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있는삶'에 해당되는 글 1071건

  1. 2012.09.22 [중앙시평] 민족주의란 이름의 괴물
  2. 2012.09.22 [사색의 향기/8월 21일] '럭셔리' 헤어숍에게
  3. 2012.09.22 [글로벌 아이] 희망과 공포 사이의 겸허함
  4. 2012.09.22 [세상 읽기] 피해자 의식을 넘어서 연대로 / 김동춘
  5. 2012.09.22 [김순덕 칼럼] 일본이 스스로 보여 준 정체성
  6. 2012.09.22 [광화문에서/윤종구]대통령의 독도 방문이 아쉬운 이유
  7. 2012.09.22 [동서남북] '중국産'이 미디어 시장도 장악한다면
  8. 2012.09.22 1969년 달착륙 과정을 1865년에 예언
  9. 2012.09.22 인생은 소중하니까
  10. 2012.09.22 [@뉴스룸/전승훈]런던스타일과 강남스타일
  11. 2012.09.22 [양선희의 시시각각] 식량 부족한 날이 온다
  12. 2012.09.22 [세상 읽기] 내가 구자철 선수에게 푹 빠진 이유 / 장대익
  13. 2012.09.22 [아침을 열며/8월 15일] 올림픽, 8·15, 그리고 한류
  14. 2012.09.22 [도정일 칼럼/8월 15일] 우리 본성 속의 더 나은 천사
  15. 2012.09.22 [세상 읽기] 싸이의 말춤은 막춤이 아니다 / 장대익
  16. 2012.09.22 [왜냐면] ‘세계시민’으로서 사형제 바라보기
  17. 2012.09.22 [동아광장/김용하]베이비부머보다 에코세대가 행복하다
  18. 2012.09.22 [광화문에서/허문명]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화해
  19. 2012.09.22 [특파원 칼럼/배극인]한일관계 출발선 다시 그려야
  20. 2012.09.22 [특파원 칼럼/정미경]스토리가 있는 대선 후보
2012. 9. 22. 20:31

민족주의는 괴물이다. 평소엔 숨어 있어 잘 모른다. 모습을 나타내면 상상 밖의 힘을 발휘한다. 잘 다스리면 폭발적 동력이 되지만, 고삐를 놓쳤을 경우 엄청난 희생을 초래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독일 민족주의를 보면 괴물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1807년 독일 철학자 피히테의 대중 강연 ‘독일 국민에게 고함’은 민족주의를 공동체 발전동력으로 승화시킨 성공사례다. 프랑스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을 점령하자 독일인들은 절망한다. 피히테의 표현에 따르면 “죽은 몸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병 걸린 둥지(몸)로 돌아갈 수 없을까 하고 헛되이 애쓰는 망령”과 같았다.

 그런 독일인에게 피히테는 민족주의를 외쳤다. “여러분이 결연히 분기한다면, 독일인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기념을 약속하는 한 시대가 꽃피어 오르는 것을 볼 것이며, 독일의 이름이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영광스러운 민족으로 드높여지는 것을 볼 것”이라고 외쳤다. 결연히 분기하는 방법으로 교육혁명을 강조했다. 국민교육을 통해 (패전의 원인인) 이기심을 타파하자는 것이다.

 당시 유럽은 근대적 의미의 민족주의와 국민국가가 막 형성되던 시기였다. 프랑스에 짓밟힌 독일은 게르만 민족주의라는 동력에 불을 지펴 통일과 국민국가 형성의 길로 나섰다. 그 결과 64년 만에 프랑스와의 전쟁에 승리해 베르사유 궁전에서 ‘제2 제국’을 선포함으로써 통일의 꿈을 이루었다.


반면 히틀러의 나치즘은 최악의 민족주의로 꼽힌다. 나치즘은 독일 민족주의에 인종주의까지 가미된 파시즘이다. 우수한 독일 민족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독일인의 혈통과 명예를 보호하기 위한 법’을 만들었다. 유대인과 독일인의 결혼을 금지하고, 모든 신랑·신부는 혈통에 관한 증빙서류를 제출하게 했다. 불순한 혈통에 대한 대청소가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다. 열등민족에 대한 지배는 곧 2차 대전이었다. 주목할 대목은 히틀러 역시 민주적 절차로 집권했다는 점이다. 독일 국민은 정치적 선동에 휩쓸려 민족주의란 괴물의 고삐를 놓쳐버렸음을 당시엔 알지 못했다.


 이런 아픈 역사가 있기에 서구에선 ‘민족주의’라고 하면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민족주의를 뜻하는 쇼비니즘(chauvinism) 혹은 징고이즘(jingoism)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배타적 민족주의와 전쟁에 대한 공포심이 널리 퍼져 있기에 유럽통합이란 국경 허물기가 가능했다. 21세기 유럽에선 적어도 국가 차원의 민족주의는 사라졌다.

 반면 최근 민족주의의 화약고로 떠오르고 있는 지역이 동북아시아다. 우리나라와 중국, 그리고 일본. 세 나라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를 지니고 있다.

 첫째, 세 나라는 유구한 민족적 정체성을 자랑한다. 세 나라는 각각의 영토에서 수천 년의 민족공동체를 꾸려왔다.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라 자부하는 중국의 중화민족주의는 긴 말이 필요 없다. 일본은 더 독특하다. 만세일손(萬世一孫)의 천황(일왕)이 다스리는 신국(神國·신의 나라)이라고 생각한다. 민족주의의 토양은 깊고 풍성하다.

 둘째, 결정적으로 세 나라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직접 가해·피해 당사자로서 아직 생생한 기억을 지닌 채 국경을 맞대고 있다. 작은 일에도 아픈 기억에 민족주의가 되살아난다. 특히 국경 문제는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이라 더더욱 민족감정을 자극한다. 중국과 한국에선 민족주의가 독립운동의 이념이었기에 지금도 신성하다.

 셋째, 동북아 지역은 패권이동의 변혁기다. 일본이 가라앉고 중국이 아편전쟁 이후 100년 만에 굴기(<5D1B>起)하면서 힘의 이동이 급속히 이뤄지고 있기에 마찰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일본이 상실감과 중국의 자존심은 화력 좋은 불쏘시개다.

 넷째, 2012년 현시점에서 세 나라는 모두 권력 이양기다. 이명박(MB)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잇따른 발언은 레임덕 대통령의 자구책으로 풀이된다. 일본 노다 총리 역시 민주당 정권의 명운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외교적으로 유약하다”는 비난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10년 주기의 지도부 교체를 눈앞에 둔 중국의 경우 더 민감하다. 과거와 달리 대중적 지지를 의식하지 않고는 권좌에 오르기도, 유지하기도 어렵게 됐다. 중국 네티즌의 민족주의 열기는 폭발 직전이다. 중국은 이런 열기를 적절히 외부로 발산함으로써 내부 단속을 꾀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최악은 ‘정치인에 의한 민족주의 자극’이다. 그런 점에서 MB의 갑작스러운 대일 강경책은 ‘맞는 얘기’지만 ‘바람직하진 않은 행동’이었다. 민족주의라는 괴물의 고삐를 놓치지 않으려면 냉정해야 한다.



오병상 수석논설위원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108907&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2. 9. 22. 20:30

일 관계로 강남에 갔다가, 나간 김에 인근의 한 미용실에 들렀다. 머리를 자르는 동안 헤어디자이너와 이런 저런 대화가 오가기 마련인데, 대화가 막힌 시점에서 미용실의 이름 뜻을 물었다. 발음도 못하겠는, 낯선 단어였던 때문이다. 이름은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였다. 사각사각 가위소리 뒤로, 요즘 상류문화는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라는 설명이 따라왔다. 최근 주변에 새로 생긴 헤어숍 이름은 라틴어라며, 발 빠른 경쟁자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미용실, 미장원이라고 부르면 왠지 격하시킨 것처럼 여겨지는 헤어숍들은 '코지'풍이든 '모던'풍이든 모두 '럭셔리'를 지향한다. 특히 강남으로 갈수록 그런 경향은 뚜렷해져서, 건물이나 실내장식의 위용과 세련됨이 놀라울 정도다. 그런데 이렇게 고급을 표방하고 유행에 민감한데도, 내가 엄마 따라 단발머리를 끊으러 가던 시절부터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실내에 비치된 여성지들이다. 

왜 미용실에는 여성지들만 비치되어 있을까. 두툼한 여성지들 사이에 흔히 '럭셔리 잡지'라고 부르는 무가지들이 추가된 것이 변화라면 변화다. 그럴 때면 헤어숍들의 이른 바 럭셔리 콘셉트라는 게 얼마나 상업적이며 외연에 치우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스스로는 헤어디자이너, 메이크업 아티스트 등의 이름으로 '미용'을 '예술'로 격상시킨 지 오랜데, 고객은 여전히 여성지만 읽는 주부 취급을 하는 것은 아닐까. 머리를 하는 동안에는 생각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라는 것일까. 휴식의 방법은 여성지들 안에만 있는 것일까. 머리를 말고 대기하는 그 길고 지루한 시간에, 선택의 여지없이 묵직한 책들을 집어들 때면 거의 취향을 강요 받는 느낌이다. 물론 여성지의 장점도 있다. 다만 다양성의 존중 차원에서 다른 책들의 비치는 어떤가, 권해보는 것이다. 

얼마 전 <영국은 주말에 오픈한다>라는 책을 출간한 지인으로부터 영국 브라이튼에 있는 한 미용실이 벽면마다 현대사진가의 사진을 걸어 전시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사실 미용실은 사진이든 그림이든, 전시를 하기 좋은 공간이다. '이발소 그림'이라는 말의 다른 측면을 살피면 이발소가 그림이 걸려 공유되는 공간이라는 뜻이 아닌가. (알다시피 요즘 헤어숍들은 남성고객들을 위한 '이발소' 역할도 한다)

전시까지 아니어도 괜찮다. 활자가 빼곡한 책들이야 어렵겠지만, 시각적인 책들은 얼마든지 비치가 가능하다. 화집과 사진집도 좋고, 요즘은 어른들을 위해 나온 수준 높은 동화들도 많다. 생활인으로서의 부분 외에도 지니고 있을 고객들의 다른 측면, 혹은 감성에 접근해보는 것이다. 

류가헌이 사진위주 전시장이니, 여기서는 사진집 이야기만 하기로 하자. 사진집은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시각언어다. 재빠르게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을 가능하게 한다. 금세 그 이미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집안이든, 공공장소에서든 책 한 권에서 이처럼 깊은 층위의 감동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사진집만한 것도 없다. 

또한, 오리지널 전시작이 아니어도 사진집 한 권에는 감동이 고스란하다. 전문 사진가가 찍은 사진이 아닌데도 우리 사진사에 회자되는 사진집 <윤미네 집>은, 한 아버지가 딸이 태어나서 시집가기까지를 기록한 책으로, 일반인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운 책이다. 사진집이 크고 무겁고 가격이 비싸다고 반박한다면, 열화당사진문고를 권할 수도 있다. 1만 원대의 가격, 손바닥만 한 크기의 책 안에 한 사진가의 작품세계가 압축되어 있어 감동의 수위가 높다. 

