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있는삶'에 해당되는 글 1071건

  1. 2018.01.07 [朝鮮칼럼 The Column] "아메리칸 드림, 핀란드에서 펼쳐라?"
  2. 2018.01.07 [김인숙의 조용한 이야기]위로와 느림의 미학
  3. 2018.01.07 [삶의 창] 최 선생님의 루앙프라방
  4. 2018.01.07 [편집국에서] 애경사의 파국, 스페이스빔의 미래
  5. 2018.01.07 [김현수의 뉴스룸]예쁜 레이저, 심리스 아이폰
  6. 2018.01.07 [석동빈 기자의 세상만車]지킬 것과 버릴 것
  7. 2018.01.07 [시론] 걷고 싶은 거리엔 이유가 있다
  8. 2018.01.07 [동서남북] 세서미 스트리트의 줄리아가 그린 희망
  9. 2018.01.07 [만물상] "써야 생각한다"
  10. 2018.01.07 [권인숙 칼럼] 동성애 인정하면 동성애가 퍼진다?
  11. 2018.01.07 [삶의 창] 변화를 일으키는 공감능력
  12. 2018.01.07 [오철우의 과학의 숲] 유전자 드라이브와 야생의 브레이크?
  13. 2018.01.06 [세상 읽기] 선거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
  14. 2018.01.06 [발언대] 콘텐츠 향유, 행복한 삶의 새 기준이다
  15. 2018.01.06 [아침 편지] 오래 사는 것이 미안하지 않은 나라를
  16. 2018.01.06 [김명환의 시간여행] [68] 어린이날마다 초대형 매스게임 벌여… 수천 아동, 대통령 앞 재롱떠느라 진땀
  17. 2018.01.06 [시선 2035] 이제는 밥상 민주화다
  18. 2018.01.06 [직장인을 위한 김호의 ‘생존의 방식’]팔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
  19. 2018.01.06 [36.5°] 넌 특별하지 않아
  20. 2018.01.06 [이정모 칼럼] ‘총 균 쇠’, 화물숭배와 500만 명
2018. 1. 7. 23:53

美, 소득 따라 교육 격차 커지고 한국처럼 자녀의 미래에 집착 
핀란드·스웨덴 등 북구 나라는 '노르딕 모델'로 자녀 독립 돕고 
자신의 꿈 펼칠 수 있게 지원… 청년의 미래 위한 제도로 참고를


우리 아들딸 세대는 우리 세대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예전에는 개인의 신분 상승 기회가 보장된 국가로 흔히 미국을 거론했다.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각고의 노력 끝에 사회 최상층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많았고, 수백만명의 이민자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했기에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미국은 여전히 기회의 땅인가? 그렇지 않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미국은 오히려 다른 나라에 비해 상향 사회 이동이 매우 적다. 최저 소득 구간의 사람들이 상층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계속 빈민으로 남는 비율이 훨씬 작은 나라는 오히려 북유럽 국가들이다. 이런 사실을 두고 영국 노동당 당수였던 에드 밀리밴드는 이렇게 말한다.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려면 핀란드로 가라."

오늘날 국가 경쟁력과 삶의 질 면에서 최상위를 차지하는 나라, 행복하게 살고픈 꿈을 이룰 수 있는 나라로 꼽히는 곳들은 핀란드·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아이슬란드 등 소위 노르딕(Nordic) 국가들이다. 혁신 국가, 국가 경쟁력,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일과 삶의 균형, 행복 지수, 청소년 학업 성취도 같은 조사를 할 때마다 노르딕 국가들은 모두 최상위권에 들었던 반면 미국은 순위가 훨씬 뒤처졌다.

아메리칸 드림은 어느덧 '미국병'으로 미끄러져 버린 것 같다. 그 증상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이 교육 문제다. 갓난아이 때부터 좋은 유치원 들여보내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하고, 좋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보내기 위해 무리해서라도 잘사는 지역에 집을 얻어야 한다. 피아노나 무용 같은 과외 교육시키기 위해 어머니들이 돈 대고 운전하느라 골수가 빠질 지경이다. 명문대학 입학 역시 많은 경우 부모의 능력에 좌우되고, 엄청난 학비도 부모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미국 중산층 부모들은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너무 크게 희생한다. 반대로 저소득층 아이들은 그런 경쟁에서 일찌감치 뒤처져서 중등 교육부터 이미 포기 상태에 빠지곤 한다. 어렵사리 우수한 대학에 들어간다 해도 경제적 부담 때문에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도 많다. 자연히 불평등의 대물림이 영속화하는 경향이 커졌다.

부모가 아이를 위해 그토록 큰 희생을 치른 결과 모두들 행복해졌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엄마 손에 이끌려 자란 아이들이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인재가 되기는 어렵다. 많은 미국 대학생들이 하루에도 여러 차례 부모에게 문자나 전화 통화로 보고를 하고, 명문대학의 여학생들이 부잣집 남자 만나 결혼하는 게 꿈이라는 조사도 있다. 시간이 흘러 부모가 늙으면 지난날의 '투자'에 대한 반대급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중년의 성인들이 나이 든 부모를 돌보는 데에 완전히 얽매여 의존 상태가 역전된다.

미국 사회의 일들이 우리나라와 너무 흡사하여 놀라울 지경이다. 두 나라 모두 부모 자식 간에 서로 과도하게 얽매여 사느라 정작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 중 하나가 '노르딕 모델'이다. 아이들은 십대 후반이면 자기 삶을 찾아 부모 곁을 떠나고, 부모 역시 자식의 삶에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 초·중등 교육뿐 아니라 대학 교육도 무료이니 수학 능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대학교 진학이 가능하지만, 굳이 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생각은 없다. 부자가 되지 않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며 잘 살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병원비가 거의 무료일 정도로 우수한 사회보장제도를 이용하며 살다가 나이 들면 시설 좋은 양로원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사회의 인간관계는 너무 메마르고 비정한 게 아닐까? 생각하기 나름이다. 과도한 의존과 부담에서 벗어날 때 오히려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 나라 사람들 생각이다.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 노르딕 국가들의 단점도 언급하는 게 옳다. 이런 나라들에서는 모두 우울증, 알코올중독, 자살 비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행복한 사회라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흔히 북유럽의 혹독한 겨울 날씨를 거론하지만, 자연만 탓할 게 아니라 분명 이 사회 시스템이 안고 있는 심각한 결점들도 들여다보아야 한다.


남의 나라의 좋은 제도를 배워서 가져온다고 그대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많은 사례를 참조하되 결국은 우리에게 맞는 체제를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다. 누가 만드는가? 현 정부도, 다음 정부도 조만간 답을 줄 것 같지는 않다. 다음 세대의 주인공들인 청년들이 새로운 꿈을 꾸고 미래 사회의 새 제도를 연구해보아야 한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11/2017071103438.html




Posted by 겟업
2018. 1. 7. 23:48

책 정리를 할 일이 생겼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집에 쌓인 책이 많은데, 그걸 정리하지 못해 거의 무너질 지경이 되었다. 인터넷으로 집 안 정리하는 법, 책 정리하는 법 같은 걸 찾아보았는데, 어떤 정리의 법칙이든 가장 우선되는 건 ‘잘 버리는 일’ 같았다. 우선되는 일인 만큼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책이란 게 과일 껍데기처럼 다 먹어치우거나 아니면 깎아버리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유행 지난 옷처럼 의류수거함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버릴 수 없는 이유는 다양했다. 지인들의 서명이 있는 책들은 물론 버릴 수 없고, 오래전에 밑줄 그어가며 보았던 책들도 버릴 수 없고, 전에는 읽기 싫었지만 앞으로는 읽고 싶어지게 될지도 모르는 책들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다 버릴 수 없는 책들이었다. 


책들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많은 건 소설책이다. 한 번 읽은 책도 있고 몇 번 읽은 책도 있고, 펼쳐보기만 하고 만 책도 물론 있다. 모두들 나름대로 내 책장에서 나이가 들었다. 최근 어떤 작은 모임에서 요즘 시대에도 여전히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대단히 새로운 질문이 아니었음에도,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언제나 그런 것처럼 좀 불끈했다. 발끈이 아니라 불끈이다. 나한테는 소설 쓰는 일이 맛있거나 맛있지 않거나 아주 좋은 밥상을 차리는 일과 같고, 그 밥상 차려놓은 후에는 이게 맛있기까지 해야 할 텐데 하면서 살짝 MSG의 유혹도 받고, 차림이 이쁜가 사발과 대접 놓임새도 신경 쓰고, 아무튼 그러한 일인데, 누군가 그걸 먹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묻는다면 거기에 조리있는 대답이 있을 리가 없다. 불끈, 드셔보시지요, 할 뿐이다.
 학창시절에 샀던 책들도 눈에 띄었다. 30년도 더 된, 노랗게 색이 바랜 책들이다. 대부분의 책들은 지난 30년 동안 한번도 다시 펼쳐보지 않은 것들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다시 펼쳐볼 일이 거의 없을 듯싶은데, 이 책들을 한쪽 구석으로 치우는 일이 어려웠다. 추억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없는 돈을 안타깝게 모아 샀던 책들, 그중에는 엉뚱한 표지로 제목과 내용을 가려놓은 금서도 있었다. 당시에는 금서도 많았고 그 금서들을 배포하는 방법도 많았다.


불끈이든 발끈이든, 이렇게 감정이 앞서면 대답에 조리가 없기 마련이다. 그때 톨스토이 얘기를 했었다. 독후감 같은 것을 쓸 일이 생겨서 근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한 권당 600페이지가 넘는 총 4권 분량의 긴 책이다. 이 책의 감상문을 쓸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서 편집자가 ‘혹시 체력이 허락된다면’이라는 농담 같은 말을 덧붙였을 정도다. 그만큼 압도적인 길이이기도 하거니와 그 촘촘한 짜임새의 긴장이 만만치 않다는 뜻임을 알아들었다. 아주 오래전에 이 책을 읽었을 것이다. 읽었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과연 제대로 된 <전쟁과 평화>를 읽어본 적이 있었던 것인지 자신할 수가 없어서이다. 아주 어렸을 때 어린이용으로 편집된 세계명작 동화로도 읽었던 것 같고, 촘촘하게 인쇄된 몇 권의 책으로도 읽었던 것 같지만, 기억이 다 가물가물하다.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읽기 시작했다.


