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3. 12:38

국·한문 혼용을 주장하는 어문정책정상화추진회가 지난달 “국어기본법의 한글 전용 정책은 위헌”이라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추진회는 “한국어에서 한자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고유어보다 훨씬 크다”며 한자를 배척해선 안 된다고 했다. 이에 한글단체들은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한글 전용 정책이 폐기돼야 하는지를 둘러싼 양쪽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우리 문화 담긴 한자, 외국 문자 아니다 

 

한·중·일 삼국은 근세기에 들어서면서 한자 폐지와 로마자 선망론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극심한 서사(書寫·글쓰기)의 변혁기를 거쳤다. 우리나라도 광복 직후부터 한글과 애국심을 결합한 한글 전용론이 한자 폐지 정책을 주도하며 60년 넘게 한글 전용 교육이 행해진 결과 오늘날에는 일부 노년층을 제외하면 한자(漢字)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되었다. 명실공히 한글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 2005년 국어기본법 제정으로 한글 전용 정책과 한글 전용 현상이 확고부동한 우리나라 문자 쓰기 체제로 굳어가고 있다. 게다가 교육부 고시의 ‘교과서 한자 혼용 금지 규정’과 ‘한자교육 배제고시’가 국어기본법을 측면 지원함으로써 교육현장에서 한자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 결과 오늘날의 언어문자 생활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한자를 읽고 쓰지 못하니 한자어 낱말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져 정확한 의사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일종의 언어 공황상태가 빚어지고 있다. 잘못된 국어 사용으로 인한 폐단은 일류 문화 국가가 되겠다는 우리 한국 사람의 염원을 멀리 벗어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헌법소원의 요지(要旨)는 한자를 한국어가 아닌 외국 문자로 규정함으로써 한자 교육을 가로막고 있는 국어기본법이 위헌임을 결정해 달라는 것이다. 국어기본법에는 ‘국어’의 개념 규정이 불분명하고 한자어는 국어에 포함시키면서도 그것을 한자로 표현하는 것을 극도로 제한해 외국어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문구도 들어 있으니 이는 명백한 모순이다.

 헌법소원 청구인들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한글과 한자, 즉 국어는 관습헌법 사항이라는 것이요, 둘째는 초등학교 국어과목에서 한자 교육을 실시하라는 것이다. 사회 일반의 글쓰기에서 한글 전용이나 한글·한자의 병용은 쓰는 사람 개인의 자유의사와 판단에 맡기되 한자 교육은 초등학교부터 국어과 정규교과에서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초·중등학교의 정규 국어과목에서 한자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알고자 하는 욕구, 배우고자 하는 학습권을 학생들로부터 박탈하는 것이요, 한자 가르치기를 원하는 학부모의 교육권을 명백히 침해하는 것이다.

 한자는 한국어를 적는 국자(國字)다. 그것은 적어도 2000년 전부터 우리 민족의 서사문화(書寫文化)를 이끌어온 핵심 문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향찰·이두·구결과 같은 우리 식 표기 방식을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2000년간 그 글자로 우리의 역사·사상·문학을 개진했으며 그것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밝혀왔다. 지난 2000년간 한자로 쓰인 우리 고전을 우리가 지키고 가꾸지 못하면 우리는 조상이 물려준 정신문화 재산을 잃어버리는 못난이가 되고 말 것이다. 물론 국민 모두가 고전한문에 익숙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용 기초한자 1800자만이라도 초·중등학교에서 가르쳐 일상 언어생활에 불편이 없게 하면 그것이 곧 전통문화의 초석이 될 것이다.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분들도 아름다운 고유어를 많이 발굴해 사용하는 노력을 기울이되 심오한 사고(思考)와 분석이 필요한 전문 학술용어의 기능을 인정하고, 한국어인 한자를 한문과 혼동하며 부정(否定)할 것이 아니라 한글과 한자가 다정히 공존하게 하여 한국어를 더 살찌우는 풍부한 어문생활 풍토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심재기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 원장

 

 


쉽고 편리한 한글의 가치 지켜야 한다

 

세종 임금께서는 우리말이 중국어와 다름을 아시고 가장 쉽고도 편리한 한글을 만드셨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말과 한글은 천시당하고 중국에서 밀려 들어온 한자만을 사용하여 금쪽같은 우리 토박이말들이 죽어 없어지거나 천한 말과 글로 밀려나 뒷방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번에 어문정책정상화추진회에서 초·중·고등학생의 정규 교과에서 한자 교육을 시켜 달라는 등의 헌법소원을 제출했다. 이것은 우리의 국어 생활을 또 한번 어두웠던 옛날로 돌아가게 하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헌법소원서에서 주장하는 몇 가지를 반박해 본다.

 첫째는 한글 전용 교육으로 인해 한글 표기조차 정확히 쓰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풍비박산(風飛雹散)’을 ‘풍지박산’으로, ‘희한(稀罕)’을 ‘히안’ 등으로 잘못 쓴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자 혼용과 전혀 다른 문제이다. ‘풍비박산(風飛雹散)이나 ‘희한(稀罕)’이라는 표기를 바르게 쓰기 위해 그 한자를 배우라는 뜻인데, 그 일이 훨씬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희한’의 ‘ㅢ’음은 이미 ‘ㅣ’가 표준 발음으로 인정되고 있다. 토박이말인 ‘늴리리, 무늬’를 ‘닐리리, 무니’로 ‘ㅢ’음을 자주 틀리는 것은 한자 교육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발음 교육으로 해결될 문제이다.

 둘째는 낱말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니 한자 병용 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100년 전 일제 강점기 때의 ‘기미독립선언문’처럼 한자말투성이로 쓰던 시대에는 한자 병용이 필요했을 것이나, 지금은 거의 토박이말이나 쉬운 한자말로 바뀌어서 염려 없다.

 오히려 대부분의 낱말마다 한자를 병용한다면 문서의 분량이나 작성 속도에서 큰 불편이 예상된다. 더구나 한자는 다의성이 많아서 낱말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많을 수도 있다. ‘선생(先生)’ ‘미국(美國)’을 한자로 표기하면 ‘먼저 태어남’ ‘아름다운 나라’라는 뜻이 된다. 낱말의 본래 뜻인 ‘스승’ ‘나라 이름’과는 멀어진다.

 셋째 한자의 사용이 전통문화 계승과 문화의 발전, 교류에 필수적이라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전통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왕조실록을 읽거나 이순신의 『난중일기』나 박지원의 『열하일기』 정도를 읽으려면 옛날처럼 한문 서당을 오랫동안 다녀야 하는데, 자기 전공은 언제 공부하겠는가? 오히려 우리 전통문화 계승과 교류를 위해서는 더 많은 한문 전문가를 따로 지원해 그분들이 옛 서적들을 쉬운 우리 한글로 번역하게 하면 될 것이다.

 부존자원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를 이만큼 경제대국으로 이끌고 있으며, 세계를 놀라게 하는 한류문화의 중심에는 ‘한글’이 있다. 스마트폰의 자판만 보아도 세계의 어느 문자도 흉내 낼 수 없게 간결하고 과학적이다. 모음 ㅣ, ·, ㅡ, 자음 ㄱ, ㄴ, ㄷ, ㅂ, ㅅ, ㅈ, ㅇ 등 모두 열 개의 자판으로 40만~50만 낱말을 모두 적을 수 있다. 일본의 가나는 물론이고 서양의 알파벳보다도 훨씬 빠르고도 정확하다. 만일 한자를 병용한다면 자판을 어떻게 만든단 말인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가르침처럼 신속하고 정확하고 간결해야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한글 전용이 정답이다. 지금 우리가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한자 병용 정책이 아니라, 거리에 나가면 흘러넘치는 국적 모를 외국어 남용 문제나 저속한 욕설 등을 가다듬는 국어순화운동이다.

김진규 공주대 명예교수 문화체육관광부 국어심의위원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780706&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3. 1. 3. 12:37

1862년 여름 링컨은 뉴잉글랜드에서 온 압력단체 대표들을 만났다. 그들의 요구를 다 듣고 난 링컨은 이렇게 말했다.

“몇 년 전 블롱댕(프랑스의 줄타기 곡예사)이 나이애가라 폭포를 가로질러 밧줄을 걸고 그 위를 건넌 걸 기억하는가.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이 위대한 나라가 지금까지 이뤄낸 물질적 가치, 번영,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블롱댕이 장대로 균형을 잡아가며 저 무서운 폭포를 건넌다고 상상해보라. 맞은편에서 당신들은 ‘블롱댕, 오른쪽으로’ ‘블롱댕 왼쪽으로’라고 소리치겠는가, 아니면 말없이 숨죽이며 그가 무사히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도록 기도하겠는가.”

조용히 일어선 대표단은 모자를 집어 든 뒤 링컨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11월 첫 주 표지에 링컨을 등장시켰다. ‘링컨이라면 어떻게 할까’가 제목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을 맡고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주연한 영화 ‘링컨’이 11월 9일 개봉하는 데 때맞춰 미국인의 사랑을 받는 대통령을 재조명하기 위함이다.

링컨은 종종 자신의 말을 거역하는 연방군 사령관 조지 매클레런에게 “나는 소수파 대통령”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자신을 소수파라 칭한 링컨은 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합과 포용의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자신을 ‘긴 팔을 가진 고릴라’라고 경멸한 에드윈 스탠턴을 전쟁부장관에 임명했고, 대선에서 경쟁한 윌리엄 시워드를 국무장관에 임명했다. 경선에서 진 뒤 자신을 모욕해온 새먼 체이스에겐 재무장관직을, 자신을 무능하다고 한 원로 정치인 에드워드 베이츠에겐 법무장관직을 맡겼다.

타임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밋 롬니 공화당 후보에게 누가 미국의 4년을 맡든 1862년의 링컨에게 배워야 한다고 충고했다.

타임의 진단은 정확하다. 미국 정치는 지금 위기다. 워싱턴포스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은 둘로 나뉘어 있다. 백인 유권자의 60%가 롬니를 지지하고, 비백인 유권자의 79%는 오바마를 지지한다. ‘인종 갈등’이란 표현이 신문과 방송에서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고소득층은 롬니, 저소득층은 오바마 지지로 갈라져 있다. 여기에 세대 갈등도 있다. 그래서 미국 정치는 11월 6일 이후가 더 위험하다. 연말까지 재정적자 해소 방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켜야 하지만 공화당이 장악한 하원과 민주당이 장악한 상원은 꼼짝 않고 있다.

