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취임 일성을 무상급식 확대로 시작해 서울시립대 반값 등록금, 서울시와 산하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으로 이어가던 박원순 시장의 복지행보가 “서울시민 복지기준”으로 결실을 맺고 있다.
목이 터져라 외쳐도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던 복지확대가 지금 서울시민의 눈앞에서 현실정책이 되고 있다. 한강에 콘크리트 덩어리를 띄우고, 서울을 디자인하겠다며 벌여놓은 전시성 토건사업을 위해 쓰이던 눈먼 시민의 세금이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는 연어처럼 시민을 위한 복지로 되돌아오고 있다.
서울시민 복지기준은 시민이 낸 세금이 시민을 위한 복지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줄 것이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복지확대의 가장 큰 걸림돌은 보수언론의 포퓰리즘 공세도, 4대 강을 치적으로 내세우는 존재감 없는 이명박 정부도, 조직화되지 않은 노동자들과 시민들도,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북한문제도 아니다. 진짜 범인은 수십년 독재정권 동안 켜켜이 쌓인 국가에 대한 국민의 끝도 모를 불신이다.
복지국가는 국가에 대한 시민의 신뢰로부터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복지국가는 국민이 부여한 정당성만큼 성장한다. 국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 서울시민 복지기준이 주는 의미는 분명하다. 복지기준은 국가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를 복원해 나가는 큰 걸음이 될 것이고, 복원된 신뢰는 한국 사회가 더 큰 복지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든든한 정치적 자산이 될 것이다. 일부에서 보편적 복지국가를 위한 보편적 증세를 주장하지만, 국가에 대한 신뢰가 없는 증세는 정치적 자살행위이다. 보편적 복지를 할 터이니 증세에 동의해 달라는 말은 국민에게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치는 양치기 소년을 믿으라는 것과 같다. 누가 대한민국에서 정부를 신뢰하는가? 누가 대한민국에서 세금이 공정하게 걷히고 있다고 믿나? 아무리 좋은 명분이 있다고 해도 신뢰받지 못하는 정부가 추진하는 증세를 기다리는 것은 분노한 국민들의 저항뿐이다. 미국 독립전쟁으로부터 영국 보수당의 인두세 도입과 일본의 소비세 도입에 이르기까지 세금을 둘러싼 근현대사는 국민의 예고된 저항을 반복적으로 확인해주고 있다. 누군가, 언젠가는 국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고 발을 구르는 사이 쥐구멍에도 볕이 들 것 같다. 서울시민 복지기준이 국민의 불신을 신뢰로 바꾸어나가는 시작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시민 복지기준”의 한계 또한 분명하다. 세출구조 조정으로는 더 큰 복지국가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사각지대에 있는 빈곤층 일부에게 얼마간의 경제적 도움을 주고, 보육비와 주거비의 일부를 지원해줄 수는 있겠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서울시의 실험은 서울특별시니까 가능한 일이다. 재정자립도가 10%를 조금 넘는 여타 지방정부에서 세출구조를 조정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성질의 일이 아니다. 결국 결정적 한계는 서울시민 복지기준이 서울특별시라는 아주 특별한 지방정부의 특산품이라는 점과 중산층의 복지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없다는 점이다.
박원순식 서울시민 복지기준으로는 중산층 시민의 주거불안, 교육불안, 일자리불안, 노후불안, 의료불안을 잠재울 수 없다. 더 많은 콘크리트가 복지로 복원되어야 하고, 더 많은 재원이 필요하고, 더 많은 국민의 삶을 따뜻하게 보듬어야 한다. 더 큰 복지국가를 위한 현실이 그리 녹록하지 않은 이유이다. 그렇다고 주눅들 이유는 없다. “서울시민 복지기준”이라는 특별한 시작이 2012년 12월 “대한민국 복지기준”이라는 보편적 희망으로 되돌아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서울시가 대한민국에 “복지”라고 말을 걸기 시작했다.
윤홍식 인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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