도 중국의 이 같은 공세를 의식한 것이다.

중국 보도기관들의 해외 진출 확대 계획은 규모가 너무 커서 중국이 ‘미디어 항공모함’을 띄울 기세라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진짜 경계해야 할 것은 중국이 러시아에서 사들인 ‘바랴그’호를 개조해 만든 항공모함이 아니라 바로 이 미디어 항공모함이란 것이다. 세계가 가격 때문에 값싼 중국산 상품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국가 지원 덕에 비용을 고려하지 않고 대량생산할 수 있는 중국산 영문 뉴스를 볼 수밖에 없는 날이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중국산 뉴스엔 중국 당국의 시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이다.



강인선 국제부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19/201208190122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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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19:49

   1969년 달착륙 과정을 1865년에 예언

새 시대를 연 거목들 <19> 쥘 베른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의 역사는 오래다. 기원전 24세기 작품인 길가메시서사시(Gilgamesh敍事詩)를 사이언스 픽션의 원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이언스 픽션을 우리말로 공상과학소설이라고 옮기는 것은 일본 번역계를 따라 한 것이다. 공상(空想)은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리어 봄”이다. 부정적인 뜻이 담겼다. 공상이라는 군더더기 표현을 빼고 사이언스 픽션을 과학소설이라고 부르자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
‘사이언스 픽션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은 쥘 가브리엘 베른(1828~1905)이다. 베른을 취재한 1902년 6월 28일자 뉴욕타임스 기사도 그를 ‘과학 소설가(novelist of science)’라고 불렀다. 그가 쓴 소설은 ‘과학적 소설(scientific novel)’이라고 지칭했다. 

한 문학사학자에 따르면 베른은 역사상 228번째 과학소설가다. 하지만 작가ㆍ과학자ㆍ발명가에 미친 베른의 영향력을 넘볼 수 있는 과학소설가는 많지 않다. 베른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번역된 작가다. 일등은 추리소설가 애거사 크리스티(1890~1976)다. 

우주시대 그린 SF의 아버지
베른의 소설은 어린이용이 아니었다. 외국 출판사들 입장에서 베른의 소설은 어린이물 독서 시장에서 승산이 있었다. 외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베른의 소설은 원문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편집됐다. 다행인 것은 수많은 과학자들이 어린 시절부터 그의 소설을 만난 것이다. 우주 시대를 연 선구자들은 베른의 소설을 읽고 자란 ‘쥘 베른 키즈(kids)’다. 로켓ㆍ인공위성 연구의 선구자인 소련 항공학자 콘스탄틴 치올콥스키(1857~1935), ‘현대 로켓 공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고더드(1882~1945), 아폴로 계획을 성공시킨 베르너 폰 브라운(1912~1977)은 자신들이 베른의 『지구에서 달로(De la Terre <00E0> la lune)』(1865)를 읽으며 우주 여행을 꿈꿨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베른은 “뭐든지 한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베른은 『지구에서 달로』에서 인류가 달에 갔다 지구로 돌아오는 과정을 그렸다. 104년 후인 1969년, 아폴로 11호는 소설에서처럼 플로리다에서 발사돼 돌아올 때는 대양에 떨어져 회수됐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것들 중에는 잠수함, 기구(氣球)와 같이 이미 세상에 등장했던 것도 있었다. 달여행 소설의 원조도 머터그 먹더멋(Murtagh McDermott)의 『달여행(A Trip to the Moon)』(1728)이다. 베른의 작품에 나오지도 않는데 그가 발명한 것으로 일반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도 있다. TVㆍ원자폭탄ㆍ인터넷 같은 것들이다. 물론 베른이 실제 최초로 예언한 것들도 많다. 1920년에 처음 등장한 뉴스방송(newscast)을 베른은 1889년에 예언했다. 태양돛배(solar sail), 화상회의, 테이저(taser) 총, 사형용 전기의자도 베른이 원조다. 

쥘 베른은 2남3녀 중 장남으로 프랑스 낭트에서 출생했다. 낭트는 항구다. 출생지의 영향으로 베른은 어려서부터 모험ㆍ여행에 매료됐다. 베른의 소설은 과학소설이기 이전에 모험소설이다. 나중에 소설가로 성공해 큰돈을 벌게 되자 베른은 요트를 구입해 영국ㆍ프랑스ㆍ지중해 해안을 여행했다. 아마추어 시인이기도 한 아버지 피에르 베른은 변호사였다. 아들이 가업을 이어 변호사가 되기를 바랐다. 아들이 딴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생활비를 끊었다. 

