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에서 여성 상사 시대가 한순간에 찾아온 것은 아니다. 1960, 70년대엔 저임 여공 시대가 있었고 1980년대엔 서무 여사원의 시대가 있었다. 1990년대에 절대 다수 대졸 남성에 섞여 입사한 ‘외로운 여성 공채’ 시대가 열렸다. 직장 내 여성 상사는 이제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성 임원의 시대는 언제 열릴까.
여성 상사가 부하들과 함께 과업을 수행하는 일을 한다면 여성 임원은 조직에 필요한 과제를 고민하고, 그것을 추진할 방법을 생각해 내며,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는 일을 한다. 또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상사가 관리자라면, 임원은 리더다. 여성 임원은 직접 조직 내 의사결정에 참여해 조직의 윤곽을 바꿔 놓기 때문에 여성 임원들이 포진해 있는 기업은 밖에서 봐도 멋있다. 여성 상사는 ‘유능한’ 여성이지만 여성 임원은 ‘성공한’ 여성이다. 여성 상사는 후배들의 롤 모델이 되지만 임원은 사회적 롤 모델이 되므로 여성 임원은 존재 자체가 대(對)사회적 메시지이다.
성공한 여성은 많지만 여성 임원이 별로 눈에 안 띄는 이유는 뭘까? 아직 시간이 안 됐기 때문이다. 기업에서 임원이 되려면, 최소 입사 20년은 걸리는데 한국 기업에서는 이제 막 내부 승진 여성 임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고용노동부는 2010년 현재 종업원 1000명 이상인 대기업 여성 임원 비율이 6.5%라고 추정한다. 수치로는 미미할지 몰라도 여성 임원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로는 충분하다. 조사 대상 기업 중 여성 임원이 1명도 없는 경우가 63.5%나 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나머지 기업에서의 여성 임원 비중은 10%를 훨씬 상회할 것이라는 추산이 가능하다.
여성 임원 40%가 마케팅 분야 종사
여성 임원 비율은 2020년 최대 20%까지 갈 수 있다. 첨단을 지향하는 기업들에서는 8년 후면 여성 임원이 30% 또는 그 이상을 차지할 것이다. 여성 임원은 여전히 소수겠지만, 지금보다 훨씬 ‘편안한 소수(comfortable minority)’가 될 것이다.
기업 간 차등이 있듯이 분야 간에도 차등이 있어, 여성 친화적인 분야가 있는가 하면 남성만의 철옹성도 있다. 굳이 애써서 후자를 택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성장하는 분야, 남성과의 차별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 여성들의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여성 임원들이 주로 포진해 있는 분야는 마케팅, 고객서비스, 교육, 연구개발(R&D)이다. 여성 임원의 약 40%가 마케팅 분야에 종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최고 여성 임원은 모두 이 분야 전문가이다. 교육이나 커뮤니케이션 분야도 두드러진다. LG그룹 최초의 여성 임원도 교육통이다. 최근엔 디자이너가 임원으로 승진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향후 여성들에게 전망이 밝은 분야가 R&D이다. 여성의 고학력화 및 이공계 진출 경향과 함께 더 많이 눈에 띌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비해 영업의 경우, 여성들의 활약이 덜하다. 아이디어 추진보다는 판매 조직을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조직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여성에게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영업은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욕심내는 임원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시험대이니만큼 적극적인 도전 의지가 중요하다고 본다.
전문성의 시대라고 하지만 여성 임원에게 전문성은 약이자 독이다. 한 우물만 파고 있으면 큰 숲을 보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기 쉽다. 남성들은 부서를 옮기라는 ‘조직의 명령’에 군말 없이 따르는 경우가 많은데 당장 전문성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어도 길게 볼 때 멀티 플레이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IBM 등 해외 선진 기업은 임원 후보를 고를 때, 전문성은 기본이고 도전적 업무, 글로벌 경험, 핵심 업무 수행 경험을 본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보는 것은 그 순간의 부담감은 있겠지만 그 이상의 보상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여성 임원의 가장 큰 약점으로 네트워크 능력이 지적된다. 타고난 성격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네트워크 구축은 활동 반경이나 시간 투자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의 필요에 귀를 기울이고, 공정하게 대하며, 성심껏 일관되게 도와주는 것이 열쇠이다.
전문성은 藥이자 毒… 영업도 해봐야
일하는 여성들에게 최대 난제는 일과 가정의 양립인데 임원이 되고 나면 늘 머릿속에 맴돌았던 ‘일 포기’ 카드를 던질 개연성은 크게 떨어진다. 이전보다 일에 더 몰입해야 하고 회사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책임감과 일을 갑작스레 그만두었을 때의 파급효과가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 임원들은 일과 가정의 양립 문제를 극복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상은 고질화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슈퍼우먼이 아니면서 슈퍼우먼 행세를 해야 하는 여성, 상사일 때만 해도 스스럼없이 불만과 고충을 나누던 동료들마저 곁에 없는 외로운 리더 자리에서 스트레스를 견뎌내는 여성이 바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여성들인 것이다.
강우란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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