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6. 16:36

독일의 경제학자 빌헬름 뢰프케는 평생 화두 하나를 붙들고 살았다. 바로 "칸트 괴테 베토벤의 나라 독일이 어쩌다 미치광이 히틀러에게 몰표를 몰아주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을 인류에게 안겨주었는가?"였다.


의문은 곧 이런 재앙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독일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라는 성찰로 이어졌다. 뢰프케가 도달한 결론은 한 사회가 건강하려면 사회적 계층질서 피라미드의 최상층에 소수의 '윤리적 귀족'이 존재해야 하며, 무지한 대중들로 인해 세상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진정한 성직자 혹은 지식인과 같은 엘리트가 자기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뢰프케는 두 가지 특이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25세 때 예나대학교의 교수에 임용됨으로써 독일 역사상 최연소 교수가 되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 기록은 나치정권이 해직한 대학교수 리스트 상단에 그의 이름이 위치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나치의 집권 이전부터 장차 나치가 독일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것을 예견하고, 강연과 기고를 통해 격렬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히틀러의 미움을 샀다. 마침내 현실화된 나치의 박해를 피해 그는 터키를 거쳐 스위스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뢰프케는 나치체제가 가져온 재앙을 복기하면서 모름지기 건강한 사회에는 윤리적 귀족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윤리적 귀족은 ‘범할 수 없는 규범과 가치를 지키는 공동체의 수호자를 자임하고 또 그것을 몸소 엄격하게 실천하는 소수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 그룹’을 의미한다. 윤리적 귀족은 절제된 생활을 위해 헌신하고, 진리와 법을 수호하기 위해 용기 있게 행동하며, 마침내 국가의 양심이 되는 인물이다. 그는 “자유사회의 지속적인 존립여부는 우리 시대가 윤리적 귀족을 얼마나 충분히 창출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자신의 목전의 이해에 눈멀지 않고 중요한 경제정책을 바라볼 수 있는 사업가, 금융인, 노조지도자, 재판관, 언론인과 학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순실 사태 이후 광장에 촛불이 켜지고 연이어 태극기 물결이 등장하면서 나라는 의식적으로 두 쪽이 났다. 현대 국가의 가장 큰 책무인 갈등조정은 교과서 속으로 퇴장하고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적절한 대응은커녕 한국은 정부부재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사드의 중국, 소녀상의 일본, 트럼프의 미국 등 국제문제가 우리를 옥죄고 있으나 정부는 아무 손을 쓰지 못한다. 정치권은 온통 대통령선거에만 집중하는 바람에 민생이라든지 청년 일자리 같은 국내현안도 표류하고 있다. 가위 국난이다.


미증유의 국난을 맞아 우리에게도 윤리적 귀족이 있는지를 자문하게 된다. 존경하는 정치인, 믿고 따를 수 있는 성직자, 올곧은 언론인, 신뢰하는 법조인, 시대정신을 발현하는 지성인이 우리에게 있는가. 지금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대중이 귀담아듣지 않는다. 그런 판국에 국민이 존경할 만한 인물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기에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어쩌다 언론이 국가 원로라는 포장으로 전직 고위인사 몇 사람의 의견을 묶어 보도하지만 그들의 말은 국민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어른도 원로도 지도자도 존경할 만한 인물도 없는 사회야말로 비극의 무대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세상에서는 국민이 자포자기하기 쉽고 부박해진다. 광장은 이미 그런 기류를 반영하기 시작했다.


믿고 따를 인물이 없는 우리에게 뢰프케의 윤리적 귀족 처방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향후 한국사회가 건강성을 유지하려면 우리에게도 윤리적 귀족에 해당하는 다음 세 집단의 정신이 살아있어야 한다. 지식인, 언론인, 종교인이다. 지식인의 책무는 건강한 시대정신을 제시하는 것이다. 언론인은 사회가 썩지 않도록 감시하고 계도하는 것이 기본 책무다. 종교인은 국민들이 저마다 가치 있게 살아가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들이 절제된 생활을 위해 헌신하고, 진리와 법을 수호하기 위해 용기 있게 행동하며, 각자의 영역에서 국가의 양심이라 칭할 만한 인물로 성장한다면, 비로소 국민의 가치관이 바로 서게 되며 그때 가서야 나라가 반듯해질 것이다.


서재경 아름다운서당 이사장

http://www.hankookilbo.com/v/8e959b7f133d4f67bf2be7c854e536c0

Posted by 겟업
2018. 1. 6. 16:33

빵집 아들이 자기집 유리창을 깼다. 빵집 주인이 아들을 심하게 탓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렇게 볼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빵집 주인이 새 유리를 사면 유리창 수리 업자는 돈을 벌게 된다. 수리업자는 그 돈을 다른 곳에 쓸 것이고, 그러면 또 다른 곳에서 소득이 생긴다. 결과적으로 빵집 아들은 마을의 소득과 고용창출에 기여했다. 그러니 창을 깬 것은 마을경제로 보면 잘한 일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아직도 4대강 사업이 좋은 사업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4대강 사업으로 금융위기 당시 고용이 창출됐다거나, 백제보를 통해 가뭄이 심각한 충남 보령댐에 물을 댈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보이는 것’만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전형적인 주장이다. 바스티아는 이런 사람들을 ‘사이비 경제학자’라고 말했다.
 빵집 주인은 신을 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리창을 사느라 신을 사지 못했다. 아들이 유리창을 깬 것은 빵집 주인의 지출 방향만 바꾸었을 뿐 새로운 소득을 창출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신발장수는 신발을 팔지 못했으니 오히려 손해를 봤다. ‘깨진 유리창의 오류’라고 명명된 유명한 경제학의 우화다. 프랑스 경제학자인 프레데릭 바스티아가 1850년에 쓴 에세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나오는 얘기다.

