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대략 천년 전 그해 한 소녀가 종소리가 되어 죽었다. 오래도록 소녀가 녹아들어가 종소리가 더 거룩하고 멀리 들린다고들 믿었다. 어떤 고고학자들은 그 종소리를 해부하고자 했다. 긴 고민 끝에 그들은 쇠에 인 성분이 없는 것으로 봐 에밀레종 이야기는 사실은 아닐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굳이 소리의 성분을 알아야만 했던 것일까. 새의 노래가 궁금하다고 가슴을 열어볼 필요는 없다. 새가 죽을 따름이다. 설화와 예술을 화학적으로 이해하고 확인코자 한 합리적 무지다. 달에 가서 계수나무를 찾는 건 과학이 아니라 작가의 몫이다. 암스트롱 등 간 사람은 볼 수 없고 가지 않은 자는 한가위 달밤에 마당에 선 채로 옥토끼를 얻을 수 있다.
이 설화의 핵심 구조는 종을 만드는 과정의 지난함과 당대 지배종교의 민중갈취에 대해 입을 통해 형상화된 기록이 재불교화한 전승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소녀의 집안은 바칠 게 없었다. 가난한 자는 종교적 압박과 그에 부가되는 죄의식에 상응하는 어떤 것을 내놓아야 할까. 인신공희, 윤회관, 여성차별, 어린아이가 제물로 순결하다고 여기는 태도 등 일반적 이해가 이를 뒷받침한다. 청동으로 빚은 시칠리아황소 뱃속에서 한 사람이 불에 타면서 소리를 질렀다면 에밀레종에는 그 시대 민중이 겪어야 했던 집단고통이 반영되어 있다고 봐도 좋다. 설화에서 소녀는 종 속으로 사라졌다. 따라서 에밀레종 소리는 민중의 울음이자 비명이다.
에밀레야. 소리 내어 읽어보라. 가슴이 여전히 울린다면 그대는 감성적 공범이다. 공범의식이 높을수록 소리는 애잔하고 멀리 울려 퍼지리라. 이는 귀신이 집단죄의식의 산물인 것과 일치한다. 귀신이 죽어버린 사회는 죄의식조차 사망해버린 사회다. 자본주의는 귀신을 살해하고 스스로 괴물이 되었다. 죽음에 울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사회는 이미 죽은 사회다. 그런 점에서 에밀레종 소리는 그치지 않고 오늘 일어나는 죽음을 고발한다. 과연 큰 종이다.
신라 때는 소녀를 섞어야 종이 울렸다. 에밀레야. 21세기 한국에서는 소녀를 섞어야 반도체가 작동한다. 그날 이후 모든 반도체는 죽음을 반사시킨다. 소녀들의 죽음을 첨가하지 않으면 전도율이 배가되지 않는 죽음의 집적회로, 순정성분 목숨들이 녹아들어야 시스템이 잘 작동하는 무균공장의 창백한 자본주의 설화가 이 순간 에밀레 설화를 대체하고 있다. 목숨을 바치는 가난한 윤회는 고대와 문명사회 간극을 일시에 메우고 있다. 에밀레종처럼 반도체에도 인 성분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비극을 더 투명하게 조립시켜내고 있는 대목이 바로 여기다.
한국 사회는 지금 죽음을 외면하는 죽음으로 죽어가고 있다. 자본의 대리로 권력이 청부 집행한 용산은 중산층이 철저히 얼굴을 돌린 죽음이다. 한국인 생존지문이었던 사글세와 사당동을 지우고자 뿌리친 자리에 노트르담 드 용산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노동과 자본이 나란히 가는 듯한 쌍차는 이름이 좋았달 뿐 스물둘 죽음에 눈감은 일상에는 대중자살이 똬리를 틀고 있다. 10대~30대 사망 원인 첫째는 모조리 자살이다. 성장기의 집단자살을 포함한 이 거대한 대중자살은 탐욕과 침묵의 공모에 의한 타살이다.
이 가을 서대문 옥마당 사형장 가는 길 미루나무가 높은 건 하루아침에 여덟 청춘이 목 매달린 터다. 선거철이 되자 이 죽음을 놓고 사과라는 말이 유통되고 있다. 인혁당의 목숨은 여덟으로써 하나다. 두번째 판결도 재심도 법률적 신원회복일 따름 무엇도 되돌리지는 못한다. 억지로 토해내는 사과는 모욕을 두껍게 할 뿐 이미 거짓이다. 에밀레야, 추석날을 울리고 가는 종소리에 귀가 아프구나. 이 사회가 숱한 죽음을 버리고 능멸한 죄 깊은 까닭이다. 오늘밤 그 미루나무는 더 높겠다.
서해성 소설가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538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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