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독도에 간다는 얘길 처음 들은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드디어 우리 대통령이 우리 땅 독도에 가는구나! 얼마 전까지 도쿄 특파원으로 일본이 지속적이고 의도적으로 역사 왜곡과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화해 온 것을 지켜본 터라 통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시원한 가슴과는 달리 머릿속에선 아쉬움이 컸다. 정치는 가슴으로 할 수 있지만 국익이 최우선인 외교는 다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앞장서서 미국과 얼굴 붉히고 일본과 ‘외교 전쟁’을 벌이고 동북아균형자론을 역설했던 2005년, 당시 외교통상부 출입기자로서 느꼈던 감정과 비슷했다. 그때도 많은 사람이 가슴 시원함을 느꼈지만 결국 남은 게 뭐 있나.
대통령은 독도 방문 배경을 설명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 조금도 반성과 해결 의지를 안 보이는 일본 정부를 탓했다. 동감이다. 일본은 석고대죄해도 모자란다. 그러나 정말 나무라고 싶었다면 상대를 부끄럽게 만들었어야 했다. 기자 초년병 시절 선배에게 들은 얘기가 있다. 비판기사를 쓸 땐 상대를 부끄럽게 만들어야지 화나게 해선 안 된다고. 외교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독도에 다녀온 뒤 대통령이 쏟아 낸 일련의 발언에선 3년 전부터 준비해 왔다는 전략적 치밀함을 찾기 어려웠다.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영향력도 이전 같지 않다.” “일왕이 또 ‘통석의 염’ 뭐가 어쩌고 이런 단어 하나 찾아서 올 거면 올 필요 없다.” 백번 옳은 말이다. 그러나 옳은 말이라고 아무 때나 여과 없이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외교에선 더욱 그렇다.
외교는 상대가 있고,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근본적 잘못이 일본에 있다 하더라도 잔뜩 화가 난 상대에게 제2, 제3의 말 펀치를 날릴 필요까지 있었나 싶다. 특히 일왕 관련 발언은 일본인 대부분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사족(蛇足)이었다.
대통령은 최고의 외교관인 동시에 최후의 외교관이다. 비장의 무기는 품속에서 슬쩍 꺼내는 시늉만으로 최고의 힘을 발휘한다. 써 버리면 더는 비장의 무기가 아니다. 독도 문제에선 누가 뭐래도 ‘현재 소유하고 있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먼발치서 안달하는 일본으로선 ‘말’로 도발하는 게 고작이다. 우리는 그때마다 상응하는 ‘행동’으로 응징하면 될 일이다. 솔직히 영토 문제는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상황 관리가 중요한 이유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수수깡 베겠다고 보검을 휘두른 감이 없지 않다. 이제 방파제나 해양과학기지 등 독도 문제에서 일본을 압박할 수 있는 외교 카드가 예전 같은 약효를 발휘할지 의문이다.
정 가고 싶었다면 지지율 높고 힘이 있던 임기 초에 갈 일이었다. 그러면 한일 관계가 껄끄러워지더라도 시간을 갖고 소신 있게 풀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레임덕을 맞은 임기 말에 하니 여기저기서 국내 정치용이란 오해를 부르고 다음 정부에 짐을 떠넘겼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한일 관계에서 우리는 역사적 채권자와 같다. 국력은 아직 일본에 비할 바 아니지만 우리나라 대사가 주재국 총리나 장관을 수시로 만나는 강대국은 일본밖에 없다. 총리급 거물이 주미대사로 가도 미국 대통령은커녕 국무장관도 마음대로 못 만난다. 그게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이다. 일본에선 그래도 ‘한국이니까…’라는 뭔가 특별함이 있다. 최근 일본 내 친한파 사이에선 그런 특별 관계가 보통 관계로 바뀌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고 한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경제력만으로는 잴 수 없는 도덕적 역사적 우위를 우리 스스로 약화시킬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윤종구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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