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15. 19:23

사주와 자미두수에 통달한 젊은 친구가 있다. 이 친구가 말하기를 운명이란 결정돼 있는 게 아니라 본인의 성향과 태도가 만들어가는 것이란다.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은 인생도 그 방향으로 풀리고, 매사 근심하고 비관적인 사람은 또 인생이 그 방향으로 풀린단다. 운명이란 이렇게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 주말 대한민국은 인구 5000만 명 시대를 열었다. 6년 전 추계에선 이 숫자에 우리나라는 도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극적인 반전에 이골이 난 우리 국민은 드디어 인구 문제에서도 ‘반전 드라마’를 써냈다.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인가. 그런데 기쁨의 말은 짧고, 근심과 우려의 소리는 길다. 일부 매체는 인구 재앙을 경고하기도 한다. 개인의 운명도 그럴진대 나라의 좋은 일 앞에서 걱정하는 한숨 소리가 기니 불길한 생각이 든다. 하지만 바로 우리가 당면한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 때문이니 딱히 책할 수도 없다. 게다가 우리와 똑같은 길을 앞서 걸었던 옆 나라 일본의 우울한 현실이 눈앞에 보이니 가위눌리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처방은 하나다. 고령인구 증가는 예방할 수 없으니 저출산을 해소하는 것뿐. 이에 정부가 ‘낳기만 하면 키워주겠다’며 꼬인다. 하지만 출산율의 극적인 반전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기르기 어렵고, 교육시키기 어렵고, 경쟁이 치열해 살아가기 어렵다는 이유를 든다. 그러면 언제는 우리나라가 극성맞지 않았으며, 이 문제가 쉬웠던 적이 있었던가.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을 느닷없이 원인이라 들이대는 건 좀 그렇다. 이유는 아이 때문이 아니라 여성들이 변했기 때문이다.

요즘 여성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현모양처’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 사회에서 자기 이름으로 독립해 살아가는 ‘알파우먼’을 지향하고, 그렇게 교육받고 자란다. 사회 시스템도 양성평등을 향해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회생활의 ‘스텝’을 꼬이게 하는 게 바로 아이 문제다. 아직도 여성은 아이가 있으면 일이냐 아이냐 선택을 강요받는 순간이 온다.


내 경우엔 아이가 서너 살 때, 우리 할머니가 아이 봐줄 다른 사람을 구하라고 한 적이 있다. 그 순간 내 결정은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거였다. ‘언론 창달’이니 ‘사회 정의 실현’이니 하는 꿈은 아이에게 닥칠지 모를 불안한 현실보다 크지 않았다. 결국 그때 할머니가 물러서셨지만, 이렇게 여자는 엄마가 되면 아이를 선택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사회에 나오려면 경력 단절 때문에 힘들고, 육아휴직 쓰고 나면 동료들보다 뒤처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 아이 맡기고 일하러 나가는 엄마들을 여전히 ‘나쁜 엄마’로 보는 시선 때문에 주눅이 든다.


그러니 알파우먼을 지향하는 여성에게 엄마가 될 것인가, 일을 할 것인가를 선택하라면 아예 사전에 고민을 차단하고 일을 선택하는 것이 영리한 행동이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늘리고, 일부 보육부담을 덜어주는 모성보호 정책 정도로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에 최근엔 나라마다 ‘일·가정 양립 정책’을 추진한다. 그 핵심은 바로 ‘아빠의 육아 책임’을 강화하는 것이다. 우리 정부도 지난해부터 전국건강가정지원센터에서 아버지교육을 실시하고, 100인의 아빠단을 만들고, 아빠육아정보를 배포하는 등의 사업을 시작했다. 또 이 계획에 기업도 참여시키려고 나섰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턱도 없다는 건 이미 선진국에서 입증했다. 스웨덴도 1974년부터 급여의 90%를 주며 아빠 육아휴직을 권했으나 별 진전이 없어 95년부터 강제휴직을 실시했다. 그 후 남녀의 사회적 육아부담이 같아지면서 출산율이 점차 늘어 지금 1.95명까지 회복됐다는 것이다. 아이로 인한 육아휴직·경력단절 등이 남녀 공히 같아 여성만 특별히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생기고, 사회가 이 비용을 분담할 때까지 ‘과격하게’ 추진해야만 저출산은 극복될 거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노력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한다면 또 한번의 반전 드라마를 쓰며 우리 미래도 그런 방향으로 풀리지 않을까.



양선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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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2. 8. 15. 19:17

‘빨리빨리’ 문화가 몸에 밴 한국인에게 30년, 50년 앞의 비전을 얘기하는 것은 수술이 급한 환자에게 예방의학 강의하는 격이다. 뜬구름 잡는 얘기로 들리기 쉽다. 하지만 비전은 나침반이고, 성급할수록 더욱 중요하다. 대권을 꿈꾸는 지도자들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을 요구하는 까닭이다. 탈(脫)분단에 이어 두 번째로 주문하고 싶은 비전은 탈탄소다. ‘자체발광 녹색 대한민국’을 위한 ‘굿바이 CO2’의 비전을 보고 싶다.


프랑스의 항공기술자인 루이 블레리오가 25마력짜리 단발엔진이 달린 프로펠러기를 타고 최초로 영불해협 횡단에 성공한 것은 1909년 7월이었다. 그로부터 약 100년 후인 지난 5일,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탐험가인 베르트랑 피카르는 태양광 비행기를 몰고 처음으로 지브롤터 해협을 횡단했다. 60m가 넘는 긴 날개에 달린 1만2000개의 전지판에서 생산된 태양광 에너지로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모로코 수도 라바트까지 768㎞를 날아갔다. 같은 날 미국 보잉사는 액체수소연료로 움직이는 무인항공기 비행 실험에 성공했다.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탄소 제로’가 두 비행체의 공통점이다.

파리시는 전기자동차 공공 대여 서비스인 ‘오토리브(Autolib)’를 시범운영 중이다. 파리와 인근에 설치된 1100개 충전소에서 자전거 빌리듯이 전기차를 빌려 타고 가까운 충전소에 반납하는 시스템이다. 파리시는 현재 1700대인 오토리브의 전기차 수를 올 연말까지 3000대로 늘릴 계획이다. 전기배터리나 수소연료전지를 사용하는 친환경 무공해 차량 개발과 시장 선점에 세계 자동차업계는 사활을 걸고 있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선 화석연료에서 나오는 온실가스 배출을 최대한 억제하고 줄여야 한다. 더구나 석유와 석탄, 천연가스 같은 화석연료는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화석연료를 태양광, 태양열, 풍력, 수력, 조력, 지열, 바이오매스, 수소연료 등 신재생에너지로 대체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미국의 석학인 제러미 리프킨(펜실베이니아대 워튼 스쿨 교수)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새로운 에너지 체제와 만날 때 경제에 혁명적 변화가 온다고 말한다. 19세기의 1차 산업혁명은 석탄을 사용하는 증기기관이 인쇄술과 결합해 일어났고, 20세기의 2차 산업혁명은 석유를 사용하는 내연기관과 전기·전자 기술이 결합한 결과라는 것이다. 21세기의 3차 산업혁명은 신재생에너지와 인터넷 기술이 결합해 일어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화석연료 에너지를 수직적으로 공급받는 방식에서 신재생에너지를 각자 생산하고 수평적으로 공유하는 방식으로 에너지 체제가 혁명적으로 바뀌면서 경제의 패러다임 자체가 변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부가가치와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것이다.


리프킨은 모든 건물에 신재생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미니 발전소를 설치하고, 에너지 저장 기술을 보급하고, 에너지를 실시간으로 사고팔 수 있는 지능형 전력망(스마트 그리드)을 갖추고, 교통수단을 무공해 차량으로 교체하는 등 몇 가지 조건이 동시에 충족될 때 3차 산업혁명이 본격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대체에너지 분야에서 가장 앞서가고 있는 유럽연합(EU)의 경우 약 40년 후가 될 것으로 리프킨은 내다보고 있다.

 EU는 202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보급과 스마트 그리드 확충에 1조 유로(약 1440조원)를 투입할 계획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경험한 일본의 민주당은 203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보급률을 40%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몽골 고비사막을 태양광 에너지원으로 활용해 동아시아 전력망을 연결하는 ‘아시아 수퍼 그리드’ 구상을 추진 중이다.

 이명박 정부가 저탄소녹색성장을 국가비전으로 제시하고, 녹색성장 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한 것은 평가할 일이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에너지와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 자체를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아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한다는 전략은 국제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4대 강 사업에 들어간 막대한 예산의 일부를 신재생에너지 개발과 보급을 촉진하는 데 썼더라면 녹색성장에 더 기여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리프킨은 한국은 1·2차 산업혁명의 후발주자였지만 3차 산업혁명에선 앞서갈 수 있는 역량과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3면이 바다여서 대체에너지 개발이 용이하고, 조밀한 인구와 세계 최고의 인터넷 보급망은 지능형 전력망 설치에 유리하다. 태양광과 연료전지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력도 갖추고 있다. 한반도를 3차 산업혁명의 발상지로 바꾸는 원대한 비전을 보여줄 지도자는 누구인가.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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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19:09

그러니까 꼭 20년 전이다. 어학연수차 영국 런던에 넉 달 정도 머물렀다. 셋집엔 일본인 3명, 이탈리아인 1명 도합 네 명의 여대생이 살고 있었다. 그중 다니엘라라는 이탈리아 여학생과 친해졌다. 다니엘라는 런던대 SOAS(동양아프리카대)에서 일본문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전공자답게 제법 값나가는 기모노를 갖고 있었고, 두툼한 우키요에(일본 전통화) 화집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집에 세든 이유도 하우스 메이트들이 일본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과연 그 집 문화는 일본이 주도했다. 공용 주방에선 코끼리표 전기밥통으로 밥을 해 다같이 젓가락으로 떠먹었다. 집을 들고 날 때 심심찮게 “다다이마(다녀왔어)” “오카에리(어서 와)” 같은 인사말을 썼다. 다니엘라는 가끔 이렇게 말했다. “선민, 넌 한국인이고 난 이탈리아인인데 우리가 영국에서 일본어로 인사한다는 게 재미있지 않니?” 한국의 멋과 매력을 주장하기엔 나도 우리나라도 힘이 좀 부쳤던 시절이다.

최근 런던올림픽을 겨냥한 한류축제 ‘오색찬란’의 기획자를 인터뷰했다. 영국 주재 한국문화원 전혜정(44) 사업총괄팀장이다. <중앙SUNDAY 6월 24일자 14면> 이 문화원은 지난해 외교통상부의 23개 해외문화원 평가에서 1위를 했다. 한류 관련 사업을 꾸준히 해온 덕분이다. 국내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꽤 알려진 런던 한국영화제는 올해로 7년째다. BBC ‘조너선 로스쇼’로 영국 내 몸값 1, 2위를 달리는 진행자 조너선 로스가 트위터(@wossy)에 “한국영화제에서 영화 ‘아저씨’를 봤는데 정말 재미있더라”고 올릴 정도다.

문화원 안에 콜라텍을 꾸며 K팝을 틀어주는 ‘K팝 나이트’는 첫 회 때 시작 네댓 시간 전부터 인근 트래펄가 광장까지 영국 청소년들이 줄을 길게 늘어설 정도로 성황이었다. 전 팀장에게서 영국 내 한류 얘기를 듣다 보니 20년 전이 떠올랐다. 격세지감이었다. 하지만 만족하긴 이르다. 유럽의 한류, K컬처는 지금부터다. 아이돌 그룹 공연이나 영화제 몇 번, 괜찮은 한국식당 몇 군데론 반짝 인기로 사그라질 가능성이 많다. 한국 문화가 좋다(1단계)-한국이 궁금해진다(2단계)까진 왔지만 20년 전 이탈리아 대학생이 일본에 대해 그랬듯 한국을 공부한다(3단계)로 진화하기까진 갈 길이 멀다.


가령 전 팀장은 “왜 한국 대학들은 영국에 와서 학생을 유치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한국 유학생이 늘어 유럽 내 지한(知韓)파로 발전한다면 그 장기적 효과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나 영화산업·관광산업 등이 커지는 데 비할 바가 아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K팝 기사를 썼고 K팝 블로그를 운영 중인 저널리스트 에드위나 무카사(22)는 올 10월 한국에 휴가를 온다. 2008년 에픽하이의 노래를 듣고 K팝에 빠진 지 4년 만에 1단계에서 3단계 직전까지 진화한 경우다. 무카사 같은 ‘잠재적 지한파’를 어떻게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할까. K컬처의 숙제다.



