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있는삶'에 해당되는 글 1071건

  1. 2014.09.14 [이원복의 세계 속의 한국] 관습의 폭력
  2. 2014.09.14 [2030 잠금해제] 가족이라는 환상
  3. 2014.09.14 시골 할머니들의 상상력 죽여주더라
  4. 2014.08.18 [오늘과 내일/박중현]좋은 인디언, 나쁜 인디언
  5. 2014.08.18 [이미애의 줌마저씨 敎육 공感] 공감력도 학습과 연습이 필요하다
  6. 2014.08.18 [강민석의 시시각각] 물병이 두려웠나 … 정홍원 총리 유감
  7. 2014.08.18 [노트북을 열며] 유언비어는 불신을 먹고 자란다
  8. 2014.08.18 [이정재의 시시각각] 네 탓, 내 탓, 선장 탓
  9. 2014.08.18 [분수대] 난 별, 넌 별, 빛나는 별
  10. 2014.08.18 [이규연의 시시각각] 장화홍련전 '미꾸라지'가 있다
  11. 2014.08.18 [중앙시평] 호감이 세상을 움직인다
  12. 2014.08.18 [백성호의 현문우답] 노아의 방주를 타는 법
  13. 2014.08.18 [이규연의 시시각각] 색계(色界) : 대한민국 성장의 한계
  14. 2014.08.18 [시론] 창조경제, 독일의 '히든 챔피언' 주목하라
  15. 2014.08.18 [아침을 열며] 초위험사회의 대한민국
  16. 2014.08.18 퍼스트 펭귄 … 세상을 바꾸는 '미친' 그들
  17. 2014.08.18 [편집국에서/4월 21일] 규제는 암이 아니라 콜레스테롤이다
  18. 2014.08.18 [메아리] 발달장애인법, 국격(國格)의 문제다
  19. 2014.08.18 [조동성 칼럼] 나눔과 봉사로 해가 지지 않는 대한민국
  20. 2014.08.18 [@뉴스룸/허진석]우리 동네 ‘요상한’ 카페
2014. 9. 14. 08:39

스페인은 711년부터 1492년까지 거의 800년간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이슬람은 타 종교에 관용적이어서 모두 종교의 자유를 누리며 평화롭게 공존하였다. 스페인의 가톨릭교도들은 국토수복 전쟁, 즉 레콩키스타도르 전쟁을 700년 넘게 계속했고, 이교도인 이슬람과의 전쟁을 치른다 하여 십자군원정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었다. 정말 끈질겼던 이 전쟁에서 승리한 가톨릭교도들은 이교도에 매우 배타적이고 적대적이어서, 가장 먼저 한 것이 무슬림과 유대인들을 국외로 추방한 것이었다. 스페인 문화 속에는 반(反)이슬람, 반유대인 정서가 짙게 녹아있지만 너무 오래 생활화되어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스페인 북부에 카스트리요 마타후디오스(Castrillo Matajud<00ED>os)란 인구 64명의 작은 마을이 있다. ‘마타후디오스’는 ‘유대인을 죽여라’(mata=죽여라, jud<00ED>os=유대인)란 뜻인데 이와 같은 반유대, 반이슬람적 어휘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이런 정서는 16세기부터 3세기 동안이나 이교도를 잔혹하게 박해했던 종교재판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도 스페인 사람들은 ‘마타후디오스’란 음료를 마시는데 이는 포도주에 레몬주스를 섞어 단숨에 들이켜는 부활절 전통 음료로도 유명하다. 스페인의 보호성자는 야곱, 즉 이아고로 성 야곱은 스페인말로 ‘산티아고’가 된다. 그런데 ‘산티아고 마타후디오스’(성 야곱이시여, 유대인을 죽이소서)라는 도시가 과거 스페인 식민지였던 멕시코에도, 미국 오하이오주에도, 쿠바에도 버젓이 존재한다.

 이 이름을 바꾸자고 이곳 시장이 나섰다. ‘마타=죽이자’의 a를 o로 고치면 ‘모타후디오스’ 즉 ‘유대인의 언덕’이 되니 마을 문장에도 들어가는 ‘유대의 별’에도 맞는다는 것이고, 아니면 이 마을에서 태어난 유명한 작곡가의 이름으로 바꾸자는 의견도 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오는 5월 26일 투표로 마을 이름 변경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왜 갑자기 수백 년간 사용해온 마을 이름을 바꾸자고 하는지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관습화되고 미처 깨닫지 못한 작은 것이라도 ‘올바르지 않고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것’이라면 바꾸어야 하는 것이 글로벌 시대의 정신이다. 글로벌화란 인류 보편적인 상식과 규범을 받아들이고 이에 어긋나는 우리의 것을 여기에 적응시켜 범세계적인 호환성을 획득해 나가는 것이지, 자기의 것을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도 아주 사소하지만 우리들만의 독선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없는지 둘러보아야 한다. 


이원복 덕성여대 석좌교수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4578720&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4. 9. 14. 08:39

얼마 전 <대한민국 부모>라는 책을 읽는데 엄마의 외도를 다룬 부분이 있었다. 일상의 대부분을 남편 내조와 자식 교육에 할애하는 중산층 엄마가 외도를 가족 붕괴의 원인이 아니라 반대로 가족 유지에 필요한 삶의 활력소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나는 약간 혼란스러웠다. 외도라는 극단적인 처방을 통해서까지 유지하고자 하는 그 가족이라는 게 대체 뭔가? 도대체 가족이라는 게 왜 그렇게까지 중요한가?

곰곰이 생각해보던 나는 가족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요즘의 한국 사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굉장히 모순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쪽에서는, 가족은 더욱 강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티브이 예능은 딸바보 아빠와 훈남 아들에게 장악되었다. 내가 만나본 많은 젊은이들이 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모와 친밀하게 지낸다. 거의 친구나 애인 사이 같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대학입시, 취업, 연애, 결혼에 이르기까지 부모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가족은 파탄 난 지 오래다. 살인에 이르는 가족 내 폭력이나 친족 내 성폭행 뉴스는 너무 잦아서 이제는 그 뉴스가 그 뉴스처럼 느껴질 정도다. 한국의 이혼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 가운데서도 상위를 차지한다. 사회면에서는 요즘 사람들은 결혼에도 출산에도 회의적이라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런데 이 모순적인 풍경을 좀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다시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한국은 정말로 끔찍할 정도로 모든 것이 가족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마치 나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가족, 혹은 다수의 가족으로 이루어진 연합체 같다. 가족은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한국인을 지배한다. 그건 그저 특수한 관계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언어이자 사상이다. 실제로 우리는 친족 간의 호칭을 타인들 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그것이 권장된다. 아버지 같은, 딸 같은 식의 수사는 어떤 상황에서나 카드게임의 조커처럼 기능한다. 위기에 처한 자식을 구하기 위해 범죄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은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크게 환영받는다. 이상한 것은, 이렇게 가족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다루는 사회 속 현실의 가족은 살인과 폭력, 성폭행 등 각종 범죄의 온상인 경우가 드물지 않으며, 많은 사람이 가족으로 인한 크고 작은 상처에 괴로워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오로지 가족 외에 아무것도 지키고 발전시키지 않은 우리 사회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실재하며, 악화하는 현실의 가족의 문제에 대단히 무력하다. 그저 망가진 현실 가족 위에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무한히 덮어씌울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가족을 둘러싼 극단적 판타지와 숨막히는 현실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건지도 모른다. 점진적인 부의 증가에 기반을 둔 한국의 중산층 가족 모델은 시효를 다했다. 더 이상 그런 식의 가족을 만들 희망이 없음을 깨달은 젊은이들은 결혼을 미루고, 출산을 기피한다. 이렇게 현실에서 가족이 멈추어 섰는데도, 우리는 계속해서 그것만을 바라본다. 우리가 가진, 상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가족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외도와 같은 극단적 처방을 통해서라도 망가진 가족을 끌어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은, 그 바깥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흔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피가 부르는 고통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가족이 아닌 다른 관계와 세계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다.


김사과 작가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32445.html


Posted by 겟업
2014. 9. 14. 08:33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유알아트’ 김영현 대표


고기 잡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물이 부족해 샤워시설도 없는 섬마을 작은 부두에는 배에서 내리는 관광객보다 민박 손님을 기다리는 노인들이 더 많았다. 일 없는 할아버지는 할머니랑 다툼이 잦았다. 유일한 낙이 있다면 바닷가에 떠내려오는 낚싯대를 건져 손질을 해서 멀쩡한 낚싯대로 만드는 일이었는데, 그렇게 고친 낚싯대를 들고 나가면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물때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었고 사시사철 어떤 고기가 어디에 몰리는지, 어떤 미끼를 쓸지 훤하게 꿰고 있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 집 담벼락에 운치 있는 간판들이 내걸렸다. 헌 빨래판에 고기잡이 모빌을 덧대어 만든 ‘고기 잡는 집’이란 문패 뒤로 집 안팎에 ‘숭어떼 기다리는 곳’, ‘물고기 말리는 곳’ 같은 팻말도 붙었다.


“할아버지가 주는 낚싯대와 미끼만 있으면 절대로 꽝 치는 일이 없다”는 소문이 나면서 하나둘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물도 부족하고 시설도 낡았지만 “실제 섬사람처럼 하루라도 지내보자”는 슬로건에 육지 사람들은 매료되었다. 대박이었다. 할머니에게도 이제 할아버지는 예전의 일 없는 노인네가 아니다. 노부부 요즘 깨가 쏟아진다.


이들에게 동화 같은 반전을 선사한 사람은 동양화를 전공한 예술가다. 그는 화선지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대신, 마을을 배경으로 사람들의 삶을 따뜻한 ‘이야기’(스토리텔링)와 ‘디자인’으로 채색해낸다. 한 달 동안 섬 주민과 먹고 자고 부대끼면서, 변방으로 밀쳐진 그들의 삶에 이름표를 달아준다. 통영시 매물도의 ‘꽃 짓는 할머니집’, ‘바다마당을 가진 집’, ‘마을을 한눈에 담는 집’들도 그렇게 탄생했다. 문화기획집단 ‘유알아트’의 김영현(49) 대표, 그는 사람이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에 가치와 정체성을 되살리는 작업을 “예술”이라고 부른다. 3월21일 찾아간 유알아트 사무실은 서울 정릉천변 시장통 건물 4층에 있었다. 


“어떤 할머니가 시계 만들었는데 아침부터 저녁 7시까지가 2/3였다 잠자는 시간은 좁게 만든 거다 이분들은 오히려 학습받지 않은 예술적 감성들을 갖고 계셨다” 

통영시 매물도의 작은 부둣가, 하동의 시골 골목길 빗자루가 멋진 예술작품으로 변신한다 
동양화 전공자로 시작한 그는 모든 사람을 예술가로 모신다 


수천명이 만든 아기장승, 20억 조각보다 빛나


-‘유알아트’란 무슨 뜻인가? ‘당신이 예술’이란 뜻인가?


“‘모든 사람이 예술가’란 뜻이다. 1998년 뜻 맞는 친구들과 유알아트 만들고 이듬해부터 (화가) 임옥상 선생님과 ‘당신도 예술가’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처음부터 특별한 의미나 개념을 가지고 시작한 건 아니었고 당시에 인사동을 차 없는 거리로 만드는데 좋은 이벤트 같은 게 없을까 하다가 용감하게 시작한 거였다. 근데 하다 보니 진짜 재밌어졌다.”


‘당신도 예술가’ 프로젝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커뮤니티 아트’ 프로그램으로 불린다. 길거리와 공원, 일상의 공간에서 주민들이 직접 창작에 참여하는 대규모 예술 프로그램인데 그 형식도 다양하고 기발하다. 20m 길이의 광목천 위에 ‘하늘을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 참가자들이 함께 그려 넣기도 하고, 대형 그물망을 세운 뒤 오색 한지에 각자의 소망을 써서 매달기도 하고, 긴 빨랫줄 위에 매듭과 구슬을 이용해서 인형을 만들어 걸기도 한다.


