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는 괴물이다. 평소엔 숨어 있어 잘 모른다. 모습을 나타내면 상상 밖의 힘을 발휘한다. 잘 다스리면 폭발적 동력이 되지만, 고삐를 놓쳤을 경우 엄청난 희생을 초래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독일 민족주의를 보면 괴물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1807년 독일 철학자 피히테의 대중 강연 ‘독일 국민에게 고함’은 민족주의를 공동체 발전동력으로 승화시킨 성공사례다. 프랑스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을 점령하자 독일인들은 절망한다. 피히테의 표현에 따르면 “죽은 몸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병 걸린 둥지(몸)로 돌아갈 수 없을까 하고 헛되이 애쓰는 망령”과 같았다.
그런 독일인에게 피히테는 민족주의를 외쳤다. “여러분이 결연히 분기한다면, 독일인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기념을 약속하는 한 시대가 꽃피어 오르는 것을 볼 것이며, 독일의 이름이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영광스러운 민족으로 드높여지는 것을 볼 것”이라고 외쳤다. 결연히 분기하는 방법으로 교육혁명을 강조했다. 국민교육을 통해 (패전의 원인인) 이기심을 타파하자는 것이다.
당시 유럽은 근대적 의미의 민족주의와 국민국가가 막 형성되던 시기였다. 프랑스에 짓밟힌 독일은 게르만 민족주의라는 동력에 불을 지펴 통일과 국민국가 형성의 길로 나섰다. 그 결과 64년 만에 프랑스와의 전쟁에 승리해 베르사유 궁전에서 ‘제2 제국’을 선포함으로써 통일의 꿈을 이루었다.
반면 히틀러의 나치즘은 최악의 민족주의로 꼽힌다. 나치즘은 독일 민족주의에 인종주의까지 가미된 파시즘이다. 우수한 독일 민족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독일인의 혈통과 명예를 보호하기 위한 법’을 만들었다. 유대인과 독일인의 결혼을 금지하고, 모든 신랑·신부는 혈통에 관한 증빙서류를 제출하게 했다. 불순한 혈통에 대한 대청소가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다. 열등민족에 대한 지배는 곧 2차 대전이었다. 주목할 대목은 히틀러 역시 민주적 절차로 집권했다는 점이다. 독일 국민은 정치적 선동에 휩쓸려 민족주의란 괴물의 고삐를 놓쳐버렸음을 당시엔 알지 못했다.
이런 아픈 역사가 있기에 서구에선 ‘민족주의’라고 하면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민족주의를 뜻하는 쇼비니즘(chauvinism) 혹은 징고이즘(jingoism)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배타적 민족주의와 전쟁에 대한 공포심이 널리 퍼져 있기에 유럽통합이란 국경 허물기가 가능했다. 21세기 유럽에선 적어도 국가 차원의 민족주의는 사라졌다.
반면 최근 민족주의의 화약고로 떠오르고 있는 지역이 동북아시아다. 우리나라와 중국, 그리고 일본. 세 나라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를 지니고 있다.
첫째, 세 나라는 유구한 민족적 정체성을 자랑한다. 세 나라는 각각의 영토에서 수천 년의 민족공동체를 꾸려왔다.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라 자부하는 중국의 중화민족주의는 긴 말이 필요 없다. 일본은 더 독특하다. 만세일손(萬世一孫)의 천황(일왕)이 다스리는 신국(神國·신의 나라)이라고 생각한다. 민족주의의 토양은 깊고 풍성하다.
둘째, 결정적으로 세 나라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직접 가해·피해 당사자로서 아직 생생한 기억을 지닌 채 국경을 맞대고 있다. 작은 일에도 아픈 기억에 민족주의가 되살아난다. 특히 국경 문제는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이라 더더욱 민족감정을 자극한다. 중국과 한국에선 민족주의가 독립운동의 이념이었기에 지금도 신성하다.
셋째, 동북아 지역은 패권이동의 변혁기다. 일본이 가라앉고 중국이 아편전쟁 이후 100년 만에 굴기(<5D1B>起)하면서 힘의 이동이 급속히 이뤄지고 있기에 마찰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일본이 상실감과 중국의 자존심은 화력 좋은 불쏘시개다.
넷째, 2012년 현시점에서 세 나라는 모두 권력 이양기다. 이명박(MB)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잇따른 발언은 레임덕 대통령의 자구책으로 풀이된다. 일본 노다 총리 역시 민주당 정권의 명운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외교적으로 유약하다”는 비난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10년 주기의 지도부 교체를 눈앞에 둔 중국의 경우 더 민감하다. 과거와 달리 대중적 지지를 의식하지 않고는 권좌에 오르기도, 유지하기도 어렵게 됐다. 중국 네티즌의 민족주의 열기는 폭발 직전이다. 중국은 이런 열기를 적절히 외부로 발산함으로써 내부 단속을 꾀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최악은 ‘정치인에 의한 민족주의 자극’이다. 그런 점에서 MB의 갑작스러운 대일 강경책은 ‘맞는 얘기’지만 ‘바람직하진 않은 행동’이었다. 민족주의라는 괴물의 고삐를 놓치지 않으려면 냉정해야 한다.
오병상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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