책은 새롭게 읽을 때마다 그 울림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그건 물론 달라져있는 내 삶 때문이다. 책을 다시 읽는 나는 매번 전보다 더 나이가 들어있다. 빛나던 열정과 결기는 좋게 얘기하면 성숙해져있지만 나쁘게 얘기하면 소심하게 빛을 잃었거나, 심지어는 비겁한 방식으로 잊혀지기도 했다. 오래된 소설을 읽는 즐거움, 추억을 더듬는 안타까움과 쓸쓸함도 즐거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분명히 오래된 소설을 읽고 또다시 읽어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안타까움과 쓸쓸함을 넘어 갑자기 환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어떤 한 문장 때문일 수도 있고, 여전히 기억 속의 어느 한순간을 찌르는 듯한 장면 때문일 수도 있고, 뭐라고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옆에서 들리는 듯 자주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작가의 숨소리 때문일 수도 있다. 200년 전을 살았던 대작가 톨스토이의 숨소리를 듣는다니, 근사하지 않나. 


낯선 나라의 낯선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 귀족들의 삶, 황제를 위해 기꺼이 바치고 싶은 목숨, 전쟁에 대한 광적인 열정,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 모든 것이 오늘날의 우리와는 다르다. 그 다름은 충분히 흥미롭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다름 속에서도 ‘여전히 관통하는’, ‘여전히 같은 것들’이다. 전쟁 속에서 펼쳐지는 오만과 허위, 그 전쟁이 앗아간 목숨들, 그리고 파괴된 사랑들, 그래도 여전히 삶은 이어진다는 것. 


이 소설에는 느닷없는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단히 빠른 전개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 시간과 그 시간 속의 사람들, 그리고 결국 그로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역사를 쫓아가는 즐거움이 있다. 이렇게 읽히는 것, 한 장 한 장, 한 줄 한 줄, 더듬어가듯 읽히는 것을 천천히 쫓아 읽는 게 책을 읽는 즐거움이지 싶었다. 



전쟁에 관한 소설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무수하다. 전쟁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한,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작가는 자신이 겪고 있는 가장 끔찍한 전쟁을 묘사하고 있을 것이다. 물리적인 전쟁의 한복판이 아니더라도 세상의 도처에서, 우리나라의 도처에서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아마 누구나 그러할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처럼, 특별히 내세울 게 없어서 국민 중의 한 사람, 서민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대부분의 사람들 삶이 정작 그러할 것이다. 그들, 우리들의 삶이 차근차근 위로받기를 바란다. 누가 봐도 정쟁으로 보이는 그런 싸움 말고, 이름 없는 사람들의 편에 선 정치를 기대한다. 어떤 정치인이나 자신이야말로 그렇다고 말할 것이고, 그중 많은 정치인들의 말을 믿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믿을 수 있는 건 이름 없이도 이루어냈던 우리들의 승리의 기억이다. 그러니, 국민의 감시가 무서울 것이다. 지난 세월, 뒤로 간 시간들이 너무 길었다. 서둘러, 그러나 차근차근, 아주 긴 책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듯이, 한 문장 한 문장 빼놓지 않고 읽듯이, 그러다가 책의 한 권 한 권이 쌓여가는 것을 보듯이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김인숙 소설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6142055005&code=990100#csidx8e4f84aa918308582064563a374d125 


Posted by 겟업
2018. 1. 7. 23:47

가끔 여행을 함께 하는 최 선생님의 여행 습관은 뭔가 좀 다르다. 여행전문가는 아니지만 남들과 함께 다니는 여행에서도 틈틈이 자신만의 행복하고 좀 특별한 여행을 만들 줄 안다.


한번은 라오스 루앙프라방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가기 전부터 열심히 라오스 관련 프로그램과 책도 보더니 몽족 야시장에 꼭 가야겠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몽족 야시장에서 옷가지 등을 파는 어린 소녀 이야기가 안타까워서 꼭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거쳐서 오후에 루앙프라방에 도착했다.


루앙프라방은 라오스 700만명의 인구에서 1%, 약 7만명이 사는 아주 작은 도시이다. 연간 외국관광객 약 400여만명이 라오스를 방문하는데 이들 중에 대부분은 세계문화유산 도시 루앙프라방을 꼭 찾는다. 한국 관광객들도 라오스 직항이 생기면서 한해 약 10여만명이 방문한다. 최근에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라는 여행기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는 2층 높이의 아담한 숙소에 짐을 풀고 학교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거리로 나섰다. 이 마을에서 3층 이상 높이의 건물을 찾기 힘들다. 마치 동화의 나라처럼 숲으로 둘러싸인 마을에 메콩강 줄기를 따라 수줍은 듯 작은 30여개의 사원들이 있다. 뜰에는 자기 키를 넘는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쓰는 붉은 가사를 입은 동자들이 장난처럼 눈에 들어온다. 마을 한가운데 망루처럼 솟아 있는 푸시산에서 바라보는 노을과 소박한 마을의 밥 짓는 연기가 정겹다. 그렇게 여행자들은 욕망의 날개를 접고 어느새 라오 사람들 품에 스며든다.


우리는 해가 산 너머로 지고 가로등이 어스름해질 때 장이 들어서는 몽족 전통시장을 찾았다. 몽족은 중국의 묘족 원주민들로서 라오스에 약 70여만명이 살고 있는데 라오스 정부와 역사적으로 갈등관계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밤이 되면 주홍빛 천막을 치고 수많은 몽족 사람들이 좌판을 깔고 장사를 한다. 최 선생은 몇 바퀴를 돌고 돌아 어렵사리 방송에 나왔다는 소녀를 찾았다. 처음에는 뭔가 도움을 주고 싶어서 선물로 물건 몇 개 사려나 보다 생각했다. 그렇게 선물 될 만한 것들을 몇 개 사더니, 소녀의 양해를 구하고 직접 지나가는 한국 사람들에게 물건을 함께 팔기 시작한다.


한국에서 아웃도어 지점장을 하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한다. 작은 수고지만 함께 노동을 하고 제법 물건을 팔고 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돌자 자리에 일어섰다. 그와 여행할 때마다 이런 비슷한 일들이 적지 않다.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는 짐을 나르는 사람들의 신발이 해어진 것을 보고 신던 신을 내주었고, 지진이 났을 때 후원금을 보내기도 했다. 버마에서는 고아원 아이들에게 맛있는 점심을 만들어서 대접하기도 했고, 캄보디아 아이들을 위해서는 책을 구입하는 데 돈을 보태기도 했다. 결코 큰돈은 아니었지만, 그는 마음을 다했고 결코 우쭐대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그저 친구처럼 사람들과 어울렸고 함께하는 즐거움으로 여행의 즐거움을 더했다.


그가 여행을 그 사람들의 삶에 젖어들고 스며드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름 휴가철이 다가왔다. 어느 곳에 가든지 자연에 순응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지긋한 마음으로 다가설 때 여행의 즐거움과 행복이 다가선다.



나효우 착한여행 대표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0034.html#csidx9ab34cb4e099cefa92ea053492ecdac 

Posted by 겟업
2018. 1. 7. 23:45

단 2시간. 100년이 사라지는 데 걸린 시간은 그뿐이었다.


지난달 30일 오전 페이스북의 한 타임라인에서는 건물의 철거 현장이 중계됐다. 인천 중구 송월동에 위치한 붉은 벽돌 건물 세채가 포클레인 한대로 간단하게 ‘정리’됐다. 건물 이름은 애경사. 애경그룹이 창업한 해인 1954년 인수해 1962년 매각한 비누공장으로 이 공장의 역사는 191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대의 양조장, 정미소, 전기회사 등과 함께 개항 초기 산업사의 중요한 한 풍경으로 한 세기를 버텨온 근대산업유산이 두시간 만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철거를 앞두고 나온 시민들의 반대 목소리를 문화유산의 가치가 없다고 무시했던 중구청은 철거 소식이 중앙 언론에까지 타전되자 그제야 그 가치를 몰랐다며 궁색한 변명을 내놨다.


그나마 보도가 되면서 ‘부음’ 기사라도 나온 애경사는 나은 형편인지 모르겠다. 인천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아래 있던 동구 송림동 한옥여관은 지난해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1938년에 지어져 1989년까지 여관으로 쓰였다는 이 한옥은 건축이나 역사의 문외한이 겉에서만 봐도 방방마다 올라간 벽돌 굴뚝이 신기해 안을 기웃거리게 되는 독특한 건물이었다. 2011년 인하대박물관 조사팀이 이 건물의 건축적 역사적 가치에 대한 분석과 보존을 위한 제언을 보고서로 남겼지만 헛수고가 됐다. 만석동에 위치했던 조선기계공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 노동자 숙소(추정)는 어떤가. 겉모습은 일반 창고 모양으로 거의 훼손됐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다닥다닥 붙어 있는 2층의 목재 발코니 구조가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드는 이 건물도 사망신고조차 확인할 겨를 없이 없어졌다.


백년 가까운 시간을 지나며 전쟁통에도 살아남은 이 강인한 건물들을 부순 힘은 뭘까. 주차장이다. 애경사는 송월동 동화마을 관광객 편의를 위한 공영주차장 증축을 위해 허물었고, 송림동 한옥여관은 근처 교회에서 건물을 사 밀어버리고 주차장으로 만들었다. 이밖에도 조일양조장, 동방극장 같은 30~40년대 인천의 근대건축물들이 최근 2~3년 새 주차장에 자리를 내주며 헐려나갔다. 공공자산의 가치가 있는 역사적 건축물을 단순히 ‘땅값’으로만 평가하는 지자체의 몰역사적 태도야 어제오늘 이야기도 아니지만 관광 활성화라는 명목으로 문화유산들을 가뿐하게 밀어버리는 판단에는 우려라는 표현도 아까운 지경이다.


최근 몇년 새 원도심 여행은 국내 여행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서울 북촌과 서촌을 시작으로 인천, 부산, 군산 같은 도시들의 오래된 골목길로 그 세월을 살지 않았던 젊은 여행자들이 찾아간다. 인천의 배다리 헌책방 거리도 그런 골목 여행지 가운데 하나다. 오래된 양조장을 대안적 문화공간으로 활용한 스페이스빔과 아벨서점 등이 주축이 되어 한때 쇠락을 거듭하기만 했던 골목에 문화적 온기를 불어넣으며 찬찬히 ‘동네’가 되살아났다. 요즘은 문화유산까지 쓸어버리며 주차장을 지원할 만큼 중구청이 그렇게나 아끼는 알록달록 송월동 동화마을보다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도 주목받고 있다.


애경사의 허탈한 철거 현장을 페이스북으로 중계하며 알린 이는 스페이스빔의 민운기 대표였다. 그에게 애경사의 비극은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10년간 인천 지역문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한 이 유서깊은 건물과 재계약에 실패했기 때문이다.(<한겨레> 4월17일치 ‘10년 공든 탑 스페이스빔 인천 문화버팀목 무너지나’) 한가지 다행은 지역 주민들과 예술인들이 이 공간의 시민자산화를 위해 나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손쉽게 애경사의 전철을 밟기에는 이제 너무 많은 눈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인천시와 동구청은 알아야 할 것이다.