-참가자들에게는 재미있는 퍼포먼스겠지만 미학적 가치를 매길 만한 예술작품은 아니잖은가?


“시민창작자들이 만드는 게 작가들 것보다 훌륭할 때도 많다. 같이 작업하는 친구들(전문작가들)이 행사 초반에 샘플 작업을 열심히 해서 걸어두는데 한 시간쯤 지나면 그걸 다 떼야 하는 상황이 온다. 사람들이 한 500명쯤 모이면 시간이 흐르면서 작가들 작품보다 훨씬 더 재밌는 게 나오기 시작하니까….”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유알아트의 모든 사업을 관통하는 두 가지 흐름이 있는데 바로 ‘상호학습’과 ‘상호작용’이다. 현장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서로에게 학습되고 서로에게 작용한다는 걸,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나도 실감하게 되었다. 과거가 천재들의 창작 시대였다면 지금은 집단창작 시대다. 시민창작자들이 판을 만들어내면서 스스로 그 에너지가 진화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너무 이념적, 관념적인 의미 부여 아닌가?


“2007년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공연과 미술창작 프로그램을 같이 한 적이 있다. 그때 프랑스 조각가가 만든 20억원짜리 작품이 야외에 전시되고 있었는데, 우리도 ‘당신도 예술가’에서 만든 작품을 그 곁에 쫙 늘어놨었다. ‘아기장승 만들기’ 프로그램에 몇천명이 참여해서 색깔 칠해 만든 거였는데 그걸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장승들 앞에서 사진을 찍는 거다. 20억짜리가 아니고.”


-상품화된 예술품의 시장가치와 그것의 문화적 가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얘긴데.


“20억짜리라고 20억짜리만큼 감동을 주는 건 아니다. 그것보다 몇백만원짜리 예산 가지고 몇천명이 만들었던 작품의 에너지가 훨씬 엄청났던 거다.”


-이런 프로젝트의 재원은 어떻게 마련했나?


“초창기인 2000년도에는 예술가 지원금을 300만원 받았다. 하루에 500명 내지 1000명 참여해서 매주 일요일마다 인사동에서 했는데….”


-한 회에 300만원?


“아니, 1년에 300만원. 그때 지원심사를 맡은 기관이 문예진흥원이었는데 심사위원들이 ‘밥 먹고 종일 그림만 그리는 사람 지원하기도 바쁜데 당신처럼 사람들하고 노닥거리는 데에 돈을 줘야 하냐?’고 하더라. 당시엔 우리가 하는 일들, 커뮤니티 아트, 사람들에게 문화 향유, 창작의 기회를 준다는 것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던 거다. 그러다가 참여정부 들어서면서 내가 하고 있던 일이 ‘참여’의 전형으로 보이게 되고 이후 지원금이 대폭 늘었다. 하루 1000만원씩. 지역에 있는 문예회관을 찾아가 프로그램을 세 개씩 돌렸다.”


-엄청난 비즈니스다.


“버스를 대절해서 한 번에 40명 정도 같이 움직였다. 프로그램 한 번 할 때. 버스 한 대, 트럭 한 대, 카니발 한 대를 가지고 가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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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은 왜 이장님을 혼내달라 했을까


-그렇게 잘나가는 일을 왜 접었나? 2008년도에 ‘당신도 예술가’ 프로젝트를 돌연 중단했는데.


“경남 함안에 프로그램을 하러 내려갔을 때였다. 군 전체 인구가 2만3000 정도 되는 작은 지역이었는데 다른 시골도 그렇지만 조손가정이 많았다. 엄마·아빠 서울 살고 아이만 할머니한테 맡겨놓는…. 보통 그러면 할머니는 애들 ‘밥’이다. 그때 마침 ‘한지 공책 만들기’를 하는데, 손주랑 같이 온 할머니 한 분이 너무너무 잘 만드시는 거다. 옛날 소학교 다닐 때 해보셨다면서. 그래서 아예 메인강사를 보조로 앉히고 할머니가 메인강사를 맡게 하니 꼼꼼하게 잘하시더라. 그 순간 손주의 표정이 바뀌는 걸 봤다. 자기 ‘밥’이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한테 ‘선생님, 선생님’ 하니까. 아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우리 선생님 얘기 잘 들으셔야 돼요, 여기 앉으시고 저기 앉으시고’ 하면서 사람들을 챙겼다. 그러다가 날이 어둑어둑해지니까 애가 갑자기 시무룩해지는 거다.”


-가기 싫었나 보다. 할머니를 더 자랑하고 싶어서.


“그러게. 나한테 다가오더니 ‘대장 선생님, 다음주에 또 오면 안 돼요?’ 하더라. 근데 나를 부르려면 1000만원이 있어야 하질 않나. 가슴이 먹먹했다. 가는 데마다 그런 아이들을 만났다. 그게 계속 누적이 되다가 ‘안 되겠다, 방식을 바꾸자’ 생각했다. 지역에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임을 만들면 내가 가서 교육을 해주고 그들이 지역 동아리를 꾸리는 식으로…. 어느 정도 교육을 하다 보니까 우리가 안 가도 될 정도가 되더라. 그래서 아예 그만뒀다.”


-그래서 그만뒀다고? 하루 1000만원 벌던 사업을?


“활동 영역이 자꾸 늘어나다 보니 함께 일하는 친구들도 힘들어했다. ‘유알아트에 비전맨(vision man)이 되려고 들어왔는데 하다 보니 실무를 치러내는 스태프가 되더라’는 고백들이 나오고. 그래서 참 아팠다. 일도 많아지고 지원도 대폭 확대될 시점이었는데, 그것과 상관없이 문을 닫기로 했다. 안식년이 필요하니 1년 동안 각자 살고 싶은 대로 살고 다시 모이자 하고….”


스스로 설정한 안식년 동안 발길 내키는 대로 전국을 유랑했다. 차 트렁크에 낚싯대 싣고 달리다가 배를 타고 돌기도 하고, 명승지 아닌 평범한 마을들을 헤집으며 동서남북 쏘다녔다. 10년간의 유알아트 활동을 반추하면서 삶이란, 예술이란 무엇일까 부단히 되묻는 여정이었다. 그렇게 얻은 해답은 ‘지역’이었다. 일상적 삶이 펼쳐지는 현장, 그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채롭게 하는 일. 2010년 유알아트는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이후 김영현은 서산과 매물도, 담양의 창평, 칠곡, 하동 등지에서 지역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유알아트를 설명하는 문구가 이전에는 ‘공공문화 개발센터’였다가 ‘삶의 기술 발전소’로 바뀌었다. ‘문화, 예술’과 ‘기술’은 대비되는 개념 아닌가?


“기술도 문화의 한 분야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삶의 현장에서 전해져 내려온 일상의 기술은 우리의 훌륭한 문화다. 우리가 담양에서 했던 달팽이학당도 동네 사람들의 전통적인 삶의 지혜를 바탕으로 만든 거다.”


-달팽이학당이 뭐하는 곳인가?


“담양 창평이 슬로시티로 지정되었는데 달팽이는 슬로시티의 상징이다. 보통 지역에서 뭘 배우려면 센터에 가서 배우지 않나. 그런데 우리는 센터가 아니라 동네분들이 각자 자기 집에서 할 수 있는 걸 가르치게 했다. 바느질하는 분은 바느질을, 막걸리 잘 담그는 분은 막걸리를, 자기 집에서 자기가 해왔던 대로 가르치는 거다.”


-달팽이학당 주민교사란 이런 분들을 가리키는 말인가?


“그렇다. ‘산골밥상’이라고 산동네 사시는 할머니 스무 분이 4개 조로 나뉘어서 외지인들이 단체로 오면 밥해 먹이는 걸 하고 있는데 이분들도 다 선생님이다. 재밌는 일이 있었는데, 우리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몇달 있다가 할머니들이 우릴 찾아왔다. 이장님 혼내줘야 된다고.”


-무슨 일이 있었나?


“사람들이 30명 와서 밥해 먹는 프로그램을 한 뒤 재료비 빼고 할머니 한 분당 4만원씩 나눠드렸다는데 화가 나셔서….”


-왜 화가 나셨나?


“왜 그런지 맞혀보라. 다섯 분한테 4만원씩 나눠줬는데 화가 났다고, 나더러 이장님 혼내주라고 오신 이유.”


-액수가 작았나?


“그게 아니다. 우리는 이분들을 ‘달팽이학당 교사’라고 불렀고 우리가 할 때는 그 돈을 봉투에 넣어 드렸다. 그러면 할머니들이 며느리나 손주한테 신나서 전화하신다. 놀러오라고, 용돈 주시겠다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내가 드릴 때는 봉투에 ‘강사비’라고 써서 드렸거든. 할머니들은 그걸 자식들한테 보이고 싶으셨던 거다. ‘내가 여기서 번 돈이 일당이 아니라 선생님 노릇해서 번 돈이야’ 얘기하고 싶으셨던 건데….”


-아하, 그런데 이장님이 그냥 돈만 주셨으니….(웃음)


“자존심이 상하셨던 거지. 이분들이 얘기하는 게 뭐냐면, 이게 똑같은 돈이 아니라는 거다. 우리는 돈의 가치를 얘기할 때 액수를 가지고 얘기하는데, 이 할머니들에게 돈의 가치는 액수가 아니다. ‘어떤 돈인가’가 중요했던 거다. 일당 받듯이 받는 거 말고, ‘내가 이걸 어떻게 번 돈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사회적 경제니 공유경제니 말들 하는데 중요한 건 돈의 액수가 아니고 그 돈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가치이다.


이분들에게 이 돈은 자존감이고 스스로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창립 이후 유알아트의 일관된 모토는 ‘사람 중심의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매물도 사람들의 일상에 의미를 부여해 관광자원화하고, 담양 창평의 지역 장인을 양성해서 토속 문화를 복원하고, 칠곡의 인문학마을공동체 사업을 진행할 때, 가장 근간이 되는 요소는 “당사자성, 지역성, 공동체성”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지역성, 공동체성은 알겠는데 당사자성은 무슨 뜻인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셀프 메이드(self-made). 매물도에 갔을 때도 처음 1년차는 우리랑 작가들이 같이 가서 (설치)작업을 했지만 2년차부터는 주민들이 ‘할 만하네, 만만하네’ 생각하면서 직접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렇게 진행될 수 있도록 토대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성북동 오리에 꽂힌 ‘동네형 영현 아씨’


-그런데 사실 이것도 어느 정도 눈썰미, 손재주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내가 태어난 집도 우리 부모가 직접 지으셨다. 근데 요즘은 자기 집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지고 제 손으로 밥해 먹을 수 있는 사람도 점점 준다. 스스로 자기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잊어버리는 시대다. 법 없이도 살던 세상이었다가 언젠가부터 법이 법률가들의 전문 영역이 돼버린 것처럼, 일상적이던 예술도 어느 순간 전문가의 영역이 되면서 우리 삶은 더이상 예술적이지도 문화적이지도 않은 것처럼 돼버렸다. 시골 가서 할머니들하고 워크숍하면 되게 재밌는데, 이분들은 오히려 학습받지 않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표현력을 갖고 계시다. 어떤 할머니가 시계를 만들었는데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가 시계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눈금 사이 간격이 일정하지 않단 건가?


“그렇다. 할머니에게 중요한 시간은 넓게, 잠자는 시간은 좁게….”


-재미있는 발상이다.


“요즘 하동에서 ‘골목 갤러리’ 사업을 하고 있다. 거기선 집집마다 할머니들이 빗자루를 만들어 쓰시는데 그 빗자루가 크기부터 모양까지 다 다르더라. 키 작은 할머니들은 조그맣게, 키 큰 사람은 크게…. 그걸 골목에 쭉 늘어놓으니 그 자체로 작품이 되었다. 누구나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고 창작할 권리가 있다. 일상적 삶의 가치가 가장 두드러질 때, 문화가 꽃피고 그 문화를 자양분으로 살아나는 게 예술인데, 이게 권력구조가 되어서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세상을 바꾸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다. 김영현은 공생과 공유의 문화를 통해 사람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려 한다. 조용하고 따뜻하지만 강력한 혁명이다. 동양화 전공자로 출발해 무대미술 감독이었다가 유알아트 설립과 함께 문화운동가, 마을운동가가 되었던 그는 요즘도 새로운 일을 벌이느라 바쁘다. 햇빛온수기와 건조기, 절약형 난로와 화덕을 개발하고 보급하기 위해 ‘자연의 부엌, 마음먹기’라는 전시장 겸 카페도 최근 개점했다.


