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관계로 강남에 갔다가, 나간 김에 인근의 한 미용실에 들렀다. 머리를 자르는 동안 헤어디자이너와 이런 저런 대화가 오가기 마련인데, 대화가 막힌 시점에서 미용실의 이름 뜻을 물었다. 발음도 못하겠는, 낯선 단어였던 때문이다. 이름은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였다. 사각사각 가위소리 뒤로, 요즘 상류문화는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라는 설명이 따라왔다. 최근 주변에 새로 생긴 헤어숍 이름은 라틴어라며, 발 빠른 경쟁자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미용실, 미장원이라고 부르면 왠지 격하시킨 것처럼 여겨지는 헤어숍들은 '코지'풍이든 '모던'풍이든 모두 '럭셔리'를 지향한다. 특히 강남으로 갈수록 그런 경향은 뚜렷해져서, 건물이나 실내장식의 위용과 세련됨이 놀라울 정도다. 그런데 이렇게 고급을 표방하고 유행에 민감한데도, 내가 엄마 따라 단발머리를 끊으러 가던 시절부터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실내에 비치된 여성지들이다.
왜 미용실에는 여성지들만 비치되어 있을까. 두툼한 여성지들 사이에 흔히 '럭셔리 잡지'라고 부르는 무가지들이 추가된 것이 변화라면 변화다. 그럴 때면 헤어숍들의 이른 바 럭셔리 콘셉트라는 게 얼마나 상업적이며 외연에 치우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스스로는 헤어디자이너, 메이크업 아티스트 등의 이름으로 '미용'을 '예술'로 격상시킨 지 오랜데, 고객은 여전히 여성지만 읽는 주부 취급을 하는 것은 아닐까. 머리를 하는 동안에는 생각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라는 것일까. 휴식의 방법은 여성지들 안에만 있는 것일까. 머리를 말고 대기하는 그 길고 지루한 시간에, 선택의 여지없이 묵직한 책들을 집어들 때면 거의 취향을 강요 받는 느낌이다. 물론 여성지의 장점도 있다. 다만 다양성의 존중 차원에서 다른 책들의 비치는 어떤가, 권해보는 것이다.
얼마 전 <영국은 주말에 오픈한다>라는 책을 출간한 지인으로부터 영국 브라이튼에 있는 한 미용실이 벽면마다 현대사진가의 사진을 걸어 전시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사실 미용실은 사진이든 그림이든, 전시를 하기 좋은 공간이다. '이발소 그림'이라는 말의 다른 측면을 살피면 이발소가 그림이 걸려 공유되는 공간이라는 뜻이 아닌가. (알다시피 요즘 헤어숍들은 남성고객들을 위한 '이발소' 역할도 한다)
전시까지 아니어도 괜찮다. 활자가 빼곡한 책들이야 어렵겠지만, 시각적인 책들은 얼마든지 비치가 가능하다. 화집과 사진집도 좋고, 요즘은 어른들을 위해 나온 수준 높은 동화들도 많다. 생활인으로서의 부분 외에도 지니고 있을 고객들의 다른 측면, 혹은 감성에 접근해보는 것이다.
류가헌이 사진위주 전시장이니, 여기서는 사진집 이야기만 하기로 하자. 사진집은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시각언어다. 재빠르게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을 가능하게 한다. 금세 그 이미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집안이든, 공공장소에서든 책 한 권에서 이처럼 깊은 층위의 감동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사진집만한 것도 없다.
또한, 오리지널 전시작이 아니어도 사진집 한 권에는 감동이 고스란하다. 전문 사진가가 찍은 사진이 아닌데도 우리 사진사에 회자되는 사진집 <윤미네 집>은, 한 아버지가 딸이 태어나서 시집가기까지를 기록한 책으로, 일반인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운 책이다. 사진집이 크고 무겁고 가격이 비싸다고 반박한다면, 열화당사진문고를 권할 수도 있다. 1만 원대의 가격, 손바닥만 한 크기의 책 안에 한 사진가의 작품세계가 압축되어 있어 감동의 수위가 높다.
헤어숍에서 막 머리를 하고 온 주부이면서, 사진집을 출간하는 갤러리 관장으로서 어쩌면 새로운 '판로개척'을 모색하며 이 글을 쓰는 지도 모르겠다. 아무려나, 다음 번엔 어느 헤어숍에서 건 사진집 하나 만나게 되는 날을 꿈꾸며.
박미경 류가헌 갤러리 팀장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8/h2012082021035512176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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