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자동차의 TV 광고는 유사한 패턴을 보여준다. 날렵한 차 한 대가 울창한 숲길을 순식간에 가로질러 고풍스러운 저택 앞에 사뿐히 멈춰 선다. 바로 그때 다른 익숙한 자동차 브랜드에선 볼 수 없는 독일 차 특유의 정교함을 자랑하는 독일의 독보적인 엔지니어링 기술에 대한 설명이 뒤따른다.
이런 광고는 독일이 구텐베르크에 의한 세계 최초의 대량 성경 인쇄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학과 엔지니어링의 놀라운 전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기에 먹힌다. 어디 그뿐인가. 막스 플랑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그리고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최초의 컴퓨터를 발명한 콘라트 추제 등 걸출한 과학자를 배출한 나라가 바로 독일이다. 독일의 엔지니어링 기술 수준은 그런 광고를 보는 사람에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익히 알려져 있다. 간단히 말하면 독일 엔지니어링은 따로 주석을 달지 않아도 될 만큼 신뢰가 구축돼 있다는 말이다.
한국산 자동차는 지난 10년간 세계 시장에서 놀라운 성장을 기록한 덕분에 유럽에서도 한국 차 애호가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자동차업계가 독일처럼 제품 광고를 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서구인은 한국 문화가 중국이나 일본과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 더군다나 1990년대 이전만 해도 한국의 과학·기술과 선진국 사이에는 괴리가 컸다.
그러나 한국이 가진 기술적 우수성의 뿌리는 깊다. 문제는 그처럼 훌륭하고 오랜 전통에도 불구하고 서구에는 그런 전통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한국의 그런 전통을 아는 사람은 미국 대학에서 일하는 소수의 사람뿐이며, 이들이 영어로 쓴 글도 대개는 학자들을 대상으로 학회지에 실린 것이다.
우리는 한국의 기술적 우월성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문화의 일부로 만들어야 한다. 한국인은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해야 한다. 한국인이 자신들의 우수한 문화가 서구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점을 개탄할 때마다 나는 솔직히 이렇게 말해준다. 요즘 시대에는 한국의 문화가 원래 탁월했으므로 외국인들이 자동적으로 한국을 이해해 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금물이라고 말이다. 한국은 외국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문화를 체계적으로 알려야 한다.
이 작업과 관련해 두 가지 가능한 해법을 제시하려 한다.
첫째, 15세기 조선의 위대한 과학자이자 발명가인 장영실의 삶을 장편영화로 만들어 전 세계 관객에게 보여주는 일이다. 미천한 노비 출신의 장영실이 어떻게 당시의 끔찍한 차별을 극복하고 진귀한 해시계·물시계·혼천의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측우기까지 만들게 됐는지 그 과정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면 세계에 한국 기술의 뿌리를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런 영화가 제작된다면 세계인들에게 기존의 한국 제품 광고보다 훨씬 더 크고 지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둘째는 세종대왕이 고리타분한 관료들과 치열하게 싸우면서 개혁을 통해 민초의 점증하는 욕구에 부응하는 교육기관을 세우는 과정도 세계 유력 작가의 손을 거친다면 훌륭한 영어소설로 재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만일 조선 과학기술의 황금기에 초점이 맞춰진 그 소설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국제사회에 한국에 대한 인식을 영원히 바꾸게 될지 모른다. 그 책이 일단 미국 작가의 손을 거쳐 미국 독자를 겨냥해 쓰인다면 세종대왕과 그의 위대한 정신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과학 분야에서 한국의 놀라운 성취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다면 현재 한국의 기술적 성취가 단지 지난 몇십 년간 갑자기 이뤄진 게 아니라 유구한 전통의 결과임을 웅변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한국의 우수성은 허구가 아님에도 실제로 많은 한국인은 그런 사실 자체를 잘 모르는 듯하다. 한국이 지난 60년간 거둔 눈부신 발전을 널리 알리는 과정에서 한국의 기술적·과학적 뿌리가 어떻게 근대화의 중추적인 근간이 됐는가 하는 점은 거의 무시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까지는 한국이 꾸준한 노력을 통해 선진국 반열에 오른 점만 부각시키면 됐지만 이제부터는 한국의 기술적 전통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편이 더 낫다. 다시 말해 느닷없이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게 아니라 바로 그런 연속성이 오늘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음을 부각시킨다면 국제사회에 더 많은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그렇게만 된다면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한국의 우수성을 이야기해도 고개를 갸우뚱하는 세계인은 아마도 확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지금처럼 새로운 기술을 개발만 해서는 국제사회에서 그 같은 지위를 확보하기 어렵다. 지난 10년간 한국 과학자들은 놀라운 기술적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한국을 아시아 다른 나라들과 차별화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만일 한국이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설득력 있게 또 효과적으로 세계인들에게 소개할 수만 있다면 한국은 분명 우뚝 설 것이다.
엠마뉴엘 페스트라이히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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