민주·공화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스윙 스테이트 버지니아에 사는 탓에 붉은색(공화당)과 파란색(민주당)으로 갈린 현장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정원이 넓은 백인이 사는 집엔 어김없이 ‘롬니’ 팻말이 꽂혀 있다.

한국이건, 미국이건 시작하는 대통령은 누구나 포용의 마음을 갖는다. 4년 전 오바마도, 10년 전 노무현도 링컨을 닮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끝까지 실천하진 못했다. 분명한 건 4년이 지난 지금 오바마가 재선 가도에서 이토록 고생하는 건 마음속에서 링컨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박승희 워싱턴총국장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780692&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3. 1. 3. 12:36
우리 시대에 ‘긍정적’이라는 형용사는 사람의 성격을 지칭하는 많은 단어들 중 월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긍정적인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에게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좌절하거나 남 탓을 하지 않고, 그 속에서 교훈을 찾아내고 자신을 바꾸려 노력하는 데 있다. 성공한 스포츠 선수부터 잘나가는 연예인, 멘토링을 하는 교수와 대선을 앞둔 대통령 후보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할 것 없이 강조하는 게 바로 ‘긍정’이다.

 

<휴먼스토리─덤벼라! 인생>(MBC)이나 <강연 100℃>, <이야기쇼 두드림>(KBS) 등은 좌절을 딛고 자기에 대한 긍정적 믿음으로 결국 ‘승리’한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슈퍼스타케이4> 등 오디션 프로그램에 깔린 철학 역시 마찬가지다. ‘기적을 노래’할 수 있을 만큼의 긍정적 사고와 피나는 노력이 없다면 ‘슈퍼스타’가 될 수 없다.

 

‘긍정적 사고’(positive thinking)에도 역사가 있다. 바버라 에렌라이크에 따르면, 미국에서 긍정적 사고는 죄의식과 자기절제, 노동윤리를 강조하던 칼뱅주의 기독교 정신에 대한 반발로 생겼다. 칼뱅주의적 엄격함 속에서 유행하던 신경쇠약이라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19세기 중엽에 피니어스 큄비와 메리 베이커 에디는 ‘신사고’(New Thought) 운동을 전개하는데, 이들은 심판하는 신의 이미지 대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따뜻한 정신으로서의 신을 주창한다. 정신이 제일이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는 것이 핵심이 된다.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것이 치유의 지름길인 것. 윌리엄 제임스나 에머슨 등 유명한 지식인들 역시 신사고 운동의 지지자들이었다.

 

하지만 이 긍정적 사고는 칼뱅주의의 유산을 여전히 간직한다. 자기절제와 노동윤리는 더욱 강화되고, 죄의식 대신 ‘부정적 사고’에 대한 끝없는 경계가 들어선다. 20세기를 거치며 미국에서 ‘긍정적 사고’의 철학은 복음주의 기독교, 기업의 노동자 교육과 결합하면서 부와 성공을 염원하는 대중의 신화가 되었다.

 

긍정적 사고는 기독교와 기업의 영향력이 큰데다 성공에 대한 압박이 강한 한국에서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 1980년대만 해도 체제에 저항하는 투사, 곧 ‘비판적 인간’이 얼마간 이상화되었다면, 민주화 이후의 세상에서 ‘비판’은 ‘긍정’에 자리를 내준다. 긍정적 사고의 문화는 ‘사회’ 대신 ‘인적 자본’으로서의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부과하는 신자유주의 질서와도 부합한다. 힘들어도 체제 탓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개인의 정신자세와 노력 여부로 연결시키는 긍정적 인간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가 원하는 이상적 주체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살인적인 경쟁 속에서 ‘긍정적 사고’만으로 승자가 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감춰진다. 그저 노력하는 자세의 아름다움만 찬양될 뿐, 어쩌다 승리한다면 ‘대박’나는 것이고, 실패한다 해도 그건 나의 부족함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로 가득한 ‘긍정적’ 세상이야말로 지배하기에 가장 용이한 곳이리라. 긍정적 사고의 문화가 탈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긍정적 사고가 가득한 곳일수록 다른 방식의 혐오가 넘친다는 점은 흥미롭다. 긍정적 사고가 가진 특유의 전투성은 실패한 이들, 저항하는 이들을 희화화한다. ‘비판만 일삼는 이들’을 뜻하는 ‘좌빨’, 나아가 ‘종범’, ‘듣보잡’, ‘지잡대’ 등의 인터넷 신조어들에는 모두 실패한 이들, 변두리에 있는 이들에 대한 혐오가 강하게 드러난다. 여성, 비정규직, 장애인, 빈민, 외국인 노동자도 흔한 목표물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현실의 문제들을 현실적으로 힘없는 주체들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우리 시대의 지배적 태도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낸다. 2007년 이후 ‘이명박’이란 긍정의 아이콘이 보여주듯, 역설적으로 긍정적 사고는 어떤 지독한 부정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것이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58767.html

 

 

Posted by 겟업
2013. 1. 3. 12:34

요즘 모임이나 회식 자리에서 흔히 받게 되는 질문이 있다. "(이번 대선에서) 누가 되는 거야? 언론계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어?" 대답은 "그걸 알면 여기 이러고 있겠니?"다. 이어 "언론계라고 생각이 다 같은 줄 알아? 내가 무슨 언론계 대표도 아니고…"라고 덧붙인다.

대선이 50일도 남지 않았는데 대진표가 불투명한 터에 여론조사 결과까지 정반대로 나오는 경우가 많아 국민들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승부가 뻔해 보였던 5년 전과는 딴판이다. 진영논리가 강고한 사람들은 이미 지지후보를 결정하고 요지부동 상태로 들어갔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주변 사람들의 견해를 듣고 싶어 한다. 지지 후보를 결정했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떠보고 싶은 심리는 같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누가 당선돼도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무책임한 말 같지만 누가 되든 역사적 정치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유력 후보 3명은 지금 연일 새로운 정책과 공약을 쏟아내고 있는데, 큰 차이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는 만능인간인 것처럼 약속을 하고 다니는 게 불안하다.

이채필 고용노동부장관이 최근 세 후보의 노동공약에 대해 "새로운 내용이 없고 대안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바 있지만, 그의 말대로 세 후보의 공약은 우는 아이에게 젖을 주라고만 할 뿐 젖이든 죽이든 미음이든 주게 하는 대안이 없다.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정직하게 말하며 국민들의 동참과 노력을 호소하는 사람은 이번에도 없다.

그런데도 세 후보 중 누가 당선되든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나라가 대통령 한 사람에 의해 명운이 결정적으로 달라질 정도의 나라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세계의 주요 국가로 커버렸고, 어느 한 개인이 농단과 전횡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큼 허약하지도 않다. 원조를 받아가며 근근이 살아온 나라가 이제는 원조를 줄 뿐 아니라 정치외교와 경제 분야는 물론 문화적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강국이 됐다.

이 시점에 검토해야 할 것은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대통령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덜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4년 중임제와 지방분권 강화를 골자로 한 개헌논의가 다시 활발해진 것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초대 이승만부터 현재의 이명박 대통령까지 역사의 고비마다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의식했든 못했든 그 시대의 의미에 맞는 위상에 충실했다. 우리는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 등을 어느 나라보다 더 빨리 압축적으로 이루어냈다.

이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문화라고 본다. 문화화라는 말이 있을 수 있다면 나라의 고급화, 국민의 성숙을 목표로 문화화를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성장을 말하지 않고 분배만 추구하느냐고 후보들을 윽박지르는 분위기가 있지만, 우리에게 성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숙이다. 성장을 추구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성장도 그냥 성장이 아니라 성숙한 성장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대통령은 개발경제시대의 리더로서 앞장 서거나 십자가를 진 구국의 영웅이 되려고 애써서는 안 된다. 역사적 세계적 업적을 남기려 하는 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 협치의 우두머리로서 각 부문의 갈등을 관리하고 조화를 꾀하는 마지막 조정자로서의 역할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문화적 활동이나 유머와 여유로 국민을 안심시키고 행복감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것도 꼭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나와 있는 후보들 중에 그런 사람이 없다고? 아쉽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문화적이기는커녕 이번에도 대선은 과거를 들춰내 흠집내기와 공직 먹이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밀한 상대적 비교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임철순 논설고문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1/h2012110121023481940.htm

 

Posted by 겟업
2013. 1. 3. 12:33

녀석의 부고를 받았다. 그와 나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장례식장에 가야 했지만 망설여졌다. 그 장례식장에서 나를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루 종일 망설이다, 마지막은 봐야 한다는 의무감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병문안을 갔을 때 녀석이 나에게 남긴 말이 귀를 맴돌았다. "형 졸업식에 꽃 들고 찾아가야 하는데."

그를 만난 것은 군대에서였다. 나의 후임병이었다. 묘한 친구였다. 한 선임병은 그의 몸에서는 사과 풋 향이 난다고 했다. 생긴 것도 장난스럽게 생겼고 하는 짓도 아주 귀여웠다. 그 바람에 그는 많은 선임병들에게 희롱을 당했다. 안고 뺨을 부비고 냄새를 킁킁대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십년 전에는 이런 희롱을 당하더라도 후임병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볼멘소리로 "하지마시란 말입니다"만 반복했다.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군대에서는 없었다. 그러다 그가 화장실에서 '바위처럼'이라는 민중가요를 흥얼거리다 나한테 딱 걸렸다. 쓱 옆으로 다가가 "너 운동권이지?"라고 물었다. 녀석은 "아닙니다!"며 화들짝 놀랐다. "아니긴 뭐가 아냐 임마. 그거 '바위처럼'이잖아." 녀석은 경계를 다 풀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이 노래 아십니까?" 하하하. "당연히 알지. 임마. 나도 운동권이었거든." 그리고 녀석과 나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별로 말을 나눌 사람이 없던 터라 온갖 이야기를 하며 몰래 술도 마시며 어울려 다녔다.

그러다 녀석과 내가 더욱 각별해진 것은 1996년 연세대 사태 때였다. 부산에서 여전히 학생운동을 하던 녀석도 올라왔다. 서로 반가워하며 밖에서 만나 잠시 술을 마시는 와중에 연세대가 봉쇄됐다. 녀석은 오도 가도 못하게 됐고 연세대 사태가 진행되던 우리 집에 숨어있었다. 매일 헬기 소리를 듣고 그의 친구도, 내 동료들도 잡혀가는 것을 TV로 지켜봐야했다. 큰 상처였다. 이 상처에 대한 공유는 우리를 더욱 각별한 사이로 만들었다. 내가 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울산에 내려갈 때마다 만났고 서로를 격려하고 삶을 나눴다.