-당신의 직업은 뭔가?


“16년째 남들이 직업이 뭐냐고 물어보면 답을 못하고 있는데….(웃음) 어떤 친구가 나한테 ‘트렌드세터’(trendsetter)라고 그래서, 그런가… 하고 있다.”


-많은 일들을 한꺼번에 진행하고 있는데 이 기회에 특별히 홍보하고 싶은 프로젝트는 없나?


“요 사무실 앞 정릉천에 오리들이 사는데, 동네 사람들이랑 그 오리도 보호하고 하천 주변도 살피자고 ‘성북오리’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계속 지방으로 다니다 보니까 내가 사는 동네에서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 동네에서 놀고 싶다. 동네 좋은 형이 되고 싶다.”


-하하하, ‘동네 형’이 되려면 ‘추리닝’에 슬리퍼부터 장만하셔야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동네에서 내 닉네임도 정해졌다. ‘영현 아씨’라고….(웃음) 다들 날 그렇게 부른다.”


그의 사무실 창 너머로 석양빛을 받은 정릉천이 내려다보였다. 오리 몇마리가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따스한 봄날, 헐렁한 체육복에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담고 천변을 어슬렁거릴 동네 형 영현 아씨의 모습을 조만간 저 오리들도 마주치게 될 것이다.


녹취 김혜영(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3131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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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8. 03:12

“내가 아는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다(The only good Indian is a dead Indian).”

19세기 후반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 미국의 백인들은 서부 개척에 방해되는 인디언들을 잔인하게 소탕하고 있었다. 코만치족의 추장 토와시는 이때 부족원들을 이끌고 투항했다. 더듬거리는 영어로 그가 “나 토와시, 좋은 인디언”이라며 선처를 호소했을 때 토벌작전을 지휘하던 필립 셰리든 장군은 “내가 본 좋은 인디언은 다 죽어버렸어”라고 대꾸했다. 이 말이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 뿐’이란 말로 바뀌어 인구에 떠돌았다. 

지난달 20일 박근혜 대통령이 ‘끝장 토론회’에서 “일자리 창출과 투자를 가로막는 규제는 우리 경제의 ‘암 덩어리’지만 복지, 환경, 개인정보 보호같이 꼭 필요한 규제들도 있다. 좋은 규제는 개선하고 나쁜 규제는 뿌리 뽑겠다”라고 밝히는 걸 보면서 엉뚱하게 미국 인디언 멸망사의 한 토막이 떠올랐다. 박 대통령은 이날 좋은 규제와 나쁜 규제에 대해 설명했지만 전체적인 무게는 ‘나쁜 규제의 혁파’에 실렸다. 

다음 날부터 모든 정부부처는 규제개혁 총력전에 돌입했다. 한국의 인터넷쇼핑몰에 ‘천송이 코트’를 주문하려는 중국인들을 가로막는 공인인증서 규제, 트럭을 개조해 소자본으로 음식장사를 해보려는 청년들을 방해하는 푸드트럭 관련 규제 등 토론회에서 지적된 사안들은 벌써 개선 방안과 일정이 나왔다. ‘좋은 규제는 폐지된 규제뿐’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각 분야의 규제들이 사회의 발전을 해치는 절대악으로 떠올랐다. 

공인인증서 규제, 푸드트럭 규제는 누가 봐도 폐지돼야 할 나쁜 규제다. 하지만 조금만 다른 부문으로 가면 선악의 경계는 금세 흐릿해진다. 끝장 토론회에서 여성가족부 장관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설전을 불렀던 ‘셧다운제’는 게임산업을 활성화하고 관련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선 폐지돼야 할 나쁜 규제다. 하지만 자녀의 게임중독을 두려워하는 부모들에게 이 규제는 고마운 규제다. 

문제는 선악의 중간지대에 있는 이런 규제들이 일자리 창출, 기업투자 확대의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다는 점이다. 카지노 관련 규제도 이런 종류다. ‘도덕 국가’ 싱가포르에서 카지노는 40여 년간 금단의 비즈니스였다. 하지만 2006년 취임한 리셴룽(李顯龍) 총리는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도박은 절대 허용 못한다”는 아버지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의 반대를 무릅쓰고 카지노 허용에 박차를 가했다. 활력을 잃는 경제를 살리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거센 반대에도 2010년 내국인도 출입할 수 있는 카지노 두 곳을 포함한 복합리조트의 문을 열었다. 결과는 5만 개의 일자리, 10%가 넘는 성장률이었다.

시대에 따라 규제의 선악은 바뀌기도 한다.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규제로 자주 꼽히는 영국의 ‘적기 조례(Red flag act)’는 증기 자동차가 마차 타는 사람이나 보행자의 안전을 위협하지 않도록 붉은 깃발을 든 사람이 차에 앞장서 달리게 하는 내용이었다. 1865년 제정 당시엔 도로 사정 등을 고려한 세계 최초의 선진적 도로교통법이었다. 하지만 차의 속도를 사람이 달리는 속도 이하로 제한한 이 규제로 영국의 자동차산업은 독일, 프랑스에 영원히 뒤처졌다. 


규제의 선악을 판가름하는 일은 기병대가 좋은 인디언, 나쁜 인디언을 생사로 가르는 것만큼 분명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각종 규제가 현재와 미래에 끼칠 손익을 읽어내는 눈을 갖춰야 한다. 선악의 경계에 있고, 반발이 예상돼도 국가의 미래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과감히 개혁을 추진하는 지도자의 의지가 결국 좋은 규제와 나쁜 규제를 규정한다. 그런 의지가 담긴 선택을 보고 싶다.


박중현 경제부장


http://news.donga.com/3/all/20140403/622211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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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8. 03:11

많은 사람들이 지금 근조의 마음가짐으로 일상을 산다. 하루 세끼를 챙겨 먹는 것조차 모래알을 삼키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마치 자신이 외계인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온 국민이 애통한 심정인데도 남의 일 말하듯 툭툭 비수를 박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능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공감 역시 배려처럼 학습되고, 연습되어야 하는 능력이다.

 중간고사를 앞둔 요즘, 외할머니 생신이나 시댁 큰집 큰형의 결혼식, 작은집 처가의 장인이 돌아가신 일 등 경조사가 있을 때마다 부모들이 입에 달고 사는 게 있다. “우리 애는 공부하느라고 못 왔어요.” 심지어 아이들에게 “너는 공부해야 하니까 가지 않아도 돼” 혹은 “가지 마라”고 한다. 부모만 혼자 열심히 자녀에게 공감해주면 아이는 스스로 공감력을 키우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공감 역시 아이가 자라는 기간 내내 키워야 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공감력은 가장 가까운 단위인 가족, 그리고 친척 등의 범위에서 하나씩 확장된다. 아이가 시험기간일지라도 다른 사람들의 생활은 중요하며, 그대로 유지된다는 걸 깨닫게 하는 게 중요하다.

 부모에게서 공감을 받기만 하는 요즘 아이들은 공감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예를 들어 요즘 아이들은 엄마를 수퍼 엄마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항상 건강하고, 피곤한 일도 없고, 아파도 씩씩한 기계처럼 여기는 것 같다. 공감을 받기만 한 이런 아이들은 결국 부모에게 재앙이 될 것이다. 성장기 자녀의 공감력을 키울 기회를 스스로 빼앗음으로 해서 결국 나이 들어 자녀에게 공감을 얻지도, 배려도 받지 못할 것이다. 타인을 배려하고 공감을 끌어내는 사람으로 키우려면 작은 일에서부터 공감하고,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훈련을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사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매일매일의 일상에서 소통으로 가능한 일이다. 피곤해도, 아파도 아이를 위해서 모든 걸 다 해줄 필요는 없다.

 “오늘 엄마가 많이 아파서 피곤하단다. 너도 아프고 피곤한 날이 있지? 이런 날은 네가 엄마를 이해해주고 도와주면 좋겠어. 엄마를 쉬도록 도와줄래?” 엄마도 아플 수 있고 그러므로 누군가의 도움, 즉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를 생각하고, 그런 고민이 한 자아를 성숙하게 만든다. 이렇게 사소한 일부터 공감력도 학습이고 연습이어야 한다. 


이미애 국자인 대표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4548102&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4. 8. 18. 03:11

안전의 위협을 느끼는 국민 앞엔 사실 한가한 소리다. 고작 계란·물병의 위협 따위라면. 그러나 그조차 좀 당당하게 맞서는 정치인(고위공직자)과 새가슴인 부류로 갈리는 것 같다.

 #1. “그때도 계란 한 방 맞았지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다. 2001년 인터뷰 때였다. 두 번 계란을 맞은 일화를 소개했다.

 부산 정치집회에서 한 번, 대우자동차·GM과의 인수협상 때 “외국 자본으로라도 공장을 돌리자”고 노동자들을 설득했다가 세게 한 방 맞았다고 했다. 그러나 계란 맞은 걸 수치로 여기진 않았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한번씩 맞아줘야 국민들의 화가 좀 안 풀리겠는가.”

 말이 무섭게 한 번 더 봉변을 당했다. 2002년 ‘우리 쌀 지키기 전국농민대회’에서 연설하던 도중, 날아온 계란이 얼굴에 명중했다. “얼굴이 축축하길래 피가 나나 했다”면서도 연설을 끝까지 마쳤다.

 #2. 1987년 김대중(DJ) 전 대통령(당시 대선후보)의 대구 두류공원 유세 때였다. 연설을 시작하기도 전에 돌멩이가 어지러이 날아들었다. 수행원들이 방패로 몸을 가리려 했다.

 “치우시오. 이 더러운 지역감정의 돌멩이에 맞으면 어떻습니까. 때리라고 하세요!”

 실제 한 말은 이와 조금 다를지 몰라도, 연단 앞에 떼구르르 돌멩이가 나뒹구는데, 방패를 밀쳐낸 걸 학창 시절 TV로 본 기억이 난다. DJ도 당시 연설을 끝까지 마쳤다.

 #3. 정홍원 국무총리가 지난 17일 세월호 실종자들 앞에 섰다. 해외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진도체육관으로 직행한 것까진 좋았다.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이 “총리님 오셨습니까”라고 환대할 걸로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물병이 날아왔다. 자정쯤 도착한 정 총리는 10여 분 만에 등을 보였다. 가족들이 승용차를 막아섰다. 정 총리는 여러 시간 동안 차 안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가 새벽 5시쯤에야 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럴 거면 왜 갔나. 이랬으면 어땠을까. 차 안에서 몇 시간을 죽치고 앉아 기다릴 게 아니라, 다시 내려 물병 든 가족들의 손을 꽉 잡았더라면. 그리고 체육관 안으로 다시 들어가 같이 울거나, 정 눈물이 안 나오면 그들의 눈가를 닦아주기라도 했다면. 해양경찰청장이든 장관이든 불러서 혼낼 건 혼내고 “이분들이 원하는 걸 당장 들어주라”고 지시했다면. 못할 일인가? 바로 몇 시간 뒤 박근혜 대통령은 했는데. 당시 박 대통령과 실종자 가족들의 문답을 보면서 귀를 의심했다. 실종자 가족들이 대통령에게 원한 게 ‘상황판 설치’ 같은 것들이었다. 대통령보다 먼저 현장을 방문한 총리는 왜 해결 못했나. 당연한 상황판 하나까지 대통령이 지시해야 공무원이 움직이는 나라임을 보여주려고? 물병을 뒤집어써 생수가 안경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더라도 “늦었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면, 사의 표명한 그에게 조롱은 안 나왔을 것이다.

 #4. “정홍원이 누군데?”