베른에게는 10여 년간의 무명 시절이 있었다. 문학 살롱을 드나들며 희곡, 오페라 대본, 단편 소설을 집필했다.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바치는 시를 수십 편 쓰기도 했다. 1857년 결혼한 다음에는 생계를 위해 증권중개인으로 일했다. 꽤 소질이 있었으나 베른은 자신이 하는 증권 업무를 혐오했다. 

1862년 피에르-쥘 에첼(1814~1886)을 만나면서 운이 트이기 시작했다. 에첼은 드뮈세ㆍ발자크ㆍ보들레르ㆍ위고ㆍ조르주 상드 등 내로라 하는 문인들의 책을 출간했다. 번번이 거절당하던 베른의 원고를 에첼이 가능성을 알아보고 출간했다. 『5주간의 풍선여행』(1863)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베른의 출세작이었다. 기구를 타고 아프리카 나일강의 근원을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40세 중반 무렵에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됐다. 베른의 소설은 에첼이 한 달에 두 번씩 내는 『교육과 여가』라는 잡지에 연재됐다. 사람들은 베른의 소설을 읽기 위해 잡지를 샀다. 베른과 에첼은 20년 출판 계약을 맺었다. 베른은 1년에 2~3편 이상의 소설을 쏟아 냈다. 평생 100권을 쓰는 게 목표였다.

에첼이 베른이 이룩한 성공의 일등 공신이었다. 에첼은 무자비한 편집권한을 행사했다. 반유대주의적인 내용은 삭제했다. 불행의 그림자를 지우고 해피엔딩으로 바꿨다. 『해저 2만리』(1870)에 나오는 네모 선장은 원래는 ‘성격 좋은’ 사람이었으나 에첼이 신비롭고 비합리적인 인물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베른은 더 큰 부자가 될 뻔했다. 에첼은 베른에게 한동안 인세가 아니라 원고료만을 지불했다. 

당시 사람들은 과학에 대한 관심이 컸다. 독자들의 목마름을 해갈한 것은 베른이었다. 그는 과학과 지리학을 문학과 접목시킨 후 모험ㆍ여행과 버무려 새로운 소설 분야를 창출한 것이다. 베른은 매일 15종의 신문을 읽었다. 최신 과학ㆍ기술을 모니터링했다. 국립도서관은 그의 개인 서재와 같았다. 메모광이었던 베른은 방대한 독서를 통해 소설에 담길 과학ㆍ기술을 흡수했다. 얄궂게도 베른은 과학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중등교육을 받을 때 베른은 그리스어ㆍ라틴어ㆍ철학은 잘하는 편이었으나 과학 과목과 작문은 겨우 패스하는 수준이었다. 그의 진짜 관심사는 지리학이었다. 과학ㆍ기술의 예견에 있어서는 천재였으나 베른은 자전거에 대해서도 시큰둥했다. 전화도 가급적 피했다. 

베른의 문체는 시대를 앞섰다. 군더더기가 없고 사건이 속도감 있게 전개됐다. 베른은 알렉상드르 뒤마(1802~1870)와 빅토르 위고에게 글쓰기를 배웠다. 특히 뒤마는 매일매일 하루 중 정해진 시간은 집필에 할애해야 한다는 것을 베른에게 강조했다. 

국제금융이 지배하는 암울한 세상 예언 
베른이 세계적인 작가가 되자 그를 둘러싼 신화가 생겨났다. 그가 여행을 한 적이 없고 오로지 상상으로 글을 쓴다는 소문이 돌았다. 1880년대 후반 이탈리아에서는 그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이 유포됐다. 어떤 작가 집단이 베른이라는 필명으로 책을 뽑아낸다는 주장이었다. 

베른은 소설의 내용에서는 시대를 앞서갔지만 사회문화적으로는 그 시대의 산물이었다. 중년 이후에는 신앙심을 상실했지만 원래는 정통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한 보수적인 부르주아였다. 극우적 프랑스 민족주의자였으며 프랑스 제국주의를 지지했다. 소설 속에서 여성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지 않았다. 사랑 이야기도 없었다. 사랑에 대해 쓸 수 있는 재주가 자신에게는 없다고 고백했다. 

1871년 베른 가족은 아미앵으로 이주했다. 인구가 9만 명 정도였던 아미앵에 있는 그의 집은 루이 15세 시대 가구로 채웠지만 외양은 수수한 집이었다. 아미앵은 아내의 고향이기도 했다. 베른은 1856년 아미앵에서 거행된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아내 오노린을 만났다. 딸을 두 명 둔 과부였다. 둘은 이듬해 결혼했다. 부부는 베른이 1905년 당뇨합병증으로 사망할 때까지 해로했다. 

