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미래 밝지 않아… 특허 소송, 혁신의 계기 삼는다면 우리에게 약”
한국 정보통신 분야 기술의 산실인 국책연구기관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을 이끌고 있는 김흥남 원장. 김 원장은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사무소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 “이번 삼성-애플 간 특허 소송을 지적재산권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혁신의 계기로 삼는다면 한국 정보통신산업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김 원장은 지난달 24일(현지 시간) 미국 법원의 애플 특허 승소 판결과 관련해 “한마디로 이제는 기계를 만들어내는 시대가 아니라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시대가 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먼저 양국 법원이 각각 내린 피해배상 액수에 주목했다.
“한국과 미국에서 잇따라 판결이 내려졌는데 특허침해에 따른 배상판결 액수가 한국법원은 애플이 침해한 2건에 4000만 원이고, 미국 법원은 삼성이 침해한 6건에 1조2000억 원이다. 이 말은 결국 두 나라가 지적재산권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지적재산권 침해에 미국보다 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일을 단지 누가 이기고 졌느냐 하는 법정싸움의 관점이 아니라 지적재산권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그러면서 “이번 미국 소송에서 삼성이 패한 특허들이 대부분 디자인에 집중됐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애플은 바운스 백(화면을 맨 아래까지 내리면 튕겨 화면의 끝을 알려주는 것), 멀티 터치(두 손가락으로 화면을 확대하거나 축소하는 기능), 멀티 택(글자를 터치하면 커졌다 작아지는 기능) 등의 기능을 삼성이 침해했다고 주장한 반면 삼성이 침해당했다고 한 특허는 3세대 이동통신 특허, e메일 전송 기술 같은 기술 분야다. 우리는 흔히 특허라고 하면 기술적인 것만 생각하는데 미국에선 디자인, 유저 인터페이스(컴퓨터를 더 쉽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명령어 또는 기법), 트레이드 드레스(상품 외관 혹은 느낌까지 포괄하는 지적재산권)처럼 분야가 다양하다. 특허를 적용하는 범위가 넓은 데다 이에 대한 가치를 확실히 인정해주니 판결 액수도 천문학적인 단위가 나온 것이다.”
―미국 배심원단의 전문성, 공평성도 논란이 됐다.
“우리 쪽은 기술적인 것을 이해시켜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더 어려웠다고 본다. 디자인 분야는 모양만 보고도 쉽게 비교하고 판단할 수 있잖은가.”
―이번 판결에서 ‘트레이드 드레스’ 특허가 화제가 됐다.
“디자인을 종합적으로 봤을 때 느껴지는 전체적인 모습이나 제품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모습이다. 그 디자인만 생각하면 그 제품이 떠오르는, 디자인 정체성이라고나 할까. 예를 들어 코카콜라병 가운데에 잘록하게 들어간 선은 코카콜라에만 쓸 수 있다. 이걸 베끼면 미국에선 표절로 본다.”
―우리나라도 그런 특허가 있나.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다. 우리나라 특허 정의를 보면 ‘자연 과학을 이용해서 고도화된 새로운 아이디어’라고 되어 있다. ‘고도화된’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그만큼 엄격하게 특허 인정을 한다는 거다. 애플이 침해당했다고 주장하는 ‘모서리가 둥근 디자인’ 같은 것은 우리 문화에서는 (침해로) 인정받기 어렵다.”
김 원장은 이 대목에서 “기술에는 패스트(Fast) 테크놀로지와 슬로(Slow) 테크놀로지가 있는데 우리도 이제 슬로 쪽에 노력을 더 기울여 양쪽 기술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패스트 기술은 하드웨어, 메모리, 반도체처럼 발전 속도가 빠른 것들이다. 앞서 나가기도 쉽지만 추월당하기도 쉽다. 소프트웨어 분야는 슬로 기술이다. 개발도 더디지만 쉽게 추월당하지 않는다. 명품 가방, 신발 시장도 슬로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디자인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애플의 경우 스마트폰 기기 제작 같은 패스트 분야는 외주(아웃소싱)를 주었지만 소프트웨어나 디자인 개발 같은 슬로 분야는 절대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스티브 잡스는 어떻게 그런 전략을 쓸 생각을 했을까.
“그는 개발자인 동시에 디자이너 쪽에 가깝다. 젊었을 때 동양의 서예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아닌가. 또 잡스는 인류가 글자보다 그림을 먼저 썼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래서 ‘파일을 내려받는 중입니다’라는 글자를 보여주기보다 모래시계를 화면에 띄운 거다. 사람들이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걸 좋아한다는 것을 확신했던 그는 자신의 인문학적 철학에 디자인 기술을 섞어 컴퓨터에 구현했다. 돈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디자인을 통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우리 IT산업의 미래로 화제를 돌려보자. (김 원장은 평소) 글로벌 IT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모바일 플랫폼 개발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해온 걸로 알고 있다. 우선 ‘플랫폼’이란 개념부터 설명해 달라.
“컴퓨터를 쓸 수 있게 해주는 운영체제(OS·operating system) 프로그램이다. 자동차로 말하면 ‘엔진’ 기능을 하는 핵심 기술이다. 소프트웨어 형태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엔진’이라고 할까.”
그의 말이 이어졌다.
“IT 생태계에는 네 가지 구성 요소가 있다. 맨 밑이 통신망(네트워크 인프라)이고, 그 위가 컴퓨터 휴대전화 TV 자동차 같은 기기(하드웨어 디바이스), 그 위가 소프트웨어, 마지막이 게임 같은 콘텐츠 서비스다. 이 4개가 균형 있게 돌아가야 건강한 IT 생태계가 만들어진다. 우리는 통신망, 기기 제조 분야에서는 세계 1등이고 콘텐츠 분야도 나름대로 경쟁력이 있는데 소프트웨어 OS 개발, 즉 플랫폼 경쟁력이 거의 제로다. 플랫폼은 기기와 콘텐츠를 연결하는 접착제 같은 건데 이게 없다보니 4개 분야가 다 떨어져 각개약진하고 있다.”