 27일 정 총리의 사의 표명 이후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트위터에 올린 시중 여론이다. “아, 그 물병 맞은 아저씨?”

 얄미운 말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기자도 비슷한 반응을 만났다. ‘아저씨’ 대신 ‘정원홍’이라 부르는 사람도 봤다. 박근혜 정부는 총리 없는 정부였나.

 정 총리에 국한한 얘기는 아니다. 고위급 인사나 정치인들에겐 가도 욕먹고, 안 가도 욕먹는 현장이 널려 있다.

 안 가서 욕먹을 바엔 가서 계란의 역습을 받더라도 현장과 호흡하며 느낄 걸 절절하게 느끼고 돌아오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계란과 물병에 쫓겨온 뒤 국민을 ‘미개인’으로 본다면, 최악이다. 아무 생각 없이 갔다가 사진 찍고 되돌아오려면, 약은 사람들처럼 납작 엎드려 몸 사리고 ‘죄인 스탠스’를 취하는 게 낫다. 카메라에 눈도장 찍으러 갔다가 욕만 먹는 ‘바보들의 행진’은 질릴 만큼 봤다.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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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8. 03:09

세월호 침몰 이후 온갖 유언비어가 돌았다. 미군 잠수함과 부딪쳤다는 충돌설, 구조를 지연시키기 위해 구조함이 늑장 출동했다는 소문에 당국이 민간 잠수사들을 일부러 차단했다는 얘기까지 한때 돌았다. SNS에선 학생들이 선내에서 구조를 요청하고 있다는 문자 메시지가 돌며 경찰이 수사에 나서기도 했다. 당국은 각종 유언비어에 대해 엄단을 선언했다.

 『유언비어의 사회학』(시미즈 이쿠타로 저)은 유언비어가 발생하는 조건으로 ‘굶주림’과 ‘부족한 정보’를 든다. ①사실을 알고 싶다는 굶주림이 있어야 하고 ②이 과정에서 무언가가 알려졌는데 모든 것은 알려져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엄청난 관심을 받는 뭔가가 있는데 이를 완벽하게 설명해 주지 못하니 ‘빠진 부분’이 유언비어로 만들어진다는 설명이다. “유언비어는 지식(정보)을 필요로 하지만 그것만으론 도저히 수미일관한 보도로 만인을 만족시킬 수 없을 때 성립한다”는 얘기다. 『루머사회』(니콜라스 디폰조 저)도 비슷한 분석을 내놓는다. “소문이 퍼지는 이유는 불확실성 때문으로, 정보의 부족에서 불확실성이 발생한다”고 봤다. 

 세월호 참사는 국가적 충격이다. 그런데 시작부터 정보의 불확실성이 지배했다. 모두 구조됐다길래 안도했는데 곧바로 아니라는 발표가 나왔다. 세월호 탑승자 숫자도 며칠간 오락가락했다. 기존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참사가 벌어졌는데 당국의 발표로는 상황을 이해하기는커녕 혼란과 불안이 가중됐다. 이 공백을 유언비어가 스멀거리며 메운 게 된다. 유언비어엔 분노도 담겼다. 『루머사회』는 “사람들이 소문을 믿는 주된 이유는 소문을 받아들이고 싶은 심리적 공간이 있기 때문”이라며 “개인은 자신의 적대감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기술했다. 세월호 초기 구조 작업과 이후 대응에서 드러난 관(官)의 비효율과 무능은 좌절감으로 이어졌고, 이 좌절감에 기생한 유언비어가 근거 없는 ‘카더라’로 표출된 것은 아닐까.

 유언비어는 사악하다. 사회를 갉아먹는다. 4년 전 천안함 폭침 사건에서 나타났듯 무슨 말을 하건 음모론으로 받아치는 ‘신앙 같은 불신’을 사회 밑바닥에 깔아 놓는다. 유언비어 앞에선 진실도 사라진다. “유언비어가 발생한 뒤 진실이 알려지면 유감스럽게도 진의의 태반은 상실된다.”(『유언비어의 사회학』) 

 하지만 유언비어만큼이나 답답한 것은 유언비어를 만드는 조건이다. 탑승자 숫자를 놓고 책임 떠넘기기를 했던 안전행정부와 해경, 세월호 침몰로 드러난 한국해운조합·한국선급 등의 ‘관료 낙하산’,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이 모인 장소에서 장관 의전에 나서고 사진을 찍는 관료들. 불신을 자초한 관료 사회가 먼저 개조되지 않는 한 유언비어가 기생하는 토양을 걷어내기가 쉽지 않다. 정말 두려운 사회는 유언비어 자체보다 유언비어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회다. 

채병건 정치국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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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8. 03:08

요즘 또 하인리히 법칙이 언론에 자주 거론됩니다. 하인리히 법칙은 달리 1:29:300의 법칙으로 불립니다. 대형 사고 때면 등장하는 단골손님이기도 합니다. 1931년 미국의 보험회사 직원 HW 하인리히가 입증한 법칙입니다. 그는 5000여 건의 실제 사고를 분석했습니다. 그랬더니 대형 사고 한 건이 일어나기 전 이와 관련 있는 소형 사고가 29건, 경미한 사고가 300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큰 재난이 나기 전에는 늘 어떤 신호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작은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큰 사고를 막을 수 있다는 교훈이기도 합니다.(김민주, 『하인리히 법칙』)

 10여 년 전 하타무라 요타로(畑村洋太郞) 도쿄대 교수는 하인리히 법칙을 실패학에 접목했습니다. 그는 저서 『실패학의 권유』에서 작은 사고, 조그만 이상 징후를 놓치지 않아야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며 그것이 경영자의 책임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의 실패학은 일본 열도를 강타했습니다. 그는 삼풍백화점 붕괴를 이 법칙에 빗대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많은 국내 대기업들도 ‘하인리히 법칙’과 ‘하타무라 권유’를 임직원 교육에 활용했습니다. 그런데도 대형 사고가 끊이지 않는 걸 보면 ‘인간은 실패에서 배우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 모양입니다.

 세월호라고 달랐겠습니까. 여객선 안전·관리·감독 유관 조합·협회장 자리를 수십 년간 독식해 온 해양수산부 낙하산 300건, 배에 누가 탔는지 확인도 안 한 무사안일 300건, 늦었다며 화물을 제대로 묶지도 않고 맹골수도를 아슬아슬 빠져나간 용감무쌍(?) 300건이 있었을 겁니다. 기념사진 국장, 컵라면 장관 같은 무개념·무책임 공무원도 그들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300건이 있었을 겁니다.

 어디 세월호뿐이겠습니까. 우리 사회엔 곳곳에 300건이 있습니다. 요 며칠 새 본 것만도 차고 넘칠 정도입니다.

 21일 출근길. 집 앞 커브길을 돌자마자 빨간 봉을 휘두르는 안전요원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크” 급브레이크를 밟아가며 차선을 바꿔야 했습니다. 안전요원은 몸으로 공사 현장 표지판 역할을 한 겁니다. 이쯤 되면 사고를 막는 게 아니라 되레 유발하지만 않아도 천만다행입니다. 이런 공사 현장이 하루 이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미국 도로가 생각났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차로를 막는 ‘꼬깔콘’이 하나 둘 나타납니다. 그런데 가도 가도 공사 현장이 안 보입니다. 2~3㎞를 달린 뒤에야 비로소 대형 트럭과 인부 서너 명이 나타납니다. “무슨 대단한 공사기에 이 호들갑인가” 힐끔 보면 별거 아닙니다. 대개 구멍 하나 메우는 정도의 사소한 공사입니다.

 22일 오후 3시 서소문로. 지하철 2호선 9번 출구 앞 인도에서 30분을 지켜봤습니다. 27대의 오토바이가 인도로 질주했습니다. 10대는 건널목을 건너갔는데, 모두 오토바이를 탄 채였습니다. 내려서 끌고 간 사람은 없었습니다. 인도를 걷는 보행자에게 경적을 울리거나 라이트를 번쩍거리는 오토바이도 있습니다. 누구 하나 항의는커녕 몸 피하기 급급합니다. 그만큼 시민들이 안전 불감증 불법 오토바이에 길들여졌다는 얘기겠지요.

 어디 안전뿐이겠습니까. 생활 속 어디에나 또 다른 300건이 있습니다. 새치기, 난폭 운전, 욕설 같은 겁니다. 여기엔 희생과 배려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이런 게 안전 불감증과 결합하면 뭐가 되겠습니까. 그게 바로 세월호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제2의 세월호가 없으려면 이런 생활 속 300건부터 사라져야 합니다.

 마무리는 속담으로 하겠습니다. 아주 유명한 인디언 속담입니다. ‘사람 마음속엔 착한 늑대와 나쁜 늑대가 있다. 두 마리 늑대는 늘 싸운다. 이기는 쪽은 어딜까. 내가 먹이를 주는 쪽이다.’ 늑대를 세월호 선장과 고(故) 박지영 승무원으로 바꿔봅니다. 나는 누구에게 먹이를 주고 있나. 선장 늑대인가, 승무원 늑대인가.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우리 사회는 혹시 너무 오랫동안 선장 늑대에게만 먹이를 줘 온 것은 아닐까요. 


이정재 논설위원·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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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4. 8. 18. 03:07

2012년 미국의 실력파 싱어 송 라이터 벡(Beck)은 앨범 ‘송 리더(Song Reader)’를 발표했다. 본인은 앨범이라고 했지만 실제 음반은 나오지 않았다. 오직 악보로만 출판됐고 이후 공연에서 음악으로 들려줬을 뿐이다. 평소 잊고 있던 ‘악보’의 가치를 일깨운 작업이다.

 어제 새 앨범 ‘8’을 선보인 가수 이소라도 앨범 발매 전 악보를 공개했다. 자신의 SNS에 타이틀 곡 ‘난 별’ 등 2곡의 자필 악보와 가사를 올린 것이다. 악보 공개의 파장은 의외로 컸다. 팬들은 악보를 퍼 날랐고 커버 열풍이 이어졌다. 팬들, 실용음악 전공 학생들, 연주자들이 자신만의 ‘난 별’을 부르거나 연주했다. 나중에는 가수 박효신·손승연, 기타리스트 박주원 등 프로들까지 가세했다. 이소라의 ‘난 별’이 세상에 나오기 전, 다양한 버전의 ‘난 별’이 이미 등장한 것이다.

 이는 원곡에 대한 궁금증도 증폭시켰다. 이소라의 목소리로, 원래의 편곡으로 듣는 ‘난 별’은 어떤 느낌일지 기대감이 커졌다.

 이소라는 앨범 발매와 함께 ‘난 별’ 가사를 손글씨로 쓴 뮤직비디오도 선보였다. 팬들에게도 ‘난 별’ 가사를 손으로 써 올리면 그것으로 개인 버전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줘 공유하게 했다. 고객참여형·맞춤형·쌍방향 소통형 마케팅이다. 디지털 시대, 악보와 손글씨라는 아날로그 감성을 되살린 마케팅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악보의 존재와 가치를 새롭게 일깨운 것이 흥미롭다.

 이소라는 새 앨범에서 거리낌 없는 록을 선보여 평단을 깜짝 놀라게 했지만, ‘난 별’은 비교적 과거 음악의 연장선에 있다. “우주의 한 부분으로 살며/ 믿는 대로 생긴다는 믿음을 잃지 않았을 때 오는/ 빛나는 결과들에 감사하며/ 별처럼 저 별처럼/ 난 별 빛나는 별” 그녀가 쓴 노래 가사다. 무심히 관조하듯 읊조리며 “난 별 넌 별 빛나는 별”이라 노래한다.