강 정비의 필요성을 전면 부인하자는 게 아니다. 정비가 필요한 강에는 그 수요에 맞게 돈을 썼으면 됐다. 10분의 1인 2조원 정도였다면 차고도 남았을지 모른다.

말이 쉬워서 1조원이지, 1조원은 작은돈이 아니다. 한 사람이 하루 3000만원씩 쓴다고 해도 무려 100년간 쓸 수 있는 돈이다. 그런 돈 22조원을 강바닥에 썼다. 그것도 국채를 발행해 빚까지 내서 말이다. 그 돈은 시급히 써야 할 데가 많았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기획재정부의 한 고위 간부는 “김대중 정부 때 인터넷 인프라를 까는 데 47조원을 썼고, 그 덕에 IT강국이 됐다”며 “4대강 대신 신성장동력에 과감하게 투자했더라면 지금쯤 새로운 먹을거리를 찾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래, 그까짓 것 한번 질펀한 돈잔치를 벌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다. 4대강 사업이 완공된 2012년 이후 유지비로 매년 5000억원씩, 이미 2조5000억원을 더 썼다. 수자원공사가 빌린 8조원의 이자, 생태하천 등 4대강 사업 구간 관리, 준설토 관리 등을 합친 액수다. 예정에 없던 새 계산서도 제출됐다. 녹조 관리다. 거기다 향후 지출이 확정된 비용 등을 모두 따지면 전체 사업비는 30조원에 이를 수 있다. 차라리 보를 부수고 물길을 터주자고 애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부는 안된다고 한다. 이미 쓴 돈이 얼마냐는 것이다. 이면에는 4대강 사업 실패를 인정할 수 없는 자존심도 있다. 

세계 최초의 초음속 여객기인 ‘콩코드’는 경제성이 없었다. 연료소모량은 많고 탑승인원은 적었다. 하지만 콩코드를 만든 영국과 프랑스는 운항을 중단하지 못했다. 콩코드는 양국의 자존심이었다. 개발에 많은 자금도 투자됐다. 2003년 콩코드는 운항 27년 만에 중단을 선언했다. 누적된 적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콩코드의 오류’라 부른다. 매몰비용(이미 쓴 비용)에 집착하다 상황을 더 악화시킨 대표적인 사례다. 


‘깨진 유리창의 오류’로 시작한 4대강 사업은 ‘콩코드의 오류’로 넘어가고 있다. 정부가 고집을 꺾지 않는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4대강 사업은 새 경제용어를 남길지도 모르겠다. 깨진 유리창과 콩코드, 두 오류를 합친 ‘4대강의 오류’라고 말이다. 4대강 사업은 시작도 잘못됐고, 끝도 잘못되고 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3012112035&code=990100#csidxd50d0c3754599e18345c1ccd6c92264 



Posted by 겟업
2018. 1. 6. 16:30

‘부시맨’은 같은 제목으로 국내에도 개봉한 1980년대 영화 덕분에,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아프리카 원시부족을 상징하는 이름이 됐다. 부락 위를 날던 비행기에서 우연히 떨어진 콜라병을 두고서 부락 안에서 분란이 일고, 결국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신에게 돌려주려고 추장은 땅끝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여정 중에 마주치는 문명사회에서 겪는 코미디 같은 에피소드가 줄거리다. 순진무구해서 도리어 우스꽝스러운 부시맨은 문명의 맥락에서 동떨어진 아프리카 부족을 부르는 자연스러운 이름으로, 그렇게 불리었다.


부시맨이라는 말이 당사자인 아프리카 ‘산족’(San people)에겐 모욕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해외 매체에 실린 뉴스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것도 연구윤리를 다루는 뉴스에서.


서양사람이 붙여준 부시맨 또는 코이산족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아프리카 산족들 중에서 남아공 산족평의회(SASC)가 앞으로 산족을 연구하기 위해선 연구윤리를 지켜야 한다며 연구자사회를 향해 자신들이 만든 연구윤리규약을 발표했다. <네이처>와 <사이언스>를 비롯해 여러 매체가 관심을 보이며 그 내용과 반응을 보도했다.


산족평의회는 원주민 연구의 윤리 원칙으로 존중, 정직, 정의와 공정, 배려를 요구했다(bit.ly/2nEscvQ). 산족의 문화와 역사를 존중하고 산족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줄 것, 연구 목적이나 연구비 정보 등을 산족에게 투명하고 정직하게 밝힐 것, 연구에 참여해 얻을 혜택을 분명하게 논의하고 보장할 것, 산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복잡한 과학 언어로 혼란을 주거나 무지한 이로 취급하지 말 것 등을 요구했다.


산족이 연구윤리에 이처럼 심각해진 이유는 뭘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원시 종족”으로 불리는 산족은 그동안 각지에서 찾아온 연구자들로 시달려왔다고 한다. 이른바 문명사회에선 보기 힘든 전통 의례와 풍습들, 그리고 환경과 어울려 살 줄 아는 산족만의 건강 비법과 약초 지식들, 오래된 유전자를 간직해 인류 집단의 분기와 진화를 연구하는 데 도움을 주는 유전체(게놈), 이런 것들이 산족 바깥 세계로 연구자들이 가져간 산족의 지식, 경험, 문화, 생체정보였다.


