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17. 16:24

독일 자동차의 TV 광고는 유사한 패턴을 보여준다. 날렵한 차 한 대가 울창한 숲길을 순식간에 가로질러 고풍스러운 저택 앞에 사뿐히 멈춰 선다. 바로 그때 다른 익숙한 자동차 브랜드에선 볼 수 없는 독일 차 특유의 정교함을 자랑하는 독일의 독보적인 엔지니어링 기술에 대한 설명이 뒤따른다. 

 이런 광고는 독일이 구텐베르크에 의한 세계 최초의 대량 성경 인쇄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학과 엔지니어링의 놀라운 전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기에 먹힌다. 어디 그뿐인가. 막스 플랑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그리고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최초의 컴퓨터를 발명한 콘라트 추제 등 걸출한 과학자를 배출한 나라가 바로 독일이다. 독일의 엔지니어링 기술 수준은 그런 광고를 보는 사람에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익히 알려져 있다. 간단히 말하면 독일 엔지니어링은 따로 주석을 달지 않아도 될 만큼 신뢰가 구축돼 있다는 말이다. 

 한국산 자동차는 지난 10년간 세계 시장에서 놀라운 성장을 기록한 덕분에 유럽에서도 한국 차 애호가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자동차업계가 독일처럼 제품 광고를 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서구인은 한국 문화가 중국이나 일본과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 더군다나 1990년대 이전만 해도 한국의 과학·기술과 선진국 사이에는 괴리가 컸다. 

 그러나 한국이 가진 기술적 우수성의 뿌리는 깊다. 문제는 그처럼 훌륭하고 오랜 전통에도 불구하고 서구에는 그런 전통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한국의 그런 전통을 아는 사람은 미국 대학에서 일하는 소수의 사람뿐이며, 이들이 영어로 쓴 글도 대개는 학자들을 대상으로 학회지에 실린 것이다. 

 우리는 한국의 기술적 우월성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문화의 일부로 만들어야 한다. 한국인은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해야 한다. 한국인이 자신들의 우수한 문화가 서구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점을 개탄할 때마다 나는 솔직히 이렇게 말해준다. 요즘 시대에는 한국의 문화가 원래 탁월했으므로 외국인들이 자동적으로 한국을 이해해 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금물이라고 말이다. 한국은 외국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문화를 체계적으로 알려야 한다. 

 이 작업과 관련해 두 가지 가능한 해법을 제시하려 한다. 

 첫째, 15세기 조선의 위대한 과학자이자 발명가인 장영실의 삶을 장편영화로 만들어 전 세계 관객에게 보여주는 일이다. 미천한 노비 출신의 장영실이 어떻게 당시의 끔찍한 차별을 극복하고 진귀한 해시계·물시계·혼천의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측우기까지 만들게 됐는지 그 과정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면 세계에 한국 기술의 뿌리를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런 영화가 제작된다면 세계인들에게 기존의 한국 제품 광고보다 훨씬 더 크고 지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둘째는 세종대왕이 고리타분한 관료들과 치열하게 싸우면서 개혁을 통해 민초의 점증하는 욕구에 부응하는 교육기관을 세우는 과정도 세계 유력 작가의 손을 거친다면 훌륭한 영어소설로 재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만일 조선 과학기술의 황금기에 초점이 맞춰진 그 소설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국제사회에 한국에 대한 인식을 영원히 바꾸게 될지 모른다. 그 책이 일단 미국 작가의 손을 거쳐 미국 독자를 겨냥해 쓰인다면 세종대왕과 그의 위대한 정신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과학 분야에서 한국의 놀라운 성취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다면 현재 한국의 기술적 성취가 단지 지난 몇십 년간 갑자기 이뤄진 게 아니라 유구한 전통의 결과임을 웅변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한국의 우수성은 허구가 아님에도 실제로 많은 한국인은 그런 사실 자체를 잘 모르는 듯하다. 한국이 지난 60년간 거둔 눈부신 발전을 널리 알리는 과정에서 한국의 기술적·과학적 뿌리가 어떻게 근대화의 중추적인 근간이 됐는가 하는 점은 거의 무시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까지는 한국이 꾸준한 노력을 통해 선진국 반열에 오른 점만 부각시키면 됐지만 이제부터는 한국의 기술적 전통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편이 더 낫다. 다시 말해 느닷없이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게 아니라 바로 그런 연속성이 오늘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음을 부각시킨다면 국제사회에 더 많은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그렇게만 된다면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한국의 우수성을 이야기해도 고개를 갸우뚱하는 세계인은 아마도 확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지금처럼 새로운 기술을 개발만 해서는 국제사회에서 그 같은 지위를 확보하기 어렵다. 지난 10년간 한국 과학자들은 놀라운 기술적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한국을 아시아 다른 나라들과 차별화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만일 한국이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설득력 있게 또 효과적으로 세계인들에게 소개할 수만 있다면 한국은 분명 우뚝 설 것이다. 

엠마뉴엘 페스트라이히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5236316&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4. 9. 17. 16:23

‘내가 지금 탄 세월호, 나는 갔어야 됐어 네스호/ 이런 미친놈들의 항해사, 너 때문에 나는 즉사/ 이런 길 속에 나는 묻혀, 넌 나를 못 쳐/ 내가 니들 뺨을 쳐? 니들은 내 등을 쳐/ 우리가 출발예정시간 여섯시 삼십분, 우리가 출발예정시간 여섯시 삼십분/ 우리가 출발한 시간은 여덟시 이런 씨발, 니들이 그따구로 이 배를 운전?/ 지금 배는 85도, 내 머릿속 온도는 지금 100도.’

고3이면서도 힙합 오디션 프로인 <쇼미더머니>를 본방사수하며 관련 기사나 댓글까지 다 찾아 들려주는 내 아들의 모습이 겹쳐 더 그런지 모르겠다. 단원고 2학년 6반 김동협군은 평생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지난 1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처음 공개된 휴대전화 동영상에서 동협이는 말했다. “내가 왜 수학여행을 와서, 나는 꿈이 있는데, 나는 살고 싶은데 이 썅.” 그도 꿈이 래퍼였을까? 침몰 상황을 중계하듯 전하던 동협이는 “마지막으로 제 라임을 한번 뽐내야겠습니다” 하며 랩을 남겼다.

40일 넘게, 적잖은 <한겨레> 사람들은 비슷한 증세를 보이고 있다. 박재동 화백이 그린 단원고 학생들의 초상캐리커처와 사연, 가족들의 편지를 싣기 시작하면서다. 제작된 다음날 지면을 점검하는 저녁 편집회의에서 ‘잊지 않겠습니다’를 확인하다 눈가가 젖으면 서로 못 본 체하고, 아침에 집으로 배달된 신문에서 같은 기사를 다시 읽다가 눈물을 흘린다.

원통해하는 가족들에 대한 가슴 아픔과 지지부진한 진상규명에 대한 분노가 뒤엉킨 감정 속에, 새삼 느낀 건 정말 아이들의 꿈이 이렇게 많구나라는 점이다. 이종격투기 대회 출전을 계획했던 홍래,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꿈꾸며 미용대회에 나갈 재료비를 아껴놨던 혜경이, 유니세프 같은 국제기구에서 일하길 바라던 하영이, 여군 장교가 되겠다던 주이, 작곡가가 되려던 승묵이…. 그동안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나 흔하게 ‘요즘 애들은 자기 꿈이 없어’라는 말을 들어왔다.

몇주 전 큰아들 학교 입시설명회에 다녀왔다. 실용음악학원의 실기 연습도 버거운 아이가 다른 학과까지 지원해 합격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마지막’이라는 문자에 쫓기는 심정이 됐다. 수능 외에 학생부 교과, 학생부 전형, 논술모집, 적성고사… 여기에 수시와 정시의 경우와 과별, 과목별 반영비율까지 고려하면 경우의 수는 꼽기도 힘들다. 그래도 설명회에 나온 선생은 한번의 학력고사 점수로 결정되던 예전에 비해 학생들에게 다양한 기회가 생긴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대학별 점수표와 ‘합격 사례’로 가니 막막하다. 학원이나 학교에서 제시하는 표 안에서 과목별 1, 2등급 이외 학생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전체 학생의 89%인 3~9등급 대다수 아이들의 ‘꿈’은 이 표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대학만이 길은 아니라고 누구나 쉽게 말한다. 그러면서도 이 사회와 학교는 중·고교 시절 6년 내내 대부분의 학생들을 서울 및 수도권 대학을 목표로 전력질주시킨다. 이런 속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꿈에 대해 얼마나 자부심을 갖고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을까. 학생들의 자기소개서나 논술답안이 학원에서 베껴온 듯 똑같다고 교수들은 불평하지만, 아이들의 다양한 꿈을 덮어버리는 건 주요과목 점수가 높은 학생들을 끌어들이려 교묘히 짜놓은 입시전형 쪽이다.

열일곱살 250개의 꿈을 떠나보내고서야 깨달았다. 이 많은 꿈을 왜 몰랐을까. 지금 이 땅의 아이들이 등급이 아니라 하나하나 자신의 꿈을 드러내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것, 이 또한 세월호 아이들을 잊지 않는 길 아닐까.

김영희 문화부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49097.html



Posted by 겟업
2014. 9. 17. 16:23

휴가철이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20, 30대 직장인들과의 대화는 세상의 급변을 실감케 했다. 지난달 일찌감치 친구들과 싱가포르로 여름 휴가를 다녀온 A씨는 어느 때보다 만족감이 컸다고 한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아 비싼 레스토랑이나 호텔 대신 로컬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밀쉐어링(mealsharing.com)’과 온라인 숙박 공유 사이트 ‘에어비엔비(airbnb.com)’를 이용한 덕분이란다. 밀쉐어링 서비스는 현지 가정에서 돈을 주고 ‘집 밥’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시간과 날짜는 음식을 제공하는 가정에서 정하는데, 가고 싶은 집을 선택해 사이트에 올라있는 음식사진과 가격을 골라 예약하면 된다. 세계 각지에서 온 낯선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오순도순 식사도 할 수 있는 점이 매력이란다. 숙박은 에어비앤비를 활용했는데, 집 주인을 직접 만나지 않고도 예쁜 2층 단독주택의 비밀번호를 받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었다. 비용도 기존 유스호스텔이나 민박보다 저렴했다. 사이트에 해당 주택을 먼저 다녀간 사람의 후기도 적혀 있어 믿고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동석한 B씨의 이야기는 더 놀라웠다. 경기 화성시 동탄에 사는 그녀는 회사가 있는 서울 강남까지 ‘이버스(eBUS)’로 출퇴근한다. 지난해 하반기에 국내에 등장한 이버스는 이용자들이 홈페이지에 접속해 정원을 채워 신규노선을 만들면 된다. 직장 위치가 비슷한 동네 사람들이 인터넷에 모여 자발적으로 버스노선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입했다고 한다. 현재 동탄-강남, 동탄-서울역 2개 노선이 출퇴근 시간대만 하루 3회씩 운영되는데, 강남 노선은 만석일 정도로 인기가 높다. 현행법상 면허 없이는 여객주선업을 할 수 없어 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는 자회사인 전세버스사업자로부터 위탁 받는 형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일종의 편법인데, 위법은 아니다.

인터넷과 모바일, SNS를 통해 촘촘히 연결되고 있는 사회에서 소비자의 차별화된 욕구에 부응해 다양한 서비스들이 나타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공유경제’라 부른다. 2008년 미 하버드대 로렌스 레식 교수가 쓴 개념인데, 비어 있는 집이나 세워 둔 차량 등 물적 자산뿐 아니라 재능ㆍ경험 등 인적 자산까지도 필요한 사람과 공유(sharing)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살면서 소유해야 하는 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고가 출발점이다. 이를 공유경제로 칭하든, 신종 렌탈 비즈니스로 표현하든, 정보통신(IT)기술 덕분에 지구촌이 24시간 연결되면서 생긴, 시대적 현상임은 분명해 보인다.

문제는 이들 서비스가 기존 사업자들의 이해관계와 충돌한다는 점이다. 대표적 사례가 최근 모바일 차량 공유 앱(App) 서비스인 ‘우버’(UBER)다. 201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번지고 있는 이 서비스는 주변의 일반 차량을 콜택시처럼 불러 이용할 수 있다. 나라와 도시 별로 “기존 법규를 허무는 불법” 혹은 “혁신적 합법 서비스”로 판결이 엇갈리는 가운데, 전 세계 택시운전사들이 자신들의 밥줄이 끊긴다며 들고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 미국 뉴욕주 검찰이 “손님을 빼앗아 간다”는 호텔업계의 강력한 항의로 에어비앤비에 가입한 건물주들을 단속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중요한 건 규제당국의 자세다. 기존 규제를 엄격히 적용하느냐, 아니면 이를 완화ㆍ해체해 혁신의 물꼬를 터주고 북돋우느냐에 그 사회의 명암이 갈린다. 간과해선 안 될 건 외견상 기존사업자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기술발달로 인해 새롭게 열리는 시장이라는 점이다. 밀쉐어링이 등장했다고 기존의 레스토랑이 망한다는 건, 이버스가 나왔다고 대중교통 노선이 없어진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혁신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시장을 선점한 기득권층의 이해관계를 흔들어 놓는다. 때문에 혁신의 성공은 늘 혁신을 바라보는 규제당국의 긍정적이고 새로운 시각을 요구한다. “공유하라, 그리고 기존의 칸막이를 파괴하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네트워크사회의 새로운 비즈니스 생태계를 뒷받침할 규제혁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경환 새 경제팀이 경제활성화를 고민한다면 잊지 말아야 할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박진용 논설위원



http://www.hankookilbo.com/v/37359a6a68d14e88b4b506bfed4a9a92



Posted by 겟업
2014. 9. 17. 16:22

지난 주말 일본에 다녀오는 길에 일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새삼 새겨보게 되었다. 거품(버블) 붕괴 이후 지난 사반세기 동안 일본은 장기적인 침체를 겪고 있다. 매년 엄청난 적자를 내고 있는 간사이공항에서 아직도 남아있는 거품의 후유증을 확인할 수 있었고, 삼성 휴대폰을 샀더니 일본 친구들이 ‘불쌍한 소니 거 사주지 왜 안 그래도 잘나가는 삼성 거 샀냐고 뭐라 하더라’는 한 동포의 농담에 일본인들의 어려움이 묻어나왔다. 소위 ‘해석개헌’을 통해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꾀하는 움직임도 일본 경제의 장기적 침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본 경제의 문제는 무엇인가? 거품의 후유증도 있었고, 엔화 강세로 인한 제조업 경쟁력 저하도 있었고, 누적된 재정적자로 인한 미래에 대한 불안심리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그다지 커다란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거품 붕괴는 까마득한 옛날 얘기고, 환율은 부침이 있었으며, 거대한 재정적자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국채금리는 지극히 안정되어 있다. 규제가 많아서 문제니 규제완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지난 20년 동안 수도 없이 외쳤고, 아베 내각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규제완화를 통해서 경제성장이 눈에 띄게 올라갈 리 만무하다. 사실 일본이 엄청난 거품경제에 휩싸이게 된 까닭이 바로 80년대 중반 나카소네 내각의 무분별한 규제완화였던 것을 상기하면 이러한 규제완화론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일본 경제문제의 핵심은 인구문제다. 인구 정체와 고령화에 의해 잠재성장률 자체가 매우 낮아졌다. 인구문제를 빼고 보면 일본 경제의 성과가 나쁘지 않다. 1990년부터 200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15살에서 64살까지의 경제활동인구 1인당 소득의 증가율은 1.2%로서 여느 선진국보다 못하지 않다. 2008년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의 타격이 심했던 만큼 최근의 회복세도 강하다. 다시 말해 일본 경제가 오랫동안 침체되어 보이는 것은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지 이들의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일본처럼 인구가 정체되고 고령화가 진행된다면 온갖 경기부양이나 성장정책이 먹혀들 여지가 없어진다.