헤어숍에서 막 머리를 하고 온 주부이면서, 사진집을 출간하는 갤러리 관장으로서 어쩌면 새로운 '판로개척'을 모색하며 이 글을 쓰는 지도 모르겠다. 아무려나, 다음 번엔 어느 헤어숍에서 건 사진집 하나 만나게 되는 날을 꿈꾸며.



박미경 류가헌 갤러리 팀장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8/h20120820210355121760.htm


Posted by 겟업
2012. 9. 22. 20:29

며칠 전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는 영상을 봤다. 1995년 미국 몬태나주 헬레나에 있는 한 초등학교가 무대였다. 선생님이 5학년생 8명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 인터넷의 미래가 어떨 것 같니?”

 아이들은 이제 막 퍼져나가기 시작한 인터넷에 대해 갖가지 생각을 쏟아냈다.

 “전화기처럼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될 거예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도 채팅을 할 수 있어요.” “내 고양이 사진을 전 세계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돼요”….

 20년이 채 못 돼 아이들의 상상은 정확한 현실이 됐다.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언론들은 순수한 마음이 미래를 예측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기자의 생각은 다르다. 아이들이 미래를 봤다기보다는 우린 당대에 상상하고 꿈꿔온 것들을 하나씩 이뤄내 온 것이다.

 요즘 개인적으로 호기심을 가진 또 하나의 소재가 있다. 최근 화성에 안착한 미국 탐사로봇 ‘큐리오시티’가 보내오는 사진들이다. 화성의 모습은 놀랍게도 지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늘색은 몰라도 잔돌이 깔려 있는 바닥이나 언덕의 모습은 거의 흡사했다. 하늘만 손질하면 지구 어느 쯤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지구 침공을 꿈꾸는 외계인들이 살고 있다고 믿었던 화성은 이렇게 평범한 모습으로 베일을 벗고 있다. 그 평범함이 지구와 화성의 거리를 크게 좁혀놓을 거라는 상상을 해 본다. 전문가들은 15~20년 후면 일반인들의 화성 여행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인류는 상상에서나 존재했던 일들을 하나씩 현실화해 왔다. 20세기에 나온 공상과학 소설을 허황되다고 말할 사람은 더 이상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점에서 지금 우리가 꾸는 꿈도 가까운 미래에 이뤄질 것으로 믿는다. 20년 전 몬태나주 아이들이 미래를 정확히 그렸던 것처럼 화성 여행도 현실이 될 것이다. 상상한 대로 이룰 수 있다는 건 희망이고 축복이다.

 하지만 이런 낭만에 찬물을 끼얹는 뉴스도 이어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이러스의 습격이다. 최근 미국에선 일본뇌염 바이러스와 비슷한 ‘웨스트 나일 바이러스’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올 들어 미국에서만 26명이 숨지고 7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감염됐다. 사스·신종플루·조류독감 등 전 세계를 패닉 상태에 빠뜨렸던 바이러스의 공포는 중단될 줄 모른다. 아프리카에선 치료제도 없는 에볼라 바이러스가 다시 퍼져 지난달에만 수십 명이 죽었다고 한다.

 1958년 노벨생리학상 수상자인 조슈아 레더버그는 “인류의 지구 지배에서 단 하나 위협은 바이러스”라고 했다. 화성에 가고 무한한 꿈을 꾸는 인류지만 눈에 안 보이는 미세한 존재인 바이러스를 정복하지 못하고 있다. 수천 년 싸워왔어도 이길 승산이 안 보인다. 결국 희망과 공포 사이에서 겸허함을 가져야 하는 게 인간의 숙명인 듯하다. 그게 지구가 우리에게 주려는 교훈일지도 모른다.


이상복 워싱턴 특파원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098106&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2. 9. 22. 20:28

고문피해 생존자들의 모임인 ‘진실의 힘’이 국가폭력 피해 치유를 위한 씨앗기금으로 3000만원을 내놓았다고 한다. ‘진실의 힘’은 작년에도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의 심리치료를 위한 센터 ‘와락’ 건립을 위해 2000만원을 출연한 바 있다. 국가폭력의 피해는 결코 개인이 짊어져야 할 일이 아니고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짊어져야 할 책무라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가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2000만원을 생활보호 대상자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내놓은 일도 있었고, 황금자 할머니는 임대아파트에서 힘겹게 지내면서 정부에서 준 위로금과 폐지를 팔아서 모은 1억원을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써 달라고 유언장을 써 놓기도 했다. 또 김복동·길원옥 할머니는 자신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금을 받으면 콩고 등지 세계 각지의 전쟁피해여성을 위해 쓰겠다고 선언하여 ‘나비기금’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사실 이들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은 응당 국가로부터 위로와 보상을 받아야 하고, 가해자 처벌을 요구해야 하고,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리고서 그 대가로 호의호식해온 사람들에게 구상권까지 청구하는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에 의해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망가지고 가족도 제대로 꾸리지 못하고 처참한 가난에 신음하게 되었으면서도 자신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돈을 자기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오늘의 피해자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쾌척한 일 자체는 감동적이다. 이들에게 2000만원은 사회적 공격을 피하기 위해 기업가들이 내놓은 수천억의 기부금보다 값지다. 이들은 이미 도덕적으로 가해자들에게 이겼다. 장차 동참자들도 늘어날 것이다.


한편 우리도 국가나 대기업의 횡포로 피해를 받은 사람들의 권익투쟁에 힘을 보태야 하고 피해자의 고통에 동참해야 한다. 그러나 투쟁에는 함정이 있다. “악마와 싸우다 보면 악마를 닮는다”는 말처럼 권리 요구와 투쟁에만 매달리면, 투쟁의 대의에 소극적인 동료를 원망하거나 투쟁 노선을 둘러싸고 내부에서 분열 대립하기 쉽고, 결국 목표도 얻기 전에 스스로의 육체나 정신 모두를 망가뜨리는 수가 많다. 그리고 눈앞의 투쟁 목표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더 큰 목표나 이상을 놓치는 경우도 많다. 투쟁을 하는 목적은 우선 내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자는 데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억울한 피해자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 있다. 그래서 투쟁의 과정에는 언제나 힘없는 사람들이 서로 격려하고 힘을 얻을 수 있는 대안적 조직문화, 그리고 생산과 건설의 전망까지 어느 정도 바탕에 깔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다소 이상이기는 하지만 투쟁 속에서 새 인간, 관계, 국가, 사회의 싹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통합진보당이나 조직노조 활동이 뒷걸음친 이유는 너무나 명백하다. 폭력 탄압보다 더 무서운 것이 주체의 정신적 무장해제와 파편화다. 이익의 논리가 종교처럼 압도하는 ‘기업사회’는 모든 사람을 경쟁하는 개인으로 파편화한다. 사회관계가 비즈니스 논리로 움직이는 사회에서 가진 사람은 더 갖지 못해 안달하고, 못 가진 사람은 다 잃어버리지 않을까 불안해하기 때문에,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투쟁 구호는 대단히 전투적이지만, 힘들여서 ‘승리’해도 뿔뿔이 흩어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기업형슈퍼마켓(SSM) 반대 운동은 마을 살리기 운동이 되어야 하고, 비정규직 차별철폐운동은 노동자 서로돕기 운동과 결합되어야 한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의 손을 뻗으면 진보가 살 것이고 장차 진보정치도 살아날 것이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47897.html

Posted by 겟업
2012. 9. 22. 19:59

왜 일본은 독일처럼 못할까. 군국주의 시절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을 절대로,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는 일본을 볼 때마다 의아했다. 세계가 다 아는 ‘군 성노예’ 배상을 외면하는 일이 얼마나 일본 남자들을 징그럽게 만드는지, 잊을 만하면 독도를 들먹이는 게 얼마나 식민지배 근성을 드러내는지 그들은 모르는 건가, 모르는 척하는 건가.

일왕 언급에 경악…神政국가인가

“아키히토(明仁) 일왕도 한국을 방문하고 싶으면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들을 찾아가서 진심으로 사과하면 좋겠다”는 우리 대통령의 발언에 일본 열도가 뒤집힌 모양이다. 

일본에선 교통사고가 늘어나도 총리가 ‘통석의 염’ 운운하며 국민에게 사과한다는데, 1989년 일왕이 그 말을 했을 때는 그것도 모르고 해석에 골몰했다. 그렇게 어려운 말이나 하려면 안 오는 게 낫다는 언급에 아사히신문까지 “국가 원수로서의 품격을 잃었다고 할 수 있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마호메트를 불경스럽게 그렸다고 이슬람권이 발칵 했을 때를 연상케 한다. 일본이 왕정(王政) 아닌 신정(神政)국가라도 되는 것 같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곧바로 독일제국의 이름으로 이뤄진 모든 죄과를 국가적 차원에서 사죄했고, 물질적 정신적 보상을 해 왔다. 1970년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해 유대인 희생자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사진은 다시 봐도 뭉클하다. 

개인이라면 죄의식이 없을 수도 있다. 유대인 대량학살의 책임자인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도 법정에서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이라고 뻔뻔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독일은 책임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상국가’가 될 수 있었다. 유로존 위기가 닥치자 과거 전쟁으로 못 꺾었던 나라들을 경제로 무릎 꿇게 만든 힘도 여기서 나왔다.

일본이 독일처럼 못 된 이유를 “독일은 1945년을 ‘0시’로 삼아 과거와 완전히 단절했지만 일본은 못 했기 때문”이라고 이언 부루마는 ‘죄의 값’에서 지적했다. 천황제를 통해 자신들이 신의 민족이라고 믿어 온 일본인은 패전 후에도 천황제를 유지함으로써 민족적 우월성을 고수한다. 때론 노골적으로 이웃나라를 멸시하는 것도 이들에겐 당연하다. 명령과 복종을 끔찍이 여기고, 전체주의와 집단의식에 젖어 민주주의와 잘 맞지 않는 기질도 이와 무관치 않다.

10년 전까지 일본처럼 환상 속에 살던 나라가 또 있었다. 합스부르크 황실의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는 오스트리아다. 나치 독일에 기꺼이 합병된 오스트리아는 독일 뺨치게 유대인 학살에 열을 올리고도 패전 뒤에는 ‘나치의 피해자’를 자처했다. 그러고는 영세중립국을 표방하고 경제에 매진해 선진국으로 변신했다. ‘원폭 희생자’라면서, 우리나라보다 더 불쌍하고도 평화를 사랑하는 모습으로 미국과 경제에 매달린 일본과 참으로 비슷하다.

‘많이 아픈 나라’ 증거 같은 행태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나라답게 오스트리아는 불쾌한 기억을 무의식 속에 묻어 두는 ‘억압’ 기제에 능했다. 나치에 협력한 정치인과 관료들이 전후에도 고위직을 차지했고, 학교 역사시간엔 2차대전 전까지만 가르칠 정도였다. 굴욕을 참느니 차라리 할복하는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는 억압 기제의 극단적 발현이다. 만행을 저지른 세대는 의도적으로 과거를 버렸고, 젊은 세대에게는 아예 알리지 않았다. 따라서 진심으로 사과를 할 것도 없는 기형적 상황이 된 셈이다.