한 사건이 기폭제가 됐다. ‘트러스트 프로젝트’라는 단체의 보고서(bit.ly/2nkVP2g)를 보면, 산족과 반투족의 게놈을 비교분석해 2010년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이 문제가 됐다. 논문 부록에서 무지한 부시맨 또는 비문명인처럼 묘사된 데 대해 산족은 모멸감을 느꼈다. “부족 열등감으로 많은 부시맨 여성은 반투족 남성과 결혼해 신분 상승을 꾀하려 한다”는 말은 산족의 화를 돋우었다. 프라이버시 원칙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산족 지도자들은 <네이처>에 항의편지를 보냈고, 그동안 산족 지도자와 게놈 연구자, 윤리학자, 법률가 등이 모여 윤리규약을 마련해왔다.


산족 연구윤리 선언의 의미를 조금 넓혀 바라본다면, 특정 집단을 우리와 다른 존재, 분리된 존재로서 흥미의 대상이나 연구 자원으로만 바라보는 이른바 ‘타자화’의 위험을 지적하고 경계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머나먼 아프리카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타인에 의해 분석되고 설명될 뿐인 이들은 또 없을까?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차별을 받는, 자신을 방어할 마땅한 수단이 없는, 그래서 주류와 정상의 시선에서 손쉽게 재단되고 타자로 분리되어 이야기되는 소수자 집단이 우리 주변에도 있을 것이다. 산족이 알려준 존중, 정직, 정의, 배려의 원칙은 단지 연구자들의 윤리규약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의미 있는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오철우 삶과행복팀 선임기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88691.html#csidx1aced828f4f69ed83318153d32630b9 

Posted by 겟업
2018. 1. 6. 16:28

지난 2월 하순,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에 의해 진주 용산고개 일대에서 한국전쟁 당시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유골이 상당수 발견되었다. 학살 당시의 목격자에 의하면 용산고개 3개 골짜기 5개 지점에 718구의 시신이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카빈소총, 5구경 권총 및 M1 소총으로 살해당한 이들은 대부분 ‘보도연맹’에 연루된 양민들이었고, 살해 총기를 근거로 추정컨대 살해자들은 당시의 경찰과 국군이었다고 한다. 도대체 무엇이 한 집단으로 하여금 다른 집단의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게 했을까. 도대체 무엇이 다른 사람을 ‘죽이고 싶도록’ 밉게 만들었을까.
 
테리 이글턴은 “악이란 이해 너머에 있는 것, 이해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악의 치열성이고 절대성이다. 악인들은 본인들이 악하다는 생각을 절대 하지 않는다. 다시 이글턴을 인용하면 “악이란 자기 너머에 있는 어떤 것, 가령 대의(大義) 같은 것과 아무런 관련을 갖고 있지 않다.” 악은 악 그 자체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악인들은 자신들을 향한 모든 비난에 대해 (그들의 입장에서는) 정당하게(?!), 진실하게(?!) 분개하는 것이다. 그들의 억울함과 분노는 가짜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폭력에 가담한 많은 사람들이 개인 단위에서는 양심적이고 선하며 순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한 ‘개인’들을 악한 ‘집단’으로 몰고 갈까. 그것은 바로 사회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그러나 개인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사회적 ‘시스템’이다. 해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보여준 것처럼,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에 깊이 연루되었던 나치 전범 아이히만은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당시 그를 진찰했던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은 그의 정신 상태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심지어 “정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대법원에서 그의 항소를 지켜보고 그를 자주 방문한 한 성직자는 실제로 그가 “매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판단하였다. 이것이 바로 아렌트가 이야기한 바, “악의 평범성”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은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했는데, 이 “명령”이 바로 선한 개인들을 악인으로 만드는 시스템의 (허상이라는 의미에서)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나치들은 소위 “민족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이념에 포획되어 ‘민족’과 ‘혁명’의 시뮬라크르에 충실했던 사람들이다. 알랭 바디유에 의하면 정치적 시뮬라크르는 “충성의 형식을 실제로 지니기 때문에… ‘어떤 자’에게 희생과 줄기찬 참여를 요구”하며 “전쟁과 학살을 그 내용으로 한다.” 말하자면 ‘명령’ ‘민족’ ‘혁명’ 이런 기표들이 형식(허상)으로서의 시뮬라크르라면, 전쟁과 학살은 그 내용(실상)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한 사회를 집단 광기로 몰고 가는 여러 가지 시뮬라크르들이 있다. 근대 국가의 형성과 발전의 과정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것들이 바로 ‘민족’ ‘애국’ ‘혁명’과 같은 시뮬라크르들이다. 이런 기표들은 대부분 ‘국가주의’의 기의(記意)를 가지고 있고,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들을 ‘애국’의 이름으로 적대시한다. 대신 그것들은 그 안에 참여하는 개인들을 동질성의 확고한 틀로 묶어내며, 그것에 열광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정의의 투사’라는 판타지를 갖게 만든다. 그들은 개인 단위에서 자신들이 겪은 비극들을 ‘국가를 위한 희생’으로 승화시키며, 헌신의 숭고미(崇高美)에 빠져 자신들을 역경과 고통으로 몰아넣은 구조적 악을 망각한다. 자신들이 지나온 불행의 역사를 조국을 위한 헌신으로 해석할 때, 그들은 피해자가 아니라 숭고한 전사로 둔갑되는 것이다.
 
