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지않아 식량 부족 사태가 오겠구나’. 이런 생각을 한 게 10여 년 전이다. 계기는 좀 허접하다. ‘중국 경제 대장정’ 기획 취재를 위해 20여 일간 중국 남부 연안도시들을 돌고 있을 때였다. 당시 식당에서 보니 중국인들의 먹는 양이 장난이 아니었다. 문득 ‘지금은 잘사는 이들 지역 음식 소비가 늘지만 중국 경제가 점점 발달해 엄청난 인구가 먹기 시작하면 식량이 남아나질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곡물시장 모니터링을 시작했다. 당시는 농산물 잉여의 시대였는데 불과 얼마 후부터 중국은 식량 순수입국으로 돌아섰고, 미국은 남아도는 옥수수로 바이오에탄올을 생산하겠다고 나섰으며, 기후변화로 인한 식량생산 경고 사인이 속속 올라왔다. 한데 이 모니터링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우리 식량안보를 위협하는 건 중국이 아니라 바로 우리나라의 기형적 식량정책이라는 것이었다.
우린 쌀에 올인한 터라 쌀 자급률은 넘쳐서 남는 쌀을 내다버려야 할 정도인데, 나머지 곡물은 거의 전량 수입에 의존한다. 한 예로 식습관이 바뀌어 쌀 소비는 줄고, 육류 소비는 가파르게 늘어나는데 사료는 국내 조달이 안 된다. 우리 식량은 카길 등 4대 곡물 메이저와 일본계 종합상사들이 전체 수입량의 70%를 대고 있다. 식량자급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최하위(26%)이면서도 변변한 곡물유통기업도 없고, 해외 산지 곡물저장소나 곡물터미널 하나 없었다.
이에 2006년 원자재 대란 위험을 경고한 신년기획 ‘세계는 자원전쟁 중’ 시리즈에서 에너지·광물자원과 함께 식량을 다루었다. 이 기획을 할 때만 해도 ‘넘치는 게 식량인데 오버한다’는 반응도 있었다. 그때까지 표면상 식량은 흔했다. 그러나 불과 얼마 안 돼 세계 곡물가격이 들썩이기 시작했고, 2008년 밀 산지의 기상이변에 가격이 폭등하는 ‘밀가루 파동’이 일어났다.
우리에게 기회는 있었다. 나 같은 비전문가조차 오래 전에 식량 위기 조짐을 읽었으니 전문가들은 당연히 알았을 거다. 그런데 대책은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밀가루 파동’ 당시 대통령까지 나서서 밀국수 대신 쌀국수를 먹자며 ‘정치쇼’로 대신했다. 시대에 맞는 농정의 틀을 다시 짜야 할 때, 이렇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며 세월을 보냈다.
일본만 벤치마킹해도 그림은 보인다. 일본은 식량 자급률에선 우리보다 크게 나을 게 없지만 1980년대부터 종합상사들이 세계 각지에 곡물 저장소와 터미널, 해외 생산기지를 확보하고 곡물 유통에 나서 지금은 메이저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또 농민만 농지를 소유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 대신 기업도 농지 소유를 가능케 해 농업기업이 탄생했고, 농업 R&D 분야에도 투자를 쏟아붓는다.
물론 최근 국내 종합상사들이 곡물 유통에 관심을 보이고, STX가 워싱턴주에 곡물터미널을 막 확보하는 등 변화 조짐은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농정은 여전히 쌀 중심이고, 농민 보호가 우선이다. 세계 식량산업은 ‘전략산업’으로 달려가는데, 우리는 여전히 농업에 대한 전략적·기술적 투자는 미흡하고, 1차 산업에 머무른다.
이제 위기의 문턱이다. 식량산업을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됐다. 식량 생산성 향상 기술 확보, 메이저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종자 개발, 효율적인 농산물 생산구조 확립, 농업의 산업화, 글로벌 농산물 유통기업 육성 등 ‘식량산업 고도화’를 위해 투자해야 한다. 필요하면 ‘경자유전’ 원칙도 허물 수 있어야 한다. 왜 직업이 농업인 농민 회사원은 안 되나?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지 못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양선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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