사람이 사람을 중히 여기는 인류 보편의 가치와 너무나 먼 이런 나라는 정상국가라고 하기 어렵다. 오스트리아도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쿠르트 발트하임이 나치에 복무했다는 것을 알면서 1986년 대통령으로 뽑는 ‘공범의 시절’이 있었다. 1999년엔 나치 고위직 출신이 낀 극우정당을 제1당으로 만들 만큼 이 나라 사람들은 죄의식 제로 속에 살았다.

이런 나라를 정상국가로 돌려놓은 것이 2000년 유럽연합(EU) 14개 국가의 압력과 미디어였다. 유대인의 집단배상소송까지 쏟아져 엄청난 배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는 고립될 수 없었던 오스트리아는 2002년 총선에서 극우당을 몰락시킴으로써 비로소 독일처럼 됐다는 평가를 얻을 수 있었다.

일본이라고 이런 압력을 안 받는 게 아니다. 미국 캐나다 유럽의회 등 전 세계가 일본의 ‘군 성노예’ 강제행위를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도 국가적 잘못을 인정하고 인류 보편의 가치로 돌아서기는커녕 일왕을 언급한 것만으로도 온 나라가 뒤집어진다는 건, 일본이 많이 아프다는 증거다.

그래서야 우리와 같이 자유민주주의라는 공통의 가치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더구나 올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로 일본이 국제사회에 복귀한 지 60년이 되는 해다. 아무리 평화헌법을 고친다 해도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고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는 한, 일본은 문명사회를 선도하는 국가라 할 수 없다.


김순덕 논설위원


http://news.donga.com/3/all/20120820/48733287/1

Posted by 겟업
2012. 9. 22. 19:57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에 간다는 얘길 처음 들은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드디어 우리 대통령이 우리 땅 독도에 가는구나! 얼마 전까지 도쿄 특파원으로 일본이 지속적이고 의도적으로 역사 왜곡과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화해 온 것을 지켜본 터라 통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시원한 가슴과는 달리 머릿속에선 아쉬움이 컸다. 정치는 가슴으로 할 수 있지만 국익이 최우선인 외교는 다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앞장서서 미국과 얼굴 붉히고 일본과 ‘외교 전쟁’을 벌이고 동북아균형자론을 역설했던 2005년, 당시 외교통상부 출입기자로서 느꼈던 감정과 비슷했다. 그때도 많은 사람이 가슴 시원함을 느꼈지만 결국 남은 게 뭐 있나.

대통령은 독도 방문 배경을 설명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 조금도 반성과 해결 의지를 안 보이는 일본 정부를 탓했다. 동감이다. 일본은 석고대죄해도 모자란다. 그러나 정말 나무라고 싶었다면 상대를 부끄럽게 만들었어야 했다. 기자 초년병 시절 선배에게 들은 얘기가 있다. 비판기사를 쓸 땐 상대를 부끄럽게 만들어야지 화나게 해선 안 된다고. 외교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독도에 다녀온 뒤 대통령이 쏟아 낸 일련의 발언에선 3년 전부터 준비해 왔다는 전략적 치밀함을 찾기 어려웠다.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영향력도 이전 같지 않다.” “일왕이 또 ‘통석의 염’ 뭐가 어쩌고 이런 단어 하나 찾아서 올 거면 올 필요 없다.” 백번 옳은 말이다. 그러나 옳은 말이라고 아무 때나 여과 없이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외교에선 더욱 그렇다.

외교는 상대가 있고,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근본적 잘못이 일본에 있다 하더라도 잔뜩 화가 난 상대에게 제2, 제3의 말 펀치를 날릴 필요까지 있었나 싶다. 특히 일왕 관련 발언은 일본인 대부분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사족(蛇足)이었다.

대통령은 최고의 외교관인 동시에 최후의 외교관이다. 비장의 무기는 품속에서 슬쩍 꺼내는 시늉만으로 최고의 힘을 발휘한다. 써 버리면 더는 비장의 무기가 아니다. 독도 문제에선 누가 뭐래도 ‘현재 소유하고 있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먼발치서 안달하는 일본으로선 ‘말’로 도발하는 게 고작이다. 우리는 그때마다 상응하는 ‘행동’으로 응징하면 될 일이다. 솔직히 영토 문제는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상황 관리가 중요한 이유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수수깡 베겠다고 보검을 휘두른 감이 없지 않다. 이제 방파제나 해양과학기지 등 독도 문제에서 일본을 압박할 수 있는 외교 카드가 예전 같은 약효를 발휘할지 의문이다.

정 가고 싶었다면 지지율 높고 힘이 있던 임기 초에 갈 일이었다. 그러면 한일 관계가 껄끄러워지더라도 시간을 갖고 소신 있게 풀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레임덕을 맞은 임기 말에 하니 여기저기서 국내 정치용이란 오해를 부르고 다음 정부에 짐을 떠넘겼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한일 관계에서 우리는 역사적 채권자와 같다. 국력은 아직 일본에 비할 바 아니지만 우리나라 대사가 주재국 총리나 장관을 수시로 만나는 강대국은 일본밖에 없다. 총리급 거물이 주미대사로 가도 미국 대통령은커녕 국무장관도 마음대로 못 만난다. 그게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이다. 일본에선 그래도 ‘한국이니까…’라는 뭔가 특별함이 있다. 최근 일본 내 친한파 사이에선 그런 특별 관계가 보통 관계로 바뀌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고 한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경제력만으로는 잴 수 없는 도덕적 역사적 우위를 우리 스스로 약화시킬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윤종구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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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19:51

요즘 국제 뉴스를 검색하다 보면 중국 신화통신의 영문 뉴스가 부쩍 늘었다는 걸 실감한다. 미국발 뉴스를 신화통신 영문 뉴스를 통해 먼저 알게 될 때도 있다. 신화통신은 2010년 24시간 영어 뉴스 채널도 시작했다. 신화통신 사장은 당시 기자회견에서 “중국의 관점에서 국제적인 비전을 보여주려는 정부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국영방송인 CCTV도 24시간 영어 뉴스 채널을 운영한다. CCTV는 2010년 수십명 수준이던 해외 인력을 올해 말까지 280명, 2016년까지는 80개 지국 500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CCTV는 미국 워싱턴에 기자 80명을 두고 있다. 이는 워싱턴에 있는 한국 특파원단 전부를 합한 숫자의 2~3배에 달한다.

CCTV의 해외 진출은 미국을 비롯, 유럽,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태평양 지역 등의 6개 지국을 중심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한다. 이 프로젝트의 명분은 ‘중국 시각으로 국제 뉴스를 전달하겠다’는 것이다. 서구 미디어들이 중국에 대한 편파적인 시각으로 중국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그리는 걸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은 위성TV 방송 ‘알자지라’의 성공을 눈여겨봤다고 한다. 알자지라는 중동과 아랍인 시각에서 국제 뉴스를 보도해 큰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중국의 꿈은 알자지라보다 더 커서 ‘세계적인 미디어 제국’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중국의 ‘국가적 사업’이라는 데 있다. 지난해 신화통신은 미국 뉴욕의 타임스스퀘어 근처에 사무실을 열었고, 타임스스퀘어의 전광판을 임차, 광고도 시작했다. 주요 언론사가 모여 있는 지역에 진출함으로써 국제적인 면모를 한층 강화한 듯했다. 하지만 뉴욕에서 영어로 보도한다 해도 신화통신이 결국 중국 공산당의 선전기구라는 점 때문에 경계의 눈길은 사라지지 않는다.

중국 보도기관들이 권력 감시와 공익 수호라는 언론의 기본 사명을 공유하는지도 의문이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보도기관들이 중국 당국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보시라이 전 충칭시 서기의 스캔들이나 티베트 독립운동 등을 속 시원하게 보도하지 않는다고 본다. 리비아 사태 때도 장기 집권 독재자 카다피 처지에서 보도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래서 중국 보도기관들의 세계 진출 확대에 대한 우려는 더 커지고 있다.

중국 정부는 국영 보도기관들의 해외 진출 프로젝트에 약 8조원을 쏟아부을 계획이다. 광고 시장 사정이 악화돼 세계 유수 언론사들마저 적자에 시달리다 규모를 축소하고 문을 닫는 마당에 이들은 국가 지원을 받으며 거침없이 활동 무대를 넓히고 있다. 사정이 어려운 개도국 언론사에 신화통신 영문 뉴스를 공짜로 제공하고, 언론 자유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베네수엘라 같은 나라에 통신위성을 지원한다. 중국산 뉴스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다. 이런 추세로 가다 보면 기존 언론사들의 활동이 위축된 상황에서 중국 당국의 통제를 받는 보도기관이 만들어낸 중국산 영문 뉴스가 미디어 시장에서 판치는 날이 곧 올 수도 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최근 “정보 전쟁에서 미국이 밀리고 있다”고 한 것도 중국의 이 같은 공세를 의식한 것이다.

중국 보도기관들의 해외 진출 확대 계획은 규모가 너무 커서 중국이 ‘미디어 항공모함’을 띄울 기세라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진짜 경계해야 할 것은 중국이 러시아에서 사들인 ‘바랴그’호를 개조해 만든 항공모함이 아니라 바로 이 미디어 항공모함이란 것이다. 세계가 가격 때문에 값싼 중국산 상품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국가 지원 덕에 비용을 고려하지 않고 대량생산할 수 있는 중국산 영문 뉴스를 볼 수밖에 없는 날이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중국산 뉴스엔 중국 당국의 시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이다.



강인선 국제부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19/201208190122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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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19:49

   1969년 달착륙 과정을 1865년에 예언

새 시대를 연 거목들 <19> 쥘 베른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의 역사는 오래다. 기원전 24세기 작품인 길가메시서사시(Gilgamesh敍事詩)를 사이언스 픽션의 원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이언스 픽션을 우리말로 공상과학소설이라고 옮기는 것은 일본 번역계를 따라 한 것이다. 공상(空想)은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리어 봄”이다. 부정적인 뜻이 담겼다. 공상이라는 군더더기 표현을 빼고 사이언스 픽션을 과학소설이라고 부르자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
‘사이언스 픽션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은 쥘 가브리엘 베른(1828~1905)이다. 베른을 취재한 1902년 6월 28일자 뉴욕타임스 기사도 그를 ‘과학 소설가(novelist of science)’라고 불렀다. 그가 쓴 소설은 ‘과학적 소설(scientific novel)’이라고 지칭했다. 

한 문학사학자에 따르면 베른은 역사상 228번째 과학소설가다. 하지만 작가ㆍ과학자ㆍ발명가에 미친 베른의 영향력을 넘볼 수 있는 과학소설가는 많지 않다. 베른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번역된 작가다. 일등은 추리소설가 애거사 크리스티(1890~1976)다. 

