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3. 12:32

판사도 인간이다. 그들도 성질을 못 이겨 법정에서 막말하고 반말하며 졸기도 한다. 2010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상담 사례집’에는 39세 판사가 69세 피고에게 “버릇없다”라고 말한 예가 나온다. 10월 23일 법률소비자연맹이 펴낸 ‘대한민국 법원 법정 백서’에 따르면 조는 판사, 재판에 지각하는 판사가 적지 않다. 한국뿐 아니다.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세계 여러 나라 판사들도 마찬가지다.

막말하고 졸고 지각하는 판사 많아

그러나 판사도 인간이라고 해서 법정에서의 부적절한 행동이 관용될 수는 없다. 사법부는 독립성이 생명이라는 말이 판사들 마음대로 행동하는 무제한의 자유를 준다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사법부의 독립은 국민의 신뢰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판사들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높은 도덕성을 가져야 한다. 사법부의 독립은 사법부가 져야 할 책임이 동반할 때 균형을 이룬다.



어느 나라든 ‘불량 법관’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미국, 영국, 캐나다 등의 사법부 태도와 방식은 한국과 참으로 다르다.

미국 등이 판사들의 태도를 개선하기 위해 택한 방식의 하나는 법정 내 언론의 사진 및 텔레비전 카메라 취재 허용이다. 법정에서 독재자, 폭군 노릇을 하거나 잠에 취한 판사 들은 카메라를 통해 국민에게 알려질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기자들이 쓰는 기사로 묘사할 수 없는 판사들의 무례하고 무성의한 모습을 카메라는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2월 미국 텍사스 주 교육법원 래리 크레독 판사가 법정에서 조는 모습이 텔레비전 뉴스에 나갔다. 크레독 판사는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자폐아 부모가 법원에 제기한 공립고교의 교육 방식 문제에 관해 사흘간의 청문회를 주재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졸았다. 이에 분노한 부모는 그를 깨우기 위해 헛기침을 하고 물병을 바닥에 떨어뜨리기까지 했지만 소용없었다. 참다 못해 휴대폰 카메라로 조는 크레독 판사를 촬영해 언론에 제공한 것이다. 여론은 들끓었고 크레독 판사는 결국 사임했다.

비록 언론의 카메라가 직접 촬영한 것은 아니었지만 카메라와 언론이 판사의 이상한 행동에 대한 훌륭한 교정 수단임을 보여 준 경우다. 미국 제9순회법원 알렉스 코진스키 수석판사도 “(카메라 때문에) 판사들은 졸음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고, 자신들의 결정을 설명하는 데 좀 더 신중해질 수 있으며, 자의적인 결정이나 지나치게 느슨한 재판 운영을 피할 수 있다”고 했다.

미국은 50개 주 모두가 전면 또는 일부 법원에 대해 카메라 진입을 허용하고 있다. 연방법원만은 예외다.

美선 카메라 허용후 공정성 높아져

미국이 법정 내 카메라를 허용한 것은 판사들의 태도를 바로잡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다. 그리고 법원의 투명성과 재판의 공정성을 높여 법원과 법관의 권위와 신뢰를 높이기 위해서다.

미국 법정에 언론 카메라가 허용되는 과정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90여 년 동안 수많은 논의와 연구, 법정 모의실험을 통한 결과다. 1975년 플로리다 주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1년 동안의 모의실험을 한 뒤 카메라가 재판을 방해하지도, 판사나 피고 등 누구에게도 심리적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고 법정 내 카메라 진입을 허용했다. 이후 전국으로 퍼졌다.

영국은 1923년부터 법정에서 카메라 촬영을 금지해 왔지만, 2011년 9월 영국 정부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대법원을 제외한 모든 법원에서 촬영 및 방송을 허가한다고 발표했다. 영국 역시 치열한 논의와 연구 끝에 2004년 첫 시험 재판을 실시했다. 뉴질랜드, 호주, 캐나다, 스코틀랜드, 노르웨이, 스페인 등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제한된 형태로 카메라의 법정 진입을 허용하고 있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은 시험 연구를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사법부는 언론 카메라의 법정 취재를 사실상 철저하게 봉쇄하고 있다. 실제 재판 과정이 아닌, 판사나 피고가 법정에 들어서는 모습만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촬영토록 할 뿐이다. 국민은 12·12와 5·18사건 등 역사적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텔레비전으로 지켜볼 수 없었다. 생생한 역사의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1973년 만들어진 법원조직법 내 촬영 등에 관한 조항은 40여 년간 요지부동이다. 다른 나라 법조계는 100년 가까이 숱한 논의와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한국은 사법부 차원에서 연구와 논의를 전혀 하지 않았다. 미디어 기술 발전 등 시대 변화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와 미국 등의 결정적 차이는 카메라 허용 여부나 정도의 차가 아니다. 논의와 연구가 있고 없음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사법부는 왜 법정 촬영 및 방송을 그토록 완강하게 반대하는가? 사법부는 그 정당한 명분과 치밀한 법리를 국민에게 제시해야 한다. 그것은 언론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폐쇄적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한국의 법관들은 언론의 카메라 취재 허용은커녕, 그것을 언급하는 것조차 꺼리고 있다.

카메라 문제뿐 아니다. 현재 한국의 법관들 중에는 블로그나 트위터 같은 첨단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활용해 개인의 정치 견해와 주장, 재판 내용을 밝히기도 했다. 자신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있으며, 소셜 미디어를 통해 방어하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면서 말이다.

국민의 알권리 위한 최소한의 예의

그러나 미국, 영국, 호주 등의 법원과는 달리 한국 기자들은 법정에서 블로그나 트위터를 이용할 수 없다. 휴대전화, 노트북 등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디지털 강국이라 자부하는 한국의 언론은 법정 취재에 관한 한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판사들은 법정 바깥에서 자신들의 첨단 커뮤니케이션 기기 사용을 정당화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기자들이 이를 활용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토의하고, 연구해야 한다. 자신의 표현의 자유를 위해서는 최신 기술을 사용하는 것에 관대하면서 그 기술이 언론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사용되는 것에는 주저하는 한국 판사들의 모습은 지극히 이중적이다.

법정에서 막말을 하는 안하무인 판사들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그런 판사들의 이기적 풍토 때문이 아닌가. 언론의 카메라가 법정 문턱을 넘어서게 함으로써 사법부는 한층 겸손하고 친근한 모습으로 국민에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손태규 단국대 교수

 

 

http://news.donga.com/3/all/20121101/50537375/1

 

 



 

Posted by 겟업
2013. 1. 3. 12:31

루브르 박물관에서 노(老)정치인의 은퇴 기념 연회가 열렸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앞에서다. 권력욕을 대변하는 이 화려한 그림을 둘러싼 잔치가 민망했던 정치가는 슬쩍 빠져나와 맨발로 박물관 곳곳을 순례한다. 종착지는 장 앙투안 와토의 로코코 회화 ‘키테라 섬의 순례’. 호리호리한 젊은이들이 사랑의 섬으로 여행 간다는 그림이다. 사랑의 설렘과 함께 그 사랑이 곧 식을 것이며 젊은이들은 언젠간 늙고 죽을 거라는 덧없음도 담겼다. 현실 정치에 찌든 노인은 잊었던 환상과 설렘의 순간을 떠올리며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최근 출간된 만화책 『매혹의 박물관』(크리스티앙 뒤리외, 열화당)의 내용이다. 루브르 만화총서 제7권으로 프랑스의 만화전문 출판사 퓌튀로폴리스와 루브르 공동기획이다. 루브르는 만화가들에게 이 박물관을 주제로 만화를 그려줄 것을 의뢰했고, 선정된 만화가들은 전시장뿐 아니라 방대한 수장고, 후미진 지하실 등 일반인이 접하기 어려운 박물관 구석구석을 마음껏 돌아보는 특권을 누렸다. 먼 미래의 탐사대가 빙하에 파묻힌 루브르의 명작을 발굴한다는 기상천외한 내용의 『빙하시대』(2005)를 시작으로 일곱 권의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이 세상에 나왔다.

 

만화 『매혹의 박물관』의 한 장면.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610x931㎝)을 배경으로 했다. [사진 열화당]

 


12년째 루브르를 이끌고 있는 앙리 루아레트 관장은 “이야기를 창조하는 작가와 예술작품 간에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그야말로 그들의 창조력과 상상력에 백지수표가 주어진 것”이라고 기획 취지를 밝혔다. 박물관은 천재들의 유산을 시공을 초월해 차곡차곡 쌓아둔 곳.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경이의 집합체이며, 필멸(必滅)의 인간이 불멸의 시간과 싸우는 곳이다. 과거엔 막 썼을 사금파리·요강단지 따위를 유리 진열장에 모셔두고 숭배하는 무균질의 공간이며, 오늘날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박제화된 장소이기도 하다. 총서는 그런 박물관이 첨단의 대중문화인 만화와 만나 젊어지고자 한 시도다. 루아레트 관장은 철학자 자크 데리다, 영화감독 피터 그리너웨이 등 다른 분야 대가들을 초빙해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다. 루브르가 죽은 유물들의 시체 안치소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화제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우리 만화가들이 그릴 박물관은 어떨까 혼자 상상해 본다. ‘이끼’의 윤태호라면 박물관을 진짜와 가짜, 돈과 권력의 암투가 벌어지는 공간으로 그릴 것 같다. ‘순정만화’의 강풀이라면 박물관을 박물관답게 만들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는 이들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보낼 듯하다. 우리 박물관엔 어디 이런 참신한 기획 없을까.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758372&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3. 1. 3. 12:28

한국, 票心 위한 복지의 '챔피언'… 그럴수록 국가는 위기 향해 돌진
1999년 슈뢰더·블레어 선언은 '복지는 개인 역량 키우게 도와야'
최근 늘어난 우리 사회 빈곤층, 지금 못 끌어올리면 미래 어두워

 

사회과학에는 딱히 법칙이랄 것이 없다. 자연과학의 숱한 법칙과 달리 사람이 사는 일은 공식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칙이라고 부를 만큼 예외 없는 원칙이 사회정책에도 하나 있다. '공적 혜택의 수혜자는 비용 부담자보다 세다'는 게 그것이다. 수혜자에게는 혜택이 중요하지만 비용은 전 국민이 같이 부담하기 때문에 희석된다. 그래서 찬성은 강하고 반대는 약하다. 그러니 정치인들은 새로운 혜택을 만들어 수혜자 그룹을 조성한 후 그들의 지지와 충성을 확보하는 데 골몰한다.

표심(票心) 때문에 복지를 늘리는 행태에 관한 한 우리나라 정치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2004년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노인 빈곤 대책이란 명목으로 전체 노인 대상의 기초연금을 제안하고 나섰다. 스웨덴·캐나다·핀란드·노르웨이·덴마크 등 기초연금을 운영했던 나라들이 1980년대 이후 포기한 마당에 정부 여당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라 살림을 볼모로 노인 표를 잡으면서 여당을 곤란하게 하기 위한 정치 공세였던 셈이다.

2006년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야당과 어렵게 타협한 결과가 노인 중 70%를 대상으로 한 기초노령연금이라고 털어놨다. 제도의 장기적 지향이나 후대의 막대한 부담은 안중에 없었고 선정 기준 등 제도 설계도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로 이 제도의 수급 가구 소득 분포는 어이없을 정도로 뒤틀려 있다. 빈곤 대책임에도 동거 자녀의 경제력을 고려하지 않으니 최상위 부유층 노인의 절반 이상이 수급자이다. 반면 정작 빈곤 노인들은 그런 제도가 있는지도 몰라서 수급률이 낮다. 기초노령연금의 월 10만원 급여가 절실한 이들이 사실상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 야당이 된 국회의원들은 법정 수급률을 1~2% 못 채웠다고 다그치니 담당 정부 부처는 소외된 노인을 배려하기보다 목표율에 근접하기 위해 애쓸 뿐이다.