김은형 문화스포츠 에디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9723.html#csidxe1413e18e20ce808c8c7b6b886e7fd7 

Posted by 겟업
2018. 1. 7. 20:06

10년 전 6월 29일, 미국에 아이폰이 나왔다는 뉴스를 봤다. 그땐 별 관심이 없었다. 모토로라의 핑크색 레이저 모델이 더 예뻐 보였으니까. 당시 레이저는 날렵한 디자인과 핑크, 라임, 실버, 블랙 등 다채로운 컬러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아이폰이 마음에 들어온 것은 ‘옐프(yelp)’라는 맛집 찾기 애플리케이션(앱) 때문이었다. 2009년 9월 미국 뉴욕에 갔을 때였다. 주섬주섬 지도책을 꺼내려던 찰나, 미국에 살던 지인이 아이폰을 꺼냈다. 옐프로 우리 주변에 있는 가장 인기 있는 컵케이크 카페를 찾아냈다. 여행 책이 필요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아이폰은 그해 11월이 돼서야 한국에 상륙했다. 생각보다 가격이 비싸 망설이던 중 친구가 미국 주간지 ‘타임’ 앱 덕분에 출퇴근 시간에 영어공부 하기 좋다고 했다. 공부는 ‘지름신’의 좋은 핑계가 돼줬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이폰은 생활의 일부가 됐다.

구구절절 아이폰과의 첫 만남을 떠올린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29일이 아이폰의 10번째 생일이어서, 두 번째는 얼마 전 열린 동아일보, 한국디자인진흥원 주최의 디자인경영포럼에서 아이폰이 화제에 올라서다.  

포럼에 참석한 에린 조 미국 파슨스디자인스쿨 전략디자인경영학과 교수는 “아이폰은 디자인이 아닌 전략의 승리”라고 설명했다. 그러면 왜 10년이 넘도록 아이폰이 디자인경영의 모범 사례로 꼽힐까. 조 교수는 “아이폰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혁신을 이끄는 ‘디자인 전략’을 선보였다”고 설명했다. 

10년 전 레이저는 예뻤고, 블랙베리는 시크했다. 하지만 아이폰은 휴대전화에 맛집 검색, 영어공부 같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사용하고, 더 많은 개발자가 뛰어들면서 그 쓰임새는 무한히 확장됐다. 이젠 백화점, 서점, 은행도 들어 있다. 아이폰 이후의 디자인경영은 ‘남보다 예쁘게 만들어서 비싸게 판다’가 아닌 ‘새로운 기술과 의미를 제품과 서비스에 매끄럽게 담을 수 있는가’를 포괄하는 전략적 개념이 됐다. 


요즘 ‘심리스(seamless·끊김 없는)’라는 단어가 많이 쓰인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상품과 서비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포스트 아이폰 시대에는 기업이 각종 ‘재료’를 심리스하게 융합해 디자인해야 한다.



혁신적인 기업들은 이미 디자인, 개발, 전략, 기획부서가 함께 심리스한 상품 개발에 나서고 있다. 네이버는 디자이너를 ‘서비스 설계자’로 부른다. 사용자의 경험까지 디자인해야 한다는 의미다. 에어비앤비의 창업자 세 명 중 두 명은 디자이너 출신이다. 이 회사의 디자인 팀에는 도서관 사서, 댄서, 생명보험 설계사 출신 등이 있다고 한다. 사용자의 경험을 이해하려면 다양한 배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이폰의 고향, 미국에서는 최근 10주년을 기념한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중 월스트리트저널 기사의 제목이 눈에 띄었다. ‘10년 후 당신의 아이폰은 더 이상 폰이 아닐 것.’ 안경이나 헤드셋, 혹은 상상도 못 할 디자인이 나타날지 모른다. 무엇이 또 우리의 10년을 바꿀지 기대된다. 
  

김현수 산업부 기자


http://news.donga.com/East/MainNews/3/all/20170630/85131654/1#csidx71cb96f42201a7eadeb92f2193836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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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7. 17:01
자동차 회사들은 강한 인상을 풍기기 위해 경쟁적으로 전면부에 커다란 인테이크 그릴을 넣는다. 그러나 BMW는 가로 배치 ‘키드니 그릴’ 때문에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아우디 ‘A8’,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 렉서스 ‘LS’, BMW ‘7시리즈’. 각 회사 제공



최근 미국의 싱크탱크인 리싱크X는 “13년 뒤인 2030년에 미국 내 자동차 등록대수가 82% 감소할 것”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보고서를 내놨습니다. 공유형 자율주행 전기차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는 개인 소유의 내연기관(엔진) 자동차가 도로 위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예언입니다.


이 보고서는 미국 내 자동차 등록대수가 2020년 2억4700만 대로 정점을 찍은 뒤 2030년 4400만 대로 감소하면서 130년의 역사를 가진 자동차·운송산업과 개인의 내연기관 자동차 소유 문화가 종말을 맞고, 그 과정에서 세계 에너지 경제가 재편된다고 내다봤습니다. 이로 인해 제조-판매-유지·보수-보험-정유회사 등으로 이어지는 자동차 산업 가치사슬이 재난적 수준으로 붕괴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도 지난달 25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글로벌 자동차 공유 서비스가 2030년까지 현재의 8배(약 320조 원)로 성장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공유 자동차 서비스를 이용하는 비용이 아무리 낮아진다고 해도 사람의 기본적인 소유욕과 유아시트 같은 개인 사물을 보관해두는 편의성 측면에서 자동차 산업이 입는 타격이 예상만큼 크지 않을 것이라는 반론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10년 뒤 자동차 산업과 관련 서비스 생태계가 ‘전동화, 자율주행, 공유’라는 3대 변혁의 요인으로 크게 달라질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처럼 4차 산업혁명의 폭풍을 코앞에 두고 있는 현재 상황과 묘하게 오버랩되는 두 자동차회사가 있습니다. 현대·기아자동차와 BMW입니다. 기아자동차가 최근에 내놓은 스포츠세단 ‘스팅어’는 깜짝 놀랄 정도로 잘 만들어졌습니다. 운전 재미와 안락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도록 동력 성능과 차체, 서스펜션 세팅이 역대 국산차 중 최고 수준으로 업그레이드됐습니다. 또 현대차는 지난달 28일 독일 뉘르부르크링에서 열린 24시간 내구레이스에 곧 출시될 ‘i30N’ 모델 2대를 출전시켜 완주했습니다. 특히 개발 엔지니어들이 레이서로 참여해 의미를 더했습니다.



하지만 현대·기아차의 노력들이 조금 안쓰럽게 보이는 이유는 뭘까요. 바로 이런 식의 자동차 만들기는 끝물이기 때문입니다. 기존 자동차 산업의 가치체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데 10년 전 일본이 졸업한 자동차 제조와 마케팅을 이제야 구현했습니다. 

차라리 이런 단계를 건너뛰고 지금은 미래 비전을 보여줄 고출력 전기차나 사람보다 운전을 잘하는 자율주행차를 실험적으로 내놓아야 할 타이밍이 아닐까요. 곧 스마트폰 세상이 열리는데 열심히 성능 좋은 ‘삐삐’를 개발하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현대·기아차의 시가총액은 이미 미국의 전기차 업체인 테슬라에 따라잡혔습니다.


BMW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례로 보입니다. BMW의 상징은 흰색과 파란색이 4등분돼 있는 동그란 엠블럼과 ‘키드니 그릴’로 불리는 자동차 전면의 공기흡입구 두 가지입니다. 특히 키드니 그릴은 멀리서 봐도 BMW임을 각인시키는 효과가 뛰어나서 그동안 회사의 성장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키드니 그릴이 이제는 BMW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2004년 아우디의 ‘싱글 프레임’을 시작으로 경쟁사들은 앞다퉈 커다란 인테이크 그릴(사진 참조)을 도입해 강한 인상과 럭셔리함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BMW는 긴 타원형 그릴 2개를 가로로 배치해야 하는 디자인의 한계 때문에 전면부를 납작한 스타일로 만들 수밖에 없었고 상대적으로 경쟁 그룹 내에서 디자인 존재감도 약화됐습니다. 첨단 기술로 무장시켜 야심작으로 내놓은 신형 7시리즈의 판매 부진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특히 전기차 시대로 넘어가면 엔진의 열을 식히는 기능적 역할을 했던 인테이크 그릴의 존재 의미는 퇴색됩니다. BMW 내에서 성공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키드니 그릴을 바꾸자는 주장은 ‘역적모의’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오래전부터 충분히 검토하고 조금씩 변화의 시도를 해왔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과거에 성공했던 경험이나 위기관리 방식이 적용되지 않는 시대입니다. 만일 기존 성과와 경험이 생존을 보장해준다면 세계 1위 기업이 몰락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죠. 그러나 우리는 코닥, 모토로라, 노키아 등이 단숨에 곤두박질치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엔진과 변속기 전문가나 키드니 그릴 신봉자를 옆에 두고선 미래를 준비하기 힘들어 보이는 이유입니다.



이제 지켜야 할 것은 파괴적인 자기 혁신과 유연한 사고를 가진 조직과 인재밖에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석동빈 기자


http://news.donga.com/East/MainNews/3/all/20170601/84664646/1#csidx3a6f6904aab9edeb9df5aa398d45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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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7. 16:58

거리 풍경 바뀌지 않는 서울… TV로 치면 정지 화면 상태 걷고 싶은 도시 만들려면 들어가 구경할 가게 늘려야

서울시는 최근 '서울로 7017'을 조성했고, 향후 광화문 12개 차로를 지하화해서 세종로 전체를 광장으로 만드는 계획안을 발표하는 등 서울을 보행자 중심 도시로 만드는 노력을 진행 중이다.


전 세계적으로 도시를 자동차 중심에서 보행자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변화의 물결은 이미 시작됐다. 하지만 단순히 자동차 도로를 없애면 걷기 좋은 도시가 되는 걸까? 보행 친화적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 인도를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경험으로 어떤 길은 더 걷고 싶고 어떤 길은 덜 걷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을 안다. 연애 초기에 데이트 코스를 정할 때 홍대 앞, 명동, 신사동 가로수길 같은 곳을 선호하지 테헤란로를 걷자고 하는 사람은 없다. 이유는 가로에 접한 가게 입구의 숫자와 상관이 있다. 100m를 걷는 동안 보행자가 선택 가능한 가게 입구의 숫자는 홍대 34개, 명동 36개, 가로수길은 36개, 강남대로 14개, 테헤란로는 8개이다. 대체로 가게 입구의 숫자가 30개는 넘어야 걷고 싶은 거리가 된다.


