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 박물관에서 노(老)정치인의 은퇴 기념 연회가 열렸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앞에서다. 권력욕을 대변하는 이 화려한 그림을 둘러싼 잔치가 민망했던 정치가는 슬쩍 빠져나와 맨발로 박물관 곳곳을 순례한다. 종착지는 장 앙투안 와토의 로코코 회화 ‘키테라 섬의 순례’. 호리호리한 젊은이들이 사랑의 섬으로 여행 간다는 그림이다. 사랑의 설렘과 함께 그 사랑이 곧 식을 것이며 젊은이들은 언젠간 늙고 죽을 거라는 덧없음도 담겼다. 현실 정치에 찌든 노인은 잊었던 환상과 설렘의 순간을 떠올리며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최근 출간된 만화책 『매혹의 박물관』(크리스티앙 뒤리외, 열화당)의 내용이다. 루브르 만화총서 제7권으로 프랑스의 만화전문 출판사 퓌튀로폴리스와 루브르 공동기획이다. 루브르는 만화가들에게 이 박물관을 주제로 만화를 그려줄 것을 의뢰했고, 선정된 만화가들은 전시장뿐 아니라 방대한 수장고, 후미진 지하실 등 일반인이 접하기 어려운 박물관 구석구석을 마음껏 돌아보는 특권을 누렸다. 먼 미래의 탐사대가 빙하에 파묻힌 루브르의 명작을 발굴한다는 기상천외한 내용의 『빙하시대』(2005)를 시작으로 일곱 권의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이 세상에 나왔다.
만화 『매혹의 박물관』의 한 장면.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610x931㎝)을 배경으로 했다. [사진 열화당]
12년째 루브르를 이끌고 있는 앙리 루아레트 관장은 “이야기를 창조하는 작가와 예술작품 간에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그야말로 그들의 창조력과 상상력에 백지수표가 주어진 것”이라고 기획 취지를 밝혔다. 박물관은 천재들의 유산을 시공을 초월해 차곡차곡 쌓아둔 곳.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경이의 집합체이며, 필멸(必滅)의 인간이 불멸의 시간과 싸우는 곳이다. 과거엔 막 썼을 사금파리·요강단지 따위를 유리 진열장에 모셔두고 숭배하는 무균질의 공간이며, 오늘날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박제화된 장소이기도 하다. 총서는 그런 박물관이 첨단의 대중문화인 만화와 만나 젊어지고자 한 시도다. 루아레트 관장은 철학자 자크 데리다, 영화감독 피터 그리너웨이 등 다른 분야 대가들을 초빙해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다. 루브르가 죽은 유물들의 시체 안치소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화제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우리 만화가들이 그릴 박물관은 어떨까 혼자 상상해 본다. ‘이끼’의 윤태호라면 박물관을 진짜와 가짜, 돈과 권력의 암투가 벌어지는 공간으로 그릴 것 같다. ‘순정만화’의 강풀이라면 박물관을 박물관답게 만들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는 이들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보낼 듯하다. 우리 박물관엔 어디 이런 참신한 기획 없을까.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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