그러나 그의 빈소에서 그와 나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그의 가족을 만난 것은 그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어머니를 만난 딱 한번이 전부였다. 그 어머니가 자동차 사고를 내서 경찰서에 끌려갔던 이야기며, 몸무게가 급속도로 늘어서 부인이 된 여자 친구한테 살이 더 찌면 헤어질 것이라는 경고를 들었다는 말도 킬킬거리며 했지만 정작 그의 가족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유족들에게 조문하며 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당황스러웠다. 나는 그의 가족들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나를 알리는 없었다. 길게 설명했으면 그들도 내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겠지만 거기서 그럴 수도 없었다. 더듬거리며 몇 마디로 나를 소개했지만 어쨌든 나는 쌩뚱 맞은 사람이었고 유족들도 뜬금없어 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나의 슬픔과 유족들의 고통이 만날 수가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나오면서 사람의 관계는 나와 너, 둘 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불현 듯 깨달았다. 그와 나의 관계를 알고 있는 제3자가 단 한 명도 없는 그의 장례식장에서 내 존재는 무화되었다. 그러면서 왜 성소수자들이 결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건 흔히 오해하듯 결혼이라는 이성애적 질서에 그들이 편입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은 최소한 세 명이 모여야 비로소 인간이 된다. 이 세 번째 존재가 없다면 나머지 둘은 아직 인간이 아닌 것이다. 성소수자들에게 결혼이란 바로 자신들의 존재를 보증하고 기억하는 이 세 번째를 얻고자 하는 그런 투쟁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그들의 투쟁에 이성애자들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면 그 이유는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보장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성애자들은 성소수자의 투쟁에서 배워야한다. 그들이 잃어가고 있는 세 번째의 의미를 말이다. 이미 우리는 삶의 전 영역에서 세 번째가 급속도로 사라지고 오로지 둘만 남는, 그런 해체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엄기호 교육공동체 벗 편집위원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0/h2012103121004881920.htm



Posted by 겟업
2013. 1. 3. 12:32

한국 경제는 저성장 시대에 들어섰다. 어려운 시절이 기다리고 있다. 산업 간, 계층 간 소득 불균등도 심화하고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경제민주화’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겉의 증상만 보는 대증적(對症的) 방안이다. 빈곤층 문제는 소수 부유층 때문이며 중소기업의 곤란은 대기업 때문이고 골목상권 정체는 대형 유통업체 때문이라는 대증적 진단으로는, 한국 경제의 모순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거나 바른 해법을 모색하기 힘들다.

자본주의는 나라마다 나름의 얼굴을 갖는다. 한국에는 한국형, 미국에는 미국형 자본주의가 있다. 나라마다 다른 문화가 상이한 유형의 자본주의를 만들어낸다.

한국형 자본주의의 특질을 지적하기는 어렵지 않다. 노동자 근속연수가 짧아 1년 미만 근속자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5개국 중 1등인 것이 그 하나다. 경제 규모에 비해 사업체 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도 또 하나의 특질이다. 2009년 실질국민소득 100만 달러당 중소기업 수는 한국이 2.64개인데 일본은 1.11개, 미국은 0.45개다. 사업체 형태가 모조리 주식회사인 것도 한국만의 특질이다.



이 같은 특질의 근저에는 ‘저(低)신뢰’라는 문화적 조건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한국을 저신뢰 사회로 분류한 이래 이를 입증하는 국제비교가 몇 차례 행해졌다. 그에 따르면 한국사회 신뢰지수는 멕시코보다는 높으나 OECD 평균을 밑돌고 있다. 그 대신 갈등지수는 OECD 4위다.

한국이 ‘저신뢰 사회’인 것은 한국인의 가치관이 물질주의적인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에는 역사적 연원이 깊다. 일반적 통념과 달리 한국의 전통사회는 공동체로 조직되지 않은, 분산적 개인으로 구성된 저신뢰의 물질주의 사회였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만 해도 당시 전국 3만4665개 자연 마을을 대상으로 한 정부 조사에 따르면 리더십이 충분했던 마을은 9%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리더십이 없거나 후진적인 마을이었다. 한마디로 한국은 잘 조직된 공동체사회가 아니었다. 19세기 말 한국을 찾았던 외국인들이 “양반끼리 모여서 하는 행사나 모임은 있어도 전 주민이 공유하는 의례는 없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상황은 오늘날 일상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예컨대 중소기업이 겪는 곤란은 대기업 횡포 때문만이 아니라 중소기업 자체가 신뢰를 기반으로 한 단체가 아니라는 점에 문제가 있다. 젊은이들이 중소기업에 희망을 걸지 못하는 이유는 가족경영이 대부분이어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부장, 임원, 사장이 될 수 없으리라는 불안 때문이다. 사업주 역시 이를 당연시해 인재를 키우지 않는다. 중소기업끼리 공동으로 협심해서 시장을 개척한다거나 하는 활동도 결여돼 있다. 지난 20∼30년간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이 결코 적지 않았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은 이런 사회적 조건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경제가 당면한 여러 문제를 경제민주화로만 접근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다. 오히려 그것은 이미 나타나듯 정치적 갈등만 증폭시킬 가능성이 크다. 저성장 시대를 맞아 사회 자체가 충격을 흡수하고 고통을 분담하고 혁신을 수행하게 하는 노력과 정책이 다양하게 개발돼야 한다. 위기를 맞아 한 사회가 어떤 양태의 대응을 보이는지는, 다시 말해 갈등을 증폭시키는지 협력을 고양하는지는 그 사회의 지성과 도덕 수준을 대변한다.

마을이, 기업이, 협동조합이, 종교단체가 이 세상을 인간이 살 만한 생활공동체로 가꾸는 일에 발 벗고 나설 필요가 있다. 규제와 세금 일변도의 ‘경제민주화’에는 이 같은 사회 고양적 발상이 결여돼 있다. ‘경제민주화’는 이 나라가 여전히 정치 만능의 저신뢰 사회임을 얘기하고 있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http://news.donga.com/3/all/20121101/50537258/1

Posted by 겟업
2013. 1. 3. 12:32

판사도 인간이다. 그들도 성질을 못 이겨 법정에서 막말하고 반말하며 졸기도 한다. 2010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상담 사례집’에는 39세 판사가 69세 피고에게 “버릇없다”라고 말한 예가 나온다. 10월 23일 법률소비자연맹이 펴낸 ‘대한민국 법원 법정 백서’에 따르면 조는 판사, 재판에 지각하는 판사가 적지 않다. 한국뿐 아니다.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세계 여러 나라 판사들도 마찬가지다.

막말하고 졸고 지각하는 판사 많아

그러나 판사도 인간이라고 해서 법정에서의 부적절한 행동이 관용될 수는 없다. 사법부는 독립성이 생명이라는 말이 판사들 마음대로 행동하는 무제한의 자유를 준다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사법부의 독립은 국민의 신뢰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판사들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높은 도덕성을 가져야 한다. 사법부의 독립은 사법부가 져야 할 책임이 동반할 때 균형을 이룬다.



어느 나라든 ‘불량 법관’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미국, 영국, 캐나다 등의 사법부 태도와 방식은 한국과 참으로 다르다.

미국 등이 판사들의 태도를 개선하기 위해 택한 방식의 하나는 법정 내 언론의 사진 및 텔레비전 카메라 취재 허용이다. 법정에서 독재자, 폭군 노릇을 하거나 잠에 취한 판사 들은 카메라를 통해 국민에게 알려질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기자들이 쓰는 기사로 묘사할 수 없는 판사들의 무례하고 무성의한 모습을 카메라는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2월 미국 텍사스 주 교육법원 래리 크레독 판사가 법정에서 조는 모습이 텔레비전 뉴스에 나갔다. 크레독 판사는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자폐아 부모가 법원에 제기한 공립고교의 교육 방식 문제에 관해 사흘간의 청문회를 주재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졸았다. 이에 분노한 부모는 그를 깨우기 위해 헛기침을 하고 물병을 바닥에 떨어뜨리기까지 했지만 소용없었다. 참다 못해 휴대폰 카메라로 조는 크레독 판사를 촬영해 언론에 제공한 것이다. 여론은 들끓었고 크레독 판사는 결국 사임했다.

비록 언론의 카메라가 직접 촬영한 것은 아니었지만 카메라와 언론이 판사의 이상한 행동에 대한 훌륭한 교정 수단임을 보여 준 경우다. 미국 제9순회법원 알렉스 코진스키 수석판사도 “(카메라 때문에) 판사들은 졸음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고, 자신들의 결정을 설명하는 데 좀 더 신중해질 수 있으며, 자의적인 결정이나 지나치게 느슨한 재판 운영을 피할 수 있다”고 했다.

미국은 50개 주 모두가 전면 또는 일부 법원에 대해 카메라 진입을 허용하고 있다. 연방법원만은 예외다.

美선 카메라 허용후 공정성 높아져

미국이 법정 내 카메라를 허용한 것은 판사들의 태도를 바로잡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다. 그리고 법원의 투명성과 재판의 공정성을 높여 법원과 법관의 권위와 신뢰를 높이기 위해서다.

미국 법정에 언론 카메라가 허용되는 과정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90여 년 동안 수많은 논의와 연구, 법정 모의실험을 통한 결과다. 1975년 플로리다 주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1년 동안의 모의실험을 한 뒤 카메라가 재판을 방해하지도, 판사나 피고 등 누구에게도 심리적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고 법정 내 카메라 진입을 허용했다. 이후 전국으로 퍼졌다.