우주시대 그린 SF의 아버지
베른의 소설은 어린이용이 아니었다. 외국 출판사들 입장에서 베른의 소설은 어린이물 독서 시장에서 승산이 있었다. 외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베른의 소설은 원문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편집됐다. 다행인 것은 수많은 과학자들이 어린 시절부터 그의 소설을 만난 것이다. 우주 시대를 연 선구자들은 베른의 소설을 읽고 자란 ‘쥘 베른 키즈(kids)’다. 로켓ㆍ인공위성 연구의 선구자인 소련 항공학자 콘스탄틴 치올콥스키(1857~1935), ‘현대 로켓 공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고더드(1882~1945), 아폴로 계획을 성공시킨 베르너 폰 브라운(1912~1977)은 자신들이 베른의 『지구에서 달로(De la Terre <00E0> la lune)』(1865)를 읽으며 우주 여행을 꿈꿨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베른은 “뭐든지 한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베른은 『지구에서 달로』에서 인류가 달에 갔다 지구로 돌아오는 과정을 그렸다. 104년 후인 1969년, 아폴로 11호는 소설에서처럼 플로리다에서 발사돼 돌아올 때는 대양에 떨어져 회수됐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것들 중에는 잠수함, 기구(氣球)와 같이 이미 세상에 등장했던 것도 있었다. 달여행 소설의 원조도 머터그 먹더멋(Murtagh McDermott)의 『달여행(A Trip to the Moon)』(1728)이다. 베른의 작품에 나오지도 않는데 그가 발명한 것으로 일반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도 있다. TVㆍ원자폭탄ㆍ인터넷 같은 것들이다. 물론 베른이 실제 최초로 예언한 것들도 많다. 1920년에 처음 등장한 뉴스방송(newscast)을 베른은 1889년에 예언했다. 태양돛배(solar sail), 화상회의, 테이저(taser) 총, 사형용 전기의자도 베른이 원조다. 

쥘 베른은 2남3녀 중 장남으로 프랑스 낭트에서 출생했다. 낭트는 항구다. 출생지의 영향으로 베른은 어려서부터 모험ㆍ여행에 매료됐다. 베른의 소설은 과학소설이기 이전에 모험소설이다. 나중에 소설가로 성공해 큰돈을 벌게 되자 베른은 요트를 구입해 영국ㆍ프랑스ㆍ지중해 해안을 여행했다. 아마추어 시인이기도 한 아버지 피에르 베른은 변호사였다. 아들이 가업을 이어 변호사가 되기를 바랐다. 아들이 딴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생활비를 끊었다. 

베른에게는 10여 년간의 무명 시절이 있었다. 문학 살롱을 드나들며 희곡, 오페라 대본, 단편 소설을 집필했다.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바치는 시를 수십 편 쓰기도 했다. 1857년 결혼한 다음에는 생계를 위해 증권중개인으로 일했다. 꽤 소질이 있었으나 베른은 자신이 하는 증권 업무를 혐오했다. 

1862년 피에르-쥘 에첼(1814~1886)을 만나면서 운이 트이기 시작했다. 에첼은 드뮈세ㆍ발자크ㆍ보들레르ㆍ위고ㆍ조르주 상드 등 내로라 하는 문인들의 책을 출간했다. 번번이 거절당하던 베른의 원고를 에첼이 가능성을 알아보고 출간했다. 『5주간의 풍선여행』(1863)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베른의 출세작이었다. 기구를 타고 아프리카 나일강의 근원을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40세 중반 무렵에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됐다. 베른의 소설은 에첼이 한 달에 두 번씩 내는 『교육과 여가』라는 잡지에 연재됐다. 사람들은 베른의 소설을 읽기 위해 잡지를 샀다. 베른과 에첼은 20년 출판 계약을 맺었다. 베른은 1년에 2~3편 이상의 소설을 쏟아 냈다. 평생 100권을 쓰는 게 목표였다.

에첼이 베른이 이룩한 성공의 일등 공신이었다. 에첼은 무자비한 편집권한을 행사했다. 반유대주의적인 내용은 삭제했다. 불행의 그림자를 지우고 해피엔딩으로 바꿨다. 『해저 2만리』(1870)에 나오는 네모 선장은 원래는 ‘성격 좋은’ 사람이었으나 에첼이 신비롭고 비합리적인 인물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베른은 더 큰 부자가 될 뻔했다. 에첼은 베른에게 한동안 인세가 아니라 원고료만을 지불했다. 

당시 사람들은 과학에 대한 관심이 컸다. 독자들의 목마름을 해갈한 것은 베른이었다. 그는 과학과 지리학을 문학과 접목시킨 후 모험ㆍ여행과 버무려 새로운 소설 분야를 창출한 것이다. 베른은 매일 15종의 신문을 읽었다. 최신 과학ㆍ기술을 모니터링했다. 국립도서관은 그의 개인 서재와 같았다. 메모광이었던 베른은 방대한 독서를 통해 소설에 담길 과학ㆍ기술을 흡수했다. 얄궂게도 베른은 과학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중등교육을 받을 때 베른은 그리스어ㆍ라틴어ㆍ철학은 잘하는 편이었으나 과학 과목과 작문은 겨우 패스하는 수준이었다. 그의 진짜 관심사는 지리학이었다. 과학ㆍ기술의 예견에 있어서는 천재였으나 베른은 자전거에 대해서도 시큰둥했다. 전화도 가급적 피했다. 

베른의 문체는 시대를 앞섰다. 군더더기가 없고 사건이 속도감 있게 전개됐다. 베른은 알렉상드르 뒤마(1802~1870)와 빅토르 위고에게 글쓰기를 배웠다. 특히 뒤마는 매일매일 하루 중 정해진 시간은 집필에 할애해야 한다는 것을 베른에게 강조했다. 

국제금융이 지배하는 암울한 세상 예언 
베른이 세계적인 작가가 되자 그를 둘러싼 신화가 생겨났다. 그가 여행을 한 적이 없고 오로지 상상으로 글을 쓴다는 소문이 돌았다. 1880년대 후반 이탈리아에서는 그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이 유포됐다. 어떤 작가 집단이 베른이라는 필명으로 책을 뽑아낸다는 주장이었다. 

베른은 소설의 내용에서는 시대를 앞서갔지만 사회문화적으로는 그 시대의 산물이었다. 중년 이후에는 신앙심을 상실했지만 원래는 정통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한 보수적인 부르주아였다. 극우적 프랑스 민족주의자였으며 프랑스 제국주의를 지지했다. 소설 속에서 여성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지 않았다. 사랑 이야기도 없었다. 사랑에 대해 쓸 수 있는 재주가 자신에게는 없다고 고백했다. 

1871년 베른 가족은 아미앵으로 이주했다. 인구가 9만 명 정도였던 아미앵에 있는 그의 집은 루이 15세 시대 가구로 채웠지만 외양은 수수한 집이었다. 아미앵은 아내의 고향이기도 했다. 베른은 1856년 아미앵에서 거행된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아내 오노린을 만났다. 딸을 두 명 둔 과부였다. 둘은 이듬해 결혼했다. 부부는 베른이 1905년 당뇨합병증으로 사망할 때까지 해로했다. 

오노린은 베른이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했다. 베른은 소화불량, 안면근육마비 등의 증세로 고생했다. 그는 건강염려증(hypochondria) 환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베른을 아내는 부지런히 아들처럼 돌봤다. 오노린의 역할은 에첼 못지않게 중요했다. 『5주간의 풍선여행』이 번번이 출판사들로부터 무시당하자 베른은 원고를 불태워버리려고 했다. 아내가 막았다. 

아들 미셸과 관계도 순탄하지 않았다. 베른은 아들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나이가 들면서 사이가 원만해졌다. 베른의 사후에 서랍 속에서 수많은 원고가 발견됐다. 아버지의 저서를 사후에 출간한 것은 소설가가 된 아들 미셸이었다. 미셸은 베른의 원고를 심하게 편집하거나 아예 새로 썼다. 

베른은 1892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872년께부터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 물망에 올랐으나 실패했다. 열심히 로비를 했다. 질투 때문인지 아카데미프랑세즈는 그에게 결국 ‘신포도’가 됐다. 베른은 회원이 되는 것을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베른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1989년 베른의 증손자가 『20세기 파리』를 발견해 1994년 출간했다. 에첼이 20년 후에 출간하라고 권한 소설이었다. 과학이 고도로 발전했으나 사람들이 국제금융의 지배하에서 신음하는 시대를 예견한 소설이었다.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7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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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19:45

인생을 바꿀 만큼 강렬한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때는 몰랐어도 그 기억이 뇌리에 남아 인생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도 있다. 그런 순간은 주변 사람들을 통해 찾아오기도 한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왔다. 한국에서 만난 친구 벤을 통해서다. 올해 마흔이 된 벤은 얼마 전 종합건강검진을 받기로 했다. 한국에선 대부분의 직장에서 으레 종합검진을 받지만 미국에선 흔하지 않은 풍경이다. 벤은 ‘마흔 살이 됐으니 검진 한번 받아볼까’라는 마음으로 병원에 갔다고 한다.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보고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다.


그런데 결과는 뜻밖이었다. 그의 위와 신장에 악성 종양이 하나씩 발견된 데다 백혈구 수치도 높게 나왔다.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벤은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친구다. 하이킹, 달리기, 자전거 타기 그리고 스카이다이빙까지 한다. 건강 상태도 좋고, 활달하고 무엇보다 마흔 살밖에 되질 않았다. 벤과 악성 종양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적어도 우린 그렇게 생각했다.

검진 결과를 듣자마자 벤은 미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고 가족과 시간을 함께 보내기로 했다. 우리는 그가 떠나기 전날 조촐한 이별 파티를 했다. 파티 분위기가 조용하고 어색한 데다 착 가라앉았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벤의 미래는 불확실하고 불안했지만 벤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했다. 우린 모두 왁자지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느 파티처럼 서로 즐겁게 얘기하고, 웃고, 흥겨운 음악을 듣고 멋진 친구들과 시간을 함께 보냈다. 아마 벤을 이렇게 보는 건 마지막일 터였다. 하지만 벤은 악성 종양 때문에 친구들과의 시간을 우울하게 망치지 않았다.

그의 낙관주의적인 태도는 감동을 줬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돼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언제든 끝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린 왜 주어진 매 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걸까? 매 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1년 뒤 아니면 1시간 뒤 혹은 1분 뒤에도 우리 인생은 끝날 수 있다.
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면서, 또 인생을 잘 사는 태도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 머릿속엔 자꾸 내 젊은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술을 절대 안 드셨다. 종교적인 이유 때문도 아니고 알레르기 반응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아버지께 그 이유를 한 번 여쭤본 적이 있었다. 그의 답은 이랬다. “인생은 소중하니까.”

아버지의 이 말씀은 내 마음에 오래도록 맴돌았다. 아버진 인생의 소중함을 알고 계셨다. 인생의 가치를 알고 계셨다. 벤도 그렇듯이.
인생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됐다는 게 큰 행운처럼 느껴진다. 매일 난 내 인생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느끼고,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넘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름다운 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은 배가된다.