 문득 “수많은 별들은 순한 양떼처럼 소리 없이 운행을 계속하고, 그 별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려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다”라는 알퐁스 도데의 그 유명한 『별』이 떠오르기도 한다. 주인집 아가씨를 짝사랑하는 양치기 소년이 자기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아가씨를 바라보며 하는 말이다. 작곡가 정지찬은 파리 여행 중 몽마르트르 언덕 성당 문밖에서 기도하는 남자를 보고 이 곡을 썼다고 했다. 별을 보지 않고 산 지 얼마나 오래인지 모르겠다. 오늘 밤은 꼭 별을 봐야겠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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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4. 8. 18. 03:06

『장화홍련전』과 진짜 ‘장화홍련전’을 함께 읽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장화홍련전』은 지은이와 지은 시기가 분명하지 않은 고대소설이다. 줄거리를 열한 문장으로 정리해봤다.

 ·평안도에 배좌수라는 양반이 살고 있었다.

 ·늘그막에 장화와 홍련을 얻는다.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후처를 본다.

 ·후처는 간악하지만 좌수는 알지 못한다.

 ·후처는 장화의 혼수를 아까워한다.

 ·후처는 털을 뽑은 쥐를 장화의 이불 속에 넣었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꾸민다.

 ·좌수는 후처의 흉계에 속아 장화가 낙태한 것으로 알고 딸을 못에 빠뜨린다.

 ·홍련 역시 언니를 따라 못에 몸을 던진다.

 ·둘의 영혼은 신임 사또를 찾아가지만 이를 본 사또들은 겁에 질려 죽어나간다.

 ·담이 큰 사또가 스스로 부임해 장화·홍련의 억울한 사연을 듣고 계모를 처형한다.

 ·배좌수는 새 장가를 들어 잘 먹고 잘 산다.

 이 소설과 가장 가까운 역사적 기록이 ‘가재사실록’에 실려 있다. 평안도와 배좌수, 장화·홍련이라는 무대·이름이 같다. 악녀인 계모가 장화를 모함해 사지로 몰아넣는 것도 같다. 나중에 정의의 사또가 등장해 원한을 풀어주는 스토리까지 일치한다. 누군가가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소설을 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다르다. 실록과 달리 소설에는 ‘미꾸라지’가 있다는 점이다.

 소설의 배좌수는 장화·홍련을 지극히 아끼는 아버지로 묘사된다. 실록에는 없는 내용이다. 소설의 배좌수는 본의 아니게 후처의 농간에 놀아난 마음 약한 양반이지만 실록의 배좌수는 장화를 죽이라고 지시를 내린 공범 또는 종범이다. 소설의 배좌수는 뒤늦게 진실을 알고 통곡하며 후회함으로써 처벌에서 벗어난다. 새 장가를 가서 아들과 재물을 동시에 얻기까지 한다. 하지만 실록의 배좌수는 유배형을 받는다. 실제 이야기가 소설로 바뀌는 과정에서 배좌수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최근 경북 칠곡에서 현대판 『장화홍련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악독한 계모와 무능한 아버지, 장화·홍련 같은 자매가 등장한다. 계모는 8살 난 의붓딸을 끔찍하게 때려 숨지게 한 뒤 언니인 다른 의붓딸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우려 했다고 한다. 언니의 고변이 없었다면 어린 자매는 ‘언니에게 맞아 죽은 동생, 동생을 숨지게 한 언니’로 남을 뻔했다. 이후 계모의 악행이 추가로 드러나면서 사람들의 손가락은 온통 계모를 향한다. ‘악마’ ‘짐승’ ‘사이코패스’라는 표현까지 신문 사회면에 등장한다. 정작 이 사건이 소설과 흡사한 것은 배좌수같이 빠져나가려는 캐릭터들이 있다는 점이다.

 칠곡의 딸들은 지속적인 학대를 당했다. 학대 징후가 수차례 드러났지만 경찰과 보호기관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계모의 거짓말에 감쪽같이 속았다”고 주장한다. “계모가 혐의를 인정하지 않아서” “계모가 집에 없어서” “계모 앞에서 아이가 진술을 번복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둘러댄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엄격한 훈육 정도라고 여겼을 뿐 후처의 악행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모두가 무능한 배좌수를 자처한다. 하지만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무능보다 무책임이다. 계모의 입만 보고 있다면 그런 직업·기구·가장은 왜 있을까.

 ‘눈은 퉁방울, 입은 메기, 두발은 돼지털, 목소리는 이리…심사는 더욱 불량해 못할 짓만 골라가며 했다.’ 소설은 배좌수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계모의 극악성을 누누이 강조한다. 이를 배좌수의 허물을 덮는 전략으로 쓴다. 칠곡 사건을 둘러싸고 나오는 숱한 증언들은 그 계모를 『장화홍련전』 계모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아이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우려 했던 계모처럼 계모에게 허물을 떠넘기고 자신들은 빠져나가려는 핑계성 발언이 넘쳐난다. 배좌수는 소설로 족하다. 계모의 치마폭에서 나와 죄를 청해야 할 이들이 많지 않은가. 


이규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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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8. 03:06

“우리는 측정할 수 있는 것을 과대평가하고, 측정할 수 없는 것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전 최고마케팅 경영자 존 헤이스가 한 말이다.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숫자부터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측정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까.

 무엇이 세상을 움직이는가? 의사결정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이해득실, 가치와 능력, 판단과 실행 다 중요하지만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것 중 하나가 사람들의 ‘매력’이라는 요소다. 우리는 호감 가는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고, 매력적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개인이 풍기는 매력이다.

 측정하기 곤란한 이 ‘매력’이란 것은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힌 상황에서도 여지없이 작용한다. 조지타운대 경영대학원 로히트 바르가바 교수는 2012년 자신이 쓴 저서 『호감이 전략을 이긴다』(원더박스, 2013)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 통화는 종이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관계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세계 경제가 얼핏 숫자들에 의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호감이 매우 강력한 기제로 작용한다는 얘기다. ‘비슷한 능력이라면 이왕이면 호감 가는 사람과 일하려고 한다’가 아니라 호감이 능력보다 더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2005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 티지아나 카시아로와 듀크대 미겔 수자 로보 교수의 연구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들은 호감도가 비즈니스 영역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보는 설문조사를 했다. 실리콘밸리 테크회사, 미국의 대학교, 스페인의 세계적인 명품회사 직원들을 대상으로 호감도와 능력에 대한 선호 조사를 했다. 같은 직장에서 근무한다고 가정할 경우 어떤 동료와 함께 일하고 싶은지 물은 것이다.

 당연히 능력도 뛰어나고 호감도도 높은 사람과 일하길 다들 희망했다. 능력이 없는 데다가 호감도까지 낮은 사람과 일하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흥미로운 결과는 호감도는 높으나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과 업무능력은 뛰어나지만 호감도가 낮은 사람 중에서 선택해야 할 경우 대부분의 사람은 전자를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유능한 밉상보다 매력적인 바보를 선택한 것이다. 호감도와 능력 중에서 호감도를 더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맬컴 글래드웰의 『블링크』에 따르면, 의사가 의료 과실로 소송을 당할 가능성은 얼마나 많은 실수를 했느냐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고 한다. 부적절한 치료로 인해 의사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환자가 소송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의료사고 전문변호사 앨리스 버킨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의사를 상대로는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고 한다. 의료과실을 범한 의사를 고소하라는 주위의 압력을 받을 때 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그 의사가 한 실수는 개의치 않습니다. 난 그 의사를 좋아하거든요. 고소할 마음이 없습니다.”

 토론토대 웬디 레빈슨 박사는 한번도 소송을 당한 적이 없는 의사들은 그렇지 않은 의사들보다 환자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소송을 당한 적이 없는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더 잘 웃고, 더 적극적으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우선 이렇게 해 보고 다음에는 말씀하신 대로 해봅시다” 같은 말을 통해 환자들의 의견을 반영하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을 신뢰하고 믿는다. 좋아하는 것과 믿을 만한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인데도 말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원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능력이 있다는 보장이 없음에도 말이다. 왜냐하면 비호감인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은 지옥을 경험하는 것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비즈니스 세계에선 관계가 중요하니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두루 처세를 잘하라는 식의 조언을 하려는 게 아니다. 호감을 풍기기 위해 실천해야 할 지침들을 외울 필요도 없다.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애써 외면해 온 호감이라는 걸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것의 역할과 효과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룰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고객들에게 호감을 전하며 물건을 팔고 있는지, 우리 회사 직원들의 호감도는 어느 정도인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회심리학자 팀 샌더스는 얼마나 진실한가, 얼마나 이타적인가, 공감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가, 남의 말을 들어주고 배려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가 등이 호감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호감은 소통과 배려의 결과물인 것이다.

 호감 가는 인간으로 어릴 때부터 교육해야 한다. 매력은 인간이 갖추어야 할 가장 강력한 미덕이다. 함께 더불어 살기에 매력적인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행복한 사회를 위해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다.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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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8. 03:05

#풍경1 : 영화 ‘노아’를 봤습니다.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의 방주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의 스토리를 상업적으로 각색한 영화더군요. 성경 이야기의 역사적 재현을 기대한 기독교인 관객이라면 실망감이 컸을 겁니다. 영화는 선과 악의 경직된 이분법적 시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도 군데군데 가슴에 꽂히는 대사가 있었습니다. 가령 “세상은 뜨는 것과 가라앉는 것으로 나뉜다”는 대목입니다. 영화의 시각적 클라이맥스는 대홍수 장면입니다. 폭우가 퍼붓고, 홍수가 나고, 세상이 몽땅 물속에 잠깁니다. 영화관을 나서면서 생각했습니다. 정말 물에 뜨는 건 무엇이고, 물에 가라앉는 건 무엇일까. 

 #풍경2 : 예수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걸 본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왔습니다. 예수를 따라서 물 위를 걷기 시작합니다. 멀리서 풍랑이 일자 두려움이 생깁니다. 베드로는 그만 물에 빠지고 맙니다. ‘젖지 않는 베드로’가 ‘젖는 베드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대체 뭘까요. 젖는 것과 젖지 않는 것의 차이 말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하나님)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의 차이”라고 말합니다. 노아도 신을 섬겼다는 이유로 방주를 탈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묵상의 영역입니다. 베드로는 왜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을까. 적어도 60~80kg은 나갔을 성인 남자의 몸무게는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폭풍이 몰려오고 두려움이 생기는 순간, 그의 몸무게는 왜 다시 돌아왔을까. 그리고 물에 푹 잠겼을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삶이 힘겨울 때 우리는 일상 속에서 허우적댑니다. 일종의 홍수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겐 그게 더 위협적인 홍수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베드로 일화를 유심히 짚어봅니다. 그 속에는 ‘홍수 속에서도 젖지 않는 열쇠’가 녹아 있으니까요. 

 물 위를 걷는 베드로는 가볍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의 모든 걸 예수에게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때 베드로라는 에고의 무게는 얼마일까요? 0㎏입니다. 그래서 물 위를 걷는 겁니다. 그런데 바람이 거세집니다. 베드로는 덜컥 겁이 납니다. ‘이러다 내가 진짜 죽는 건 아닐까?’ 두려움이 생겨납니다. 놓았던 에고를 다시 움켜쥡니다. 그 순간, 베드로의 몸이 물속에 쑥 빠집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맞습니다. 에고의 무게입니다. 베드로는 그 무게로 인해 뜨기도 하고, 가라앉기도 합니다.

 불교에도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무아(無我). 붓다는 그걸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따집니다. 에고의 무게를 어떻게 0kg으로 줄이느냐고. 그게 어디 사람이냐고. 그렇다면 자신의 다이어트 경험을 돌아보세요. 몸무게가 1~2kg만 줄어도 가뿐합니다. 날아갈 것 같습니다. 에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 뭘까요.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주로 오판합니다. 엉뚱한 해법을 시도합니다. 보기 싫은 그물을 피하거나 짜증나는 진흙을 파내서 없애려고 합니다. 이런 방식은 승부가 나질 않습니다. 끝이 없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그물과 진흙은 끝없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정말 그물이나 진흙일까요. 그걸 만드는 공장이 아닐까요. 그 공장이 “좋다, 나쁘다” 따지고 있는 나의 잣대와 고집입니다. 그걸 무너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럼 ‘싫은 그물’이 아니라 ‘그냥 그물’이 됩니다. ‘싫은 사람’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 됩니다. 그런 뒤에는 더 이상 걸리지 않습니다. 고집이 무너진 만큼 우리는 그물을 뚫고 지나가는 바람이 됩니다. 노아는 자신의 고집을 꺾고 신의 메시지를 따랐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그때 이미 방주를 탄 겁니다. 에고가 무너질 때 우리는 늘 방주를 타니까요. 물에 젖지 않는 연꽃을 말입니다.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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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8. 03:04

‘색(色), 네 개의 욕망.’ 얼마 전 방영된 KBS 기획물이다. 인간의 욕망을 가장 선명하게 표현하는 빨강·초록·파랑과 그 합인 하양을 문명사 측면에서 파고든 교양물이다. 제작팀은 색의 의미를 강조한다. ‘인간은 구원(파랑)을 향한 욕망을 거쳐 불멸을 염원하는 빨강, 소유하고자 하는 초록을 지나 탐미(하양)로 돌아간다.’