지금은 근대가 아니라 후기 근대 혹은 탈(脫)근대의 21세기이다. ‘상식’에 근거하여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화가 “상상적 공동체”(베네딕트 앤더슨)로서의 민족보다 더 중요한 시대이다. 상식이 존중될 때, 민족에 집착하지 않아도 민족은 아무 탈 없이 무사하다. 비상식이 상식을 덮을 때마다 민족이 위태로워지고, 그 틈에서 애국애민의 판타지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시스템이 가동되는 것이다.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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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6. 15:58

어른이 돼 한국어를 배운 외국인들이 방송에 출연해 한국 사람 뺨치게 한국말을 잘하는 것을 보면 외국어 학습이 나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가 늦게 배웠기 때문에 영어를 못한다며 아직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아이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육아정책연구소에서는 외국어 교육의 적절한 시작 시기를 알아보기 위해 중국어로 실험교육을 실시했다. 영어와 달리 중국어는 아직 배워 보지 않은 생소한 언어라 실험에 적합했다. 세 그룹으로 나눠 5세 유아, 초등 3년생, 대학생 각각 20명에게 일주일에 5회씩 총 20회의 교육을 실시했다. 유아들은 깔깔거리는 소리가 실험실 밖까지 들릴 정도로 재미있게 중국어를 배웠다. 그동안 외국의 많은 연구는 유아들의 외국어 교육효과가 아동이나 어른들에 비해 매우 낮다고 했는데, 이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연구 결과를 뒤집어 놓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4주 뒤 테스트 결과에서는 우리나라 유아들도 다른 나라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교육효과가 매우 낮았다. 말하기·듣기·읽기로 나눠 평가를 해 보니 세 영역 모두 유아의 점수가 가장 낮았다. 듣기와 읽기는 유아, 초등, 대학생 순이었고 말하기는 대학생의 점수가 초등생보다 약간 낮았지만 역시 유아의 점수가 가장 낮았다.

그뿐 아니었다. 실험교육 후 중국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검사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실험 대상자들에게 자연스러운 중국어 문장과 부자연스러운 문장들을 보여 준 후 뇌파검사(Cz 부위)와 안구의 움직임을 분석했다. 그 결과 대학생들은 중국어 문장을 볼 때 뇌파와 안구의 움직임이 중국 원어민들과 유사한 패턴을 보여 중국 사람들처럼 문장의 의미를 이해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유아들은 그 패턴이 매우 달랐다. 이는 중국어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 실험이 보여 주듯 유아기는 외국어 교육의 적령기가 아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유아 자녀를 위해 한 달에 수십만원 내지 수백만원을 내며 하루에 5~6시간씩 영어만 사용해야 하는 학원에 보내는 부모들도 있다. 모국어처럼 유창하게 영어를 잘해 국제경쟁력을 갖추도록 하겠다는 것이 부모들의 바람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오히려 사고가 움츠러들고 외국인 강사로부터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배우며 열등감마저 느끼게 된다.


언어학자 촘스키는 인간은 언어습득장치(LAD)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특별한 장애가 없는 한 누구든지 모국어를 배울 수 있다고 했다. 간혹 우리나라에서는 이 장치의 기능이 나이가 들수록 저하된다며 조기 외국어 교육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언어습득장치는 가상의 장치이며 나이가 든다고 쇠퇴하는 게 아니다. 모국어는 결정적 시기에 적절한 언어 자극이 없으면 습득이 어렵지만 일단 모국어를 습득한 사람은 언제든지 외국어 학습이 가능하다. 다만 배우려는 동기의 절실함이나 각자의 언어 능력에 따라 외국어 학습효과는 달라질 수 있다.

유아들은 아직 외국어를 배우겠다는 간절한 동기가 없다. 게다가 인지 발달, 뇌 발달도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으므로 유아들의 외국어 학습효과는 매우 미미하다. 반면 유아기는 뇌의 발달이 가장 왕성해 포도당의 소모가 성인의 두 배가 넘는다. 그런데 이 시기에 힘든 외국어를 배우느라 뇌 발달에 사용해야 할 에너지를 탕진해 버린다면 뇌 자체의 발달이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뇌에 과부하가 걸려 다른 발달의 장애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므로 뇌 발달을 저해하는 외국어를 유아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어른들의 무지로 인한 아동학대다.



현재의 유아들이 살아갈 미래는 빅데이터를 활용하고 인공지능(AI)이 대세가 될 4차 산업혁명 시대다. 그 시대에는 통역기가 발달해 외국어를 전혀 몰라도 앱을 깐다거나 귀에 간단한 장치 하나만 끼우면 소통이 가능해진다. 어려서부터 힘들게 배운 외국어가 쓸모없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 반대로 빅데이터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려면 튼실하게 잘 발달된 뇌가 필요하며, AI로부터 살아남으려면 AI에게 없는 감성과 창의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유아기는 모국어 습득으로 사고력과 창의력이 가장 활발하게 발달하는 시기다. 신나게 뛰놀면서 오감을 통해 방대한 세상의 자극을 받아들여 상상력과 창의력이 쑥쑥 자랄 수 있도록 아이들을 제발 좀 내버려 두자. 쓸모가 없어질 외국어 교육을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는 부모들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더 이상 자녀를 학대하지 말자. 정부도 교사 자격은커녕 근원도 모르는 원어민을 데려다가 학부모들을 현혹해선 안 되고 자칫 아이들의 발달을 저해할지 모를 영어학원도 방관해선 안 될 것이다. 아이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랄 때 진정 우리나라도 행복하고 건강한 나라로 발전할 것이다.


우남희 육아정책연구소장



http://news.joins.com/article/21333536

Posted by 겟업
2018. 1. 6. 15:53

사람들은 타인의 존엄을 짓밟아선 안 된다는 걸 몰라서 그런 짓을 하는 게 아니다. “그래 왔으니까” “그래도 되니까” 기꺼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법과 제도가 제법 그럴듯하게 갖춰져 있음에도 전혀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한국인 누구나 알고 있다. 재벌은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감옥에 가지 않고, 만약 1등 재벌일 경우 구속조차 되지 않는다.


