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홍련전』과 진짜 ‘장화홍련전’을 함께 읽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장화홍련전』은 지은이와 지은 시기가 분명하지 않은 고대소설이다. 줄거리를 열한 문장으로 정리해봤다.
·평안도에 배좌수라는 양반이 살고 있었다.
·늘그막에 장화와 홍련을 얻는다.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후처를 본다.
·후처는 간악하지만 좌수는 알지 못한다.
·후처는 장화의 혼수를 아까워한다.
·후처는 털을 뽑은 쥐를 장화의 이불 속에 넣었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꾸민다.
·좌수는 후처의 흉계에 속아 장화가 낙태한 것으로 알고 딸을 못에 빠뜨린다.
·홍련 역시 언니를 따라 못에 몸을 던진다.
·둘의 영혼은 신임 사또를 찾아가지만 이를 본 사또들은 겁에 질려 죽어나간다.
·담이 큰 사또가 스스로 부임해 장화·홍련의 억울한 사연을 듣고 계모를 처형한다.
·배좌수는 새 장가를 들어 잘 먹고 잘 산다.
이 소설과 가장 가까운 역사적 기록이 ‘가재사실록’에 실려 있다. 평안도와 배좌수, 장화·홍련이라는 무대·이름이 같다. 악녀인 계모가 장화를 모함해 사지로 몰아넣는 것도 같다. 나중에 정의의 사또가 등장해 원한을 풀어주는 스토리까지 일치한다. 누군가가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소설을 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다르다. 실록과 달리 소설에는 ‘미꾸라지’가 있다는 점이다.
소설의 배좌수는 장화·홍련을 지극히 아끼는 아버지로 묘사된다. 실록에는 없는 내용이다. 소설의 배좌수는 본의 아니게 후처의 농간에 놀아난 마음 약한 양반이지만 실록의 배좌수는 장화를 죽이라고 지시를 내린 공범 또는 종범이다. 소설의 배좌수는 뒤늦게 진실을 알고 통곡하며 후회함으로써 처벌에서 벗어난다. 새 장가를 가서 아들과 재물을 동시에 얻기까지 한다. 하지만 실록의 배좌수는 유배형을 받는다. 실제 이야기가 소설로 바뀌는 과정에서 배좌수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최근 경북 칠곡에서 현대판 『장화홍련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악독한 계모와 무능한 아버지, 장화·홍련 같은 자매가 등장한다. 계모는 8살 난 의붓딸을 끔찍하게 때려 숨지게 한 뒤 언니인 다른 의붓딸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우려 했다고 한다. 언니의 고변이 없었다면 어린 자매는 ‘언니에게 맞아 죽은 동생, 동생을 숨지게 한 언니’로 남을 뻔했다. 이후 계모의 악행이 추가로 드러나면서 사람들의 손가락은 온통 계모를 향한다. ‘악마’ ‘짐승’ ‘사이코패스’라는 표현까지 신문 사회면에 등장한다. 정작 이 사건이 소설과 흡사한 것은 배좌수같이 빠져나가려는 캐릭터들이 있다는 점이다.
칠곡의 딸들은 지속적인 학대를 당했다. 학대 징후가 수차례 드러났지만 경찰과 보호기관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계모의 거짓말에 감쪽같이 속았다”고 주장한다. “계모가 혐의를 인정하지 않아서” “계모가 집에 없어서” “계모 앞에서 아이가 진술을 번복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둘러댄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엄격한 훈육 정도라고 여겼을 뿐 후처의 악행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모두가 무능한 배좌수를 자처한다. 하지만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무능보다 무책임이다. 계모의 입만 보고 있다면 그런 직업·기구·가장은 왜 있을까.
‘눈은 퉁방울, 입은 메기, 두발은 돼지털, 목소리는 이리…심사는 더욱 불량해 못할 짓만 골라가며 했다.’ 소설은 배좌수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계모의 극악성을 누누이 강조한다. 이를 배좌수의 허물을 덮는 전략으로 쓴다. 칠곡 사건을 둘러싸고 나오는 숱한 증언들은 그 계모를 『장화홍련전』 계모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아이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우려 했던 계모처럼 계모에게 허물을 떠넘기고 자신들은 빠져나가려는 핑계성 발언이 넘쳐난다. 배좌수는 소설로 족하다. 계모의 치마폭에서 나와 죄를 청해야 할 이들이 많지 않은가.
이규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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