영국은 1923년부터 법정에서 카메라 촬영을 금지해 왔지만, 2011년 9월 영국 정부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대법원을 제외한 모든 법원에서 촬영 및 방송을 허가한다고 발표했다. 영국 역시 치열한 논의와 연구 끝에 2004년 첫 시험 재판을 실시했다. 뉴질랜드, 호주, 캐나다, 스코틀랜드, 노르웨이, 스페인 등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제한된 형태로 카메라의 법정 진입을 허용하고 있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은 시험 연구를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사법부는 언론 카메라의 법정 취재를 사실상 철저하게 봉쇄하고 있다. 실제 재판 과정이 아닌, 판사나 피고가 법정에 들어서는 모습만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촬영토록 할 뿐이다. 국민은 12·12와 5·18사건 등 역사적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텔레비전으로 지켜볼 수 없었다. 생생한 역사의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1973년 만들어진 법원조직법 내 촬영 등에 관한 조항은 40여 년간 요지부동이다. 다른 나라 법조계는 100년 가까이 숱한 논의와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한국은 사법부 차원에서 연구와 논의를 전혀 하지 않았다. 미디어 기술 발전 등 시대 변화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와 미국 등의 결정적 차이는 카메라 허용 여부나 정도의 차가 아니다. 논의와 연구가 있고 없음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사법부는 왜 법정 촬영 및 방송을 그토록 완강하게 반대하는가? 사법부는 그 정당한 명분과 치밀한 법리를 국민에게 제시해야 한다. 그것은 언론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폐쇄적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한국의 법관들은 언론의 카메라 취재 허용은커녕, 그것을 언급하는 것조차 꺼리고 있다.

카메라 문제뿐 아니다. 현재 한국의 법관들 중에는 블로그나 트위터 같은 첨단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활용해 개인의 정치 견해와 주장, 재판 내용을 밝히기도 했다. 자신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있으며, 소셜 미디어를 통해 방어하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면서 말이다.

국민의 알권리 위한 최소한의 예의

그러나 미국, 영국, 호주 등의 법원과는 달리 한국 기자들은 법정에서 블로그나 트위터를 이용할 수 없다. 휴대전화, 노트북 등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디지털 강국이라 자부하는 한국의 언론은 법정 취재에 관한 한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판사들은 법정 바깥에서 자신들의 첨단 커뮤니케이션 기기 사용을 정당화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기자들이 이를 활용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토의하고, 연구해야 한다. 자신의 표현의 자유를 위해서는 최신 기술을 사용하는 것에 관대하면서 그 기술이 언론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사용되는 것에는 주저하는 한국 판사들의 모습은 지극히 이중적이다.

법정에서 막말을 하는 안하무인 판사들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그런 판사들의 이기적 풍토 때문이 아닌가. 언론의 카메라가 법정 문턱을 넘어서게 함으로써 사법부는 한층 겸손하고 친근한 모습으로 국민에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손태규 단국대 교수

 

 

http://news.donga.com/3/all/20121101/50537375/1

 

 



 

Posted by 겟업
2013. 1. 3. 12:31

루브르 박물관에서 노(老)정치인의 은퇴 기념 연회가 열렸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앞에서다. 권력욕을 대변하는 이 화려한 그림을 둘러싼 잔치가 민망했던 정치가는 슬쩍 빠져나와 맨발로 박물관 곳곳을 순례한다. 종착지는 장 앙투안 와토의 로코코 회화 ‘키테라 섬의 순례’. 호리호리한 젊은이들이 사랑의 섬으로 여행 간다는 그림이다. 사랑의 설렘과 함께 그 사랑이 곧 식을 것이며 젊은이들은 언젠간 늙고 죽을 거라는 덧없음도 담겼다. 현실 정치에 찌든 노인은 잊었던 환상과 설렘의 순간을 떠올리며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최근 출간된 만화책 『매혹의 박물관』(크리스티앙 뒤리외, 열화당)의 내용이다. 루브르 만화총서 제7권으로 프랑스의 만화전문 출판사 퓌튀로폴리스와 루브르 공동기획이다. 루브르는 만화가들에게 이 박물관을 주제로 만화를 그려줄 것을 의뢰했고, 선정된 만화가들은 전시장뿐 아니라 방대한 수장고, 후미진 지하실 등 일반인이 접하기 어려운 박물관 구석구석을 마음껏 돌아보는 특권을 누렸다. 먼 미래의 탐사대가 빙하에 파묻힌 루브르의 명작을 발굴한다는 기상천외한 내용의 『빙하시대』(2005)를 시작으로 일곱 권의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이 세상에 나왔다.

 

만화 『매혹의 박물관』의 한 장면.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610x931㎝)을 배경으로 했다. [사진 열화당]

 


12년째 루브르를 이끌고 있는 앙리 루아레트 관장은 “이야기를 창조하는 작가와 예술작품 간에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그야말로 그들의 창조력과 상상력에 백지수표가 주어진 것”이라고 기획 취지를 밝혔다. 박물관은 천재들의 유산을 시공을 초월해 차곡차곡 쌓아둔 곳.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경이의 집합체이며, 필멸(必滅)의 인간이 불멸의 시간과 싸우는 곳이다. 과거엔 막 썼을 사금파리·요강단지 따위를 유리 진열장에 모셔두고 숭배하는 무균질의 공간이며, 오늘날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박제화된 장소이기도 하다. 총서는 그런 박물관이 첨단의 대중문화인 만화와 만나 젊어지고자 한 시도다. 루아레트 관장은 철학자 자크 데리다, 영화감독 피터 그리너웨이 등 다른 분야 대가들을 초빙해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다. 루브르가 죽은 유물들의 시체 안치소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화제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우리 만화가들이 그릴 박물관은 어떨까 혼자 상상해 본다. ‘이끼’의 윤태호라면 박물관을 진짜와 가짜, 돈과 권력의 암투가 벌어지는 공간으로 그릴 것 같다. ‘순정만화’의 강풀이라면 박물관을 박물관답게 만들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는 이들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보낼 듯하다. 우리 박물관엔 어디 이런 참신한 기획 없을까.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758372&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3. 1. 3. 12:28

한국, 票心 위한 복지의 '챔피언'… 그럴수록 국가는 위기 향해 돌진
1999년 슈뢰더·블레어 선언은 '복지는 개인 역량 키우게 도와야'
최근 늘어난 우리 사회 빈곤층, 지금 못 끌어올리면 미래 어두워

 

사회과학에는 딱히 법칙이랄 것이 없다. 자연과학의 숱한 법칙과 달리 사람이 사는 일은 공식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칙이라고 부를 만큼 예외 없는 원칙이 사회정책에도 하나 있다. '공적 혜택의 수혜자는 비용 부담자보다 세다'는 게 그것이다. 수혜자에게는 혜택이 중요하지만 비용은 전 국민이 같이 부담하기 때문에 희석된다. 그래서 찬성은 강하고 반대는 약하다. 그러니 정치인들은 새로운 혜택을 만들어 수혜자 그룹을 조성한 후 그들의 지지와 충성을 확보하는 데 골몰한다.

표심(票心) 때문에 복지를 늘리는 행태에 관한 한 우리나라 정치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2004년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노인 빈곤 대책이란 명목으로 전체 노인 대상의 기초연금을 제안하고 나섰다. 스웨덴·캐나다·핀란드·노르웨이·덴마크 등 기초연금을 운영했던 나라들이 1980년대 이후 포기한 마당에 정부 여당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라 살림을 볼모로 노인 표를 잡으면서 여당을 곤란하게 하기 위한 정치 공세였던 셈이다.

2006년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야당과 어렵게 타협한 결과가 노인 중 70%를 대상으로 한 기초노령연금이라고 털어놨다. 제도의 장기적 지향이나 후대의 막대한 부담은 안중에 없었고 선정 기준 등 제도 설계도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로 이 제도의 수급 가구 소득 분포는 어이없을 정도로 뒤틀려 있다. 빈곤 대책임에도 동거 자녀의 경제력을 고려하지 않으니 최상위 부유층 노인의 절반 이상이 수급자이다. 반면 정작 빈곤 노인들은 그런 제도가 있는지도 몰라서 수급률이 낮다. 기초노령연금의 월 10만원 급여가 절실한 이들이 사실상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 야당이 된 국회의원들은 법정 수급률을 1~2% 못 채웠다고 다그치니 담당 정부 부처는 소외된 노인을 배려하기보다 목표율에 근접하기 위해 애쓸 뿐이다.

결국은 사회가 지게 될 부담과 정책 합리성을 무시한 채 정치가들이 당장 선거에 이기는 것만 생각할 때 나라는 위기를 향해 돌진하게 된다. 그러다 막상 비상사태가 닥치면 궁여지책으로 정치가와 정치를 뒤로 물리고 전문가에게 나라를 위탁하기도 한다. 그리스 중앙은행장을 지낸 파파데모스는 작년에 그리스 총리로 덜컥 추대됐고, 경제학자인 몬티는 지금 이탈리아를 이끌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선거로 당선된 자만이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울하게도 싫든 좋든 나라를 이끄는 것은 정치가이다.

그런데 모든 정치가가 정치적 계산만 좇는 것은 아니다. 위기는 위대한 정치가와 인간 정신을 고양하는 새로운 비전을 낳기도 한다. 영국의 디즈레일리 총리와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사회가 극도로 분열됐을 때 자기가 소속된 보수당의 이념적 지향을 훌쩍 뛰어넘어 사회 통합의 비전을 제시했다. 반면 1999년 슈뢰더·블레어 선언은 복지 확대로 사회의 경직성이 고도에 달했을 때 좌파의 도그마를 자아비판한 통렬한 반성문이다. 디즈레일리와 루스벨트는 영국과 미국 정치 사상 가장 탁월한 리더십으로 위기를 돌파한 정치인으로 손꼽힌다. 슈뢰더와 블레어는 사회 안전망이 개인의 책임을 면제해서는 안 되며 복지는 개인의 역량을 키워 주어지는 기회를 거머쥐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는 '제3의 길'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는 '사람의 능력을 키우는 복지'라는 새로운 정책 흐름을 형성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이런 외부 세계의 도저한 흐름에 등을 돌릴 수 없는 상황이다. 근래 늘어난 광범위한 빈곤층은 지난 20여년간 급변해온 경제구조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 이들이다. 소득이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절대 빈곤층이 550만명에 이른다. 이들이 노동시장에 안착하여 가능성을 펼치도록 역량을 향상시키지 못한다면 사회 통합뿐 아니라 우리 경제의 내일도 깜깜할 수밖에 없다. 이는 인간과 사회와 글로벌 경제에 대한 깊은 통찰이 요구되는 우리 세대 최대의 도전이며 결코 선심성 복지로는 해결될 수 없다.

그간 급격히 깊어진 우리 사회의 바닥을 지금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다음 세대는 이를 방치하여 생산과 복지 양면에서 집단적 역량을 망가뜨린 세대로 우리를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유력 대선 후보 세 명은 모두 이를 어떻게 타개하고 세계 속의 미래로 향할 것인지에 대해 괴이(怪異)할 정도로 침묵하고 있다. 2012년 한국은 연일 이해 그룹을 찾아다니며 공약을 떨구는 정치적 계산이 아니라 선명한 비전이 필요하다.