한국은 과거 일본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으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마침 이런 고민을 하는 가운데 귀국하여 처음 접한 뉴스가 “한국 출산율 세계 최하위”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건 조금 선정적인 헤드라인이고, 그 내용은 16일 발표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월드팩트북(The World Factbook)에 따르면 올해 추정치 기준으로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25명에 그쳐 분석 대상 224개국 중 219위였다는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는 한국이 꼴찌였다고 한다. 일본은 1.40명으로 208위를 차지해서 우리보다는 조금 나았다.

그럼 도대체 어떤 나라들이 출산율이 낮은 것일까? 크게 보아 소득수준이 올라가면 출산율이 낮아지는 경향이 있는데, 일정한 소득수준을 넘어선 나라들 사이에서는 문화와 정책의 차이에 의해 커다란 편차가 나타난다. 우리보다 출산율이 낮은 나라들은 싱가포르, 마카오, 대만, 홍콩으로서 이들이 모두 동아시아의 부유한 경제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사회복지가 부실하여 아이 낳아 기르기가 부담스럽고, 여성차별 때문에 출산과 자아실현을 동시에 이루기 어려운 나라들이다. 젊은 여성들이 출산파업으로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새 경제팀이 경제의 활력을 살리겠다고 한다. 출산파업을 해결하지 않는 한 백약이 무효일 것이다.

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지식협동조합좋은나라 원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42606.html



Posted by 겟업
2014. 9. 17. 16:22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필자가 여태까지 들은 노엄 촘스키의 명언 중 이 말은 가장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최악의 학살자는 현장에서 직접 살인을 벌이는 졸개들이라기보다는, 멀리에서 정장을 입고 조용한 사무실에 얌전히 앉아 있는 고학력자 출신의 지휘자다.” 이번 세월호 학살도 마찬가지다. 주류 언론들이 도망친 선장 등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지만, 비정규직이기도 한 선장은 촘스키가 이야기한 ‘졸개’에 불과했다. 고물 선박 구입과 관련된 규제를 풀고 선박에 대한 감독을 해운업자 조직에 맡기는 등 과적 운항을 상습화시킨 ‘조용한 사무실에서의’ 관피아야말로 이 학살의 원흉임을 이제는 삼척동자도 알게 된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관피아보다 훨씬 더 그늘에 가려 있는 초대형 조직은 바로 학피아, 즉 정부·기업들과 긴밀히 유착돼 있는 학계다. ‘규제완화’ 등 관피아가 추진하는 범죄적 정책들의 골간을 학피아가 만들어내고, 곡학아세하면서 합리화하기에 이번 학살의 원인을 논할 때 학피아를 빠뜨릴 수 없다.

그러나 관피아와 함께 이 학살이 일어나도록 공을 들였으면서도, 관피아보다 훨씬 더 그늘에 가려 있는 초대형 조직은 바로 학피아, 즉 정부·기업들과 긴밀히 유착돼 있는 대학가 내지 학계다. ‘규제완화’ 등 관피아가 추진하는 범죄적 정책들의 골간을 학피아가 만들어내고, 곡학아세하면서 합리화하기에 이번 학살의 원인들을 논할 때 학피아를 빠뜨릴 수 없다. 하지만 국내는 아니지만 일단 대학 교원인 나 자신에 대한 반성문을 쓰는 입장에서 학피아 문제를 본격 거론하기 전에 몇가지 단서를 달아야 할 것이다.

첫째, 나는 국내 대학의 모든 정규직 교원들을 뭉뚱그려 ‘학피아’로 보려 하지 않는다. 그들 중에서도 주류에의 편입을 거부하고 노동운동에 앞장서는 ‘작지만 큰’ 용감한 소수는 있다. 하지만 변혁을 지향하는 소수는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조직체로서 학계·대학가는 대한민국에서 신자유주의 도입의 전위대 노릇을 해왔다. 또 밑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대학사회만큼 신자유주의 원칙이 철저히 적용되는 곳도 드물다.

둘째, 대한민국 학계라고 해서 꼭 특별한 것은 아니다. 정학(政學)·경학(經學) 유착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우리 식민 모국을 보라. 이미 1969년에 촘스키는 베트남 침략의 원흉으로 아서 슐레진저(1917~2007)나 새뮤얼 헌팅턴(1927~2008)처럼 ‘효율적인 제3세계 개입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어용 ‘정치학자’들을 지목했다. 1973년에 촘스키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정치외교학 계통 논저의 95% 정도는 미국 재벌기업의 이해관계와 대외정책의 연관성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학자들이 재벌들 앞에서 이 정도로 ‘얌전하게 구는’ 데는 당연히 대학가의 이해관계가 있다. 전체 미국 대학이 수령하는 연구비의 약 60%를 재벌이 움직이는 국가가 대주고, 약 6%를 사기업들이 직접 대주고 있다. 많은 대학의 경우 기업들의 지원은 거의 결정적이다. ‘진리 탐구’나 ‘상아탑의 자율성’은 옛말이 된 지 이미 오래다.

다른 나라라고 해서 본질적 차이는 그다지 없는데 하필이면 한국 학계를 특별한 문제로 삼는 까닭은 무엇인가?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관피아와 함께 학피아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어느 나라보다도 한국 ‘명문대학’의 전임교원들은 사회 귀족으로서의 신분을 과시한다. 미국이라고 해서 폴리페서가 없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 언급한 슐레진저와 같은 사람들은 사실 그 정의에 그대로 부합할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만큼 폴리페서들이 판치는 세상도 참 드물다.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공공기관 고급 임원 중 교수와 연구원 출신은 24%나 됐다. ‘재벌정부’라는 누명을 썼음에도, 사기업 임원 출신은 약 8%에 그쳤다. 박근혜 초기 내각에서는 연구원 출신만 약 28%에 달했다. 즉, 두 극우적인 신자유주의 정권의 공통점이라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바로 ‘고급 두뇌’들이 추진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유독 ‘교수 출신 장관’ 따위가 많은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그중 하나 특기할 만한 이유는 바로 학벌 카스트 제도의 작동 방식이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이라는 세 대통령의 하나의 공통점을 지적하자면, 그들 중에서는 그 누구도 감히(?) ‘서울대 마피아’라고 호칭할 수 있는 학벌조직이 대한민국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건드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각각 임명한 정무직 공무원 중 서울대 출신 비율은 47% 정도였으며, 이명박 시절에는 고려대 출신에 약간 밀린 결과 40%로 깎이긴 했지만 그대로 우세를 유지했다. 특정 대학이 국가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상황에서 그 대학 전임교원의 정치·사회적 비중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둘째, 그 어느 나라에서도 대학들이 신자유주의적으로 개편되지 않는 곳은 거의 없지만, 그 일부(성균관대·중앙대 등)를 아예 재벌기업이 소유하는 한국만큼 저질스럽고 졸속적인 신자유주의화를 볼 수 있는 곳은 드물다. 예컨대 정부의 정원감축이나 특성화 사업에 발맞추느라고, 도살하듯이, 학생의 의견을 무시해 가면서 여러 대학에서 벌어지는 학과 통폐합을 보라. ‘비인기’라고 해서 독일·프랑스어, 사회학이나 철학 등의 학과들을 폐품 처리하듯이 단숨에 없애버리는 것은 과연 학술적 전통이 있는 대학에서 가능한 일일까? 아니면 ‘영어 논문’ 광풍이나 ‘유명 해외 학술지’ 광풍을 보라. 내가 있는 오슬로대학을 포함해서 세계 대부분의 대학들은 교원들이 학술 활동을 영어로 하는 것을 유도하고, 교원들의 영미권 유명 학회지 논문 게재를 선호한다. 그만큼 세계적으로 영미권 학계의 패권이 강한 것은 현실이다. 한데 외국의 유명 학술지에 논문을 실었다고 하여 그 저자로 돼 있는 교수에게 수천만원의 포상금을 내놓는 대학은 한국 말고 과연 어디에 더 있는가? 더군다나 국내의 논문생산 시스템에서 상당수 교수들이 대학원생이나 비정규직들을 무상 착취해 가며 논문을 만드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국내 대학들을 기초 상식이 없고 기본 인권도 지킬 줄 모르는 신자유주의적 착취공장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장하준 교수는 케임브리지대에 취직할 수 있어도 국내의 ‘명문대’ 경제학과 같으면 취직하기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경제학과 교수들은 비정규직 양산부터 ‘규제완화’까지 서민들 삶의 기반을 뒤흔드는 데 앞장섰다. 학피아의 주변부에 속하는 인문학의 가장 큰 문제는 고질적인 현실도피다.

세월호 학살로 귀결된 대한민국의 신자유주의화를 이끈 것은, 학피아의 하나의 중심이라고 할 ‘명문대’들의 경제학과였다. 거기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는 고사하고 제도주의 학파 등 온건 케인스주의자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돌아온 시장주의자 일색이다. 시장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큰 인기를 얻은 장하준 교수는 케임브리지대에 취직할 수 있어도 국내의 ‘명문대’ 경제학과 같으면 취직하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경제학과 교수들이 역대 정권에 의해서 가장 자주 정무직으로 등용됐으며, 비정규직 양산부터 범죄적인 ‘규제완화’까지 서민들의 삶의 기반을 뒤흔드는 데 앞장섰다.

경제학과들을 점령하다시피 한 시장주의자들의 범죄성이야 노골적이지만, 학피아의 주변부에 속하는 인문학의 가장 큰 문제는 고질적인 현실도피다. 예를 들어 여러모로 가장 현재성이 강할 수도 있는 역사학을 보라. 최근의 ‘문화 중시’와 같은 포스트모던 추세로 한참 ‘뜨고 있는’ 식민지시대 영화 연구로 지난 10년 동안 적어도 50개 이상의 연구논문이 발표됐다. 그러나 삼성가의 자본축적 경위나 그 과정에서의 식민지 당국이나 독재정권과의 유착을 본격적으로 다룬 저서 내지 논문은 3~4편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어차피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민족주의는 학계에서 비판의 대상에 올라도, 한국 대학에 대한 자본 지배의 현실은 거의 학술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국가와 자본의 명령대로 인문학은 ‘가만히 있는’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세월호에서 수장당한 아이들에게, 시장주의와 순응주의가 당연시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앞장서온 고등교육기관 교원인 우리가 속죄하자면, 이제라도 학피아의 테두리를 안으로부터 과감히 부숴야 한다. 국가와 자본을 끊임없이 문제시하고 도전하는 학문만이 새로운 학살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실학’이 된다. ‘가만히 있지 않기’를 실천하고 가르쳐야 우리에게 속죄의 길이 열릴 것이다. 착취공장으로 전락한 대학의 틀 안에서 안주하는 순간 우리도 종범이 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Posted by 겟업
2014. 9. 17. 16:21

약속 시간에 늦었다. 급히 대문을 열고 나오는데 옆집 할머니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 계셨다. 할머니가 우리집 쪽을 돌아본 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 잠시만요!”라는 외침이 무색하게 할머니는 엘리베이터 문을 닫고 내려가 버리셨다. 벌써 두 번째 있는 일. 집에 오는 길에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어떤 아저씨가 스마트폰으로 운동경기 중계를 보고 있었다. 소리를 스피커폰으로 해두어서 나를 비롯한 버스 승객 모두는 강제로 그 시끄럽게 웅웅대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유명한 연예인을 길거리에서 만난 대학생들의 반응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와!” 하고 놀라더니 “헐~ 대박!”을 외치며 무작정 스마트폰 카메라부터 연예인의 얼굴에 들이대고보기 시작했다.

옆집에 살아서 서로 얼굴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할머니는 왜 그러셨을까? 혼자 타고 가는 대중교통도 아닌데 아저씨는 왜 그러셨을까? 아무리 연예인이라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아무런 인사도 없이 그저 어떤 대상을 다루듯 학생들은 왜 그랬을까? 처음엔 왜 이렇게 무례할까 생각했다. 그런데 차츰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공감’의 개념 자체를 배우지 못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옮아갔다. 공감이 없으면 애초에 마음에 ‘너’가 없으니까 무례일 것도 없다.

지난해에 케냐에 갔다가 우연히 비정부기구(NGO)가 지원하고 있는 방과후교실 수업에 참관할 기회를 얻게 됐다. 초등학생들 수업이었는데, 그 수업의 그날 주제는 ‘정직’(Honesty)과 ‘온전함’(Integrity)이었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그 두 단어를 각각 나름대로 정의해 보게 했다. 학생들의 발표가 끝없이 이어졌다. 45분 내내 수업은 이것이 전부였다. 두 개의 단어로 45분 수업이 다 갔다. 무척 인상 깊었다. 내가 받아온 수업이란, 늘 ‘정직해야 해요’로 시작해서 ‘이러이러한 게 정직한 행동이에요. 이렇게 행동해요’를 암기한 뒤 어떤 것이 정직한 행동인지 문제집에서 연습한 후 시험에서 만점을 받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45분을 딱 두 개 단어로 보내는 것, 지나치게 더딘 수업방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내려준 정의와 행동강령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배운다. 남이 내린 정의를 강요받는 것이 아니므로 이 정의는 나의 행동을 결정하고 책임질 힘을 갖는다. 두 단어만 공부하는 것 같지만 실은 이 시간 동안 아이들은 자기 삶을 더 넓고 깊게 살펴보게 된다. 가족과 자기의 관계, 친구와 자기의 관계 등등. 천천히 아이들의 마음에 인간이 들어온다. ‘너’가 보이기 시작하고 너와 ‘공감’하게 된다. 행동은 당연히 일일이 지시해주지 않아도 어떤 상황에서든 자연스레 타인을 배려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입시 위주의 우리 교육은 도덕 시험에서는 100점을 맞지만 실제 생활에선 전혀 도덕적이지도 타인을 고려하지도 못하는 기이한 인간을 만들어냈다. 남이 내려준 정의는 내 것이 아니니 책임질 필요 없고, 단순 암기는 전체를 보는 눈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마음에 들어와 있지 못한 사람의 눈에 ‘너’가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공감 불능’이 만연해 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란 외침이 가득하다. 아이들의 더딘 걸음을 기꺼이 기다려주는 천천한 교육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임자헌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40098.html



Posted by 겟업
2014. 9. 14. 15:27


《 동아일보 오피니언 면이 ‘동아쟁론(爭論)’을 신설합니다. ‘주장은 명확하게 판단은 독자에게’라는 취지로 그때그때 우리 사회를 달구는 뜨거운 이슈들을 잡아서 전문가들로부터 찬반양론을 듣는 여론의 광장입니다. 어느 한쪽의 주장을 담기보다 찬성과 반대라는 양쪽의 입장을 모두 소개해 독자들의 판단에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논쟁적인 도전의 장을 기대해주십시오. 첫 번째 주제는 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로 등장한 ‘경제 민주화’입니다. 찬성하는 쪽에서는 재벌 개혁을 내세우고, 반대하는 쪽에서는 정치적 구호라고 반박합니다. 》

▼ ‘힘의 집중’이 재벌문제의 근원 ▼

최정표 경실련 공동대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경제 민주화’란 공정한 경제활동과 공평한 성과배분을 의미한다. 이러한 ‘민주화’는 힘의 분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어느 사회이건 힘이 집중되면 그 힘은 남용되고 사회정의는 훼손된다. 정치적 힘이 집중되면 독재를 낳고 시장의 힘이 집중되면 독점을 낳는다. 그러므로 힘의 집중은 민주사회가 가장 경계하는 악마(惡魔)이다. 민주주의 발전사는 힘의 분산을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힘의 분산은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

‘경제 민주화’도 정치 민주화와 마찬가지로 힘의 분산을 필수 요건으로 한다. 그런데 한국경제에서는 힘의 집중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5대 재벌의 기업자산은 우리나라 전체기업자산의 25%에 이르면서 국가소유 자산의 절반 가까이 된다고 한다. 5대 재벌의 힘은 다시 다섯 사람의 총수에게로 집중된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경제의 절대적 힘이 다섯 사람의 개인과 그 가족에게 집중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집중된 경제적 힘은 언론, 문화, 스포츠, 광고, 행정, 입법, 사법 등 사회 곳곳에서 그 영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재벌의 힘은 이미 경제영역을 벗어나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그 힘이 남용되고 있다. 그리고 비경제분야에서의 영향력은 다시 경제영역에서의 힘을 추가시키는 데 활용되고 있다. 말하자면 경제영역과 비경제영역 사이에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져 있는 셈이다.