머릿속엔 아버지 말씀이 맴돈다. 인생은 소중하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 친구들과 함께 남산을 뛴다. 점심 시간엔 요가를 한다. 저녁엔 안락한 부엌에서 남자친구를 위해 건강식을 요리한다. 술은 절제해서 일정량만 마신다. 친구들과 가족들을 볼 때마다 내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한다. 내가 인생에 대해 더 조심스러운 태도를 갖고 더 감사한 마음을 가질수록 인생은 내게 더 소중한 시간을 선사한다.

우린 매일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를 격려해 주고 행복해 하는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 우리의 꿈을 실현해야 한다. 단 1초라도 화를 내거나 비관주의에 빠져 인생을 낭비해선 안 된다. 우린 살아 있다. 그게 전부다.

독자 여러분도 벤을 생각해 주시고 벤을 위해 기도해 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여러분의 소중한 인생, 마음껏 즐기시기를.

미셸 판스워스 신한은행 외국인고객 관리팀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7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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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19:43

12일 열린 런던 올림픽 폐막식은 현대 미술계의 악동 데이미언 허스트가 만든 거대한 유니언잭 모양의 무대에서 시작했다. 런던의 러시아워를 묘사한 장면에서 사람들의 옷은 물론 블랙캡 택시와 2층 버스도 모두 신문지로 싸여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신문지에는 셰익스피어, 찰스 디킨스, 존 밀턴, 윌리엄 워즈워스 같은 영국 대문호들의 작품이 인쇄돼 있었다. 오늘의 영국을 만들어낸 힘이 활자와 인문학에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활자로 시작한 폐막식은 조지 마이클, 스파이스 걸스, 더후, 뮤즈 등 팝음악 스타들과 패션계의 거장 알렉산더 매퀸, 타악 퍼포먼스 ‘스톰프’ 등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친 영국 대중문화의 창조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개막식에서 폴 매카트니가 ‘헤이 주드’를, 폐막식에서 퀸이 ‘위 윌 록 유’를 수만 명의 관객들과 함께 ‘떼 창’한 것은 정말 짜릿한 순간이었다.

개막식에서도 영국은 산업혁명, 여성참정권 운동, 국민의료서비스(NHS), 해리포터, 피터팬, 뮤지컬, 코미디까지 두루 자랑했다. 지난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중국은 인류 4대 발명품(나침반, 화약, 인쇄술, 종이)과 세계로 뻗는 중국의 힘을 과시했다. 그러나 런던 올림픽이 베이징 올림픽과 달리 쇼비니즘(배타적 애국주의) 논란에서 벗어나 세계인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곳곳에 숨겨진 ‘유머’의 힘 때문이었다. 

‘영국식 유머’(British Humour)는 ‘노팅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러브 액츄얼리’ 등 영국식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프랑스 유머가 남의 약점이나 순진함을 조롱하는 말장난이 많다면, 영국식 유머는 자기 자신까지도 농담의 대상으로 삼는 블랙유머가 많다. 이는 먼저 자기를 낮춤으로써 남의 공격을 예방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런던 올림픽은 진지하고 엄숙한 개막식에서 국가의 최고 존엄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86)을 웃음거리로 삼았다. 올해 즉위 60주년을 맞은 여왕이 제임스 본드와 함께 치마를 휘날리며 스카이다이빙을 하고(대역이었음),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미스터 빈’ 로언 앳킨슨이 무대 위에서 조는 장면에서 전 세계인들은 ‘빵’ 터졌다.

지난 한 달 동안 유튜브에서 최고의 조회수를 기록했던 싸이의 ‘강남스타일’도 세계의 공통언어인 유머의 힘을 보여준 사례다. 기름진 머리를 한 남자가 육중한 몸매로 말춤을 추는 장면을 본 외국인들은 컴퓨터 앞에서 파안대소하고, 패러디 동영상을 띄우면서 싸이의 유머에 동참했다. ‘런던스타일’이나 ‘강남스타일’도 모두 자신이 ‘가장 잘 나가는 핫(hot)한 존재’임을 강조했지만, 스스로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머로 세계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간 것이다.

런던 올림픽 개·폐막식을 본 탈북자들은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소감을 밝혔다. 북한의 아리랑축전이나 88 서울 올림픽,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등은 꽉 짜인 군대 열병식 같은 분위기였던 게 사실이다. 지난해 프랑스에서 관람했던 리틀엔젤스 공연이나 SM타운의 K팝 콘서트의 ‘집단 안무’도 경이롭지만 획일적인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2014년 인천 아시아경기 개·폐막식은 한국영화계의 거장 임권택 감독이 총감독을 맡는다고 한다. 한국의 ‘정(情)과 한(恨)’을 탁월하게 그려냈던 임 감독에게 세계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한국식 유머도 함께 기대해본다.

전승훈 문화부 차장



http://news.donga.com/3/all/20120816/48683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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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19:42

‘머지않아 식량 부족 사태가 오겠구나’. 이런 생각을 한 게 10여 년 전이다. 계기는 좀 허접하다. ‘중국 경제 대장정’ 기획 취재를 위해 20여 일간 중국 남부 연안도시들을 돌고 있을 때였다. 당시 식당에서 보니 중국인들의 먹는 양이 장난이 아니었다. 문득 ‘지금은 잘사는 이들 지역 음식 소비가 늘지만 중국 경제가 점점 발달해 엄청난 인구가 먹기 시작하면 식량이 남아나질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곡물시장 모니터링을 시작했다. 당시는 농산물 잉여의 시대였는데 불과 얼마 후부터 중국은 식량 순수입국으로 돌아섰고, 미국은 남아도는 옥수수로 바이오에탄올을 생산하겠다고 나섰으며, 기후변화로 인한 식량생산 경고 사인이 속속 올라왔다. 한데 이 모니터링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우리 식량안보를 위협하는 건 중국이 아니라 바로 우리나라의 기형적 식량정책이라는 것이었다.

 우린 쌀에 올인한 터라 쌀 자급률은 넘쳐서 남는 쌀을 내다버려야 할 정도인데, 나머지 곡물은 거의 전량 수입에 의존한다. 한 예로 식습관이 바뀌어 쌀 소비는 줄고, 육류 소비는 가파르게 늘어나는데 사료는 국내 조달이 안 된다. 우리 식량은 카길 등 4대 곡물 메이저와 일본계 종합상사들이 전체 수입량의 70%를 대고 있다. 식량자급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최하위(26%)이면서도 변변한 곡물유통기업도 없고, 해외 산지 곡물저장소나 곡물터미널 하나 없었다.

 이에 2006년 원자재 대란 위험을 경고한 신년기획 ‘세계는 자원전쟁 중’ 시리즈에서 에너지·광물자원과 함께 식량을 다루었다. 이 기획을 할 때만 해도 ‘넘치는 게 식량인데 오버한다’는 반응도 있었다. 그때까지 표면상 식량은 흔했다. 그러나 불과 얼마 안 돼 세계 곡물가격이 들썩이기 시작했고, 2008년 밀 산지의 기상이변에 가격이 폭등하는 ‘밀가루 파동’이 일어났다.

 자! 이번엔 미국 중서부의 심각한 가뭄이다. 이미 옥수수와 콩 값은 치솟고, 지구촌 곳곳에선 폭동조짐마저 나타난다. G20(주요 20개국)이 식량 때문에 긴급회의를 소집했고, 우리도 연일 농산물 가격 상승으로 물가가 오르는 ‘애그플레이션’ 걱정에 여념이 없다. 애그플레이션이란 용어는 등장한 지 불과 5~6년 만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다. 이렇게 ‘식량위기’는 일상화됐다.

 우리에게 기회는 있었다. 나 같은 비전문가조차 오래 전에 식량 위기 조짐을 읽었으니 전문가들은 당연히 알았을 거다. 그런데 대책은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밀가루 파동’ 당시 대통령까지 나서서 밀국수 대신 쌀국수를 먹자며 ‘정치쇼’로 대신했다. 시대에 맞는 농정의 틀을 다시 짜야 할 때, 이렇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며 세월을 보냈다.

 일본만 벤치마킹해도 그림은 보인다. 일본은 식량 자급률에선 우리보다 크게 나을 게 없지만 1980년대부터 종합상사들이 세계 각지에 곡물 저장소와 터미널, 해외 생산기지를 확보하고 곡물 유통에 나서 지금은 메이저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또 농민만 농지를 소유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 대신 기업도 농지 소유를 가능케 해 농업기업이 탄생했고, 농업 R&D 분야에도 투자를 쏟아붓는다.

 물론 최근 국내 종합상사들이 곡물 유통에 관심을 보이고, STX가 워싱턴주에 곡물터미널을 막 확보하는 등 변화 조짐은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농정은 여전히 쌀 중심이고, 농민 보호가 우선이다. 세계 식량산업은 ‘전략산업’으로 달려가는데, 우리는 여전히 농업에 대한 전략적·기술적 투자는 미흡하고, 1차 산업에 머무른다.

 이제 위기의 문턱이다. 식량산업을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됐다. 식량 생산성 향상 기술 확보, 메이저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종자 개발, 효율적인 농산물 생산구조 확립, 농업의 산업화, 글로벌 농산물 유통기업 육성 등 ‘식량산업 고도화’를 위해 투자해야 한다. 필요하면 ‘경자유전’ 원칙도 허물 수 있어야 한다. 왜 직업이 농업인 농민 회사원은 안 되나?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지 못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양선희 논설위원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071085&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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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19:39


“아빠, 생신 축하! 여기 선물이에요.” 초등학교 4학년 딸아이가 얇은 노트를 내민다. 수년 전 미국에 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아이가 건네준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쓴 ‘이야기’였다. 미국에 간 지 몇달밖에 안 된 때였는데, 영어로 이야기를 만들어서 아빠에게 선물할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귀엽고 대견했다. 매일 저녁에 글쓰기 숙제와 씨름하더니 아빠에게 생애 최고의 생일선물을 안겨준 것이다. 이럴 때 아빠는 지갑을 열게 되어 있다.


그러던 아이가 한국에 와서는 많이 달라졌다. 마치 학교는 쓰기, 읽기, 말하기 능력은 집에서 알아서 배우라는 식인 것 같다. 집에서 글쓰기 숙제를 하는 경우조차 거의 본 적이 없다. 내심 후속 이야기를 선물받고 싶었지만, 그 이후로 아이는 이야기 선물을 내밀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이번 런던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올림픽 축구 대표팀의 모든 경기를 보며 나는 구자철과 기성용 선수에게 푹 빠졌다. 물론 그들의 축구가 아름다웠기 때문이지만, 그 발놀림만큼이나 그들의 언어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한일전을 승리로 장식한 직후 구자철은 인터뷰에서 1년 전 삿포로에서 일본에 3 대 0으로 졌던 일을 차분히 회고했다. 그 당시 썼던 자신의 일기를 들먹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너무도 간절히 승리를 원했다는 느낌이 확실히 전달되는 인터뷰였다.