오노린은 베른이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했다. 베른은 소화불량, 안면근육마비 등의 증세로 고생했다. 그는 건강염려증(hypochondria) 환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베른을 아내는 부지런히 아들처럼 돌봤다. 오노린의 역할은 에첼 못지않게 중요했다. 『5주간의 풍선여행』이 번번이 출판사들로부터 무시당하자 베른은 원고를 불태워버리려고 했다. 아내가 막았다. 

아들 미셸과 관계도 순탄하지 않았다. 베른은 아들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나이가 들면서 사이가 원만해졌다. 베른의 사후에 서랍 속에서 수많은 원고가 발견됐다. 아버지의 저서를 사후에 출간한 것은 소설가가 된 아들 미셸이었다. 미셸은 베른의 원고를 심하게 편집하거나 아예 새로 썼다. 

베른은 1892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872년께부터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 물망에 올랐으나 실패했다. 열심히 로비를 했다. 질투 때문인지 아카데미프랑세즈는 그에게 결국 ‘신포도’가 됐다. 베른은 회원이 되는 것을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베른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1989년 베른의 증손자가 『20세기 파리』를 발견해 1994년 출간했다. 에첼이 20년 후에 출간하라고 권한 소설이었다. 과학이 고도로 발전했으나 사람들이 국제금융의 지배하에서 신음하는 시대를 예견한 소설이었다.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7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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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19:45

인생을 바꿀 만큼 강렬한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때는 몰랐어도 그 기억이 뇌리에 남아 인생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도 있다. 그런 순간은 주변 사람들을 통해 찾아오기도 한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왔다. 한국에서 만난 친구 벤을 통해서다. 올해 마흔이 된 벤은 얼마 전 종합건강검진을 받기로 했다. 한국에선 대부분의 직장에서 으레 종합검진을 받지만 미국에선 흔하지 않은 풍경이다. 벤은 ‘마흔 살이 됐으니 검진 한번 받아볼까’라는 마음으로 병원에 갔다고 한다.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보고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다.


그런데 결과는 뜻밖이었다. 그의 위와 신장에 악성 종양이 하나씩 발견된 데다 백혈구 수치도 높게 나왔다.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벤은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친구다. 하이킹, 달리기, 자전거 타기 그리고 스카이다이빙까지 한다. 건강 상태도 좋고, 활달하고 무엇보다 마흔 살밖에 되질 않았다. 벤과 악성 종양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적어도 우린 그렇게 생각했다.

검진 결과를 듣자마자 벤은 미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고 가족과 시간을 함께 보내기로 했다. 우리는 그가 떠나기 전날 조촐한 이별 파티를 했다. 파티 분위기가 조용하고 어색한 데다 착 가라앉았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벤의 미래는 불확실하고 불안했지만 벤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했다. 우린 모두 왁자지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느 파티처럼 서로 즐겁게 얘기하고, 웃고, 흥겨운 음악을 듣고 멋진 친구들과 시간을 함께 보냈다. 아마 벤을 이렇게 보는 건 마지막일 터였다. 하지만 벤은 악성 종양 때문에 친구들과의 시간을 우울하게 망치지 않았다.

그의 낙관주의적인 태도는 감동을 줬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돼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언제든 끝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린 왜 주어진 매 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걸까? 매 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1년 뒤 아니면 1시간 뒤 혹은 1분 뒤에도 우리 인생은 끝날 수 있다.
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면서, 또 인생을 잘 사는 태도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 머릿속엔 자꾸 내 젊은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술을 절대 안 드셨다. 종교적인 이유 때문도 아니고 알레르기 반응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아버지께 그 이유를 한 번 여쭤본 적이 있었다. 그의 답은 이랬다. “인생은 소중하니까.”

아버지의 이 말씀은 내 마음에 오래도록 맴돌았다. 아버진 인생의 소중함을 알고 계셨다. 인생의 가치를 알고 계셨다. 벤도 그렇듯이.
인생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됐다는 게 큰 행운처럼 느껴진다. 매일 난 내 인생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느끼고,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넘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름다운 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은 배가된다.

머릿속엔 아버지 말씀이 맴돈다. 인생은 소중하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 친구들과 함께 남산을 뛴다. 점심 시간엔 요가를 한다. 저녁엔 안락한 부엌에서 남자친구를 위해 건강식을 요리한다. 술은 절제해서 일정량만 마신다. 친구들과 가족들을 볼 때마다 내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한다. 내가 인생에 대해 더 조심스러운 태도를 갖고 더 감사한 마음을 가질수록 인생은 내게 더 소중한 시간을 선사한다.