가게 입구는 보행자에게 선택권을 준다. TV 채널과 비슷하다. 가게 입구가 많은 거리를 선호하는 것은 채널이 5개였던 시절의 TV보다 채널 100개 이상의 케이블TV를 선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뿐 아니다. 시속 4㎞ 속도로 걸어갈 때 마주치는 다양한 가게 입구는 다채로운 체험을 제공한다. 채널이 100개여도 볼 것이 없지만, 채널이 많으면 그나마 '채널 돌리는' 재미라도 느끼게 해준다. 가게 입구가 많으면 실제로 내가 들어가는 가게는 몇 개 없더라도 걸으면서 변화하는 풍경이 주는 엔터테인먼트가 있다. 계산해보면 명동이나 가로수길은 2.5초당 한 번씩 채널이 바뀌는 TV와 같고, 테헤란로는 11초당 한 번씩 채널이 바뀌는 TV와 같다. 밀도가 높은 가게 입구의 배치는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드는 데 중요한 물리적 조건이 된다.


서울 홍대앞 '걷고 싶은 거리'에서 시민들이 주말을 즐기고 있다. /조선일보 DB

필자는 뉴욕에서 일할 때 20분 정도의 거리는 걸어서 다녔다. 하지만 서울 강남에서 그 정도 거리는 택시를 탄다. 왜 그럴까? 지인 중에 금요일 저녁마다 마포에서 압구정동까지 걸어서 퇴근하는 이가 있다. 그는 3시간 반의 퇴근길 중 가장 걷기 힘든 구간은 '마포대교 위'라고 했다. 마포대교 위를 15분쯤 걸어야 하는데 그동안 장면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TV로 치자면 정지 화면 상태다. 이 이야기로 우리는 걸으면서 풍경이 바뀌는 것은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드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뉴욕은 블록의 세로 길이가 평균 60m밖에 되지 않는다. 뉴욕에서 남북 방향의 애비뉴를 따라 걸으면 1분마다 동서 방향으로 가로지르는 새로운 스트리트의 풍경을 접한다. 반면 서울 강남은 한 블록의 크기가 800m다. 한 변을 걸을 때 12분쯤 걸린다. 역삼역에서 강남역을 향해 걸어가면서 바라보는 풍경이 12분 동안 큰 변화가 없다. 당연히 지루하다. 반면 강북의 북촌이나 경리단길 같은 곳은 촘촘하고 복잡한 골목길로 되어 있어서 조금만 걸어도 새로운 골목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이처럼 걷고 싶은 거리는 블록의 크기와 도로에 접한 가게 입구의 수가 결정한다.

위의 연구처럼 상업 시설의 분포는 보행자 중심 도시를 만드는 데 중요하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은 얼마 안 되는 상업 시설들이 한곳에 집중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반포의 아파트 재개발을 살펴보면 가로(街路)형 상가들이 사라지고 수천 가구 단지의 모든 상업 시설이 코너 역세권의 5층짜리 상가에 집중돼 있다. 보행자 도시를 만들려면 상업 시설이 1·2층에 선형으로 늘어서야 하는데 반대로 고층·집중화되고 있다. 이런 상가가 만들어지고 나면 나머지 거리는 수백m 길이의 아파트 단지 담장만 늘어서게 된다. 편리한 원스톱 상가가 거리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상업 시설이 점차 대형화되고 실내 공간에서 놀이·휴식·쇼핑 등을 모두 해결하려 한다. 그로 인해 우리의 거리와 외부 공간은 황폐화되고 있다. 고층·집중화된 상가와 대형 쇼핑몰을 계속 지어대면서 보행자를 위한 도시를 만들겠다는 것은 모순이다. 우리가 이대로 거리를 자동차에 양보하고, 에어컨은 나오지만 하늘을 볼 수 없는 실내 공간에서만 살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방향을 돌릴지 깊이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21/201706210368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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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7. 16:35
두 달 전쯤 미국의 유명 어린이 TV 프로그램인 세서미 스트리트에 '줄리아'라는 이름의 여자 인형이 새로 등장해 화제가 됐다. 48년 방송 역사상 첫 자폐아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네 살인 줄리아는 그림 그리기에 열중할 땐 친구들이 불러도 반응하지 않고, 갑자기 웃거나 이상한 소리를 낸다. 소방차 사이렌 소리에 놀라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세서미 스트리트는 줄리아를 통해 시청자에게 자폐가 무엇인지를 자연스럽게 이해시켰다.

한국에선 자폐성 장애와 지적장애를 합쳐 발달장애라고 규정한다. 국내 등록 장애인 250여만명 중 지적장애인이 20여만명, 자폐성 장애인은 2만여명 정도이다. 지적장애, 자폐성 장애, 뇌병변 등의 장애가 겹친 발달장애인도 상당수일 것으로 추정된다.

'세서미 스트리트'의 자폐증 아동 캐릭터 줄리아. /EBS 화면캡처
발달장애인은 자기주장이나 권리를 제대로 내세우지 못하므로 여러 유형의 장애인 중에서 가장 소외되고 차별받는 약자(弱者)에 속한다. 19년 동안 소 축사 옆 쪽방에서 살며 강제 노역을 했던 고모(48)씨, 10여년 동안 '거짓말 정신봉' '인간 제조기'라는 글자가 적힌 몽둥이로 맞아가며 타이어 수리점에서 일했던 김모(42)씨 등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발달장애인 사례들이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청소년기엔 학교에 다녔어도 성인이 되면 대부분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것도 문제다. 얼마 전 광주광역시에선 발달장애가 있는 20대 여성이 아파트 12층 난간에 매달리는 극단적인 행동을 했다. 어머니가 15분간 필사적으로 딸을 붙들고 있는 사이 경찰이 출동해 구조했다. 이 장애 여성은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지 하루 만에 이런 소동을 벌였다고 한다. 집과 병원 외엔 갈 곳이 없었다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문재인 정부는 최근 '국가가 치매를 책임지겠다'고 발표했다. 여기에 발달장애도 포함하길 바란다. 국가와 지자체가 발달장애인의 생애주기별 욕구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지원하면 발달장애인 가족의 삶의 질까지 높여줄 수 있다. 소수만을 위한 복지가 아닌 보편적 복지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발달장애인들을 도울 전문 인력을 양성하면 새 정부가 추구하는 일자리 늘리기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전 세계 140여 나라 어린이들에게 사랑받는 세서미 스트리트에서 '자폐아 줄리아'의 인형을 움직이는 여성은 자폐성 장애를 가진 13세 아들을 두고 있다고 한다. 사람과 동물, 몬스터, 요정 등 다양한 캐릭터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세서미 스트리트는 TV 속 가상의 세계다. 하지만 우리도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깨치는 순간, 이 이상향은 현실로 다가온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11/201706110179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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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7. 16:32

'시인의 경지에 이른 과학자'상이라는 게 있다. 과학 분야에서 탁월한 글솜씨를 발휘한 저자에게 주는 상이다. 1993년 미국 록펠러대학이 제정했다. 역대 수상자 중에 노벨상 수상자가 네 명이나 됐다. 아인슈타인도 글을 잘 썼다. 우연이 아니다. 생각을 체계적·합리적·논리적으로 펼치는 것은 무엇을 하든 필수다. 미국 의대 시험에서도 에세이를 중시하는 이유다.


▶그리스·로마시대부터 서구 고등교육의 근간은 수사학(修辭學)이다. 글로든 말로든 생각을 조리 있게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미국 방송을 보면 길 가는 아무한테나 마이크를 들이대도 자기 생각을 풍부하고 논리적으로 얘기한다. 우리는 그저 "너무, 너무" "… 같아요"만 연발한다. 앞뒤가 뒤죽박죽이어서 글로 옮겨 놓으면 무슨 얘기인지 알 수도 없다. 때론 한국어를 배운 지 3~4년 된 외국인이 우리보다 더 조리 있게 한국말을 하기도 한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우리도 예부터 글을 잘 쓰고 논리적으로 말하는 걸 강조했다. 이런 전통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해외에서 아이를 키우다 한국에 들어온 사람 불만 중 상당 부분이 글쓰기 교육이 없다는 것이다. 객관식 문제 한두 개 맞히는 데 목숨 거는 세상에선 글쓰기 교육 하자고 말하는 사람이 이상해진다.


▶올해 초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신입생 글쓰기 평가를 했더니 39%가 70점 미만을 받았다. 주제를 벗어난 데다 비문(非文)에 맞춤법도 엉망이다. 채점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나 제대로 평가하면 점수는 훨씬 더 떨어질 것이다. "거시기하다"는 등 비속어, 인터넷식(式) 엉터리 문체가 과제물에 넘쳐난다. 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요즘 신입 사원은 영어보다 국어 실력이 문제"라고 한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20년간 글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한 낸시 소머스 교수가 그제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어느 분야에서든 진정한 프로가 되려면 글쓰기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짧은 글이라도 매일 쓰라. 그래야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하버드 대학 신입생은 한 학기 적어도 세 편 에세이를 쓴다. 교수가 일일이 첨삭 지도한다. 사회에서 리더가 된 졸업생에게 '성공 요인이 뭐냐'고 물었더니 가장 많은 답이 '글쓰기'였다. '능력을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이란 질문에 대한 답도 단연 '글쓰기'였다. 글쓰기는 기술이 아니다. 생각의 근력(筋力)을 키우는 일이다. 생각하는 힘이 없는 사회는 주관 없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냄비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불필요한 갈등도 빈발한다.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 우리 모습 아닌가.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05/201706050268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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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7. 15:49

동성애가 더 잘 퍼진다(?)는 걱정은 군대 같은 이성애적 남성성이 강하고 개인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집단주의적 폐쇄성이 강한 공간의 특성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렵고 확인된 사실도 없다. 군대는 오히려 남자답지 못한 남자에 대한 집단적 혐오와 경계심이 높아 이성애자의 동성애자에 대한 성폭력 같은 보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다.


작년에 일어난 일이다. 인권 관련 회의에서 미혼모 인권 행사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참석했던 한 공무원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관점을 꼭 보태야겠다는 표정을 하고 말했다. “미혼모 인권도 중요하지만 미혼모 발생 예방도 중요하지 않나요?” 순간 다들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 막막해하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잠시 후 어떤 이가 다른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렸고 다수가 동조하며 회의를 이어갔다.


그 공무원은 자존심이 상할 상황이었다. 그가 전혀 뜬금없는 소리를 하였다면 반박하며 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혼모가 늘어나면 안 좋다는 것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 보편상식이고 공무원은 상식 수준의 말을 하고 있었다. 반론이 쉽지 않은 주장이다. 반면 인권과 예방은 같이 이야기할 수 없는 모순관계이다. 특정 소수자 그룹의 인권을 논하면서 그들은 존재하지 않아야 더 좋고 존재할 수 없게 노력까지 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가 반인권적이다. 그 상황에서 가장 정직한 접근은 미혼모가 많은 사회가 정말 문제인가를 토론하는 거였다. 그러나 결혼제도, 국가, 여성의 저임금과 성, 저출산 등이 얽혀 있어 논쟁을 피하는 게 낫다고 다들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특정 소수자 혐오는 그 소수자들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하면 너무 퍼지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전염과 확산에 대한 경계 혹은 공포가 깔린 의심에서 출발한다. 미혼모의 존재를 인정하면 너도나도 미혼모가 되려 하지 않을까?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인정하면 너도나도 군대 안 간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바탕에선 이들이 적게 존재하면, 심지어는 없으면 더 좋다는 생각을 당연시하고 있다. 소수자 인권을 부정하지 않더라도 결국 차별이 예방이라는 믿음도 깨지 않고 있는 것이다. 소수자 인권은 허술한 토대 위에 집을 짓고 있는 셈이다.