꽤 길었다. 마이크 앞에서 이렇게 길게 승리의 소감을 이야기하는 선수를 나는 여태 보지 못했다. 고생한 선수들에게 미안한 말이긴 하지만, 승리 소감을 말하는 선수들의 인터뷰는 “승리해서 기쁘고 우리 모두 잘해줬다” 정도여서 안 들어도 그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인터뷰 시간도 몇초면 된다. 하지만 그날 구자철은 달랐다. 뻔한 정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요한 경기를 에워싼 개인과 팀의 사연을 차근차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 구성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트위터에 소소한 이야기를 많이 올리는 기성용도 소통 능력이 뛰어난, 몇 안 되는 선수 중 하나다.

올림픽 축구대표팀 구자철이 지난 8월10일(현지시간) 영국 카디프 밀레니엄 스타디움에서 열린 일본과의 경기에서 후반 골을 성공시키고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카디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월드컵 4강에 올려놓기만 한 감독이라면 우리는 히딩크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을 것이다. “난 아직도 배고프다”와 같은 그의 명언이 회자되기에 그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농구에 천부적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이기지 못하지만, 열심히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넘지 못한다”는 명언을 남긴 마이클 조던이 공자의 <논어>를 읽었을 리는 없다. 농구 천재로서 자신이 경험한 바를 정확하게 표현하다 보니 진실의 수렴이 일어난 경우일 것이다. 우리의 뇌리에 오래 남는 선수는 운동을 잘하는 선수가 아니라 운동을 잘할 뿐만 아니라 소통 능력도 뛰어난 선수다.


사람들에게 역사상 누가 가장 뛰어난 과학자냐고 한번 물어보라. 아인슈타인, 뉴턴, 다윈 등을 지목할 것이다. 그들은 논문만 달랑 몇편 쓴 과학자가 아니었다. 혁명적인 연구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길게 책으로 펴낸 이들이다. 일반인이 가장 좋아하는 물리학자 파인먼, 천문학자 세이건, 생물학자 도킨스의 공통점은 뛰어난 연구자라는 사실만이 아니다. 각각 <물리학 강의>, <코스모스>, <이기적 유전자>와 같은 현대의 과학 고전을 쓴 탁월한 글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공계 인재들에게도 글쓰기 능력을 필수로 가르치자. 운동선수들에게도 말하기 능력을 가르치자.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독서 과제와 작문 숙제만큼은 꼬박꼬박 챙겨주자. 소통 능력은 기본기다. 다른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기본기가 없다면 오래가지 못한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4729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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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19:29

금년 8ㆍ15 광복절은 올림픽 이야기로 풀어가는 것이 당연할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나라가 1948년 7월,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처음으로 올림픽에 출전했던 곳이 바로 영국 런던이고, 이번에 바로 그 런던에서 원정 올림픽 사상 최고 성적인 종합 5위를 달성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안겨준 우리 국가대표 선수들의 땀방울을 '병역혜택' 같은 이슈로 몰고 가는 외국인들의 시선은 도리어 그들의 시샘 정도로 너그럽게 넘기도록 하자. 

필자는 런던 올림픽 중계를 보면서 스포츠와 함께 '한류'를 생각했다. '한류'를 넓게 보아 '세계적인 경쟁력과 매력을 지닌 한국의 그 무엇'이라고 한다면, 이번 런던 올림픽 결과로 나타난 우리의 스포츠가 바로 '한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한국의 수영, 펜싱, 축구가 세계 최고 수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64년 만에 다시 찾아간 런던에서 한국 스포츠는 '멈춰 버린 1초' 같은 지독한 편파 판정에도 굴하지 않고 스포츠 5대 강국이라는 당당한 모습을 세계에 과시했다. 

'한류'의 중심에 있는 K팝 아이돌 스타들 뒤에는 세계무대를 꿈꿨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한, 그래서 그 회한과 열정을 후진 양성으로 만족해야 했던 세대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48년 7월, 기차타고, 배타고, 무려 20여일 만에 겨우 런던에 도착한 대한민국 첫 올림픽 대표 팀이 있다.

그렇다. 한류와 올림픽 메달 모두 결코 갑자기 얻게 된 결과가 아니다. 지난 수 십 년간 우리 국민들의 악착같은 노력, 그것 없이는 불가능했다. 우리는 악착같이 노력해서 '압축성장'을 달성했고, 피나는 투쟁으로 '압축민주화'를 이룩했다. 또 우리의 엄청난 교육열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연설의 단골 주제가 될 정도가 됐다. 그 결과 이제 우리의 젊은이들이 그들 DNA 속에 5,000년 동안 간직하고 있던 문화예술, 스포츠 재능을 세계무대에서 마음껏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다. 우리가 지금까지는 타고난 근면함으로 선진국들을 따라잡았지만, 앞으로 그것만으로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97년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의 급격한 감소, 소외감과 상대적 빈곤층 증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 중 가장 높은 자살률, 낮은 행복지수 등 다양한 사회적 위험 요소가 상존하고 있다. 

결국 사회적 패러다임의 변화가 절실한 시점이다. 이제 더 이상 선진국을 그대로 모방하는 벤치마킹은 우리나라에서 먹히지 않는 해법이 됐다. 이미 우리의 여러 시스템을 벤치마킹 하는 나라가 늘고 있다. 우리 스스로 해답을 찾아야 하는데, 그 해답을 잡기 위한 키워드가 바로 '창의'와 '융합'이다. 우리의 경쟁 상대와 차별화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바로 '창의력'이다. 상품의 기획, 디자인, 생산과 마케팅에서 창의력이 발휘되면 모든 것이 변화된다. 교육에 있어서도 가장 주안점은 '창의력'에 두어야 한다. 최근 가수 싸이가 발표한 노래와 춤에 세계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오직 '창의력'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또 이러한 창의력이 다양한 분야에서 연계될 수 있도록 '융합' 요소가 고려돼야 한다. 이미 '한류' 효과를 통해 검증된 것처럼, 드라마 K팝 등 대중문화로 시작된 한류를 국내 관광 상품과 융합한 '한류관광'은 외래관광객 유치를 획기적으로 늘리는데 있어 창의적 '융합'의 중요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번 런던 올림픽은 한마디로 '문화 올림픽'이다. 문화와 스포츠의 환상적 '융합'을 제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런던 올림픽 개막식은 영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그에 대한 세계의 인정, 그 자체였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도 문화, 체육, 관광을 창의와 융합으로 연계시켜 런던 올림픽을 뛰어넘는 '문화 올림픽', 세계 스포츠계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길 기원한다.



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8/h201208142104022437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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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19:27

요즘 대학가의 가을학기 특강이나 자치단체들의 시민강좌 프로그램들을 보면 거의 공통적으로 어떤 화두 하나가 떠올라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다. 이것은 '큰 물음'이다. 모든 작은 물음들의 밑바닥에 깔린, 그래서 우리가 방향과 가치, 의미와 목적의 문제를 놓고 어둠 속을 헤맬 때 최종적으로 되돌아가서 반문해봐야 하는 기본적 질문이 큰 물음이다. 기본적 질문에는 정답이랄 것이 없다. 인간은 족히 3,000년 전부터 그 질문을 던져왔고 지금도 묻고 있다. 정답 없는 질문이 수천 년 되풀이 되어 왔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인간이 멍청해서? 정답 없는 것의 마법에 홀렸기 때문에? 인간이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그런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만 인간은 인간이라는 것이 첫째 이유이고, 정답이 없으니까 내가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둘째 이유이며, 어떻게든 그 질문에 응답하지 않고선 내가 이 세상에서 내 존재의 문법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이 세 번째 이유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은 인문학 분야들에 대한 학문적 관심 때문이기보다는 인간이 사는 이유와 목적,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물음들에 우리가 오랫동안 등 돌리고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살다보니 "어, 그게 아니네"라는 회의가 들고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같은 질문이 고개를 들 때 사람들은 '생각의 전환'을, 또는 그런 전환의 필요성을 경험한다. 그 전환을 명명할 마땅한 용어가 없을 때 가장 쉽게 써먹을 수 있는 것이 '인문학적 전환'이라는 표현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생각의 인문학적 전환이 일고 있다. 

이 전환과 관련해서 나는 진화생물학에 심리학을 융합한 이른바 진화심리학계의 최근 동향 한 가지를 이 칼럼에서 보고하고 싶다. 한국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에드워드 윌슨과 스티븐 핑커의 최근 저서에 관한 이야기다. 둘 다 하버드대 교수들이다. 윌슨의 책은 <지구의 사회적 정복>이라는 제목을, 핑커의 책은 <인간본성 속의 더 나은 천사>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윌슨이 책에서 추적하고 응답을 모색하는 질문은 흥미롭게도 화가 폴 고갱이 던졌던 세 가지 질문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첫 번째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두 개의 질문들은 생물학의 전형적 질문이라고 보긴 어렵다. 윌슨은 고갱의 두 번 째 질문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으로 바꿔 놓고 있는데, 이건 정확히 질문의 인문학적 전환이다. 세 번째 질문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것은 인간 사회의, 또는 문명의 '방향과 목적'에 관계되는 질문이며 방향과 목적의 문제는 엄밀히 말해 진화론의 화두가 아니다. 그것 역시 인문학적 화두이다. 

핑커의 책은 지난 수천 년의 문명사를 거시적으로 훑어보고 미시적으로 뒤져보면 인간 세계에서의 '폭력'의 빈도와 강도가 현저히 감소했다는 놀라운 주장을 내놓고 있다.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세한 논의들을 여기 다 거론할 수 없지만, 폭력이 감소한 것은 '인간 본성 속의 더 나은 천사'가 인간성의 나쁜 부분들을 누르고 인간의 행동방식을,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인간'을 바꿔왔기 때문이라는 것이 핑커의 결론이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초래했는가. 역시 흥미롭게도 핑커는 진화론의 통상적 논의 방식을 떠나 폭력 감소의 이유를 인간 감성의 변화, 제도와 법률, 이성의 확장 같은 '문화' 차원에서 구하고 있다. 

이 분석에는 반박과 비판의 여지가 없지 않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두 사람이 진화론에 대한 이론적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미래에 매우 낙관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윌슨에 따르면 인간은 협동하고 협력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위대'하고 이 위대한 동물은 부단히 더 큰 사회적 협동과 협력을 '지향'한다. 이건 핑커의 '더 나은 천사'론이나 사실상 진배 없다. 인문학은 '더 나은 천사'론을 좀체 꺼내지 않는다. 부끄러워서다. 그러나 '더 나은 인간'을 지향하는 것은 인문학도 마찬가지다. 진화심리학과 인문학이 오작교에서 만나는 건가?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8/h2012081421102912173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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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19:11

한국인이 부른 우리말 가요가 이렇게 세계인의 관심을 받게 된 일은 유사 이래 처음이다. 두달 만에 1억5000만번의 유튜브 조회수를 기록한 ‘강남스타일’은 대체 무엇 때문에 글로벌 스타일로 진화해가는 것일까?