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시발비용’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욕설 ‘○발’을 순화시켜 ‘비용’과 합친 말로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쓰지 않아도 될 비용’이란 뜻이다. 홧김에 마신 술, 열 받아서 먹은 치킨, 힘들어서 잡은 택시…. 이런 소비가 전부 시발비용이다. 이 말이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 건 오늘 우리의 노동이 그만큼 비참하다는 증거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자신의 월급을 ‘한 달 동안 모멸을 견딘 대가’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높은 자영업자 비율의 배경에는 이런 요인도 있지 않을까. 자영업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알면서도, 어떤 이들은 지옥 같은 직장생활에 시달리다 완전히 소진되는 것보다 자영업이 낫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물론 창업했다고 지옥을 벗어난다는 보장은 없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비합리적인 상사보다 한술 더 뜨는 ‘진상고객’, 업계 ‘갑’들의 복마전이다.


존엄(dignity)의 훼손은 일상이 되었다. 한국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존엄을 짓밟히며 살아간다.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는 부모들, “10분만 더 공부하면 아내 얼굴이 바뀐다(남편 직업이 바뀐다)” 같은 말을 급훈으로 거는 교사들이 과거에 너무나 많았고 지금도 여전히 많다. 그러니까 이건 아주 오래전부터 학습되고 누적되어온 습속이다. 달라진 부분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늘어났다는 점이다. 인간은 경제적 손실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존엄의 훼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존재다.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쓴 역사학자 톰슨은 피착취자의 단결과 저항이 경제적 이해관계의 기계적 반영이 아니라 도덕적 정당성, 사회적 인정 같은 요소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 바 있었다.


‘경영 멘토’ ‘인문 멘토’로 불리는 사람들은 “약육강식의 정글” 같은 말을 써가며 사회의 무자비함을 강조하길 좋아한다. 이들 중 몇몇은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자본주의를 어찌나 준열하게 비판하는지, 거의 반자본주의 혁명가처럼 보일 지경이다. 저들은 인간 존엄을 훼손하는 체제나 사회를 마치 자연재난처럼 묘사한다. 자연재난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결국 각자의 적응과 생존 문제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논의는 나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로 수렴한다. 답은 대동소이하다. 잔혹한 세계를 헤쳐나갈 만큼 ‘강한 자아’가 되는 것, 살벌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자’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식으론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대다수가 존엄하지 못한 사회에서 극소수만 존엄해지는 것, 그건 존엄이 아니라 ‘특권’이다. 나의 존엄을 인정받으려면 타인의 존엄도 인정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현실에서 이 원칙이 권력의 작동에 의해 심각하게 침식되고 있음을 안다. 한국 사회에서 유독 존엄의 훼손이 극심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앞서 말한 오랜 습속과 관성이고, 또 하나는 사회적 제재 수단의 결여다. 사람들은 타인의 존엄을 짓밟아선 안 된다는 걸 몰라서 그런 짓을 하는 게 아니다. “그래 왔으니까” “그래도 되니까” 기꺼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법과 제도가 제법 그럴듯하게 갖춰져 있음에도 그것이 전혀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한국인 누구나 알고 있다. 재벌은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감옥에 가지 않고, 가더라도 금방 특별사면되며, 만약 1등 재벌일 경우 구속조차 되지 않는다.


명시된 법도 지킬 생각 없는 이들에게 “타인의 존엄을 지켜주세요”라고 부탁하면 그들이 ‘아 그랬구나, 우리가 잘못했구나’ 눈물 쏟으며 회개할까? 그럴 거였으면 애당초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을 테다. 사태가 별반 개선되지 않는 이유는 개별 해법 말고는 대처 수단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혈연·지연·학연 공동체, 종교 공동체는 넘쳐나지만, 오랜 반공주의 등의 영향으로 정당과 노동조합 같은 결사체가 여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사회다. 이런 결사체는 정부와 자본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할 뿐 아니라 시민 각자의 이해관계를 공적 관심사로 번역하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우리의 일터와 우리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건, 5년짜리 대통령이 아니라 체제와 개인을 일상적으로 매개하는 이런 조직들이다. 혼자 존엄할 수는 없다. 오직 같이 존엄해질 수 있을 뿐이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80933.html#csidx3bc572a8672940d800e3416452900bb 

Posted by 겟업
2018. 1. 6. 15:48

지난해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던 한 교수님은 “지금은 절대적 빈곤만 줄어들었을 뿐, 불평등 수준은 ‘레미제라블’시대(19세기)와 비슷해졌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저런 그래프를 살펴보니 맞는 말이었다.


얼마 전 이틀간 굶은 실직자가 막걸리를 훔치다 경찰에 잡혔다. 월세가 밀려 방을 빼야 했던 날, 목을 맨 세입자도 있었다. 상위 10%에 몰린 소득 집중도(48.5%),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임금 비율(53.5%), 월급 7,810만원이 넘는 초고소득 직장인 급증(3,403명) 등 모든 불평등 통계가 사상 최대를 갈아치우고 있다.


하지만 이런 뉴스들은 익숙해서 신문 지면에서도 눈에 띄는 공간에서 밀려날 때가 많다. 저임금 노동자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2위를 오간 지 오래된 현실에서, 불평등에 대한 자포자기는 공기처럼 퍼졌다. 너무 편재해서 문제라는 감각도 무뎌지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장 저항해야 할 인식의 모순인지 모른다.