결국은 사회가 지게 될 부담과 정책 합리성을 무시한 채 정치가들이 당장 선거에 이기는 것만 생각할 때 나라는 위기를 향해 돌진하게 된다. 그러다 막상 비상사태가 닥치면 궁여지책으로 정치가와 정치를 뒤로 물리고 전문가에게 나라를 위탁하기도 한다. 그리스 중앙은행장을 지낸 파파데모스는 작년에 그리스 총리로 덜컥 추대됐고, 경제학자인 몬티는 지금 이탈리아를 이끌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선거로 당선된 자만이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울하게도 싫든 좋든 나라를 이끄는 것은 정치가이다.

그런데 모든 정치가가 정치적 계산만 좇는 것은 아니다. 위기는 위대한 정치가와 인간 정신을 고양하는 새로운 비전을 낳기도 한다. 영국의 디즈레일리 총리와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사회가 극도로 분열됐을 때 자기가 소속된 보수당의 이념적 지향을 훌쩍 뛰어넘어 사회 통합의 비전을 제시했다. 반면 1999년 슈뢰더·블레어 선언은 복지 확대로 사회의 경직성이 고도에 달했을 때 좌파의 도그마를 자아비판한 통렬한 반성문이다. 디즈레일리와 루스벨트는 영국과 미국 정치 사상 가장 탁월한 리더십으로 위기를 돌파한 정치인으로 손꼽힌다. 슈뢰더와 블레어는 사회 안전망이 개인의 책임을 면제해서는 안 되며 복지는 개인의 역량을 키워 주어지는 기회를 거머쥐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는 '제3의 길'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는 '사람의 능력을 키우는 복지'라는 새로운 정책 흐름을 형성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이런 외부 세계의 도저한 흐름에 등을 돌릴 수 없는 상황이다. 근래 늘어난 광범위한 빈곤층은 지난 20여년간 급변해온 경제구조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 이들이다. 소득이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절대 빈곤층이 550만명에 이른다. 이들이 노동시장에 안착하여 가능성을 펼치도록 역량을 향상시키지 못한다면 사회 통합뿐 아니라 우리 경제의 내일도 깜깜할 수밖에 없다. 이는 인간과 사회와 글로벌 경제에 대한 깊은 통찰이 요구되는 우리 세대 최대의 도전이며 결코 선심성 복지로는 해결될 수 없다.

그간 급격히 깊어진 우리 사회의 바닥을 지금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다음 세대는 이를 방치하여 생산과 복지 양면에서 집단적 역량을 망가뜨린 세대로 우리를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유력 대선 후보 세 명은 모두 이를 어떻게 타개하고 세계 속의 미래로 향할 것인지에 대해 괴이(怪異)할 정도로 침묵하고 있다. 2012년 한국은 연일 이해 그룹을 찾아다니며 공약을 떨구는 정치적 계산이 아니라 선명한 비전이 필요하다.

 

 

윤희숙 KDI 연구위원·보건복지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0/31/2012103101112.html

 

 

Posted by 겟업
2013. 1. 3. 12:27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 후보는 31일 노인 기초노령연금을 월 9만원에서 18만원으로 올리고, 청년 구직자에 매달 30만원의 취업 준비금을 지급하며, 폐업 자영업자와 실직자에 월 50만원의 구직 촉진비를 대고, 12세 미만 아동에게 매달 10만원 아동수당을 주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박근혜·문재인 후보는 그간 보편적 복지 시책을 펴겠다는 뜻을 밝혀 왔고, 안철수 후보는 자기 책에서 보편 복지와 선택 복지의 균형을 취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지만 최종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할지 두고 봐야 한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내년 복지 지출 규모는 102조5000억원이다. 2005년 50조8000억원이던 복지 예산이 8년 만에 두 배로 증가했다. 여야의 복지 확대 경쟁으로 앞으로 예산 심의 과정에서 더 늘어날 것이다.

보편 복지는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전 국민에게 보육·의료·교육과 같은 기본 복지 혜택을 똑같이 제공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복지를 실현하는 데 드는 비용은 세금을 추가로 걷지 않는 한 조달할 수 없고, 증세(增稅)를 하더라도 단기간에 지금의 몇 배로 늘릴 수 없다. 따라서 대선 후보들은 보편 복지의 수십 가지 항목 가운데 어떤 복지는 언제 시작해서 언제 완성하고, 어떤 복지는 언제부터 시행에 들어갈 것인지 각 복지 항목에 대한 명확한 실천 시간표를 먼저 제시해야 한다. 이 시간표가 의미가 있으려면 각 공약 시행에 필요한 재원 조달 방안도 분명하게 함께 표시돼야 한다. 실천 시간표와 재원 조달 방안이 분명하지 않은 공약으로 국민을 홀리는 것은 정치적 유객(誘客) 행위에 불과하다.

보편 복지 공약을 입법해서 실행하려면 우선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먼저 복지 범위와 증세 등 재원 조달 방안에 국민 합의가 있어야 하고 그다음 여야 견해 절충을 통해 국회에서 입법화하는 데도 추가적 시간이 소요된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1~2년의 이행(履行) 기간이 필요하다. 중요한 문제는 전면적 복지 시대로 옮겨가는 이행 과정에서 국가와 사회의 도움을 가장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계층의 고통을 어떻게 완화해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보편 복지의 추진과 별도로 최(最)빈곤층과 현재의 복지 시스템 밖에 방치된 직업군(職業群)에 대해서는 상당한 재정을 들여 선별적인 지원을 해주지 못하면 여야의 복지 공약 경쟁이 사회의 취약층을 되레 고통에 빠뜨릴 위험이 크다.

지난 19일 78세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74세 아내를 목 졸라 죽이고 자기도 투신자살하려 했던 사건이 있었다. 환자 본인과 수발드는 가족까지 한꺼번에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리는 질병인 치매 환자가 53만명이나 되는데 국가 지원을 받는 숫자는 15만명이 안 된다. 29일엔 불이 난 아파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열한 살, 열세 살의 뇌성마비와 ADHD 장애 남매가 함께 중태에 빠졌다. 26일엔 33살 뇌병변 1급 장애인이 집에 불이 나자 휴대폰 터치펜으로 119에 '살려달라'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결국 연기에 질식해 숨지고 말았다. 국내 등록 장애인이 250만명 있지만 정부·지자체 지원으로 생활을 도와주는 활동 보조인 서비스를 받는 것은 5만명 정도다.

의지할 곳 없는 독거(獨居)노인만 118만명이고 그 가운데 빈곤층이 77%인 91만명이다. 지난 7월엔 강원도 강릉에서 위암 수술을 받은 69세 할머니가 혼자 보살피던 생후 10개월 된 외증손자와 함께 집 욕실에 숨진 채 발견됐다. 초·중·고생 가운데 정부가 아침·점심·저녁을 모두 챙겨줘야 하는 아이가 9만명이다. 이런 아이들은 공책과 연필 살 돈도 마련할 길이 없다.

올해 한국의 복지 예산은 GDP의 9.5%로 OECD 평균(19.5%)의 절반 수준이다.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가 된 복지 욕구를 충족하려면 복지 예산을 계속 늘려야 한다. 그러나 전 국민에게 소득과 관계없이 일정 한도의 복지 혜택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급한 건 고통에 허덕이고 있는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배려다.

대선 후보들은 자신들의 보편 복지 공약을 완성하기까지 이행 기간 동안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이런 불쌍한 사람들을 어떻게 그 고통에서 구해줄 것인지 청사진을 내놔야 한다. 국민도 복지 상품들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화려한 복지 진열장 차리는 데만 정신이 팔린 후보와 우리 사회의 약자들에게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해줄 치밀한 복지 청사진을 내놓는 후보가 누군지 구분해야 한다.

Posted by 겟업
2013. 1. 3. 12:25

가을이 깊었다. 결실과 수확의 계절이다. 시장에 나가보면 햇곡식과 과일이 풍성하다. 각 지방의 특산물 광고도 요란하다. 얼핏 넉넉해 보이는 풍경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전세계 식량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에그플레이션이 이미 코 앞에 닥쳤다. 특히 미국을 위시한 식량수출국들의 올 여름 농사가 아주 나빴다. 올해 말, 내년 초가 되면 먹거리 가격이 걷잡을 수 없이 뛸 가능성이 있다. 우리의 식량자급률은 20% 조금 위에서 턱걸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자급하고 있다던 쌀도 작년 현재 83% 수준으로 떨어졌다. 직불제 액수가 제자리를 맴돌면서 쌀농사를 포기하는 농가가 많아졌다.

아마 세상에서 우리만큼 식량자급률이 낮으면서 우리만큼 천하태평인 나라도 없을 것이다. "필요하면 돈 주고 사오면 된다"는 배금사상이 뼛속 깊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해외농업을 개발해서 식량을 확보한다는 발상도 마찬가지다. 실효성도 떨어지고, 위기상황이 왔을 때 해외로부터 식량을 추수해서 고스란히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 자체가 황당한 발상이다. 해외에 농지를 구입하는 나라에게 토지수탈이라는 비난이 빗발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크게 보아 이 모든 문제는 이른바 '식량 레짐', 즉 먹거리의 생산과 분배를 기업, 시장, 무역의 회로 속에 내장시켜 놓은 탓에 발생했다. 먹거리를 일반 상품과 동일한 논리로 다루는 한 식량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진리를 깨쳐야 한다. 일단 식량자급률을 높여야 한다. 또한 농생태적으로 먹거리를 생산하는 것이 기후변화 시대에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 수 있는 제일 좋은 방식임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많은 이들이 이야기해 왔다. 그런데 먹거리 문제를 논하기 전에 먹거리를 만드는 사람, 농민의 현실을 생각해야 한다. 전세계에서 농촌인구 비율이 줄었지만 절대숫자로 아직도 인류의 3분의 1이 농민이다. 그런데 농민 특히 소농들의 삶은 참으로 신산하다. 오늘날 기아와 만성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인류가 약 10억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 중 7할이 소농과 농촌거주 영세민이다. 먹거리 생산자들이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는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현실을 세계 인권운동이 놓칠 리 없다. 지난 9월 말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중요한 결의안이 통과됐다. 농민과 농촌지역 노동자들의 권리에 관한 유엔선언을 제정하기 위한 실무그룹을 구성하기로 한 것이다. 2014년 가을까지 초안을 작성해서 보고하게 되었으니 빠르면 2년 뒤 역사상 최초로 유엔에서 농민인권선언이 나오게 된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이 발표된 후 인권의 발전은 크게 보아 두 가지 경로를 거쳤다. 하나는 주제별로 인권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인종차별철폐 혹은 고문금지와 같은 주제가 대표적이다. 다른 하나는 해당 집단별로 인권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1979), 어린이-청소년(1989), 이주노동자(1990), 장애인(2006), 원주민(2007) 등이 국제인권 규범의 대상이 됐다. 공식적인 조약도 있고, 덜 공식적인 선언도 있었지만 어쨌든 세계가 인정한 인권보호 대상이라는 점에서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원주민인권선언이 나온 다음 세계 각국의 법률이 바뀌었던 것처럼, 유엔농민인권선언이 나오면 농민과 농업을 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질 것이고, 또 달라져야만 한다.

