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3. 12:36
우리 시대에 ‘긍정적’이라는 형용사는 사람의 성격을 지칭하는 많은 단어들 중 월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긍정적인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에게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좌절하거나 남 탓을 하지 않고, 그 속에서 교훈을 찾아내고 자신을 바꾸려 노력하는 데 있다. 성공한 스포츠 선수부터 잘나가는 연예인, 멘토링을 하는 교수와 대선을 앞둔 대통령 후보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할 것 없이 강조하는 게 바로 ‘긍정’이다.

 

<휴먼스토리─덤벼라! 인생>(MBC)이나 <강연 100℃>, <이야기쇼 두드림>(KBS) 등은 좌절을 딛고 자기에 대한 긍정적 믿음으로 결국 ‘승리’한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슈퍼스타케이4> 등 오디션 프로그램에 깔린 철학 역시 마찬가지다. ‘기적을 노래’할 수 있을 만큼의 긍정적 사고와 피나는 노력이 없다면 ‘슈퍼스타’가 될 수 없다.

 

‘긍정적 사고’(positive thinking)에도 역사가 있다. 바버라 에렌라이크에 따르면, 미국에서 긍정적 사고는 죄의식과 자기절제, 노동윤리를 강조하던 칼뱅주의 기독교 정신에 대한 반발로 생겼다. 칼뱅주의적 엄격함 속에서 유행하던 신경쇠약이라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19세기 중엽에 피니어스 큄비와 메리 베이커 에디는 ‘신사고’(New Thought) 운동을 전개하는데, 이들은 심판하는 신의 이미지 대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따뜻한 정신으로서의 신을 주창한다. 정신이 제일이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는 것이 핵심이 된다.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것이 치유의 지름길인 것. 윌리엄 제임스나 에머슨 등 유명한 지식인들 역시 신사고 운동의 지지자들이었다.

 

하지만 이 긍정적 사고는 칼뱅주의의 유산을 여전히 간직한다. 자기절제와 노동윤리는 더욱 강화되고, 죄의식 대신 ‘부정적 사고’에 대한 끝없는 경계가 들어선다. 20세기를 거치며 미국에서 ‘긍정적 사고’의 철학은 복음주의 기독교, 기업의 노동자 교육과 결합하면서 부와 성공을 염원하는 대중의 신화가 되었다.

 

긍정적 사고는 기독교와 기업의 영향력이 큰데다 성공에 대한 압박이 강한 한국에서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 1980년대만 해도 체제에 저항하는 투사, 곧 ‘비판적 인간’이 얼마간 이상화되었다면, 민주화 이후의 세상에서 ‘비판’은 ‘긍정’에 자리를 내준다. 긍정적 사고의 문화는 ‘사회’ 대신 ‘인적 자본’으로서의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부과하는 신자유주의 질서와도 부합한다. 힘들어도 체제 탓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개인의 정신자세와 노력 여부로 연결시키는 긍정적 인간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가 원하는 이상적 주체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살인적인 경쟁 속에서 ‘긍정적 사고’만으로 승자가 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감춰진다. 그저 노력하는 자세의 아름다움만 찬양될 뿐, 어쩌다 승리한다면 ‘대박’나는 것이고, 실패한다 해도 그건 나의 부족함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로 가득한 ‘긍정적’ 세상이야말로 지배하기에 가장 용이한 곳이리라. 긍정적 사고의 문화가 탈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긍정적 사고가 가득한 곳일수록 다른 방식의 혐오가 넘친다는 점은 흥미롭다. 긍정적 사고가 가진 특유의 전투성은 실패한 이들, 저항하는 이들을 희화화한다. ‘비판만 일삼는 이들’을 뜻하는 ‘좌빨’, 나아가 ‘종범’, ‘듣보잡’, ‘지잡대’ 등의 인터넷 신조어들에는 모두 실패한 이들, 변두리에 있는 이들에 대한 혐오가 강하게 드러난다. 여성, 비정규직, 장애인, 빈민, 외국인 노동자도 흔한 목표물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현실의 문제들을 현실적으로 힘없는 주체들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우리 시대의 지배적 태도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낸다. 2007년 이후 ‘이명박’이란 긍정의 아이콘이 보여주듯, 역설적으로 긍정적 사고는 어떤 지독한 부정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것이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587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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