기선민 중앙SUNDAY 기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6/27/201206270167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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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19:02

갑상선암 수술 급증은 '돈' 때문, 행위별 수가제의 대표적 문제점
의사단체는 공익보다 수익 우선… 포괄수가제, 과잉진료 완화해도
구멍 많고 진료 質 저하 우려… 대결 대신 제대로 된 보완책을

사방이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다는 사람이다. 최근 급증한 갑상선암은 작년에 결국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암이 됐다. 우리나라만의 특이 현상이긴 하나, 우리 체질이 특이해진 것은 아니다. 병이 아니라 시술이 늘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갑상선암을 무리해서 찾거나 서둘러 수술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평생 악화되거나 전이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연구는 천수(天壽)를 누리고 죽은 사람의 36%가 갑상선암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유독 우리나라에서 갑상선 검사를 적극 권하고, 조직검사와 수술을 서둘러 해치우는 것은 돈 때문이다. 갑상선암이 병원 수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면서 시술 의사의 위상도 상승했다. 의사들끼리는 이런 세태를 개탄하지만, 환자들은 암(癌)이라는 말에 놀라서 뭐든 할 수밖에 없다. '공포 마케팅'이다. 건강보험과 개인의 부담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의사가 환자를 통해 사익(私益)을 추구한다는 불신이다.
 
이는 행위별 수가제의 대표적인 문제점이다. 행위별 수가제는 진료 행위별로 비용을 계상해 보험이 상환해준다. 진단과 치료를 같은 사람이 하는데, 치료를 많이 할수록 수익이 증가하니, 부풀리고 늘릴 유인이 내장된다. 그래서 보편적 공보험을 가진 나라치고 우리처럼 행위별 수가제에만 의존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의료 행위를 유사한 것끼리 묶거나(포괄수가제), 전부를 통째로 묶어(총액계약제) 사전에 상환액을 정한다. 어떻게 서비스를 묶어서 관리할지 이견(異見)이 있을 수는 있으나, 행위별 수가제로부터 전환해야 한다는 것에 토를 달기는 어렵다. 이렇게 본다면 현재 포괄수가제를 둘러싼 대립은 의사들의 수익 보전 전략과 대승적 국가 정책의 충돌일 뿐이다.

그런데 그 밑단의 문제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첫째, 의사라는 고학력 지식인 집단이 행위별 수가제의 문제점을 아예 나 몰라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전문가 의식과 단체의 문제이다. 의료만큼 외부인이 통제하기 어려운 분야는 없다. 지식의 특수함과 깊이 때문이다. 그래서 통상 의료인단체는 정부의 정책 파트너이며, 자율적 권위를 갖는다. 의사의 단기적 이해를 대변하는 한편, 국민의 신뢰에 기반한 사회적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윤리와 규율의 문제를 제기하고 자정(自淨)하는 역할도 병행하며 공익(公益)을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의사협회는 사실상 개원의 협회로서, 의원급 수가를 올리고 경영 조건을 유지하는 데 전념해왔다. 국가의 갈 길을 불편부당하게 비추고 의사 윤리를 수호하는 전문가 단체 역할은 실종 상태다. 예를 들어, 의사 개인이 창출한 진료액에 보수를 연동시키는 병원 성과급 구조는 과잉 진료를 증폭시키고 의사의 양심과 부딪친다. 이는 의사 개인이 감당할 싸움이 아니라 전문가 단체와 병원 자본의 싸움이어야 한다. 그러나 의사협회는 이에 대해 침묵해왔다. 반면 의원 수익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만한 정부 정책은 취지 불문하고 극력 반대다.

전문가 의식의 부재는 역사적 경험에 말미암은 것으로 단기간에 해결될 수 없다. 그러나 우선 의사협회는 대학교수와 병·의원 의사 모두의 전문가 의식과 정책적 관심을 모아내고 고양시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전문가 단체가 단기적 이해에 매몰될 때 전문가의 권위는 사라지며, 정책 파트너가 아닌 정책 대상으로 규정될 뿐이다.

둘째, 정부와 의사 단체만의 대결 구도라는 점이다. 이는 정책 과정의 문제다. 포괄수가제는 많은 나라에서 활용하는 제도이지만 전면적 해법은 아니다. 대상 질환의 과잉 진료를 일부 완화할 수는 있으나 적용 대상이 아닌, 예를 들어 갑상선을 뒤져 수술받게 하는 행태는 여전히 걸러지지 않는다. 게다가 피해 나갈 구멍이 많고, 진료의 질 저하도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간 나타난 문제를 보완하고, 향후 정책을 평가하고 환류시킬 구체적 메커니즘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그러니 포괄수가제를 시행할 준비가 되었는지 판단할 근거도, 지지할 근거도 없다.

2000년 도입된 의약분업은 어지간한 나라에 다 있는 제도이다. 그러나 약품으로 의사가 수익을 올리는 구조를 쭉 방치했던 정부가 갑자기 의사를 도둑으로 몰며 과격한 개혁을 밀어붙였고 의사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극단으로 치닫는 싸움으로 누군가는 정치가가 됐고, 누군가는 승진했다. 그러나 이후의 정책 과정은 대립과 충돌뿐이니 국가 차원에서는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니다. 물론 툭하면 총궐기, 수술 거부를 외치는 이들을 상대로 공감의 정책을 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저열한 악순환을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는 먼저 어른스러워져야 한다.


윤희숙 KDI 연구위원 보건복지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6/27/201206270167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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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18:59

수학은 뭐고 수학교육은 뭐지? 의외로 이 둘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이 꽤 된다. 학창시절 미적분의 아픈 추억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한데 더 알아내야 할 수학이 남아 있다고? 유독 수학에서 이런 혼란이 불거지는 걸 보면 ‘초중고교에서 배우는 축적된 수학적 지식을 전수하는 것 말고는 수학자들이 더 할 게 무에 있으랴’라고 식자들조차 단단히 믿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인류의 수학적 지식은 대양의 물 한 방울 같아서 수학자들은 새로운 이해에 다다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수학교육자들은 이렇게 축적된 방대한 수학적 지식을 사회적 문화적 필요에 따라 분류하며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일을 한다. 이런 방식은 수천 년간 지속돼 왔는데 고대 그리스의 철학계보에서는 산술과 기하를 최상위 과목으로 여기고 교육의 중심으로 삼았다. 중세 대학에서는 산술 기하 천문 음악의 상급 네 과목을 가장 중요시했고 2세기경의 중국 책인 구장산술에도 피타고라스정리나 파이 값 계산 등이 나온다.

수학은 그 시대 신념체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 무(無) 또는 공(空)을 뜻하는 ‘0’의 개념을 인류가 찾아내는 데 장구한 시간이 걸렸다. 세는 것과는 다른 수준의 철학적 사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13세기에 와서야 ‘0’의 개념이 소개됐고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6세기 이후다. 선사시대에도 사냥한 짐승을 세는 수의 개념이 있었지만 ‘0’의 개념은 없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쯤에 오면 곱셈을 위한 구구단도 있었고 나일 강의 홍수를 겪으며 측량을 위한 기하학도 발전했지만 여전히 ‘없음’의 개념은 없었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이 산술과 기하를 논했고 2000년 동안 기하학의 핵심이었던 유클리드 기하학이 만들어진 고대 그리스에서도 ‘0’의 개념은 출현하지 않았다. 



반전은 힌두교에 기반을 둔 인도문명에서 일어났다. 인도문명은 무(無)의 개념을 8세기경에 쉽게 발견했고 이를 사용해 인도아라비아 숫자를 만들어냈다. 사실은 인도 숫자인데 이슬람교도에 의해 지중해 지역을 거쳐 유럽으로 전해지는 데 800년 이상 걸린 탓으로 인도아라비아 숫자로 불린다.

‘0’의 출현이 왜 이리 힘들었을까? 힌두 철학은 무의 개념을 쉽게 발견했지만 ‘충만함의 신학’이 유행하던 십자군시대 기독교에서는 ‘비어 있음’의 개념이 설 자리가 없었던 탓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었음에 주목하고 죽음에서 깨어나는’ 신학적 각성과 함께 르네상스시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그리스 및 아랍 문헌 번역작업이 상호작용하면서 ‘0’의 개념은 유럽에 소개되고 받아들여졌다. 이는 철학과 신학의 방향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서양 수학이 ‘0’을 받아들인 지 500년이 지났다. 21세기 수학은 높은 수준의 암호를 만들어 인터넷 상거래를 가능하게 했고 방대한 화상데이터를 압축하는 이론을 만들어내 화상채팅시대도 열었다. 이제 수학은 사유의 도구이면서 기후 예측이나 단백질구조 예측 문제에 답을 주고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도 한다. 이미 만들어진 수학적 지식의 전수 및 교육뿐만 아니라 날마다 새로 출현하는 문제를 수학적으로 모델링하고 답하는 게 국가경쟁력의 척도가 됐고 수학 연구와 수학교육이 같이 가야만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전 세계 4000여 수학교육자가 참여하는 국제수학교육대회가 곧 서울에서 열린다. 사유의 도구로서 논리적 사고의 형성을 돕는 기능부터 국가경쟁력의 원천으로 첨단 정보기술(IT)과의 융합까지, 방대한 수학교육의 화두를 다루며 한 단계 도약하는 성공적인 대회를 기대한다.

박형주 포스텍 수학과 교수



http://news.donga.com/3/all/20120627/47318632/1

Posted by 겟업
2012. 8. 15. 18:53

외환위기 극복해야 했던 DJ처럼 차기 대통령, 심각한 문제 당면
세계 경제에 산사태 몰려올 것… 성장동력 불씨 살려 반등 대비
경제민주화 수용 범위 결정을… 대기업 현금은 투자로 돌려야


분배와 형평을 중시하는 '대중 참여 경제론'의 이상을 품고 1998년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이 처음 마주한 진실은 한국이라는 나라의 금고에 외화가 불과 39억달러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자연히 그에겐 외환위기 극복이 최우선 과제가 됐다. 침몰해가는 '한국호(號)'를 난파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그는 평생에 걸쳐 정립한 '대중 참여 경제론'을 일정 부분 포기한 채 IMF가 내세운 요구 조건에 순응하며 강도 높은 구조조정 정책을 폈다. 그가 했던 선택 중에는 정말 피하고 싶었을 신자유주의적 선택도 포함돼 있었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든 경제민주화라는 시대의 새로운 요구를 안고 가야 한다는 점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비슷하다. 그가 대통령이 돼 처음 마주할 진실 역시 그때 못지않게 심각할 것이다. 그 진실이란 세계 경제에 산사태가 몰려온다는 점이다. 그래서 위기 극복이 최우선 과제가 될 것이라는 점도 김 전 대통령과 비슷하다. 때로는 정말 피하고 싶을 선택을 해야 한다는 점도 비슷할 것이다.

IMF 외환위기를 겪은 우리는 뒤이어 닥친 위기들에 상대적으로 둔감해졌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위기가 아니고, 5년에 걸쳐 위기가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점도 위기 불감증에 일조한다. 우리는 외환위기를 2년 만에 졸업할 수 있었지만 이번 위기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외환위기가 주변부의 위기였다면,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와 이번 유럽 재정위기는 자본주의 심장부의 위기다. 심장부의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세계 경제질서는 근본적으로 재편될 것이고, 5~10년 동안 세계 경제에 대혼란기가 닥칠 수 있다.

유럽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리스 스페인의 위기를 간신히 땜질로 봉합했을 뿐이다. 유럽의 문제는 보다 근본적이며, 유로존에서 문제국가들이 떨어져 나가는 일대 정치경제적 대혼란을 겪은 뒤에야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할지 모른다. 유럽 사태가 간신히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그다음에는 미국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될 것이다. 미국 역시 리먼 쇼크의 대폭발을 국가 재정과 중앙은행의 발권력으로 간신히 억눌러놓은 데 불과하다. 언젠가 수영장에 물이 빠지면 벌거벗고 헤엄치는 미국의 적나라한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앞으로 닥칠 이런 5~10년의 '마(魔)의 계곡'을 건너 최후의 승자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참고 견디며 일단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성장동력의 불씨를 살려 다음번 반등(反騰)에 대비하는 것이다. 인구 구조의 급격한 노령화로 경제 활력이 떨어지고 청년층과 노년층의 실업률이 함께 치솟는 상황은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새 대통령이 부딪칠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경제민주화의 요구가 봇물처럼 끓어오르는 지금, 그는 공동체와 개인의 갈등을 조율해야 할 과제를 동시에 안게 될 것이다. 그동안 양극화와 경기부진으로 사회적 배려가 필요한 계층이 너무 많아졌고, 이들 개인의 '배당 청구권'을 사회가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다. 그 요구를 어느 선에서 수용할지가 한국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지금은 단기적으로 성장률이 떨어진다고 호들갑 떨 상황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산사태에 대비하는 일이다. 낙오자 대책을 만들고 기업과 공동체의 대타협을 추진하는 한편으로 기업을 다독여 성장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살려야 한다. 우리 경제가 버틸 수 있는 힘의 원천 중 하나는 대기업들이 갖고 있는 막대한 현금이며, 그 돈을 투자로 돌리게 해야 한다. 장기전에는 맷집이 최대의 덕목이다. 그렇게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이미 '20-50' 클럽에 가입한 한국은 세계 경제질서의 재편기에 큰 기회를 잡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지훈 경제부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6/26/20120626030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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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18:49

안데스. 인디언들의 언어인 케추아어로 높은 산마루라는 뜻의 ‘안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남북의 길이 7500㎞, 평균 높이가 4000m에 이르며 6000 m가 넘는 봉우리만 해도 100개가 넘는 광대한 산맥이다.