며칠 전 영외에서 동성 군인과 합의된 성관계를 한 대위가 군형법 92조의6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을 보면서 이 허술한 토대가 생각났다. 이 법은 영내 성관계 금지와 징계로 통제 가능한 동성 군인과의 섹스를 굳이 ‘항문성교’라며 추해서 형법으로 처벌하겠다는 것으로, 특정 대상만을 심하게 차별하는 허약한 법이다. 그러나 헌법소원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고, 대선에서도 후보자들은 군형법을 인정한다는 의견을 당연한 듯 피력했다. 다수가 지지하기 때문이다.


기사의 댓글에서도 다수의 마음이 확인된다. 다른 문제에 진보적인 특정 사이트의 댓글에서 이번에는 유죄판결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훨씬 높다. 지지가 높은 댓글은 “군은 특성상 동성애 금지해야 돼. 저런 지휘관이 동성애자면 지위를 이용해서 악용할 수도 있고 애들 작살난다”, “군대가 동성애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엄마들 어찌 아들을 군대 보내겠나?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더욱 철저한 관리와 처벌이 있어야 한다”, “내 아들이 군대 가서 동성애자 되면 어떡하지요” 등이다.


성폭력과 동성애 확산에 대한 공포이다. 동성간 성행위를 금지하지 않는 것은 동성간 연애를 허락하는 것이고, 그러면 동성애가 군대에 만연할 것이란 두려움이 다수의 반대의식에 담겨 있다. 내 아들은 절대 동성애자일 리 없지만 유혹에는 넘어갈 것 같고, 서열적 권위가 강한 군대에서 선임으로 혹은 장교로 이들을 만날 것 같기에 두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애가 더 잘 퍼진다(?)는 걱정은 군대 같은 이성애적 남성성이 강하고 개인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집단주의적 폐쇄성이 강한 공간의 특성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렵고 확인된 사실도 없다. 군대는 오히려 남자답지 못한 남자에 대한 집단적 혐오와 경계심이 높아 이성애자의 동성애자에 대한 성폭력 같은 보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다. 동성애를 금지하면 동성애 폭로 등을 약점 삼아 성폭력 등 각종 범죄가 더 쉽게 일어난다. 그래서 몇 년 전 미국 군대는 동성애자인지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던 모호한 신분불인정정책을 폐지했다.


진짜 문제는 군대의 특수성은 핑계이고 다수의 사람이 동성애는 없으면 더 좋은 것이라며 동성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을 가능성이다. 동성애가 시민사회에서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믿는다면 수많은 사람이 일상으로 살아가는 공간인 군대에서만 특별히 구성원간 동성애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은 나오기 힘들다.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반인권적 판결을 대하면서 우리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존재의 부정보다 더 공격적인 차별은 없다는 것이다.




권인숙  명지대 교수·여성학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6873.html#csidx31a4d15cd2443049afb96a6af7441a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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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7. 15:31

오래전 일이다. 새삼 옛 기억이 떠오르는 이유를 모르겠다. 아마도 지난달 만난 스리랑카 농부 때문인 것 같다. 수년간 유기농을 고집했는데 이제는 마을 전체가 유기농을 하면서 마을살이가 좋아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변화의 속도보다 방향을 제대로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2004년 12월26일, 성탄절 다음날이었다. 나는 서울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강력한 지진으로 해일이 발생해 타이 푸껫을 휩쓸고 있다는 긴급 뉴스를 보았다. 지진 발생 지역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아체주 앞바다였다. 규모 9.3의 강진이었다. 급히 인도네시아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보니 피해 규모가 상상을 뛰어넘었다. 이후 사고 집계를 보니 인도네시아 아체에서 17만여명이 숨지거나 실종됐고, 스리랑카, 인도, 타이 등에서 약 6만여명이 사망했다.


이듬해 피해복구가 한창인 아체를 갔다. 참혹한 현장이 끝도 없었다. 거대한 배가 지진해일에 밀려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점령군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 뒤편으로 세계 각지에서 온 구호단체들의 수많은 텐트에 각종 깃발이 만국기처럼 펄럭였다. 저 수많은 구호단체 중 주민에게 기억되는 단체가 있을까. 주민들 입장에서 궁금했다.


현지 단체들의 도움으로 여러 마을 주민대표들을 만날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국가 또는 구호단체 이름과 이유를 물었다. 유명한 단체를 이야기할 거라 짐짓 생각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단체 이름을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이유가 흥미로웠다. 어느 날 청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마을 곳곳을 다니는 외국 여성이 있었는데, 여느 단체들처럼 구호물품을 들고 온 것도 아니었다.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기만 했다. 그리고 여느 구호단체와 달리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계속 묻기만 했고 주민들의 대답에 정말 기가 막힌 생각이라고 공감하는 게 전부였다.


주민들은 이제나저제나 언제 올지 모르는 구호물품을 마냥 기다릴 수 없으니 생계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뭘 해서 먹고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날품팔이라도 좋으니 손수레와 옥수수를 공급해주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고 답했다. 이쯤 되면 손수레를 공급해주겠다고 해야 할 텐데 “그 손수레와 옥수수는 어떻게 구입하지요?”라고 또 물었다.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당황스러웠다. 주민들은 곰곰이 생각해보니 쓰나미에 떠밀려온 폐자재 중에 골라서 고쳐 쓰면 될 것 같았다. 손수레 바퀴 짝이 안 맞는 것도 있지만 굴러가기만 하면 급한 대로 쓸 수 있었다. 그녀는 몇푼 안 드는 옥수수와 재료비는 장기 저리로 빌려주겠다고 했다. 공짜로 받는 것보다 자존심을 지킬 수 있어서 그것도 괜찮다 생각했다. 게다가 돈 빌려주는데 까다로운 서류를 요구하지도 않고 주민들에게 맡긴다고 하니 더할 나위 없었다.


그 후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폐자재 수리 전문가가 되고 이래저래 자그만 가게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가끔씩 찾아오는 그녀는 빌려준 돈이나 사업보다는 사람에게 더 관심을 보였다. 그제야 주민들도 어느 나라 어떤 단체에서 일하는지 물었다고 한다. 몇달이 지나서 알게 된 단체 이름은 영국의 ‘옥스팜’이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주민들 스스로 이루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옥스팜은 참 좋은 친구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단체는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변화의 속도보다 함께 공감할 줄 아는 능력, 정책 못지않게 사람이 중요한 까닭이다.


나효우  착한여행 대표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6411.html#csidxfa2184726d215d9bc1bd0849b68eb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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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7. 15:25

피를 빨아먹는 게 모기의 모성애라는 얘기도 있다지만, 그래도 모기는 성가시고 아주 간혹 위험하다. 가려움쯤이야 성가신 일로 넘겨도 말라리아, 지카 같은 병을 옮기는 건 위험한 공중보건 문제다. 그래서 모기를 쫓거나 피하려는 가벼운 노력도 있지만, 병원체를 옮기는 모기 종을 물리치려는 치열한 노력도 계속된다.


아예 모기의 유전자를 바꾸자는 건 그런 시도의 첨단에 서 있다. 2010년쯤으로 기억한다. 당시 영국의 생명공학기업이 카리브해의 영국령 케이맨 제도에서 유전자 변형 모기들을 야생에 풀어 뎅기열 매개 모기 종을 퇴치하려는 실험을 벌였다.


퇴치 전략은 이렇다. 수컷 모기의 유전자를 변형해 야생에 푼다. 이 수컷이 야생의 암컷과 짝짓기를 하면 후손 유충은 생존에 필요한 특정 항생물질을 생성하지 못해 죽고, 그래서 세대를 거듭할수록 모기 수가 줄어들도록 했다. 당시 모기 수가 크게 줄었다는 발표도 있었으나 야외 실험 전에 환경영향평가가 충분했는지는 논란거리가 됐다.


더 적극적인 시도는 ‘유전자 드라이브’라는 말과 함께 2015년 등장했다. 모기 번식을 막을 특정 유전자가 후손에게 우선적으로 널리 유전되도록 촉진하는 기술이라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은 듯했다. ‘수출 드라이브’ 같은 말에 담긴 의미와 비슷할 듯하다. 예컨대 암컷이 태어나는 걸 막는 유전자를 모기 후손들에게 널리 퍼뜨릴 수 있다면 그 종의 개체는 점점 줄고 결국엔 위험한 모기 종을 퇴출할 수도 있다는 구상이다.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NAS)가 지난해 이와 관련한 평가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를 보면, 유전자 드라이브는 일찍이 1960년부터 어떤 생물종을 개체군 수준에서 보존하거나 퇴치하는 유전공학적 관리 기술과 전략으로 연구되었는데 실효성이 특히 주목받은 것은 2013년 무렵 유전체 편집 기술인 ‘유전자 가위’가 등장한 이후였다. 실험실에선 모기나 초파리에 유전자 가위 시스템을 심어 특정 유전자를 확산하는 기법이 개발됐다.


유전자 드라이브는 위험한 야생은 억제하고 멸종위기 야생은 보존하는 전략이 될까? 기대도 높지만 우려도 깊다. 얽히고설킨 생태계를 뜻하지 않게 교란할 가능성은 한창 논란 중이다. 현재로선, 지난해 유엔 생물다양성 회의나 미국 과학아카데미 보고서가 밝혔듯이 불확실성과 우려도 있지만 연구 가치 또한 있으므로 실험실 연구는 계속돼야 한다는 쪽에 무게가 실려 있다.


논란 중에 다른 성격의 연구도 새롭게 눈길을 끌었다. 실험실이 아니라 실제 야생에서도 유전자 드라이브는 힘을 발휘할까? 야생에선 돌연변이가 출현해 유전자 드라이브에 대한 저항성도 또한 생기지 않을까?


이런 물음과 관련한 연구결과가 최근 또 하나 더해졌다. 미국 생물학 연구자들은 유전자 가위 기법을 이용해 거짓쌀도둑거저리라는 병해충의 개체수를 줄이는 유전자 드라이브 실험을 했다. 연구진은 몇 세대 뒤에 자연적으로 돌연변이가 생겨나 유전자 드라이브 전략을 무력화하는 저항성이 생겨났다고 학술지(<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발표했다.