이러한 비정상적 상황을 치유하지 않고는 시장경제도 성공시킬 수 없고 선진국을 달성할 수도 없다. 이런 현상은 후진국에서만 관찰되는 현상이고 선진국에는 없는 현상이라는 데서 그 답은 분명하다. ‘경제 민주화’는 바로 이 문제를 치유하여 시장경제를 복원하고 정상화하는 일이다.

힘의 집중은 또한 시장경제의 최대 적이다. 주식시장에 큰손이 작용하면 그것은 더이상 시장이 아니듯이 경제활동에도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큰 힘이 존재하면 시장은 파괴된다. 재벌은 이러한 집중된 힘의 주체이다. 재벌은 작심만 하면 어느 업종에나 진출하여 쉽게 그 업종을 장악해 버릴 수 있다. 시장경제의 번영을 위해서는 소수 재벌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는 이런 힘을 분산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정치 민주화가 정치권력의 분산에서 시작하듯이 경제 민주화도 경제력의 분산에서 출발해야 한다.

경제력의 분산은 재벌정책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재벌정책이 바로 경제 민주화의 첫걸음이 된다. 현재는 1%의 개인 소유지분으로 50%가 넘는 계열사 지분을 장악할 수 있는 제도를 허용하기 때문에 총수 한 사람이 수많은 기업을 지배할 수 있고 소수 개인에게 막강한 경제력이 집중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적은 돈으로 수많은 기업을 지배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한국의 기업제도 때문에 재벌체제가 가능한 것이다. 이런 비합리적인 소유 지배제도를 개선해야 재벌에 의한 과도한 경제력 집중을 해소할 수 있다.

재벌에서는 총수 돈이 아닌 계열사 자금으로 또 다른 회사를 소유하고 총수가 그 회사의 경영권을 장악한다. 순환출자를 금지하고 지주회사 규제를 강화하고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시행하고 금융계열사와 일반계열사를 분리시키면 이런 과정을 통해 총수가 지배할 수 있는 기업은 많이 줄어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책을 추진하지 않고는 결코 재벌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기업이란 돈을 벌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기 때문에 불법이 아닌 한 끝없이 이윤을 추구하기 마련이고 이것은 나무랄 일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나오는 사회적 폐해를 최소화하면서 경제활동의 과실이 국민 모두에게 고르게 분배되도록 올바른 제도와 틀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입법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그동안 정부와 국회가 재벌과 영합하거나 재벌에 굴복하여 이 일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재벌 중심의 비민주적 비시장적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새 국회와 다가올 새 정권은 소수 재벌에 집중되어 있는 경제적 힘을 분산시킬 뿐만 아니라 그 힘이 남용되지 않도록 하는 제도개혁에 적극 나서야 한다. 이 길만이 한국경제의 살길이고 우리경제의 희망이다. 힘의 집중을 해소하는 데는 많은 난관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일은 결코 미룰 수 없는 시대정신이다.

최정표 경실련 공동대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 필자 소개 ::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산업조직학회장과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을 지냈다.

▼ ‘경제 민주화’는 허울뿐인 구호 ▼

복거일 경제평론가 소설가

‘경제 민주화’는 새로운 용어가 아니다. 19세기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미 ‘부의 평등화’라는 뜻으로 널리 썼던 말이다. 이때 경제 민주화는 ‘경제 민주주의(economic democracy)’의 실현을 뜻한다. 따라서 경제 민주주의의 어원은 바로 공산주의 경제 체제인 것이다.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논파되자, 경제 민주주의도 체계적 이론으로 존재하기를 멈췄다. 

최근 다시 살아난 경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사소한 정책들을 포장하는 말이 되었다. 그런 주장들은 단편적이고 연관성이 적어서 원래 경제 민주주의 개념의 파편에 지나지 않지만 이론적 바탕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노동량 가치설(quantity-theory of value)’이다. 이 이론은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원시적 이론으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도 오래전에 버렸다. 그리고 시장경제는 모든 시민의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므로, 이미 그 자체로 민주적이다. 그래서 주류 경제학자들은 경제 민주주의라는 말을 아예 쓰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우리 사회에서 갑자기 경제 민주화가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떠오를 까닭이 없다. 그것이 매력적인 구호라는 점을 빼놓고는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리 체제에 적대적인 사람들은 그들의 시장간섭 정책을 경제 민주화라는 구호로 포장한다.

그들은 헌법의 119조 2항 중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라는 표현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표현은 아주 애매해서 논란을 부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헌법에 들어가면 안 되는 표현이었다. 게다가 문맥으로 보면, 그것이 당해 조항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알다시피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지향한다. 마르크스주의 경제 이론에 바탕을 둔 경제 민주화라는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데 이질적인 개념이 첨가되면서, 우리 헌법의 일체성이 상당히 훼손되었다. 이에 따른 현실적 해악도 크다. 역사적으로 법은 권력을 쥔 사람들의 자의적 행태를 억제해서 시민들을 보호해 왔다. 권력이 남용될 수 있는 규정들을 품으면, 좋은 법이 될 수 없다. 헌법 119조 2항은 국가가 시장에 자의적으로 간섭할 근거를 마련하면서도 권력이 남용되지 않도록 하는 조치를 빠뜨려 우리 정부는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깊이 시장에 간섭해 왔다.

하지만 어떻든 그 조항이 실재하므로, 우리는 그것을 헌법정신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활동으로 나온 경제 상태에 부정적 측면이 보이면, 국가는 그것을 완화하려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 조항이 마르크스주의 경제 이론에 바탕을 둔 경제 민주주의를 내세웠다는 해석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지금 경제 민주화로 포장된 정책들의 핵심은 ‘강력한 재벌 규제’다. 재벌 규제는 인기가 높지만, 그것은 폐기된 경제 이론의 틀로 경제 현상을 살핀 데서 나왔다. 

만일 재벌 기업이 재벌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묘사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악한 존재라면 소비자들이 재벌 기업의 제품을 찾고, 젊은이들이 재벌 기업에서 일하려 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또 재벌 기업이 수출을 주도해 경제를 이끌고 있는데 강제로 퇴출시키면, 그 자리를 외국 대기업이 차지하는 현상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우리 시장은 이미 너무 많은 규제로 왜곡되었다. 거기서 활동하는 기업도 당연히 왜곡된다. 재벌 기업이 보이는 추한 모습은 대부분 잘못된 규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비현실적 규제를 푸는 것이지 경제 원리를 거스르는 규제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 민주화가 재벌 개혁이라 한다면 그것을 따로 포장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이미 반세기 넘게 재벌 문제와 씨름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모두가 잘 아는 재벌 문제에 관한 낡은 주장을 그럴 듯한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다. 매력적인 구호로 자신의 주장을 포장하려는 충동은 자연스럽지만 중요한 선거를 앞둔 지금 재벌에 대한 거친 공격을 경제 민주화로 포장하는 일은 시민들을 현혹하려는 시도다.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고 현실적으로 해롭다.

복거일 경제평론가 소설

Posted by 겟업
2014. 9. 14. 10:53

로마시대 최고 인기 스포츠
노예·포로 외 일반인도 돈·인기 위해 검투사로

佛 검투사 클럽 30여개 검투 클럽에 수강생 몰리고 클럽 대항전도 열려

스파르타쿠스의 향수 이탈리아 중부도시 카푸아 이곳에서 동료 70명과 반란 저항과 자유의 아이콘으로



지난달 14일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작은 도시 '아를'의 로마 시대 원형 경기장. 서기 1세기 때 세워진 것으로 한 번에 2만명을 수용했던 이 대형 건축물 바깥에는 여름휴가철을 맞아 매주 월요일 오후 5시 30분에 투우 경기가 열린다는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경기장 안에 들어서자 '깜짝 반전'이 펼쳐졌다. 2000년 전 이 경기장이 건설됐을 때나 볼 수 있었을 법한 검투사들의 시합이 눈앞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박수를 받으며 경기장에 등장한 검투사 두 명의 경기는 순간 격렬하게 달아올랐다. 옛날처럼 상대방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지 않을 뿐 상대방 몸과 방패를 향해 돌격하고 뭉뚝한 무기로 급소를 공격하는 모습은 로마 시대와 다를 바 없었다. 이들은 검투사 양성·공연 전문회사인 악타아케오 소속의 전문 글래디에이터(검투사)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로페즈 브리스 대표는 "회사에는 모두 16명의 검투사가 소속돼 있는데 여름휴가나 지방 축제 기간에는 매일, 그리고 하루에 여러 차례 관광객을 대상으로 이 같은 시범 경기를 펼친다"고 말했다. 검투사들은 경기가 끝나자 어린이 관광객 20여명을 경기장 안으로 불러내 기본자세를 가르쳐주는 팬서비스도 진행했다.

인구 5만3000여명의 아를은 여름휴가 때가 되면 50만명 이상 관광객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룬다.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매력 포인트는 네덜란드 출신 후기 인상파 화가 반 고흐의 체취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로마의 유적들이다. 고흐는 이 도시에 머문 15개월 동안 자신의 작품 중 3분의 1을 그릴 정도로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대표작 중 하나인 '밤의 카페테라스'(1888년작) 그림 속 카페는 외벽에 '반 고흐 카페'라는 글씨를 써놓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원형 경기장은 고흐 카페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이장석 재불 몽펠리에 한인회장은 "아를은 님 등과 함께 남프랑스에서 손꼽히는 로마형 도시"라며 "로마풍으로 도시를 건설했고 그때 만든 여러 건축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말했다.


검투 자세 배우는 관광객들 지난달 14일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 ‘아를’ 시내에 있는 원형경기장에서 청소년 관광객들이 검투 기본자세 등을 배우고 있다. 이 경기장은 로마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한 번에 2만명을 수용했다.
검투 자세 배우는 관광객들 지난달 14일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 ‘아를’ 시내에 있는 원형경기장에서 청소년 관광객들이 검투 기본자세 등을 배우고 있다. 이 경기장은 로마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한 번에 2만명을 수용했다. / 장일현 기자


로마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당시 최고 인기 연예인이었던 검투사의 흥행 스토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검투사의 세계는 영화 등 상업 작품이나 소설, 회화 등에서도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2000년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글래디에이터'는 음모에 빠져 로마 장군에서 노예 검투사로 전락한 주인공이 가족과 제국을 위해 복수한다는 내용으로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 등 5개 상을 받았다. 2010년에는 미국 TV 시리즈 '스파르타쿠스'가 인기를 끌었다.

검투는 로마 시대를 풍미했던 인기 스포츠였다. 로마 이전에 이미 이탈리아 중·남부에서 벌어졌던 전통적 풍습이 로마 시대에 접어들면서 대중적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황제들은 시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이 경기를 이용했다. 검투사들은 무기를 들고 맹수와 싸우거나 상대방 검투사와 목숨을 건 결투를 벌였다. 노예나 전쟁포로, 범죄자 출신이 대부분이었지만 일반 자유민들이 돈이나 인기를 얻기 위해 검투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남프랑스에서는 검투사 경기를 현대적 시각에서 복원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프랑스 전역에는 현재 약 30여개의 검투사 클럽이 운영되고 있다. 각 클럽에는 검투를 배우는 수강생들도 줄을 잇고 있다. 브리스 악타아케오 대표는 "우리 회사에만 검투사 과정을 수강하는 사람이 200여명 정도 된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중남부 도시 카푸아에 있는 원형 경기장. 이 경기장은 로마의 콜로세움보다 100년 이상 먼저 지어졌다. 카푸아는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반란을 일으킨 곳이다.
이탈리아 중남부 도시 카푸아에 있는 원형 경기장. 이 경기장은 로마의 콜로세움보다 100년 이상 먼저 지어졌다. 카푸아는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반란을 일으킨 곳이다. / 장일현 기자


로마 제국을 탄생시킨 이탈리아에선 반란을 일으킨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존재가 새삼 이목을 끌었다. 흔히 검투사 하면 관광객들은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을 떠올린다. 한 번에 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고대 로마 최대의 건축물은 서기 80년에 완공돼 연배로 따지면 '동생뻘'이다. 이보다 앞선 '형님'은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카푸아라는 도시에 있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검투사 스파르타쿠스 자취도 이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카푸아는 로마에서 남쪽으로 200㎞, 나폴리에서 북쪽으로 25㎞ 정도 떨어졌다. 이곳 원형 경기장은 로마 최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31년 악티움해전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건설됐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일부 이탈리아 학자들은 이미 스파르타쿠스(?~BC 71) 시대에 경기장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경기장 입구에는 '스파르타쿠스 시대 때 원형 경기장이 있었던 곳'이라고 적힌 작은 팻말이 꽂혀 있었다. 현장 관리인은 "이 경기장을 찾아온 한국인은 거의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픽] 아를 / 카푸아
오늘날 불가리아 지역인 트리키아 출신 스파르타쿠스는 기원전 73년 카푸아에 있는 검투사 양성소에서 70여명의 동료 검투사와 함께 반란을 시작했다. 한때 군세가 최대 12만명에 달했고, 이탈리아 반도 중부와 남부를 휩쓸었으나 기원전 71년 원로원이 보낸 크라수스 군단에게 패해 사망했다. 크라수스는 이후 반란군 잔당을 끝까지 추적해 6000여명을 붙잡은 뒤 카푸아에서 로마로 이어지는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했다. 1960년 커크 더글러스 주연 영화 '스파르타쿠스'에 나오는 장면 그대로였다.

카푸아 지역에서도 최근 들어서야 스파르타쿠스의 역사적 가치와 상품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경기장 주변엔 검투사 학원 등도 생겨났다. 2년 전에는 경기장 입구 쪽에 입장권 판매소와 레스토랑 등이 들어선 관리 건물도 지었다. 관리소 여직원 안나 디글리오씨는 "그가 유명하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존재이긴 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주목을 끌 만한 무엇을 만들어내지 못했었다"며 "지금은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하루 50~60명 정도가 꾸준히 이곳을 찾아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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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4. 9. 14. 10:49

어디가서도 성공했을 사람. DNA 가 다르다.