안데스 험준한 고산지대에서 그들은 갔다. 수자원개발 분야의 베테랑 엔지니어인 그들은 대규모 수력발전소 수주라는 꿈을 앞두고 안데스의 구름과 눈과 바람 등 기상악화 속에서 5000m나 되는 고산에서 산화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육체는 희생되었지만, 인프라 수출을 위해 남미의 고산밀림지대를 누빈 그들의 개척정신과 도전정신은 그대로 남았다.

오늘의 한국 경제를 이룩한 것은 면면히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개척정신과 도전정신이다. 20세기 후반 우리의 선배들은 생존을 위해 해외로 뛰어들어야 했다. 달러를 벌어 국내에 있는 가족들을 먹이고 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해외에 간호사로, 광부로 나갔다. 수출품의 선적기일을 맞추느라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사이 형들과 누나들의 발은 부르트고 손가락의 지문은 문드러졌다. 열사의 중동에서 피땀 흘려 모은 돈으로 대한민국 성장의 초석을 놓았다. 한국인 특유의 배짱과 자신감 하나로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해외건설 프로젝트를 따냈다.

선배들이 만든 수출보국의 전통은 후배들에게로 이어졌다. 선배들이 배짱과 자신감을 가지고 세계를 누볐다면, 후배들은 뛰어난 전문지식과 탄탄한 어학실력을 가지고 세계를 주름잡고 있다. 선배들이 원단과 공산품을 팔았다면, 후배들은 첨단상품과 아이디어와 기술을 팔고 있다. 이번에 희생된 8인의 영웅은 수자원과 토목 분야에서 기술과 경험을 갈고닦은 세계 수준의 전문인력이었다.


댐이나 발전소 건설 등 수자원 관련 공사에는 항상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다. 험한 산속이나 계곡 등 오지의 미개발 지역이나 심지어는 내전으로 치안이 불안한 곳에 건설하기 때문이다. 악착스러운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이 없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세기 후반 우리의 발전을 일구어낸 것은 ‘하면 된다’는 긍정의 정신문화였다. 21세기 글로벌시대는 더 큰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을 필요로 한다.

이곳 페루에서도 우리의 젊은 기업인들은 호흡이 곤란한 5000m 고지에서 광물자원을 캐내고, 높은 파도가 치는 태평양에서 멀미를 참아내며 석유를 뽑아 올리고 있다. 선배들의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이 이미 우리의 DNA로 체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러한 정신이 살아 있는 한 대한민국은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선진국으로 우뚝 설 것이다.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열정과 사명감을 보여주신 8인의 영웅을 널리 기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000m 이상의 안데스 고지에는 콘도르라는 거대한 새가 산다. 잉카인들에게 콘도르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 또는 ‘신들의 뜻을 전하는 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또한 그들은 영웅이 죽으면 콘도르로 부활한다고 믿는다.

콘도르의 자유정신을 표상하여 페루의 작곡가 알로미아 로블레스는 20세기 초 ‘엘 콘도르 파사(El Condor Pasa)’라는 노래를 작곡했다. 이 노래는 다시 사이먼과 가펑클이 편곡, 번안해 불러 세계적인 히트곡이 되었다. 아리랑이 우리에게 갖는 정서적 의미와 비슷하게 인디오의 고난과 한이 서린 구슬픈 음조는 우리의 가슴을 저며온다.

산화하신 8인의 영웅도 콘도르가 되었을까? 너무나 웅장하고 변덕스러운 자연 앞에 스러져간 영혼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콘도르는 오늘도 안데스를 처연히 지키고 있다. 그 콘도르를 보면서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박희권 주 페루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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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18:45

"하면 된다"라는 말은 한국 사회의 정신적 태도를 가장 선명하게 규정하는 말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대담한 정신은 근대화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아 왔고,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하루 종일 서성이고 있다. 우리의 학교와 직장은 여전히 "하면 된다"의 구호로 가득하다. 그 네 글자는 오로지 한국인의 것이다. 어떤 다른 외국어로도 깔끔하게 번역될 수 없고 어떤 다른 외국인들도 그것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뜻을 잘 알고 있다. 그 말은 강한 의지를 가지고 마음을 가다듬어 성실하게 어떤 일에 임하면 세상에 해내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인간 의지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웅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세상의 어느 낙관주의자도 이처럼 확고한 태도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지 못했다. 낙관과 긍정은 우리에게 힘을 불어 넣어준다. 고마운 일이다. 용기를 잃고 낙담할 때 실의에 빠져서 기운을 차리기 어려울 때 옆에서 어떤 이가 진심으로 그 말을 속삭여 준다면 다시 힘을 얻고 일어서려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없지 않다. 이 조건문은, 만일에 의도한대로 세상일이 잘 굴러가지 않았다면 그것은 당신이 진정으로 그것을 욕구하고 그것의 성취를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다는 질책을, 논리적으로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면 된다"라는 한국적 정신의 불편한 점이다. 세상에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일은 너무도 많다. "하면 된다"가 아니고 "해도 잘 안 된다"는 체험이 훨씬 세상의 진실에 가깝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고백하지 않는 삶의 뼈아픈 비밀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너는 마음만 먹으면 잘 할 수 있을 텐데, 왜 노력하지 않는 거니?"라고 묻는다. 물론 아이들의 잠재적 가능성을 누구보다도 믿고 신뢰하는 부모에게 당연한 의문이지만, 이때 우리는 충분히 솔직하지 않다. 능력은 많은 경우 의지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니 참으로 기이한 것은, 우리 사회가 능력에 대해서 보상하고 무능에 대해서 보상하지 않는다는 신념 체계를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점이다. 우리는 한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때는 원칙적으로 그에게 선택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외모나 출신 지역으로 타인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도덕적 신념의 근저에는, 당사자의 의지로 그것들을 바꿀 수 없다는 직관이 놓여 있다. 인생에서의 성취는 많은 경우 본인의 의지와 노력에 비례하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당신이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다. 누구나 어떤 일에 있어서는 남들과 경쟁할 수 있을 정도의 상식적인 능력은 보유하고 있지만 또 다른 어떤 일에 있어서는 자신의 유전자를 원망할 정도의 깊은 좌절감을 느끼곤 하는 것이다. 어떤 위대한 사람도 모든 방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

물론 능력에 따른 보상 그 자체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심지어 도덕적이기까지 하다. 프로 축구팀이 유능한 선수에게 큰 돈을 주고 싶다고 하는데, 거기에 무슨 대단한 잘못이 있겠는가. 문제는 축구 말고도 온갖 종류의 운동경기가 있는데 전국 각지에서 일년 내내 오직 축구 경기만 열린다는 데에 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발로 공을 차서 그물 상자 안에 넣는 그 우스운 동작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래서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이유로 3류 시민의 자리로까지 천천히 떨어지고 있는 중이다. 야구와 배구와 농구와 테니스 경기가 본격적으로 열린다면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이 나서 운동장으로 뛰어나가겠는가. 

완고한 능력주의가 제대로 옹호될 수 있으려면 우리 사회가 개인의 다양한 능력을 온전히 평가하고 그에 보상하는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물론 우리가 투표를 통해 오로지 축구만 잘 하는 사람들을 이 사회의 리더들로 뽑아 놓았으니 이런 억울한 고생을 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기는 하다. 

능력이 없으면 적게 받는 게 당연하다고? 내가 보기에는 미안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썩 능력 있어 보이지 않는다. 무능은 무죄다.



김수영 로도스출판사 대표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6/h2012062521023412176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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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18:41

지난주 유럽 여행에서의 모든 대화는 한 가지 형태의 질문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시대의 도전에 맞서라고 국민을 고무시킬 지도자들이 왜 없다고 느껴질까? 전 세계적인 지도력 부재에 대해 세대의 문제와 기술적인 것에 초점을 맞춰 보자.

기술적인 것부터 보자. 인텔의 공동 창업주인 고든 무어는 마이크로칩의 정보처리 용량이 18개월마다 2배가 된다는 무어의 법칙을 내놓았다. 각자의 위기 해법에 고심하는 유럽, 아랍, 미국의 지도자들을 보면서 무어의 법칙과 같은 정치 법칙이 없을지 궁금해졌다. 정치 지도력의 질적 수준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의 새로운 이용자가 1억 명씩 늘어날 때마다 나빠진다는 것 같은 법칙 말이다.

소셜미디어와 인터넷이 가능한 휴대전화를 통한 세상의 연결은 모든 곳에서 지도자와 피지배자 간 대화의 본질을 변화시키고 있다. 위에서 아래라는 일방 대화에서 위와 아래의 쌍방향 대화로의 변화는 더 많은 참여, 혁신, 투명성 등 많은 긍정적인 면을 갖고 있다. 



대중영합주의, 그것은 우리 시대 최고의 이데올로기다. 여론조사를 읽고, 블로그를 추적하고,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글을 읽고, 사람들이 갈 필요가 있는 곳 대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정확히 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팔로잉’하면 누가 ‘리딩(leading)’하나?

오늘날 휴대전화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파파라치다. 트위터 계정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기자다. 유튜브 액세스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영화제작자다. 남을 찍으려는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공인이다. 호주의 전 외교장관인 알렉산더 다우너는 최근 “많은 지도자는 전보다 더 큰 감시 아래에 있다. 대중으로부터의 조롱과 지속적인 간섭은 지도자들이 합리적이고 용감한 결정을 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고 말했다.

세대교체 문제로 옮겨가 보자. 우리는 미래를 위한 저축과 투자를 신봉하던 위대한 세대로부터 오늘을 위한 대출과 소비를 신봉하는 베이비붐 세대로 옮겨왔다. 이는 조지 W 부시와 그의 아버지 조지 부시로 대비된다. 진주만 공습 직후 자원입대한 아버지 부시는 재정긴축이 필요할 때 세금을 올리는 등 여론에 끌려다니지 않는 정책을 추진하는 냉전시대의 지도자로 단련됐다. 그의 베이비부머 아들은 징병을 기피했고 2개의 전쟁 와중에 세금을 인하한 미국 역사상 첫 번째 대통령이 됐다.

단기간의 빠른 반응과 판단을 촉진하는 기술을 갖고, 단기간의 만족감에 익숙해진 세대 앞에서 국제 금융위기와 실업, 아랍 국가 건설 등 장기적 해법을 필요로 하는 문제를 다룰 때 지도력은 도전과 맞닥뜨리게 된다. 오늘날 지도자들은 국민에게 짐을 나눠주고,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함께 연구하며, 현명하게 일할 것을 요구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는 특별한 지도력이 요구된다.

‘하우(How)’라는 책을 쓴 도브 세이드먼은 “진실보다 더 사람들을 고무시키는 것은 없다”고 주장해왔다.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자신을 취약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생각이다. 그는 “진실 공유는 더 좋은 해결책을 찾아내는 시작”이라고 말했다.

지금 미국, 아랍, 유럽의 지도자들에게서는 이러한 면을 볼 수 없다. 아마도 이들 중 한 명은 진실을 말하고 협조를 요청할 기회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국민이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계획이 필요하고, 더 좋은 길을 가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말하는 지도자라면 가상의 세계가 아닌 실제 ‘팔로어’와 ‘친구’를 얻을 것이다.

토머스 프리드먼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http://news.donga.com/3/all/20120626/47288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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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18:38

최근 빅히트한 문화상품의 하나는 강연 콘텐트다. 다양한 연사들이 각자의 주제를 자유롭게 발표하는 TED의 세계적인 성공 이후 국내에도 유사 포맷이 줄을 잇고 있다. 정치인, 학자, 대중예술인, 유명인들이 강연자로 선다.

토크콘서트, 북콘서트, ‘리빙 라이브러리’ 등 이름도 다양하다. 가령 유력한 대권주자의 하나로 거론되는 안철수 서울대 교수의 오늘이 있기까지, 그가 매번 수천 명의 대학생과 만난 ‘청춘콘서트’를 빼놓을 순 없다.

하버드대 특강을 책으로 펴낸 『정의란 무엇인가』로 돌풍을 일으킨 마이클 샌델 교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출간과 함께 내한해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토론형 공개 강연’을 했다. 무려 1만5000명의 청중이 운집했다. ‘한국형 TED’라 불리는 CBS의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세바시)’은 15분짜리 미니 강연콘텐트로 SNS 등 다양한 미디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5월 명동성당에서 손석희·서경덕 교수 등을 초청해 열린 ‘리빙 라이브러리’도 있다. ‘살아있는 책(사람)’을 ‘대출’해 이야기를 듣는 신개념 기획이다. 2000년 덴마크에서 시작됐고 시민단체나 지자체의 문화행사로도 확산일로다. 유명인뿐 아니라 역경을 이겨낸 일반인, 혹은 사회적 편견에 희생되기 쉬운 소수자들을 ‘살아있는 책’으로 불러내 소통하는 데 방점이 찍혔다.

KBS의 ‘강연 100℃’도 주목받는다. 역시 명사 아닌, 일반인들이 의미 있는 도전과 경험을 펼쳐놓는다. 다양한 사연들이 어눌해도, 감동적으로 전해진다.

