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22. 19:39


“아빠, 생신 축하! 여기 선물이에요.” 초등학교 4학년 딸아이가 얇은 노트를 내민다. 수년 전 미국에 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아이가 건네준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쓴 ‘이야기’였다. 미국에 간 지 몇달밖에 안 된 때였는데, 영어로 이야기를 만들어서 아빠에게 선물할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귀엽고 대견했다. 매일 저녁에 글쓰기 숙제와 씨름하더니 아빠에게 생애 최고의 생일선물을 안겨준 것이다. 이럴 때 아빠는 지갑을 열게 되어 있다.


그러던 아이가 한국에 와서는 많이 달라졌다. 마치 학교는 쓰기, 읽기, 말하기 능력은 집에서 알아서 배우라는 식인 것 같다. 집에서 글쓰기 숙제를 하는 경우조차 거의 본 적이 없다. 내심 후속 이야기를 선물받고 싶었지만, 그 이후로 아이는 이야기 선물을 내밀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이번 런던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올림픽 축구 대표팀의 모든 경기를 보며 나는 구자철과 기성용 선수에게 푹 빠졌다. 물론 그들의 축구가 아름다웠기 때문이지만, 그 발놀림만큼이나 그들의 언어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한일전을 승리로 장식한 직후 구자철은 인터뷰에서 1년 전 삿포로에서 일본에 3 대 0으로 졌던 일을 차분히 회고했다. 그 당시 썼던 자신의 일기를 들먹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너무도 간절히 승리를 원했다는 느낌이 확실히 전달되는 인터뷰였다.


꽤 길었다. 마이크 앞에서 이렇게 길게 승리의 소감을 이야기하는 선수를 나는 여태 보지 못했다. 고생한 선수들에게 미안한 말이긴 하지만, 승리 소감을 말하는 선수들의 인터뷰는 “승리해서 기쁘고 우리 모두 잘해줬다” 정도여서 안 들어도 그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인터뷰 시간도 몇초면 된다. 하지만 그날 구자철은 달랐다. 뻔한 정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요한 경기를 에워싼 개인과 팀의 사연을 차근차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 구성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트위터에 소소한 이야기를 많이 올리는 기성용도 소통 능력이 뛰어난, 몇 안 되는 선수 중 하나다.

올림픽 축구대표팀 구자철이 지난 8월10일(현지시간) 영국 카디프 밀레니엄 스타디움에서 열린 일본과의 경기에서 후반 골을 성공시키고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카디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월드컵 4강에 올려놓기만 한 감독이라면 우리는 히딩크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을 것이다. “난 아직도 배고프다”와 같은 그의 명언이 회자되기에 그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농구에 천부적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이기지 못하지만, 열심히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넘지 못한다”는 명언을 남긴 마이클 조던이 공자의 <논어>를 읽었을 리는 없다. 농구 천재로서 자신이 경험한 바를 정확하게 표현하다 보니 진실의 수렴이 일어난 경우일 것이다. 우리의 뇌리에 오래 남는 선수는 운동을 잘하는 선수가 아니라 운동을 잘할 뿐만 아니라 소통 능력도 뛰어난 선수다.


사람들에게 역사상 누가 가장 뛰어난 과학자냐고 한번 물어보라. 아인슈타인, 뉴턴, 다윈 등을 지목할 것이다. 그들은 논문만 달랑 몇편 쓴 과학자가 아니었다. 혁명적인 연구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길게 책으로 펴낸 이들이다. 일반인이 가장 좋아하는 물리학자 파인먼, 천문학자 세이건, 생물학자 도킨스의 공통점은 뛰어난 연구자라는 사실만이 아니다. 각각 <물리학 강의>, <코스모스>, <이기적 유전자>와 같은 현대의 과학 고전을 쓴 탁월한 글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공계 인재들에게도 글쓰기 능력을 필수로 가르치자. 운동선수들에게도 말하기 능력을 가르치자.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독서 과제와 작문 숙제만큼은 꼬박꼬박 챙겨주자. 소통 능력은 기본기다. 다른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기본기가 없다면 오래가지 못한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47291.html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