경제성장과 발전 이데올로기는 도시 편향성을 그 핵심으로 한다. 산업화를 위해서라면 농민을 도시노동자로 만들고, 농촌을 포기하며, 식량을 수입하면 된다는 논리가 우리에게 주술처럼 씌워져 있었다. "촌스럽다"라는 인권침해적 언사가 버젓이 통용되는 사회다. 그러나 과거 장애인을 부르던 별칭이 이제 사라진 것처럼, 여성을 비하하던 말들이 적어도 공적 담론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못하는 것처럼, 농어촌과 농어민의 가치를 폄훼하던 관행 역시 조만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0/h2012103021004624370.htm

Posted by 겟업
2013. 1. 3. 12:12

1990년대 인터넷이 보편화하면서 가장 기대가 쏠린 분야는 단연 정치였다. 저 먼 그리스 시대 이후로 마침내 직접민주주의 시대의 재래(再來)를 예상하며 다들 지레 흥분했다. 사회적 담론이나 국가정책은 더 이상 소수 엘리트의 자의적 판단이 아닌, 대중의 이성적 합의로 결정될 것이었다. 누구든지 제약 없는 자유로운 참여와 소통이 '집단지성'을 발현케 할 것이라고 굳게들 믿었다. 제아무리 잘났던들 '나' 혼자보다는 '우리'가 훨씬 똑똑한 법이니까.

■기대가 무너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유로운 참여와 소통은 서로 다른 의견들을 모아가는 기능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와 취향이 맞는 동지들을 찾는데 가장 유용한 것이었다. 동지들끼리의 결속감이 커질수록 나와 다른 적들의 정체는 확실해지고 사이는 점점 더 벌어졌다. 집단지성이 아니라, 피아간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집단적 극단화 현상이 심화됐다. 동지를 만나고 적과 싸우는데 시간과 장소의 한계마저 허문 SNS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김광진 민주통합당 의원이 과거 SNS에 올렸던 글들이 속속 공개되면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어떤 너그러운 시선으로 읽어도 지극히 변태적인 성 취향에다, 여자나 밝히는 '있는 집' 자식의 행태가 연상되는 역겨운 내용들이다. 도리어 지탄받아 마땅한 반사회적 인식의 인물을 명색이 공당(公黨)에서 특별히 청년비례대표로 뽑아 국회의원 배지를 달아주었다. 이런 품성인줄 모르고 그의 앞선 공적 발언들을 진지하게 시비했던 일 자체가 우습고 부끄럽다.

■초기에 공정한 여론형성의 기대감을 듬뿍 받았던 SNS가 이젠 거꾸로 숙의(熟議)민주주의의 적으로 난타당한다. 그래도 역시 SNS의 순기능은 가볍게 볼 게 아니다. 그가 남긴 글들이 없었고, 또 그렇게 쉬 검색할 수 없었다면 그의 실체를 일반이 알아채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전에도 몇몇 유명 SNS실세들의 트위터 글을 보고 품성에 실망해 생각을 고쳐먹은 적이 여러 번이다. 잘만 활용하면 SNS는 공적 인물들을 걸러내는 유효한 수단이 될 듯도 싶다.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0/h201210302105452444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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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3. 12:12

지난 8월까지 미국 하버드대에 방문교수로 가서 1년을 지냈다. 사무실이 있던 건물은 각각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전·현직 회장인 빌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가 기증했다. 페이스북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도 그곳에서 공부했다. 석학을 많이 배출한 하버드대도 게이츠와 저커버그에 대해서는 특별한 자부심이 있었다. 자수성가로 미국 1위의 부자가 된 게이츠와 나이 20대에 큰 부자가 된 저커버그는 미국 경제체제의 역동성을 잘 보여주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은 각각 3학년과 2학년 때 이 대학을 휴학했고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전 문재인 대통령 후보는 “재벌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빌 게이츠나 마크 저커버그가 안 나온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지금 ‘경제 민주화’가 모두의 화두인 것을 생각하면 똑같은 말을 안철수나 박근혜 후보가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자수성가한 1등 부자가 생긴다면 현재 재벌이 야기하는 기회독점의 논란이 많이 수그러들 것이다. 그렇지만 ‘재벌 때문’이란 원인 분석은 틀렸다. 우선 소프트웨어나 콘텐트 분야는 자본집중적 산업이 아니기 때문에 대기업의 영향력이 비교적 작은 곳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게이츠와 저커버그는 매우 잘 준비되고 기회포착에 민첩했다.

게이츠의 경우 중학교 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웠으며, 고등학교 때 자동차 통행량 분석기를 개발해 팔기 위해 기업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하버드대 3학년 때 당시 마이크로컴퓨터가 나오자 그곳에 쓰이는 소프트웨어를 공급하기 위해 학교를 휴학하고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세웠다. 그 또한 처음에는 소프트웨어의 무단 복제 때문에 무진 고생을 하며, 컴퓨터 잡지에 ‘무단 소프트웨어 복제는 도둑질’이라는 광고를 내 당시 컴퓨터 애호가들로부터 미움을 받기도 했다.

저커버그의 경우에도 중학교 때부터 프로그래밍을 배웠으며 그의 부모는 그에게 프로그래밍 과외를 시키기도 했다. 그도 고등학교 때 인공지능을 이용한 음악 재생기를 개발해 여러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기도 했다. 저커버그는 하버드대1학년 때 멋진 학생을 투표로 찾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오히려 학교에서는 문제 학생 취급을 받았다. 그는 벤처회사 페이스북을 세우기 위해 결국 2학년 때 하버드대를 떠났다.

게이츠와 저커버그의 성공 요인은 명확하다. 그것은 자유로운 중·고등학교 교육과 기업가 정신이다. 이 두 사람이 중·고등학교 시절 단지 주어진 과목의 문제 풀이에 시간을 보냈다면 그렇게 젊은 나이에 기회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기 성취와 모험심으로 대표되는 기업가 정신을 빼고는 이들의 명문대학 중퇴를 설명할 수 없다.

한국의 미래는 청년들의 성공에 달려 있다. 대통령 선거는 어느 후보가 청년들의 성공에 더 나은 방향을 제시했는가에 대한 판단기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안철수·문재인 후보 모두 평준화된 중·고등 교육을 고치겠다는 어떤 공약도 없다. 그리고 장밋빛 희망을 선거 공약으로 내놓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희생해 이를 달성할 수 있는가를 말하지 않는다. 반값 등록금을 약속하기 전에 청년들의 학력과 스펙 쌓기 경쟁을 어떻게 멈출까에 대한 걱정이 있어야 한다.

게이츠와 저커버그의 성공 뒤에는 명문대 졸업장의 포기가 있었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 쉬운 성공이 가능하다는 대권 후보들의 주장은 폰지 게임(허황된 금리를 약속하는 사기 수신행위)을 연상하게 한다. 우리가 아이들의 창의와 재능을 살리는 교육제도를 만들고, 청년들이 고시와 공무원 시험 준비 대신 창업과 도전으로 젊은 날을 불태울 때 그들 중에 게이츠와 저커버그가 나올 것을 나는 확신한다.

 


성원용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745987&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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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3. 12:11

국제관계학 수업에선 통상 “학생들에게 국가 간 협력을 증진하는 최선의 방법은 경제적 상호의존도를 높이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자유주의적 시각의 국제관계학자들은 “두 나라 간 교역과 투자가 높은 수준일 때 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작다”고 설명한다. 교역과 경제적인 결합은 각국을 이성적인 결정으로 이끌며, 전쟁 가능성을 줄이고 평화와 협력에 따른 상호이익을 증가시킨다.

국제관계학자 중에선 중국의 부상과 관련해 이러한 자유주의적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국제 경제 질서에 더욱 많이 빠져들수록, 즉 외부와의 교역이 늘어날수록 중국은 외부와 협력을 강화하고 같은 지역 내 이웃 국가와의 분쟁을 피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언뜻 우아한 해결책으로 보인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맞아 보이지만 불행히도 현실에선 전혀 통하지 않는다. 외려 그 반대다. 최근 중국이 한 행동을 살펴보면 자유주의적 경제 원칙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로 북한 문제를 보자. 중국과 한국 간의 교역과 상호 투자는 북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중 상호 교역량은 2446억 달러에 이른다. 같은 기간 북·중 교역량은 56억2000만 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한·중 경제 교류 규모가 북·중 간의 50배나 된다는 걸 의미한다. 이러한 경제적 현실에도 중국은 평양과의 외교 관계를 한반도 외교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왜? 베이징은 한반도에서 경제보다 전략 문제를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국제 관계에서 상식이 된 경제 상호의존 이론이 유독 중국에선 통하지 않는 것이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동료인 보니 글레이저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은 경제력을 오히려 일본·동남아시아·유럽과의 분쟁에서 압력 도구로 이용해 왔다. 2010년 9월 일본 해상보안청은 중·일 간 영토분쟁 중인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근처에서 일본 순시선과 충돌한 중국 어선 선장을 체포해 2주 이상 억류했다. 베이징은 이런 조치에 항의하고 자국민 석방을 요구한 것은 물론 희토류의 대일 선적을 중지하기까지 했다. 중국 관리들은 공식적으로는 이런 일이 없다고 부인했으나 중국 희토류 수출 물량의 60%를 가져가는 세계 최대의 희토류 수입 국가인 일본은 곧바로 위기를 인식하고 손을 들었다. 올해 센카쿠(댜오위다오) 분쟁이 재연될 무렵 중국은 희토류 수출 규제를 시작했다. 물론 표면상의 이유로 가격 안정을 내세웠으나 월스트리트저널은 올해 중국의 희토류 수출이 전례 없이 적은 1만t 수준이라고 보도했다.

중국은 동남아에 대해서도 경제력을 지렛대로 사용하고 있다. 지난봄 남중국해 스카버러섬(황옌다오) 주변 해역의 중국 어선 불법 조업 문제로 필리핀 군함과 중국 순시선이 해상 대치를 벌였다. 중국은 그 다음 주에 열린 미국·필리핀 군사 훈련에 불만을 표시했다. 2012년 5월 중국은 필리핀산 과일 수입을 봉쇄했다. 표면상의 이유는 필리핀에서 수입한 바나나와 파인애플에서 해충이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사실 바나나는 필리핀에서 교역 규모가 둘째로 큰 농산물이다. 문제는 이러한 정밀검사를 받는 필리핀산 과일이 망고·파파야·코코넛으로 갈수록 늘어나 급기야 거의 모든 필리핀산 농산물로 확대됐다. 이는 베이징이 보내는 보복의 메시지가 분명했으며 이런 조치는 필리핀 경제계가 정부에 중국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요청할 때까지 계속됐다.

2010년 12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중국의 반체제 활동가 류샤오보(劉曉波)를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뽑았다. 이에 경악하고 분노한 중국 정부는 노벨위원회에 재고를 요청했다. 하지만 노벨위원회는 이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수상식을 앞당겨 개최했으며 그 유명한 ‘빈 의자’를 류샤오보를 위해 남겨 뒀다. 중국도 반응했다. 조용히 노르웨이산 연어의 수입을 중지하고 진행 중이던 자유무역 교섭의 중단을 통보했다. 노르웨이는 이전 몇 년간 어류 수출로 재미를 봤으며 특히 어류 수요가 50%나 늘었던 중국에서 상당한 이득을 거두고 있었다. 중국의 수입 중단 조치로 노르웨이산 연어 판매는 62%나 감소했으며 중국은 심지어 전직 노르웨이 총리의 방문 비자 발급도 거부했다.

 이는 경제적인 상호의존 이론이 중국에선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글레이저는 보고서에서 “중국은 목표로 하는 국가를 굴복시켜 그들의 정책을 바꾸게 하기 위해 경제 관계를 직접적으로 이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어 우려를 자아낸다”고 썼다. 중국은 경제적 상호의존 이론이 역으로 적용되는 나라다. 경제적 상호의존을 무기로 삼아 다른 나라에 자국의 뜻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밀접한 교역 관계를 맺고 있는 파트너 국가에 검역 등에서 필요 이상의 엄격한 잣대를 갖다 댐으로써 원하는 정치적 목적을 이루는 방식으로는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중국이 아시아에서 패권을 잡으려면 우선 덕(德)과 유연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빅터 차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745988&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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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3. 12:10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체제다(Democracy is the worst form of government).”