 요즘 ‘성장의 한계’ 얘기를 많이 한다. 국민소득 2만 달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기업의 영업이익률은 꺾인다. 반도체·스마트폰·자동차 다음을 이끌 기둥산업이 보이지 않는다. 누구는 고속성장을 더 해야 하는데 동력이 없다고 한다. 또 누구는 성장 지상주의의 수명이 다했다고 진단한다. 모두 한계를 가리키지만 방향은 제각각이다. 지금 세대가 성장의 한계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미래세대의 모습은 바뀐다. KAIST 미래전략연구센터(원장 이광형)와 재미있는 조사를 해봤다. 오피니언 리더 55명에게 ‘성장의 한계는 무엇이고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고 보느냐’를 물었다. 그 유형을 네 가지 색으로 나눠봤다.

 1 유형 빨강(불멸). ‘성장동력 상실이 주원인이며, 그 책임은 정부·지도층에 있다.’ 55명 중 16명.

 “결국 성장은 얼마나 불필요한 활동을 적게 하느냐에 달렸다. 성장의 한계는 낭비를 조장하는 제도와 이를 이용하는 정치권력 때문이다.”(벤처사업가) “규제가 많아서 되는 일이 없다. 공직자의 업무처리 속도가 너무 느리다.”(재미 정치인) “수준 낮은 좌파 리더십이 문제다. 리더십을 바로잡자.”(중견그룹 CEO) “박정희 정부 이래로 이어온 산업화세대의 기득권이 문제다. 관 주도의 성장모델로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내기 어렵다.”(파워블로거)

 2 유형 초록(소유). ‘성장동력 상실이 한계의 주원인이지만 그 책임은 사회 전체에 있다.’ 13명.

 “저출산·고령화가 가장 큰 문제다. 성장에 불리한 인구구조가 만들어졌다. 모두가 각성해야 한다. 해결할 수 있을까.”(중견 언론인) “새로운 첨단산업을 못 만들어내고 있다. 국가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뇌과학자) “남북 분단이 경제 왜곡의 주범이다. 남북이 손잡고 통일로 가야 한다.”(과학연구기관 간부)

 3 유형 파랑(구원). ‘성장 지상주의가 한계의 주원인이며, 그 책임은 정부·지도층에 있다.’ 20명.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 대기업과 정부가 이를 소홀히 했다.”(경제시민단체 간부) “주원인은 재벌 경제체제에 있다. 이런 체제에서는 다원성과 다양성이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정치학 교수) “성장 중심의 국가정책 아래에서 불평등이 커진 게 가장 큰 원인이다.”(사회학 교수) “다수의 경제구성원이 동기부여를 받지 못한다. 재분배 정책을 꾸준히 펴야 한다.”(증권분석가)

 마지막 유형 하양(탐미). ‘성장 지상주의가 한계의 주원인이지만 그 책임은 사회(지구) 전체에 있다.’ 6명.

 “성장의 한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사회가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과학연구기관 연구위원) “석유문명의 한계다.”(역사연구가) “우리의 모습은 몸집만 커진 아이다. 발전의 과정을 더 거쳐야 한다.”(행정연구기관 연구위원) “자원과 환경의 위기에서 비롯됐다. 지구적 차원의 문제로 봐야 한다.”(환경연구소 간부)

 결과적으로 파랑이 가장 많고 하양이 가장 적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성장동력 상실파가 성장 지상주의파보다 약간 많았다. 조진삼 KAIST 미래전략연구센터 연구원은 “정부·지도층 책임론이 사회 공동책임론을 압도한 점은 새겨볼 만한 대목”이라고 했다. 선거가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유권자와 출마자는 어떤 색깔을 고를까. 불멸의 소유일까, 탐미의 구원일까. 


이규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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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8. 03:04

박근혜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하면서 통일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독일의 통일을 배우려는 열기도 더욱 강해지는 분위기다.

독일에서 배워야 할 것은 단지 통일만은 아닐 것이다. 독일은 유럽뿐 아니라 세계 경제의 강자다. 경제대국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다. 다 이유가 있어서 되는 것이다. 

 한국의 화두 중 하나가 창조경제다. 창조경제의 모델을 굳이 나누자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영국과 미국 같은 벤처모델이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신기술과 창의적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삼은 벤처가 우후죽순으로 나온다. 벤처를 대기업에 팔아 대박을 낸다. 당연히 젊은 대학생과 연구생들이 주변의 성공을 보고 벤처의 꿈을 꾸게 된다. 대학이 벤처의 모태 역할을 하고 있다. 

 둘째는 독일 모델이다. 독일 경제는 강한 중소기업이 이끈다. 독일의 경영학자인 헤르만 지몬은 1996년 강한 중소기업인 ‘히든 챔피언’을 조사했다.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해당 분야에서 세계 1, 2위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기업들을 찾아낸 것이다. 독일의 히든 챔피언은 대개 가격보다는 성능과 품질로 승부를 겨루고 있다. 

 또 제조업 분야에서 차별화된 기술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2012년 조사에 의하면 독일에는 1307개, 미국엔 366개, 일본엔 220개, 오스트리아엔 128개의 히든 챔피언이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합하면 무려 1400개 이상의 히든 챔피언이 독일어 문화권에 있다. 독일이 2000년 초 경제가 정체돼 2% 성장을 할 때도 이들 기업은 8% 이상의 성장을 이뤘다. 국가경제가 어려울 때도 독일의 중소기업은 더 강한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히든 챔피언이 나오는 독일의 중소기업, 즉 미텔슈탄트(Mittelstand)는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해주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130만 명 이상의 독일 청년이 매년 미텔슈탄트에서 직업 훈련을 받고 있다. 유럽의 대부분 국가가 청년 실업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독일은 예외다. 미텔슈탄트가 고용을 창출해주기 때문이다. 

 창조경제에서 벤처모델이 중요하다. 그러나 독일과 같은 히든 챔피언 모델도 중요하다. 한국 창조경제의 한 축은 히든 챔피언 모델이 돼야 한다. 벤처모델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라면 히든 챔피언 모델은 약(弱)을 강(强)으로 만드는 것이다.

중소기업을 강한 기업으로 만드는 데 극복해야 할 과제가 많다. 가장 큰 문제는 중소기업이 개발한 기술과 부품을 대기업이 사주지 못하는 것이다. 신뢰성이 확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기업은 판매량이 수년간 수백만 대에 이르는 제품도 있다. 많이 팔면 대박이 나지만 많이 판 제품에 문제가 생기면 쪽박을 차게 된다. 당연히 검증 안 된 기술과 부품을 무턱대고 사줄 수 없는 것이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이 개발한 기술과 부품을 안 사주니 히든 챔피언이 될 수 없고, 영원히 약한 기업이니 좋은 인력을 유치할 수 없으며, 인력이 없으니 기술개발은 더 어려워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지고 있다. 

 반면 독일에서는 선순환의 고리를 만들어 주는 인프라가 있다. 바로 산학협력 인프라다. 시뮬레이션(가상실험)을 통해 검증을 해주는 대학이 히든 챔피언을 든든히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미텔슈탄트가 제어용 프로세서를 개발했다면 이를 영하 30도와 영상 140도, 습도 99%, 고도 2000m 등과 같은 극한적 상황에서 기능을 발휘하는지 가상실험을 통해 검증해준다. 가상공간에서 온갖 경우의 수를 검증하는 것이다. 이런 검증 덕택에 대기업은 미텔슈탄트의 기술을 믿고 구매할 수 있는 것이다. 

 독일 기업의 경쟁력이 뛰어난 이유는 가상공간에서 시뮬레이션을 통해 신제품 개발 기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검증을 통해 개발 기간을 단축하면서 품질과 기능의 신뢰성도 높이고 있으니 한번에 세 마리 토끼를 잡는 격이다.

한국에도 가상공간 검증 인프라가 있어야 한다. 특히 대학이 중소기업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추어야 한다. 검증 하드웨어(HW)와 소프트웨어(SW), 이를 운영할 수 있는 교수와 대학원생이 필요하다. 

 한국 대학의 설비와 장비는 대부분 SCI 외국 논문을 발간하는 데 적합한 인프라다. 연구 인프라는 준비돼 있으나 산학협력 인프라는 매우 취약한 게 현실이다. 정부에서 아무리 산학협력을 권장해도 중소기업이 대학을 찾을 리 없다. 대학에서 양산한 연구논문이 중소기업에는 단지 종잇조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독일식 산학협력 모델을 배워야 한다. 중소기업 기술의 신뢰성을 확보해주는 검증데이터를 대학이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중소기업의 기술이 대학의 검증을 거쳐 대기업의 구매로 이어지는, 히든 챔피언 탄생의 선순환 구조를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통일의 대박과 한국 히든 챔피언의 대박이 동시에 터졌으면 한다.


유지수 국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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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8. 03:03

지난 16일 세월호의 침몰사고는 정말 충격적인 날벼락이었다. 봄날 바닷길로 제주여행을 떠나온 많은 승객을 태운 대형 여객선이 진도 앞바다에서 삽시간에 기울어져 바닷물에 잠겼다는 소식이었으니 "어째 이런 일이…."를 되뇌며 충격의 놀라움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곧이어, 침몰한 세월호 승객의 상당수가 구조되지 못하였고 그중 대부분이 수학여행 중인 고등학생들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는 안타까움과 희망 찾는 간절함에 절로 손 모아 빌었다. 특히, 손이 귀한 요즘 자식의 끊긴 소식에 부모들의 애타는 심정을 떠올리며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함께 느껴보기도 하였다. 사고 발생 이후 1주일 넘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국내외의 수많은 사람이 실종자 무사 생환의 기적을 기원하며 펼치는 노란 리본과 촛불기도에 동참하여 작은 간절한 소망을 보태었다. 하지만 고대하던 구조의 희소식 대신 희생자명단만 늘어나는 궂은 소식들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비통함과 애도의 마음으로 미어졌다. 사고경위가 밝혀지고 사고 발생 이후의 상황이 속속들이 드러나면서 분노에 치를 떨었고, 죄책감에 고개 숙여야 하였다. 무엇보다, 가라앉는 배의 탑승객을 버려둔 채 제 살길을 찾아 도망친 세월호 선장과 승무원들의 후안무치한 작태에 크게 분노하였다. 돈벌이에만 열중하여 초과 화물적재와 선박 보수 및 선원인력관리 소홀 등으로 세월호의 침몰위험을 가중시켜온 해운사의 미필적 고의성에 또 한 번 분노하였다. 사고대책과 구조활동에 우왕좌왕하는 무능한 정부 당국이나 사태의 엄중함을 제대로 파악지 못하고 한심한 행동을 서슴지 않은 공직자ㆍ정치인들에 대해 격한 분노의 감정을 쏟아내기도 하였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허술함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번 세월호 사고로 희생당한 많은 학생을 떠올리면 피지 못한 꽃망울 같은 그네들에게 어른 된 입장에서 참으로 송구스럽고 죄스럽기만 하였다. 아마,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는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에게 마음속으로 교차하였던 만감이 이렇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근대화된 국가라면 필연적으로 위험사회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을 쉽게 설명해보자면, 근대화의 원동력이자 핵심성과인 과학기술과 산업시설 등이 날로 발전함에 따라 오히려 인간들의 삶에 치명적이지만 제어하기 어려운 위협요소들, 예를 들어 환경오염, 건축물 또는 교통운행 관련 대형사고, 산업재해, 핵 관련 재난사고 등을 새롭게 유발함으로써 위험사회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벡 교수는 위험을 성공한 근대가 낳은 딜레마라는 흥미로운 역설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는 서구국가들이 200여년에 걸쳐 이룬 근대적 산업화를 1960년대 이후 50여년 동안 경제개발과 수출입국에 매진하여 눈부신 속도로 근대화를 이뤄냈다. 하지만 벡의 위험사회론에 따르자면 압축적인 근대화 덕분에 우리 사회는 다른 나라들의 몇 배 되는 위험을 감수하고 있을 것으로 손쉽게 추론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올해에만 지난 2월의 경주리조트 붕괴사고에 이어 이번의 세월호 참사가 빚어진 것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대형 안전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할 뿐 아니라, 그 사고들의 인명피해가 크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위험수위가 서구 선진국을 현저히 상회할 것으로 판단된다. 또 다른 위험지표인 산업재해를 살펴봐도,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중에서 단연 최고 수준을 차지하고 있어 사회적 위험수위의 심각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같이 따지다 보면 우리나라가 그냥 위험사회가 아니라 아주 심각한 위험사회, 즉 초 위험사회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벡 교수는 위험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난 근대화과정의 반성을 통해 그 위험요소들을 감소시켜 나가는 성찰적 근대화를 제안하고 있다. 그렇다면, 초 위험사회에 빠져든 우리나라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제대로 지켜주기 위해서는 압축적 근대화를 통해 우리 경제와 산업 그리고 제도와 의식에 깊숙이 배어든 인명 천시의 위험요소들을 철저하게 발본색원하려는 몇 배의 뼈저린 성찰이 요구된다는 것은 아닐까?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8&aid=0002494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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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8. 02:56