人生은 한걸음씩, 革新은 반걸음씩 

"새로운 게 늘 좋은 건 아니야… 10년 뒤에도 통하는 클래식 추구" 

꿈을 현실로… 3박자가 맞았다 
運, 기회의 땅 미국에 태어나… 
타이밍, 내가 자란 60년대는 세계가 패션에 막 투자하던 때 
사람, 나를 알아봐준 사람들… 열광과 격려로 성공 뒷받침 

유행은 너무 짧아 
제품이 時流에 맞으면서도… 시대 초월해 통용 가능해야 

17세 때 패션에 눈떠 
환불 처리 점원으로 일하다, 사람들의 好不好 알게 돼 

당신 곁의 트렌드를 읽어라 
직관은 특별한 재능 아니다… 열망 강하면 깨어 있게 돼


까치발을 한 꼬마는 잡화점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파란색 스웨이드 구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세상에 그보다 아름다운 물건은 없는 것 같았다. 밤마다 꿈을 꿨다. 그 신발을 신은 아이는 왕자가 됐다가 거인도 됐다가 수퍼맨도 됐다.

하지만 소년의 발엔 언제나 형이 신다 물려준 낡은 운동화가 전부였다. 옷은 물론이고, 야구 글러브 하나 제대로 된 걸 가져본 적도 없다. 뉴욕 브롱크스에서 가난한 유대계 러시아인 이민자의 넷째로 태어난 그에게 '풍족'이나 '풍요'는 요원한 단어였다.

"그래도 항상 매일이 즐거웠던 소년이었어요. 상상 속에서 언제나 난 매끈하게 멋있는 녀석이었으니까요. 매일 꿈꿀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진짜 재밌는 게 뭔지 알아요? 모든 걸 상상했지만, 내가 상상했던 그 모든 것이 현실이 될 거라곤 정말 상상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무일푼으로 시작해 자신의 이름을 딴 '패션 왕국'으로 68억달러(약 7조원·2014년 포브스 추정)의 부(富)를 쌓아 올린 랄프 로렌(Lauren·74·개명한 이름·공식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랠프 로런)의 삶은 '아메리칸 드림' 그 자체다. 그는 고등학교 앨범에 '백만장자가 되고 싶다'고 적었다. 꿈을 완벽히 이룬 셈이다.

뉴욕 맨해튼에 있는 그의 사무실은 유리창으로 덮인 초현대적 마천루의 건물 외관과는 딴판이었다. 마치 19세기 런던의 비밀스러운 사교 클럽이나 18세기 프랑스 궁전 내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고급스러운 마호가니로 된 가구와 장식물들이 눈에 띄었고, 고풍스러운 유화가 곳곳에 걸려 있었다.

호그와트 마법학교에나 있을 법한 거대한 문을 열고 나니 눈에 띈 건 의외로 작고 귀여운 동네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까다롭고 제왕적이며 고집 센'이라고 표현됐던 일부 책자의 설명과는 딴판이었다. 양옆으로 술(tassel)이 잔뜩 달린 카우보이 바지에 은색 징이 박힌 커다란 벨트를 매고 회색 꽈배기 니트, 흰색 셔츠를 받쳐 입은 그는 마치 파란색 스웨이드 슈즈를 바라봤던 그 눈처럼 천진한 표정으로 환영 인사를 건넸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공식으로 밝힌 바는 없지만 168㎝ 내외다), 군살 하나 없는 탄탄한 체격이었다. "멋지다"는 말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 말 또 해줄 순 없나요? 당신이 여기 계속 머물렀으면 좋겠네요"라며 크게 웃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Weekly BIZ] [Cover Story]
가난한 이민자 아들로 태어나 억만장자가 된 미국의 디자이너 겸 CEO 랄프 로렌. “꿈을 디자인한 다”며 상류층의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한 그의 의상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이들을 사로잡았고, 랄프 로렌 자신 역시 ‘아메리칸 드림’을 일구게 됐다. 아래 왼쪽 사진은 유방암 퇴치 지원을 위한 ‘핑크포니’라인. 수익금 일부를 관련 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 랄프 로렌 제공



―어린 시절 진짜 꿈은 뭐였나.

"스포츠를 좋아해 농구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키가 안 컸다(웃음). 영화를 좋아해 영화배우도 되고 싶었다. 조지 클루니 같은. 난 어릴 때 친구들의 패션에 대해 조언을 해주던 인기 소년이었다. 옷만 잘 입어도, 비록 그게 새 옷이나 비싼 옷은 아닐지라도, 남들과 차별되게 스타일을 잘 맞춰 입은 날이면 내 기분이 달라졌다. 옷이 날 표현해 준다고 느꼈다."

―언제부터 디자인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았나.

"초등학생 때 구제 의상을 고쳐 입었는데 사람들이 '멋지다'며 난리였다. 으쓱했다. 디자인에 대한 재능이라기보다는 패션 전체, 어떻게 하면 좀 더 멋져 보일까, 이런 삶 전체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거 같다."

옷 이야기를 하면서 호흡이 빨라지고 행복해하는 그의 눈빛은 너무나 강렬했다. "디자이너라기보단 타고난 마케터"라고 비판한 패션 평론가들 때문에 생겼던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일부 유명 디자인 스쿨 출신과 '게이'라는 정체성이 업계를 지배하는 폐쇄성 강한 패션업계에서 대학 교육도 거의 받지 않고 패션계에선 굉장히 드문 '스트레이트'라는 점이 그의 디자인을 "평범하다"고 폄하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구두는 샀나?

"가난한 화가의 아들이 무얼 많이 가졌겠는가. 때론 그런 건 영원한 동경의 대상으로 남아있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바랄 수 있다는 것만큼 행복한 게 있을까? 부족했기에, 결핍이 있었기에 그만큼 갈망하고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던 거 같다. 그래서 난 행복한 아이였다."

―이렇게 성공한 비결은?

"열심히 일하고, 또 열심히 일하고, 일하는 걸 즐기는 것."

―너무 평범한 답 아닌가?

"무슨 소리. 당신을 바라봐라. 사람 만나는 것 좋아하고 글 쓰는 것 좋아하고,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이 즐겁지 않은가? 당신은 단어로 글을 쓰지만, 난 옷을 통해 글을 쓴다. 그리고 그걸 즐긴다. 당신이 즐기는 일을 하면 그 자체로 동기부여가 되고 에너지를 얻게 된다. 그게 쌓이면 위대한 커리어를 쌓을 수 있다. 위대함을 원한다면 그 위대함 속에 시간을 담으면 된다. 위대함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고, 마법처럼 손짓 하나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즐기는 일을 열심히 하면 상대방이 반응하고, 그걸 보고 만족을 느끼고, 더 책임감 있게 잘하게 된다. 위대한 것은 결국 작은 것들이 축적돼 완성되는 것이다."

―성공 비결을 물을 때마다 많은 사람이 똑같이 답한다. 열심히 일하고 네가 하는 걸 즐기고. 한국에 워커홀릭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 그렇다고 다 성공하는 건….

"다 성공하는 건 아니라고? 그렇다. 그러면 뭐가 차이일까? 생각의 출발점을 바꿔야 한다. 보통 그런 이들은 '돈을 벌자'고 목표를 설정한 뒤 일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지치게 되고 '내가 지금 누굴 위해, 무얼 위해 하고 있는가' 하며 정신적 혼돈에 휩싸이기도 한다. 난 처음부터 돈을 바라지 않았다. 나는 꿈을 완성하기 위해 일했다. 디자인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삶을 디자인하고 싶다'는 명확한 꿈이 있었다."

―꿈꾸긴 쉬운 거 아닌가.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게 어렵지.

"물론 운도 좋았다. 부인할 수 없다. 인생에서 성공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세 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꼽자면 '타이밍과 운,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다. 미국이라는 기회의 땅에 태어나 운이 좋았고, 내가 자랄 시기인 1960년대는 전 세계가 이제 막 패션에 눈을 떠 투자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타이밍도 좋았다. 내가 만약 10년 일찍 태어났다면 랄프 로렌 같은 거대 기업은 존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나를 인정해준 사람을 만난 것이 행운이자 성공의 뒷받침이 됐다."

 [Weekly BIZ] [Cover Story]
랄프 로렌이 영국 윌리엄 왕세손 초청으로 14일(현지 시각) 윈저 캐슬에서 열린 ‘로열 마스덴 자선 행사’에 참석했다. 로렌은 최근 유방암 예방과 퇴치를 위해 영국 유명 암센터인 로열 마스덴과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사진 왼쪽부터 사위 폴 아루 엣(헤지 펀드 매니저), 딸인 딜런(캔디 사업가), 랄프 로렌, 아내 리키, 큰아들 앤드루(영화 제작자₩모델), 둘째 며느리 로렌 부시(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조카), 둘째 아들 데이비드(랄프 로렌 그룹 광고마케팅부 수석부사장). / 사진가 데이비드 하틀리 제공


―당신을 인정해준 사람이 누구인가?

"너무나 많다. 굳이 한 명을 꼽자면 마빈 트라웁(블루밍데일 백화점 전 CEO)이다. 내 넥타이에 대해 모두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때, 당시 블루밍데일 백화점 바이어였던 그는 내 작품에 열광하며 백화점 내에 숍인숍(매장 안에 작은 매장)을 두고 팔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뿐만 아니라 '랄프, 당신의 재능은 뛰어나군! 넥타이 말고 또 무얼 만들 수 있지? 뭐든지 만들어 보게'라며 격려해줬다. 난 사람을 알아봐 주고 격려한다는 게 얼마나 젊은이의 잠재력을 일깨울 수 있는지 그를 통해 배웠다."

―어릴 때 매장 재고 관리원으로 일하면서 패션에 눈떴다고 들었다.

"17세 때다. 재고 관리라기보다는 교환 환불 처리 같은 일이었다. 사람들이 반환한 옷을 옷걸이에 걸어 창고로 가져다 놓는 일 같은 걸 했다."

―그래도 배운 게 있을 텐데.

"환불하는 걸 보면서 '아 저런 걸 사람들이 싫어하는구나'라는 걸 알았다."

―그 경험이 도움 됐나?

"그때 진짜 느낀 건 내가 패션을 정말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는 것이다."

그는 16세 때 이름을 랄프 리프시츠에서 랄프 로렌으로 바꿨다. 유대인의 느낌을 지우기 위해 일부러 바꾼 게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그는 "발음이 어렵다며 어린 시절 계속됐던 놀림 때문"이라고 말했다. '로렌'은 '로렌스'라는 사촌 이름에서 따왔다('런던'도 유력했다고 한다).

"직관은 강한 열망에서 나온다"

패션계에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20대 중반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넥타이를 내놓으면서다. 야간 대학을 다니며 브룩스 브러더스의 판매원으로 일하면서 '개별적이고 고급 서비스를 원하는 고객은 그에 맞게 지갑을 열 준비가 충분히 돼 있다는 점'을 깨달은 뒤였다. 대학을 중퇴하고 자신의 회사를 차려 기존에 유행하던 폭 좁은 넥타이 대신 그의 두 배는 되는 4인치 폭(약 11㎝)의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았다. 값도 일반 타이 가격이 3~4달러였던 1967년 당시 7.5~15달러로 높여 승부수를 걸었다.

―넥타이는 특별했지만 처음부터 환영받은 건 아니었다. 좌절을 어떻게 극복했나.

"나 자신을 믿었다. 내 직관을 믿었고, 사람들을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세대'를 이끌 것이라 생각했고, 새로운 걸 추구하는 그들의 욕구를 폭발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처음부터 쉬운 건 아니었다. 무일푼 젊은이를 믿고 투자하려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가능성을 본 한 사업가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앞 작은 좌판을 내줬다. 5만달러를 대출받아 회사를 세우고 생산을 시작했다. 그의 넥타이와 이듬해 시작한 남성복은 젊고 부유한 이들의 눈을 사로잡았고, 곧 신분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됐다. 드라마 같은 출발이었다.

―'패밀리 브랜드(남성·여성·아동 등 가족을 모두 아우르는 브랜드)'라는 개념을 만든 것도 당신이 처음이고, 플래그십 스토어(대형 단독 매장)도 당신이 1986년 뉴욕에 선보인 라인맨더 매장이 원형이 됐다. 패션계에서 당신은 모든 걸 앞서갔다.

"아까 말했듯 내 직관을 믿었다. 직관이란 건 일부만 가진 재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흐름이란 게 나한테만 보였을까? 아니다. 분명 당신 곁도 스쳐 지나갔다. 간과했을 뿐이다. 언제나 깨어 있어라. 트렌드라는 건 당신 곁에 항상 있다."

―알아보는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만큼 내 열망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난 항상 사람들이 '나은 삶'에 대해 갈구할 것이라 생각해왔다. 난 그저 옷을 디자인한 게 아니다. 삶을 디자인했고 꿈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다. 대학 졸업장 같은 게 당신이란 사람을 결정해 주진 않는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밀고 나가라. 내가 산 증인 아닌가."

"내가 가장 중시하는 건 일관성"

랄프 로렌 디자인 팀에서 일했고, 지금은 몽클레르 디자이너인 톰 브라운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디자인은 하기 쉽다. 하지만 그걸 상업적으로 성공하게 하느냐는 다른 문제다. 그런 점에서 랄프 로렌은 위대하다."

―실패란 건 해본 적 없는 것 같다.

"무슨 소리. 나도 실수 많이 했다. 초기엔 비즈니스에 대한 감각이 부족했다.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잠 못 이뤘다. 부도 일보 직전이어서 은행에선 전화가 계속 오고. 내 평생 최악이었던 것 같다."

―어떻게 이겨냈나.

"비밀을 알고 싶나? 위대한 팀과 함께 일하기 때문이다. 적시 적소에 딱 맞는 사람을 만나 그들의 능력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좋은 디자이너, 좋은 사업가가 되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위대한 디자이너, 위대한 사업가가 되는 건 굉장히 어렵다. 그 차이가 바로 '위대한 팀'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난 정말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열심히 한다는 것이 무조건 혼자 하라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당신만의 '군대(army)'를 가져야 한다."

그는 스티브 잡스와도 자주 비교된다. 일부에선 그의 회사를 일컬어 '랄프교(敎)'라는 이도 있다. 그를 교주처럼 떠받친다는 것이다.

"직원과 한몸이라고 느끼기 때문 아닐까? 2만50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좇아 우리 회사로 모이지 않았는가. 직원이 성장하는 것이 결국 회사가 성장하는 것이다. 난 성장을 즐긴다. 난 그들이 자라나는 것을 바라보면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폴 골드버거는 당신을 가리켜 루스벨트나 케네디 대통령과 비슷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더 나은 삶이 있다'는 희망을 준다는 것이다.

"세상에나. 그들 모두 내가 존경하는 이들이다. 제대로 된 리더, 그러니까 영감을 주는 사람이 위기에서 얼마나 필요한지, 그런 이들이 얼마나 세상을 바꿔주는지 생애를 통해 절실히 배웠다. 그들이 한 일은 나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여주는 세계를 통해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한다."

―미국 패션계에선 당신이 대통령 아닌가. 당신만의 비전이 있다면?

"하하. 내가 가장 중시하는 건 일관성이다. 기업의 철학이나 CEO의 철학이 일관성이 없다면, 직원들이 얼마나 그 회사를 어떻게 믿고 자신을 투자하겠는가. 기업을 떠올릴 때 명확한 비전이 있어야 한다. 난 내 회사를 믿었고, 사람들에게 신뢰할 만한 기업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품질에 대한 집착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혁신이란 딱 반 보 앞서는 것"

―당신에게 혁신이란 무언가.

