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 코닥 아그파 코니카. 한때 세계 카메라필름 시장을 과점하던 4개사다.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으로 필름 수요가 없어지자 미국의 코닥과 벨기에의 아그파는 거의 파산했다. 반면 일본의 후지와 코니카는 생존에 성공했다. 트리아세틸셀룰로스(TAC)필름 쪽으로 눈을 돌린 덕분이다. TAC필름은 TV PC 휴대전화의 모니터에 쓰이는 액정표시장치(LCD)편광판을 보호하는 첨단소재. 국내에서는 효성이 2009년부터 생산하고 있지만 자급률 1∼2%이며, 나머지는 세계시장의 99%를 장악한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
日 부품소재산업 여전히 세계 최강
폴리이미드(PI)필름은 섭씨 400도의 고온과 영하 269도의 극저온을 견딘다. 내화학성 내마모성도 뛰어나다. 인공위성, 발광다이오드(LED), 태양광, e북 등은 이게 있어야 만들 수 있다. SK가 2000년대 후반 독자개발한 덕에 국산화율 15%이며 나머지 85%는 일본 가네카사로부터 수입한다. 대규모집적회로(LSI) 등 미세하고 복잡한 회로 패턴의 생산에 없어서는 안 되는 포토레지스트는 93%를 일본에 의존한다. 한국이 무역수지 흑자 기조를 굳힌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작년 286억 달러 적자다. 대일(對日) 적자의 70%가 이 같은 첨단 부품소재산업에서 나온다.
일본 경제는 1990년대 ‘잃어버린 10년’과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거치며 활력을 잃고 있다. 최근에는 국제신용평가회사 피치가 한국의 신용등급을 AA―로 올려 일본(A+)을 앞질렀다. 일본으로서는 처음 겪는 굴욕이다. 동아일보가 경제전문가 10명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에서는 7명이 “한국의 1인당 소득이 20년 안에 일본을 추월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우쭐한 기분이 들지만 그렇다고 한국 경제가 곧 일본을 추월할 것처럼 착각해선 안 된다. 국가신용등급이나 구매력기준(PPP) 소득 같은 걸로 ‘일본 추월’을 거론한다면 코미디다. 두 나라 경제를 비교하려면 경제의 ‘규모’(국내총생산·GDP)와 ‘질’(핵심산업지배력)을 봐야 한다. 중국이 ‘G2’라 불리는 것도 GDP에서 일본과 독일을 멀찍이 제쳤고, 기초과학기술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GDP는 한국의 5배, 인구는 2.4배다.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며 외환보유액도 1조2700억 달러로 세계 2위다. 제조업 경쟁력, 특히 핵심기술부품 및 소재에서는 세계 최강이다. 일본은 ‘몸살 앓는 거인’이다.
일본의 신용등급이 떨어진 것에는 이유가 많지만 핵심은 정부 부채, 즉 국채다. 하지만 일본 국채 문제는 매우 독특하다. 국채의 대부분이 국내에서 엔화로 발행돼 ‘일본인이 일본인에게 진’ 빚이다. 국가 부도 위험이 전혀 없다는 뜻. 빚과 함께 원리금 청구권도 다음 세대로 승계된다. 따라서 미래의 어떤 시점에 납세자(대부분 중산층이다)가 국채 투자자(같은 계층이다)에게 갚으면 그만인 구조다.
신용등급 올랐지만 곳곳에 지뢰밭
일본을 가벼이 볼 게 아니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국가부채 해결을 위해서는 세수 증대가 필요하고 소비세 인상이 유일한 대안이지만, 여야가 권력 다툼에만 매몰돼 유권자들이 싫어할 세금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일본 문제의 근본 원인은 정치의 마비, 국가 리더십의 실종에 있다. 구조조정을 통한 산업구조 선진화가 지연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등급은 올라갔지만 한국 경제에 대한 도전이 만만찮다. 가계부채와 부동산 침체는 최대의 복병이다. 일자리, 양극화, 고령화, 노사, 기초기술 부족 등 난제가 산적하다. 국가부채는 GDP 대비 34%로 아직 건전하지만 빚 증가 속도가 가파르다. 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포퓰리즘 경쟁은 이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일본 경제상황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현주소를 냉철하게 직시해야 한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40100000105/3/70040100000105/20120920/495378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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