강릉 교육계에서 유명한 일화 한 토막이다. 지난해 강릉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교사가 물었다. “강릉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뭘까요?” 아이들이 앞다퉈 손을 들었다. “커피요!” 신사임당을 기대했던 교사는 당황했다.

강릉이 변했다. 신사임당과 경포대를 떠올린다면, 강릉의 과거만 기억하는 것이다. 지난 4일 강릉항 해변길(안목 해변)은 여느 포구와 달랐다. 횟집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신 20여 개의 커피전문점이 줄지어 있었다. 모래사장이라고 해야 500m 정도인 데다 도축장·군부대로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작은 어촌을 변하게 한 건 두 명의 도전자다. 커피 매니어들의 성지로 불리는 커피점 ‘보헤미안’을 연 커피 명인 박이추(65)씨, 커피공장을 차린 김용덕(54) 테라로사 사장이다. 송성진 강릉문화재단 예술사업팀장은 “‘지방에서 무슨 커피냐’고 비웃을 때 두 명인의 도전과 커피 축제가 만나 상상하지 못한 변화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강릉시내 190여 개의 커피점과 5년간 커피축제를 찾은 관광객 109만여 명은 표피적인 변화일 뿐이다. 송 팀장은 “대학 등을 통해 강릉에서만 한 해 5000명의 바리스타가 양산된다”고 말했다.

 ‘퍼스트 펭귄’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 모두 머뭇거릴 때 ‘미친 사람’ 소리를 들으며 미지의 바다에 뛰어든 김용덕 사장 같은 도전자들이다. 퍼스트 펭귄은 그저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다. 한국 경제가 맞닥뜨린 과제다. 

1980년대 중반만 해도 변변한 상가 하나 없었던 강원도 강릉 안목해변(왼쪽)이 커피를 만나 강릉의 새 명소가 됐다. 4일 저녁 추운 날씨에도 20여 개의 커피점이 있는 안목 커피거리는 성업 중이었다. [강릉=변선구 기자]


올해 각 기업의 신년사는 절박했다. 재계의 리더들은 “한계를 돌파해야 한다”(이건희 삼성 회장), “선도 상품으로 성과를 내야 한다”(구본무 LG 회장), “실패를 두려워 말고 도전하자”(허창수 GS 회장)고 외쳤다. 추격자로는 더 이상 먹고살기 어렵다는 얘기다. 한국이 선진국에 다가서면서 갖다놓고 베낄 참고서도 더 이상 없다. 게다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는 과거의 기준이 통하지 않는 ‘뉴 노멀(New Normal)’의 시대가 됐다.

 돌이켜보면 한국 경제는 퍼스트 펭귄을 통해 성장해왔다. 세계 1위 한국 조선의 시작은 1971년 조선소가 들어설 울산 백사장 사진 한 장을 들고 영국으로 건너가 자금을 구해 온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에서 시작됐다. 그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해보기는 했나”였다. 삼성 휴대전화의 오늘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과감한 결정과 휴대전화를 들고 지리산을 뛰어다닌 삼성전자 과장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처음엔 그저 그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취급을 받았던 카카오톡은 SNS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게임 시장을 만들어냈다. 1조원 규모다. 오영호 KOTRA 사장은 “모래폭풍 속으로 뛰어든 중동 건설 근로자도, 반도체에 승부를 건 순간에도 기업과 근로자는 가슴 옥죄는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라며 “그러나 누군가 퍼스트 펭귄이 되어 앞장서 뛰었기에 기적 같은 경제성장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본지는 연중 기획으로 한국 경제의 희망이 될 퍼스트 펭귄을 소개한다. 작은 매장을 운영하는 1인 사업자도 있고, 세계적 히트작을 낸 대기업 연구자도 있다. 규모에 관계없이 이들은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자동차 장인 김태성(43)씨의 올해 일감은 모두 예약이 끝났다. 그는 오직 수작업으로 단종된 갤로퍼를 개조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차를 만든다. 그는 “사명감·수익성은 부차적인 문제다. 내 작품에 대한 자신감과 자존심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국의 자동차 튜닝 시장 규모(5000억원)는 미국(35조원)의 70분의 1이다. SK케미칼은 발기부전 치료제의 후발주자다. 하지만 이 회사는 굵은 알약 대신 티 나지 않게 녹여 먹을 수 있는 필름형으로 제품 형태를 바꿔 시장 판도를 바꿨다. 부동의 1등 비아그라도 지난해 이 회사가 만든 제품 형태를 따라왔다. 

변준영 보스턴컨설팅그룹(BCG)서울사무소 파트너는 “완벽한 전략을 만들겠다며 시간을 소비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것보다 미완의 전략이라도 민첩하게 움직이는 것이 훨씬 낫다”며 “여기서 오는 실패는 긴 안목으로 보면 기업과 경제에 소중한 자산이 된다”고 말했다. 

글=김영훈·김현예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퍼스트 펭귄(First Penguin)=바다에는 펭귄의 먹잇감도 많지만 바다표범 같은 펭귄의 적도 많다. 그래서 펭귄 무리는 바다에 뛰어들어야 할 때 머뭇거린다. 이럴 때 한 마리가 먼저 바다에 뛰어들면 다른 펭귄도 잇따라 입수한다. 처음 바다에 뛰어든 펭귄을 ‘퍼스트 펭귄’이라 부른다. 영어권에선 이 말이 불확실성을 감수하고 용감하게 도전하는 선구자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3846509&cloc=olink|article|default



퍼스트 펭귄-

http://article.joins.com/issue/issue.asp?sid=7236&cloc=joongang|article|related_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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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8. 02:55

미국의 총기 소유 옹호론자들이 내세우는 논리 중 개인적으로 가장 반박하기 힘든 것은 "총을 손에 든 순간 힘이 센 자와 약한 자가 모두 평등해진다"는 주장이다. 만일 정부가 국민들의 총기 소유권을 박탈하게 되면 노인이나 여성처럼 약한 사람들은 힘센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지난달 20일 청와대에서 '규제개혁 끝장토론'이 열린 이후 한달 간 이어진 정부 국회 기업 민원인들의 규제개혁 관련 발언들을 지켜보면서 규제와 연관된 논란이 총기소유 논란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의 존재가 사람들 간 체중과 근육량의 차이를 무력화하듯 규제 역시 당사자간 유ㆍ불리, 수혜자와 피해자를 뒤바꿔 놓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규제 없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질서라 보기도 어렵다. 허약하다는 이유로 늘 힘센 사람의 부당한 대우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더 자연스럽다고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결국 규제개혁이란 좋은 규제를 늘리고 나쁜 규제를 없애는 점진적ㆍ지속적 노력이어야 하지, 규제 총량을 줄이는 식의 단기적 양적 접근은 심각한 부작용을 부를 수 있다. '여객선 선령 제한을 20년에서 30년으로' 늘린 2008년의 규제완화가 진도 여객선 침몰 참사의 원인 중 하나가 된 것처럼.

그렇다면 좋은 규제와 나쁜 규제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불행히도 '명확한 잣대가 없다'는 게 정답에 가깝다. 주류 경제학 교과서들이 잘못된 규제의 대명사처럼 언급하는 '최저임금제'조차 찬반이 갈린다. 잘못된 규제라는 근거는 최저임금을 인위적으로 제한하면 한계 상황의 기업들은 고용을 줄이기 때문에 결국 최저임금을 받는 직원들만 일자리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폴 크루그먼 같은 경제학자는 노동시장은 빵을 파는 시장과 달리 돈 몇 푼 때문에 갑자기 직원을 해고하는 일은 잘 벌어지지 않고, 장기적으로 보면 저임 노동자의 구매력이 높아져 전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는 점이 경험적으로 입증됐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규제의 효과는 논리와 실제가 다르고, 단기와 장기에 따라 엇갈린다.

대부분 사람들이 규제 도입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영역도 있다. 바로 누구든 공짜 또는극히 낮은 비용만 내고 이용하지만, 공급에는 한계가 있는 공공토지나 지하자원, 공기와 바다 등이 이런 영역에 포함된다. 이런 영역에 도입된 규제 중 가장 성공적인 예가 슈퍼마켓에서 비닐봉지를 유료로 판매하도록 한 정책이다. 몇백원의 부담이지만 소비자들의 환경보호 의식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해 우리나라를 비롯 전세계적으로 비닐봉투 사용이 획기적으로 줄었다. 그런데 만일 성공에 고무된 한 정치인이 과감히 비닐봉투 사용 전면금지를 도입한다면 어떻게 될까. 얼마 후 슈퍼마켓 주변에는 시장바구니를 잊고 장보기에 나섰다 당황한 사람들을 위해 불법 비닐봉투를 한 장에 천원 또는 이천원에 판매하는 행상이 등장할 것이다.

이는 미국 비영리 단체인 환경보호기금(EDF) 수석 경제학자인 거노트 와그너가 쓴 <누가 마지막 나무를 쓰러뜨렸나>의 한 대목을 살짝 윤색한 예다. 

이처럼 규제는 꼭 필요한 영역에 정확한 처방을 적절한 강도로 투여해야 성공할 수 있는, 매우 까다로운 존재다. 규제 대상의 이기심ㆍ나태함 같은 본성을 지나치게 제약해서도 안되고, 시장질서에 맞서서도 성공하기 힘들다. 

반대로 과도한 규제들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의 창의성과 자율성이 질식될 지경이 돼서는 안되겠지만, 군사작전을 하듯 일거에 제거한다면 오히려 부작용만 키울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탄소발생량 제한, 어획량 제한, 개발제한구역 같이 철폐한다면 가까운 미래에 인류의 생존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큰 중요한 규제들도 적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의 '규제는 암덩어리'발언은 정책 추진 의지를 명확히 전달하기 위한 비유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규제에 대한 의학적 비유를 찾는다면 반드시 제거해야 할 암이 아니라, 너무 많으면 각종 성인병의 원인이 되지만 적당한 수준 밑으로 떨어져도 건강이 위험해지는 '콜레스테롤'이 더 정확한 비유다. 

