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도지사가 추진하는 신당이 일본 정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비례대표 선거 때 어떤 당에 투표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시하라 신당'은 9%를 얻어 집권 민주당(10%)과 차이가 거의 없었다. 특히 도쿄권에서는 이시하라 신당이 18%로 민주당(5%)을 압도했다. 이런 조사결과를 토대로 이시하라는 일본유신회와 '우리 모두의 당' 등 제3세력 연합을 결성, 다음 선거에서 중의원 의석 480석 중 100석은 얻을 것이라고 큰소리치고 있다. 야당인 자민당이 제1당이 돼도 과반 의석을 얻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면 이시하라 등의 제3세력이 연립정부에 참여하거나 캐스팅보트를 쥐고 일본 정치를 좌지우지할 가능성이 현실화되고 있다.
'평화헌법 파기론'을 주창하는 이시하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장애인·노인·여성·인종 차별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외국의 일왕(日王) 사죄 요구에 대해서는 "예의가 없다"며 품격(品格) 운운하는 일본이지만 이시하라의 망언에는 너무 관대하다. 8선 의원과 두 차례 장관을 지냈으며 도쿄도지사를 4번 연임한 이시하라는 거의 1년마다 바뀌는 총리보다 어쩌면 더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수십권의 소설이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진 국민작가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예의 바르고 질서 있고 남을 배려하는 일본인과 이시하라의 망언을 용인하는 일본 사회 사이의 괴리(乖離)에 절망하게 된다.
이시하라의 인기를 카리스마 때문으로 해석하는 일본인이 많다.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것이 마치 결단력 있는 정치인의 상징처럼 해석된다는 것이다. 그는 3·11 대지진과 관련, '천벌(天罰)'이라는 망언을 한 직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압승했다. 일본 사회는 그에게 망언(妄言) 면죄부라도 부여한 듯하다.
그는 일본 국익에도 치명타를 가했다. 중·일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의 영유권을 강화한다며 도쿄도에서 구입을 추진, 일본 정부의 센카쿠 국유화를 촉발시켰다. 센카쿠 국유화는 중국의 반일(反日) 데모와 일본 상품 불매운동으로 이어져 일본 자동차의 판매가 반 토막 나고 중국 수출도 10% 이상 감소했다. 센카쿠 주변 해역에는 중국 감시선이 상주해 일본의 영유권은 사실상 무력화됐다.
이시하라의 망언에는 전염성이 있다.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 하시모토 도루 일본유신회 대표 등의 망언이 이어지는 것도 일종의 '이시하라 벤치마킹'이다. 이들은 강력한 일본을 만든다는 명분을 앞세워 망언을 남발하지만, '이상한 일본'이라는 이미지를 자초할 뿐이다. 전범(戰犯)국가 독일이 유럽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역대 정치 지도자들의 과거사 사죄가 밑거름됐다.
일본 국민은 국익을 위해서라도 이시하라의 망언에 단호하게 '노(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 선거는 현 정부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지만, 이시하라의 망언에 대한 일본의 상식과 국격(國格)의 시험대이기도 하다.
차학봉 도쿄 특파원
'교양있는삶 > Asia' 카테고리의 다른 글
[특파원 칼럼/배극인]美 대선결과와 일본의 반전카드 (0) | 2013.01.03 |
---|---|
[@뉴스룸/주성하]“여긴 아날로그 시대가 끝났어” (0) | 2013.01.03 |
[중앙시평] 중국은 개혁을 이뤄낼 수 있을까? (0) | 2013.01.03 |
[태평로]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일본 따라가는 우리 (0) | 2013.01.03 |
[발언대] '아시아 世紀'에는 온 국민이 홍보대사 (0) | 2013.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