일단 웃긴다. 그런데 우리만 웃는 게 아니다. 일반적인 가수의 이미지와는 살짝 어긋난 외모의 소유자가 예측불허의 상황에서 희한한 춤을 추는 것이 노르웨이인들에게도 웃기는가 보다. 또한 요즘 유행하는 일렉트로닉 사운드도 웃음 코드만큼이나 만국 공통이다. 게다가 이 매력덩어리를 소비하고 전파하는 사회연결망서비스가 늘 우리 손안에 있으니, 삼박자가 딱 맞은 결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분석에는 뭔가가 빠져 있다. 웃기고 흥겹다는 이유로 마우스를 수억번씩이나 누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른 요인이 있어야 한다. 우선, 강남스타일의 특이한 춤동작부터 보자. 사실, 이 춤을 특이하다고는 할 수 없다. 참신하긴 하지만 말을 타고 가는 동작이기에 전혀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말춤’인 것이다. 이 춤이 아이돌 그룹의 현란하고 세련된 춤과는 달리 너무 쉬워서 문화의 국경을 잘 넘게 된 것이라는 분석도 그래서 많다.

하지만 단지 쉽기 때문일까? 쉬운 것으로 따지자면 ‘막춤’만한 것이 없다. 규칙 없이 그냥 추면 된다. 하지만 규칙이 없다는 바로 그 이유로 막춤은 남들이 따라 하기에 가장 힘든 춤이다. 싸이의 춤이 세계 곳곳으로 빠르게 전파되는 이유는 막춤이어서가 아니다. 누구나 아는 규칙을 가진 말춤이기 때문이다.

정말 그럴까? 맨 처음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그림을 그리게 한 뒤 그다음 사람들이 순차적으로 따라 그리게 하는 게임을 해보자. 틀림없이 열번째 정도의 사람은 처음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맨 처음 사람이 별모양 그림으로 시작했다면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중간에 어떤 사람이 조금 다르게 복제를 해 놓아도 다른 참여자들이 그것이 별모양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제대로 따라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말춤은 별모양 그림이다. 이 춤이 전세계로 빠르게 복제되며 진화하는 이유는 춤의 지침(의미)이 보편적이어서다.

춤동작만도 아니다. 강남 ‘스타일’이라는 제목도 한몫을 했다. 누리집에 올라온 전세계의 패러디에는 한결같이 ‘무슨’ 스타일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그저 뒤에 ‘스타일’만 붙이고 자신의 처지대로 따라 하면 그만이다. ‘나는 가수다’ 열풍에 편승해 ‘나는 무엇이다’라는 변이들이 넘쳐났던 현상과 유사하지만, 강남스타일은 국제적인 변이까지도 만들어내고 있다.

생물의 역사에서도 체절동물의 등장처럼 진화의 분수령에 해당하는 사건들이 있다. 실제로 체절의 수와 특징을 여러 방식으로 조합하는 과정에서 생명체는 엄청나게 다양해질 수 있었다. 다양성의 극치인 곤충의 세계만 생각해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진화학자들은 체절의 등장을 ‘진화 가능성’의 진화라고 말한다. 이와 유사하게 강남스타일은 문화적 변이들을 양산하는, 진화 가능한 기작을 작동시킨다. 싸이가 이 모든 원리를 알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분명한 점은 그의 촉과 감은 정말 탁월하다는 사실이다.

대선이 100일도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국민의 관심을 끌기 위한 정치권의 몸부림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그들은 자신이 내건 가치가 국민들 사이에서 빠르게 전파되고 풍성한 변이를 만들어내길 갈망할 것이다. 이제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싸이에게서 배워야 할 때다. 말춤은 막춤이 아니며, 강남스타일은 강남스타일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51361.html

Posted by 겟업
2012. 9. 22. 18:32


도지은 부산 사상구 감전동

제2차 세계대전 때 타이와 미얀마를 잇는 콰이강의 다리 공사에 끌려온 연합군 포로는 5만5000명. 당시 일본의 강제명령에 의해 3000명의 조선 젊은이들이 반강제로 포로감시원으로 동원됐다.

1945년 전쟁이 끝난 뒤 포로들은 일제히 가혹한 학대행위의 주도자로 조선인들을 지목했다. 조국은 해방을 맞았으나 그들은 전범재판에 기소되어 23명이 사형을 당했다. 가혹한 학대행위를 하고 아픈 포로에게도 일을 시켜 죽음에 이르게 했던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의 사형 언도에 우리 국민들은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

사형제에 대한 판단은 그 시대가 갖는 정신과 국민의 법감정·법의식에 의해 판단될 수밖에 없다. 국제 재판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사형제 때문에 타국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면, 우리는 그 사형제에 대해 지금처럼 80% 이상의 찬성 여론을 모을 수 있을까. 또 우리나라에서 사형제를 유지하면서 우리나라 국민에게 사형을 선고한 그 나라를 비판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시대에 따라 판단기준이 다르고 정권에 따라 옳고 그름의 기준이 왔다 갔다 하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어찌 ‘법’에 사람의 ‘목숨’을 맡길 수 있겠는가. 사형은 속죄, 교화 또는 재사회화라는 목적 모두를 상실해 버리는 제도다. 또 단순히 응보라는 이념만으로 형벌을 부과한다면 범죄자 또는 수형자는 그 응보라는 목적에 온전히 내몰린 수단 또는 도구로 취급된다. 이는 인간을 목적이 아닌 ‘도구’로 전락시키는 행위다. 살인자 한명이 나머지 국민 모두를 살인자로 만드는 사형제는 인간을 도구화하고 존엄성을 해친다. 그 소수의 사람들이 우리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불가침을 침해하려는 것을 내버려 둬선 안 된다. 또 범죄자에 대한 복수 차원에서 보면 오히려 평생을 갇힌 공간에서 자신을 후회하게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유럽의회는 2010년 3월 한국의 헌법재판소가 사형제를 합헌으로 결정한 것에 비난 결의안을 채택했다. 한국은 지난 15년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사실상 사형 폐지국으로 간주되지만, 사형제 자체를 존치하고 있기 때문에 유럽연합(EU) 의회에 옵서버 국가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외교부는 국익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사형 집행에 반대하는 입장을 내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형제 폐지 요구를 경제논리로만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계산적인 입장일 뿐이다. 유럽국가들이 사형제 폐지를 요구하는 이유는 앞에서 든 예와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세계적 시각에서 봤을 때 자국의 국민이 다른 나라에서도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고 보호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2010년 헌재가 5(합헌) 대 4(위헌)로 사형제 합헌 결정을 할 때 4명이 제시한 위헌 의견도 새겨봐야 한다. 위헌 의견에서는 인간의 생명을 수단화하지 않고는 형벌목적론의 관점에서 사형제를 정당화하기 힘들다고 설명하고 있다. 최근 이진성 헌재재판관 후보자는 “개인적인 경험으로 서울중앙지검 검사직무 대리를 할 때 6명의 사형집행을 참관한 적이 있다”며 “인간의 생명권이 완전히 소멸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가 이런 경험을 직접 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형 집행이 재개된다면 어느 누군가는 생명이 소멸될 것이고, 이를 방조하는 우리 모두는 살인자가 되는 것과 다름없다. 세계시민으로서 우리 국민의 보호를 위해서라도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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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17:53

베이비부머의 자녀인 1979∼1992년생 954만 명을 지칭하는 에코세대는 베이비부머와 연령에서 오는 세대 차 이상의 간극을 갖는다. 에코세대는 세계관부터 판이하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을 경제적 이익에 눈먼 부끄러운 일이라는 유시민 전 의원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로 세상을 보고,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를 읽으면서 기존의 잘못된 사회구조에 분노한다. 그렇지만 에코세대는 일하는 것을 평생의 목표로 하고 산 이전 세대와 달리 즐겁게 소비하기 위하여 일한다. 김정운 교수의 ‘노는 만큼 성공한다’는 휴테크에 공감한다. 그렇지만 에코세대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읽으면서 위안받는다.

에코세대를 취업 신용 주거의 3중고(苦)로 연애 결혼 출산 등 세 가지를 포기하는 ‘삼포세대’라고 칭한다. 이들이 은퇴해 노후생활에 들어갈 2060년경에 국민연금이 고갈되기 때문에 노후가 막막하고 출산율 저하로 인구가 감소해 다음 세대로부터 도움도 못 받는 슬픈 세대다. 과연 에코세대는 미래가 막막한 불행한 세대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일벌레보다 일 통한 만족 추구로 

에코세대는 월세로 사는 사람이 많고 자기 집 마련하기 어려울 것이라 걱정하지만 20대 나이에 혼자 살면서 자기 소유의 집에 사는 것이 더 이상하다. 보통 형제자매가 둘 이하이니 부모가 살던 집은 이들의 집이 될 가능성이 높을 수도 있다.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을 이대로 두면 재정불안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도 재정 안정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인구고령화를 앞당길 것인가, 아니면 늦출 것인가는 이제 결혼 및 출산연령에 진입하고 있는 에코세대의 선택에 달려 있다. 

에코세대는 이전 세대가 가지고 있지 못한 희망이 있다. 무엇보다도 정보기술(IT) 시대에 성장한 에코세대는 21세기 지식공유 시대의 절대 강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인터넷 공간을 통해 단숨에 지구 반대편에 가는가 하면 수십 년 전 과거도 한순간에 접속한다. 케이팝은 에코세대의 글로벌 성공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30년 전 베이비부머가 직업전선에 들어설 때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000달러에 불과했지만 에코세대는 2만 달러의 경제적 기반 위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취업과 편중된 분배구조의 고착화는 큰 문제다. 청년실업률은 7% 내외로, 10%대의 유럽국가에 비해서는 양호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일할 의사가 있는 사람 중에 1주일에 1시간 이상 일하지 못한 사람을 실업이라고 분류하는 현재의 통계로는 졸업하지 않고 취업준비 중인 휴학생도, ‘알바’로 연연하는 사실상의 실업자도 실업으로 잡지 못한다. 어림잡아 다섯 명 중 한 명은 제대로 된 일자리를 못 구하고 있다.

모든 정치인이 일자리가 가장 큰 문제라는 인식은 공유하고 있지만 시원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사실 30년 전에도 좋은 일자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그때는 좋든 나쁘든 현실을 수용했다. 지금은 누구나 좋은 일자리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미스매치(불일치)를 해소하기 쉽지 않다. 그렇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 단카이 세대라고 불리는 베이비부머가 집중 은퇴할 시기에 청년취업률이 크게 높아졌듯이 우리나라 역시 베이비부머의 은퇴가 시작되면서 좋은 일자리가 연쇄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그래도 과거 개념의 좋은 일자리를 더 만드는 것이 어렵다면 어떤 일자리도 좋게 생각될 수 있도록 경제사회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먼저 좋은 일자리 개념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 베이비부머가 직업을 선택할 때는 생존을 위한 선택을 했지만 에코세대는 자신의 행복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다. 권력 재산 명예가 따르는 직업을 가져야 행복할 수 있다는 베이비부머 부모의 고정관념이 자유로운 선택을 막는다. 개개인이 행복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참다운 의미의 눈높이에 맞춘 일자리 찾기다. 일 자체보다는 일을 통한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천의 미꾸라지도 행복한 사회

좋은 일자리를 한정하는 경제사회 시스템도 개선돼야 한다. 대학을 다니든 안 다니든 어떤 직업을 갖더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새로운 국가비전과 정책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유럽 선진국에서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이 통하는 근본 이유는 학력 간 임금 차별이 거의 없고 복지시스템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임금 차별을 축소하고 비정규직도 안심하고 일할 수 있도록 관련법을 개정함과 아울러, 아이를 낳아서 키우고 가르치는 데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을 국가가 더 많이 책임짐으로써 출발선상에서 기회 균등을 제고해 가난의 대물림을 완화해 나가야 한다.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개천에 사는 미꾸라지도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것으로 국가 목표를 수정해야 한다.


