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학가의 가을학기 특강이나 자치단체들의 시민강좌 프로그램들을 보면 거의 공통적으로 어떤 화두 하나가 떠올라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다. 이것은 '큰 물음'이다. 모든 작은 물음들의 밑바닥에 깔린, 그래서 우리가 방향과 가치, 의미와 목적의 문제를 놓고 어둠 속을 헤맬 때 최종적으로 되돌아가서 반문해봐야 하는 기본적 질문이 큰 물음이다. 기본적 질문에는 정답이랄 것이 없다. 인간은 족히 3,000년 전부터 그 질문을 던져왔고 지금도 묻고 있다. 정답 없는 질문이 수천 년 되풀이 되어 왔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인간이 멍청해서? 정답 없는 것의 마법에 홀렸기 때문에? 인간이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그런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만 인간은 인간이라는 것이 첫째 이유이고, 정답이 없으니까 내가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둘째 이유이며, 어떻게든 그 질문에 응답하지 않고선 내가 이 세상에서 내 존재의 문법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이 세 번째 이유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은 인문학 분야들에 대한 학문적 관심 때문이기보다는 인간이 사는 이유와 목적,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물음들에 우리가 오랫동안 등 돌리고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살다보니 "어, 그게 아니네"라는 회의가 들고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같은 질문이 고개를 들 때 사람들은 '생각의 전환'을, 또는 그런 전환의 필요성을 경험한다. 그 전환을 명명할 마땅한 용어가 없을 때 가장 쉽게 써먹을 수 있는 것이 '인문학적 전환'이라는 표현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생각의 인문학적 전환이 일고 있다.
이 전환과 관련해서 나는 진화생물학에 심리학을 융합한 이른바 진화심리학계의 최근 동향 한 가지를 이 칼럼에서 보고하고 싶다. 한국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에드워드 윌슨과 스티븐 핑커의 최근 저서에 관한 이야기다. 둘 다 하버드대 교수들이다. 윌슨의 책은 <지구의 사회적 정복>이라는 제목을, 핑커의 책은 <인간본성 속의 더 나은 천사>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윌슨이 책에서 추적하고 응답을 모색하는 질문은 흥미롭게도 화가 폴 고갱이 던졌던 세 가지 질문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첫 번째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두 개의 질문들은 생물학의 전형적 질문이라고 보긴 어렵다. 윌슨은 고갱의 두 번 째 질문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으로 바꿔 놓고 있는데, 이건 정확히 질문의 인문학적 전환이다. 세 번째 질문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것은 인간 사회의, 또는 문명의 '방향과 목적'에 관계되는 질문이며 방향과 목적의 문제는 엄밀히 말해 진화론의 화두가 아니다. 그것 역시 인문학적 화두이다.
핑커의 책은 지난 수천 년의 문명사를 거시적으로 훑어보고 미시적으로 뒤져보면 인간 세계에서의 '폭력'의 빈도와 강도가 현저히 감소했다는 놀라운 주장을 내놓고 있다.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세한 논의들을 여기 다 거론할 수 없지만, 폭력이 감소한 것은 '인간 본성 속의 더 나은 천사'가 인간성의 나쁜 부분들을 누르고 인간의 행동방식을,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인간'을 바꿔왔기 때문이라는 것이 핑커의 결론이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초래했는가. 역시 흥미롭게도 핑커는 진화론의 통상적 논의 방식을 떠나 폭력 감소의 이유를 인간 감성의 변화, 제도와 법률, 이성의 확장 같은 '문화' 차원에서 구하고 있다.
이 분석에는 반박과 비판의 여지가 없지 않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두 사람이 진화론에 대한 이론적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미래에 매우 낙관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윌슨에 따르면 인간은 협동하고 협력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위대'하고 이 위대한 동물은 부단히 더 큰 사회적 협동과 협력을 '지향'한다. 이건 핑커의 '더 나은 천사'론이나 사실상 진배 없다. 인문학은 '더 나은 천사'론을 좀체 꺼내지 않는다. 부끄러워서다. 그러나 '더 나은 인간'을 지향하는 것은 인문학도 마찬가지다. 진화심리학과 인문학이 오작교에서 만나는 건가?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8/h2012081421102912173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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