"기존보다 반 보 앞서는 것이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나의 목소리가 모이면 트렌드가 된다."

―2017년이면 50년이 된다. 자칫하면 올드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게 패션계인데. 어떻게 매일 새로워지면서 지속 가능할 수 있는가.

"새로움(newness)이 언제나 항상 좋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새로운 건 좋지만, 그저 새롭기만 해서는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다. 시류에 맞으면서도 시대를 초월하는 항상성 같은 걸 가져야 한다. 10년, 20년 전에 샀던 것도 현재에 통용될 수 있는 것, 클래식하면서도 구식이 되지 않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너무나 트렌디해서 돈 낭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신뢰받는 브랜드를 만들려면?

"가장 중요한 건 장수(longevity)할 수 있느냐다. 유행이란 너무나 짧고, 내가 몸담고 있는 세계는 길다. 당신이 꼭 경계할 것은 '나도 이거 할 수 있어'라는 이야기에 빠져드는 것이다. 경쟁사가 무얼 한다고 해서 따라 하는 순간 영속성은 깨진다. 또 작은 디테일도 놓치면 안 된다. 남들 눈에 안 보일 수 있어도 누군가는 그 흠을 발견할 수 있다."

―신뢰받으면서 동시에 트렌드를 주도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난 '이걸 사야 돼'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이런 삶도 있어'라고 제안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랄프 로렌적 삶'이라는 걸 이미지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광고 투자도 필요했다. 난 시각화의 힘을 믿는다."

1970년대 '광고'의 중요성을 깨달은 그는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장장 20쪽에 달하는 이미지 광고를 실었다. '옷 자체보다는 옷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라이프 스타일이 더 중요하다'는 철학을 내세웠다.

―당신에게 럭셔리란 무엇인가?

"매스(mass·대량 생산) 시대에 럭셔리는 특별한 걸 의미한다. 장인(匠人) 정신과 좀 더 나은 삶, 남과 차별화되는 것이다. 기계가 지배하는 매스 시대가 되면 될수록 질이 더 중요해진다. 처음에 매스가 쏟아내는 어마어마한 양에 눌려서 구분하기 어렵다가 시간이 가서 경험이 쌓이고 좋은 걸 볼 줄 아는 눈이 떠지면 질(quality)이 있는 것을 구별하게 된다. 결국 이 게임의 최후의 승자는 품질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좋은 가정을 일궈 올해 결혼 50주년을 기념할 수 있는 게 무척 행복하다. 생각해 보면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무 일도 없을 때, 단순한 평화(just peace)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난 매 순간에 감사하고 즐기려 한다. 난 언제나 상기한다. 파란색 스웨이드 슈즈를 바라봤던 그 시절 모습을. 나는 언제나 설레고 언제나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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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4. 9. 14. 10:44

옛날 새우깡은 지금 새우깡이랑 맛이 조금 달랐다. 한 봉지에 담긴 과자 맛이 균일하지 않았다. 짠맛이 많이 나는 게 있는가 하면, 조금 탄 맛이 나는 것도 있었다. 새우깡 한 봉지를 열면 그 안에서 감자깡이나 고구마깡이 한두 개씩은 꼭 나왔다. 제조 공정이 개선되면서 이런 일은 사라졌지만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어린 시절 과자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통로와 같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릴 때쯤 ‘언젠가는 먹고 말 거야’라는 광고문구와 함께 등장한 ‘치토스’는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어린이들에게 태평양 건너 바비큐 소스의 풍미를 처음 알렸다. 

옛날 과자 얘기를 꺼낸 이유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과자들이 여전히 전성시대를 누리고 있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인기 과자 가운데 새우깡은 1971년 탄생했고 죠리퐁, 꿀꽈배기는 1972년생이다. 초코파이와 에이스는 1974년에 탄생했다. 1980년대에도 계란과자, 포테토칩, 홈런볼, 버터링, 꼬깔콘 등이 태어났다. 

이런 ‘고령 과자’가 판치는 까닭은 사람의 감각기관 가운데 입이 가장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항상 새로운 것만 찾는 눈이 가장 진보적인 기관이라면, 수십 년 전 엄마의 손맛을 평생 잊지 못하는 입은 ‘극렬보수’에 가깝다. 모르는 것을 잘못 먹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위험회피 본능이 우리 유전자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과자 회사들은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새 제품을 연구해 내놓기보다 성공이 검증된 제품에 의존하려는 습성이 강하다. 외생변수로 시장이 급성장한 경제 성장기엔 외국의 인기 제품을 먼저 모방해 국내에 소개하면 성공이 보장됐지만 시장이 성숙해 버린 지금은 그마저도 어려워졌다. 스테디셀러 과자 탄생이 드물어진 까닭이다. 성장 정체를 딛고 살아남는 법은 가격 인상이 있을 뿐이다. 한 유명 과자회사의 회장은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신제품 개발도 안 하고 마케팅도 안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실제로 국내 대표적인 식품기업들의 연구개발(R&D) 투자는 매출액의 1%를 밑도는 수준이다.

보수화되는 것은 비단 과자회사만의 얘기가 아니다. 자동차, 가전, 반도체, 조선…. 우리나라가 의존하는 주요 먹거리 산업은 대부분 1970, 1980년대에 시작돼 조금씩 성숙기에 접어들고 있다. 기업들이 새로운 분야의 투자를 기피하는 바람에 성장이 정체되는 모습이 확연하다. 어떤 전문가들은 “더이상 따라잡을 기업이 없어진 삼성전자에 필요한 것은 ‘제2의 애플’이 등장하는 일”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이렇게 검증된 성공 공식만 따르다가는 필연적으로 갈 길을 잃게 된다. 입사 시험을 보러 전국에서 10만 명이 모여든다는 삼성그룹, 현대자동차그룹의 공채가 한 차례 진행될 때마다 취업전선에서 9만 명씩의 방황하는 영혼이 생기는 셈이다. 브랜드 컨설턴트 권민 씨는 자신의 책에서 “사람은 모두 원본(原本)으로 태어나지만, 대부분 누군가의 복사본(複寫本)으로 죽게 된다”고 말했다. “유일한 존재로서 유일한 삶을 살 수 있는데도 누군가를 따라 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희석한 나머지 잉여 되거나 여분의 사람으로 전락해” 발전의 동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 눈길을 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창출로 돌려야 할 때다. 그리고 다시 경제성장을 얘기할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과제가 있다. 바로 과거의 성공모델을 답습하려 하지 않고 모험정신으로 똘똘 뭉친 새로운 ‘원본’을 발견해 내는 일이다.

김용석 소비자경제부 차


http://news.donga.com/3/all/20140625/64628378/1

Posted by 겟업
2014. 9. 14. 10:42

선진국선 ‘김영란법’ 이미 시행 
공무원이 금품받으면 직무관련-대가성 불문하고 뇌물죄로 형사처벌 
돈-향응 받은 ‘스폰서 검사’, 승용차 받은 ‘벤츠 여검사’ 
무죄판결 또 안나오게 하려면 김영란법 통과가 절실하다



이른바 김영란법은 형법의 뇌물죄 요건이 너무 엄격하여 금품을 받은 공무원이 처벌이 안 되는 부패의 사각지대를 없애고, 부패의 근원을 방지하기 위해 선진국이 마련하고 있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국회에서 이 법을 통과시키지 않는 이유는 이 법률이 통과되면 청탁과 이권 개입으로 이득을 얻어 오던 무리들의 음성소득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 때문일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인테그리티(integrity)’라는 단어를 매우 강조한다. 윤리 관련 규정과 부패 방지 법규에는 이 단어가 꼭 등장한다. 주로 ‘청렴성’으로 번역되지만 ‘고결성’이 더 적합할 것 같다. “고결성만큼 신성한 것은 없다”(에머슨) “고결성은 말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행동에서 나온다”(베이컨) 등 고결성을 강조하는 경구가 많다.

선진국에서는 학교와 기업, 공직사회, 전문직과 리더십 교육 과정 등에서 이 고결성 덕목을 반복해서 교육하고 강조한다. 국제 거래와 기업에서도 법규와 윤리규정 준수를 의미하는 ‘컴플라이언스 의무’가 강조된다. 고결성을 손상시키는 행위는 중대 사안으로 다룬다. 필자가 하버드 로스쿨에서 공부할 때도 ‘인테그리티’를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는 것을 보았다. 부패 방지를 위한 국제규범에서도 고결성은 핵심 가치로 등장한다. 국제투명성기구는 “부패 방지를 위해 노력한 사람에게 ‘인테그리티상’을 준다. 유엔 반부패협약에서도, “부패와 싸우기 위해, 각국은 공직자들에게 고결성, 정직성을 장려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동양에서도 군자는 혼자 있을 때 더욱 삼가고 경계해야 한다는 신독(愼獨)을 강조했다(대학과 중용). 우리나라에서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도 신독을 강조했다. 이순신 장군은 신독 정신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공직자였다. 우리도 선비정신과 같은 고결한 인격수양의 전통이 있음에도 오늘날에는 고결함의 전통과 가치가 크게 퇴색되어 가고 있다.

고위공직자의 탐욕과 부패, 부정직함이 지나쳐서 하위 공직자들의 일탈 행위는 말할 것도 못 된다. 헌법재판소장 대법원장 대법관 등 가장 고결해야 할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조차 ‘황제 전관예우’를 활용하여 과도한 사익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 축첩행위와 혼외자식을 은폐하기 위해 대국민 거짓말 행진을 펼친 전 검찰총장, 3억 원대 금품과 2000만 원대 시계를 받고도 이것을 취임 축하선물이라고 강변하는 전 국세청장도 우리 사회의 고결성을 무참히 짓밟은 사람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로 부패의 근원을 척결하기 위해 ‘부정청탁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방지법안(이른바 김영란법)’의 통과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법안은 공직자의 부정 청탁과 이해충돌 행위, 금품수수 행위를 금지하고 금품수수가 100만 원을 초과할 경우 형사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러한 법률이 마련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뇌물죄에 대한 형사처벌 규정만 있을 뿐이고, 부정 청탁과 이해충돌 행위를 처벌하는 규정이 없다. 우리나라의 뇌물죄는 직무 관련성과 대가성을 엄격히 요구해서 고액의 금품을 받은 공무원이 무죄 판결을 받는 일이 빈발하고 있다.

건설업자로부터 현금 100만 원과 140만 원대의 향응을 받은 이른바 ‘스폰서 검사 사건’에서도 향응수수는 인정되나 직무 관련성과 대가성이 없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이 났다. 내연 관계의 변호사로부터 500만 원대의 샤넬 백과 신용카드 및 벤츠 승용차를 제공받은 이른바 ‘벤츠 여검사 사건’에서도 청탁 관련이 아니라 ‘사랑의 징표’로 받은 것이라는 해괴한 이유로 무죄 판결이 났다.

선진국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다. 미국 영국 독일에서는 공직자가 정부 급여 이외의 금품을 받으면 직무 관련성이 없더라도, 대가성을 불문하고 뇌물죄로 형사처벌한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외국 공무원에 대한 뇌물 제공까지 형사처벌한다. 캐나다 프랑스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국들은 대부분 이와 비슷한 법규를 마련하고 있다.


‘고결성’을 중시하는 국가 사회를 만들지 않고는 부패를 척결하기 어렵다. 존중받는 국가는 더욱 요원하다. 김영란법의 통과가 절실히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읊은 해맑은 시인 윤동주의 고결성이 더욱 그립다.

배금자 객원논설위원·변호사


http://news.donga.com/3/all/20140613/64226161/1



Posted by 겟업
2014. 9. 14. 10:41

생계와 교육이 막막한 서민에게 손에 안잡히는 ‘국가 개조’는 잠꼬대 
내수 위축시키는 집단심리 탓인지 국내 소비는 줄고 해외 소비는 늘어 
정부 人事물어뜯기보다 급한 것은 멍든 민생경제에 활기 불어넣는 일 
분노와 겁주는 정치로는 해결 못해



웃음기가 너무 없다. 정치에도 사회에도 없으니 경제와 시장에도 없다. 온통 경직되어 있다. 그저 조심하는 게 상책이란 생각이 전염병 같다. 꼬투리만 잡히면 죽는다는 두려움에 총리감도 장관감도 수석감도 많이들 숨었다. 자칫하다간 칼 맞는다고, 공무원들은 복지부동(伏地不動) 정도가 아니라 초여름에 지하동면(地下冬眠) 중이다.


한 친구는 지난달 중순 울릉도에 갔는데 일행 말고는 여행객을 구경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관광 철이 그토록 한산하니 그곳 부모들은 육지로 유학 보낸 자식들의 2학기 등록금 걱정에 땅이 꺼질 것이다. 도시 업소들에서 일당(日當) 시급(時給)이나마 받을 수 있는 일자리와 일거리도 눈에 띄게 줄었다. 많은 일용직 근로자들은 언제 일이 끊어질까 하루하루가 초조하다. 이미 허탕 치는 날이 많다. 당장의 생계와 아이들 교육이 막막해지니 헛웃음조차 짓기 어렵다. 이런 서민에게 ‘국가 개조’라는 손에 안 잡히는 거대담론은 잠꼬대보다도 허망한 소리이다.

지금이 어느 땐데 술 마시고 노래하고 놀러 다니느냐고 하는 집단심리와 상호감시가, 그렇지 않아도 쪼그라든 내수 소비를 더 얼어붙게 만든다. 골프장 손님이 급격히 줄어 생계 걱정이 늘어난 쪽은 경기도우미와 골프장 내 식당종업원 같은 약자들이다. 인과(因果)는 돌고 도는 것이지만 아무튼, 사회가 경직되고 활기가 사라지면 경제가 풀리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부자가 아닌 중산층 이하의 국민은 가계부채의 고통에 시달려왔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사회가 밝기보다 어둡고, 웃는 사람보다 찌푸리는 사람이 많고, 분노가 넘치는 나라에는 외국 관광객인들 많이 올 리 없다. 맞이하는 사람들이 부드럽고 웃음이 넉넉하며, 친절하고 활력 있어야 외국인도 신이 나서 찾아오고 즐겁게 돈을 쓸 것이다. 

돈도 쓰는 맛이 있어야 쓸 텐데, 내 돈 쓰면서 세상 눈치부터 봐야 하는 사회 분위기에서는 돈이 숨거나 달아나기 십상이다. 우리 국민의 국내 소비는 줄고 해외 소비는 늘고 있다. 어제도 중국행, 동남아행 비행기는 많은 한국인을 실어 날랐다. 그들 주머니의 달러도 주인을 따라 중국으로, 동남아로 흘러갔다.

나라 안에서 돈이 풀리면 서민에게도 좋을 텐데, 그 돈이 나라 밖으로 줄줄 새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국에는 술 마시고 노래하고 골프 쳐서는 안 되는 사람이 너무 많은지도 모르겠다. 자주 외국을 드나들며 놀고 쇼핑하는 사람들은 조용히 돈을 들고 나간다.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주체는 정부 이전에 민간이다. 정부는 많은 세금을 거두지만 정작 민생 경제를 위해 정부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복지로 성장을 북돋우고, 나라가 가난을 구제해줄 것처럼 외쳐댔던 선거공약들은 역시 허망하다. 투자도 생산도 민간이 자유롭게 마음 놓고 할 수 있어야, 그리고 범죄가 아닌 다음에는 남의 눈치 안 보고 소비도 할 수 있어야 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 기업하기 좋고 투자하기 쉬운 환경, 각자의 능력 범위에서 하고 싶고 사고 싶고 먹고 싶은 것에 돈을 쓸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경제가 산다. 그래야 민생의 고통도 덜어낼 수 있다.