이런 강연 콘텐트의 인기는 결국 최고의 콘텐트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또 사람이 최고의 콘텐트가 되려면, 그가 대중에게 들려줄 수 있는 자신만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잘 보여준다.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신간 『3차 산업혁명』에서 새로운 문명과 산업구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쉽게 간파되지 않는 이유로 “경제 쪽에 스토리텔링이 없기 때문”이라고 썼다. 리프킨은 또 오바마 미국 대통령 역시 이미 시작된 3차 산업혁명의 변화를 국가비전과 미래계획으로 담아내는 내러티브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고 진단했다.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라는 책이 있듯이 스토리텔링은 이미 각종 인재 선발 과정에서도 중요 요소로 떠올랐다. 스토리텔링으로 수렴되지 않는 단순한 스펙의 나열은 별 매력이 없다는 뜻이다. “그간 내가 살아온 얘기를 책으로 쓰면 열 권도 부족하다”고 말하던 세대들의 치열한 삶의 경험. 생각해보면 그런 것들이 바로 스토리다. 자신만의 삶을 치열하고 진정성 있게 살아내는 것 말이다.

내가 만약 ‘강연 100℃’ 무대에 선다면, 그것도 각종 사회적 명함을 떼고서 달랑 선다면, 과연 무슨 얘기를 할 것인가? 거기서 자신만의 스토리텔링은 시작될 것이다. 콘텐트로서 자기 가치도 입증될 것이고 말이다.



양성희 스포츠문화 차장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8558314&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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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18:29

특별 좌담 : 보이스톡 서비스 논란


무료 모바일 인터넷 전화(mVoIP)인 보이스톡 등장 이후 후폭풍이 거세다. 망 중립성을 둘러싼 논란도 한창이다. 소비자들은 공짜 서비스에 환호하지만 네트워크 사업자들은 울상이다. 음성 통화로 수익을 내던 비즈니스 모델이 망가진 다며 반발하고 있다. mVoIP가 어디로 가야 할지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보았다.



왼쪽부터 김동주 회장, 김동욱 원장, 이해완 교수.


김동욱 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사회)=mVoIP는 그동안 통신사업자들이 사업 기반으로 삼아온 음성 통화와 겹친다는 점, 그리고 보이스톡을 선보인 카카오톡 가입자가 4000여만 명에 이르러 사실상 보편적 서비스나 다름없다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기존의 통신산업 판도를 뒤흔들 수 있는 근본적인 도전이다. 무료라고 해도 누군가는 비용을 내야 한다. 지금의 요금 구조 아래서는 망 사업자가 부담을 떠안게 된다. 고객에게 추가비용을 요구하면 통신요금이 올라 거부감이 크고, 카카오톡 같은 인터넷의 콘텐트 공급업체에 부담을 지우기도 힘들다.

 김동주 정보통신정책학회장·고려대 교수=기술의 발전은 막을 수 없다. 앞으로 모바일 인터넷 영상 통화 등 다양한 공짜 서비스가 나올 것이다. 이번 충격을 트래픽 급증에 따른 좁은 의미의 ‘망 중립성’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 오히려 그동안 우리가 미국에 빼앗겼던 ‘ICT(정보통신기술) 생태계’를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 하는 보다 큰 차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해완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최근 논란이 경제적 또는 기술적 관점에 치중하고 있는데 현행 법률이 어떻게 돼 있느냐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기통신사업법 50조에 ‘불합리하거나 차별적인 조건 또는 제한을 부당하게 부과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현재 일정 요금제 이하에서 서비스를 차단한다든가 통화품질을 떨어뜨리는 것은 이런 법 정신에 위배된다. 이렇게 되면 법이 아니라 통신사업자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배제와 차별이 있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 회장=현실적으로 지금 이동통신 사업자의 수익 70~80%가 음성통화에서 나온다. 현행 요금 체계는 인터넷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음성 통화에는 높은 요금을 매기고, 콘텐트 사업자에겐 무료로 돼 있다. 인터넷 초창기 때는 이런 시스템이 맞을 수 있다. 하지만 모바일과 인터넷 시장도 성숙한 단계로 진입했다. 음성 통화의 수익으로 인터넷 콘텐트에 보조금을 주는 식의 현재 구도가 지속되기 어렵다. 우리의 네트워크 품질도 지속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망 투자의 부담을 어떻게 분담할지도 생각해야 한다.

김 원장=전기통신사업법 50조를 적용할지는 좀 더 신중히 검토해봐야 한다. 아직 은 인터넷 사업자가 제공하는 무료 통화서비스는 서비스품질(QoS)이 보장되지 않는다. 부가적 서비스이자 보완적 서비스라는 성격이 강하다. QoS가 보장되는 기존 통신서비스와 동일한 잣대를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고 본다. 일단 시장에 맡기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 교수=망 중립성이란 규범적 원칙이 마치 현실적이지 않은 것처럼 혼동해선 안 된다. 미루거나 외면해서도 안 된다. 망 중립성은 경쟁을 촉진하고 소비자의 선택권을 보장하는 가치 있는 규칙이다. 단지 시장에만 맡기자는 것은 안이한 생각이다. 시장에 맡기려면 공정한 경쟁이라는 전제조건이 충족돼야 하며, 새로운 혁신은 창조적 파괴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mVoIP도 기존 통신시장에 창조적 파괴의 하나다. 정부가 망 중립성의 법적 기준을 확실히 선언해야 시장과 기업도 거기에 적응하고 따라올 것이다.

 김 원장=이번 망 중립성 논란은 과도기적 측면이 있다. 휴대전화 소비자 패턴이 2년 정도의 주기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현재의 3G 중심에서 LTE로 대세가 넘어가면 요금제에 따른 이용 제한 논란은 자연스럽게 해소되지 않을까 한다. 다만 한시적으로 mVoIP의 통화품질이 소비자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불만이 생길 수 있다.

 이 교수=방통위의 망 중립성 가이드라인에 보면 투명성을 강조하고 있다. 투명성이 확보돼야 mVoIP에 차별이 있는지 규명할 수 있다. 기술적 트래픽 관리를 교묘하게 하면서 mVoIP의 음성품질을 낮추는 행위가 있으면 망 중립성 위반이다. 소비자들의 선택권 보장을 위해서도 투명성은 보장돼야 한다. 또한 부분적 허용은 부분적 차단이다. 일정 금액 이상의 요금제 사용자에게만 mVoIP를 허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김 회장=세계적 흐름에서 보면 요금제에 따라 mVoIP를 허용하는 것이 대세다. 미국은 망 중립성을 제도화했지만 실제로 데이터를 쓰려면 월 7만~8만원은 내야 한다. 유럽은 시장 자율에 맡기지만 사실상 7만~8만원을 내야 mVoIP를 허용한다. 우리가 월 5만4000원 이상에서 허용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 국제적인 기준에 비싼지 아닌지를 따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김 원장=앞으로 소프트웨어 경쟁력이 강력한 외국 기업들이 들어와 무료 서비스를 펼칠 때 국가 간의 비용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자칫 망 투자는 국내 기업이 하고 수익은 외국 기업이 챙겨가는 일이 벌어진다.

 김 회장=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다. 망 중립성은 국내의 법적 시각으로만 분석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미 세계적으로 빅 데이터(관리하기조차 힘든 막대한 양의 데이터)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다. 또한 애플·구글·페이스북·아마존 등은 포갱(4 Gang)으로 불린다. 미국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망 중립성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도 사실 국익을 위한 측면이 크다. 포갱들의 플랫폼이 압도적인 경쟁력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국내 시장을 잠식할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 교수=물론 망 중립성이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 정책은 아니다. 방통위가 제시한 가이드라인 정도라면 합리적 대안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자칫 통신업체들을 과보호하는 쪽으로 흐르면 국내 콘텐트 공급업체들의 혁신적인 상품 개발 의욕을 떨어뜨릴 수 있다. 인터넷 사업의 글로벌한 성격도 수용해야 한다.

 김 회장=초기에는 네트워크 사업자가 지배력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플랫폼 업체들의 시가총액이 통신업체들을 압도하고 있다. 단적으로 네이버 시가총액이 SKT를 넘어섰지 않은가. ICT 전체의 생태계라는 큰 그림을 봐야 한다. 네트워크의 경쟁력을 잃게 되면 국내 플랫폼 기업이나 단말기 업체들의 경쟁력도 저하된다. 또한 우리의 네트워크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다른 나라의 기준을 맹목적으로 따라가선 안 되고, 우리에게 맞는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김 원장=현재로선 망 업그레이드 투자를 위해 통신업체이건 콘텐트 공급업체이건 어느 정도 수익을 얻는 쪽에서 일정 부분의 비용을 분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물론 수익이 나지 않는 업체에 부담을 지울 수는 없다. 하지만 미국의 유튜브처럼 망 용량을 많이 잡아먹으면서 큰 수익을 내는 인터넷 업체들은 공공 기금 형태로 출연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한다. 가령 정보통신진흥기금 같은 사례도 있지 않은가.

 김 회장=요금 체계도 개편해야 할 것이다. 콘텐트 공급업체는 거의 부담하지 않고 소비자들에게 더 많은 요금을 내도록 하는 현재의 구도를 바꿔야 한다. 또한 데이터 종량제 도입도 검토해야 할 것이다. 통신요금 개편이라 하면 대부분 요금 인상으로 오인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10% 정도의 다량 이용자들만 오르고 절반 이상의 소비자의 경우 통신비용이 줄어들게 된다.

 이 교수=사실 온라인 사업은 우리나라가 비교적 성공을 거뒀다. 몇몇 글로벌 기업은 일본조차 부러워할 정도다. 그 비결이 바로 그동안 한국이 비교적 망 중립성을 잘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앞으로 더 자유롭게 경쟁하고 혁신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아직 콘텐트 공급업체들은 초기 단계인 경우가 많고 그들에게 지나치게 무거운 옷을 입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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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18:25

문화가 경제력 없이 홀로 설 수는 없다. 먹을거리를 제공해 주는 경제야말로 우리 삶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이를 간파한 빌 클린턴은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이제는 경제라네, 바보들아!(It’s the economy, stupid!)”라는 구호를 내세워 당시 부시 대통령을 이겼다. 

경제면에서 한국은 모범생이다. 한국은 1인당 소득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에서 2만 달러를 넘는 소득과 5000만 명이 넘는 국민을 가진 이른바 ‘20-50클럽’을 구성하는 7대 선진국 중 하나로 올라섰다. 경제적 목표 달성 이후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삶의 목적을 추구하게 된다. 행복은 정신적인 삶의 가치이며, 이를 구현하는 것이 문화다. 

21세기는 우리에게 세계 문화를 이끌고 갈 무대를 제공하고 있다. 혹자는 작년 여름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 젊은이들을 열광시킨 케이팝(K-pop·한국대중가요) 콘서트를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우리가 세계문화의 중심에 서게 될까 고개를 갸우뚱할지 모른다. 그런 분들에게 몇 가지 퀴즈를 내본다. 



지난해 7월 제14회 차이콥스키콩쿠르에서 남녀 성악 동반 1위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는? 오페라단이 제일 많은(100여 개) 나라는? 뮤지컬을 가장 많이(300여 편) 제작하는 나라는? 문학잡지가 제일 많이(300여 종) 출판되는 나라는? 위 질문의 정답은 모두 ‘한국’이다. 이런 기반 위에 ‘한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산업이든 경쟁력을 갖추려면 9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이 중 4개는 물적 요소이고, 4개는 인적 요소이며, 나머지 하나는 전쟁, 재앙 같은 예외적 현상이다. 물적 요소로는 투입요소, 산업 환경, 관련 산업과 지원 산업, 시장 조건이 있고 인적 요소로는 근로자, 비전을 가진 정치지도자와 행정관료, 창업자, 전문가집단이 있다. 이 중 한국의 문화산업에 가장 필요한 요소는 투입요소, 정치지도자와 행정관료, 창업자다. 

투입요소로 가장 중요한 자본은 정부예산이다. 올해 정부예산 중 문화체육관광부에 배정된 예산은 1.1%다. 제조업의 고용유발효과가 투자 10억 원당 7.98명인데 비해 문화 콘텐츠 산업은 12.11명, 관광산업은 15.50명이라는 통계는 문화에 대한 정부예산 비중이 높을수록 일자리 창출을 통해 한국의 복지 수준, 나아가 국가경쟁력이 제고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불어 정치지도자와 행정관료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투철한 철학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 

문화산업의 창업자는 미래에 대한 예측과 수요 분석을 통해 정밀한 투자를 하는 투자자가 맡아야 한다. 문화산업에 대한 투자를 유치할 수 있도록 문화벤처기업만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을 코스닥에 설치하자.

2003년 영국의 더타임스는 우리 국민의 평균 IQ가 106으로 세계 185개 국가 중 홍콩에 이어 2등, 국가 기준으로는 1등이라고 보도했다. 한국을 천재들의 나라라고 부를 만하다. 그래서 문화가 미래를 이끄는 동력이라는 것을 먼저 깨달았나 보다. 세계인의 정신적 삶을 풍요롭게 하는 100점짜리 국가, 그래서 ‘20-50-100클럽’에 처음 가입하는 문화선진국이 돼 보면 어떨까. 세계를 향해서 높이 외쳐보자. “이제는 문화라네, 바보들아!”