임금 문제는 노동의 수요- 공급 법칙을 들이미는 경제학의 우격다짐만으로 해소되지 않는 존재론적 질문이다. 어떤 학자와 이야기하다가 “정책 만든다는 교수들도 저소득층이 어떻게 사는지 모른다는 게, 참 단점이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속한 언론계도 마찬가지이다. 계층간 사다리는 붕괴됐고 정계, 학계, 언론계 사람들 대부분 평균 이상의 배경과 소득을 가진 계층에 속하니, 다시 도래한 ‘가난의 시대’의 실체와 팽배한 아픔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죄책감도 든다. 19세기 지주와 소작농의 시대처럼, 동시간을 살지만 경험조차 단절됐다.


미국 저널리스트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저임금 직업들을 직접 경험해보고 쓴 ‘노동의 배신’에서 “노동 인구의 30%가 시간당 8달러 이하(1998년 당시)를 받는 게 사실이라면 그들은 내가 모르는 생존 비법을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예상했다. 겪어본 결과는 반대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만 아는 절약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난하기 때문에 추가로 드는 비용이 수두룩하다…보증금이 없으니 엄청난 방세를 내고, 정기 건강검진을 받을 수 없어 결국 대가를 치른다”고 했다.


하나의 답은 스웨덴에서 찾을 수 있다. 전국단위 노조가 과거 장기간 연대임금 정책을 내걸고 경영자단체와의 협상에서 상위 근로자의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하위층의 임금을 끌어올린 그 유명한 사례에 대해 누군가는 “눈물 나는 이야기”라고 했다. 일정 수준의 임금을 주지 못하는 기업은 존재할 가치도 없다는 그들의 기조는, 한국의 수준 따위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해도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강력한 증거로서 존재해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이 대기업 정규직 임금을 줄이거나 동결하고, 비정규직ㆍ하청근로자 임금을 올리라고 협상을 할 수 있을까? 지난해 300명 이상 대기업 중 임금인상을 자제하고 확보한 재원을 신규채용, 비정규직 처우개선 등에 활용한 기업은 18.8%에 불과했다.


국내에서 드물게 산별 임단협 협상을 하는 금융노조는 고연봉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은행원의 평균 연봉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203%(미국 101%), 절대 액수도 미국 은행원의 평균 연봉보다 많다. 이들의 고연봉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러니 당신은, 특히 남들이 부러워하는 연봉을 자랑하는 당신은 분명 알아야 한다. 대기업 총수의 변론을 맡아 수십억원을 받는 변호사는 그 돈이 하청업체의 노동자에게 돌아갈 몫이었다는 것, 의사의 고액 임금에는 박봉의 간호사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 포함돼 있다는 것, 은행원의 억대 연봉에는 사내 비정규직의 눈물과 후배들을 덜 뽑는 대가가 들어 있다는 것. 아 이쯤에서, ‘나는 남들 놀 때 공부 열심히 했고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말은 제발 말아달라.


근본적인 원인은 강력한 비정규직 제도 및 노조 배제정책을 써온 정부, 또 부도덕한 경영자들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지적할 사람도 많을 것 같다. 맞는 말이다. 나는 애초 이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조와 노동자끼리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언제부터인가 눈에 띄는 지도자 한 명 나오지 않고, 찢기고 축소된 한국의 노동계가 하루 빨리 힘을 얻고 연대의식을 갖춰 제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또 조만간 ‘최순실 정권’이 끝나고 최소한의 신뢰라도 갖춘 차기 정부가 들어선다면,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를 바란다.


이진희 정책사회부 기자 river@hankookilbo.com



http://www.hankookilbo.com/v/6ec3040f442645e6b9373074ffde62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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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9. 22:52

중세 유럽의 이야기다. 사악한 용(龍)을 잡는 방법을 가르치는 ‘용잡이 학원’이 있었다. 학생들은 비싼 수업료를 내고 기초부터 고급 과정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연마했다.

졸업반 학생 하나가 스승에게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용은 어디 있습니까?” 스승이 대답했다. “용은 없다.” 화들짝 놀란 학생이 “그러면 지금껏 배운 공부가 무용지물이란 말씀입니까?”라고 따지자 스승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너도 나처럼 학원을 차려 학생들을 가르치면 될 것 아니냐.”

대학 공부, 특히 인문학이 용잡이 학원 수업을 닮았다는 비판이 끊이질 않는다. 이에 대해 인문학 교수나 소위 힐링 전도사들은 인문학이 상상력을 키워 주는 쓰임새가 큰 학문이라고 역설한다. 애플 창업주인 스티브 잡스가 대학에서 철학을, 페이스북 창업주인 마크 저커버그가 심리학을 전공한 것을 즐겨 예로 든다.

그런데도 왜 기업들은 잡스나 저커버그를 배출한 인문사회계를 외면하고 이공계나 상경계 졸업생을 선호할까?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고교 시절 잡스는 HP 인턴으로 컴퓨터 기초를 다졌고, 저커버그는 컴퓨터 신동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 성공의 원동력은 컴퓨터 공부다. 인문학 지식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일반 대졸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모 일간지 기자가 “인문계 인재를 뽑아 직무 능력을 키워 주면 되지 않느냐”고 어느 재벌 그룹 인사 담당자에게 물어봤다. 그 담당자는 “인문계를 뽑아 하나부터 열까지 직무 교육을 하느니 차라리 이공계를 뽑아 인문학 강의를 해 주는 게 훨씬 더 경제적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둘째, 잡스와 저커버그는 천재 중의 천재다. 천재(天才)는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재주라 대학에서 뭘 전공해도 성공한다. 보통의 학생들은 이런 예외적인 천재의 성공 스토리에 현혹되지 말고 인문계의 평균적인 모습을 살펴봐야 한다.