흥미로운 점은, 변이가 작더라도 드물게 출현하더라도 일단 생긴 변이는 야생에서 빠르게 확산하는 것으로 분석된다는 점이다. 말라리아, 뎅기열, 지카 같은 질환의 퇴치를 목표로 연구돼온 유전자 드라이브 전략은 생태계 교란 가능성이라는 딜레마를 안고서 앞으로도 여러 논의를 거칠 것이다. 이제 유전자 드라이브 연구 전략이나 환경영향평가 논의에서는 첨단 과학의 수동적 대상으로 여겨질 법한 야생이 실은 능동적 적응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도 심각하게 고려될 듯하다. 야생의 진화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오철우 삶과행복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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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6. 17:55

적폐 청산이란 무엇을 하는 것일까? 청산해야 할 적폐들은 수없이 많지만, 최근 며칠 동안 선거와 관련된 뉴스를 보면서 떠오른 것은 유신헌법의 잔향이었다. 1972년에 제정되어 유신체제의 근간이 된 유신헌법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1조 2항에 나온 주권자에 대한 규정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 이후 대통령 긴급조치를 통해 이 헌법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하는 것 자체가 범죄로 규정된 것처럼, 주권자인 국민은 직접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없고, 오직 투표나 청탁을 통해서만 정치에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누구를 지지하느냐, 어느 줄에 서느냐가 ‘정치’가 된 셈이다.


지난주, 문재인 후보가 4차 토론회에서 한 혐오발언에 대해 성소수자들이 직접 항의행동에 나서자 일부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내가 본 것만 해도 ‘예의가 없다’부터 ‘테러’까지 다양한 수준의 막말이 난무했다. 문재인의 연설을 방해하지 않도록 끝까지 기다렸다가 무지개깃발을 들고 천천히 걸어가면서 몇 마디 외친 것을 두고 마치 난동을 부린 것처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유신’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절감했다.


성소수자들의 행동에 대한 비난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로 ‘오냐오냐하니까 기어오른다’는 의식이다. ‘불쌍한 약자’로서 ‘훌륭한 지도자’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렸어야 할 존재가, 자신들도 오르지 않는 정치 무대에 등장한 것이 용납이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이 지닌 위계의식은, 성소수자들이 홍준표가 아니라 문재인을 ‘공격’한 이유가 그가 만만해 보여서였다는 인식에서 잘 드러난다. 물론 이런 가정 자체가 망상이긴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의식은 더 잘 보인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을 누군가 만만하게 봤다고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인이 만만해 보이는 게 그렇게 나쁜 것일까?


노무현이 대통령이었을 때, 나에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가 만만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가 대통령으로서 잘못한 것도 많지만, 과거 어떤 대통령보다도 탈권위주의적이었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평가될 만하다. 보수 세력이 노무현이 한때 대통령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이유도 그가 대통령의 권위를 실추시켰다고, 즉 민주화시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권위를 바라는 마음은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4·19혁명 이후 쏟아져 나온 다양한 목소리들 앞에서 적지 않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오직 ‘혼란’만을 보고 불안해했다. 위계의 붕괴는 ‘사회 지도층’으로서의 그들의 존립기반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불안은 ‘혼란을 수습한’ 군사쿠데타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우리가 그들과 다른 길을 갈 수 있을지 여부는 우리가 ‘광장’에서 무엇을 배웠느냐에 달려 있다.


올해 1월, <한겨레>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더 나은 민주주의 사회를 위해 필요한 것으로 시민들이 검찰 개혁에 이어 두 번째로 꼽은 것이 시민의 직접 정치 참여였다. 이는 꼭 대의제를 부정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선거 과정을 통해 더 다양한 의견들이 드러날 수 있게 하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직접 정치 참여의 한 방법이며, 성소수자들의 행동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투표뿐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유신시대는 끝나지 않는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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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6. 17:51

지난겨울은 '도깨비'가 있어서 행복했다. '가슴에 검(劍)을 꽂고 900년을 살아온 도깨비의 고통을 거두어 줄 사람은 그의 신부뿐'이라는 지극히 낭만적인 '저주'는 서사 전개에 필요한 장치라기보다는 메타포에 가까웠다. 드라마 '도깨비'는 시적인 대사와 미시 콘텐츠의 활성화를 통해 즐길 거리를 제공했다. 그 매력은 당신이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작품에 참여한 데 있다. 주인공의 대사를 따라 하거나, 롱코트를 입어보거나, 빨간 목도리를 둘러 본 사람들. 시크한 말투를 흉내 낸 시청자. 모두가 작품과 함께했다.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 '향유의 시대'를 살고 있다. 향유란 문화를 주체적으로 즐기는 활동이다. 주체적으로 즐긴다는 말은 스스로 참여하여 가능한 모든 방법을 찾아가는 체험의 과정을 의미한다. 문화는 향유를 통해 생산자 중심의 교조적 일방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창조적 활력을 지니게 된다. 국민 누구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콘텐츠를 향유하고 소비하며, 체험의 과정을 통해 창작자로 성장한다. 콘텐츠를 중심으로 역동적인 창업과 창작이 연결되는 것이다.

이렇듯 콘텐츠 관점에서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향유다. 이제 우리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가치 있는 체험을 하고 공유하며 확산시킬 힘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다. 게임, 영화, 음악, 애니메이션, 웹툰, 캐릭터 등으로 대표되는 콘텐츠 모두가 보편적 향유 대상이다. 우리는 이 향유 대상들로부터 감성과 감동의 울림을 얻는다. 기술 진보에 따라 향유 방법이 다양해지고 있지만 결국 사람을 이해하고 감성을 자극하고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문화적 감수성이 중요하다.


지금 온 사회가 4차 산업혁명과 새 정부의 새로운 정책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문제는 경제'라고 하지만 사회의 어젠다가 경제에만 묶여 있으면 불행한 일이다. 경제가 삶의 중요한 토대라면 콘텐츠 향유 역시 그러하다. 콘텐츠 향유가 중요한 것은 그 부가가치만큼이나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고, 우리 자신을 주인공으로 세우기 때문이다. 스스로 참여해 가치를 발굴하고 즐거움을 창출하는 향유의 시대인 것이다. 문화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콘텐츠는 공허하고, 참여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향유는 불가능하다. 새 정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국민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라면, 그 중요한 답의 하나는 '콘텐츠 향유'에 있다.


박기수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16/201705160345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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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6. 17:05
서울의 민간 재가복지센터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2008년부터 시행된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에 따라 치매나 뇌혈관 문제 등 노인성 질환을 앓는 어르신 댁을 요양보호사들이 찾아가 도움을 드리고 있습니다. 저도 20명가량을 담당하는데, 매달 한 번 댁으로 가서 신체, 질병, 인지, 영양, 의사소통 상태를 체크하고 보호자와 요양보호사들의 의견을 듣습니다. 어르신 20여명 중 대부분이 할머니입니다.

서울에 사는 87세 할머니는 1남 4녀가 있는데 서울에만 1남 2녀가 삽니다. 하지만 셋 모두 형편이 어려워 줄곧 모실 처지가 아니어서 한 달씩 번갈아가며 모십니다. 신림동 작은딸네서 한 달, 그 부근 아들네서 한 달, 사당동 큰딸네에서 한 달, 이런 식입니다. 난청이 심해 큰 소리로 말해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이가 없는데 틀니를 못해 늘 소화 장애에 시달립니다. 작년 가을 화장실에서 넘어진 후로는 걷지도 못합니다. 치매와 시공간 감지력 저하로 밤과 낮 구분이 안 돼 한밤에 기어가 이 방 저 방 문을 여니 자식과 손주들 모두 힘들어합니다. 제가 가면 "왜 아직까지 사는지 모르겠다"며 "하지만 병원(요양원)은 안 간다"는 말만 반복합니다. 요양원에 보내질지 모른다는, 즉 집에서 내쳐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는 겁니다. 요양원 입소는 당사자들이 극력 꺼리기도 하지만 국공립은 대기자가 많아 '하늘의 별 따기'이고 민간 역시 자리가 비어야 합니다. 대상 어르신의 수는 급격히 늘어나는데 시설 자체가 크게 부족합니다.

/조선일보 DB
평택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 가야 하는 곳에 홀로 사는 90세 할머니가 계십니다. 너무 외져서 요양보호사들도 맡기를 꺼립니다. 지하 창고를 개조해 환기가 잘 안 되는 악취 심한 방에 삽니다. 시력이 나쁜데도 불을 켜면 눈물이 나서 사실상 암흑 속에서 지내다시피 합니다. 제가 돌아갈 때마다 "왜 벌써 가려느냐"며 붙잡으십니다. 저는 화재라도 나면 어쩌나 싶어 늘 불안합니다. 이분도 자녀는 많지만 전국에 흩어져 있고, 서울·수도권에 사는 자녀는 다들 살기가 어려워 함께 지낼 여건이 아닙니다. 구리에서 혼자 사는 90세 할머니는 생활 형편은 훨씬 좋습니다. 하지만 그분도 저만 보면 "나보다 나이 먹은 사람도 있느냐"며 물어보시는데 제가 "그럼요. 많이 계셔요"라고 답해야 안심하십니다.

어르신들이 왜 오래 사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하나. 왜 자녀들 힘들게 만든다며 죄의식을 갖고, 내쳐질까 봐 두려워해야 하나. 이분들을 대할 때마다 우리의 내일을 미리 보는 것 같아 서글프고 불안해집니다. 우리나라의 고령화 속도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릅니다. 그리고 노인 빈곤율은 OECD 회원국 가운데 1위라고 합니다. 한편 불황과 청년 실업 문제는 개선되지 않으니 사회가 어르신을 모실 능력을 점점 더 상실해가는 것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우리의 부모인 어르신을 모시는 문제는 이제 가족만이 감당할 사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끼곤 합니다. 어르신이 오래 사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나라, 자녀에게 피해를 준다며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그런 나라를 만들어야지요. 이제부터라도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제대로 된 대책을 세워 실천합시다.



김지은 굿모닝복지센터 책임연구원·사회복지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04/201705040266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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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6. 17:02
"욕하지 말고, 때리지 말고. 부리지 말자."

1923년 5월 1일이 '어린이날'로 처음 제정됐을 때 어린이 운동가들이 외친 구호다. 아이들에게 뭘 해주자는 게 아니라 뭘 하지 말자는 부작위의 호소였다. 뒤집어보면, 90여 년 전 우리 아이들 처지가 얼마나 고달팠는지 알 수 있다. 제1회 어린이날에 아이들의 가장 간절한 희망사항 10가지를 담아 배포한, '어른에게 드리는 선전문' 속에는 '이발이나 목욕을 때맞춰 해주세요'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해주세요' '산보와 소풍을 가끔 시켜주세요' 같은 것도 있었다(동아일보 1923년 5월 1일자). 이런 외침도 어린이날만 지나면 잠잠해졌다.