김용하 객원논설위원·순천향대교수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40100000019/3/70040100000019/20120831/49004573/1

Posted by 겟업
2012. 9. 22. 17:40

‘박정희 시대’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다. 경제민주화나 복지 이슈에서 별로 차별성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여야가 역사인식에서 전선(戰線)을 만들었다는 느낌까지 든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는 5·16에 대해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했다가 “역사적 평가에 맡기겠다”고 물러섰지만 인혁당 발언으로 다시 논란을 빚었다. 경선 캠프 공동선대위원장을 지낸 홍사덕 전 의원은 지난달 29일 “유신은 박 전 대통령이 권력 유지가 아니라 수출 100억 달러를 넘기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 김병호 캠프 공보단장은 이달 16일 인혁당 사태와 관련해 “피해 당사자가 아닌 가족 후손까지 (사과 대상을) 확대하면 사과 안 받을 국민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민주당의 공세도 만만치 않다. 대선후보 수락연설에서 우리 경제를 “개발독재와 정경유착으로 파행적인 압축성장을 이뤘다”고 단정한 문재인 후보는 경선 다음 날 현충원을 방문해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만 찾고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은 찾지 않았다. 논란이 일자 “가해자 측의 진지한 반성이 있어야 통합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언제든 묘역을 찾겠다”고 했다. 문 후보는 대학시절 유신반대 시위를 하다 제적당했다. 그의 측근인 김경수 전 노무현재단 사무국장은 “역사의 화해란 가해자가 반성과 함께 피해자를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야 간의 이런 인식차는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로 갈린 우리 안의 분열을 보여준다. 

우선 민주화 세대는 산업화 세대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희생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면서 지금 우리가 넘치도록 향유하는 민주주의가 앞선 세대의 배고픔과 절망의 산물이었음을 간과한다. 빈곤 경험이 없는 2030세대는 삶의 질은 고사하고 생존 자체가 목적이었던 그 시절, 인권 자유 평등 같은 민주적 가치들이 포기되고 유보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고리타분한 옛 이야기로만 받아들인다. 

또 연령적으로 50대 이상인 산업화 세대는 최빈국으로부터 탈출해 경제성장을 이루어낸 공을 앞세우며 박정희 시대 때 침해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한다. 새누리당 한기호 의원은 트위터에 박 후보의 역사인식을 문제 삼는 진영을 ‘세작(간첩)’에 비유하는 글을 올려 논란을 빚었다. 진영에 따라 민주주의를 주장하면 종북(從北)이고, 산업화를 주장하면 독재라는 극단적 이분법까지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두 진영의 역사인식에서 아쉬운 것은 ‘시간’이라는 요소를 무시한다는 점이다. ‘민주화가 옳았느냐 산업화가 옳았느냐’ 하는 가치나 개념이 앞선 질문이 아니라 1960년대 70년대 80년대마다 달랐던, 당시 국민들이 최우선적으로 추구했던 과제가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이 먼저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간대에서 병행 발전시킨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우리 사회의 진정한 통합은 두 세대의 화해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민주화 세대는 산업화 세대의 피와 땀이 없었다면 민주화가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할 필요가 있다. 산업화 세대는 민주화 세대의 희생과 고초에 대해 진정성을 갖고 대할 필요가 있다. 

미래를 논하기에도 부족한데 과거사 논쟁은 퇴행적 주제라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치러야 할 성장통이라는 생각도 든다. 상대를 이해하고 인정해주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 성숙한 역사의식을 보고 싶다.


허문명 오피니언팀장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40100000034/3/70040100000034/20120920/495379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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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17:33

요즘은 일본이 과연 내가 알던 일본이 맞나 싶어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사회가 원색적으로 ‘한국 때리기’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류(韓流) 메카로 유명한 도쿄(東京) 신오쿠보(新大久保) 거리에는 한동안 주말마다 극우 시위대가 몰려다니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요즘도 주중에는 확성기를 부착한 차량이 소음 공세를 퍼붓고 있다. 이 때문에 한류 팬이 발길을 돌리면서 이곳 한국 식당들의 매출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한 교민은 “시위대가 종업원들에게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이름)는 누구 땅’이냐며 시비를 걸어 올 때는 사고라도 날까 봐 가슴을 졸인다”고 전했다.

일본 잡지는 ‘한국을 망하게 하는 법’ 시리즈와 특집을 쏟아 내고 있다. 선정적인 3류 잡지라면 거론도 안 하겠지만 일본 사회에서 평판이 높은 시사 잡지들 얘기다. 필진도 대학교수부터 경제전문가, 저널리스트까지 다양하다. 이 중 일본인으로 귀화한 한국인 교수와 한국을 사랑했다고 주장하는 일본인 교수의 이름도 보인다. 

내용은 유치하기까지 하다. 이번 기회에 한일 통화스와프를 전면 철회하고 전자 자동차 등 부품 수출을 중단해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다. 일부 잡지는 한국 경제가 일본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 안 돼 한국이 망해도 큰 타격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잡지는 한국 경제나 기업이 알고 보면 별게 아니며 모두 일본 기술을 베꼈다고 주장한다.

일본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한국에 대한 배려는 끝났다”느니, 이명박 대통령을 직접 겨냥해 “무례하다”는 막말을 쏟아 내더니 이제는 여야 가릴 것 없이 일본군 위안부 등 과거사까지 부정하고 나섰다. 헌법을 개정해 재무장하겠다는 극우 정치인들은 ‘영토 문제 적임자’라는 이유로 차기 총리감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쯤 되면 일본이 영토 문제로 중국에 당하고 러시아에 치인 화풀이를 한국에 하고 있다는 일회성 논리로는 설명이 안 된다. 한일 관계의 토대를 바꾸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본 내에 진행되고 있다는 우려를 감출 수 없다.

먼저 일본 정치권의 세대교체다.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40, 50대 전후세대가 정치 전면에 등장하면서 일본의 과거사 족쇄를 벗어던지려는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다. 특히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 등 제국주의 일본을 주도했던 세력의 후손은 일본은 단지 미국과의 전쟁에서 졌을 뿐 한국에 부채가 없다는 인식이 강하다. 이런 기류는 안팎으로 피해의식이 커지는 국민의 불안감과 결합해 한일 관계를 새로운 긴장 국면으로 몰아가고 있다.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의 약진도 한국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바꾸는 요인 중 하나다. 일본 기업들이 전자 등 일부 산업에서 죽을 쑤면서 한국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반감도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기업인은 “한국의 키가 부쩍 자라 세계 시장이라는 만원 지하철에서 일본과 자꾸 어깨가 부딪치면서 감정이 상하는 일이 늘고 있는 셈”이라고 비유했다.

한 일본인 교수는 “한국이 과거사로 압박하면 일본이 물러서는 시늉이라도 하던 시대는 끝나 가고 있다. 냉담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한국의 대일 전략 오류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달라진 일본과 앞으로 어떤 관계 맺기를 해야 할 것인가. 한국의 대일 정책이 도전받고 있다.

배극인 도쿄 특파원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40100000086/3/70040100000086/20120909/49260559/1

Posted by 겟업
2012. 9. 22. 17:31

“침대에 누워있는 내 딸을 내려다보며 눈물을 글썽거리던 그를 잊을 수 없습니다. 남들에게 그는 성공한 정치인, 기업가로 보이겠지만 저에게는 따뜻한 이웃으로 기억됩니다.”

지난달 27∼30일 열린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가장 많은 박수를 받은 연설자는 유명한 정치인이나 영화배우가 아닌 팸 핀레이슨이라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는 연단에 올라 30여 년 전 보스턴에서 같은 교회에 다니던 ‘평범한 밋 롬니’를 이야기했다. 그가 기억하는 롬니는 인간적인 면모가 부족한 대선 후보가 아니라 자신의 아픈 딸을 위해 매일 병원을 찾아 기도해주고 직접 음식까지 만들어 위로 파티를 열어준 정 많은 이웃이었다.

핀레이슨 씨 외에도 과거 롬니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이 이번 전당대회 연단에 올랐다. 미국 전당대회에서 이렇게 일반인들이 대거 연사로 등장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들이 전당대회의 하이라이트인 마지막 날 롬니 후보 수락 연설이 있기 전에 등장한 것은 ‘극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유권자들은 대선 후보가 전해주는 ‘감동의 내러티브’를 좋아한다. 베트남전쟁에서 5년 동안 전쟁포로로 잡혀 있었어도 적에게 굴복하지 않다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석방된 존 매케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전쟁 영웅’ 내러티브는 2008년 대선을 장식했다. 당시 민주당 쪽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남편의 바람기를 참아내며 도전하는 곳마다 ‘유리천장’을 깨면서 진취적인 삶을 살아온 ‘여성 롤 모델’의 전형이었다.

버락 오바마 후보는 ‘미국의 꿈’을 보여줬다. 케냐 출신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젊은이로 시카고 슬럼가에서 시민운동을 하다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하버드 로스쿨에 들어가 정치권에 입문해 초선 상원의원으로 대권에 도전한 그의 스토리는 유권자들에게 강한 감동을 전해줬다.

그동안 대선 후보 롬니의 최대 약점은 ‘스토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유권자들의 공감을 사기는커녕 질투와 시샘을 받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선택받은 소수’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력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다.

‘백만장자 기업가에 주지사를 지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사립 초중고교를 다닌 후 1960년대 말 다른 젊은이들이 베트남전 참전을 고민할 때 프랑스로 선교활동을 다녀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투자회사를 세워 큰 재산을 모았다.’

스토리가 부족한 롬니가 평범한 동료와 이웃의 입을 통해 보여주려는 내러티브는 그가 누리는 부와 성공 명예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었다(I built it)’는 것이었다.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롬니는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기업가 정신’을 자신의 대선 브랜드로 만들려는 노력을 보여줬다. 이 노력이 얼마나 성공을 거둘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아직 유권자 호감도에서 롬니는 오바마에게 뒤지고 있다.

미국 선거 전문가들은 이번 대선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도가 떨어지는 이유를 감동지수가 낮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롬니뿐만 아니라 재선에 나선 오바마도 국민을 감동시킬 만한 스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2008년 오바마가 보여줬던 화합과 변화의 메시지는 미국 정치가 최악의 갈등관계로 치닫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설득력을 잃었다.

미국 정치 분석가 데이비드 애스먼은 유권자들이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냉소적이 될수록 더욱 감동적인 스토리를 찾는다고 했다. 석 달 앞으로 다가온 미국과 한국 대선에서 감동을 전해주는 후보는 누구일까.


정미경 워싱턴 특파원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40100000086/3/70040100000086/20120902/490645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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