 

 

윤희숙 KDI 연구위원·보건복지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0/31/2012103101112.html

 

 

Posted by 겟업
2013. 1. 3. 12:27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 후보는 31일 노인 기초노령연금을 월 9만원에서 18만원으로 올리고, 청년 구직자에 매달 30만원의 취업 준비금을 지급하며, 폐업 자영업자와 실직자에 월 50만원의 구직 촉진비를 대고, 12세 미만 아동에게 매달 10만원 아동수당을 주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박근혜·문재인 후보는 그간 보편적 복지 시책을 펴겠다는 뜻을 밝혀 왔고, 안철수 후보는 자기 책에서 보편 복지와 선택 복지의 균형을 취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지만 최종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할지 두고 봐야 한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내년 복지 지출 규모는 102조5000억원이다. 2005년 50조8000억원이던 복지 예산이 8년 만에 두 배로 증가했다. 여야의 복지 확대 경쟁으로 앞으로 예산 심의 과정에서 더 늘어날 것이다.

보편 복지는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전 국민에게 보육·의료·교육과 같은 기본 복지 혜택을 똑같이 제공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복지를 실현하는 데 드는 비용은 세금을 추가로 걷지 않는 한 조달할 수 없고, 증세(增稅)를 하더라도 단기간에 지금의 몇 배로 늘릴 수 없다. 따라서 대선 후보들은 보편 복지의 수십 가지 항목 가운데 어떤 복지는 언제 시작해서 언제 완성하고, 어떤 복지는 언제부터 시행에 들어갈 것인지 각 복지 항목에 대한 명확한 실천 시간표를 먼저 제시해야 한다. 이 시간표가 의미가 있으려면 각 공약 시행에 필요한 재원 조달 방안도 분명하게 함께 표시돼야 한다. 실천 시간표와 재원 조달 방안이 분명하지 않은 공약으로 국민을 홀리는 것은 정치적 유객(誘客) 행위에 불과하다.

보편 복지 공약을 입법해서 실행하려면 우선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먼저 복지 범위와 증세 등 재원 조달 방안에 국민 합의가 있어야 하고 그다음 여야 견해 절충을 통해 국회에서 입법화하는 데도 추가적 시간이 소요된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1~2년의 이행(履行) 기간이 필요하다. 중요한 문제는 전면적 복지 시대로 옮겨가는 이행 과정에서 국가와 사회의 도움을 가장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계층의 고통을 어떻게 완화해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보편 복지의 추진과 별도로 최(最)빈곤층과 현재의 복지 시스템 밖에 방치된 직업군(職業群)에 대해서는 상당한 재정을 들여 선별적인 지원을 해주지 못하면 여야의 복지 공약 경쟁이 사회의 취약층을 되레 고통에 빠뜨릴 위험이 크다.

지난 19일 78세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74세 아내를 목 졸라 죽이고 자기도 투신자살하려 했던 사건이 있었다. 환자 본인과 수발드는 가족까지 한꺼번에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리는 질병인 치매 환자가 53만명이나 되는데 국가 지원을 받는 숫자는 15만명이 안 된다. 29일엔 불이 난 아파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열한 살, 열세 살의 뇌성마비와 ADHD 장애 남매가 함께 중태에 빠졌다. 26일엔 33살 뇌병변 1급 장애인이 집에 불이 나자 휴대폰 터치펜으로 119에 '살려달라'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결국 연기에 질식해 숨지고 말았다. 국내 등록 장애인이 250만명 있지만 정부·지자체 지원으로 생활을 도와주는 활동 보조인 서비스를 받는 것은 5만명 정도다.

의지할 곳 없는 독거(獨居)노인만 118만명이고 그 가운데 빈곤층이 77%인 91만명이다. 지난 7월엔 강원도 강릉에서 위암 수술을 받은 69세 할머니가 혼자 보살피던 생후 10개월 된 외증손자와 함께 집 욕실에 숨진 채 발견됐다. 초·중·고생 가운데 정부가 아침·점심·저녁을 모두 챙겨줘야 하는 아이가 9만명이다. 이런 아이들은 공책과 연필 살 돈도 마련할 길이 없다.

올해 한국의 복지 예산은 GDP의 9.5%로 OECD 평균(19.5%)의 절반 수준이다.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가 된 복지 욕구를 충족하려면 복지 예산을 계속 늘려야 한다. 그러나 전 국민에게 소득과 관계없이 일정 한도의 복지 혜택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급한 건 고통에 허덕이고 있는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배려다.

대선 후보들은 자신들의 보편 복지 공약을 완성하기까지 이행 기간 동안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이런 불쌍한 사람들을 어떻게 그 고통에서 구해줄 것인지 청사진을 내놔야 한다. 국민도 복지 상품들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화려한 복지 진열장 차리는 데만 정신이 팔린 후보와 우리 사회의 약자들에게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해줄 치밀한 복지 청사진을 내놓는 후보가 누군지 구분해야 한다.

Posted by 겟업
2013. 1. 3. 12:25

가을이 깊었다. 결실과 수확의 계절이다. 시장에 나가보면 햇곡식과 과일이 풍성하다. 각 지방의 특산물 광고도 요란하다. 얼핏 넉넉해 보이는 풍경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전세계 식량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에그플레이션이 이미 코 앞에 닥쳤다. 특히 미국을 위시한 식량수출국들의 올 여름 농사가 아주 나빴다. 올해 말, 내년 초가 되면 먹거리 가격이 걷잡을 수 없이 뛸 가능성이 있다. 우리의 식량자급률은 20% 조금 위에서 턱걸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자급하고 있다던 쌀도 작년 현재 83% 수준으로 떨어졌다. 직불제 액수가 제자리를 맴돌면서 쌀농사를 포기하는 농가가 많아졌다.

아마 세상에서 우리만큼 식량자급률이 낮으면서 우리만큼 천하태평인 나라도 없을 것이다. "필요하면 돈 주고 사오면 된다"는 배금사상이 뼛속 깊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해외농업을 개발해서 식량을 확보한다는 발상도 마찬가지다. 실효성도 떨어지고, 위기상황이 왔을 때 해외로부터 식량을 추수해서 고스란히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 자체가 황당한 발상이다. 해외에 농지를 구입하는 나라에게 토지수탈이라는 비난이 빗발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크게 보아 이 모든 문제는 이른바 '식량 레짐', 즉 먹거리의 생산과 분배를 기업, 시장, 무역의 회로 속에 내장시켜 놓은 탓에 발생했다. 먹거리를 일반 상품과 동일한 논리로 다루는 한 식량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진리를 깨쳐야 한다. 일단 식량자급률을 높여야 한다. 또한 농생태적으로 먹거리를 생산하는 것이 기후변화 시대에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 수 있는 제일 좋은 방식임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많은 이들이 이야기해 왔다. 그런데 먹거리 문제를 논하기 전에 먹거리를 만드는 사람, 농민의 현실을 생각해야 한다. 전세계에서 농촌인구 비율이 줄었지만 절대숫자로 아직도 인류의 3분의 1이 농민이다. 그런데 농민 특히 소농들의 삶은 참으로 신산하다. 오늘날 기아와 만성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인류가 약 10억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 중 7할이 소농과 농촌거주 영세민이다. 먹거리 생산자들이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는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현실을 세계 인권운동이 놓칠 리 없다. 지난 9월 말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중요한 결의안이 통과됐다. 농민과 농촌지역 노동자들의 권리에 관한 유엔선언을 제정하기 위한 실무그룹을 구성하기로 한 것이다. 2014년 가을까지 초안을 작성해서 보고하게 되었으니 빠르면 2년 뒤 역사상 최초로 유엔에서 농민인권선언이 나오게 된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이 발표된 후 인권의 발전은 크게 보아 두 가지 경로를 거쳤다. 하나는 주제별로 인권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인종차별철폐 혹은 고문금지와 같은 주제가 대표적이다. 다른 하나는 해당 집단별로 인권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1979), 어린이-청소년(1989), 이주노동자(1990), 장애인(2006), 원주민(2007) 등이 국제인권 규범의 대상이 됐다. 공식적인 조약도 있고, 덜 공식적인 선언도 있었지만 어쨌든 세계가 인정한 인권보호 대상이라는 점에서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원주민인권선언이 나온 다음 세계 각국의 법률이 바뀌었던 것처럼, 유엔농민인권선언이 나오면 농민과 농업을 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질 것이고, 또 달라져야만 한다.

경제성장과 발전 이데올로기는 도시 편향성을 그 핵심으로 한다. 산업화를 위해서라면 농민을 도시노동자로 만들고, 농촌을 포기하며, 식량을 수입하면 된다는 논리가 우리에게 주술처럼 씌워져 있었다. "촌스럽다"라는 인권침해적 언사가 버젓이 통용되는 사회다. 그러나 과거 장애인을 부르던 별칭이 이제 사라진 것처럼, 여성을 비하하던 말들이 적어도 공적 담론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못하는 것처럼, 농어촌과 농어민의 가치를 폄훼하던 관행 역시 조만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0/h2012103021004624370.htm

Posted by 겟업
2013. 1. 3. 12:12

1990년대 인터넷이 보편화하면서 가장 기대가 쏠린 분야는 단연 정치였다. 저 먼 그리스 시대 이후로 마침내 직접민주주의 시대의 재래(再來)를 예상하며 다들 지레 흥분했다. 사회적 담론이나 국가정책은 더 이상 소수 엘리트의 자의적 판단이 아닌, 대중의 이성적 합의로 결정될 것이었다. 누구든지 제약 없는 자유로운 참여와 소통이 '집단지성'을 발현케 할 것이라고 굳게들 믿었다. 제아무리 잘났던들 '나' 혼자보다는 '우리'가 훨씬 똑똑한 법이니까.

■기대가 무너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유로운 참여와 소통은 서로 다른 의견들을 모아가는 기능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와 취향이 맞는 동지들을 찾는데 가장 유용한 것이었다. 동지들끼리의 결속감이 커질수록 나와 다른 적들의 정체는 확실해지고 사이는 점점 더 벌어졌다. 집단지성이 아니라, 피아간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집단적 극단화 현상이 심화됐다. 동지를 만나고 적과 싸우는데 시간과 장소의 한계마저 허문 SNS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김광진 민주통합당 의원이 과거 SNS에 올렸던 글들이 속속 공개되면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어떤 너그러운 시선으로 읽어도 지극히 변태적인 성 취향에다, 여자나 밝히는 '있는 집' 자식의 행태가 연상되는 역겨운 내용들이다. 도리어 지탄받아 마땅한 반사회적 인식의 인물을 명색이 공당(公黨)에서 특별히 청년비례대표로 뽑아 국회의원 배지를 달아주었다. 이런 품성인줄 모르고 그의 앞선 공적 발언들을 진지하게 시비했던 일 자체가 우습고 부끄럽다.