3주 전 어느 일간지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SKY) 인문사회 계열 졸업생의 취업률은 45.4%로 나타났다. SKY가 이럴 정도니 다른 대학들은 어떻겠는가. 그래서 나온 씁쓸한 신조어가 “인문계 90%가 논다”는 ‘인구론’이다. 이것이 인문학 전공자의 평균적 모습이다.

두 달 전 서울의 어느 명문대는 비인기 인문계 학과의 통폐합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 학제 개편은 곧 해당 학과 교수들의 거센 반발에 부닥쳤다. 개편이 유야무야되면 교수의 기득권이야 지켜지겠지만 학생은 ‘인구론’의 직격탄을 맞게 된다.

대학의 인문학 위기와는 달리 지난 몇 년간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그 이유는 인문학이 ‘사치재(luxuries)’이기 때문이다. 사치재란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수요가 급증하는 재화를 일컫는 경제학 용어다. 어느 개인의 평생 소득의 변화를 보면 중장년 무렵에 최고조에 달하는데 그때 인문학 수요가 급증한다.

인문학이 사치재란 걸 받아들이면 학제 개편의 방향은 명확해진다. 먼저, 인문계 정원을 필요 최소한으로 축소할 필요가 있다. 그 대신 이공계 학생을 포함한 전교생의 인문학 교양 교육을 강화하라. 그래서 학생들이 중장년층이 됐을 때 인문학을 다시 찾도록 만들어라. 그리고 현재 중장년층의 인문학 수요에 부응해 새로운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라.

인문학 힐링 전도사들 역시 ‘인구론’에 일조한다. 작가인 남정욱 숭실대 교수는 ‘차라리 죽지 그래’라는 저서에서 철학자 강신주 박사나 서울대 김난도 교수가 그런 전도사라고 주장한다. “일하는 것은 노예가 되는 것”이라는 등 인문학을 빙자한 반(反)자본주의 논리로 청춘을 오도(誤導)하는 강 박사가 정작 자신은 일의 노예가 돼 자본주의적 돈벌이에 몰두한다고 남 교수는 개탄한다.

남 교수는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서울대생처럼 선택받은 소수가 아닌 대다수 청춘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김 교수가 설파하는 ‘인문학적 방황’을 믿고 따르다간 낭패 보기 십상인 게 ‘인구론’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틀 뒤면 입학식과 함께 신학기가 시작된다. 인문학 전도사에게 속아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인문학을 선택해 열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하지만 그 선택이 초래할 결과가 어떨지는 미리 헤아려라. 그래야 ‘용잡이 학원’이나 ‘인구론’에서 벗어날 수 있다.

김인규 한림대 교수·경제



http://news.donga.com/3/all/20150228/69852847/1#replyL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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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5. 3. 8. 01:30

2012년 9월 프랑스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는 정부의 권고를 무시하고 이슬람 창시자 마호메트를 외설적으로 묘사한 여러 그림을 실었다. 당시 필자는 튀니스에 있었다. 이슬람 사원 밖에 탱크와 군인이 있었고, 외벽은 영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로 서구와 이슬람 증오 세력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혁명을 외치는 낙서로 도배돼 있었다. 튀니스 주재 미국 대사관이 공격받고 미국인 학교가 방화로 소실된 며칠 후였다. 그 바로 전에는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가 지하드 반군에 살해당했다.

 필자는 30분간 튀니스 중심부인 하비브 부르기바 거리에 초조하게 서 있었다. 통행금지가 떨어지기 전 돌아가야 하는데 아무리 해도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거리엔 유럽인이라곤 혼자밖에 없어 눈에 확 띄었다. 마음속으로 지난 수년간 고의적이고도 불필요한 도발을 계속한 샤를리 에브도를 저주했다. 샤를리 에브도는 2006년 덴마크 신문에 처음 등장했던 마호메트 풍자 만화를 재발행했다. 2011년에는 이슬람 율법 샤리아를 패러디한 ‘샤리아 에브도’를 발간해 편집국이 화염병 공격을 받는 일도 있었다.

 지난주 수요일 아침, 우리 사무실에서 20분 거리인 샤를리 에브도 본사가 무차별 총격을 받아 12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필자는 파리의 다른 모든 시민과 마찬가지로 깊은 충격을 받았다. 중무장한 경찰과 군인이 골목마다 서 있고 군용 차량이 다른 차량을 견인하는 것을 봤을 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커피숍에 들어가자 모두 TV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한마디씩 하고 있었다. TV에서는 경찰관 2명과 스테판 샤르보니에 편집장과 여러 만평가가 목숨을 잃은 대학살 현장을 중계하고 있었다. 필자 옆의 남자가 “또 다른 단계로 접어들었을 뿐”이라고 말을 건네왔다. “무슨 말이오?”라고 묻자 “아랍과의 전쟁 말이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샤를리 에브도는 정당성 없는 폭력의 예상치 못한 피해자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요즘의 파리 사람들에게 샤를리 에브도는 충격을 줄 힘을 잃어버린 1960~70년대의 진기한 유물일 뿐이다. 테러 전날 신문 가판대에 있는 샤를리 에브도 최신호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멍한 표정의 성모 마리아가 더 멍한 표정의 예수 그리스도를 낳는 그림이었다. 길을 가면서 요즘 저 잡지를 도대체 누가 보는지, 어떻게 적자를 갓 벗어나기 시작했는지, 어쩌다 박물관에나 진열될 법한 유물이 된 건지를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이번 테러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유명 만평가 두 명의 나이에서도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장 카뷔와 조르주 볼린스키는 각각 76세와 80세였다. 무엇보다 이들은 1968년 5월 혁명 세대였다. 무제한적 자유를 믿고 거리낌없는 성적 표현과 마약 복용을 하는 세대 말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모든 형태의 윤리적·종교적 권위를 조롱할 자유를 굳게 믿으며 드골 정부의 고압적 가부장주의에 반발했다. 샤를리 에브도의 끈질긴 도발(provocation) 추구는 파리 사람들 특유의 전통에 속한다. 이 태도는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 창간된 샤를리 에브도를 프랑스 잡지답게 만든 건 바로 전투적이고도 공격적인 세속주의였다. 이 또한 프랑스 문화의 오랜 전통이다. 역사적으로 가톨릭 교회의 힘을 견제하는 한 방식이었다. 68년 5월 혁명은 구세대를 향한 청년세대의 저항이었고, 반종교 풍자는 저항의 핵심이었다. 