조동성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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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4. 20:13

“나이는 숫자에 불과”…성형 보편화로 모든 이가 젊어져


갑자기 거의 모든 이가 젊어졌다. 아니 젊어졌다기보다 어려졌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하다. 20대 후반인가 싶으면 40대가 훌쩍 넘었고, 30대 중반인가 하면 50대인 경우도 있다. 10대와 20대의 구별은 아예 불가능하다. 성형이 보편화되면서 ‘동안’이 범국민적 현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다시 원점이다. 동안이 ‘동안’이 되려면 차별성이 있어야 한다. 한데 거의 다 동안이면 그건 몰개성일뿐더러 병증에 가깝다. 이 ‘동안열풍’의 원조에는 공주병, 왕자병이 있는 듯하다. 중년이 되어서도 자신을 공주나 왕자로 착각하는 건 분명 병이다. 그것도 아주 중증 불치병.


사람들은 외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기를 바라는 불멸에 대한 소망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늙지도, 죽지도 않는 것, 그것은 암세포의 속성 아닌가. 자신의 불멸을 위해 종족살해도 불사하는 세포가 바로 암세포다. 암이 워낙 많다보니 이렇게 된 것일까, 아니면 이런 욕망이 암을 만들어낸 것일까. 선후관계야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둘은 ‘서로 함께’ 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이 동안 열풍이 좀 무섭다! 중년 이후에도 젊게 보인다는 건 연륜 속에 활력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노익장 역시 마찬가지 의미다. 하지만 ‘동안’은 그게 아니다. 아무런 연륜도 활기도 없는데 나이가 마치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증발해버렸다는 뜻이다. 흡혈귀나 드라큘라처럼. 시간의 흔적이 없다는 건 그동안 아무런 성장이나 변화를 겪지 않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렇다. 얼굴만 앳된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비롯해 몸 전체가 미성숙 상태다. 정신연령이 낮은 건 말할 나위도 없다. 



어쩌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알다시피 자본주의는 오직 청춘만을 삶의 정점으로 간주한다. 나머지는 다 여분이거나 엑스트라다. 생로병사의 리듬에서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어떻게든 지연시키려는 태도의 산물이다. 말하자면 성숙하기를, 무르익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성숙이란 삶을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밀고 가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와 세계를 통찰하는 힘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현대문명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숙은 곧 지혜고, 이런 지혜는 돈이나 상품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동안열풍’에 휩쓸리다 보면 자연히 내적 성숙을 외면하게 된다. 예컨대 30대 여성이 10대와 젊음과 미모를 경쟁하거나, 40∼50대 여성이 사춘기 때의 정서를 고스란히 반복하는 것, 60대 여성이 인정욕망(남이 자신을 인정해 주길 바라는 것)에 시달리는 것, 이건 시쳇말로 ‘멘털 붕괴’와 다름없다. 실제로 ‘동안’에 갇히는 순간 마음은 조증과 울증을 오르락내리락하거나 혹은 도피와 중독을 되풀이하는 등 진짜로 붕괴를 향해 달려간다. ‘동안’을 얻은 대가치고는 참 가혹하다.

사계절의 운행이 만물을 낳고 기르듯이 인생 또한 생로병사의 리듬이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특권과 서열이 없듯이 인생의 매순간도 그 자체로 완전해야 한다. “소년은 허약하고 청년은 저돌적이고, 장년은 위엄이 있으며, 노년은 원숙한데, 이런 자질들은 제철이 돼야만 거둬들일 수 있는 자연의 결실과도 같은 것이라네.”(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고미숙 고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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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4. 20:12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누가 나의 삶에 가장 큰 도움을 주었는가를 고민하다 보니 우선 ‘도움’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를 도와준 사람은 참 많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돈을 주었고, 어떤 사람은 편의를 봐 주었고, 어떤 사람은 위로를 주었다. 그 많은 도움 중 어떤 도움을 준 이가 나에게 가장 크게 와 닿았는가를 생각하고 내가 찾은 답은 그 누구보다 바로 내가 ‘올바른 생각’을 하게 도와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모든 도움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두 일시적인 약효를 지닌 것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그 약효가 소진되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나로 하여금 올바른 생각을 하도록 해 준 도움은 달랐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나의 삶을 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었고 나를 더 성숙하게 만들었고 나 자신을 더 편안하게 해 주었다. 결론적으로 나에게 가장 많은 행복을 안겨준 도움이었다. 

누가 나로 하여금 올바른 생각을 하게 해 준 사람일까. 물론 부모님과 선생님들일 것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나에게 특별한 기억을 남겨준 분이 있다. 그분은 내가 대학에 다닐 때 만난 모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셨다(나는 차라리 그분을 익명으로 남겨드리고 싶다). 나의 대학 생활은 참 많은 고통과 방황의 시기였다. 고등학교 때의 넘치던 자신감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든 것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고, 특히 나 자신에 대한 회의가 컸다. 열등감도 생겼고 죄의식도 많았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자신이 없었고 여성관계도 참담한 실패의 연속이었다. 경제적 고통도 심했고 마음이 불편하니 육체적 건강도 함께 쇠락했다. 어디에 나의 삶, 행동의 기준을 잡아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었다. 



이때 만난 분이 바로 그 교수님이었다. 어느 날 한 선배와의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뵙게 된 그분은 막 외국 유학에서 돌아온, 젊음과 패기가 넘치는 동시에 성숙하고 진지한 분이었다. 심리학을 전공하셨다는 그분에게 내가 모임의 파장 무렵에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때 그분이 준 답은 나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고 나의 삶의 궤적을 바로잡아 주었다. 내가 던진 질문은 “사람은 어떻게 하면 방황 없이 살 수 있습니까”였고, 그분의 답은 “사람은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었다. 매일 가정 예배를 보는 가정에서 자라나 온갖 도덕과 규율로 자신을 꽁꽁 묶고 있었다. 그러던 나에게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이 말은 문자 그대로 굉음을 울리며 내 마음 속에 던져졌다.

그 울림의 여운을 잊지 못한 나는 몇 번 더 그분을 찾아뵈었고 많은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그분의 모든 이야기는 한가지로 귀결됐다. ‘사람은 자기답게 살아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 그 마음의 소리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기답게 사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었다. 

그때 이후로 방황할 때마다, 어떡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일 때마다 나는 내 마음의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에 따라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점차 그것은 나의 습관이 되어갔다. 그러면서 나는 ‘나’라는 존재가 점점 더 명확하게 구축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방황이 줄어들었고 대신 자존감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내 나이 육십이 넘어 황혼에 접어든 지금, 내 삶 전체를 되돌아 볼 때, 나는 그분의 얘기가 옳았다고 믿게 되었다. 

사람이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자존감을 갖게 되고 또 자기답게 살 때 바로 온전한 인격체가 된다고 나는 믿는다. 사람이 논리와 계율의 노예가 될 때 그 사람은 자기다움을 잃어버린다. 사람의 방황이 시작되는 것은 바로 이때다. 

나는 요즘 감히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순간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내 마음 속에 느껴져 오는 소리, 그 느낌뿐이다”라고. 나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 준 그 교수님은 그런 면에서 나의 은인이다.


전성철 IGM 세계경영연구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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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4. 20:10

영국의 필 파커(36) 소령은 이라크전에 참전했던 2008년 2월 척추사고로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됐다. 16년간 군인으로 살아왔던 그는 목발을 짚고 2009년 4월 26일 런던 마라톤에 참가해 매일 3.2㎞씩 걸으면서 14일 만에 결승점을 밟았다. 그가 마라톤에 참가해 완주한 이유는 자기와 같은 상이군인을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서였다. 수많은 박수와 응원 속에 총 96만 파운드(약 18억원)의 기부금이 모였다.

올해 4월 22일 런던 마라톤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연출됐다. 3만6000명의 참가자가 모두 집으로 돌아갔지만 허리 아래가 마비된 장애인 클레어 로마스(32)는 출발 22일 만에 결승점에 도착했다. 생체공학 로봇 옷을 입고 기계음을 내면서 남편과 함께 5만5000걸음을 걸은 뒤 결승점에서 생후 13개월 된 딸과 감격의 키스를 했다. 당일 완주가 아니어서 공식 완주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참가자들이 자신의 완주 메달을 내놓았고 수많은 사람의 격려와 응원 메시지가 쏟아졌다. 그녀 역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마비 환자들의 치료 개발을 위한 의학연구단체에 기부금을 모아 주려고 대회에 참가했다.

런던 마라톤의 역사는 짧지만 단일 행사로 세계 제일의 기부금이 모이는, 살맛 나는 스토리텔링이 넘쳐나는 대회가 됐다. 올해도 사상 최대인 약 900억원이 모금됐다고 한다. 런던보다 마라톤 역사가 훨씬 오래된 대회가 많지만 선진국으로 불리는 데 적합한 품격인 자선과 기부를 생각할 때면 런던대회를 떠올리게 된다.

23일이면 한국 인구가 5000만 명을 넘게 된다.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이 2만3680달러였으므로 우리나라는 소득 2만 달러, 인구 5000만 명을 넘는 소위 ‘20-50클럽’에 세계 일곱 번째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영국이 여섯 번째로 가입한 후 16년 만의 일이며 다음 순서의 국가를 보기가 당분간 어렵다고 한다.


한국은 전쟁 폐허 속에서 60년 만에 국내총생산 1200조원(세계 15위), 무역 규모 1조 달러(세계 8위), 선진국만 개최할 수 있다는 4대 국제스포츠를 치를 수 있는 국가가 됐다. 선진 6개국이 ‘20-50클럽’에 가입한 뒤 4~14년이 지나 모두 ‘30-50클럽’에 등재한 경험법칙으로 보면 우리도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과거 선진국 모임의 대표 격인 주요 7개국(G7)과 비슷한 길에 들어섰다고 세계가 우리를 선진국으로 불러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로는 첫째, 정의로운 사회라고 아직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경제·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양극화가 심화돼 갈등과 분열이 깊어지고 있다. 1987년 민주화 항쟁 25주년이 되는 올해에도 경제 민주화의 외침이 크게 들리고 있다.

둘째, 글로벌 문화 수용력이 취약하다. 지금은 제조 수출산업시대의 일사불란한 내부 문화보다 혁신과 통섭을 통한 다양성과 창조성이 강조되는 시대다. 여기에 필요한 인력·지식·문화·자원 등을 받아들이려면 외부에 개방적인 문화가 폭넓게 수용돼야만 한다. 로마를 보라. 에스파냐 출신의 황제 트라야누스는 로마가 아닌, 정복지 출신 최초의 황제였지만 가장 넓게 영토를 확장시켰고 또한 ‘5인의 현명한 황제’ 중 한 사람이 됐다.

셋째, 선진국민으로서 품격이 국민의 삶과 문화 속에 더욱 배양돼야 한다. 인권·정직·질서·배려·기부·봉사 등이 중요한 사회적 품격이므로 무엇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적극 요청된다. 여기에도 로마의 선례가 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총신이었던 마에케나스는 2000년 전에 이미 예술부흥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오늘날 ‘메세나 운동’의 기원이 됐다.

8000억원을 교육재단에 출연해 우리나라 개인기부 최다 기록을 세운 삼영화학의 이종환(90) 회장은 ‘한국의 빌 게이츠’를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현재까지 약 80억 달러를 기부한 세계 7위 갑부인 조지 소로스(81) 회장은 세금을 더 내 국가 시스템 안에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게 효율적이라고 했다.

한국도 더 많은 기부자와 기부금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시스템 안에서 구휼사업이 더욱 많아져야 하고 더 많은 보편적 복지도 만들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업이나 부자들의 기부 내용을 헤아리기보다 내 주머니에서 지극히 적은 것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기부문화가 확산되는 것이다. 필자 자신, 지난 11년 동안 32번의 마라톤에서 총 20억원이 넘는 모금을 했던 경험을 돌아보건대 한국에서도 ‘20-50클럽’ 시대의 나눔문화를 꽃피울 수 있다고 확신한다.


신헌철 SK미소금융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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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4. 20:04

▷10여 년 전 TV 쇼 프로그램에 인기 절정이던 댄스그룹 H.O.T.가 출연했다. 공개홀을 가득 채운 어린 관객의 울부짖음 섞인 환호에 정신이 팔렸는지 진행을 맡은 사회자가 외쳤다. “한국의 비틀스, H.O.T.입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해도 일개 댄스 그룹을 비틀스에 비교하는 건 좀 심하지 않은가 해서다. 그런데 요즘 방송을 보면 이런 일은 애교에 속한다. ‘록의 전설’이니, ‘발라드의 여신’이니 하면서 좀 실력 있는 가수나 그룹은 무조건 만신전(萬神殿)에 올려놓는다. 말(言)의 인플레이션 시대다.