정영오 경제부장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8&aid=000249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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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8. 02:54

유럽이나 미국인들의 모럴이 우리보다 낫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저쪽에 젠틀맨십(gentlemanshipㆍ신사도)이 있다면 우리에겐 예의염치(禮義廉恥)가 있다. 인권이나 자유와 관련된 행동양식이나 사회시스템은 적잖이 다르지만, 대개 의식이 행동으로 발현되는 양상이 다른 것이지 양심의 우열은 아니라고 여겼다. '의식이 족해야 예의를 차린다'는 말처럼, 생활형편이 나아지면 우리도 더 좋아질 것이라고 애써 자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안간힘조차 무색할 때가 종종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서구인들의 사회적 약자, 특히 장애인에 대한 '뭔가 다른' 선의와 배려를 느낄 때다. 국민소득만으로 잴 수 없는 국격(國格) 같은 걸 생각하게 되는 것도 바로 그런 때다.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은 매우 활달한 외교관이었다. 북미국장으로서 외교적으로 우리에겐 영원한 '갑'인 미국을 상대하면서도 치고 받고, 어르고 달래면서 1990년대 중반의 '4자회담' 국면을 무난히 이끌어 냈다. 늘 여유가 넘쳤던 그가 사석에서 뜻밖에 심각한 표정이 됐다. 빌 클린턴 행정부의 적극적 대북 개입정책(engagement policy)에 따라 미국은 북한 식량지원을 대폭 늘리려 하고, 우리는 남북관계의 주도권 등을 감안해 지원 시기와 물량의 '적절한 조절'을 꾀하던 국면이었다.

"주한 미대사관의 ○○○ 참사관 대하기가 가장 힘들어. 국무장관은 오히려 쉬운데 말이오. 그 친구한테 북한 식량지원 좀 조절하잔 얘길 하면, 그저 물끄러미 날 바라보는 거야. 마치 사람이 굶어 죽어 나가는 마당에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그 친구 부부가 우리 뇌성마비 어린이 입양해서 업어주고 씻어주고 하면서 그렇게 정성스럽게 보살피고 있거든. 우린 그렇게 못하잖소. 그 선량한 눈을 보면 왠지 내가 인간적으로 한 수 접히는 느낌, 우리의 정책 윤리가 미국보다 떨어지는 것 같은 생각까지 들 정도요."

유 전 장관은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 친구 부부의 선의도 선의지만, 정작 미국이 대단한 건 그런 선의가 잘 작동할 수 있도록 제도가 갖춰졌다는 거요. 장애가족 지원비, 재활 및 간호 프로그램 지원 같은 게 탄탄해. 우리도 이제 그런 제도를 하루빨리 정비해야 할 거요."

그 얘기를 들은 지 20년이 지났다. 그 사이 우리는 세계 최대의 스마트폰 생산국이 됐고 유수의 자동차 강국이 됐다. 하지만 장애인 지원제도는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후진국이다. 서울 여의도에서는 오늘도 발달장애인 부모와 환자들의 천막농성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주 만개한 벚꽃 잎이 눈처럼 흩날리던 그 곳에선 발달장애인과 가족 8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장애인 어머니 등 78명이 눈물을 흩뿌리며 삭발을 감행했다. 발의는 됐지만 2년째 국회 처리가 미뤄지고 있는 발달장애인법 제정을 촉구하는 처절한 절규다.

발달장애인은 자폐증, 뇌성마비(간질), 다운증후군 등으로 정상적 사회생활이 어려운 환자들이다. 특정 신체장애와 달리, 밥 먹고 용변 보는 것까지 보호자들이 24시간 챙겨줘야 하기 때문에 환자 본인뿐 아니라, 온 가족이 극심한 부담과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지난해 말 40대 가장이 자폐성 장애 1급이던 열일곱 아들과 함께 동반 자살한 걸 비롯해, 알려진 것만 작년 4건, 올 들어 2건의 가족 동반 자살사건이 발생했을 정도다.

발달장애인법은 장애인 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장애 상황에 빠진 20만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들에게 최소한의 희망을 주자는 법이다. 발달장애의 특수성을 감안한 지원센터 설치, 발달장애인의 일자리 확충과 최소한의 소득보장, 부모 사후 홀로 된 성년 장애인에 대한 후견 시스템 마련 등이 골자다.

정부와 정치권 일각에선 적잖은 예산과 다른 장애인 처우와의 형평성 등을 들며 4월 국회 처리에 미온적이라지만 온당치 않다. 더 이상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고군분투하는 발달장애인과 가족을 외면한다는 건 몰염치다. 소득보장책을 포함해 최선의 법안을 마련해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하기 바란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사회적 부조이자, 국격의 문제다. 


장인철 논설위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8&aid=000249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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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8. 02:53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마케도니아와 로마제국의 젊은이들은 말과 전차를 타고 세계를 정복했고,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의 젊은이들은 함대와 제국주의적 무역상을 내세워서 식민지를 지배했다. 이렇듯 역사 속의 세계화는 전쟁과 약탈을 통해 피지배국에게 파괴와 아픔을 줄 뿐이었다. 한국은 5,000년 역사에서 타국을 단 한 차례도 지배 목적의 공격을 하지 않은 평화국가로서, 피지배국으로서의 파괴와 아픔을 극복하고 단 반세기 만에 산업화, 민주화를 달성했다.

한국은 외국인근로자 200만 시대를 맞이할 정도로 일자리가 많은 나라이다. 반면 청년실업자 100만 명을 포함한 실업자가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유럽 젊은이들이 외국인근로자를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경쟁자로 보고 테러를 일삼는 반면, 한국 청년실업자들은 외국인 근로자에게 자신들이 담당해야 할 3D직업을 대신 해준다고 고마워하는 독특한 나라이다. 정부는 청년실업자들이 원하지 않는 직장을 만들고 이들에게 취업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이들이 원하는 고품격, 고부가가치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

선진국 중심 세계화의 두 가지 모델이었던 전쟁과 약탈을 통한 세계지배는 잘못된 세계화 모델이다. 한국은 한반도에서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참전한 16개 국을 비롯하여 물자 및 의료 지원을 해준 67개 국가에 보은하고, 도움을 기다리는 100여 개발도상국에 나눔과 봉사를 실천함으로써, 바람직한 세 번째 세계화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꿈과 야심을 가진 한국의 젊은이들이 원하는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 

그 동안 이루어진 수많은 한국형 성공모델 소개에도 불구하고 한국 모델을 이용해서 큰 성공을 이룬 대표적인 국가는 아직 없다. 경제개발계획, 새마을운동 등 한국의 성공을 이루어낸 여러 가지 모델을 담당하는 부서 간에 통합은 말할 것도 없고 단순한 소통과 협조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결과, 충분한 성공을 끌어내지 못한 동시에 나눔과 봉사에 대한 수혜국의 경제 및 사회 상황 변화와 수혜국 국민의 문화 및 인식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한국의 성공을 다른 나라에 소개하는 전담조직, 즉 '세계화 플랫폼'이 없기 때문에 한국의 시대적 소명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국제개발협력위원회'를 대통령직속 '세계화위원회'(가칭)로 승격하여 종합적, 네트워크적, 동태적, 지속적인 세계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할 것을 제안한다. 이 위원회에서는 지난 반 세기 동안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한국의 발전경험을 기반으로 평화, 번영, 문화 등 다양한 핵심 가치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통합국가발전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이 모델에는 평화 면에서 민주화, 안전행정, 교육, 의료, 소방방재 등을 포함시키고, 번영 면에서 경제개발5개년계획, 새마을운동, 무역투자, 과학기술, ICT, 농업기술, 행정시스템 등을 포함시키며, 문화 면에서 한글, 한식, 태권도, K팝 등을 포함시킬 만하다. 100만 청년 실업자들에게 통합국가발전모델을 다른 나라에 적용해서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시켜 한국의 성공경험을 공유하기 원하는 세계 각국에게 파견함으로써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는 한국,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세계를 창조하자. 이와 별도로 '국제교사자격증'(가칭) 제도를 만들어 원하는 청년 실업자들에게 이 자격증을 갖게 하고, 이들을 한국 제도를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을 갖지 않는 세계 여러 나라의 초중고교에 파견하여 이들 나라의 차세대 지도자들을 교육시키는 역할을 부여하자. 

대한민국 청년들을 5대양 6대주 개발도상국에 파견하여 산업화 및 민주화를 도와주고 초중고 선생님으로 파견함으로써 한국은 전쟁과 약탈의 1, 2차 세계화에서 나눔과 봉사의 3차 세계화라는 새로운 모델의 주역이 될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의 힘으로 나눔과 봉사로 해가 지지 않는 대한민국을 만들어내자. 


조동성 서울대 명예교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8&aid=0002488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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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8. 02:52

그 집 앞을 오간 지 몇 년은 됐다. 차 두 대가 겨우 비키는 골목에서 커피와 직접 담근 유자차 등을 파는 곳이다. 이렇게만 보면 그냥 동네 카페다.

근데 평범치가 않다. 우선 간판이 없다. 유리문 안쪽에 걸린 ‘open’ 표식이 영업점이라는 걸 알릴 뿐이다.

출퇴근 길목이라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풍경들. 어떤 날 저녁엔 카페의 큰 테이블에 사람들이 둘러앉아 강의를 들었고, 다른 날엔 아주머니들이 바느질 수업을 받았다. 어린이들을 위한 만들기 수업도 있는 듯했다. 여느 카페와 달리 동네 아이들까지 그렇게 쉬이 그 가게 문턱을 넘나들었다. 카페가 아니라 시골의 마을회관을 더 닮았다.

판은 점점 커졌다. 한 해 전 요맘때는 점심 식사 메뉴가 등장했다. 카페 앞에 안내문을 붙여 둬서 알게 된 사정인데, 솜씨 있는 이웃들이 ‘1일 사장’이 돼 자신만의 메뉴를 판매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그 카페는 동네 축제까지 연다. ‘같은 동네에 사는데, 우리 서로 친하게 지내요’라고 인사하는 듯한 축제다. 축제가 열리면 도예공방 주인이나 수녀님 같은 이웃에 계신 분들이 두 손을 걷어붙이고 돕는다. 아이들이 장기자랑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동네 분들이 짜 준다.

모두 수익과는 거리가 먼 일들이다. 또박또박 이런 일을 벌여온 카페 주인은 30대와 20대로 보이는 처자 A와 B. “저희는 카페를 사무실이라고 여겨요, 커피는 손님이 오면 파는 거고요. 헤헤.”

카페 안에는 책상 두 개가 있다. 손님이 없는 시간엔 ‘하고 싶은 일’을 궁리한다. 동네의 근현대 생활사를 수집하는 계획을 세우거나 특정 공간을 문화공간으로 바꾸는 기획서를 만드는 식이다.

기획서를 제출해 용역사업을 수주 받곤 하지만 잘 버는 게 아닌 건 분명하다. 지난해 겨울 어느 날에는 임대료 걱정이 한창이었다. 돈 안 되는 ‘문화 기획’을 하며 동네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그들, 1970, 80년대 같았으면 간첩으로 오인받지 않았을까.

왜 할까. “문화 행사를 기획하면서 뭔가 똑 떨어지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잠을 못 잘 정도예요. 이 일이 좋아서 은행까지 그만둔 걸요.” A가 안면을 익힌 지 2년여가 지난 어제에야 들려줬다.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들어갈 정도로 일 그 자체의 완성도를 높이는 게 재밌어요. 5년을 그렇게 산 적도 있는걸요.” B가 거들었다.

자기 일이 너무 좋아 ‘긍정의 신열’을 앓는다는 그들. 일을 이렇게 좋아해야 직분에 따른 책임감도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엔 시민단체 직원 중에도 월급 그 자체 때문에 일하는 이들이 많다는 얘기마저 들린다. 취직하기 힘들어서인지 공직 입문자의 소명 의식도 예전 같지 않은 분위기다. 이런 일이 확산되면 우리 공동체의 체질은 약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 번뿐인 인생, 일을 좇는가, 돈을 좇는가. 우리 동네 카페의 물음이다.

허진석 채널A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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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