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바꿀 만큼 강렬한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때는 몰랐어도 그 기억이 뇌리에 남아 인생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도 있다. 그런 순간은 주변 사람들을 통해 찾아오기도 한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왔다. 한국에서 만난 친구 벤을 통해서다. 올해 마흔이 된 벤은 얼마 전 종합건강검진을 받기로 했다. 한국에선 대부분의 직장에서 으레 종합검진을 받지만 미국에선 흔하지 않은 풍경이다. 벤은 ‘마흔 살이 됐으니 검진 한번 받아볼까’라는 마음으로 병원에 갔다고 한다.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보고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다.
그런데 결과는 뜻밖이었다. 그의 위와 신장에 악성 종양이 하나씩 발견된 데다 백혈구 수치도 높게 나왔다.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벤은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친구다. 하이킹, 달리기, 자전거 타기 그리고 스카이다이빙까지 한다. 건강 상태도 좋고, 활달하고 무엇보다 마흔 살밖에 되질 않았다. 벤과 악성 종양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적어도 우린 그렇게 생각했다.
검진 결과를 듣자마자 벤은 미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고 가족과 시간을 함께 보내기로 했다. 우리는 그가 떠나기 전날 조촐한 이별 파티를 했다. 파티 분위기가 조용하고 어색한 데다 착 가라앉았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벤의 미래는 불확실하고 불안했지만 벤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했다. 우린 모두 왁자지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느 파티처럼 서로 즐겁게 얘기하고, 웃고, 흥겨운 음악을 듣고 멋진 친구들과 시간을 함께 보냈다. 아마 벤을 이렇게 보는 건 마지막일 터였다. 하지만 벤은 악성 종양 때문에 친구들과의 시간을 우울하게 망치지 않았다.
그의 낙관주의적인 태도는 감동을 줬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돼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언제든 끝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린 왜 주어진 매 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걸까? 매 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1년 뒤 아니면 1시간 뒤 혹은 1분 뒤에도 우리 인생은 끝날 수 있다.
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면서, 또 인생을 잘 사는 태도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 머릿속엔 자꾸 내 젊은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술을 절대 안 드셨다. 종교적인 이유 때문도 아니고 알레르기 반응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아버지께 그 이유를 한 번 여쭤본 적이 있었다. 그의 답은 이랬다. “인생은 소중하니까.”
아버지의 이 말씀은 내 마음에 오래도록 맴돌았다. 아버진 인생의 소중함을 알고 계셨다. 인생의 가치를 알고 계셨다. 벤도 그렇듯이.
인생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됐다는 게 큰 행운처럼 느껴진다. 매일 난 내 인생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느끼고,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넘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름다운 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은 배가된다.
머릿속엔 아버지 말씀이 맴돈다. 인생은 소중하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 친구들과 함께 남산을 뛴다. 점심 시간엔 요가를 한다. 저녁엔 안락한 부엌에서 남자친구를 위해 건강식을 요리한다. 술은 절제해서 일정량만 마신다. 친구들과 가족들을 볼 때마다 내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한다. 내가 인생에 대해 더 조심스러운 태도를 갖고 더 감사한 마음을 가질수록 인생은 내게 더 소중한 시간을 선사한다.
우린 매일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를 격려해 주고 행복해 하는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 우리의 꿈을 실현해야 한다. 단 1초라도 화를 내거나 비관주의에 빠져 인생을 낭비해선 안 된다. 우린 살아 있다. 그게 전부다.
독자 여러분도 벤을 생각해 주시고 벤을 위해 기도해 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여러분의 소중한 인생, 마음껏 즐기시기를.
미셸 판스워스 신한은행 외국인고객 관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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