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1. 13:36

1946년 9월28일 가로명제정위원회가 구성되어 서울 지명에서 '왜색'(倭色)을 지우는 작업이 시작됐다. 위원회는 일본식 지명인 마치(町)를 모두 동(洞)으로 바꾸고 일본인의 이름을 땄거나 식민통치와 관련해 특별한 상징성을 지녔던 지명에는 우리 역사상의 위인들 이름과 시호를 붙이기로 했다. 이에 따라 서울 일본인 거주민의 중심지였던 혼마치는 이순신 장군의 시호를 따서 충무로가 되었고, 중국인들이 많이 살았던 고카네초오는 살수대첩을 이끈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의 이름을 따서 을지로가 되었다. 경복궁 남쪽 거리에는 세종 같은 좋은 지도자가 거듭 나오라는 기원을 담아 세종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20여년이 지난 1967년엔 정권 제2인자였던 김종필을 회장으로 하여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위원회는 장소의 역사성을 고려하여 세종대왕 동상은 세종로에, 충무공 동상은 충무로에, 을지문덕 동상은 을지로에 각각 세우기로 계획했다. 그런데 동상 제막을 앞두고 갑작스레 계획이 변경되었다. 서울의 중심이자 나라의 중심인 세종로에는 무인의 동상을 세우는 것이 군 출신 통치자에게 더 어울린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 탓에 세종대왕 동상은 아무 연고도 없는 덕수궁으로 밀려났고, 지명과 동상의 연계를 고집할 이유도 없어졌다. 당시 세종로에 충무공 동상을 세우는 것이 '이상'하다고 느낀 사람들은 많았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은 이 이상한 상징의 중첩에 익숙해졌다.

그로부터 다시 40여 년이 흐른 뒤, 세종로에 광장을 조성하기로 한 서울시는 충무공 동상 이전을 검토했다. 그런데 압도적 다수의 시민들이 이에 반대했다. 이미 세종로가 충무공으로 표상되는 '이상한' 현상에 익숙해졌기에, 변화를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종대왕 동상을 충무공 뒤에 세운 것은 이런 상황에서 나온 궁여지책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아주 '이상'하다. 청계광장 쯤에서 경복궁 쪽을 바라보면 궐 밖 어정쩡한 곳에 앉아 있는 세종대왕을 충무공이 호위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은 이 이상한 모양새에도 익숙해 질 것이다.

1967년 서울시는 한강 변에 새 제방을 쌓고 그 위에 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새 제방과 이전 제방 사이에 생긴 땅을 택지로 조성해 팔면 막대한 건설 경비를 조달할 수 있다고 판단한 서울시와 정부는 68년 '한강개발 3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본격적인 한강변 개발에 나섰다. 이와 함께 공유수면 매립 사업도 벌어졌다. 한강 변 얕은 곳을 매립하여 택지를 조성한 이 사업에 따라 강변에 아파트만 빼곡히 들어서고 육지와 강이 완전히 분리되었다. 서울에 처음 온 외국인들은 아파트밖에 안 보이는 이상한 강변 경관에 놀라움을 표하지만, 요즘 서울 사람들은 강변 제방 바로 옆에 아파트가 있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88올림픽 개최가 확정된 후 경기장 건설과 불량주택 밀집 지역의 합동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건설자재가 부족에 직면하자, 전두환 대통령은 서울시장에게 한강의 골재와 고수부지 활용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한강 전역에서 모래와 자갈이 사라졌고, 잠실과 신곡에 각각 수중보가 건설되어 물의 자연스런 흐름을 방해했다. 강변 모래톱도 다 없어지고 그 대신 둔치에 잔디광장과 체육시설이 만들어졌다. 지금 한강은 강바닥도 물도 강변 환경도 '정상적'인 강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한강을 '정상 상태'로 되돌리자고 하면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 받기 십상이다.

권위주의 통치와 압축성장은 이 사회 곳곳에 이상한 경관, 현상, 관행, 시설들을 남겨 놓았고, 대다수 국민들은 그 이상한 것들에 이미 익숙해있다. 대선을 앞두고 각 후보 진영에서 이런 저런 약속들을 하고 있는데 모두가 일반 국민들 듣기 좋은 이야기들뿐이다. 정치 지도자가 국민의 쓴 소리를 듣지 않는 것도 문제이나, 국민이 쓴 소리 하는 정치인을 배척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국민들 스스로 특이한 역사 진행 경로에서 형성된 이상한 자기 모습을 성찰하지 못한다면, 후손에게 정상적인 나라를 물려줄 수 없다.



전우용 역사학자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0/h2012102221023581920.htm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