물론 나라도 기업도 개인도 부담 능력을 넘어선 과소비는 독약이다. 안 그래도 빚이 너무 늘었다. 부채가 있으면 절약해야 한다. 다만 돈이 있으면 쓸 만큼 써야 하고, 편하게 쓸 수 있어야 돈이 돈다. 돈이 돌아야 빈부 간의 분배도 된다.

경제가 활력을 잃고, 성장 잠재력을 보충하기가 더욱 어려워지는 구조로 가고 있다. 그런데도 세상은 경제보다 정치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더 많다. 내 생각에는 ‘국가를 개조할 국무총리, 경제를 살릴 경제부총리’ 그런 위인(偉人)을 찾는 일보다 국민의 경제심리를 끌어올리는 일이 더 중요하고 급하다. 지금까지 역대 어느 총리도, 어느 부총리도 국민에게 밥을 떠먹여준 위인은 없었다. 온 정치권과 사회운동권이 정부 인사(人事)를 둘러싸고 물고 뜯느라 정작 촉진해야 할 경제와 시장의 활성화에는 건성이다. 미국은 2008년 서브프라임 위기 이후 국민과 국가의 총력을 경제에 집중해 위기를 극복했다.

정부와 정치권에 바란다. 겁주는 정치, 성내는 공권력으로, 그 칼잡이 행태로 민생경제를 더 피멍들게 하지 말라. 조금이라도 국민을 신나게 해주고 국민에게 엷은 미소라도 돌려다오.

배인준 주필


http://news.donga.com/3/all/20140610/64159843/1



Posted by 겟업
2014. 9. 14. 10:40

“우리 애가 요즘 잘 안 먹어서 걱정이에요.” “우리 애가 드디어 대소변을 가려요.” “우리 애는 발소리만 듣고도 난 줄 안다니까.” 우리 애는 사람이 아니라 개다. 우리 집에도 ‘행운이’라는 이름의 혈기왕성한 네 살짜리 수컷 보더콜리가 산다. 퇴근 후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이 녀석에게 제일 먼저 건네는 말이 “엄마 왔다”이다. 휴일에 행운이가 공을 물고 와서 놀자고 채근하면 컴퓨터 앞에서 빈둥거리던 아이들이 잔소리를 듣는다. “오늘은 형, 누나가 좀 놀아줘라.”

개그맨 전유성 씨는 2009년 처음으로 경북 청도에서 반려동물을 위한 음악회 ‘개나 소나 콘서트’를 열었다. 이후 해마다 복날에 즈음하여 열리는 이 음악회를 보러 1만 명이 몰려와 청도의 명물이 됐다. 전 씨가 개에게 클래식 음악을 들려준다는 희한한 발상을 하게 된 계기는 방송인 최유라 씨의 “우리 애(개)가 아파서 병원 갔다 왔어”라는 말 때문이라고 한다. 개도 가족이라면 문화생활을 같이하는 게 뭐가 이상한가.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스스로 반려동물의 엄마 아빠 노릇을 하며 행복해한다. 개의 학명 ‘카니스 루푸스 파밀리아리스(Canis lupus familiaris)’에 ‘가족(원래 친근하다는 뜻)’을 가리키는 ‘파밀리아리스’가 포함돼 있는 것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사랑하는 반려견에게 유기농 사료를 먹이고, 정기적으로 미용실에 데려가고, 공주 옷을 입힌다. 엄마 아빠가 외출한 사이 혼자 집을 지키는 ‘아이들’을 위해 개 전용 방송 채널까지 등장했다. 이처럼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밑에서 개들도 행복할까.

올해 초 EBS의 다큐 프로그램 ‘하나뿐인 지구’는 ‘당신은 개를 키우면 안 된다’는 도발적인 문제 제기를 했다. 주인과 함께 있을 때는 사랑스럽기만 한 반려견이 혼자 집에 있을 때는 180도 달라진다. 물건을 마구 물어뜯고 아무 데나 용변을 보고 늑대처럼 울부짖는다. 개 훈련사인 강형욱 씨는 “힘든 상황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동료를 부르거나 주인을 찾는 소리”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분리 불안증을 보이는 개들은 심한 경우 자기 생식기나 발가락을 물어뜯기도 한다.

방송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동물학자 스티븐 부디안스키의 말이다. “개는 개죠.” 개를 마치 사람처럼 대하며 ‘우리 애가 행복하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순전히 착각이다. 분리 불안증으로 예민하고 난폭해진 개를 치료하는 방법은 끌어안고 비비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데리고 나가 운동을 시키는 것이다. 개는 개의 방식으로 사랑해야 한다. 강형욱 씨는 최근 ‘당신은 개를 키우면 안 된다’는 제목의 반려견 교육서에서 ‘가지고 논다’는 의미의 ‘애완견’이라는 말부터 사용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친구이고 가족이라면, 강아지를 혼자 울타리 안에 가둬놓고 재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목에 줄을 매어 평생을 묶어 놓지도 않을 것입니다. 아파트로 이사 간다고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 강아지는 당신을 친구로 생각하는데, 왜 당신은 자신의 외로움을 해소하고, 과시욕을 채우기 위해 강아지를 키우려 하나요? 강아지를 왜 자녀의 장난감으로 키우려고 하나요? 혹시 이 글을 읽고도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개를 키우면 안 됩니다.”


비단 개뿐이랴. 고양이, 토끼, 새, 햄스터 등등 애완이라는 이유로 사람과 함께 살게 된 모든 생명체가 여기에 해당된다. 뜨끔하다. 나는 결코 좋은 ‘엄마’가 아니었음을 반성한다.


김현미 출판국 전략기획팀장


http://news.donga.com/3/all/20140613/64226171/1



Posted by 겟업
2014. 9. 14. 10:38

“사저에 살며 슈퍼마켓서 장보는 메르켈… 리더십 비결은 경청”

3개월간 독일 체류를 마치고 최근 귀국한 김종인 전 새누리당 국민행복위원장. 이승만 정권 때인 자유당 시절부터 한국 정치를 체험하고 지켜봐 온 그는 유럽 경제와 역사를 종횡무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으로 독일의 성공 비결과 한국 정치에 던지는 시사점을 설명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김종인 전 새누리당 국민행복위원장(74)이 3개월간 독일 체류를 마치고 귀국했다는 소식에 안부인사 겸 사무실을 찾았다. 그는 훔볼트 재단 초청으로 독일 6대 싱크 탱크 중 하나인 에센 RWI (Rheinisch-Westfalisches Institut fur Wirtschaftsforschung)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독일 내 지식인 정치인들을 두루 만났다고 한다. 통일 이후, 또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탄탄한 경제성장을 하고 있는 독일의 성공비결을 찾으려 인생의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연구에 몰두했다고 한다.

당초 인터뷰 계획은 없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듣는 독일이야기는 세월호 이후 국가개조가 논의되는 마당에 의미 있는 시사점이 있었다. 인터뷰는 민감한 정치현안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하고 어렵사리 이뤄졌다. 사무실을 다시 찾은 건 22일이었다.

―직접 가서 본 독일 분위기는 어땠나.

“사회가 상당히 변했다는 걸 느꼈다. 국민들이 자신감에 충만해 있었다. 국민 82%가 현 상황에 만족한다고 하더라. 그럴 만도 한 것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전 세계에서 정부 부채가 줄어든 유일한 나라 아닌가. 올해 성장률도 2%가량 된다고 한다. 거리에 노인들이 많이 보였는데 다들 행복해 보였다. 카페에서 커피 마시고 주말 되면 여행 다니고 이런 게 진짜 복지사회구나 느껴졌다. 결국 한 나라의 발전이라는 것은 적당히 무슨 조치를 취한다고 되는 건 아니고 조금 비난을 받더라도 자신들의 특성을 살리면서 가는 거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독일이 비난을 받았다는 뜻인가.

“독일과 일본은 2차 대전 패전국이면서도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한 나라들로 주목받았지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본 모델이 더 주목을 받았다. 독일은 1990년 갑작스러운 통일로 휘청거리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 독일 모델은 끝났고 더이상 경쟁력이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지금은 어떤가. 일본이 1993년 이후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반면 독일은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나라가 되지 않았나.”

―비결은 뭐라고 보나.

“독일인들 스스로 말하듯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 질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독일인들도 자신들의 시스템이 과연 옳은 건지 회의한 적이 있는데 역시 옳았다고 자평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사회적 시장경제’란?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사회주의냐’고 묻는데 아니다. 자본주의를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다. ‘사회적’이라는 말은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에 정부가 개입한다는 뜻이다. 독일이 성공한 것은 경제 자체의 효율과 사회 각 분야의 질서가 서로 맞물려 통제와 감시 시스템이 가장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기업이나 근로자 같은 경제 주체들이 시장에서 탈락을 해도 또 다른 제도를 통해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회나 체제에 대한 불만이 적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정부가 개입하는 분야라고 하면?

“공정한 거래확립, 세금 노동 사회안전망 이런 거다. 시장은 내버려두면 약자는 죽어버리고 비사회적으로 가게 되어 있다. 이것을 어떻게 막고 사회적으로 조화시키느냐 이게 소셜(social·사회적)이란 말에 포함된다. 자본주의체제는 기본적으로 탐욕이 작동할 수밖에 없다. 탐욕에는 끝이 없다. 2008년 금융위기란 것도 1999년 클린턴 정부가 금융 규제를 다 풀어 버리는 바람에 시장을 통제하지 못한 데서 온 거 아닌가.”

그는 “무엇보다 독일의 시장경제가 안정화된 데에는 사법부, 학계, 언론 역할이 컸다”는 말도 했다.

“독일 경제학자 뢰프케가 ‘나라가 잘 되려면 법관 기자 대학교수가 제 기능을 해야 한다’고 했다. 독일은 헌법재판소 판결이 나오면 무조건 승복한다. 언론의 감시기능도 엄청나다. 독일인들 스스로 사회 곳곳을 파헤치는 언론의 탐사보도 노력이 민주적인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최근 총리 후보로 유력했던 국방장관이 표절에 걸려 정치적으로 매장됐다. 우리로 치면 7, 8년 가까이 교육부 장관 하던 사람도 표절 사실이 나오자 즉시 물러났다. 대통령도 두 사람이나 임기 중에 물러났다. 한 사람은 사소한 말실수로, 또 한 사람은 대통령 되기 이전에 금융기관 친구를 통해 싼 이자로 대출받은 게 보도됐다. 낙마한 사람들에 대해 국민들이 애석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잘못이 있으면 물러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메르켈 총리는 정말 존경받는 지도자인가.

“국민 신뢰가 대단했다. 지금 59세인데 이런 상태로 가면 총리를 한 번 더 하지 않을까 그럴 가능성까지 보였다.”

―메르켈 리더십의 장점은 뭐라고 생각하나.

“그는 엄청나게 이야기를 많이 듣는 사람이다. 최종 판단능력이 탁월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안에 대해 결정을 내리기 전에 많은 사람들 의견을 듣는다. 독일 친구 중에 터키 출신 언론인이 있었는데 ‘메르켈을 세 번 만났다’고 하면서 굉장히 겸손한 사람이라고 전하더라. 총리가 터키 전문가를 찾다가 내 친구를 찾았다면서 자신이 동독에서 35년 살다온 사람이라 잘 모르니 상세한 이야기를 해 달라고 세 번이나 단독면담을 청했다는 거다. 최근 의사결정에서 매우 인상적인 건 원자력 발전소 폐기 정책이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독일이 이 정책을 관철시켰는데 오죽하면 ‘원전 폐기하려면 메르켈에게 물어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메르켈은 환경부 장관 4년을 하면서 환경운동가들 이야기를 오랫동안 다 듣고 있었고 후쿠시마 사태가 나자 바로 결심을 해버렸다. 이후 대체 에너지 개발 정책도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북해의 풍력에너지로 만든 전기를 남쪽 지방까지 끌어오는 과정에서 고압선이 지나가는 지역 내 반대 여론이 비등했다. 하지만 그 어려운 문제도 최근 합의될 것 같은 분위기이다. 메르켈은 어떤 정책을 내놓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의견을 듣고 방향이 서면 국민들을 오랜 시간 설득한다.”

김 전 위원장은 “지금 독일 사회의 성공은 개방성에서 나온다고 본다”면서 “현재 총리와 대통령이 모두 동독 출신인데 우리로 치면 통일 후 북한 출신이 대통령도 하고 총리도 하는 셈”이라고 했다.

―메르켈 리더십을 흔히 ‘무티(엄마)’ 리더십이라고도 하던데….

“실제로 독일 국민들은 메르켈을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관저에 살지 않고 사저에서 남편하고 산다. 슈퍼마켓에서 스스럼없이 장도 보는 모습이 공개되는데 이걸 보는 국민들이 친근하게 생각한다. 사실 메르켈 집권 후 독일은 뭐가 잘못되어 가는 게 없다. 축구까지 잘한다(웃음). 총리 머릿속이 요즘 우크라이나 사태 때문에 복잡하다. 또 유럽연합(EU) 집행부를 새로 뽑고 있어 굉장히 바쁜 시기인데도 일부러 축구 경기에 가서 선수들과 어깨동무하고 사진 찍는다. 이런 게 독일 국민들을 흐뭇하게 하고 호감을 주는 것 같다.”

그는 “총리 보좌 그룹 중에 현자(賢者)들의 모임이란 게 있다”면서 “내가 있던 연구소 소장이 그 모임 의장인데 메르켈은 참석자들마다 제각각 다른 의견들을 모두 들은 뒤 ‘국민의 뜻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는 거 아니냐’라고 말한다고 한다. 정치라는 건 그런 것”이라고 했다.

―무조건 국민 뜻을 따른다면 포퓰리즘 아닌가.

“포퓰리즘이 아니라 그게 현실정치의 속성이다. 이 글로벌한 시대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할 점은 지금이 지식정보사회라는 거다. 국민들이 모든 걸 다 알고 있다. 핸드폰 하나만 있으면 정보가 무제한으로 유통된다. 교육수준도 굉장히 높아졌고 국민 대다수가 비판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런 국민들을 상대로 과장하거나 뭔가를 연출하려 한다거나 통제하려 한다면 먹히지 않는다. 늘 이야기하지만 선거를 했으면 표심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

내친 김에 국내 정치 문제로 질문을 삼았다. 그는 새누리당 정강정책을 만들고 박근혜 정부를 탄생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생각에서인지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이나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대한 즉답을 내놓는 것을 꺼렸다. 