▷말의 인플레이션은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언어가 범람하는 이 시대의 현상만은 아니었나 보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의 동명 원작소설을 쓴 작가 앤서니 버지스는 1964년 펴낸 책 ‘평범해진 언어(Language Made Plain)’에서 ‘그저 선율이 아름다운 팝송을 기막히게 멋지다고 말한다면,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은 도대체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라며 통탄했다. 그는 ‘과장된 표현이 모든 의미를 망쳐 놓고 있다’고 답답해했다.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가 현 정부를 두고 “패악무도(悖惡無道)한 정권”이라고 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어긋난, 흉악하며 막된 정권’이라는 것이다. 현 정권을 어떻게 칭하건 그건 말하는 사람의 자유다. 하지만 궁금한 게 있다. 이 대표는 1970년대 유신독재와 1980년대 권위주의 군사정권 시대에 저항했다. 그렇다면 이 대표는 당시의 정권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일반인의 눈높이에서 패악무도한 정권이란 연산군이나 로마 시대 네로 황제의 통치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4월 총선에서 민주당의 절대 약세 지역인 대구에 출마했다 떨어진 김부겸 전 의원은 대구 민심을 돌리기 쉽지 않은 까닭을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도 이명박 정권이 잘못했다는 걸 안다. 그런데 이 정권이 잘사는 나라를 하루아침에 망쳤다는 식으로 오버하는 걸 싫어한다. 그런 게 자꾸 쌓이니까 민주당에 대해 고개를 돌려버리더라.” 현실과 동떨어진 과장이나 독설보다는 폐부를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야 너른 공감을 살 수 있다. 

민동용 주말섹션 O₂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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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4. 19:51

1999년을 기억한다. 인터넷 기업이기만 하면 주가가 오르던 시절 새롬기술은 그 중에서도 단연 압권이었다. 주가가 액면가의 640배인 주당 32만 원까지 치솟아 시가총액이 현대자동차와 맞먹었다. ‘다이얼패드’라고 하는 무료 인터넷전화 기술이 주가 폭등을 이끌었다.

국내 정보통신업계가 무료 인터넷전화로 다시 시끄럽다. 무료 모바일 메신저로 국내에서만 3700만 가입자를 끌어들인 카카오톡에서 공짜 음성통화 서비스가 나왔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모델이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 이동통신사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는 건 당연하다.

겉으로 보이는 대립구도는 이렇다. 혁신적 비즈니스모델의 벤처기업 대(對) 전통적인 모델의 이동통신업계. 새로운 기술을 가진 창의적인 약자(弱者)와 비효율적인 거대 자본의 대결. 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카카오톡을 서비스하는 카카오의 실적을 들여다보자. 이 회사는 2010년 3400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손실은 40억5100만 원. 지난해 매출은 17억9900만 원으로 뛰었지만 손실도 152억5900만 원으로 늘었다. 2년간 200억 원 가까운 손실을 보는 동안 매출은 18억 원이 채 안 됐다.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카카오의 최대주주인 김범수 이사회 의장은 물론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 김정주 NXC 대표 등 다른 주주들도 손꼽히는 주식 거부(巨富)들이다. 올해 4월에는 1000억 원 가까운 투자가 들어갔다. 중국 게임업체 텐센트가 720억 원을, 국내 온라인게임 업체인 위메이드엔터테인먼트가 200억 원을 투자했다. 수익은 못 내지만 당분간 실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을 일은 없어 보인다. 흔히 벤처기업하면 떠올리듯 야전침대를 갖다 놓고 밤을 지새우는 ‘헝그리 벤처’는 아닌 셈이다.

기술적인 면은 어떤가. 카카오톡의 보이스톡 같은 모바일인터넷전화(mVoIP)는 1999년의 다이얼패드와 기술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3세대(3G) 이동통신망에선 초당 13kb(킬로비트) 정도의 속도면 음성통화가 되지만 mVoIP는 초당 20kb의 속도가 필요하다. 획기적인 첨단 기술이라고 평가하긴 어렵다.

이동통신사들은 “카카오톡이 배에 공짜로 타는 것도 모자라 바닥에 구멍을 뚫고 있다”며 아우성이다. 음성통화 허용에 따른 손실이 수조 원대에 이를 것이며 앞으로 투자를 못 하면 국내 정보통신 생태계가 파괴된다는 논리로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여론은 공짜 서비스 제공자 편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혁신할 수 있는 기회가 빨리 왔다고 생각하는 게 바람직하다.

정작 문제는 카카오톡 자신이다. 근래에 보기 드문 혁신적인 모델인 건 맞지만 그것만으로 성공을 보장하긴 어렵다. 동창생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아이러브스쿨, 일촌을 내세운 커뮤니티 서비스 싸이월드도 가입자 수와 비즈니스 모델만 놓고 보면 세계적인 혁신 사례였지만 지금은 과거의 이름이 됐다. 더욱이 공짜에 길들여진 이용자들에게 단돈 1000원이라도 받아내기는 결코 쉽지 않다. 

카카오톡이 다시 공짜 서비스를 들고 나온 건 글로벌 시장을 염두에 둔 심모원려(深謀遠慮)로 읽힌다. 수억 명의 가입자로 페이스북과 제대로 붙을 수 있는 기업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국내에서 이동통신업계와 벌이고 있는 무임승차 논쟁은 어느 정도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빨리 정리하는 게 좋다. 언제까지 여론에 기댈 것인가.


홍석민 산업부 차장


http://news.donga.com/3/all/20120614/469913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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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4. 19:33

드라마·음악·영화를 비롯한 한국 콘텐트 산업이 국제적인 경쟁력을 확보하면서 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콘텐트의 경쟁력이 높아지는 이면에는 자본·아이디어와 열정을 가진 새로운 콘텐트 사업자들의 거침없는 투자와 새로운 시도가 밑바닥이 됐다.

그러나 우리나라 콘텐트 시장은 여전히 지상파 방송 중심의 소수 사업자로 형성된 취약한 구조다. 콘텐트의 기획·제작·유통의 가치 사슬이 공정한 환경에서 유기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발효로 3년 뒤에는 외국인의 방송 콘텐트 시장 투자가 허용되는 등 해외 거대 미디어 기업의 국내 시장 진출이라는 위협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

콘텐트 산업의 육성을 위해서는 콘텐트 산업구조를 개선해 스마트 미디어 시대에 적합한 생태계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무엇보다도 국제 경쟁력을 가진 콘텐트 기업의 육성을 통한 체질 개선이 우선돼야 한다.

이미 세계 콘텐트 시장에서 주요 기업들은 이른바 CPNT(콘텐트·플랫폼·네트워크·터미널) 중 자신이 취약한 분야를 인수합병 등을 통해 보완하는 ‘몸통 불리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 뉴스코퍼레이션·디즈니·타임워너가 이미 글로벌 거대 미디어 콘텐트 기업으로 변신했고, 애플과 구글 같은 기업도 전략적 제휴 등을 통해 세계시장을 노리고 있다.

우리 콘텐트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기존 시장에 새로운 자본이 유입될 수 있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시장을 확대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우수한 인력·자원·시장이 최적의 상태로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정책이다. 한국의 한류, 미국의 콘텐트 산업의 성공 뒤에는 ‘규모의 경제’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콘텐트 시장은 대표적인 고위험·고수익 사업이다. 일정 수준의 자본력을 갖춘 사업자가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하지 않는다면 산업의 경쟁력이 높아질 수 없다. 콘텐트 사업자의 규모가 커질수록 투자여력이 생겨 양질의 콘텐트를 만들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해외시장 개척 기회를 확대할 수 있다.

지상파 방송 이외에도 일정 규모 이상의 콘텐트 사업자들이 등장할 수 있도록 시장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상파 방송과 견줄 수 있는 사업자가 등장해 상호 경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콘텐트 분야의 경쟁력을 가진 새로운 사업자들이 양질의 다양한 콘텐트를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물론 규제를 완화해 일부 콘텐트 사업자들이 크게 성장할 경우 작은 규모의 콘텐트 사업자들이 경쟁력을 상실해 콘텐트 시장이 왜곡될 수도 있다. 따라서 아이디어와 열정을 가진 중소 콘텐트 사업자들이 콘텐트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도록 별도의 지원정책을 병행해야 한다. 그래야만 규제 완화의 효과가 전체 콘텐트 산업의 활성화로 연결될 수 있다.

현재의 제도로는 지상파 방송 중심의 취약한 콘텐트 산업 구조를 개선할 수 없다. 경쟁력 있는 콘텐트 사업자가 지상파 방송 콘텐트 시장의 지배적 구조 안에서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해 도태되거나 향후 FTA로 인한 인수합병으로 외국 미디어 사업자에게 합병될 가능성이 크다. 아울러 한류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콘텐트의 경쟁력을 높일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다.

개방·공유·창조의 스마트 미디어 시대에 콘텐트 산업은 정부의 지원이나 규제보다는 시장의 자율성을 신장하고 사업자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콘텐트 산업에 대한 정부의 단선적인 규제와 보호정책으로 인해 우리 콘텐트 산업이 경쟁력을 상실하고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과감한 정책 변화가 절실한 시점이다.



주정민 전남대 교수·신문방송학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8446704&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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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4. 19:30

지난주 초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했던 ‘지금 유럽발 위기는 대공황에 버금가는 것’이라는 발언이 전해지면서 주식시장은 요동을 쳤다. 그 진의를 궁금해하던 중, 나는 중국을 방문해 현지 전문가들을 만나게 됐다. 한겨레경제연구소가 아시아적 맥락을 반영한 기업 평가모델 개발을 위해 베이징에서 연 중국 사회책임경영 전문가위원회에서였다.


“지난해 중국 기업 1000곳 이상이 사회책임경영(CSR) 보고서를 발간했다. 사회책임경영에 대한 사회 전반의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는 증거다.” 궈페이위안 신타오 대표가 최근 중국 기업 동향을 설명하며 이렇게 강조했다. 한국 기업 중 사회책임경영 보고서를 낸 곳은 지난해 100곳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 4~5년 전만 해도 중국보다 많았는데 그새 따라잡혔다.


사회책임경영 보고서는 기업이 재무적 사업 성과뿐 아니라 탄소배출, 노동조건 등 환경 및 사회적 성과를 함께 공개하는 보고서다. 그런데 상하이와 선전 증시에서는 상장기업의 사회책임경영 보고서 발간을 의무화한 상태다. 사회책임경영을 지향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내용을 공시까지 해야 상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다 중국 정부는 국외투자 기업에 대해 사회적 책임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세계 5위 해외투자국이 된 중국이 책임있는 투자자라는 점을 강조하겠다는 전략이다.


중국은 여전히 국가가 시장을 통제하는 체제이면서, 한편에서는 서구식 시장원리를 빠르게 도입하고 있다. 국가 통제 체제를 계속 끌고 가는 것도 비효율적이지만, 세계 자본주의 위기를 불러온 극단적 시장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꺼림칙할 것이다. 결국 사회책임경영은 국가 주도 경제와 극단적 시장주의 사이의 새로운 선택지인 셈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다시 김석동 위원장의 발언을 떠올렸다. 그의 진의는 ‘자본주의가 대공황 뒤 케인스주의와 수정자본주의로 넘어갔던 것처럼, 이번 위기 뒤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가 나타난다’는 뜻이었다. 최소한 중국에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국가 주도성을 약화시키면서 시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기업의 역할을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사회적인 것으로까지 확장시켜 시장의 부작용을 완화하겠다는 전략이다.


유럽에서도 근본적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금의 유럽 위기는 무모하게 투자하고 지나치게 써버려서 맞이한 위기다. 유럽 재정위기는 국가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많이 빌린 돈을 써버린 뒤 갚을 방법이 막막해진 위기다. 금융권 입장에서는 무분별하게 투자한 뒤 돌려받지 못할 위험이 커져 생긴 위기다. 미래 후손들의 자원을 당겨 써버린 셈이다.


그렇다고 투자와 소비를 없애고 빚만 갚아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대공황 같은 사태로 번지면서 삶의 질을 과거로 돌려놓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규모 투자-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를 유지하기도 어렵다. 빚을 내서 소비하고 위험을 가리지 않고 투자하는 경제로 돌아갔다가는 거품만 더 키울 뿐이다. 결국 투자와 소비를 일으키되 환경, 고용, 지역공동체 등의 가치를 담은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경제, 환경, 사회를 균형있게 고려하는 지속가능발전이 유력한 발전모델이 될 것이다.


김석동 위원장의 말은 옳았다. 중국은 국가와 시장 사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고 있다. 유럽에서는 단기적 투자수익률을 절대선으로 여기던 자본주의 패러다임이 근본적 변화를 겪고 있다. 한국은 1960년대 이래 국가가 계획하고 통제하는 경제를 운용하다가, 1990년대 이후에는 시장을 메시아로 삼았다. 이제 세번째 경제정책 패러다임을 고민할 때가 됐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3757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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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4. 19:28

과연 포괄수가제가 무엇일까? 일반 국민들은 이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우리 사회의 정서상 국민들은 이 제도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의사들이 반대하고 정부가 강행한다면 '국민들에게 좋은 제도'라고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국민정서에는 의사집단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부터 대한의사협회는 과거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전문가로서의 의무를 다하며 의사의 이익보다는 국민전체의 이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포괄수가제는 필연적으로 그 피해가 국민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제도라는 것이 의협의 입장이다.