우린 매일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를 격려해 주고 행복해 하는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 우리의 꿈을 실현해야 한다. 단 1초라도 화를 내거나 비관주의에 빠져 인생을 낭비해선 안 된다. 우린 살아 있다. 그게 전부다.

독자 여러분도 벤을 생각해 주시고 벤을 위해 기도해 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여러분의 소중한 인생, 마음껏 즐기시기를.

미셸 판스워스 신한은행 외국인고객 관리팀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7192

Posted by 겟업
2012. 9. 22. 19:43

12일 열린 런던 올림픽 폐막식은 현대 미술계의 악동 데이미언 허스트가 만든 거대한 유니언잭 모양의 무대에서 시작했다. 런던의 러시아워를 묘사한 장면에서 사람들의 옷은 물론 블랙캡 택시와 2층 버스도 모두 신문지로 싸여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신문지에는 셰익스피어, 찰스 디킨스, 존 밀턴, 윌리엄 워즈워스 같은 영국 대문호들의 작품이 인쇄돼 있었다. 오늘의 영국을 만들어낸 힘이 활자와 인문학에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활자로 시작한 폐막식은 조지 마이클, 스파이스 걸스, 더후, 뮤즈 등 팝음악 스타들과 패션계의 거장 알렉산더 매퀸, 타악 퍼포먼스 ‘스톰프’ 등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친 영국 대중문화의 창조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개막식에서 폴 매카트니가 ‘헤이 주드’를, 폐막식에서 퀸이 ‘위 윌 록 유’를 수만 명의 관객들과 함께 ‘떼 창’한 것은 정말 짜릿한 순간이었다.

개막식에서도 영국은 산업혁명, 여성참정권 운동, 국민의료서비스(NHS), 해리포터, 피터팬, 뮤지컬, 코미디까지 두루 자랑했다. 지난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중국은 인류 4대 발명품(나침반, 화약, 인쇄술, 종이)과 세계로 뻗는 중국의 힘을 과시했다. 그러나 런던 올림픽이 베이징 올림픽과 달리 쇼비니즘(배타적 애국주의) 논란에서 벗어나 세계인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곳곳에 숨겨진 ‘유머’의 힘 때문이었다. 

‘영국식 유머’(British Humour)는 ‘노팅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러브 액츄얼리’ 등 영국식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프랑스 유머가 남의 약점이나 순진함을 조롱하는 말장난이 많다면, 영국식 유머는 자기 자신까지도 농담의 대상으로 삼는 블랙유머가 많다. 이는 먼저 자기를 낮춤으로써 남의 공격을 예방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런던 올림픽은 진지하고 엄숙한 개막식에서 국가의 최고 존엄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86)을 웃음거리로 삼았다. 올해 즉위 60주년을 맞은 여왕이 제임스 본드와 함께 치마를 휘날리며 스카이다이빙을 하고(대역이었음),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미스터 빈’ 로언 앳킨슨이 무대 위에서 조는 장면에서 전 세계인들은 ‘빵’ 터졌다.

지난 한 달 동안 유튜브에서 최고의 조회수를 기록했던 싸이의 ‘강남스타일’도 세계의 공통언어인 유머의 힘을 보여준 사례다. 기름진 머리를 한 남자가 육중한 몸매로 말춤을 추는 장면을 본 외국인들은 컴퓨터 앞에서 파안대소하고, 패러디 동영상을 띄우면서 싸이의 유머에 동참했다. ‘런던스타일’이나 ‘강남스타일’도 모두 자신이 ‘가장 잘 나가는 핫(hot)한 존재’임을 강조했지만, 스스로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머로 세계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간 것이다.

런던 올림픽 개·폐막식을 본 탈북자들은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소감을 밝혔다. 북한의 아리랑축전이나 88 서울 올림픽,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등은 꽉 짜인 군대 열병식 같은 분위기였던 게 사실이다. 지난해 프랑스에서 관람했던 리틀엔젤스 공연이나 SM타운의 K팝 콘서트의 ‘집단 안무’도 경이롭지만 획일적인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2014년 인천 아시아경기 개·폐막식은 한국영화계의 거장 임권택 감독이 총감독을 맡는다고 한다. 한국의 ‘정(情)과 한(恨)’을 탁월하게 그려냈던 임 감독에게 세계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한국식 유머도 함께 기대해본다.

전승훈 문화부 차장



http://news.donga.com/3/all/20120816/48683121/1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