1956년 어린이날 행사 때 땡볕 아래서 매스게임을 하는 어린이들(왼쪽 사진·조선일보 1956년 5월 6일 자)과 1963년 어린이날 나들이 나왔다가 미아가 되어 미아보호소에서 새우잠을 자는 어린이들(동아일보 1963년 5월 6일 자).
1956년 어린이날 행사 때 땡볕 아래서 매스게임을 하는 어린이들(왼쪽 사진·조선일보 1956년 5월 6일 자)과 1963년 어린이날 나들이 나왔다가 미아가 되어 미아보호소에서 새우잠을 자는 어린이들(동아일보 1963년 5월 6일 자).


















초창기 어린이날이란 잔칫날이라기보다는 '어린이날이란 무엇인가'를 어른들에게 알리는 날이었다. 전국 거리를 행진하면서 전단지 등을 나눠주는 일을 어린이들이 했다. 1925년 행사 땐 어린이 30여 만명이 길거리에 나갔다. 1933년 어린이날에 소년단 소속 어린이들은 새벽 6시부터 어린이날을 고하는 새벽나팔을 분 뒤, 선전지 배포에 총동원됐다. 평소보다 몇 배 고단한 하루였다.

광복 이후엔 어린이날 행사들이 볼거리 위주로 크게 열렸다. 이승만 정권 시절 어린이날마다 서울운동장(옛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대규모 행사 역시 아이들을 힘들게 했다. 초대형 매스게임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1955년의 경우 초등학생 5000여 명은 몇날 며칠을 수업도 줄여가며 연습한 '합동체조'를 이 대통령과 고관들 앞에서 선보였다. 얻어맞아 가며 연습했다는 말도 있었다. 이날 가장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할 어린이들이 땡볕 쏟아지는 운동장에서 진땀을 뺐다. 보다 못한 아동문학가 이원수는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아이들이) 알아듣기도 힘든 축사 강연을 들었으며 무의미한 고행을 했다… 어린이날이 아니라 아동 곤욕의 날"이라며 당국자들을 맹비난했다(조선일보 1955년 5월 10일자). 그러나 이런 지적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1956년에도 어린이 5000명이 합동무용에 동원됐다. 공연 도중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기념식이 중단됐다. 운동장에서 고생하던 어린이들은 아마도 좋아했을 것이다. 아동문학가 윤석중(새싹회 대표)은 "어린이날엔 어린이들 재롱을 어른들이 구경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알맞은 얘기랑 노래랑 춤이랑 연극이랑 들려주고 보여주는 잔치를 베풀어 줘야만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어린이날 행사에서 어린이들의 고생이 줄어들기는 했다. 하지만 어린이들의 매스게임 동원은 1980년대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어린이날이면 나들이 나왔다가 부모를 잃어버린 미아도 1000명 안팎씩 발생했다. 1963년 어린이날엔 미아 105명이 그날 밤까지도 부모를 못 만나 적십자 미아보호소에서 새우잠을 잤다. 

고달픈 어린이날의 과거는 역사 속으로 흘러갔고, 오늘날  어린이날이면 많은 아이가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도 지난주 보도에 따르면 세계 16개국 12세 아이들의 행복도를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가 최하위였다고 한다. 

특히 '외모에 대한 불만'이 12세들의 행복도를 끌어내렸다는 것이다. 외모 중시 풍토가 아이들 행복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셈이다. 방정환 선생님이 이런 사실을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02/2017050203074.html


Posted by 겟업
2018. 1. 6. 16:54

오이와 함께 비벼버린 냉면 사진에 8만 오싫사(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가 통곡했다. 오이 냄새만 맡아도 피부 말단의 DNA 세포부터 쭈뼛 서버리는 것 같다는 이들은 오싫사를 ‘살면서 가장 소속감을 느낀 집단’이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 선생님이 억지로 입에 넣은 오이를 토해버린 트라우마가 자신만의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52소수자(오이라는 글자에서도 오이 냄새가 난단다)들은 뭉친 지 며칠 사이에 많은 것을 성취했다. 한 분식 체인점이 큐컴버-프리 김밥을 출시했고 언론은 OE혐오자들이 쓴맛을 다른 사람보다 1000배 더 느끼는 유전자를 가졌단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정당성까지 확보한 셈이다. 이쯤 되면 과거 오이 싫어하는 친구를 놀리려 친구 핸드폰에 오이 비누를 문댔던 나의 장난이 씻을 수 없는 만행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들 최대의 적은 오이가 아닌 오이 패권주의자다. “오이 빼주세요”란 말에 “오이 없이 무슨 냉면 맛이야”라며 덤퍽 오이를 올리는 오이 탈레반을 의미하는 거다. 오싫사 회원들은 지난 며칠간 오이 사진과 함께 “오이는 오이시이(맛있다의 일본말)” “오이미역냉국 한 사발 하세요” 등의 메시지 테러까지 당했다. 편식은 나쁜 것이란 뿌리 깊은 인식, 똑같이 안 먹으면 실눈 뜨는 전체주의적 문화. 거기서 오는 오득권자들의 만행은 익숙하다며 한숨을 내쉰다.


중국 관광객 대신 중동 관광객을 대거 유치하겠단 계획에 의구심이 드는 것도 곳곳의 음식 패권주의 때문이다. 식도락을 즐기기 어려운데 관광객이 ‘유치’될까. 중동 사람들이 대장금을 재미있게 봤다 해도 그렇다. 할랄을 꼼꼼히 따지지 않는 이들도 한국 식당에선 믿고 먹기 어려운 경우가 많단다. 한국 대학에 다니는 중동 석사생이 “돼지를 아예 안 먹으면 돼지고기 좋아하는 한국 사람은 뭐가 돼”란 말을 자주 듣는다며 하소연한 글이 외국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일도 있다.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된다”는 우문현답에도 돼지 권유는 끊이지 않았단다. 공영방송에서 시어머니와 남편이 무슬림 며느리를 속여 돼지고기를 먹이는 에피소드가 나온 것도 불과 지난해다. 좋아하는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입장 바꿔 우리나라 관광객들에게 ‘고수 안 넣으면 동남아 음식이 아니다’며 고수를 고수하는 식당이 있다면 실격이다.
 
다행인 건 우리나라가 학습이 빠른 나라란 거다. 10년 사이에 취향 존중 문화가 확산된 것만 봐도 그렇다. 10년 전엔 욕이었던 ‘오타쿠’ ‘빠순이’도 문화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로 시선이 많이 중화됐다. 취향을 평가하려 드는 이에게 ‘취향 존중 부탁드립니다’는 매너가 됐다. 이제 식문화 차례다. 탕수육 찍먹파가 부어 먹음 당하지 않는 세상, 생선회에 레몬을 각자 뿌려 먹을 수 있는 밥상 민주화를 원한다.
 
구혜진 JTBC 사회1부 기자 



http://news.joins.com/article/21440934

Posted by 겟업
2018. 1. 6. 16:50

직장인의 미래를 예술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면 엉뚱할까.

여행사에 근무하는 지인에게서 앞으로 이 직종이 얼마나 살아남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다. 여행사를 통해 비행기표를 구매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최근 만난 동시통역사는 10년 이내에 기계에 일을 내어 줄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내가 아는 미용사는 1990년대 20대 말에 어쩔 수 없이 퇴사해서 미용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지금은 자기 가게를 운영한다. 그녀는 5월에 연휴가 많아 손님이 줄어들까 걱정하지만, 직업이 없어질 것 같은 걱정은 없다. 오히려 40대인 지금까지 직장에 있었다면 나와서 막막했을 거라 말한다. 

베스트셀러 ‘일의 미래’에서 저자 선대인 소장은 ‘5년 뒤 당신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라는 괴로운 질문을 던진다. 직장인들은 이에 대해 답이 없고 불안하다.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지난주 나무와 진흙으로 주로 작업하는 영국의 젊은 예술가이면서 한국에서도 전시를 한 바 있는 닉 웹과 이틀 동안 그의 작업실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직장인의 미래에 대한 힌트를 예술가에게서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첫째, 예술가들은 조직이 아니라 자신의 기술에 의존한다. 2월 월스트리트저널은 ‘(정규직) 직원의 종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기업들이 정규직 채용을 줄이고, 아웃소싱, 계약직으로 전환하는 트렌드를 보도했다. 예전 어른들은 공부를 못하면 “기술이나 배워라”라고 했다. 하지만 직장인들은 자기만의 기술이 없어 미래가 불안하다. 50세를 전후하여 직장을 떠난 뒤 자기 기술이 있는 사람은 독립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결국 프랜차이즈 등을 통해 조직의 기술에 의존하고, 독립이 힘들어진다. 직장인의 미래에 대한 고민은 조직이 아닌 나만의 기술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둘째, 예술가들은 조직에 기대지 않기에 정기적인 급여를 받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 자기 작품을 팔거나 돈벌이를 하게 된다. 미술이나 음악 하는 사람이 교습을 하거나 작가가 인세를 받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그렇다. 직장인이 회사를 떠나 정기적인 급여를 받지 못하는 상황은 생각보다 빨리 온다. 정기적 급여를 받으며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팔 수 있는’ 기술을 축적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냥 기술’과 ‘팔 수 있는 기술’은 매우 다르다.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요리를 팔아서 식당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다. 판매할 수 없다면 정기 급여가 없는 상황을 헤쳐 나가기 힘들다.

셋째, 예술가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 우리는 학교를 졸업하면 취직을 하고, 회사에서 배정한 부서에서 일한다. 예술가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비교적 뚜렷하다. 빅데이터는 유망한 직종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빅데이터 산업에 뛰어들 수는 없다. 세상의 변화를 쫓아가기 위해 우리는 외부에 눈을 돌린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물어보면 말문이 막힌다. 


자신을 조직과 직책의 이름으로만 규정하면 미래는 매우 좁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기술을 만들어 내야 자신만의 지속적인 연구와 개발도 가능하고 팔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아진다. 생각을 확대해 보자. 여행사 직원보다는 사람들이 좀 더 즐겁고 행복하게 여행하도록 만들어 주는 전문가로, 미용사보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에 더 자신감을 갖게 도와주는 전문가로 자신을 바라보면 새로운 기회가 열릴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혼자만의 시간과 자신과의 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많은 사람은 미래에 대한 걱정만 하지 정작 깊이 있는 고민은 회피한다. 일단 월급은 나오기 때문에 고민을 미룬다. 

웹은 좋은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확실한 기술을 가진 장인(匠人)이 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감정과 연결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했다. 선 소장 역시 공감과 소통 능력이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이라 말한다. 