최근 정치판을 보며 새삼 가슴에 와 닿는 명언이다. 처칠이 1947년 의회연설에서 한 말이다. 당시 처칠의 처지를 알면 더 공감이 간다. 제2차 세계대전을 막 승리로 이끈 영웅 처칠은 드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총선에 패배해 정권을 빼앗겼다. 나라를 구한 사람에게 패배를 안겨준 민주주의라면 ‘최악’이라 불러 마땅하다.

문장이 여기서 끝난다면 그저 푸념에 불과했을 것이다. 처칠의 위대함은 이어지는 단서조항이다. “지금까지 시도됐던 다른 정치체제를 모두 제외한다면(except for all those other forms that have been tried).” 민주주의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왕정이나 귀족정 혹은 파시즘과 같은 다른 정치체제보다는 낫다는 의미다. 절묘한 반어법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문제점만 크게 느낀다. 아무리 선진국이라 해도 유권자들의 절대다수는 ‘정치 수준이 낮다’고 개탄하며, 늘 ‘정치인은 믿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도 압축성장해 온 우리나라에서 정치불신은 그만큼 더 심각하다. 그 증거가 안철수 현상이다.

당연히 안철수에 대한 기대의 핵심은 ‘정치쇄신’이다. 그래서 그가 ‘구체적인 정치쇄신 방안을 제시하겠다’고 예고했던 지난 23일 인하대 강연은 특히 주목을 끌었다. 현장취재기자가 보내 온 메모를 보고 깜짝 놀랐다. 동영상 화면을 찾아 다시 확인했다. 더 놀랐다.

메모를 보고 놀란 까닭은 쇄신 방안의 내용이 단편적이고 논리가 일방적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회의원 수를 200명으로 줄이자며 비교한 사례가 미국과 일본이다. 비교가 안 되는 나라와 비교했다. 미국은 연방제이고, 일본은 양원제다. OECD 평균으로 따지면 우리나라 국회의원은 350명 정도로 더 늘려야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늘리자’고 나서지 못하는 것은 국민적 정치 불신 때문이다.

동영상을 보며 더 놀란 것은 현장 분위기다. 안 후보는 “법 못 만든 게 국회의원 수가 모자라서인가” “지난 몇 년간 뭘 하신 거죠”라는 식의 비꼬는 투로 객석에 물었고, 대학생 청중들은 환호하며 박수 쳤다. 국회의원 수 줄이고 국고지원 줄이고 중앙당 없애고, 대신 그 비용을 청년실업 해소에 쓰겠다는데 누가 반갑지 않겠는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고, 논리적으로 맞지 않지만 마음에 든다. 포퓰리즘이다.

안 후보가 제시한 쇄신 공약이 사실은 모두 정치불신에 기반한 것이고, 그 공약을 전달하는 형식 역시 정치불신이란 대중정서를 자극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다 보니 사방에서 비판이 몰아쳤다. ‘포퓰리즘’이란 지적에 대해 안 후보는 ‘국민에 대한 폄훼’ ‘정치 기득권의 저항’으로 반박했다. 최강의 받아치기다. 안 후보가 강수를 거듭할 수 있는 것은 여론의 뒷받침이 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 결과 60% 이상이 ‘국회의원 수 줄이기’에 찬성했다. 정치불신이란 사회적 분위기로 볼 때 당연하다. 그렇다고 ‘여론이 틀렸다’고 정면 반박할 강심장 정치인은 없다. 포퓰리즘의 힘이다.

민주주의의 급소는 바로 이런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의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정치학의 숙제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딜레마의 연속이다. 다수의 지배가 원칙이지만, 다수의 독재가 되면 중우(衆愚)정치다. 정치인의 입장에선, 유권자를 대변해야 하지만 따라가기만 해선 대중 추수(追隨)주의로 길을 잃게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언처럼 정치인은 ‘서생(書生)적 문제의식’도 있어야 하지만 ‘상인(商人)적 현실감각’도 있어야 한다. 포퓰리즘은 상인적 현실감각에 속하며, 대중 추수주의 행태를 보일 경우 중우정치가 된다. 다수가 열광하는 포퓰리즘은 정치적으로 극단적 쏠림현상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기에 특히 위험하다.

안 후보는 이런 비판을 이미 예상한 듯하다. 인하대 강연의 마무리 발언으로 ‘민주주의 아버지 존 로크의 말’을 소개했다. ‘새로운 의견은 아직 일반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언제나 의심받고 대부분 반대에 부딪힌다’. 맞는 말이다. 안 후보는 이처럼 멋있는 인용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로크의 사상에 비유한 셈이다.

그런데 전후 맥락이 빠졌다. 로크는 정치인이 아니라 철학자였으며, 로크의 주장이 구현되기까지엔 프랑스 대혁명 같은 세기적 사건과 30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안 후보는 시대를 관철하는 사상가도 아니며, 역사를 건너뛸 수 있는 메시아도 아니다. 정치 신인 안철수는 유권자들에게 더 많은 설명을 해야 한다. 왜 포퓰리스트가 아닌지.

 

 

오병상 수석논설위원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745963&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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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3. 12:09

일본은 미식 여행 상품이 아주 인기다. 그렇다고 고급 식당 순례는 아니다. 제대로 된 향토 음식을 알차게 먹어보는 내용이다. 나가사키 라면 개항의 산물인 짬뽕과 카스텔라, 싯포쿠 요리(중국에서 전래한 원탁 요리)를 즐기는 식이다. 이런 여행은 먹는 이도 기쁘고, 지역도 살찌운다. 사라질 운명에 처한 지역 재료와 음식을 부활시킬 수도 있다. 사투리가 언어생활을 풍요롭게 하듯, 지역 음식은 한식이라는 거대한 나무를 지탱하는 뿌리가 된다. 제주도가 올레 여행을 통해 고기국수와 몸국 같은 향토 음식에 힘을 얻은 것은 좋은 예다.

얼마 전 대전을 다녀왔다. 역사가 오랜 이 광역시에는 3대를 이어 운영하는 식당도 많다. 갈수록 세련되기만 하는 서울의 식당가에 피곤해진 입맛을 푸근하게 적셔준다. 한 두부 두루치기집에서는 감동스러운 일도 있었다. 진짜 동치미를 내주는 것이었다. 동치미 흉내만 내는 '식초물에 담근 가짜'만 먹어오던 입의 호사였다. 묻어 놓은 독에서 꺼낸 그 톡 쏘는 듯한 발효향이라니. 인심도 넉넉해서 식당 안에는 훈기가 돌았다. 연세 지긋한 멋쟁이 노인들이 파안대소하는 노포(老鋪)는 멋이 넘쳤다. 그 덕에 나도 모르게 막걸리 사발을 연신 비웠다. 생긴 지 오십 년이 넘었다는 칼국수집은 개업 초부터 쓰던 그릇을 진열하고 있었다. 먹을 게 없어서 양으로 해결하던 그때 그 시절의 국수 양푼은 왜 그리 크던지….

돌아오는 대전 역사 앞에는 추억의 가락국수를 팔고 있었고, 시간에 쫓겨 입천장을 홀랑 벗겨가며 먹던 추억에 잠시 눈물겨웠다. 대전까지 고속열차로 불과 사십여 분. 올해가 가기 전에 다시 나만의 미식 기차를 탈 참이다. 기다려라, 진짜 동치미여.

박찬일·요리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0/30/20121030031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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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3. 12:09
요즘 러시아에서 만나는 정치인 학자를 비롯해 일반 시민들은 한국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높다. 급속한 경제성장에 대한 관심은 물론이고 드라마 케이팝(K-pop·한국대중가요)에 대한 높은 관심은 러시아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에 대한 이들의 높은 관심은 ‘경제협력’이란 실질적 목표와 닿아 있기 때문에 더욱 현실감이 있다. 그 거점이 되는 지역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축으로 한 극동 지역이다.

100여 년 전 제정 러시아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건설해서 동방 진출을 시작했다.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러시아의 아태지역 진출을 위한 신(新)동방정책의 신호탄으로 해석할 만하다. 러시아 극동지역의 중요성을 재인식해 우리의 시야를 넓혀 준 것이다.

한반도 28배 극동지역 자원 풍부



극동지역은 한반도의 28배에 달하는 방대한 면적에 풍부한 천연자원과 인적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발전 잠재력이 무한하다. 이곳은 또한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4700km에 이르는 동시베리아∼태평양 송유관, 가스관이 건설되고 있고 석유, 가스개발과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도 이루어지고 있다. 우주항공과 유전공학, 해양 등 과학기술 분야도 협력할 것이 많다. 러시아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도 빼놓을 수 없는 변화다. 당장 서비스·물류 분야가 100% 개방된다. 기후온난화로 자원 개발과 북극 항로의 이용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우리의 극동 러시아 진출 역사는 올해로 20년째다. 그동안 한국과 러시아 극동지역 간에는 많은 협력과 성과가 있었다. 나는 올 6월 마가단과 추콧카 출장을 계기로 극동 8개 주를 모두 방문하게 됐다. 9시간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면서 극동 러시아야말로 우리의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국가 발전과 직결되는 곳임을 실감했다.

서울과 블라디보스토크를 고속철도로 연결하면 불과 3시간 거리다. 한국과 러시아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할 날도 올 것이다. 한국과 극동 러시아는 일일생활권이자 단일경제권이 된다는 얘기다. 최근 만난 러시아의 한 인사는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꿈도 꿀 수 없는 일들이 현실이 되고 있다”고 얘기했다. 앞으로 한반도종단철도(TKR)와 TSR를 고속철도로 연결하고 가스관을 연결하는 실크로드 비전도, 통일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얘기다.

이 엄청난 역사적 변혁기에 우리는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 우선 한-러 간 상호 이해와 신뢰 구축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러시아가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중국 일본에 대해서는 국민감정이 좋지 않지만 한국인에게는 우호적이었다.

최근 방문한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있는 우리 영농 기업은 10여 년간 모진 고난을 겪으며 러시아 법을 지키고 현지인을 고용하고 지역 발전에 기여해 왔다. 기업 측 인사들은 “투명하게 기업 운영을 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던 현지 사람들이 이제 ‘당신들이 옳았다’고 말한다. 나아가 한국 기업이 잘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전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세계 유일의 한국학 대학이 있어 좋은 인적자원을 양산하고 있으며 현대호텔도 있고, 한국이 운영하는 문화센터와 국제학교도 있다. 무엇보다 극동지역에 거주하는 10만여 명의 고려인이 큰 자산이다.

5∼10년 내다보는 마스터플랜 필요

극동의 중요성에 상응한 그랜드 마스터플랜이 필요하다. 한-러 간 공동의 비전과 전략을 토대로 최소한 5∼10년간의 협력 내용과 액션플랜, 로드맵이 담겨야 할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극동 러시아와 중국 동북 3성을 대상으로 200여 개의 프로젝트가 망라된 10개년 협력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한-러 양국은 더 나은 협력 모델을 추진할 수 있는 경험과 역량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 이제는 마스터플랜을 토대로 행동할 때다.

러시아는 우리 편이 될 수 있다. 러시아를 더 가까이 하자.

 


이양구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

 

 

http://news.donga.com/3/all/20121030/50482829/1

 

Posted by 겟업
2013. 1. 3. 12:08

‘가해자 한정(限定)’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전후 화해에 대해 논의할 때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전쟁 피해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커진 것은 그리 먼 옛날 일이 아니다. 산업혁명 이후 규모가 커졌고, 피해도 심각해졌다. 19세기엔 식민지 쟁탈 전쟁이 빈발했고, 20세기에 벌어진 두 차례 세계대전은 총력전으로 치달았다. 그 결과 ‘망각에 따른 화해’가 불가능하게 됐다.