“이번 6·4지방선거는 누가 이긴 건가”라고 묻자 독일을 언급하며 국내 역대 선거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원칙과 신뢰 강조한 朴대통령 경제민주화 약속 믿었지만 선거 끝나고 사라져▼

“독일 정치인들은 선거가 끝나면 승패 분석을 철저히 한다. 집권 세력이 되면 자기네들이 어떻게 해서 집권하게 되었느냐에 대한 성찰을 끊임없이 한다. 우리 역대 선거도 찬찬히 뜯어보면 민심의 뜻과 이후 정국의 향배를 알 수 있다. 단적으로 1958년, 1971년, 1978년, 1985년 선거를 보면 서울 표심이 정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958년 서울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자유당이 한 석 빼고 전멸했다. 겁이 나니까 다음 대선에서 부정선거 기획을 한 거다. 그게 4·19로 연결됐다. 71년 선거 때도 서울에서 한 석 빼고 다 전멸했는데 그 결과가 유신이었다. 78년 선거 때에도 서울에서 (여당이) 참패하고 전국적으로는 1.1%포인트 차로 졌다. 그런데도 표심을 읽지 못하다 결국 79년 일이 벌어졌다. 85년에는 생긴 지 2주일밖에 안 된 야당(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당시 여당인 민정당이 전멸했다. 결국 87년 민주항쟁이 나온 거 아닌가. 민주사회에서 선거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집권을 할 수가 없다.”

―이번 6·4선거도 엄중한 시그널인가.

“나는 그렇게 본다. 여야가 영호남에서 이긴 것은 원래 지역표이고 서울과 충청권 표심이 야로 돌아섰다는 게 굉장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관피아 척결에 대한 이야기도 많다.

“문제를 발생시킨 사람들한테 해결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이다.”

―그렇다고 다 나가라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결국 정치시스템 자체가 변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 지금 세월호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세상이 뒤집어진 것 같지만 사실 역대 대통령 모두 당선이 되면 구름 위로 올라간다. 황홀경을 느끼며 1, 2년을 헛되이 보내기 십상인데 이번 일이 구름을 빨리 걷게 해 상황인식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동안의 적폐를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방법이 중요하다.”

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말을 끊었다가 “내가 경제 민주화를 주창한 이유가 뭔지 아느냐”고 되물었다.

“재벌을 해체하자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 질서를 제대로 만들어 놓지 않으면 다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근원적인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우리 재계(財界)는 너무 힘이 세니까 내부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만들자고 했던 거다. 이런 방식으로 가다가는 관(官) 주도와 정경유착으로 오랜 불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 모델로 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어떻든, 일본은 왜 지금 이 모양이고 독일은 승승장구하는지 그걸 알아보고 싶어 독일에도 갔던 거다.”

―총리 후보로도 거론되었다.

“내가 새누리당 정강정책을 새로 쓴 사람이고 거기에 경제 민주화와 복지가 들어간 거 아닌가. 박 대통령은 선거에서 그걸 내걸어 다수당이 됐고 대통령이 됐다. 평소 원칙과 신뢰를 강조해온 대통령이 그걸 꼭 지키리라 믿었다. 하지만 선거 끝나고 경제 민주화는 사라졌다. (이 정부에) 마음 떠난 지 오래다.”

―문창극 총리 후보 문제로 시끄럽다. 총리의 역할은 뭔가.

“우리 같은 대통령제하에서는 한마디로 역할이 거의 없다. 대통령을 대신해 국회에 가서 답변하는 것 외에 실질적인 권한이 없다는 뜻이다. 역사를 보면 총리제도라는 게 우습게 도입이 됐다. 내각책임제를 하려다 갑자기 대통령제로 바뀌었는데 어정쩡하게 총리 자리는 그대로 둔 거다. 이승만 대통령은 말년에 총리를 임명조차 안 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뒤에 내가 어느 인터뷰에서 총리의 자격조건을 말한 적이 있다. ‘대통령보다 잘나서도, 지식이 많아서도 안 되고 잘생겨서도 안 된다’(웃음)는 거다.”

―총리 인선에 너무 무게를 두지 말라는 건가.

“상징적인 의미만 있기 때문에 누가 되든 대세에 지장이 없다. 책임총리 운운하는데 헌법에 그런 조항이 없는데 어떻게 책임을 지나.”

―문 총리 후보는 사퇴해야 하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된다. 거듭 말하지만 지식정보사회라고 말만 하지 말고 거기에 따라서 행동을 해야 한다. 글로벌 환경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처신해야 하는지는 본인이 잘 알 것 아닌가.”

―새누리당을 떠난 뒤 대통령은 만났나.

“내가 3월 1일에 독일에 왔는데 국빈자격으로 대통령이 방독했던 3월 26일 나는 독일 외교부 초청으로 독일 대통령 주최 오찬장에서 뵈었다. 사람들이 많아 그냥 인사 정도만 나누었다. 그렇게 말고는 만난 적은 없다.”


―대통령이 되고 난 뒤 전화는 한 적 없나.


“없다.”

허문명 기자


http://news.donga.com/3/all/20140623/645489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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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4. 10:28

"우리는 흥부와 놀부, 콩쥐와 팥쥐 사회에 갇혀 있는 것 같다."

몇 년 전 어떤 사석에서 들었던 얘기다. 흥부와 놀부의 사회란 어떤 것일까. 매사를 선(善)과 악(惡)의 이분법으로 보는 시각을 말한다. 사람을 볼 때도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나누어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세상이 그럴까. 우리 주변에서 어떤 때는 착한 사람이다가 어떤 때는 나쁜 사람인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서양 사회는 사람관(觀)이 우리와는 좀 다른 것 같다. 야누스나 '지킬 앤드 하이드'의 사회란 생각이다. 로마신화에 나오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나 학식이 높고 자비심이 많은 지킬 박사가 때로는 추악한 하이드로 변신한다는 '지킬 앤드 하이드'에 익숙한 문화다. 이런 시각은 인간은 선·악이란 두 가지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양면성(兩面性)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살다 보면 나 스스로가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으로 결정돼 있는 게 아니라 선택과 결정의 순간마다 자신의 내부에 있는 선과 악이 충돌한다는 사실을 느끼게 마련이다. 더욱이 그렇게 선과 악이 충돌한 결과는 100대0이 아니라 51대49인 경우가 더 많다. 간발의 차이로 때로는 옳은 일을 하고, 때로는 나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판단과 선택을 좌우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때로는 내가 배운 교양과 지식일 때도 있고, 때로는 종교적 신념, 때로는 사회적 규율과 시스템이다. 우리 사회가 한발 더 나아가려면 세상을 '지킬 앤드 하이드'로 보는 시각을 흡수해야 한다. 그래야 관용도, 포용도, 소통도 생기는 것이다.

'흥부와 놀부 사회'에 대한 얘기를 하던 시점은 광우병 사태가 막 진정될 무렵이었다. 당시 우리 사회는 '광우병에 걸린 소를 국민에게 먹이려는 대통령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 대(對) '이를 반대하는 세력'이 '전쟁'을 치른 직후였다. '어떤 대통령이 온 국민을 죽일 광우병 소를 수입하겠느냐. 이건 야당과 좌파의 대선 불복 운동이다'는 시각과 '미국과 FTA를 체결하려고 국민 건강을 팔아먹었다'는 주장이 맞붙었다. 광우병 사태는 매사를 선과 악으로 나눠 봐야 직성이 풀리는 흥부·놀부 사회에서나 가능한 소모전이었다.

세상을 이분법으로 보면 명쾌해 보이고, 단순해 보이고, 후련하다. 그런데 그런 시각으로는 세상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지금 세월호 참사를 되새기며 각종 대책을 고민 중이다. 그런데 고민의 무게중심은 여전히 흥부와 놀부를 찾아내서 규정하는 데 있는 듯하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왜 세월호를 책임져야 할 선원들의 내면에서, 또 화물을 적정량 실었는지 따져야 할 한국선급 직원들의 마음에서 흥부 대신 놀부가 판을 쳤는지 따져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그 자리에 누가 가더라도 흥부가 이길 확률이 더 높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이제 '흥부와 놀부'의 틀을 뛰어넘어야 한다.




이인열 경제부차장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6/10/201406100420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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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4. 10:27

'상놈니제이션'이란 표현을 몇 해 전 어느 교수에게서 들었다. 조선시대 신분이 낮은 이를 낮춰 부르는 '상놈'이란 말과 '근대화'를 뜻하는 영어 '모더니제이션(modernization)'을 더한 조어(造語)다. 한국의 근대화는 한마디로 '상놈화' 과정이라는 과격한 주장이었다. 글이나 논문이 아니라 사석에서 한 말이기에 실명은 밝히지 않는다.

때는 우리 학계에서 근대화 논쟁이 뜨겁던 시기였다. 한편에서는 조선후기에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씨앗이 있었고 근대화로 가는 동력이 있었다는 '자본주의 맹아론' '내재적 발전론'을 주장했다. 이 논의는 일제의 폭압적 수탈로 자주적 근대화의 길이 가로막혔다는 '식민지 수탈론'으로 이어진다. 다른 한편에는 내재적 발전론 및 수탈론을 민족 감정에 호소한 비논리적 담론이라고 비판하면서 통계와 실증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에 비로소 자본주의 경제발전이 이뤄졌다고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있었다. 두 논의를 수렴하면서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식민지 민중이 스스로 참여해 경제성장을 이룬 점을 강조하는 '식민지 근대성' 개념도 나왔다.

이들 근대화 논의는 서로 대척점에 있지만 모두 경제 발전을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놓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덕영 독일 카셀대 강사는 최근 낸 책 '환원 근대'에서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에서는 공히 근대화가 경제 외에도 다양한 삶의 영역을 포괄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고려하기 힘들다"고 비판했다.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원하는 우리 사회 일부 모습은 정신이나 문화 측면에서 '상놈니제이션'이란 표현이 적절하다. 안전에 관계없이 컨테이너 한 개라도 배에 더 싣는 게 이익이라는 인식,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키고도 도망 다니는 행태는 정신의 상놈니제이션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힘들다.

우리들 보통 사람에게도 유사한 인식이 스며들어 있다. 악다구니하며 떼를 쓰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 교차로에서 꼬리물기를 하더라도 나만 지나가면 그뿐이라는 의식 수준은 사소하지만 상놈니제이션의 진행을 보여준다. 체면이 밥 먹여주지 않고, 예의와 염치가 돈이 되지 않는 것이다.

서구의 근대화는 귀족 문화가 확산하면서 교양을 갖춘 시민이 탄생하는 과정이었다. 시민 계층은 근대화를 통해 귀족만 즐기던 모차르트 음악 같은 고급문화를 향유할 수 있게 됐다. 이 과정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 같은 시민 정신이 싹텄다. 반면 우리 근대화는 좋은 의미의 양반 문화마저 전면 부정하고 폄훼했다. '양반'이란 말은 우리 일상용어에서 욕설에 가까운 말이 됐다. 양반이 중요하게 여기던 체면이나 예의·염치는 냉소의 대상이 됐다. 이는 식민지와 전쟁 같은 험한 역사를 거치면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의 놀라운 압축 경제성장은 결코 죄(罪)가 아니다. 다만 의식(衣食)이 족하면 예절(禮節)을 안다고 했다. 이제 정신의 '양반니제이션'이 필요한 때 아니겠는가.


이한수 문화부차장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6/22/201406220247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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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4. 10:25

500년 역사를 지닌 영국의 대표적 공기업 로열메일(Royal Mail)이 여덟 달 전 민영화됐다. 영국 정부는 작년 10월 이 회사 지분 중 60%를 떼서 민간에 팔았다. 남은 지분 40%는 시장 상황을 봐 가면서 전량 매각한다고 한다. 주식 거래 첫날 주가가 정부 매각 가격보다 40% 가까이 급등해 '헐값 매각' 논란이 일었지만, 재정 상황이 어려운 영국 정부는 현금 20억파운드(약 3조5000억원)를 손에 쥐었다.

로열메일은 1516년 헨리 8세의 개인 우편 부서로 출발했다. 1840년 빅토리아 여왕의 얼굴이 새겨진 세계 최초 우표 '페니 블랙'을 발행하는 등 우편 역사의 산 증인이다. 1980년대 40여개 공기업을 민영화했던 대처 전 총리조차 "여왕의 얼굴을 민영화할 준비는 안 됐다"며 로열메일을 민간에 넘기는 건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캐머런 영국 정부는 민영화를 밀어붙였다. 우편 서비스를 공기업이 제공할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인터넷 업체가 제공하는 이메일이 확산되니 편지는 급감했다. 페덱스·DHL 등 다국적 회사들이 택배 시장을 밀고 들어와 무한 경쟁이 불가피해졌다. 독일·오스트리아·벨기에 등이 이미 우정 민영화에 성공한 것도 영국을 자극했다.

그렇다고 영국이 공기업을 없애기만 하는 건 아니다. 민간이 할 수 없는 일은 재정이 어려워도 공기업을 만들어 맡긴다. 재작년 예산 30억파운드를 넣어 출범시킨 '녹색투자은행(Green Investment Bank)'이 대표적이다. 대서양 편서풍으로 바람이 센 영국은 세계 풍력 발전소의 절반이 몰려 있는 풍력 발전 대국이다. 그런데 건설비가 많이 드는 해상(海上) 풍력 발전은 민간자본만으론 건설이 어렵다. 그 틈을 메우기 위해 녹색 투자 전문 공기업을 세웠다. 2010년 총선에서 여야 모두 녹색투자은행 설립을 공약으로 내세워 정치적 갈등도 없었다.

영국에서 이처럼 공기업 세대 교체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 공기업 개혁을 돌아보게 된다. 박근혜 정부는 작년 말부터 공기업 개혁에 '부채 감축' '방만 경영 해소'라는 두 개의 구호를 들고나왔다. 그런데 두 구호 모두 겉핥기에 그치고 있다. 우리 경제에서 지금 시점에 공기업이 할 일이 무엇인지 규정하고, 필요한 공기업은 놔두되 그렇지 않으면 민간에 넘기는 것을 결정하는 '큰 그림 그리기'는 아예 뒷전이다. 변죽만 울리다 보니 공기업 사이에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생각이 팽배하다.

공기업이 할 일은 각 나라가 추구하는 경제 모델과 경제발전 단계에 따라 다를 것이다. 시장주의 전통이 강한 미국·영국에는 공기업이 적지만 그렇지 않은 중국·프랑스·스웨덴 등에는 공기업이 많고 맡은 일도 다양하다. 우리는 경제개발 초기에 민간이 할 일까지 공기업에 맡기다 보니 공기업 과잉이란 지적이 많다. 예컨대 다른 나라에선 토목·건설을 담당하는 토지주택공사(LH) 같은 공룡 공기업은 찾아보기 힘들다.

박근혜 정부 2기 경제팀은 여러 분야의 의견을 모아 공기업 개혁의 '큰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다. 국회도 끌어들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초기엔 공기업 개혁 목소리를 높이다가 후반엔 흐지부지되는 푸닥거리가 이번에도 되풀이될 것이다.


방현철 논설위원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6/16/201406160394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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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4. 10:24

세월호 참사로 공무원 사회의 썩은 속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관료들의 무능과 부패를 새삼 알게 됐다. IMF 외환 위기 때 경제 관료 집단의 신용 등급이 평가절하되더니 이번엔 안전을 책임지는 부처의 공무원들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오죽하면 대통령 입에서 '부처 해체'라는 살벌한 말이 나왔을까.

어디 행정부 공무원뿐인가. 헌법재판관 출신 변호사가 문서를 보려고 남의 사무실에 몰래 들어간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됐다. 대법관을 지낸 변호사가 대법관 시절 재판을 맡았던 사건을 변론하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우리 사회 상층부의 병폐가 무질서하게 폭발하는 요즘이다. 마치 팝콘 냄비 같다. 다음번에 어떤 것이 터질지 모른다. 터질 순서는 알 수 없다. 아직 터지지 않은 것도 있다. 어디서 무슨 일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냄비 속 옥수수 알갱이들은 모두가 열(熱)에 노출돼 있어 언젠가는 터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터질 때마다 그 피해가 아래쪽 국민에게 번진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상층부가 과거보다 더 부패했는가. 그렇지는 않다. 국회의원들이 감옥에 가는 걸 보면 호주머니에 넣은 금액이 과거와는 다르다. 수십억원 하던 뇌물 액수가 최근에는 몇 억원 수준으로 줄었다. 몇 천만원 때문에 의원직을 잃은 사람도 적지 않다.