■초기에 공정한 여론형성의 기대감을 듬뿍 받았던 SNS가 이젠 거꾸로 숙의(熟議)민주주의의 적으로 난타당한다. 그래도 역시 SNS의 순기능은 가볍게 볼 게 아니다. 그가 남긴 글들이 없었고, 또 그렇게 쉬 검색할 수 없었다면 그의 실체를 일반이 알아채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전에도 몇몇 유명 SNS실세들의 트위터 글을 보고 품성에 실망해 생각을 고쳐먹은 적이 여러 번이다. 잘만 활용하면 SNS는 공적 인물들을 걸러내는 유효한 수단이 될 듯도 싶다.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0/h2012103021054524440.htm

Posted by 겟업
2013. 1. 3. 12:12

지난 8월까지 미국 하버드대에 방문교수로 가서 1년을 지냈다. 사무실이 있던 건물은 각각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전·현직 회장인 빌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가 기증했다. 페이스북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도 그곳에서 공부했다. 석학을 많이 배출한 하버드대도 게이츠와 저커버그에 대해서는 특별한 자부심이 있었다. 자수성가로 미국 1위의 부자가 된 게이츠와 나이 20대에 큰 부자가 된 저커버그는 미국 경제체제의 역동성을 잘 보여주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은 각각 3학년과 2학년 때 이 대학을 휴학했고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전 문재인 대통령 후보는 “재벌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빌 게이츠나 마크 저커버그가 안 나온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지금 ‘경제 민주화’가 모두의 화두인 것을 생각하면 똑같은 말을 안철수나 박근혜 후보가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자수성가한 1등 부자가 생긴다면 현재 재벌이 야기하는 기회독점의 논란이 많이 수그러들 것이다. 그렇지만 ‘재벌 때문’이란 원인 분석은 틀렸다. 우선 소프트웨어나 콘텐트 분야는 자본집중적 산업이 아니기 때문에 대기업의 영향력이 비교적 작은 곳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게이츠와 저커버그는 매우 잘 준비되고 기회포착에 민첩했다.

게이츠의 경우 중학교 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웠으며, 고등학교 때 자동차 통행량 분석기를 개발해 팔기 위해 기업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하버드대 3학년 때 당시 마이크로컴퓨터가 나오자 그곳에 쓰이는 소프트웨어를 공급하기 위해 학교를 휴학하고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세웠다. 그 또한 처음에는 소프트웨어의 무단 복제 때문에 무진 고생을 하며, 컴퓨터 잡지에 ‘무단 소프트웨어 복제는 도둑질’이라는 광고를 내 당시 컴퓨터 애호가들로부터 미움을 받기도 했다.

저커버그의 경우에도 중학교 때부터 프로그래밍을 배웠으며 그의 부모는 그에게 프로그래밍 과외를 시키기도 했다. 그도 고등학교 때 인공지능을 이용한 음악 재생기를 개발해 여러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기도 했다. 저커버그는 하버드대1학년 때 멋진 학생을 투표로 찾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오히려 학교에서는 문제 학생 취급을 받았다. 그는 벤처회사 페이스북을 세우기 위해 결국 2학년 때 하버드대를 떠났다.

게이츠와 저커버그의 성공 요인은 명확하다. 그것은 자유로운 중·고등학교 교육과 기업가 정신이다. 이 두 사람이 중·고등학교 시절 단지 주어진 과목의 문제 풀이에 시간을 보냈다면 그렇게 젊은 나이에 기회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기 성취와 모험심으로 대표되는 기업가 정신을 빼고는 이들의 명문대학 중퇴를 설명할 수 없다.

한국의 미래는 청년들의 성공에 달려 있다. 대통령 선거는 어느 후보가 청년들의 성공에 더 나은 방향을 제시했는가에 대한 판단기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안철수·문재인 후보 모두 평준화된 중·고등 교육을 고치겠다는 어떤 공약도 없다. 그리고 장밋빛 희망을 선거 공약으로 내놓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희생해 이를 달성할 수 있는가를 말하지 않는다. 반값 등록금을 약속하기 전에 청년들의 학력과 스펙 쌓기 경쟁을 어떻게 멈출까에 대한 걱정이 있어야 한다.

게이츠와 저커버그의 성공 뒤에는 명문대 졸업장의 포기가 있었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 쉬운 성공이 가능하다는 대권 후보들의 주장은 폰지 게임(허황된 금리를 약속하는 사기 수신행위)을 연상하게 한다. 우리가 아이들의 창의와 재능을 살리는 교육제도를 만들고, 청년들이 고시와 공무원 시험 준비 대신 창업과 도전으로 젊은 날을 불태울 때 그들 중에 게이츠와 저커버그가 나올 것을 나는 확신한다.

 


성원용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745987&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3. 1. 3. 12:11

국제관계학 수업에선 통상 “학생들에게 국가 간 협력을 증진하는 최선의 방법은 경제적 상호의존도를 높이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자유주의적 시각의 국제관계학자들은 “두 나라 간 교역과 투자가 높은 수준일 때 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작다”고 설명한다. 교역과 경제적인 결합은 각국을 이성적인 결정으로 이끌며, 전쟁 가능성을 줄이고 평화와 협력에 따른 상호이익을 증가시킨다.

국제관계학자 중에선 중국의 부상과 관련해 이러한 자유주의적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국제 경제 질서에 더욱 많이 빠져들수록, 즉 외부와의 교역이 늘어날수록 중국은 외부와 협력을 강화하고 같은 지역 내 이웃 국가와의 분쟁을 피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언뜻 우아한 해결책으로 보인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맞아 보이지만 불행히도 현실에선 전혀 통하지 않는다. 외려 그 반대다. 최근 중국이 한 행동을 살펴보면 자유주의적 경제 원칙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로 북한 문제를 보자. 중국과 한국 간의 교역과 상호 투자는 북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중 상호 교역량은 2446억 달러에 이른다. 같은 기간 북·중 교역량은 56억2000만 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한·중 경제 교류 규모가 북·중 간의 50배나 된다는 걸 의미한다. 이러한 경제적 현실에도 중국은 평양과의 외교 관계를 한반도 외교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왜? 베이징은 한반도에서 경제보다 전략 문제를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국제 관계에서 상식이 된 경제 상호의존 이론이 유독 중국에선 통하지 않는 것이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동료인 보니 글레이저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은 경제력을 오히려 일본·동남아시아·유럽과의 분쟁에서 압력 도구로 이용해 왔다. 2010년 9월 일본 해상보안청은 중·일 간 영토분쟁 중인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근처에서 일본 순시선과 충돌한 중국 어선 선장을 체포해 2주 이상 억류했다. 베이징은 이런 조치에 항의하고 자국민 석방을 요구한 것은 물론 희토류의 대일 선적을 중지하기까지 했다. 중국 관리들은 공식적으로는 이런 일이 없다고 부인했으나 중국 희토류 수출 물량의 60%를 가져가는 세계 최대의 희토류 수입 국가인 일본은 곧바로 위기를 인식하고 손을 들었다. 올해 센카쿠(댜오위다오) 분쟁이 재연될 무렵 중국은 희토류 수출 규제를 시작했다. 물론 표면상의 이유로 가격 안정을 내세웠으나 월스트리트저널은 올해 중국의 희토류 수출이 전례 없이 적은 1만t 수준이라고 보도했다.

중국은 동남아에 대해서도 경제력을 지렛대로 사용하고 있다. 지난봄 남중국해 스카버러섬(황옌다오) 주변 해역의 중국 어선 불법 조업 문제로 필리핀 군함과 중국 순시선이 해상 대치를 벌였다. 중국은 그 다음 주에 열린 미국·필리핀 군사 훈련에 불만을 표시했다. 2012년 5월 중국은 필리핀산 과일 수입을 봉쇄했다. 표면상의 이유는 필리핀에서 수입한 바나나와 파인애플에서 해충이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사실 바나나는 필리핀에서 교역 규모가 둘째로 큰 농산물이다. 문제는 이러한 정밀검사를 받는 필리핀산 과일이 망고·파파야·코코넛으로 갈수록 늘어나 급기야 거의 모든 필리핀산 농산물로 확대됐다. 이는 베이징이 보내는 보복의 메시지가 분명했으며 이런 조치는 필리핀 경제계가 정부에 중국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요청할 때까지 계속됐다.

2010년 12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중국의 반체제 활동가 류샤오보(劉曉波)를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뽑았다. 이에 경악하고 분노한 중국 정부는 노벨위원회에 재고를 요청했다. 하지만 노벨위원회는 이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수상식을 앞당겨 개최했으며 그 유명한 ‘빈 의자’를 류샤오보를 위해 남겨 뒀다. 중국도 반응했다. 조용히 노르웨이산 연어의 수입을 중지하고 진행 중이던 자유무역 교섭의 중단을 통보했다. 노르웨이는 이전 몇 년간 어류 수출로 재미를 봤으며 특히 어류 수요가 50%나 늘었던 중국에서 상당한 이득을 거두고 있었다. 중국의 수입 중단 조치로 노르웨이산 연어 판매는 62%나 감소했으며 중국은 심지어 전직 노르웨이 총리의 방문 비자 발급도 거부했다.

 이는 경제적인 상호의존 이론이 중국에선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글레이저는 보고서에서 “중국은 목표로 하는 국가를 굴복시켜 그들의 정책을 바꾸게 하기 위해 경제 관계를 직접적으로 이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어 우려를 자아낸다”고 썼다. 중국은 경제적 상호의존 이론이 역으로 적용되는 나라다. 경제적 상호의존을 무기로 삼아 다른 나라에 자국의 뜻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밀접한 교역 관계를 맺고 있는 파트너 국가에 검역 등에서 필요 이상의 엄격한 잣대를 갖다 댐으로써 원하는 정치적 목적을 이루는 방식으로는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중국이 아시아에서 패권을 잡으려면 우선 덕(德)과 유연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빅터 차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745988&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3. 1. 3. 12:10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체제다(Democracy is the worst form of government).”