망각이 불가능하다면 책임 추궁이 불가피하다. 책임 추궁 없이는 전후 화해가 어렵기 때문이다. 전쟁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서는 가해자를 한정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이를 위해 전범재판이 필요해진다. 국민 전체를 가해자로 하는 전후 화해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인은 능란하게 ‘가해자 한정’을 이뤄냈다.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모든 책임을 히틀러와 나치에 떠넘겼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유대인 말살 등 나치의 범죄는 상식을 벗어났다. 그 책임을 스스로 철저하게 추궁하지 않는 한 독일인은 유럽 세계에 복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폴란드를 방문했던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는 바르샤바의 게토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종전 40년 기념일에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은 “과거에 눈감는 사람은 현재도 보지 못한다”고 연설했다. 그 ‘잊어서는 안 되는 과거’는 히틀러와 나치의 범죄였다. 이를 신랄하게 추궁한 덕분에 일반 독일인은 전쟁 책임을 면했다.

이상하게도 일본인은 ‘가해자 한정’을 하지 못했다. 도쿄 전범재판에서 많은 전범들이 처형됐고, 중국 정치지도자들이 “나쁜 사람은 소수의 군국주의자들뿐이다”며 ‘구조선’을 내주었는데도 말이다. 연대책임의 집단주의적 문화 때문인지 ‘1억 총 참회’라며 스스로 전쟁 책임을 공유하려고 했다.

그 하나의 일그러진 형태가 A급 전범들의 야스쿠니(靖國)신사 합사(合祀)다. 원래 야스쿠니신사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과 군속, 국민을 봉안하기 위한 종교시설이다. 군사법정에서 심판받은 사람들이 사후에 자신이 신사에 모셔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300만 명 이상의 동포를 희생시키고 아시아 각국에 엄청난 희생과 손해를 안긴 전쟁 지도자들에게는 분명히 일반 국민과 다른 무거운 전쟁 책임이 있다. 하지만 가해자를 한정해 그 책임을 적극적으로 추궁하지 않았다고 해서 일본인이 독일인보다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식으로 보는 것은 오류다. 또 독일과 일본을 그런 틀로 비교하는 것도 정확하지는 않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일본의 책임을 추궁할 때 독일과 비교해 ‘전쟁 책임’을 추궁하기보다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과 비교해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무력 제압에서 시작된 식민 지배는 징병, 징용 등 전시동원에 이르기까지 전쟁보다 더 큰 피해를 안겼다. 그 책임 또한 전쟁 책임보다 분명히 무겁다.

하지만 전쟁 책임 추궁에 열심인 서구 제국도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 책임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 오히려 지금까지도 식민지 지배를 합법화하고 있다. 영국은 아편전쟁으로 빼앗은 홍콩을 난징조약과 베이징(北京)협약에 따라 1997년에서야 중국에 반환했다.

일본의 한국 지배는 이웃 나라를 병합한 무거운 범죄였다. 이에 가장 근접한 예는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일 것이다. 프랑스도 알제리를 병합해 동화시키려 한 흔적이 있다. 하지만 그 후 프랑스가 알제리에 사죄와 보상을 해 양국 간 화해가 성립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식민 화해’는 ‘전후 화해’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오코노기 마사오 규슈대 특임교수 겸 동서대 석좌교수

 

http://news.donga.com/3/all/20121030/504828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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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3. 12:08

많은 이가 “뜨거운 열정이 있으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세상살이”라고도 한다. 이 두 가지를 놓고 보면 당연히 모순적이다. “성공하기 위해선 열정을 가져야 한다”와 “열정을 가져도 성공하지 못할 수 있다”는 논리적 대립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하나 빠진 게 있다. 열정은 함께 가야 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송나라 때 한 어리석은 농부가 있었다. 그는 모내기를 끝내 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냈지만, 며칠이 지나자 모가 어느 정도 자랐는지 궁금해졌다. 다음 날 아침 서둘러 논에 가 보니 자신의 벼만 다른 사람이 심은 것보다 조금 덜 자란 듯 보였다. 그래서 벼를 조금 잡아당겼더니, 금세 벼의 키가 다른 벼와 비슷해졌다. 이를 본 농부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다음 날에도 논에 가서 벼를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저녁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무척 피곤하구려. 하루 종일 벼를 빼느라 힘이 하나도 없어!” 기겁을 한 식구들이 다음 날 논에 나가 보니 이미 벼는 하얗게 말라 죽어 있었다.

농부는 자신의 의지만을 앞세워 시기를 앞당기려 했다. 하지만 그 같은 시도가 성공할 리는 만무하다. 열정만으로 시간을 앞당기려 하거나, 혹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조건을 순식간에 뒤바꾸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부작용만 불러일으키며 기반마저 뒤흔든다. 열정은 시기를 조절할 수 있는 인내와 함께 가야 한다. 열정으로 자신과 주변의 조건을 성숙시키고 인내를 통해 시기가 올 때까지 견뎌내야 한다. 30대 미국 대통령이었던 캘빈 쿨리지(재임 기간 1923∼1929년)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세상의 어떤 것도 굴하지 않는 인내의 힘을 이길 수 없다. 재능도 대신할 수 없다. 재능을 가진 자가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는 너무나 흔하기 때문이다. 천재도 마찬가지다. 인정받지 못하는 천재는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인내와 강한 결심만이 전능하다.”

쿨리지는 ‘인내와 강한 결심(열정)’을 ‘전능하다’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곧 무적(無敵)이라는 뜻이다. 열정을 가지고 인내를 품을 수 있다면 당신도 ‘무적의 전사’가 될 수 있다.

이남훈 경제 경영 전문작가

 

http://news.donga.com/3/all/20121030/50482899/1

Posted by 겟업
2013. 1. 3. 12:07

‘성공사례’란 ‘예외사례’다. 성공사례를 제시하며 ‘당신도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오류다. 마치 복권 1등 당첨으로 수억원의 돈을 거머쥔 성공사례를 제시하며 ‘당신도 열심히 복권 사면 1등 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성공이란 것은 항상 극소수만이 달성할 수 있다. 사회적 차별과 부당한 제도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공한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통계적으로 보면, 그들은 수십만, 수백만명 중에 하나 생길까 말까 하는 극히 예외적인 ‘아웃라이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사례가 제한된 언론 지면에 ‘성공사례’로 소개되는 것이다.

 

최근 새누리당 김성주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여성·청년들의 일자리 문제와 관련해 ‘주도적인 자세’를 강조하면서 “정부야, 일자리 창출해라, 이런 수동적인 자세로는 안 된다”고 언급했다. 또한 “애 젖 먹이면서… ‘웰빙 진생쿠키’를 만들어 구글에 올리면 전세계에서 주문을 받을 수 있는데… 왜 젊은이들은 수동적으로 대응하느냐”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일자리로 고민하는 여성들과 청년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을 하면 성공은 제쳐두고라도 최소한의 사람다운 생활을 누릴 수 있을까? ‘진생쿠키’가 성공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운이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열심히 노력해도 운이 없으면 성공을 거두기 힘들다. 하지만 이는 그야말로 하늘의 뜻일 테니 오늘 논의에서 일단 제외하자. 둘째, 김성주 공동선대위원장이 말한 대로 주도적인 자기 노력은 필요하다. 당연한 말이다. 셋째는 시스템 혹은 정책이다. 그녀가 ‘진생쿠키’를 만들어 ‘구글’에 올리면 전세계에서 주문을 받을 수 있다고 했는데, ‘진생쿠키’가 개인의 노력을 상징한다면 ‘구글’이란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적 인프라와 정책을 상징한다.

 

‘진생쿠키’ 발언이 나온 날, <한겨레> 독자로부터 문의를 받았다. 그녀의 발언 자체가 딱히 문제가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왜 그녀의 발언이 비판을 받는지 궁금하다고. 사실 그녀가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룩한 기업인으로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별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현재 대통령 선거를 앞둔 집권당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다. 대선 후보와 함께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고 관련된 시스템과 정책을 내놓아야 하는 위치를 고려했다면 그녀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여성, 청년 여러분. 일자리 문제로 힘드시지요? 노력하는 만큼 목표를 성취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정책과 사회 구조를 만들기 위해 이 기회에 힘써 보겠습니다”라고.

 

한때 “힘들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후배에게도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서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의 노력만큼이나 그 노력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는 정책과 구조가 중요하니까 말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일부 성공사례를 놓고 개인의 노력을 다그칠 것이 아니라, 기득권자에게만 기회가 더 돌아가는 불공정 경제 구조를 혁신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 좀더 균등한 기회가 돌아가는 ‘제대로 된 정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성공적인’ 정치와 정책은 극소수에게 최대한의 성공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 시민에게 최소한의 안정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지금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누가 변화를 완성까지는 못하더라도 제대로 된 방향과 기반이라도 잡아줄까? 여성과 청년의 입장에서 ‘가장 적은 노력’으로 자기계발의 유리한 발판을 마련할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5797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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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3. 12:05

서울 동부지법의 40대 부장판사가 사기ㆍ사문서위조 사건 재판에서 60대 증인을 앞에 두고 "늙으면 죽어야 해요"라고 막말을 했다. 부장판사는 증인이 말을 모호하게 하자 직접 심문에 나섰으나 진술이 여전히 불명확하자 이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증인은 부장판사에게 한 마디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지난해 5월 인천지법에선 판사가 이혼소송 중인 여성 원고에게 "입은 터져서 아직도 계속 말이 나와요?"라고 말해 소송 당사자가 법관기피신청을 냈다. 2010년 4월 서울중앙지법의 40대 판사는 69세 원고가 허락을 받지 않고 발언하자 "어디서 버릇없이 툭 튀어나오느냐"고 질책했다. 올해 1월 발표된 서울지방변호사회 자료에는 "당신이 알지 내가 알아!" "20년간 맞고 살았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라" "모르면 좀 아는 사람한테 물어보고 준비서면을 내라" 등 일부 판사들의 부적절한 언사가 소개되기도 했다.

대법원은 판사들의 막말 파문이 빚어질 때마다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한다고 강조했지만 그때뿐이다. 법관 언행 개선 태스크포스를 구성하느니, 모니터링을 강화하느니 했지만 판사들의 오만하고 몰지각한 언행은 근절되지 않고 있다. 이번 재판이 있던 날 바로 그 동부지법에선 법관의 언행개선을 위한 세미나가 열렸다고 하니 얼마나 형식적이고 겉치레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사회 각 분야에서 특권의식과 권위의식이 상당히 사라졌으나 유독 사법부만 예외로 남아있다는 지적이 많다. 사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부 젊은 판사들이 공부만으로 사법시험을 통과해 인성이 부족하고 세상물정을 모른다고 개탄하는 선배 판사들도 적지 않다. 막말 판사에 대한 징계 등 강력하고 확실한 제재가 필요하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이번 파문이 커지자 "국민들께 심려를 끼쳐 송구스럽다"고 사과했다. 여론이 들끓으면 징계하겠다고 말하고는 어물쩍 넘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일반 시민과 검사, 변호사 등의 의견을 물어 재판과정을 평가하고 이를 법관 연임심사에 반영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0/h201210262104267607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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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3. 12:04

한동안 평창 동계올림픽유치에 참여하면서 유럽과 북미의 여러 도시들, 예컨대 뮌헨이나 밴쿠버 등 지구상에서 살기 좋다는 도시들을 돌아본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서울올림픽에 앞서 아테네, 파리, 로마, 몬트리올 등 올림픽도시들을 두루 돌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숙제까지 살펴보았었다. 그 평가결과에 관계없이 우리는 정말 겁 없이 세계가 인정하는 선진국 문화도시들과 경쟁해 당당한 승리를 따내곤 했다. 이러한 정신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유전자라고 할 만한 '겁 모르는 무한도전'의 표징이라고 할 만하다.

