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 후보는 31일 노인 기초노령연금을 월 9만원에서 18만원으로 올리고, 청년 구직자에 매달 30만원의 취업 준비금을 지급하며, 폐업 자영업자와 실직자에 월 50만원의 구직 촉진비를 대고, 12세 미만 아동에게 매달 10만원 아동수당을 주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박근혜·문재인 후보는 그간 보편적 복지 시책을 펴겠다는 뜻을 밝혀 왔고, 안철수 후보는 자기 책에서 보편 복지와 선택 복지의 균형을 취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지만 최종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할지 두고 봐야 한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내년 복지 지출 규모는 102조5000억원이다. 2005년 50조8000억원이던 복지 예산이 8년 만에 두 배로 증가했다. 여야의 복지 확대 경쟁으로 앞으로 예산 심의 과정에서 더 늘어날 것이다.
보편 복지는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전 국민에게 보육·의료·교육과 같은 기본 복지 혜택을 똑같이 제공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복지를 실현하는 데 드는 비용은 세금을 추가로 걷지 않는 한 조달할 수 없고, 증세(增稅)를 하더라도 단기간에 지금의 몇 배로 늘릴 수 없다. 따라서 대선 후보들은 보편 복지의 수십 가지 항목 가운데 어떤 복지는 언제 시작해서 언제 완성하고, 어떤 복지는 언제부터 시행에 들어갈 것인지 각 복지 항목에 대한 명확한 실천 시간표를 먼저 제시해야 한다. 이 시간표가 의미가 있으려면 각 공약 시행에 필요한 재원 조달 방안도 분명하게 함께 표시돼야 한다. 실천 시간표와 재원 조달 방안이 분명하지 않은 공약으로 국민을 홀리는 것은 정치적 유객(誘客) 행위에 불과하다.
보편 복지 공약을 입법해서 실행하려면 우선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먼저 복지 범위와 증세 등 재원 조달 방안에 국민 합의가 있어야 하고 그다음 여야 견해 절충을 통해 국회에서 입법화하는 데도 추가적 시간이 소요된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1~2년의 이행(履行) 기간이 필요하다. 중요한 문제는 전면적 복지 시대로 옮겨가는 이행 과정에서 국가와 사회의 도움을 가장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계층의 고통을 어떻게 완화해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보편 복지의 추진과 별도로 최(最)빈곤층과 현재의 복지 시스템 밖에 방치된 직업군(職業群)에 대해서는 상당한 재정을 들여 선별적인 지원을 해주지 못하면 여야의 복지 공약 경쟁이 사회의 취약층을 되레 고통에 빠뜨릴 위험이 크다.
지난 19일 78세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74세 아내를 목 졸라 죽이고 자기도 투신자살하려 했던 사건이 있었다. 환자 본인과 수발드는 가족까지 한꺼번에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리는 질병인 치매 환자가 53만명이나 되는데 국가 지원을 받는 숫자는 15만명이 안 된다. 29일엔 불이 난 아파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열한 살, 열세 살의 뇌성마비와 ADHD 장애 남매가 함께 중태에 빠졌다. 26일엔 33살 뇌병변 1급 장애인이 집에 불이 나자 휴대폰 터치펜으로 119에 '살려달라'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결국 연기에 질식해 숨지고 말았다. 국내 등록 장애인이 250만명 있지만 정부·지자체 지원으로 생활을 도와주는 활동 보조인 서비스를 받는 것은 5만명 정도다.
의지할 곳 없는 독거(獨居)노인만 118만명이고 그 가운데 빈곤층이 77%인 91만명이다. 지난 7월엔 강원도 강릉에서 위암 수술을 받은 69세 할머니가 혼자 보살피던 생후 10개월 된 외증손자와 함께 집 욕실에 숨진 채 발견됐다. 초·중·고생 가운데 정부가 아침·점심·저녁을 모두 챙겨줘야 하는 아이가 9만명이다. 이런 아이들은 공책과 연필 살 돈도 마련할 길이 없다.
올해 한국의 복지 예산은 GDP의 9.5%로 OECD 평균(19.5%)의 절반 수준이다.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가 된 복지 욕구를 충족하려면 복지 예산을 계속 늘려야 한다. 그러나 전 국민에게 소득과 관계없이 일정 한도의 복지 혜택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급한 건 고통에 허덕이고 있는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배려다.
대선 후보들은 자신들의 보편 복지 공약을 완성하기까지 이행 기간 동안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이런 불쌍한 사람들을 어떻게 그 고통에서 구해줄 것인지 청사진을 내놔야 한다. 국민도 복지 상품들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화려한 복지 진열장 차리는 데만 정신이 팔린 후보와 우리 사회의 약자들에게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해줄 치밀한 복지 청사진을 내놓는 후보가 누군지 구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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