예술가의 특성에서 미래에 대한 힌트를 얻어 보자. 삶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 분야의 탄탄한 기술을 갖고 있는가. 그 기술로 다른 사람의 감정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날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다.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 조직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http://news.donga.com/Column/3/70030300000055/20170405/83695473/1#csidx4939ff3de601590992b50a5bd32401a 

Posted by 겟업
2018. 1. 6. 16:48

몇 해 전 명절이었다. 집안 어른 한 분이 딸과 며느리들에게 신문을 보여주며 말씀하셨다. “이 사람 어머니가 자식들을 방으로 매일 한 명씩 따로 불렀다는 거야. 아이와 두 눈을 꼭 맞추고선 ‘넌 정말 특별하단다’, ‘넌 진짜 대단한 아이야’ 이런 얘기를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해줬다네. 그 덕분에 오늘날의 자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아주 좋은 방법 같아.” 혼잣말의 형식을 띠었지만, 너희도 이렇게 자식들을 키워보면 좋지 않겠냐는 제언이었다. 포인트는 형제자매들을 한꺼번에 칭찬하는 게 아니라 한 명씩 따로 몰래 칭찬하는 것. 어머니의 일상제의 덕분에 훌륭해진 사람이 빌 게이츠였는지 마크 저커버그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저 연배의 어른에게도 부모에게 인정 받는다는 느낌이 자존감의 깊은 뿌리가 되는구나, 혼자 웃으며 며칠간 열심히 실행했던 기억만 남아 있다. 

우리는 아이를 특별하게 키우라는 많은 메시지에 노출돼 있다. 분유 하나를 사도 ‘우리 아이는 특별하니까’ 더 비싼 것을 사 먹여야 하고, 학원 하나를 보내도 특별한 아이들만 다닐 수 있다는 ‘영재학원’에 보내고 싶어 한다. 특별한 아이로 키우라는 메시지는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자본의 상술일 뿐이지만, 내 아이는 특별하다는 믿음과 염원이 우리 마음 속에 창궐하므로 언제나 이 전략은 번성한다. 내면적인 것과 외형적인 것은 다르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둘은 생각보다 그렇게 분리돼 있지 않다. 특별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설령 내면에서만 꽃핀다 해도 별로 건강한 일이 아니다. 특별하다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남과의 비교, 외부의 시선을 전제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부모로부터 사랑 받고 인정 받는다는 확고부동한 감정은 한 인간의 존립근거이며, 이것이 심하게 결핍될 때 아이는 훼손된 인간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나는 특별하다는 자의식이 너도 특별하다는 평등의식과 병립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특별한 나’라는 선민의식은 한 인간의 정신에 그저 독약으로 작용할 뿐이다. 너무 특별하게 자란 아이들이 어떻게 괴물 같은 어른이 되는지 오늘날 우리는 충격적으로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보일러 작동법을 몰라 삼성동 자택에서 떨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그래서 우리는 오래오래 기억해야 한다. 9세에 청와대에 들어가 27세에 나올 때까지 공주마마로만 살았던 그는 너무도 특별한 아이였던 나머지 온전한 삶을 살 기회를 박탈당했다.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그저 그런 일상을 지루하게 살아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온전한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한다. 일찍이 소설가 마르케스가 털어놓았듯 명성은 그 본질이 파괴적인 것이어서 “사람들을 진짜 세계로부터 소외시킨다”. 그러니까 보통사람으로 산다는 건 진짜 세계에서 온전하게 전적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올 초 백악관을 떠난 미국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의 8년은 평범함과 정상성을 고수하기 위한 피나는 투쟁이었다. 외부의 시선에 노출된 공적 삶으로부터 자녀들을 보호하고 아이들이 ‘평범하기에 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매섭게 규칙을 세우고 지켰다. 백악관 직원들이라고 왜 퍼스트도터(first daughter)들에게 찬탄의 언어를 쏟아내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미셸은 즉각 이들의 찬사를 제지하며 경계선을 설정했다. 백악관에 들어가 직원들에게 처음 했던 말이 “아이들 이부자리 펴주지 마세요. 청소도 스스로 하게 하세요”였다. 최저임금 직종에서 일해봐야 한다며 둘째 딸 사샤를 새벽 식당 아르바이트에 보내고, 아이들 학교 행사는 백악관 달력에 가장 먼저 표시한 후 반드시 참석했다. 보통사람으로서 누리는 온전한 삶의 경험과 감각은 제 아무리 탁월한 홍보 전략과 이미지 조작으로도 재현 가능한 게 아니라는 걸 그는 몸소 보여줬다. 


덴마크 사람들이 신봉하는 얀테의 법칙(보통사람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네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남보다 더 똑똑하다고 착각하지 마라’, ‘네가 다른 이들보다 중요할 것이라 생각하지 마라’ 등으로 이뤄진 겸손의 10계명이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너는 특별하라’는 정언명령이 아니다. 바로 이 보통사람의 법칙이다. 그토록 특별한 삶을 살아왔던 박 전 대통령이 새 매트리스의 비닐커버를 지금쯤은 뜯었을지 어쩔지 궁금해 하다, 내가 왜 이런 걸 궁금해 하고 있어야 하는지 마음이 답답해진다. 오늘 집에 가면 아이들을 하나씩 따로 불러 말해줘야겠다. ‘넌 정말 특별하지 않아.’ 

박선영 기획취재부 기자



http://www.hankookilbo.com/m/v/f1c35ea72e614b9aa178aa0e56d702d5


Posted by 겟업
2018. 1. 6. 16:40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쓴 ‘총 균 쇠’는 서울대생이 학교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빌려보는 책 가운데 하나다.


물론 생물지리학 분야에서 중요한 책이기는 하지만 도대체 왜 그리 많이들 읽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선배들이 많이 봤다고 하니까 후배들도 덩달아 너도 나도 따라서 읽은 것일 테다.


‘총 균 쇠’는 752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이지만 단 한 가지 질문에 집중한다.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같은 조상에서 나온 호모 사피엔스다. 그런데 왜 문명 발달 속도가 저마다 다를까?”


여기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유전자의 차이라는 것이다. 흑인, 황인, 백인의 유전자가 다르며 그에 따라 지능도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계에서는 이미 ‘인종’이란 단어는 퇴출되었다. 대륙마다 유전자가 다르다는 증거가 없다.


두 번째 해석은 필요의 차이, 기후에 따른 천성 같은 게 원인이라는 것이다. 창의성은 기후가 추운 곳에서 발휘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문명 발달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바퀴, 문자, 농업, 야금술은 모두 더운 지방에서 발명된 후 추운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는 1532년 스페인의 피사로 장군과 잉카제국의 알타우알파 왕의 전투를 예로 든다. 피사로의 군대는 기병 62명과 보명 106명이 전부였다. 알타우알파 뒤에는 자그마치 8만 명의 대군이 서 있었다. 19대 1로 싸워서 이겼다는 허풍은 많이 들어봤어도 400 대 1로 싸워서 이겼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결과는 스페인의 압승이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무기다. 둘째는 유럽인이 가져온 전염병이고 셋째는 대양을 건너는 해양기술과 문자였으며 강력한 통솔력을 발휘하는 정치조직이다. 그런데 왜 유럽인에게 가능했던 일이 잉카인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을까?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농업의 발전이 대륙의 모든 차이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왜 어느 지역은 농업의 발전이 빨랐고, 어느 지역은 발전이 더디거나 아예 농업을 시작하지도 못했을까?”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해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기후, 고도와 지형의 변화 정도, 가축화할 수 있는 포유류와 곡물화할 수 있는 야생식물의 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환경적 차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족과 대륙마다 역사가 다르게 진행된 까닭은 민족의 생물학적인 차이가 아니라 환경적인 차이 때문인 것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논리는 명확하다. 문명 발달의 기초는 농업이며, 잉여생산물이 생기면 기술을 발달시킬 전문가들이 생기고 결국에는 문자와 정치조직이 발달했다. 그런데 농업의 발달 정도를 결정한 것은 바로 환경이라는 것이다. ‘총 균 쇠’는 인종의 차이를 뛰어넘는 인류사의 중요한 요소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분명히 전 세계 사람들에게 새로운 통찰을 제공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원래 생리학자로 과학계에 발을 내딛었다. 그를 생물지리학자로 변신시킨 질문은 뉴기니에서 나왔다. 1972년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조류학자와 진화생물학자로서 뉴기니 해변에서 새의 진화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뉴기니의 정치가 얄리와 함께 길을 걸었다. 얄리가 물었다.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여기서 화물이란 쇠도끼, 성냥, 의약품, 옷, 청량음료, 우산에 이르는 온갖 물건을 말한다. 뉴기니 사람들에게 화물은 하나의 신앙이었다. 카고 컬트(cargo cult), 즉 화물숭배가 바로 그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남태평양의 섬에는 미군 비행장이 건설되었다. 미군 비행기가 착륙할 때마다 신기하고 쓸모 있는 화물들도 함께 왔다. 미군들은 물건을 조금씩 원주민들에게 넘겨주었다. 하얀 알을 먹으니 설사가 멎었다. 기적이었다. 원주민에게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었다. 물건을 넘겨주는 미군들은 아무런 생산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물은 비행기에서 저절로 생겨났다. 화물은 신이 내려준 선물 같았다.


전쟁이 끝났다. 미군 비행장은 폐쇄되었다. 원주민들은 더 이상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원주민은 대나무로 비행기와 관제탑 모형을 만들어 놓고는 제사를 지냈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줄 것처럼 제사를 지냈다. 후에 미국인들이 와서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려고 해도 그들의 깊은 신앙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뉴기니에는 아직도 화물숭배 신앙이 남아 있다. 심지어 매년 2월 15일 되면 USA라는 그림을 그리고, 성조기를 펼쳐 들고 대나무 막대기로 만든 총을 어깨에 걸치고 사열하는 부족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깊은 신앙심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화물은 내려오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이게 남의 일이 아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화물숭배 신앙은 활개치고 있다. 지난 3월 1일 서울 시청 앞에는 성조기와 태극기, 심지어 뜬금없이 이스라엘 국기를 든 사람들이 500만(!) 명이나 모였다. (500만 명이 한군데에 모여도 서울시 교통은 전혀 마비되지 않았으며 생수를 비롯한 생필품 공급과 화장실 사용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단 1만 6천 명의 경찰로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정도 대처라면 웬만한 전쟁이 나도 서울시민은 무사할 것 같다. 서울시 만세! 경찰청 만세!)


이것은 한국전쟁의 기억 속에서 북한을 블레셋으로 미사일과 핵을 골리앗으로 섬기며 저주하는 또 다른 화물숭배 신앙이다. 화물숭배 신앙인에게는 답이 없다. 시간이 흘러 자연적으로 소멸하기를 바라야 한다. 다만 뉴기니보다 대한민국의 화물숭배 신앙이 더 먼저 사라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총 균 쇠’를 읽을 이유가 분명한 것 같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http://www.hankookilbo.com/v/a0ecdee3e0f74d9097ac2a954f9dd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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