간단히 말해 포괄수가제는 같은 병명으로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 경우 무조건 같은 돈을 내는 제도이다. 물론 개인의원에서 치료받는 경우와 그 규모가 조금 큰 병원에서 치료받는 경우는 수가의 차이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일단 가격을 정하고 그것에 따르는 치료의 내용을 맞춘다는 것이다. 국민은 능력과 상황에 따라 자신이 치료의 질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조금 비싸더라도 더 좋은 치료를 원하는 국민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포괄수가제는 의료의 질을 획일적으로 하향 평준화시키는 제도이다. 이동통신을 이용할 때, 본인의 경제적인 능력과 그 용도에 따라 3G를 사용할지, LTE를 사용할지는 각 개인의 선택의 문제이다. 이를 국가가 하나로 강제 지정한다면 상당한 반발과 저항이 있을 것이다.

만일 한 산모가 제왕절개 수술을 하고 입원한 후 퇴원했을 경우를 가정해 보자. 포괄수가제가 강제 시행될 7월 1일 이후부터는 의사는 이미 정해진 치료비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수술 후 통증을 없애기 위한 무통주사를 맞고 싶어도 맞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주사를 맞고 따로 돈을 내는 행위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이다. (수술 후 통증을 겪어본 분들은 그 아픔을 잘 알 것이다.) 이때 의사는 세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첫째, 산모와 그 보호자에게 "포괄수가제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 때문에 무통주사를 놓을 수 없다"고 설명하고 산모의 호소를 무시하는 방법, 둘째 정말 산모의 통증이 너무 심해서 의사의 양심상 어쩔 수 없이 무통주사를 공짜로 놓아주는 방법, 세 번째, 편법으로 일단 퇴원을 시킨 후 바로 재입원시켜 무통주사를 놓는 방법이다. (제왕절개 후 며칠은 걷는 것조차 힘든데, 퇴원수속하고 나갔다가 다른 병명으로 다시 수속하고 입원해야 한다.) 


당신이 산모라면 혹은 보호자라면 어떤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과연 의사들은 어떤 방법을 선택해야 할까. 또한 이렇게 미리 비용을 정해놓은 산부인과의원에서 정말 영양가 있는 미역국을 먹을 수 있을까. 하지만 100번 양보해서 이쯤은 참을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의료재료의 경우 그 심각성은 더하다. 수술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 몸 속에 직접 들어가는 봉합사를 포함한 의료재료의 경우 싼 것을 쓸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 경우 수술 후 상처가 곪는다든지 하는 합병증의 가능성을 분명히 증가시킬 수 있다.

의료기술의 발달과 소득수준의 향상으로 국민들의 평균 수명이 증가하고 있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의료의 비용 역시 상승하고 있고 정부는 그 의료비용을 통제하기 위해 포괄수가제를 시행하려는 것이다. 의협 역시 이러한 비용절감이 불필요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의료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비용통제는 필요하다. 다만 준비가 부족한, 강제 시행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미 세계 각국에서도 이러한 포괄수가제가 시행되고 있고, 제도의 긍정적인 면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이미 이 제도를 시행한 여러 나라들은 의료의 근간이 국가 주도적이고, 의료행위에 대한 적정한 수가체계가 있다. 또한 이러한 나라들은 그 준비기간이 충분했으며 수 십 년에 걸쳐 제도의 미비점을 보완해 온 나라들이다. 선 시행 후 보완은 대책이 될 수 없다. 제도의 미비로 인한 생명의 희생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원가의 70%밖에 되지 않는 의료수가에 대한 현실화, 정확한 질병분류체계 확립, 사후 적정성 평가에 대한 제도적 장치 등이 마련되지 않은 포괄수가제는 절대 성급히 강제 시행되어서는 안 된다.



송형곤 대한의사협회 대변인


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1206/h201206122102489156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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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4. 19:23

디지털 기술이 교육 분야에서 열어놓고 있는 가장 위대한 민주적 가능성의 하나는 교육에 접근할 기회의 대폭 확장이다. 대표적으로 사이버 교육과 원거리 학습은 아닌 게 아니라 국내외 굴지의 교육센터들을 내 방으로 끌어들인다. 민주주의는 배제의 정치학 아닌 '포함'의 정치학이다. 누구에게나 교육 받을 기회를 주고 그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은 민주사회가 실현하고자 하는 교육적 이상이다. 이 이상의 바닥에 깔린 기본 '어삼션'(생각)은 교육의 영역에서 특권의 울타리를 제거하고 '최대 다수에게 최대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실현할 사회적 지름길이 된다는 것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교육기회라는 민주적 이상은 그렇게 해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 사회철학과 멋들어지게 결합하고, 디지털 하이테크는 이 결합을 중매하는 축복의 기술이 된다. 

디지털 기술이 교육에 기여한다고 여겨지는 또 다른 부분은 그 기술의 도움을 최대로 활용할 때 '교육효과'가 엄청스레 높아진다는 것이다. 교육의 효과를 어떻게 높일 것인가는 모든 교육 종사자들의 항구한 화두다. 교육에 투입되는 각종 노력들이 허공으로 날아가지 않고 최대의 '아웃풋'을 낼 수 있게 하자는 것도 교육의 이상 가운데 하나다. 디지털 기술이 그런 교육적 이상의 실현에 크게 기여한다는 주장은, 그 주장의 실증적 증거 유무를 떠나 디지털 시대가 퍼뜨리는 복음의 하나다. 그래서 디지털 복음주의자들 중에는 멀지 않아 대학 같은 것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디지털 하이테크의 교육적 기여를 예찬하는 열광적 박수소리는 이미 도처에서 귀가 따갑게 들려오고 있다. 그 박수소리에 묻히고 눌려서 들려오지 않는 다른 소리는 없는가. 특히 한국에서. 디지털 기술시대의 교육이 하이테크의 행진 앞에서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들, 해법을 찾기 위해 고심해야 할 심각한 문제들은 없는가. 교육이 제기해야 할 근본적인 질문들은 없겠는가.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검토해봐야 할 위험하고 근거 박약한 '디지털 시대의 통상적 어삼션'들은 없을 것인가. 

우선, 학생들의 신음소리가 있다. "교수님, 제가 이 글꼭지를 열 번이나 읽었는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대학 신입생 하나가 읽기교재에 실린 열 쪽도 안 되는 글 한 편을 읽고 (사실은 버둥거리다) 와서 털어놓는 소리다. 한국인이니까 한글로 된 텍스트를 읽기는 하는데 도무지 의미 파악은 안 되는 경우다. 진정한 의미의 '문해력'이 길러져 있지 않은 것이다. 

이런 신음도 있다. "한 단락을 읽고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면 앞에서 뭘 읽었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요." 조지 오웰의 풍자우화 <동물농장>에 나오는 얘기 같다. 농장의 말 두 마리가 '알파벳'을 깨치느라 애쓰는데, ABCD까지는 간신히 깨치지만 그 다음 EFGH 넉자로 넘어가면 앞에서 공부한 ABCD가 생각나지 않는다. 교육은 실패한다. 기억력의 위기다. 기억력은 암기의 능력 말고도 집중력을 필요로 하고,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의 저장창고로 이송해서 갈무리하고 그렇게 저장된 정보를 필요할 때 인출하는 뇌신경 작업을 요구한다. 

나는 지금 수많은 관찰 사례들 가운데 단 두 개만을 든 것에 불과하다. 이런 사례가 디지털 기술시대와 무슨 관계가 있냐고? 깊은 관계가 있다. 디지털 기술시대의 '원주민'을 자처하는 젊은 세대는 디지털 기기와 디지털 환경 속에 태어나 자라면서 정신분산을 강요하는 과잉자극과 과잉정보의 홍수에 떠밀려 사고력, 집중력, 기억력, 판단력이 파탄에 가까운 위기를 만나고 있다. 손에 쥔 스마트폰으로 못하는 일이 없다는 것은 즐거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훨씬 비싼 댓가를 요구한다. 지적 정서적 능력의 결손, 자기를 만들고 형성해가야 하는 성장기 교육의 위기, 넓고 깊게 지식의 토대를 닦아야 하는 시대의 생존의 위기로 나타난다. 이런 위기로부터 탁월한 개인, 책임 있는 민주시민이 길러질까. 디지털 시대의 교육 종사자들은 밤을 새며 해법을 찾아야 할 문제들 앞에서 고민이 많다.



도정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6/h2012061221120612173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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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4. 19:20

스페인에 대한 거액의 구제금융으로 한풀 꺾이는가 싶던 유럽의 재정위기가 다시금 악화되고 있다. 스페인에 대한 응급처방만으론 유럽이 직면하고 있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해소할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 근본적이고도 구조적인 문제의 발원지는 바로 유로존 자체다. 남유럽 국가들이 줄줄이 재정위기에 빠진 데는 각국의 방만한 재정운용 탓이 크지만 그 근저에는 유로화(貨)로의 무리한 통화통합이라는 원인행위가 자리잡고 있다.

유럽연합(EU)은 통합유럽의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급속히 외연을 넓혀나가는 와중에 실력이 되지 않는 나라들까지 한꺼번에 유로존에 편입했다. 내실이 탄탄한 독일 같은 나라와 경제체질이 허약한 그리스 같은 나라가 다같이 유로화를 쓰게 됐으니 애초부터 탈이 날 수밖에 없었다. 통화는 한 나라의 경제 실력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경쟁력이 강하고 수출을 많이 하는 나라의 통화는 강하고, 경쟁력이 떨어지고 수입이 많은 나라의 통화는 약하다. 그런데 경제체력이 제각기 다른 나라들을 한데 묶어 유로화라는 단일통화를 사용하다 보니 통화의 물타기가 벌어졌다. 독일 입장에선 단일 통화 유로가 이전의 마르크화에 비해 약해진 반면, 그리스에 유로화는 이전의 드라크마화보다 훨씬 강해졌다. 독일엔 단일통화가 사실상의 평가절하였고, 그리스엔 강제적인 평가절상이었던 셈이다. 독일의 수출경쟁력은 더욱 강해졌고, 그리스의 경쟁력은 원래 실력보다 더 떨어졌다. 통화가치의 측면만 보면 통화통합의 최대 수혜자는 독일이었고, 최대 피해자는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이었다.


물론 통화통합만으로 재정위기가 벌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이 생산성을 높여 강세 통화에 걸맞은 경쟁력을 갖췄다면 좋았으련만 불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상대적으로 값싸진 수입품과 독일과 북유럽 등 통화강국의 황홀한 복지시스템에 흠뻑 취했다. 그 결과가 막대한 재정적자와 나랏빚으로 남았다. 실력은 없으면서 부자 나라의 행태만 좇아가려니 빚만 늘어난 것이다. 불편한 비유겠지만 가난한 월급쟁이가 빚을 내서 부자들이 쓰는 명품을 사들인 꼴이나 매한가지다.

이제 즐거웠던 단일통화의 향연이 끝나고 빚잔치만 남았다. 길은 두 가지다. 통합유럽의 원대한 꿈을 접고 유로존 해체의 길을 가느냐, 아니면 구제금융과 빚 탕감을 통해 유로존을 유지하느냐다. 어느 쪽이든 고통스러운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선택의 열쇠는 독일이 쥐고 있다. 유로존을 해체하자니 단일통화의 이점이 사라짐과 동시에 막대한 부실채권을 떠안아야 한다. 남유럽 국채의 최대 채권자인 독일 은행들의 연쇄부실을 피할 수 없다. 독일은 분열된 유럽과 함께 세계사의 중심무대에서 퇴장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유로존을 유지하자니 기존의 빚을 털어주는 것은 물론 어마어마한 규모의 구제금융 자금을 새로 퍼부어야 할 판이다. 자칫하면 독일마저 빚더미에 짓눌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여전히 장고(長考) 중이다.

현재로선 유럽을 살릴 수 있는 해법은 후자뿐이다. 독일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럽중앙은행(ECB)이 위기 국가들의 국채를 무제한 사들이고, 유로본드를 발행해 위기 국가의 부채를 유럽 전체가 공동으로 부담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위기의 해법은 더 깊은 정치적 통합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메르켈 총리는 구제금융 확대와 유로본드 발행의 전제조건으로 “더 많은 유럽(more Europe)”을 언급했다. 그가 말하는 ‘더 많은 유럽’이란 실은 더욱 강력한 재정과 정치통합을 의미한다. 재정위기 국가들을 유럽연합의 이름으로 구제해 주는 대신 재정적 자주권과 정치적 자치권의 포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번 유럽의 재정위기는 재정통합 없는 통화통합의 피할 수 없는 파국적 귀결이었다. 유로존의 많은 나라가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유지한다’는 유럽연합 가입조건을 지키지 못했다. 남유럽 위기 국가들은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붙여진 GDP의 5% 남짓의 재정적자 비율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긴축과 구조조정 요구가 가혹하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에 반해 독일은 구제금융을 통해 유로존에 잔류하려면 재정운용의 권한을 유럽연합에 넘기라는 것이다. 재정운용의 자율권은 바로 경제주권이다. 경제주권의 양도는 곧바로 국민국가(nation state)로서의 독립성을 상실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스가 긴축에 결사 반대하고, 스페인이 조건 없는 구제금융에 그토록 매달린 것은 재정의 자율성을 포기할 수 없다는 다짐이자, 독립국가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달라는 눈물겨운 호소다.