최근 정치판을 보며 새삼 가슴에 와 닿는 명언이다. 처칠이 1947년 의회연설에서 한 말이다. 당시 처칠의 처지를 알면 더 공감이 간다. 제2차 세계대전을 막 승리로 이끈 영웅 처칠은 드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총선에 패배해 정권을 빼앗겼다. 나라를 구한 사람에게 패배를 안겨준 민주주의라면 ‘최악’이라 불러 마땅하다.

문장이 여기서 끝난다면 그저 푸념에 불과했을 것이다. 처칠의 위대함은 이어지는 단서조항이다. “지금까지 시도됐던 다른 정치체제를 모두 제외한다면(except for all those other forms that have been tried).” 민주주의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왕정이나 귀족정 혹은 파시즘과 같은 다른 정치체제보다는 낫다는 의미다. 절묘한 반어법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문제점만 크게 느낀다. 아무리 선진국이라 해도 유권자들의 절대다수는 ‘정치 수준이 낮다’고 개탄하며, 늘 ‘정치인은 믿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도 압축성장해 온 우리나라에서 정치불신은 그만큼 더 심각하다. 그 증거가 안철수 현상이다.

당연히 안철수에 대한 기대의 핵심은 ‘정치쇄신’이다. 그래서 그가 ‘구체적인 정치쇄신 방안을 제시하겠다’고 예고했던 지난 23일 인하대 강연은 특히 주목을 끌었다. 현장취재기자가 보내 온 메모를 보고 깜짝 놀랐다. 동영상 화면을 찾아 다시 확인했다. 더 놀랐다.

메모를 보고 놀란 까닭은 쇄신 방안의 내용이 단편적이고 논리가 일방적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회의원 수를 200명으로 줄이자며 비교한 사례가 미국과 일본이다. 비교가 안 되는 나라와 비교했다. 미국은 연방제이고, 일본은 양원제다. OECD 평균으로 따지면 우리나라 국회의원은 350명 정도로 더 늘려야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늘리자’고 나서지 못하는 것은 국민적 정치 불신 때문이다.

동영상을 보며 더 놀란 것은 현장 분위기다. 안 후보는 “법 못 만든 게 국회의원 수가 모자라서인가” “지난 몇 년간 뭘 하신 거죠”라는 식의 비꼬는 투로 객석에 물었고, 대학생 청중들은 환호하며 박수 쳤다. 국회의원 수 줄이고 국고지원 줄이고 중앙당 없애고, 대신 그 비용을 청년실업 해소에 쓰겠다는데 누가 반갑지 않겠는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고, 논리적으로 맞지 않지만 마음에 든다. 포퓰리즘이다.

안 후보가 제시한 쇄신 공약이 사실은 모두 정치불신에 기반한 것이고, 그 공약을 전달하는 형식 역시 정치불신이란 대중정서를 자극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다 보니 사방에서 비판이 몰아쳤다. ‘포퓰리즘’이란 지적에 대해 안 후보는 ‘국민에 대한 폄훼’ ‘정치 기득권의 저항’으로 반박했다. 최강의 받아치기다. 안 후보가 강수를 거듭할 수 있는 것은 여론의 뒷받침이 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 결과 60% 이상이 ‘국회의원 수 줄이기’에 찬성했다. 정치불신이란 사회적 분위기로 볼 때 당연하다. 그렇다고 ‘여론이 틀렸다’고 정면 반박할 강심장 정치인은 없다. 포퓰리즘의 힘이다.

민주주의의 급소는 바로 이런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의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정치학의 숙제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딜레마의 연속이다. 다수의 지배가 원칙이지만, 다수의 독재가 되면 중우(衆愚)정치다. 정치인의 입장에선, 유권자를 대변해야 하지만 따라가기만 해선 대중 추수(追隨)주의로 길을 잃게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언처럼 정치인은 ‘서생(書生)적 문제의식’도 있어야 하지만 ‘상인(商人)적 현실감각’도 있어야 한다. 포퓰리즘은 상인적 현실감각에 속하며, 대중 추수주의 행태를 보일 경우 중우정치가 된다. 다수가 열광하는 포퓰리즘은 정치적으로 극단적 쏠림현상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기에 특히 위험하다.

안 후보는 이런 비판을 이미 예상한 듯하다. 인하대 강연의 마무리 발언으로 ‘민주주의 아버지 존 로크의 말’을 소개했다. ‘새로운 의견은 아직 일반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언제나 의심받고 대부분 반대에 부딪힌다’. 맞는 말이다. 안 후보는 이처럼 멋있는 인용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로크의 사상에 비유한 셈이다.

그런데 전후 맥락이 빠졌다. 로크는 정치인이 아니라 철학자였으며, 로크의 주장이 구현되기까지엔 프랑스 대혁명 같은 세기적 사건과 30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안 후보는 시대를 관철하는 사상가도 아니며, 역사를 건너뛸 수 있는 메시아도 아니다. 정치 신인 안철수는 유권자들에게 더 많은 설명을 해야 한다. 왜 포퓰리스트가 아닌지.

 

 

오병상 수석논설위원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745963&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3. 1. 3. 12:09

일본은 미식 여행 상품이 아주 인기다. 그렇다고 고급 식당 순례는 아니다. 제대로 된 향토 음식을 알차게 먹어보는 내용이다. 나가사키 라면 개항의 산물인 짬뽕과 카스텔라, 싯포쿠 요리(중국에서 전래한 원탁 요리)를 즐기는 식이다. 이런 여행은 먹는 이도 기쁘고, 지역도 살찌운다. 사라질 운명에 처한 지역 재료와 음식을 부활시킬 수도 있다. 사투리가 언어생활을 풍요롭게 하듯, 지역 음식은 한식이라는 거대한 나무를 지탱하는 뿌리가 된다. 제주도가 올레 여행을 통해 고기국수와 몸국 같은 향토 음식에 힘을 얻은 것은 좋은 예다.

얼마 전 대전을 다녀왔다. 역사가 오랜 이 광역시에는 3대를 이어 운영하는 식당도 많다. 갈수록 세련되기만 하는 서울의 식당가에 피곤해진 입맛을 푸근하게 적셔준다. 한 두부 두루치기집에서는 감동스러운 일도 있었다. 진짜 동치미를 내주는 것이었다. 동치미 흉내만 내는 '식초물에 담근 가짜'만 먹어오던 입의 호사였다. 묻어 놓은 독에서 꺼낸 그 톡 쏘는 듯한 발효향이라니. 인심도 넉넉해서 식당 안에는 훈기가 돌았다. 연세 지긋한 멋쟁이 노인들이 파안대소하는 노포(老鋪)는 멋이 넘쳤다. 그 덕에 나도 모르게 막걸리 사발을 연신 비웠다. 생긴 지 오십 년이 넘었다는 칼국수집은 개업 초부터 쓰던 그릇을 진열하고 있었다. 먹을 게 없어서 양으로 해결하던 그때 그 시절의 국수 양푼은 왜 그리 크던지….

돌아오는 대전 역사 앞에는 추억의 가락국수를 팔고 있었고, 시간에 쫓겨 입천장을 홀랑 벗겨가며 먹던 추억에 잠시 눈물겨웠다. 대전까지 고속열차로 불과 사십여 분. 올해가 가기 전에 다시 나만의 미식 기차를 탈 참이다. 기다려라, 진짜 동치미여.

박찬일·요리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0/30/2012103003101.html

Posted by 겟업
2013. 1. 3. 12:09
요즘 러시아에서 만나는 정치인 학자를 비롯해 일반 시민들은 한국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높다. 급속한 경제성장에 대한 관심은 물론이고 드라마 케이팝(K-pop·한국대중가요)에 대한 높은 관심은 러시아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에 대한 이들의 높은 관심은 ‘경제협력’이란 실질적 목표와 닿아 있기 때문에 더욱 현실감이 있다. 그 거점이 되는 지역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축으로 한 극동 지역이다.

100여 년 전 제정 러시아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건설해서 동방 진출을 시작했다.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러시아의 아태지역 진출을 위한 신(新)동방정책의 신호탄으로 해석할 만하다. 러시아 극동지역의 중요성을 재인식해 우리의 시야를 넓혀 준 것이다.

한반도 28배 극동지역 자원 풍부



극동지역은 한반도의 28배에 달하는 방대한 면적에 풍부한 천연자원과 인적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발전 잠재력이 무한하다. 이곳은 또한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4700km에 이르는 동시베리아∼태평양 송유관, 가스관이 건설되고 있고 석유, 가스개발과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도 이루어지고 있다. 우주항공과 유전공학, 해양 등 과학기술 분야도 협력할 것이 많다. 러시아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도 빼놓을 수 없는 변화다. 당장 서비스·물류 분야가 100% 개방된다. 기후온난화로 자원 개발과 북극 항로의 이용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우리의 극동 러시아 진출 역사는 올해로 20년째다. 그동안 한국과 러시아 극동지역 간에는 많은 협력과 성과가 있었다. 나는 올 6월 마가단과 추콧카 출장을 계기로 극동 8개 주를 모두 방문하게 됐다. 9시간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면서 극동 러시아야말로 우리의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국가 발전과 직결되는 곳임을 실감했다.

서울과 블라디보스토크를 고속철도로 연결하면 불과 3시간 거리다. 한국과 러시아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할 날도 올 것이다. 한국과 극동 러시아는 일일생활권이자 단일경제권이 된다는 얘기다. 최근 만난 러시아의 한 인사는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꿈도 꿀 수 없는 일들이 현실이 되고 있다”고 얘기했다. 앞으로 한반도종단철도(TKR)와 TSR를 고속철도로 연결하고 가스관을 연결하는 실크로드 비전도, 통일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얘기다.

이 엄청난 역사적 변혁기에 우리는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 우선 한-러 간 상호 이해와 신뢰 구축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러시아가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중국 일본에 대해서는 국민감정이 좋지 않지만 한국인에게는 우호적이었다.

최근 방문한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있는 우리 영농 기업은 10여 년간 모진 고난을 겪으며 러시아 법을 지키고 현지인을 고용하고 지역 발전에 기여해 왔다. 기업 측 인사들은 “투명하게 기업 운영을 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던 현지 사람들이 이제 ‘당신들이 옳았다’고 말한다. 나아가 한국 기업이 잘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전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세계 유일의 한국학 대학이 있어 좋은 인적자원을 양산하고 있으며 현대호텔도 있고, 한국이 운영하는 문화센터와 국제학교도 있다. 무엇보다 극동지역에 거주하는 10만여 명의 고려인이 큰 자산이다.