이처럼 '라인강의 기적'을 무색하게 한 '한강의 기적' 그 연장선에서 이번에는 인천 송도국제도시가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유치에 성공했다는 희소식이 날아왔다. 이는 올림픽이나 월드컵과 같은 단발성 이벤트보다 더 뜻있는 일일수도 있다. 더구나 유엔지원아래 한 해에 1,000억 달러가 넘는 사업을 벌인다고 하니 세계은행이상의 수퍼급 국제기구임에 틀림없다.그 동안 2014년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간의 조율이 제대로 되지 않아 혼선을 빚고 있는 데다 송도 경제자유구역의 썰렁한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졌던 터에 GCF유치가 그 활로를 열어줄 것으로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이러한 유치경쟁에서의 승리 이전에 대한민국의 국격(國格)은 우리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 놀랄 만큼 높아졌다. 지난 해 G20 정상회의를 지켜본 세계 언론들이 감탄했듯이 우리의 치밀한 외교와 조직능력은 이미 글로벌 스탠더드를 넘어섰으며 지난 8월 런던 하계올림픽 성과가 말해주듯 완전한 톱 레벨의 G5에까지 올랐으니 세계열강과 겨루어 주눅들 이유가 전혀 없다.

이번 GCF비밀투표에서 송도가 독일 본과 스위스 제네바를 따돌렸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국력신장이 큰 작용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처럼 기후와 에너지라는 지구촌 미래과제를 풀어 가는데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또 하나 기분 좋은 일은 그동안 외교무대에서 곧잘 우리의 발목을 잡곤 했던 중국과 일본이 모처럼 힘을 모아 지원했다는 점이다. 이를 계기로 평화로운 동북아시대를 열어갈 '베세토 협력라인'을 구축하는 방안을 모색해볼 만하다.

세계는 지금 놀란 토끼처럼 휘둥그레 진 눈으로 우리를 바라볼 것이다. 세계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은 지 오랜 인천국제공항에 처음 들어서는 외국인들의 반응도 그러하려니와 K팝 열풍에 이은 강남스타일 돌풍의 진원을 살피며 한국인의 놀라운 문화적 저력에 다시 한 번 감탄할 것이다. 아프리카 난민을 돕는 구원의 손길, 동남아시아 오지에 학교를 지어주는 자선행렬을 보면서 6ㆍ25참전국 용사들은 남다른 보람을 느낄 것이다. 빈곤의 바닥을 딛고 일어선 이 모든 현상이 반세기 안에 이루어진 기적임을 그들이 인지하고 있을 터다.

어떤 주역학자나 점성술사들의 말을 빌리면 어떤 알 수 없는 우주의 기운이 한반도에 모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를 국운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것이 땅의 기(氣)든 또는 사람의 맥(脈)이든, 때는 늘 오지 않는다는 진리를 새겨야 한다.

천시지리인화(天時地利人和)라는 맹자의 왕도론은 아무리 천지의 이익이 있다 해도 인화 곧 '사람의 통합'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정신적 결속과 협력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화합의 걸림돌인 선거열병과 사회분열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찾아가야 한다.

백범 김구 선생이 생전에 남긴 말씀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다. "문화의 힘으로 세계를 감동시키는 나라를 만들자" 최근엔 어느 외국 언론이 평하기를 "한국은 스포츠의 혼이 국민들의 가슴에 새겨진 나라"라고 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새로운 미래를 펼쳐가는 이 시대의 키워드는 오늘의 선거판에서 보는 대립과 반목을 극복하는 통합정신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는 저마다의 정파적 이해를 초월하여 선진국민의 지혜를 모아야 할 시대과제이기도 하다.

 

 

이태영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1210/h2012102621060891560.htm

Posted by 겟업
2013. 1. 3. 12:01

머리가 비었다, 안 비었다를 정의하는 기준이 지식의 양이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삶의 지혜가 있는 사람도 영어를 못하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고, 마이너스 인격에도 주워들은 지식만 가지고 있으면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지식과 분별력의 혼합이 ‘지성’인 것으로 생각되면서 많은 사람이 ‘지성인’의 범주에 속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기 시작했다. 많은 것을 알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것이 물론 중요하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평가절하하는 오만이 될 때 지성은 질병이 된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주유소에서 잠시 일을 했다. 서울 강남 양재대로변 주유소였는데 하루 종일 외제차들이 심심찮게 드나드는 곳이었다. 외고를 졸업하고 과외가 아닌 막일을 택했던 이유는 내가 살던 곳과 다른 세상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에서 타인을 얕보는 지성의 간교함을 봤고, 지성을 이유로 무시당하는 동료들의 먹먹함을 봤다. 입 떡 벌어지게 비싼 차를 몰고 온 사장님은 대뜸 나에게 ‘배운 것도 없는 게’라고 말했다. 주유원이라는 이유로 매일같이 무시당했으나 그 세계를 조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에 위선자들의 거짓 지성 앞에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아직까지도 가끔 그 사장님 생각이 난다. 만일 나를 주유원이 아닌 자제분의 과외선생이나 동료로 만났더라도 그렇게 대했을까.

거짓 지성과 가시적인 품위에 그렇게 학을 떼고, 지성이 꽃을 피울 거라고 생각한 대학에 왔지만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분수에 넘치는 대학에 와서 좋은 점이라고는 지성이 질병이 돼 버린 자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것과 밖에서 부모님의 어깨가 움츠러들지 않는다는 것 정도다. 엘리트라는 허울을 쓴 이들은 남들에게 ‘세상물정 모르는 책벌레’로 여겨지는지 모르고, 각자의 이상에 적합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 이상의 힘을 쏟는다.

영리하고 열정 넘치는 동기들에게 파묻혀 지성이 풍기는 악취에 나의 후각이 마비된 지 4년째.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포부를 품고 무섭게 돌진하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땅으로 꺼지고 싶을 만큼의 공포를 느낀다. 더불어 살고 싶다는 사람은 없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올바른 방향으로 바꾸고 싶다는 사람만 있으니 어찌하면 좋을지 답도 없다.

나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가 지성의 피해자로, 혹은 지성을 빌미로 한 가해자로 살아가고 있다. 오늘도 학원가에는 이른 아침부터 온갖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전철역 계단을 줄 서서 올라가야 하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무엇을 위한 분주함이며 누구를 위한 지성인가. 변화를 갈망하는 자기중심의 지성보다 타인을 세워 주며 함께 사는 지성이 넘쳐나는 사회, 그래서 웃음이 마르지 않을 사회를 감히 꿈꿔 본다.

 


박유진 미국 웰슬리대 미디어학부 4학년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713741&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3. 1. 3. 11:59

챔피언과 도전자가 링 위에서 맞붙었다. 공이 울리자마자 도전자는 저돌적인 공격으로 기선 제압에 나섰다. 챔피언은 방어에 급급한 나머지 주먹 한번 제대로 날리지 못했다. 첫 라운드는 챔피언의 완패. 상대를 얕보고 방심한 탓이 컸다. 챔피언은 태도를 확 바꿨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전략으로 거칠게 몰아붙였다. 그 결과 2, 3라운드에선 어느 정도 실점을 만회했다. 버락 오바마와 밋 롬니가 맞붙은 미국 대선 후보 TV 토론은 주먹 대신 말로 싸운 명승부였다.

토론(debate)의 목적은 자신과 다른 주장을 가진 상대를 논리와 언변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의견 차이를 좁혀 합일점을 찾는 토의(discussion)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토론은 내가 옳다는 신념에서 출발하지만 토의는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가정에서 성립한다. 토의에는 결론이 있지만 토론에는 결론이 없다. 지켜보는 청중이 우열과 승패를 판정할 뿐이다. 토의와 토론을 혼동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대선이 50여 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텔레비전마다 정치 토론 프로그램이 줄을 잇고 있다. 카메라 앞에서 갑론을박하는 토론자들을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쩌면 그렇게 말들을 잘하는지, 나같이 어눌한 사람으로서는 놀랍고 신기할 뿐이다. 가끔 “(너도 언론사 논설위원인데) TV 토론 같은 데 안 나가느냐”고 묻는 친구들이 있다.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답답한 친구들이다. 논설위원이면 다 같은 논설위원인가. TV 토론에 나가는 분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내공을 갖춘 무림(武林)의 고수(高手)들이다. 그런 분들끼리 모여 일합을 겨루는 것이 TV 토론이지, 개나 소나 다 나가면 시청률은 누가 지키나.

논리로 승부하는 토론은 머리싸움이고, 말싸움이고, 기싸움이다. 토론하는 걸 보면 그 사람의 지적 수준과 성격까지 다 드러난다. 보통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나가기 힘들다. TV 토론에 나온 사람들을 보면 토론하는 쟁점에 관한 한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안다는 자신감이 표정과 말투, 눈빛에서 묻어난다.

수많은 시청자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것은 그런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상대의 발언 도중에 마구 끼어들고, 사회자가 말려도 계속 떠들 수 있는 것도 자신감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적절한 비유와 사례를 타이밍 맞게 동원하는 순발력, 상대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집요함, 촌철살인의 한마디로 상대를 제압하는 재치도 감탄스럽다.

토론의 첫 계명은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하는 열쇠도 거기에 있다. 서로를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면서도 수준 높은 논리가 불꽃을 튀기는 멋진 TV 토론을 보고 싶다. 얼굴 두껍고, 목소리 큰 사람이 좌지우지하는 TV 토론은 짜증이 난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713711&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3. 1. 3. 11:51

# 103년 전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쐈다. 그 후 그는 뤼순 감옥에 수감돼 일제의 일방적이고 형식적인 재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국권회복과 동양평화를 위한 의로운 전쟁을 수행한 전쟁포로이기에 만국공법이 아닌 일본제국법정에서 재판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천명한 후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며 항소마저 포기한 채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이 1910년 3월 15일께다. 안 장군은 당초 서(序), 전감(前鑑),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問答)의 5편을 저술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일제가 서둘러 그해 3월 26일 사형을 집행하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았다.

 # 비록 ‘서’와 ‘전감’의 일부만을 쓰는 것에 그친 미완이지만 『동양평화론』과 공판기록 등을 통해 안중근 장군이 생각했던 동양평화의 구상이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 안에는 놀라운 혜안이 담겼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동양평화회의 개최, 한·중·일 동북아 3국 공동은행의 설립과 공용화폐 발행, 뤼순 등 지역 개방과 공동관리 및 동양 3국의 공동군단 편성 등이다. 오늘의 유럽연합(EU)과 같은 동아시아공동체를 100년 전에 그려낸 그의 혜안이 놀랍지 않은가!

 # 작금의 한·중·일은 크고 작은 긴장과 다툼 속에 있다. 하지만 역사의 큰 눈으로 보면 결국 평화와 공존의 흐름을 타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서로에게 이익임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미래에 나타날 동북아연합 내지 블록에서 한국이 분명하게 살아남고 주도적 위치에 서려면 향후 50년, 아니 100년을 내다보며 무엇보다도 한글을 읽고 쓰는 1억 공동체를 창출해야만 한다. ‘1억 한글공동체’야말로 미래의 동북아 블록화에 대비하는 가장 현실적인 생존과 대처방안이다. 현재 남한 인구는 5000만 명을 넘어섰지만 북한 인구는 아직 2500만 명을 넘지 못했다. 여기에 해외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모두 포함해도 8000만 명 안팎이다. 하지만 이것을 1억 명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미래의 우리가 존립할 근거다. 1억 명 규모의 공동체적 내수시장을 확보해 놓고 있어야 블록화된 세계에서도 미래의 생존이 가능하다. EU 내에서 아무리 뒤섞여도 각자의 언어와 문화가 살아있기에 여전히 프랑스요, 독일이요, 이탈리아 아닌가. 마찬가지로 미래의 동북아연합 내지 블록에서 우리가 당당히 우리로 존재하려면 ‘1억 한글공동체’가 핵심이다. 그것이 다름아닌 ‘그랜드 코리아’의 실존이고 요체다.

