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 대한 거액의 구제금융으로 한풀 꺾이는가 싶던 유럽의 재정위기가 다시금 악화되고 있다. 스페인에 대한 응급처방만으론 유럽이 직면하고 있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해소할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 근본적이고도 구조적인 문제의 발원지는 바로 유로존 자체다. 남유럽 국가들이 줄줄이 재정위기에 빠진 데는 각국의 방만한 재정운용 탓이 크지만 그 근저에는 유로화(貨)로의 무리한 통화통합이라는 원인행위가 자리잡고 있다.
유럽연합(EU)은 통합유럽의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급속히 외연을 넓혀나가는 와중에 실력이 되지 않는 나라들까지 한꺼번에 유로존에 편입했다. 내실이 탄탄한 독일 같은 나라와 경제체질이 허약한 그리스 같은 나라가 다같이 유로화를 쓰게 됐으니 애초부터 탈이 날 수밖에 없었다. 통화는 한 나라의 경제 실력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경쟁력이 강하고 수출을 많이 하는 나라의 통화는 강하고, 경쟁력이 떨어지고 수입이 많은 나라의 통화는 약하다. 그런데 경제체력이 제각기 다른 나라들을 한데 묶어 유로화라는 단일통화를 사용하다 보니 통화의 물타기가 벌어졌다. 독일 입장에선 단일 통화 유로가 이전의 마르크화에 비해 약해진 반면, 그리스에 유로화는 이전의 드라크마화보다 훨씬 강해졌다. 독일엔 단일통화가 사실상의 평가절하였고, 그리스엔 강제적인 평가절상이었던 셈이다. 독일의 수출경쟁력은 더욱 강해졌고, 그리스의 경쟁력은 원래 실력보다 더 떨어졌다. 통화가치의 측면만 보면 통화통합의 최대 수혜자는 독일이었고, 최대 피해자는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이었다.
물론 통화통합만으로 재정위기가 벌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이 생산성을 높여 강세 통화에 걸맞은 경쟁력을 갖췄다면 좋았으련만 불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상대적으로 값싸진 수입품과 독일과 북유럽 등 통화강국의 황홀한 복지시스템에 흠뻑 취했다. 그 결과가 막대한 재정적자와 나랏빚으로 남았다. 실력은 없으면서 부자 나라의 행태만 좇아가려니 빚만 늘어난 것이다. 불편한 비유겠지만 가난한 월급쟁이가 빚을 내서 부자들이 쓰는 명품을 사들인 꼴이나 매한가지다.
이제 즐거웠던 단일통화의 향연이 끝나고 빚잔치만 남았다. 길은 두 가지다. 통합유럽의 원대한 꿈을 접고 유로존 해체의 길을 가느냐, 아니면 구제금융과 빚 탕감을 통해 유로존을 유지하느냐다. 어느 쪽이든 고통스러운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선택의 열쇠는 독일이 쥐고 있다. 유로존을 해체하자니 단일통화의 이점이 사라짐과 동시에 막대한 부실채권을 떠안아야 한다. 남유럽 국채의 최대 채권자인 독일 은행들의 연쇄부실을 피할 수 없다. 독일은 분열된 유럽과 함께 세계사의 중심무대에서 퇴장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유로존을 유지하자니 기존의 빚을 털어주는 것은 물론 어마어마한 규모의 구제금융 자금을 새로 퍼부어야 할 판이다. 자칫하면 독일마저 빚더미에 짓눌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여전히 장고(長考) 중이다.
현재로선 유럽을 살릴 수 있는 해법은 후자뿐이다. 독일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럽중앙은행(ECB)이 위기 국가들의 국채를 무제한 사들이고, 유로본드를 발행해 위기 국가의 부채를 유럽 전체가 공동으로 부담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위기의 해법은 더 깊은 정치적 통합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메르켈 총리는 구제금융 확대와 유로본드 발행의 전제조건으로 “더 많은 유럽(more Europe)”을 언급했다. 그가 말하는 ‘더 많은 유럽’이란 실은 더욱 강력한 재정과 정치통합을 의미한다. 재정위기 국가들을 유럽연합의 이름으로 구제해 주는 대신 재정적 자주권과 정치적 자치권의 포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번 유럽의 재정위기는 재정통합 없는 통화통합의 피할 수 없는 파국적 귀결이었다. 유로존의 많은 나라가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유지한다’는 유럽연합 가입조건을 지키지 못했다. 남유럽 위기 국가들은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붙여진 GDP의 5% 남짓의 재정적자 비율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긴축과 구조조정 요구가 가혹하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에 반해 독일은 구제금융을 통해 유로존에 잔류하려면 재정운용의 권한을 유럽연합에 넘기라는 것이다. 재정운용의 자율권은 바로 경제주권이다. 경제주권의 양도는 곧바로 국민국가(nation state)로서의 독립성을 상실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스가 긴축에 결사 반대하고, 스페인이 조건 없는 구제금융에 그토록 매달린 것은 재정의 자율성을 포기할 수 없다는 다짐이자, 독립국가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달라는 눈물겨운 호소다.
더 깊은 정치적 통합은 유로존의 금융과 재정을 통할하는 공동정부와 공동의회의 구성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유럽연합은 사실상 미국과 같은 연방국가 수준의 통합에 이르게 된다. 그동안 국민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했던 회원국들은 국방·외교·거시경제 정책의 권한을 공동정부와 유럽중앙은행에 넘기고 자치주의 형태로 남게 된다. 과연 유럽 각국이 이런 수준의 통합에 동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유럽의 재정위기는 경제 문제에서 시작됐지만 통합유럽과 국민국가 간의 갈등이라는 정치적 현안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이제 유로존의 해체냐, 더 깊은 통합이냐를 가르는 운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김종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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