더 깊은 정치적 통합은 유로존의 금융과 재정을 통할하는 공동정부와 공동의회의 구성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유럽연합은 사실상 미국과 같은 연방국가 수준의 통합에 이르게 된다. 그동안 국민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했던 회원국들은 국방·외교·거시경제 정책의 권한을 공동정부와 유럽중앙은행에 넘기고 자치주의 형태로 남게 된다. 과연 유럽 각국이 이런 수준의 통합에 동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유럽의 재정위기는 경제 문제에서 시작됐지만 통합유럽과 국민국가 간의 갈등이라는 정치적 현안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이제 유로존의 해체냐, 더 깊은 통합이냐를 가르는 운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김종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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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2. 8. 14. 19:18

매카시즘(McCarthyism·극단적 반공주의) 문제가 간단치 않아 보인다.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는 지난 10일 당선 수락연설에서 “박근혜 새누리당의 매카시즘과 맞서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이 대표는 새누리당의 종북(從北)론을 매카시즘이라고 강하게 반박하는 선명성을 과시한 덕분에 경선에서 승리했다고 판단했다. 대선 과정에서도 득표를 위해 매카시즘을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까지 나섰다. 조선중앙통신은 11일 “박근혜·정몽준·김문수 등 새누리당 대권주자들이 방북 당시 했던 친북 언행을 공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남한의 보수 정치가들을 ‘친북’이라 주장하는 황당한 시추에이션이다. 공산국가인 북한이 매카시즘을 구사하니, 이런 코미디가 없다.

매카시즘이 대중 정서에 먹혀드는 현실이 문제다. 매우 감성적이고 선동적인 매카시즘은 쉽게 광풍(狂風)으로 몰아치다 순식간에 역풍(逆風)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 바람에 휘둘리면 안 된다. 그러자면 매카시즘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매카시즘은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 매카시(McCarthy)의 피해망상에서 비롯된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1950년 매카시의 등장으로 매카시즘이 불어닥쳤고 54년 그의 몰락으로 바람이 그쳤다고 생각한다. 그런 정도가 아니다. 매카시즘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사회 전체를 우경화시킨 시대적 흐름이었다. 매카시 의원은 그 흐름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오용(誤用)한 인물이기에 오명(汚名)을 역사에 남겼을 뿐이다.

매카시즘의 진짜 원인은 적색 공포(Red Scare)다. ‘1차 적색 공포’는 1919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비롯됐다. 그런데 2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소련과 동맹국이 되면서 잠시 공포를 잊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스탈리니즘에 대한 ‘2차 적색 공포’가 시작됐다. 미국을 강타한 3대 적색 충격은 소련의 핵실험 성공(1949년 8월 29일)과 중국 공산화(1949년 10월 1일) 그리고 한국전쟁(1950년 6월 25일)이었다.

먼저 터진 소련의 핵실험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미국은 2차 대전 직후 스탈린의 동유럽 점령을 보면서도 “핵무기는 우리만 가지고 있으니까”라는 안도감에 여유를 잊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보다 훨씬 빨리 소련이 핵무기를 만든 것이다. 미국의 군사적 우위가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공포에 휩싸였다. 누군가 핵개발 정보를 소련에 넘겼다는 확신에서 간첩사냥에 나섰다. 로젠버그 부부가 핵 관련 자료를 소련에 넘겨준 혐의로 붙잡혔다. 로젠버그는 공산당원이었다. 명백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형당했다. 적색 공포는 일종의 보수 본능이다. 매카시즘이 미국을 휩쓴 것은 그만큼 공포가 컸기 때문이다. 그 여운도 길었다. 당시 매카시즘의 영웅은 정치판의 닉슨과 영화판의 레이건이었다. 70년대 닉슨, 80년대 레이건 대통령 시대를 거쳐 미국은 마침내 ‘악의 제국’에 승리했다. 탈(脫)이념의 시대가 시작됐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적색 공포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북한은 핵으로 무장했다. 천안함과 연평도 피격으로 적색 공포는 현실화됐다. 매카시즘 유령이 활개 치기에 적합한 환경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카시즘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매카시즘의 문제는 불법 사상검증이었다는 점이다. 행동이 아니라 생각을 처벌했다. 증거가 아니라 추정과 짐작으로 죄상을 따졌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방대한 민간인 불법사찰로 프라이버시를 침해했다. 이런 매카시즘은 안 된다. 그런 점에서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이석기·김재연 의원 문제도 적법한 틀 안에서, 그들의 행동에 대해 심판해야 맞다. 부정 경선을 저지르고, 이를 징계하는 중앙위원회를 폭력으로 무산시킨 이들의 반(反)민주적 행동을 따져 물어야 한다.

매카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안보 의식을 의심하게 만든 것’이다. 매카시즘에 대한 비난이 결국 건전한 안보 의식과 대공 경계심마저 죄악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국사범 경력이 있는 국회의원을 모두 종북이라고 몰아붙이는 주장이나 정대세를 인터뷰한 방송을 종북이라 주장하는 것 등은 경계해야 할 매카시즘이다. 이런 주장이 오히려 매카시즘이란 비난을 초래함으로써 건전한 안보 의식을 위축시킬 수 있다.

매카시즘은 양날의 칼이다. 보수는 색깔론의 유혹을 자제해야 한다. 진보는 건전한 안보 의식마저 매카시즘이라 매도해선 안 된다. 매카시즘의 칼날이 어디를 향할지 모른다.



오병상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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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2. 8. 14. 19:14

성숙해져 간다는 것은 남을 설득하려는 마음보다 이해하려는 마음이 좀더 넓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젊은 나이에 해야 하는 일이라면, 나이가 들수록 나와 생각이 완전히 다른 사람을 봤을 때라도 그를 원수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 삶에 대한 내 의견이 성장하면서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주변 환경에서 인연이 되어 만들어진 것이라면, 성장 배경이나 인연이 나와는 다른 사람도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들을 이해해보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Haidt) 교수의 연구가 상당히 흥미롭다. 하이트 교수는 스스로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이라고 여겨왔는데, 어느 날 보수 성향의 사람들을 좀 깊이 이해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많은 미국 사람들은 왜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민주당보다 부자들을 더 위하는 공화당에 표를 던지는지 궁금해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당연히 진보정당을 지지해야 옳은데 현실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종종 펼쳐지기 때문이다.


하이트 교수에 따르면 그 이유는 사람이 무엇에 대해 판단할 때 이성보다는 태어남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다섯 가지 본능적 직감에 의해 바로 판단하기 때문이란다. 이성은 직감이 먼저 판단한 것을 나중에 왜 그 판단이 옳았는지 밝혀내는 쪽에 주로 이용된단다. 그래서 의견이 다른 사람을 만나 이성적인 언어로 아무리 설득을 하려고 해도 설득이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단다. 이 다섯 가지 직감은 1)연약한 대상을 보살피려는 본능 2)공정해야 한다는 본능 3)자기가 속한 그룹에 충성해야 한다는 본능 4)윗사람을 공경해야 한다는 본능 5)순결과 신성함을 소중하게 여기는 본능에 기반을 둔단다. 이 다섯 가지 본능 때문에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문명을 만들어 이 땅에 존재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본능 가운데 첫째와 둘째의 본능은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나 다 발달되어 가지고 있다. 만약에 모르는 어린아이가 차가 오는 도로에 뛰어들려고 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아이를 붙잡으려고 한다. 또한 공정하지 못한 상황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는 본능도 보편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그런데 나머지 본능은 보수 성향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많이 발달된 양상을 보인다고 한다. 보수 성향을 가진 사람일수록 애국심을 무척 중요시하고, 권위를 가진 사람들을 존경하며, 혈통이나 성의 순결성, 종교 의례의 신성함을 강조한다. 반대로 진보 성향의 사람들에겐 자기가 속한 그룹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나와 다름도 인정해주려고 하고, 권력자를 향한 존경보다는 그들에 의해 공정함이 손상되지 않는지 감시하려고 하고, 순결이나 신성함의 추구가 오히려 약자들의 권리를 누른다고 생각한다.


하이트 교수의 이 연구는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밝혀주는데, 사회적 약자나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당인 공화당에 표를 던지는 이유가 단순히 그들이 무식해서가 아니라,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느끼는 나머지 세 가지 본능을 그들은 중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 세 가지 본능적 가치를 중시하기 때문에 혁명이 있는 가운데서도 사회질서가 유지되었고, 또 어느 한쪽만을 절대적 가치로 여기면 사람들은 위험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미국의 예이지만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비슷한 갈등을 겪고 있는 우리들도 하이트 교수의 연구를 참조해보면 서로를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것 같다.


혜민 미국 햄프셔대학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37169.html

Posted by 겟업
2012. 8. 14. 19:13

김석동 금융위원장과 강만수 산업은행 총재의 발언이 지난주 경제계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 현재 악화일로로 치닫는 유럽 위기의 성격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1930년대 대공황 이래 자본주의의 최대 위기로 진단했다. 우선 양적으로는 스페인까지 금융 위기가 전면화될 경우 그 회복은 향후 어쩌면 10년이 넘도록 찾아오지 않을 만큼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경기 침체가 세계 경제를 덮치게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담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다. 이번 위기의 진정한 특징은 이것이 자본주의의 근본적 위기로서 그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게 될 제도적 구조의 위기라는 성격 규정도 함께 덧붙였다. 

언론에서는 일국의 경제 정책을 지도할 위치의 인물들이 이러한 큰 이야기를 덜컥 꺼내 놓아 가뜩이나 불안으로 점철된 국내의 금융 시장을 더욱 얼어붙게 만든 경솔한 행동이 아니었느냐는 질타가 많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 유럽 위기가 어떤 상황으로 접어들고 있으며 이것이 유럽만이 아니라 세계 경제를 어떤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는가를 조금이라도 지켜보았다면 이것이 결코 '경솔한' 발언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우선 지금 유럽 위기는 국민 국가 차원에서 위기를 풀며 이를 IMF나 몇 가지 초국적 기구의 도움으로 해결한다는 전통적인 해결 방식도, 그리고 신자유주의 경제 이론의 유토피아적 화폐 이론에 근거한 유로존의 구상도 모두 끝장을 내버렸다. 이제 프랑스는 유로본드 구상을, 독일은 재정 동맹 구상을 내놓는 등 유럽 전체 차원에서의 해법으로 넘어가고 있다. 물론 이것이 현존하는 모순과 위기의 자동적인 해결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단지 새로운 수준에서 새로운 양상으로 문제를 전개시키게 되어 있다는 것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은 이제 '스테이지 투'로 넘어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스테이지 스리'는 아마 전 세계 경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산업 경기 회복이 다시 사라지고 있는 데다가 지난 몇 년간 위기의 세계 경제에서 꾸준한 밑불이자 엔진이 되어 줬던 중국 경제는 각종 산업 관련 지표가 일제히 동반 추락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누리엘 루비니가 말한 '퍼펙트 스톰'이 그대로 오고 있는 게 아니냐는 걱정은 너무나 당연하다. 문제는 이번 위기의 질적 차원으로, 소위 '복합 위기'라는 성격에도 있다. 김석동 위원장이 지적하였듯, 스페인은 사실상 저축은행을 중심으로 한 은행 금융 위기이며, 그리스는 익히 알려져 있듯이 재정 위기이며, 미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은 사실상 산업 침체의 위기로서 모두 성격이 다르다.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여러 양상의 위기가 현재는 서로가 서로의 원인과 결과로 엮여서 단일한 하나의 '복합 위기'로서 전 세계 경제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는가. 무엇보다도 지난 30년간 산업과 경제에 있어서 절대적인 최상의 조직 및 운영 기관으로서 자본 및 금융 시장을 대형화 지구화하고 최대한의 자유를 허락한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경제학자들이 그동안 무책임하게 강변했던 것처럼 이 지구화 탈규제화된 자본 및 금융 시장은 모든 자산의 적정 가격을 찾아 주고 최상의 효율적 자원 배분을 이루기는커녕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자산 거품과 정부 금융 기관 가정 경제 할 것 없이 모조리 최악의 빚더미에 올려 놓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러한 금융 및 자본 시장의 환상적 작동 속에서 전 지구의 무수한 행위자들의 다종다기한 경제 활동은 지구 위의 모든 곳을 들쑤시고 다닌 자본의 흐름 속에서 긴밀한 하나의 금융 및 신용망 속에 연결되었다. 

김석동 강만수 두 사람이 모두 현존하는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질적 전환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맥락을 따져 볼 때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비판의 논점은 다른 곳에 있다. 과연 그렇게 이야기한 두 사람과 우리 경제 관료들은 그러한 패러다임 전환에 걸맞는 정책과 제도의 준비를 하고 있는가.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김석동 위원장은 우리은행의 외자 매각 가능성을, 강만수 총재는 '메가뱅크 대망론'을 설파하지 않았던가. 과연 우리는 이러한 100년만의 양적 질적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갈만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까.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6/h201206102109402437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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