그는 애플의 예를 들었다.
“애플은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아이TV, 아이카(car)까지 i시리즈 전략을 세우고 있다. 기기는 모두 다르더라도 같은 플랫폼으로 소비자들이 편하게 사용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휴대전화, TV라는 기계 자체를 잘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는 선두가 되기 어렵다. 그 안에 어떤 소프트웨어를 넣어 얼마나 더 소비자들이 쉽고 재미있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즉 유저 인터페이스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결국 미래 IT는 플랫폼 싸움이다.”
―애플의 미래를 어떻게 보나.
“의견들이 다양하지만 나는 애플의 OS가 클로즈드(closed·폐쇄) 플랫폼이라는 점에서 회의적으로 본다. 최근 첨단 기술의 역사를 돌아보면 기술을 폐쇄적으로 운영할 것이냐, 개방할 것이냐의 싸움에서 승리는 ‘개방’ 쪽이었다. 대표적인 게 비디오 테이프 시장에서 소니의 베타 방식과 VHS의 싸움이었다. 베타 방식은 한때 시장점유율이 98%까지 간 적이 있었다. 다른 회사들이 소니에 로열티를 줄 테니 기술을 함께 쓰자고 했지만, 소니는 거절했다. 화가 난 가전 회사들이 연합해 VHS 방식을 만들었고 결국 소니가 백기를 들었다.”
김 원장은 “두 번째가 애플의 매킨토시와 IBM 간 PC 싸움이었는데 애플이 최초로 PC를 내놓은 상황에서 후발 주자인 IBM은 설계도를 공개하는 전략을 써 시장 판도를 뒤집었다”며 ”결국 (기술)개방전략을 택한 IBM이 이겼다”고 했다.
―어떻든 이번 미국 판결로 삼성은 큰 타격을 입었다. 한국 IT산업의 앞날도 어두운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우리의 경쟁력은 우리나라만큼 IT 환경이 좋은 나라가 없다는 점이다. 한국처럼 기기 보급 속도가 빠르고 인터넷이 잘 터지는 나라가 없다. 미국은 지하에만 내려가도 스마트폰을 쓸 수가 없다. 한국은 무려 3000만 명이 스마트폰을 쓰는 상황에서 최고 통신 품질을 바탕으로 정보 검색, 정보 공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다양한 기술이 나올 수 있는 토대가 탄탄하다. 오죽했으면 구글의 슈미트 회장이 안드로이드 보급의 일등공신이 한국 소비자라며 감사의 말까지 했겠나.”
그의 낙관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벤처 열풍이 예전같지 못한 상황이 떠올랐다. 식어버린 벤처 열풍에 대한 견해를 묻자 김 원장은 “무엇보다 실패를 보는 눈을 바꿔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국에서는 실패 경험이 있는 벤처라면 오히려 노하우가 쌓였을 것이라고 여겨 금융 지원 등 정책적으로 더 밀어준다. 실패자들이라 해도 계속 실리콘밸리 주변을 돌아다니며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하는 문화가 있지만 우리는 ‘벤처 하다 실패하면 인생 낙오자가 된다’는 두려움이 강하다.”
그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자는 ‘오늘의 애플을 만든 것은 스티브 잡스 혼자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 원장이 말한 실패와 도전을 인정해주는 문화를 바탕으로 한 벤처 캐피털과 정부의 지원, 여기에 실리콘밸리 인재의 산실인 스탠퍼드대 등 산학연(産學硏) 협력체제, 이 모든 것이 합쳐져 결국 애플과 스티브 잡스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김 원장은 “이번 삼성과 애플의 특허 소송 사건을 삼성이나 한국 IT의 위기로 볼 것이 아니라 한국 첨단산업의 갈 길을 연구하는 연구원의 수장으로서 발전을 위한 도약의 계기로 삼겠다”고 했다. 삼성도 이미 “뼈아픈 자기 혁신의 계기로 삼겠다”고 밝힌 바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번 일은 IT 강국 코리아에 독(毒)이 아니라 약(藥)이 될 것이다.
::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Electronics and Telecommunications Research Institute) ::
1976년 설립된 국내 최대 전자정보통신 연구기관. 전자교환기(TDX) 초고집적 반도체(DRAM) 디지털이동통신시스템(CDMA) ATM교환기, 지상파 DMB, 와이브로(WiBro·고속 휴대인터넷), 3.6Gbps 4세대 무선전송시스템(NoLA) 등을 개발했다. 최근에는 세계 최고수준의 4세대 이동통신시스템 ‘LTE-Advanced’, ‘휴대형 한-영 자동통역기술’, 낮에도 선명한 화질을 보여주는 ‘투과도 조절 투명 디스플레이 기술’, 세계 최초 ‘스마트 선박 기술’을 개발하는 등 IT 강국 코리아의 ‘기술 젖줄’ 역할을 해왔다.
2011년 발간한 연구개발 성과 보고서에 따르면 35년간 총 169조8095억 원의 경제적 효과를 창출했으며 연구원 1인당 논문 건수, 1인당 등록 특허 건수에서 세계 1위를 기록했다.
김흥남 원장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전산학 박사학위를 받고 1998년 전자통신연구원에 합류해 혁신위원장, 임베디드 소프트웨어 연구단장, 기획본부장을 지냈으며 2009년부터 원장을 맡고 있다.
허문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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