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14. 10:17

곡절과 드라마로 대통령 된 이들
'내가 결국 옳았다'는 강한 확신 갖게 돼
확신이 강할수록 해저드는 깊어진다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를 보면서 과거 청와대에서 일했던 한 사람의 얘기가 생각났다. "프레지던트 해저드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대통령들이 빠지기 쉬운 위험이나 함정이다. 대통령은 오랜 기간 온갖 곡절을 겪은 끝에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렇게 대통령이라는 최고위직에 오르고 나면 자기가 살아오면서 내렸던 수많은 결정이 전부 옳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런 착각에 빠지게 되면 그다음부터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판단이 우습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대통령이란 위세 때문에 아무도 제동을 걸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이 대통령 해저드 때문에 잘못되거나 곤란을 겪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대통령 해저드가 가장 심각했던 경우는 극적인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었다. 김영삼·김대중·이명박 전 대통령이 그랬다. 이들에게 '결국 내가 맞았고, 내가 옳았다'는 이 확신은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정신적 기둥이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한 여당 의원이 '김대중·김종필 연합'이 이뤄질 것이란 중요한 정보를 보고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정치 9단이다. 턱도 없는 얘기다. 절대 안 되니 걱정 말라"고 했다. 채 한 달도 안 돼 김대중·김종필 연대가 발표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서해에서 북의 기습으로 우리 참수리정이 침몰하고 장병들이 전사한 다음 날 일본으로 월드컵 축구 구경을 가는 정말 놀라운 결정을 내렸다. 이 역시 전형적인 대통령 해저드 사례다. 이명박 대통령이 경제 관료들에게 "당신이 경제에 대해 뭘 알아"라고 했다는 얘기도 전해져 오고 있다.

이들의 이런 확신이 결국 임기 후반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반대로 정통성이 없거나 약했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상대적으로 이런 확신이 크지 않았다. 전 대통령 시절에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물가 안정을 이룩하고, 노 대통령이 북방 정책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이들이 대통령 해저드에 덜 빠져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내가 다 옳았다'는 확신을 가질 경험 자체가 적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의 지혜를 모으고 그들에게 권한을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대통령 해저드에 빠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실수가 인사다. '내가 했던 사람에 대한 평가가 결국 옳았다'는 생각이, 대통령도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에 대한 편견을 극대화한다. 그래서 대통령 해저드에 빠진 사람들의 인사를 보면 중소기업 경영자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있다.

박 대통령이 당선 후 처음 한 조각(組閣) 인사는 뭐라고 평가하기도 어려웠다. 저 사람이 대체 누구고, 왜 저 자리에 가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었다. 여당 의원 상당수가 비슷한 생각을 토로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그래도 대통령 생각은 달랐을 것이다. '선거 때마다 내가 내린 많은 결정에 대해 얼마나 반대가 많았나. 이렇게 하면 진다고 난리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내 생각대로 한 선거에서 전부 다 이겼다. 이번에도 내 소신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 아마도 이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말 몇 마디를 갖고, 그것도 전체 배경을 무시한 채 무조건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본뜻이 우리나라가 잘돼야 한다는 충정이라면 이해할 수도 있다. 문 후보의 과거 언사보다는 인선 자체가 시의적절했느냐는 아쉬움이 남는다. 예상치 못한 의외의 인물을 발탁할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는 국민에게 주는 '신선한 충격'이다. 이번에 그런 신선한 충격이 일었을까. 발표된 뒤 사람들이 보내온 질문 대다수는 "이분이 누구냐"고 묻는 것이었다.

지금은 비극적 사건 이후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져야 할 때다. 더구나 행정 조직의 대대적 개편을 앞두고 있다. 이런 때에 국민 대부분이 잘 모르고 고개를 갸우뚱거려야 하는 인선을 해야 했느냐는 생각이 든다. 연이어 청와대를 친박 인물들로 채우는 것을 보면서 '이것은 해저드다'고 믿게 됐다. '받아쓰기'에 대한 비판이 많은데도 대통령이 받아쓰기를 중단시키지 않는 것을 보면서 '대통령 지시를 받아쓰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는 확신을 느꼈다. 모두 대통령 해저드의 현상이다.

박 대통령은 지방선거에서 참패할 것이란 일반적 예상과 달리 여당이 그런대로 선전한 결과를 보고 또 한 번 자신의 확신을 다졌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박 대통령은 지금까지 많은 경우 옳은 판단을 해왔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대통령이 되기 전과 대통령이 된 후의 판단 기준이 같을 수도 없다. 박 대통령은 드라마 같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대통령까지 됐다. 이런 사람의 자기 확신은 스스로 거의 '운명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강력할 수 있다. 확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해저드는 더 깊어진다. 대통령이 해저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모두가 보게 되는 그때를 '레임덕'이라고 부른다.

양상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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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