 #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 지성으로 꼽히는 올해 여든일곱 살의 정의채 몬시뇰 신부가 『인류공통문화 지각변동 속의 한국』이란 책을 펴냈다. 그는 이 책에서 세 번째 밀레니엄, 즉 2000년대에는 동양, 그중에서도 한국이 선도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듯 썼다. 가장 빈곤했던 식민지에서, 그리고 전쟁으로 초토화된 나라에서 당당한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한국의 역할이 주목받을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이 감당해야 할 과제를 ‘따뜻한 자본주의’와 ‘행복한 발전’이란 용어로 압축했다. 깊이 공감한다.

 # 바야흐로 시세(時勢)가 동양(東洋)이다. 한·중·일 3국의 위력과 위세는 경제는 물론 정치·군사·문화 면에서도 EU에 비할 바가 아니고 미국과 러시아마저 넘어선다. 중국은 미국과 자웅을 겨룰 듯한 기세로 나서고 있고 일본 역시 침체됐다고는 하나 그 저력을 무시 못한다. 한국은 지난 60여 년간 바닥치고 일어서 괄목할 만큼 커졌다. 다만 이 변화하는 지형 위에서 어디로, 어떻게 향할지가 문제다. 그 해답의 단초가 놀랍게도 안중근 장군의 100여 년 전 ‘동양평화론’ 안에 있음을 감히 말하고 싶다. 박근혜·문재인·안철수 3인은 짬을 내 『동양평화론』과 공판기록 등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비록 5년 임기지만 향후 50년, 아니 100년을 내다보는 그랜드비전을 마음에 심고 그려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진짜 리더다.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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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3. 11:50

요즘 대기업 취업은 고시 합격에 비유되곤 한다. 지방대학에서는 재학생이 대기업에 취직하면 현수막이 걸릴 정도라고 한다. 그만큼 경쟁도 세다.

젊은이들이 대기업 취업에 목매는 이유는 중소기업과 임금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가 올 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중소기업(5~299인 고용) 상용자의 월평균임금은 263만 8,000원으로 대기업 평균임금 417만5,000원의 63.2%였다. 2000년에만 해도 대기업의 71.3%였으나 차이가 커졌다. 그나마 300명을 고비로 기업을 구분해서 나온 격차가 이 정도이고 1,000명 이상 고용기업과 그 이하 기업, 또는 50대 기업과 나머지 기업을 비교하면 차이는 더 클 것이다. 올 대졸공채의 초임 자체가 월 417만원을 넘어서는 대기업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임금격차도 크다. 통계청이 어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 6~8월 비정규직의 월평균 임금은 139만3,000원으로 정규직 246만원의 56.6%였다. 이 격차도 작년보다 커졌다. 심지어 '알바'로 불리는 시간제근로자는 정규직의 24.6%인 60만7,000원을 받았다. 상여금 퇴직금 수당 휴일 같은 혜택까지 감안하면 그야말로 사는 공기가 다르다고 하겠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비정규직이 30%나 된다.

그러니 대기업 정규직의 급행열차를 타려고 청년들은 몸부림칠 수밖에 없다. 어렵사리 들어간 기업체에서는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하니 과노동에 시달려도 말을 못하고 사회 전체가 짐승 같은 시간을 산다.

고임금을 고수하는 대기업은 고수익을 내야 하고 고수익을 내려면 하청단가와 비정규직 임금 후려치기가 가장 만만하다. 쥐어짜인 하청기업은 재하청기업을 쥐어 짜고 더 임금을 줄인다.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명문대 입학에 목을 매고 명문대 입학에 목을 매면서 사교육 시장이 커지고 사교육 시장의 격차는 소득에 따라 나뉘니 부익부 빈익빈의 차이는 대를 물려간다. 계층간의 이동 사다리마저 사라져버리면 사회는 불만에 가득한 빈곤계층과 지위에서 밀려날까 불안에 떠는 기득권층으로 양분될 수도 있다. 이런 사회에서 묻지마 범죄가 일어난다. 모두 잘 살기 위해 정말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실 해법은 간단하다.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이라는 원칙을 세우고 이걸 어기는 기업을 대대적으로 단속하면 된다. 비슷한 땀을 흘리는 이들은 비슷한 돈을 벌어야 한다고 온 사회가 동의하고 철두철미 지키면 된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데에는 기업 뿐 아니라 노동자들 안에도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정규직들이 비정규직의 문제를 제 일로 알고 같이 싸워줬다면 이 문제는 진작에 풀렸을 수도 있다.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므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라는 대법원 판결을 받고서도 현대자동차가 10개월이 지나도록 지키지 않는 것도 이런 구석을 믿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주요 후보들은 듣기 좋은 정책을 앞다퉈 던지고 있지만 실상 그 내용은 크게 차이가 없다. 정작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근본에 대한 통찰력과 구체적인 실행력이다. 이윤을 내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이 함께 사는 방안이 중요하다는 것을 기업 뿐 아니라 온 사회구성원들에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온 사회도 기업이나 개인이 과도한 수익을 내는 것을 대단한 업적으로 찬양할 것이 아니라 이익을 독점한 결과는 아닌지 물을 수 있을만큼 성숙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대통령이 필요하다. 기업가들과 어깨동무만 하는 후보는 아예 자격이 없다. 비정규직과 같은 약자들의 현장을 찾는다면 보기는 좋지만 부족하다. 기득권을 가진 이들을 찾아서 불이익을 감수하도록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길게 보고 멀리 보면서 가진 것을 두루 나누게 할 수 있는 대통령을 기다린다.

 

 

 

서화숙선임기자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0/h201210252028476780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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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3. 11:50

옥중의 아버지는 열세살 외동딸의 생일에 해줄 것이 없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마저 감옥에 있어 더 가여운 딸에게 아버지는 형무소의 높은 담도 가로막을 수 없는, 영혼으로 된 선물을 보냈다. 3년 동안 딸에게 보낸 196통 편지의 내용은 세계사였다. 인도의 독립을 위해 영국에 저항하며 아홉번 감옥에 갔던 네루는 세계사의 물결 속에 흐르는 신성한 임무에 대한 의식을 상기시키려고 딸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단적으로 그 임무란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용감하게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요구였다.

 

<세계사 편력>이라는 책이 된 그 편지를 쓰기 위해 네루는 자신의 기억에만 의존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명의 출발점부터 자신이 살던 시대까지 망라하며 역사를 보는 원대한 안목을 드러냈다. 그는 학교에서 나라별로 역사를 가르치는 방식을 못마땅하게 여겨, 역사의 부분에 대한 이해를 돕는 세계 전체의 역사를 딸에게 설명했다. 그런 논지의 밑바닥에는 인도에서, 그리고 인도를 넘어 전 세계에서 억압받는 민중에 대한 애정이 깔려 있다.

 

그는 몽골 제국과 칭기즈칸을 강조하며, 아시아의 위대성을 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런 연유로 그 책은 유럽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난 최초의 시도라는 평가를 받는다. 유관순 열사에 대해서는 일제에 저항한 용감한 여성이라고 말하며 딸에게 “3·1정신을 본받으라”고 권했다. 한마디로 그는 오늘날 역사학의 흐름 가운데 하나인 ‘약자의 눈으로 보는 역사’를 이미 오래전에 실천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이런 가르침을 받은 딸 인디라 간디가 총리가 되어 인도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일본 장교 출신으로 헌정 파괴를 자행했던 아버지가 억압적으로 강탈한 것에 대해 변명으로 일관하는 이 땅의 어느 딸에게 <세계사 편력>의 일독을 권한다. 고통받는 민중과 그들의 역사에 대한 성찰은 딴 나라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573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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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3. 11:49

놀랍다. 아니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 측면이 적지 않다. 3개월여 동안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싸이의 뮤직비디오 ‘강남 스타일’광풍 말이다. 요즘 비즈니스맨들은 미국 유럽 아프리카를 막론하고 “말춤을 춰 보라”고 요구하는 사람들 때문에 난감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라고 한다. 독특하고 재미있는 콘텐츠가 유튜브를 타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전세계로 확산됐다거나, 불황의 시대에 즐거울 일 없는 지구인들이 말춤의 흥겨움에 빠졌다는 해석 만으로 광풍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을까? 끊임 없이 유튜브에 올라 오는 강남스타일 관련 동영상들을 보면 의문이 꼬리를 문다.

유튜브 상에 올라온 강남스타일 관련 동영상은 10만 건이 넘는다. 동영상은 크게 네티즌 반응을 담은 ‘리액션’, 혼자 또는 친구들과 춤을 따라 하는 ‘커버댄스’, 거리 광장 등 특정 장소에 모여 춤을 춘 뒤 흩어지는 ‘플래시몹’, 강남스타일을 모방한 ‘패러디’ 등으로 나뉘는데, 이들을 보면 웹 비디오 시대의 새로운 트렌드를 읽을 수 있다.

우선 음악 소비 방식에 일대 전환이 일고 있다. ‘친구들끼리 비디오를 보며 웃고 떠드는 게 뭐 대단하다고 비디오로 찍어 유튜브에까지 올렸을까’하고 들여다 보면 조회수가 수백 만건에 달해 깜짝 놀라게 된다. 이런 리액션 동영상들은 바이러스처럼 네트워크를 통해 퍼져 강남스타일의 세계적 확산의 시발점이 됐다. ‘보는 음악’을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네트워크로 연결된 사람과 동영상으로 함께 소비하며 공유하는 세대가 등장했다고 봐야 한다.

또 다른 특징은 동영상들이 끊임 없이 ‘진화’한다는 점이다. 플래시몹 동영상들은 서로 경쟁하며 규모가 갈수록 커진다. 이달 초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에서 벌어진 플래시몹에는 무려 9,000여 명이 참가했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건 패러디다. 강남스타일의 일부를 코믹하게 변형한 것에서 출발해 나중에는 음원만 채택했을 뿐 기발한 발상으로 완전히 새롭게 제작한 풍자 비디오들이 등장해 폭발적 반응을 얻고 있다.

세계적인 지식컨퍼런스인 ‘테드(TED)’의 큐레이터 크리스 앤더슨은 2010년 7월‘웹 비디오가 어떻게 글로벌 혁신을 가속화하는가’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인터넷이 춤을 진화시킨다”고 말했다. 온라인 상에서 네크워크로 연결된, 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상호 경쟁하면서 각종 춤 기술을 개발하고 서로 학습하며 그 중 가장 잘하는 사람들에게 (조회수나 트위터, 구글 링크, 페이스북 등을 통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준다. 이렇게 누구나 혁신적인 춤으로 스타가 될 수 있다는 욕망을 자극해 춤을 진화시키고 더 많은 사람들을 춤의 세계로 끌여들여 이른바‘집단에 의해 가속화되는 혁신’의 사이클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의 강정수 박사는 “집단ㆍ빛ㆍ욕망, 이 세가지만 있으면 어떤 웹상의 플랫폼도 작동한다는 게 앤더슨의 설명”이라며 “대표적인 것이 유튜브이고, 그 공간에서 같은 방식으로 수 많은 집단들을 몰입시킨 콘텐츠가 다름 아닌 강남스타일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셈”이라고 말했다.

강남스타일 신드롬은 인터넷 시대에 우리가 어디쯤 와 있는지를 보여준다. 문자나 메시지 대신 동영상 등을 주고받을 수 있는 3G,4G 시대는 콘텐츠 소비 행태를 완전히 바꿔놓고 있다. 이것은 뮤직 비디오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일부 선진 기업들은 이미 신기술과 이를 적용하는 시연 동영상을 SNS를 통해 해외 생산공장으로 전파ㆍ공유하고 있는데, 현지 언어로 번역해야 하는 복잡한 문서화 과정이 없어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한다.

현재 웹 공간 내 콘텐츠(데이터)의 50%는 동영상이다. 2014년쯤에는 전체의 90%에 달할 전망이라고 한다. 강남스타일과 관련 동영상들은 글로벌 시대에 새로운 차원의 변화가 경제 사회는 물론 문화 영역에서까지 일고 있다는 징표이자, 우리가 그런 시대에 본격 진입했음을 가장 떠들썩하게 알려주는 극적인 사례일 것이다.

