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건국 64년 만에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가 됐다
최근 한국의 달라진 국제 위상을 실감케 하는 뉴스가 이어져…
그러나 다음 5년의 리더를 뽑는 대선에서 이 이슈는 실종됐다
우리나라의 국제적 지위가 지금처럼 높았던 적은 없었던 것같다. 지난 한 주 동안 일어난 일만 봐도 그렇다. 한국은 유엔 안보리(安保理) 비상임이사국이 됐다. 안보리 진출 다음날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기구인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을 인천 송도에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1991년 유엔의 정식 회원국이 됐다. 건국 43년 만이다. 독립국 지위만 가지면 들어갈 수 있는 유엔에 가입하는 데 우리는 무려 43년이나 걸렸다. 냉전(冷戰)과 남북 분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유엔 가입 21년 만에 유엔을 대표하는 사무총장 재선(再選)에 성공했고,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 두 번 선출됐다. GCF는 전 세계 190여개국이 참여하는 국제기구다. 일단 500여명으로 시작되는 사무국 규모로 볼 때 인천 송도가 미국 워싱턴 DC(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뉴욕(유엔), 스위스 제네바(세계무역기구), 프랑스 파리(경제협력개발기구)와 같은 반열에 올라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전 뉴욕에서 열린 한 행사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김용 세계은행 총재가 나란히 단상에 오르자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한국 사람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조크를 했다고 한다. 유엔과 세계은행의 수장(首長)을 한국인이 동시에 맡고 있다고 해서 한 말이란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미국의 전·현직 대통령이 조크라 할지라도 '한국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할 만큼 우리의 국제적 지위는 과거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올가을 세계 3대 신용 평가사인 무디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피치가 차례로 한국의 신용 등급을 올렸다. 피치는 우리의 신용 등급을 일본보다 높게 매기기도 했다. 1997년 가을 외환 위기가 터졌을 때 3개 평가사는 모두 한국을 '투기 등급'으로 분류했고, 일부 평가사는 우리의 신용 등급을 10단계나 하향 조정했었다. 당시 일본의 신용 등급은 최상위인 트리플 A였다. 우리는 15년 만에 그랬던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일본을 앞서게 된 것이다.
외환 위기 당시 워싱턴 특파원으로 근무했던 기자는 돈을 빌리기 위해 워싱턴의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뉴욕의 월스트리트를 전전하던 우리 정부 및 재계 대표단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 그때만 해도 미국에서 TV 등 가전제품을 사려고 매장을 찾으면 소니와 파나소닉 등 일본 제품에 가려 삼성과 LG는 찾기도 어려웠다. 현대차는 '싼 차(車)'의 대명사였고, 일본 도요타의 렉서스는 '꿈의 차(車)'라는 극찬 속에 고급차 시장을 휩쓸고 있었다. 그러나 3년 전쯤 들른 워싱턴 DC 인근의 전자 매장에서 소니 TV 앞을 기웃거리자 매장 직원이 "요즘은 삼성·LG 제품이 대세"라는 말을 건네며 다가왔다. 현대자동차는 미국에서 더 이상 싸구려 취급을 받지 않는다.
지난 몇년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한국을 보는 세계의 눈은 이렇게 달라졌다. 한국은 이제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가 됐다. 어느 국제회의를 가도 '한국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세계 어느 나라도 한국을 가볍게 대하지 않는다.
요즘 대선 지면(紙面)을 만들면서 자주 드는 생각이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가 과연 달라진 한국의 지위에 걸맞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들이 대선 출마를 선언한 후 뉴스는 대부분 후보들의 '과거'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박 후보는 부친의 집권 시절에 관련된 일들, 문 후보는 자신의 보스였던 노무현 정부 시절의 문제, 안 후보는 개인사(史)가 뉴스의 초점이 됐다. 이 자체를 뭐라 하긴 어렵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할 검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과거 논란에 묻혀 세계의 중심에 선 한국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 하는 문제가 실종돼 버렸다. 여기에는 세 후보의 책임이 가장 크다. 이들 누구도 이 문제를 입에 올리지 않고 있다. 이들이 내놓는 각종 정책은 서로 베끼기 경쟁 끝에 변별 불가능한 닮은꼴이 됐고, 이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이 나눠주겠다는 말만 하고 있다.
박·문·안 세 후보도 다음 대통령의 임기 5년이 '어려운 시절'이 될 것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대선의 쟁점이 돼야 하지만 누구도 정면으로 이 문제를 다루려 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건국 64년 만에 지금과 같은 국제적 지위를 갖게 됐다. 요즘 세 후보의 모습을 보면 다음 5년이 이런 성취를 까먹는 시간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도 어렵다.
박두식 정치부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0/23/2012102301023.html
'교양있는삶 > 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학생 칼럼] 당신의 지성은 차라리 질병입니다 (0) | 2013.01.03 |
---|---|
[서화숙 칼럼/10월 26일] 불이익을 설득할 지도자 (0) | 2013.01.03 |
소프트파워 강대국의 힘 (0) | 2013.01.03 |
[삶과 문화/10월 23일] 이상한 것에 익숙해지지 않기 (0) | 2013.01.01 |
[특파원 칼럼/10월 22일] 이젠 놀고 싶은 13억 중국인 (0) | 2013.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