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필 파커(36) 소령은 이라크전에 참전했던 2008년 2월 척추사고로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됐다. 16년간 군인으로 살아왔던 그는 목발을 짚고 2009년 4월 26일 런던 마라톤에 참가해 매일 3.2㎞씩 걸으면서 14일 만에 결승점을 밟았다. 그가 마라톤에 참가해 완주한 이유는 자기와 같은 상이군인을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서였다. 수많은 박수와 응원 속에 총 96만 파운드(약 18억원)의 기부금이 모였다.
올해 4월 22일 런던 마라톤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연출됐다. 3만6000명의 참가자가 모두 집으로 돌아갔지만 허리 아래가 마비된 장애인 클레어 로마스(32)는 출발 22일 만에 결승점에 도착했다. 생체공학 로봇 옷을 입고 기계음을 내면서 남편과 함께 5만5000걸음을 걸은 뒤 결승점에서 생후 13개월 된 딸과 감격의 키스를 했다. 당일 완주가 아니어서 공식 완주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참가자들이 자신의 완주 메달을 내놓았고 수많은 사람의 격려와 응원 메시지가 쏟아졌다. 그녀 역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마비 환자들의 치료 개발을 위한 의학연구단체에 기부금을 모아 주려고 대회에 참가했다.
런던 마라톤의 역사는 짧지만 단일 행사로 세계 제일의 기부금이 모이는, 살맛 나는 스토리텔링이 넘쳐나는 대회가 됐다. 올해도 사상 최대인 약 900억원이 모금됐다고 한다. 런던보다 마라톤 역사가 훨씬 오래된 대회가 많지만 선진국으로 불리는 데 적합한 품격인 자선과 기부를 생각할 때면 런던대회를 떠올리게 된다.
23일이면 한국 인구가 5000만 명을 넘게 된다.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이 2만3680달러였으므로 우리나라는 소득 2만 달러, 인구 5000만 명을 넘는 소위 ‘20-50클럽’에 세계 일곱 번째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영국이 여섯 번째로 가입한 후 16년 만의 일이며 다음 순서의 국가를 보기가 당분간 어렵다고 한다.
한국은 전쟁 폐허 속에서 60년 만에 국내총생산 1200조원(세계 15위), 무역 규모 1조 달러(세계 8위), 선진국만 개최할 수 있다는 4대 국제스포츠를 치를 수 있는 국가가 됐다. 선진 6개국이 ‘20-50클럽’에 가입한 뒤 4~14년이 지나 모두 ‘30-50클럽’에 등재한 경험법칙으로 보면 우리도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과거 선진국 모임의 대표 격인 주요 7개국(G7)과 비슷한 길에 들어섰다고 세계가 우리를 선진국으로 불러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로는 첫째, 정의로운 사회라고 아직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경제·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양극화가 심화돼 갈등과 분열이 깊어지고 있다. 1987년 민주화 항쟁 25주년이 되는 올해에도 경제 민주화의 외침이 크게 들리고 있다.
둘째, 글로벌 문화 수용력이 취약하다. 지금은 제조 수출산업시대의 일사불란한 내부 문화보다 혁신과 통섭을 통한 다양성과 창조성이 강조되는 시대다. 여기에 필요한 인력·지식·문화·자원 등을 받아들이려면 외부에 개방적인 문화가 폭넓게 수용돼야만 한다. 로마를 보라. 에스파냐 출신의 황제 트라야누스는 로마가 아닌, 정복지 출신 최초의 황제였지만 가장 넓게 영토를 확장시켰고 또한 ‘5인의 현명한 황제’ 중 한 사람이 됐다.
셋째, 선진국민으로서 품격이 국민의 삶과 문화 속에 더욱 배양돼야 한다. 인권·정직·질서·배려·기부·봉사 등이 중요한 사회적 품격이므로 무엇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적극 요청된다. 여기에도 로마의 선례가 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총신이었던 마에케나스는 2000년 전에 이미 예술부흥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오늘날 ‘메세나 운동’의 기원이 됐다.
8000억원을 교육재단에 출연해 우리나라 개인기부 최다 기록을 세운 삼영화학의 이종환(90) 회장은 ‘한국의 빌 게이츠’를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현재까지 약 80억 달러를 기부한 세계 7위 갑부인 조지 소로스(81) 회장은 세금을 더 내 국가 시스템 안에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게 효율적이라고 했다.
한국도 더 많은 기부자와 기부금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시스템 안에서 구휼사업이 더욱 많아져야 하고 더 많은 보편적 복지도 만들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업이나 부자들의 기부 내용을 헤아리기보다 내 주머니에서 지극히 적은 것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기부문화가 확산되는 것이다. 필자 자신, 지난 11년 동안 32번의 마라톤에서 총 20억원이 넘는 모금을 했던 경험을 돌아보건대 한국에서도 ‘20-50클럽’ 시대의 나눔문화를 꽃피울 수 있다고 확신한다.
신헌철 SK미소금융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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