 

 

박진용 산업부차장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0/h201210222121242442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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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3. 11:46

우리가 확률이 높다는 이유로 아직 저지르지 않은 일을 처벌할 수 있을까. 그것이 100%에 가깝다 하더라도.

우리는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얼마만큼이나 확신을 갖고 있을까. 그것이 0%와 다르지 않다 하더라도.

강력 성범죄와 정신질환자들의 ‘묻지 마’ 범죄가 잇따르면서 사회적으로 효과적인 제재 방안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거세(去勢)-화학적 제재이지만-와 격리와 관련된 부분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형제가 필요하고, 피해자가 억울하지 않을 정도로 형벌이 더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세나 격리처럼 ‘미래 범죄’를 사전에 막기 위한 조치는 좀더 신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것이 가능성은 높을지언정 아직 일어나지 않은 행위를 선(先)처벌하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스스로 원한다면 별문제다).

재범 우려가 높은 성범죄자를 거세하고, 정신질환자를 격리하면 범죄는 확실히 줄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명암(明暗)이 존재한다. 범죄 감소와 함께 우리가 잃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자율적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범죄예방 시스템 덕분에 살인 범죄율 0%를 달성한 한 도시의 이야기다. 3명의 예지자와 과학을 결합해 살인 발생 전에 범인 이름을 알려주는 시스템. 이 완벽한 결과 앞에 수사관들은 범죄를 아직 저지르지 않은 사람을 체포, 구금하는 데 추호의 거리낌도 없다. 특히 수사반장인 존 앤더턴(톰 크루즈 분)은 여섯 살 아들이 유괴돼 살해당한 후 범죄예방 필요성에 더욱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어느 날 자신이 미래의 살인범으로 예고돼 쫓기면서 비로소 예고된 살인자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고, 예지자가 본 미래도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지막 순간, 아들의 살인범 앞에 총을 들고 선 존에게 함께 도주한 예지자가 외친다.

“당신은 미래를 알고 있으니 원한다면 미래를 바꿀 수 있어요.”

효과적으로 범죄를 예방할 방법이 있다면 쓰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 이 유혹은 범죄가 더 흉포해지고 빈번할수록, 예방 시스템이 더 효과적일수록 우리의 사고(思考)를 마비시키고 의심의 여지가 없게 만들 것이다. 더욱이 다수의 안전과 평생 한을 안고 살아야 할 유가족을 생각하면 반론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아프지만 총을 내리고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통제할 수 있다면 이것은 점점 더 그 범위를 확산시킬 것이다. 통제가 강할수록 범죄는 줄 것이고, 범죄가 줄수록 그 방식의 유효성을 의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리 가둬놓고 범죄가 줄었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일까.

범죄 가능성이 높은 누군가가 교화(敎化)에 의해 실제로 변할지는 미지수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포기하면 안 되는 것은 ‘인간은 변화할 수 있으며, 우리는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배신당할 때가 더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전쟁과 범죄를 겪으면서도 인류가 거꾸로 가지 않은 것은 ‘사람은 달라질 수 있고, 달라져 왔다’는 믿음 때문이 아닐까. 많은 비용이 들어감에도 그들을 교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실제 교화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이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이진구 사회부 차장

 

 

http://news.donga.com/3/all/20121024/50338714/1

Posted by 겟업
2013. 1. 3. 11:45

가끔 귀갓길에 서울 서초동을 지날 때면 언덕 위 법원 청사를 바라보곤 합니다. 사건의 홍수 속에 밤늦게까지 남아 재판기록을 펼칠 수밖에 없는 판사들의 고단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일엔 재판을 하느라 휴일에도 사무실에 나와야만 하지요. “판사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그나마 대한민국 법원이 돌아간다.” 한 퇴임 대법관에게서 들은 말이 기억납니다.

그래서 법원 판결에 대해 거센 비난이 일 때마다 판사들이 느낄 당혹감을 이해합니다. 최선을 다해 재판하고 판결했는데 왜 반발을 하는 걸까. 무슨 이유로 판사를 신상털이 하고 보수니, 진보니 하는 특정 진영을 위해 판결했다고 의심하는 걸까. 답답한 심정들일 것입니다.

“그럼, 여론재판을 하라는 거냐”고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헌법에 규정된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가 아니라 ‘헌법과 법률에 근거해 여론에 따라’ 재판하라는 것으로 말입니다. 여론이 판결 하나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상황에서 재판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왜 여론을 무시하느냐”는 지적과 “너무 여론 눈치를 보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지난 4월 경기도 수원에서 20대 여성을 납치해 살해한 우위안춘(오원춘·42)에 대한 2심 판결이 지난주 나왔습니다. 1심에서 선고됐던 사형이 무기징역으로 낮춰졌습니다. 감형 이유로 “‘인육 제공 목적으로 범행했다’는 1심 판단의 근거가 약하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판사들에게 전화를 걸어봤습니다.

판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을 영원히 박탈하는 사형은 극히 예외적인 형벌로 최대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피해자 수도 중요하다. 최근엔 피해자가 한 명인 살인범에 사형이 확정된 적이 없다. 잔혹하고 엽기적이긴 하지만 사체 훼손은 피해자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비슷한 방법이 사용된 것과 다르지 않느냐.

피해자 유족과 시민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얼마나 더 끔찍해야 사형을 내리는 것이냐. 인육 제공 목적이 아니라는 판단이 잔인한 살인범의 형량을 감형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피해자가 한 명이라도 그 죄질에 따라 다르게 봐야 한다. 판사들은 “무기징역은 종신형”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교도소에서 20년 정도 복역하면 가석방으로 나올 수 있지 않느냐.

국민과 판사들의 인식 사이에 큰 괴리가 느껴집니다. 저는 그것을 법 논리와 법 감정의 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위안춘 판결문을 보면 논리적으로 빈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친절한 각주까지 붙어 있습니다. 다른 강력범죄자에 대한 판결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판례와 법리의 오솔길을 따라갑니다. 다만 결론에 이르면 한결같이 피고인의 불우한 환경, 반성하는 태도, 교화 가능성에 주목합니다.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흉악 범죄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야 할 필요성은 그 뒤에 가려집니다.

아무래도 법정에서 피고인을 직접 대면하고 있으면 측은한 마음이 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법관의 양심(良心)’이란 것이 착한 마음, 어진 마음만 뜻하는 건 아니라고 믿습니다. 양심은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법관의 양심엔 범죄로부터 국민을 지키려는 단호한 의지와 악(惡)에 대한 냉정한 분노도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판사들이 격렬한 트위터나 댓글에 상심하지 말고 그 밑에 흐르는 법 감정이 무엇인지 고민해주길 바랍니다. 국민의 법 감정은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그 결론에 맞지 않는다고 몰아세우는 여론과는 다르다고 봅니다. 제 아무리 정교하고 훌륭한 법 논리도 국민의 법 감정과 동떨어져 있다면 울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제 많은 이들이 판사들에게 묻습니다. 피고인뿐 아니라 피해자 입장에도 서본 뒤 판결을 내리고 있는가. 법원 청사의 스크린도어에 갇혀 거리와 골목의 한숨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건 아닌가. 그리고 이 물음에 답할 책임은 전국의 2715명 판사 모두에게 있습니다.

 

 

 

권석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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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3. 1. 3. 11:44

우리는 건국 64년 만에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가 됐다
최근 한국의 달라진 국제 위상을 실감케 하는 뉴스가 이어져…
그러나 다음 5년의 리더를 뽑는 대선에서 이 이슈는 실종됐다

우리나라의 국제적 지위가 지금처럼 높았던 적은 없었던 것같다. 지난 한 주 동안 일어난 일만 봐도 그렇다. 한국은 유엔 안보리(安保理) 비상임이사국이 됐다. 안보리 진출 다음날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기구인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을 인천 송도에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1991년 유엔의 정식 회원국이 됐다. 건국 43년 만이다. 독립국 지위만 가지면 들어갈 수 있는 유엔에 가입하는 데 우리는 무려 43년이나 걸렸다. 냉전(冷戰)과 남북 분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유엔 가입 21년 만에 유엔을 대표하는 사무총장 재선(再選)에 성공했고,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 두 번 선출됐다. GCF는 전 세계 190여개국이 참여하는 국제기구다. 일단 500여명으로 시작되는 사무국 규모로 볼 때 인천 송도가 미국 워싱턴 DC(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뉴욕(유엔), 스위스 제네바(세계무역기구), 프랑스 파리(경제협력개발기구)와 같은 반열에 올라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전 뉴욕에서 열린 한 행사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김용 세계은행 총재가 나란히 단상에 오르자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한국 사람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조크를 했다고 한다. 유엔과 세계은행의 수장(首長)을 한국인이 동시에 맡고 있다고 해서 한 말이란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미국의 전·현직 대통령이 조크라 할지라도 '한국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할 만큼 우리의 국제적 지위는 과거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올가을 세계 3대 신용 평가사인 무디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피치가 차례로 한국의 신용 등급을 올렸다. 피치는 우리의 신용 등급을 일본보다 높게 매기기도 했다. 1997년 가을 외환 위기가 터졌을 때 3개 평가사는 모두 한국을 '투기 등급'으로 분류했고, 일부 평가사는 우리의 신용 등급을 10단계나 하향 조정했었다. 당시 일본의 신용 등급은 최상위인 트리플 A였다. 우리는 15년 만에 그랬던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일본을 앞서게 된 것이다.

외환 위기 당시 워싱턴 특파원으로 근무했던 기자는 돈을 빌리기 위해 워싱턴의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뉴욕의 월스트리트를 전전하던 우리 정부 및 재계 대표단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 그때만 해도 미국에서 TV 등 가전제품을 사려고 매장을 찾으면 소니와 파나소닉 등 일본 제품에 가려 삼성과 LG는 찾기도 어려웠다. 현대차는 '싼 차(車)'의 대명사였고, 일본 도요타의 렉서스는 '꿈의 차(車)'라는 극찬 속에 고급차 시장을 휩쓸고 있었다. 그러나 3년 전쯤 들른 워싱턴 DC 인근의 전자 매장에서 소니 TV 앞을 기웃거리자 매장 직원이 "요즘은 삼성·LG 제품이 대세"라는 말을 건네며 다가왔다. 현대자동차는 미국에서 더 이상 싸구려 취급을 받지 않는다.

지난 몇년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한국을 보는 세계의 눈은 이렇게 달라졌다. 한국은 이제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가 됐다. 어느 국제회의를 가도 '한국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세계 어느 나라도 한국을 가볍게 대하지 않는다.

요즘 대선 지면(紙面)을 만들면서 자주 드는 생각이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가 과연 달라진 한국의 지위에 걸맞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들이 대선 출마를 선언한 후 뉴스는 대부분 후보들의 '과거'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박 후보는 부친의 집권 시절에 관련된 일들, 문 후보는 자신의 보스였던 노무현 정부 시절의 문제, 안 후보는 개인사(史)가 뉴스의 초점이 됐다. 이 자체를 뭐라 하긴 어렵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할 검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과거 논란에 묻혀 세계의 중심에 선 한국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 하는 문제가 실종돼 버렸다. 여기에는 세 후보의 책임이 가장 크다. 이들 누구도 이 문제를 입에 올리지 않고 있다. 이들이 내놓는 각종 정책은 서로 베끼기 경쟁 끝에 변별 불가능한 닮은꼴이 됐고, 이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이 나눠주겠다는 말만 하고 있다.

박·문·안 세 후보도 다음 대통령의 임기 5년이 '어려운 시절'이 될 것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대선의 쟁점이 돼야 하지만 누구도 정면으로 이 문제를 다루려 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건국 64년 만에 지금과 같은 국제적 지위를 갖게 됐다. 요즘 세 후보의 모습을 보면 다음 5년이 이런 성취를 까먹는 시간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도 어렵다.

 

 

박두식 정치부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0/23/20121023010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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