5∼10년 내다보는 마스터플랜 필요

극동의 중요성에 상응한 그랜드 마스터플랜이 필요하다. 한-러 간 공동의 비전과 전략을 토대로 최소한 5∼10년간의 협력 내용과 액션플랜, 로드맵이 담겨야 할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극동 러시아와 중국 동북 3성을 대상으로 200여 개의 프로젝트가 망라된 10개년 협력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한-러 양국은 더 나은 협력 모델을 추진할 수 있는 경험과 역량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 이제는 마스터플랜을 토대로 행동할 때다.

러시아는 우리 편이 될 수 있다. 러시아를 더 가까이 하자.

 


이양구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

 

 

http://news.donga.com/3/all/20121030/50482829/1

 

Posted by 겟업
2013. 1. 3. 12:08

‘가해자 한정(限定)’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전후 화해에 대해 논의할 때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전쟁 피해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커진 것은 그리 먼 옛날 일이 아니다. 산업혁명 이후 규모가 커졌고, 피해도 심각해졌다. 19세기엔 식민지 쟁탈 전쟁이 빈발했고, 20세기에 벌어진 두 차례 세계대전은 총력전으로 치달았다. 그 결과 ‘망각에 따른 화해’가 불가능하게 됐다.

망각이 불가능하다면 책임 추궁이 불가피하다. 책임 추궁 없이는 전후 화해가 어렵기 때문이다. 전쟁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서는 가해자를 한정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이를 위해 전범재판이 필요해진다. 국민 전체를 가해자로 하는 전후 화해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인은 능란하게 ‘가해자 한정’을 이뤄냈다.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모든 책임을 히틀러와 나치에 떠넘겼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유대인 말살 등 나치의 범죄는 상식을 벗어났다. 그 책임을 스스로 철저하게 추궁하지 않는 한 독일인은 유럽 세계에 복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폴란드를 방문했던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는 바르샤바의 게토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종전 40년 기념일에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은 “과거에 눈감는 사람은 현재도 보지 못한다”고 연설했다. 그 ‘잊어서는 안 되는 과거’는 히틀러와 나치의 범죄였다. 이를 신랄하게 추궁한 덕분에 일반 독일인은 전쟁 책임을 면했다.

이상하게도 일본인은 ‘가해자 한정’을 하지 못했다. 도쿄 전범재판에서 많은 전범들이 처형됐고, 중국 정치지도자들이 “나쁜 사람은 소수의 군국주의자들뿐이다”며 ‘구조선’을 내주었는데도 말이다. 연대책임의 집단주의적 문화 때문인지 ‘1억 총 참회’라며 스스로 전쟁 책임을 공유하려고 했다.

그 하나의 일그러진 형태가 A급 전범들의 야스쿠니(靖國)신사 합사(合祀)다. 원래 야스쿠니신사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과 군속, 국민을 봉안하기 위한 종교시설이다. 군사법정에서 심판받은 사람들이 사후에 자신이 신사에 모셔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300만 명 이상의 동포를 희생시키고 아시아 각국에 엄청난 희생과 손해를 안긴 전쟁 지도자들에게는 분명히 일반 국민과 다른 무거운 전쟁 책임이 있다. 하지만 가해자를 한정해 그 책임을 적극적으로 추궁하지 않았다고 해서 일본인이 독일인보다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식으로 보는 것은 오류다. 또 독일과 일본을 그런 틀로 비교하는 것도 정확하지는 않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일본의 책임을 추궁할 때 독일과 비교해 ‘전쟁 책임’을 추궁하기보다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과 비교해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무력 제압에서 시작된 식민 지배는 징병, 징용 등 전시동원에 이르기까지 전쟁보다 더 큰 피해를 안겼다. 그 책임 또한 전쟁 책임보다 분명히 무겁다.

하지만 전쟁 책임 추궁에 열심인 서구 제국도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 책임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 오히려 지금까지도 식민지 지배를 합법화하고 있다. 영국은 아편전쟁으로 빼앗은 홍콩을 난징조약과 베이징(北京)협약에 따라 1997년에서야 중국에 반환했다.

일본의 한국 지배는 이웃 나라를 병합한 무거운 범죄였다. 이에 가장 근접한 예는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일 것이다. 프랑스도 알제리를 병합해 동화시키려 한 흔적이 있다. 하지만 그 후 프랑스가 알제리에 사죄와 보상을 해 양국 간 화해가 성립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식민 화해’는 ‘전후 화해’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오코노기 마사오 규슈대 특임교수 겸 동서대 석좌교수

 

http://news.donga.com/3/all/20121030/50482831/1

 

 

 

Posted by 겟업
2013. 1. 3. 12:08

많은 이가 “뜨거운 열정이 있으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세상살이”라고도 한다. 이 두 가지를 놓고 보면 당연히 모순적이다. “성공하기 위해선 열정을 가져야 한다”와 “열정을 가져도 성공하지 못할 수 있다”는 논리적 대립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하나 빠진 게 있다. 열정은 함께 가야 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송나라 때 한 어리석은 농부가 있었다. 그는 모내기를 끝내 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냈지만, 며칠이 지나자 모가 어느 정도 자랐는지 궁금해졌다. 다음 날 아침 서둘러 논에 가 보니 자신의 벼만 다른 사람이 심은 것보다 조금 덜 자란 듯 보였다. 그래서 벼를 조금 잡아당겼더니, 금세 벼의 키가 다른 벼와 비슷해졌다. 이를 본 농부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다음 날에도 논에 가서 벼를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저녁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무척 피곤하구려. 하루 종일 벼를 빼느라 힘이 하나도 없어!” 기겁을 한 식구들이 다음 날 논에 나가 보니 이미 벼는 하얗게 말라 죽어 있었다.

농부는 자신의 의지만을 앞세워 시기를 앞당기려 했다. 하지만 그 같은 시도가 성공할 리는 만무하다. 열정만으로 시간을 앞당기려 하거나, 혹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조건을 순식간에 뒤바꾸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부작용만 불러일으키며 기반마저 뒤흔든다. 열정은 시기를 조절할 수 있는 인내와 함께 가야 한다. 열정으로 자신과 주변의 조건을 성숙시키고 인내를 통해 시기가 올 때까지 견뎌내야 한다. 30대 미국 대통령이었던 캘빈 쿨리지(재임 기간 1923∼1929년)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세상의 어떤 것도 굴하지 않는 인내의 힘을 이길 수 없다. 재능도 대신할 수 없다. 재능을 가진 자가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는 너무나 흔하기 때문이다. 천재도 마찬가지다. 인정받지 못하는 천재는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인내와 강한 결심만이 전능하다.”

쿨리지는 ‘인내와 강한 결심(열정)’을 ‘전능하다’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곧 무적(無敵)이라는 뜻이다. 열정을 가지고 인내를 품을 수 있다면 당신도 ‘무적의 전사’가 될 수 있다.

이남훈 경제 경영 전문작가

 

http://news.donga.com/3/all/20121030/50482899/1

Posted by 겟업
2013. 1. 3. 12:07

‘성공사례’란 ‘예외사례’다. 성공사례를 제시하며 ‘당신도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오류다. 마치 복권 1등 당첨으로 수억원의 돈을 거머쥔 성공사례를 제시하며 ‘당신도 열심히 복권 사면 1등 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성공이란 것은 항상 극소수만이 달성할 수 있다. 사회적 차별과 부당한 제도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공한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통계적으로 보면, 그들은 수십만, 수백만명 중에 하나 생길까 말까 하는 극히 예외적인 ‘아웃라이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사례가 제한된 언론 지면에 ‘성공사례’로 소개되는 것이다.

 

최근 새누리당 김성주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여성·청년들의 일자리 문제와 관련해 ‘주도적인 자세’를 강조하면서 “정부야, 일자리 창출해라, 이런 수동적인 자세로는 안 된다”고 언급했다. 또한 “애 젖 먹이면서… ‘웰빙 진생쿠키’를 만들어 구글에 올리면 전세계에서 주문을 받을 수 있는데… 왜 젊은이들은 수동적으로 대응하느냐”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일자리로 고민하는 여성들과 청년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을 하면 성공은 제쳐두고라도 최소한의 사람다운 생활을 누릴 수 있을까? ‘진생쿠키’가 성공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운이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열심히 노력해도 운이 없으면 성공을 거두기 힘들다. 하지만 이는 그야말로 하늘의 뜻일 테니 오늘 논의에서 일단 제외하자. 둘째, 김성주 공동선대위원장이 말한 대로 주도적인 자기 노력은 필요하다. 당연한 말이다. 셋째는 시스템 혹은 정책이다. 그녀가 ‘진생쿠키’를 만들어 ‘구글’에 올리면 전세계에서 주문을 받을 수 있다고 했는데, ‘진생쿠키’가 개인의 노력을 상징한다면 ‘구글’이란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적 인프라와 정책을 상징한다.

 

‘진생쿠키’ 발언이 나온 날, <한겨레> 독자로부터 문의를 받았다. 그녀의 발언 자체가 딱히 문제가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왜 그녀의 발언이 비판을 받는지 궁금하다고. 사실 그녀가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룩한 기업인으로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별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현재 대통령 선거를 앞둔 집권당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다. 대선 후보와 함께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고 관련된 시스템과 정책을 내놓아야 하는 위치를 고려했다면 그녀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여성, 청년 여러분. 일자리 문제로 힘드시지요? 노력하는 만큼 목표를 성취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정책과 사회 구조를 만들기 위해 이 기회에 힘써 보겠습니다”라고.

 

한때 “힘들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후배에게도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서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의 노력만큼이나 그 노력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는 정책과 구조가 중요하니까 말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일부 성공사례를 놓고 개인의 노력을 다그칠 것이 아니라, 기득권자에게만 기회가 더 돌아가는 불공정 경제 구조를 혁신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 좀더 균등한 기회가 돌아가는 ‘제대로 된 정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성공적인’ 정치와 정책은 극소수에게 최대한의 성공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 시민에게 최소한의 안정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지금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누가 변화를 완성까지는 못하더라도 제대로 된 방향과 기반이라도 잡아줄까? 여성과 청년의 입장에서 ‘가장 적은 노력’으로 자기계발의 유리한 발판을 마련할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57978.html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