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의 저주, 이지메, 원조 교제 활력 잃은 사회…
日 추격해 온 한국 이제 성장 멈추고 악순환 함정 빠진
'일본病' 옮는데 포퓰리즘도 닮나
치매 아내를 살해한 서울 문래동 78세 노인 사건을 보며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막막했다. 일본이 먼저 경험한 고령화의 절망적 국면이 결국 우리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노·노(老老) 케어’는 일본에서 심각한 사회문제가 돼왔다. 병시중에 지친 나머지 배우자나 노(老)부모를 살해하는 ‘간병(看病) 살인’ 역시 끊이질 않고 있다. 문래동 사건은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던 일본형 ‘고령화의 저주’가 우리에게 옮아왔음을 경고하고 있다.
과거 수십년간 우리는 ‘일본을 배우자’고 외쳤다. 일본이 하는 것을 베끼고 본떠 일본을 넘어서자는 극일(克日) 담론이었다. 2000년대 들어 일본이 장기 침체에 빠지고 시스템의 결함을 드러내자 구호는 ‘반면교사(反面敎師)론’으로 바뀌었다. 지금 우리는 저성장과 침체, 정치 포퓰리즘과 재정 파탄이라는 일본형 실패의 길을 어떻게 피할 것이냐를 놓고 머리를 싸매고 있다.
지난 시절 일본 따라잡기에서 우리는 성공을 거두었다. 짧은 시간 안에 일본과 경제·소득 격차를 줄였고, 어떤 분야에선 일본을 앞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극일 다음에 우리가 맞이한 ‘일본병(病) 피하기’의 국가 과제에선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 어쩌면 그렇게 똑같이 일본의 실패를 뒤따라가는지 신기할 정도다.
일본병이란 사회 각 분야의 구조적 모순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면서 쇠퇴해 가는 증상이다. 이를테면 저출산은 경제 침체에 따른 청년 실업이 연쇄적으로 파급돼 벌어지는 구조적 문제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저성장이 취업난을 일으키고, 경제적 곤궁이 혼인 기피, 만혼(晩婚)으로 이어져 결국 출산율 저하를 불러오는 증세를 앓아왔다. 지금 우리가 빠져 있는 악순환의 함정이 바로 그렇다.
과거 우리는 외향적·확장지향적이고 역동적 헝그리 정신에 넘친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런 강점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지난 4~6월 성장률은 경제가 사실상 제자리걸음을 하는 일본형 ‘제로(0) 성장’에 근접해가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기업들은 혁신 본능을 잃어가고, 새로운 기업가는 출현하지 못하며, 청년들은 진취적 도전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 활력이 사라지고 성장이 멈추는 순간 그동안 눌렸던 사회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경제만 일본화(化)하는 게 아니다. 지금 우리가 앓고 있는 대부분의 사회 병리(病理)는 일본의 경험을 그대로 따라간 것이다. 이지메(집단 괴롭힘)가 학교 왕따로 넘어오고, 원조(援助)교제는 스폰서 사이트로 한국화했다. 고독사(孤獨死)와 무연사(無緣死),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같은 병리 현상의 원조가 일본이다. 젊은 남성들이 유약해지는 현상까지 일본의 이른바 ‘초식남(草食男)’증후군을 빼닮았다.
무엇보다 문제인 것은 이 모든 문제를 주도적으로 돌파해야 할 정치 리더십이 포퓰리즘에 빠진 점이다.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장기침체 속에서 일본 정치는 대중에 영합하며 환부(患部)를 덮어왔다. 구조 개혁 대신 돈 풀고 공약을 남발하는 포퓰리즘으로 국가 재정을 엉망으로 만든 것이 정치인들이었다. 지금 우리 정치가 비용 개념 없이 경쟁하는 포퓰리즘 향연의 종착점도 재정 파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제 일본은 ‘국가의 자살(自殺)’까지 거론되는 단계가 됐다. 고대 로마는 내부적 모순과 중우(衆愚)정치 때문에 스스로 무너졌다. 로마처럼 국가 시스템이 기능 불능에 빠지는 자살의 메커니즘이 일본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장 활력을 잃은 나라가 자체 문제 해결 능력을 상실하는 것이 일본형 국가 자살의 시나리오다. 이것마저 우리는 일본을 닮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박정훈 부국장 겸 사회부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08/201211080306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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