법관이나 관료들도 주변의 감시 눈초리를 의식하는 센서를 가동하며 몸조심하느라 애를 쓴다. 판사는 이해관계로 얽힐 수 있는 친구들과는 골프도 피하려 한다. 저녁 술자리에 함께 어울렸다가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을까 미리 참석자 명단을 확인하는 관료도 적지 않다. 과거엔 좀체 볼 수 없던 광경이다.

그런데도 왜 법관·검사들의 전관예우가 시빗거리가 되고, 고위 공무원들이 낙하산 인사로 한자리를 차지할 때마다 시끄러운 소음이 발생할까. 왜 백성을 미개하다거나 게으르다고 꼬집은 상류층 인사들의 발언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가. 그 이유는 그냥 시대가 달라졌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선진국이 돼가는 과정이어서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해석도 언뜻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는 지난 20년 사이 새로운 계층이 등장했다. 취업을 포기하거나 취업에 실패한 청년층이 100만명을 넘을 만큼 두꺼워졌다. 비정규직 근로자는 공식적으로도 591만명에 달한다. 엄마 혼자, 아빠 혼자 자식을 키우는 한 부모 가구는 86만명을 헤아린다. 전에는 판자촌, 쪽방촌의 빈곤층이 고민거리였다면 새로운 빈곤층은 우리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있다. 이런 빈곤층 숫자가 늘면서 거대한 하부 계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 숫자는 1000만명을 쉽게 넘고, 넉넉하게 잡으면 5000만명 가운데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비정규직의 평균 임금은 월 146만원 안팎이다. 국가가 정한 최저생계비 163만원보다 낮다. 최저 생계점 이하에서 사는 591만명이 다달이 3억원씩 수입을 올리는 전직 법관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겠는가. 셋집을 구하지 못해 몇 달씩 중개업소를 쫓아다닌 외벌이 엄마가 아들딸을 명문 고교에 넣겠다고 위장 전입한 장관 후보자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는가. 10만명이 넘는 개인 파산자들이, 자녀에게 2억원의 예금을 상속하고서 국회 청문회에 나가는 날 아침에야 마지못해 세금을 내는 고관들을 보며 '뒤늦게라도 세금을 잘 냈다'고 박수를 치겠는가.

이들은 우리 사회의 질서 형성·유지 세력에 저항할 힘도, 정면으로 싸울 힘도 없다. 생각은 자학적(自虐的)일 수밖에 없고, 즉흥적인 반사(反射) 행동에 익숙해져 있다. 이들은 자신의 울분을 풀어줄 정치를 갈망하고 분노를 키우는 정치를 지지한다. 때론 자신들과 같은 언어 코드를 쓰는 정치인이 나타나 '새 정치' 깃발을 흔들면 무한(無限) 신뢰를 보내며 열광하는 것을 우리는 목격했다.

민심은 종종 변덕스럽고 그 실체를 잡기도 힘들다. 그러나 민심이 정치로 흐르는 길목이 막히면 대중은 흥분한다. 성공한 지도자는 이것저것 혼재(混在)돼 있는 민심의 도가니 안에서 부글부글 끓는 유독가스를 적절하게 잘 분출시켜 주고, 때로는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민심을 이끌어가는 흡인력을 발휘한다.

이번 정권이 꽉 막혔다는 말을 듣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관피아' 척결, 전관예우 철폐를 약속하고서도 주요 자리에는 '관피아' 슬하에서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살았거나 전관예우의 혜택 아래서 편안했던 쪽에서 대부분 차출하고 있다. 울분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것도 아니고 같은 언어를 쓰지도 않는다. 민심의 분노 표출에 때맞춰 댓글을 달아주는 민첩함도 없다. 그렇다고 민심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재주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팝콘만 불쑥불쑥 터지는 게 낫다. 팝콘 냄비마저 폭발해 잿더미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송희영 주필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6/13/2014061303970.html?cs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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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4. 10:23

어느날  이코노미스트 특파원 앞에 '전(前)' 이 붙길래 도대체 어느 한국 회사에서 스카웃 했을까, 이제 뭐하나 싶었는데 상당히 궁금했었는데 맥주집이었구나. 전혀 생각지도 못해서 자꾸 웃음이 난다. 대단하다.




[서울에 手製맥주 체인 낸 영국인 대니얼 튜더]


옥스퍼드 나와 스위스은행 근무한 이코노미스트誌 서울특파원 출신

재미로 개업해 대박… 1년만에 6호점 "한국은 밍밍한 대기업 맥주 일색"
'기적 이루고 기쁨 잃은 한국' 책도 내


이 집은 맥주로 승부한다. 대기업이 대량생산한 맥주가 아니라, 이 집만의 제조법으로 만든 수제 맥주다. 종류가 두 가지다. 우선 흰 거품 아래 황금빛 액체가 찰랑대는 '빌스페일에일(Bill's Pale Ale)'이 있다. 키 큰 컵에 꽉 차게 따라주고 5000원 받는다. 더운 날 꿀꺽꿀꺽 들이켜면 혀끝부터 목젖까지 고소한 향이 사르르 번진다.

흑맥주 애호가는 한 잔에 6500원인 '서울크림스타우트(Seoul Cream Stout)'를 찾는다. 보리밭의 흙처럼 검은빛이 감도는데, 쌉쌀하고 향긋하다.

옥호는 '더 부스'. 영국 출신 주인장 대니얼 튜더(Tudor·31)가 작년 5월 한국 친구 두 명과 서울 이태원 경리단길에 처음 열었다. 보름 만에 손님이 꽉 찼다. 강남역에 2호점을 차렸다. 그 집도 히트 쳤다. 내친김에 3·4·5·6호점을 잇달아 냈다. 전부 붐빈다. 올여름 판교에 7호점을 차리려고 준비 중이다.

‘더 부스’주인장 튜더씨가 각종 수제 맥주를 따라 보이고 있다.

‘더 부스’주인장 튜더씨가 각종 수제 맥주를 따라 보이고 있다. 어린 시절 튜더는 공부를 잘했는데 학교는 싫어했다. 눈앞의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이 궁금했다. 그는 스위스은행 다니다 기자가 됐고, 한국에서 기자 하다 맥주 가게를 냈다. 울릉도점까지 여는 게 꿈이다. /이명원 기자



튜더는 2010년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지 특파원으로 서울에 왔다. 왜 돌연 맥주집 주인장으로 돌아섰을까? 튜더가 "저한텐 맥주가 김치"라고 했다. "한국은 어딜 가나 카스 아니면 하이트예요. 전국에 김치가 딱 두 종류뿐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그야, 담가 먹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을 것이다.

"한국 맥주에 불만 있다"

그는 2012년 겨울 이코노미스트에 '먹을거리는 화끈한데 맥주는 따분하다'는 기사를 썼다. 해외에선 동네마다 가게마다 고유 맥주를 만들어 판다. 한국은 규제가 많아 중소 업체가 시장에 뛰어들기 힘들다. "그러니 맥주가 밍밍해요. 북한 대동강맥주만큼도 맛이 없어요." 맥주 회사들은 열 받았겠지만 맥주 동호회 회원들은 "옳소!" 하고 박수 쳤다. 동업하자는 한국 친구가 생겼다. 맥주에 조예 깊은 미국 친구는 공짜로 제조법을 내놨다. 기사 쓰고 반년 뒤 첫 가게를 열었다.

인생 전환점, 2002 월드컵

그때만 해도 '반쯤은 재미'였다. "근데 재미로 계속하기엔 장사가 너무 잘됐어요." 3호점 내면서 이코노미스트에 사표를 냈다. 창업 석 달 만이다.

꼭 돈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보러 처음 한국에 왔다. 옥스퍼드 대학 1학년이었다. "한국 친구가 '아버지가 월드컵 표 사놨다'고 했어요. 독일과 미국 경기를 보려고 친구 4명이 인천공항을 찍고 김해공항에 내려서 울산으로 갔어요. 숙소에 체크인하려는데, TV에서 안정환이 반지에 입 맞추며 잔디밭을 질주했어요. 우와, 로비 전체가…!"

그는 "인생이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고 했다. "한국 오기 전까지 '졸업하고 회계사가 될까, 은행에 갈까' 생각했어요. 갑자기 '꼭 그런 식으로 살 필요 없잖아?' 싶었어요." 인생 최고의 시절을 더 재미있게 보내고 싶었다. 8년 뒤 한국 특파원이 될 기회가 찾아왔다.

마법이 가신 한국

옥스퍼드를 졸업하고 맨체스터대 경영대학원을 마쳤다. 스위스 유명 투자은행에 1년쯤 근무했다. 재미없었다. 한참 좀이 쑤실 때, 대학원 시절 인턴으로 일했던 이코노미스트에서 연락이 왔다. "서울 특파원이 관뒀는데 가겠느냐?"고 했다. 두말없이 짐 싸서 한국에 왔다.

이후 한국 생활이 꼭 매력적이기만 했던 건 아니다. 튜더는 지난해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라는 책을 썼다. 2002년 처음 겪은 한국은 나라 전체가 활기차고 따뜻했다. "마법 같았죠." 한·일 월드컵이라는 마법은 풀린 지 오래됐다. 깊이 들여다본 한국은 "만사에 경쟁이 심해 승자(勝者)조차 녹초가 되는 나라"였다.

누가 진짜 승자일까

튜더가 "제가 만난 한국인 중에 정말 행복한 사람은 서울대 나와서 삼성전자 다니는 분들이 아니었다"고 했다. 아나운서 관두고 여행 다니는 사람, 홍대 앞 인디 뮤지션, 경리단길에 타이 음식점 차려서 '맛집' 소리 듣는 사람…. 요컨대 "남들이 가라는 길로 안 가고 역주행한 사람들"이 신나 보였다. "금융 상품 거래할 땐 내가 뭔가를 사고판다는 실감이 없었어요. 맥줏집은 달라요. 눈에 보이는 뭔가를 만들어 내요. 대기업이 못하는 장사가 반드시 있어요. 제 가게도 그중 하나죠."

영국에서 어머니 크리스틴(66)이 전화로 "외아들이 한국에 가겠다고 하길래 울었지만, 자주 못 보는 게 섭섭할 뿐 '명문대 나왔으니 큰 회사 다니지…' 소리는 안 해봤다"고 했다. "남이야 뭐라건 스스로 '잘 살았다'고 느끼면 성공 아니겠어요? 그리고 걘 어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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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4. 9. 14. 10:17

곡절과 드라마로 대통령 된 이들
'내가 결국 옳았다'는 강한 확신 갖게 돼
확신이 강할수록 해저드는 깊어진다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를 보면서 과거 청와대에서 일했던 한 사람의 얘기가 생각났다. "프레지던트 해저드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대통령들이 빠지기 쉬운 위험이나 함정이다. 대통령은 오랜 기간 온갖 곡절을 겪은 끝에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렇게 대통령이라는 최고위직에 오르고 나면 자기가 살아오면서 내렸던 수많은 결정이 전부 옳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런 착각에 빠지게 되면 그다음부터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판단이 우습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대통령이란 위세 때문에 아무도 제동을 걸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이 대통령 해저드 때문에 잘못되거나 곤란을 겪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대통령 해저드가 가장 심각했던 경우는 극적인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었다. 김영삼·김대중·이명박 전 대통령이 그랬다. 이들에게 '결국 내가 맞았고, 내가 옳았다'는 이 확신은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정신적 기둥이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한 여당 의원이 '김대중·김종필 연합'이 이뤄질 것이란 중요한 정보를 보고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정치 9단이다. 턱도 없는 얘기다. 절대 안 되니 걱정 말라"고 했다. 채 한 달도 안 돼 김대중·김종필 연대가 발표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서해에서 북의 기습으로 우리 참수리정이 침몰하고 장병들이 전사한 다음 날 일본으로 월드컵 축구 구경을 가는 정말 놀라운 결정을 내렸다. 이 역시 전형적인 대통령 해저드 사례다. 이명박 대통령이 경제 관료들에게 "당신이 경제에 대해 뭘 알아"라고 했다는 얘기도 전해져 오고 있다.

이들의 이런 확신이 결국 임기 후반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반대로 정통성이 없거나 약했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상대적으로 이런 확신이 크지 않았다. 전 대통령 시절에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물가 안정을 이룩하고, 노 대통령이 북방 정책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이들이 대통령 해저드에 덜 빠져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내가 다 옳았다'는 확신을 가질 경험 자체가 적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의 지혜를 모으고 그들에게 권한을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대통령 해저드에 빠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실수가 인사다. '내가 했던 사람에 대한 평가가 결국 옳았다'는 생각이, 대통령도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에 대한 편견을 극대화한다. 그래서 대통령 해저드에 빠진 사람들의 인사를 보면 중소기업 경영자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있다.

박 대통령이 당선 후 처음 한 조각(組閣) 인사는 뭐라고 평가하기도 어려웠다. 저 사람이 대체 누구고, 왜 저 자리에 가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었다. 여당 의원 상당수가 비슷한 생각을 토로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그래도 대통령 생각은 달랐을 것이다. '선거 때마다 내가 내린 많은 결정에 대해 얼마나 반대가 많았나. 이렇게 하면 진다고 난리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내 생각대로 한 선거에서 전부 다 이겼다. 이번에도 내 소신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 아마도 이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말 몇 마디를 갖고, 그것도 전체 배경을 무시한 채 무조건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본뜻이 우리나라가 잘돼야 한다는 충정이라면 이해할 수도 있다. 문 후보의 과거 언사보다는 인선 자체가 시의적절했느냐는 아쉬움이 남는다. 예상치 못한 의외의 인물을 발탁할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는 국민에게 주는 '신선한 충격'이다. 이번에 그런 신선한 충격이 일었을까. 발표된 뒤 사람들이 보내온 질문 대다수는 "이분이 누구냐"고 묻는 것이었다.

지금은 비극적 사건 이후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져야 할 때다. 더구나 행정 조직의 대대적 개편을 앞두고 있다. 이런 때에 국민 대부분이 잘 모르고 고개를 갸우뚱거려야 하는 인선을 해야 했느냐는 생각이 든다. 연이어 청와대를 친박 인물들로 채우는 것을 보면서 '이것은 해저드다'고 믿게 됐다. '받아쓰기'에 대한 비판이 많은데도 대통령이 받아쓰기를 중단시키지 않는 것을 보면서 '대통령 지시를 받아쓰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는 확신을 느꼈다. 모두 대통령 해저드의 현상이다.

박 대통령은 지방선거에서 참패할 것이란 일반적 예상과 달리 여당이 그런대로 선전한 결과를 보고 또 한 번 자신의 확신을 다졌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박 대통령은 지금까지 많은 경우 옳은 판단을 해왔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대통령이 되기 전과 대통령이 된 후의 판단 기준이 같을 수도 없다. 박 대통령은 드라마 같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대통령까지 됐다. 이런 사람의 자기 확신은 스스로 거의 '운명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강력할 수 있다. 확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해저드는 더 깊어진다. 대통령이 해저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모두가 보게 되는 그때를 '레임덕'이라고 부른다.

양상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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