 현재 프랑스에서 68혁명에 가담했던 세대는 문화적 기득권층이 된 지 오래다. 그들이 젊은 시절의 좌파적이고 자유주의적 사상을 아직 신봉한다 해도 기성세대가 됐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샤를리 에브도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리 무정부주의를 과시한다 해도 아주 오래전 기득권의 일원이 되어버렸다.

 적어도 프랑스 주변부 교외 지역에서는 샤를리 에브도를 그렇게 인지하고 있다. 프랑스 주요 도시를 둘러싸며 광범위하게 펼쳐진 교외 빈곤 지역은 중동과 아프리카, 아시아의 프랑스 식민지 이민자들이 상당수 거주하는 곳이다. 샤를리 에브도의 풍자는 파리 중심부에선 종교적·정치적 권위주의의 코를 비틀기 위한 풍자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교외 지역에서는 자신의 정체성 중에서 아직 프랑스 주류사회에 동화되거나 짓밟히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부분과, 마음 깊이 간직한 종교적 신념을 내키는 대로 조롱할 수 있는 주류 권력자의 오만으로 보고 있다.

 수요일 프랑스에서 총격으로 쓰러진 것은 누구에게든 자신의 생각을 발언할 자유를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세대다. 파리 사람들은 넉살좋은 기지(wit)에 자부심을 가진다. 늘 권위에 저항해 왔던 이런 태도의 밑바탕에는 생각의 자유와 도발을 즐기는 자세가 깔려 있다. 샤를리 에브도를 향한 끔찍한 살해는 이 모든 것의 정반대에 서 있다. 이는 바로 파리 사람들의 정신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이다. 

앤드루 허시 런던대 파리분교(ULIP) 학장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6916564&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5. 3. 8. 00:37

갑의 못된 횡포를 ‘갑질’이라고 한다. 갑의 갑질이 얼마나 추악하고 비열한지는 당해본 을만이 안다. 그런데 갑을관계의 진짜 비극은 갑의 갑질에 있다기보다는 갑질을 당한 을이 자신보다 약한 병에게 갑질과 다를 바 없는 을질을 한다는 데에 있다. 병은 또 자신보다 약한 정에게 갑질·을질과 다를 바 없는 병질을 한다.

이런 먹이사슬 관계를 온몸으로 가장 잘 드러내는 이들이 놀랍게도 아직 갑을관계의 본격적인 현장에 뛰어들지 않은 대학생들이다. 미리 연습을 하려는 걸까? 사회학자 오찬호 박사가 출간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은 대학생들의 ‘대학서열 중독증’을 실감나게 고발하고 있다. 대학생들과의 자유로운 대화에 근거한 애정 어린 고발인지라 분노보다는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오 박사는 대학의 수능점수 배치표 순위가 대학생들의 삶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전국의 200개 대학을 일렬종대로 세워놓고 대학 간 서열을 따지는 건 단지 재미를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 매우 진지하고 심각한 인정투쟁이자 생존투쟁이다. 서열이 한두개 차이 나는 대학을 ‘비슷한 대학’으로 엮기라도 할라치면 그 순간 서열이 앞선다는 대학의 학생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며 흥분한다. 이런 현실에 대해 오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대학생들은 ‘수능점수’의 차이를 ‘모든 능력’의 차이로 확장하는 식의 사고를 갖고 있다. 십대 시절 단 하루 동안의 학습능력 평가 하나로 평생의 능력이 단정되는 어이없고 불합리한 시스템을 문제시할 눈조차 없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본인이 당한 인격적 수모를 보상받기 위해 본인 역시도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스스로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택한다. 그렇게 멸시는 합리화된다.”

대학생들의 이런 정신상태는 우리 사회에서 갑을관계와 비정규직 차별이 사라지기는커녕 앞으로 더욱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 박사 말마따나, 오늘날 이십대는 “부당한 사회구조의 ‘피해자’지만, 동시에 ‘가해자’로서 그런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 모든 게 전적으로 기성세대의 책임이라는 점에서 비교적 편한 시절을 살았던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죄스러울 따름이다.

대학생들의 ‘대학서열 중독증’은 미국에서 벌어진 ‘능력주의’(meritocracy) 논쟁을 떠올리게 만든다. 오늘날 미국의 극심한 빈부격차를 정당화하는 주요 이데올로기가 바로 “능력에 따른 차별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고 하는 능력주의다. 능력은 주로 학력과 학벌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고학력과 좋은 학벌은 주로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결정된다. 학력과 학벌의 세습은 능력주의 사회가 사실상 이전의 귀족주의 사회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웅변해준다.

이런 한국형 ‘세습 자본주의’를 바꾸는 것이 제1의 개혁의제가 되어야 하겠지만,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갖고 있는 ‘사소한 차이에 대한 집착’도 성찰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수능점수 몇점이나 정규직·비정규직의 능력 차이는 사소한 것임에도 우리는 그런 차이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에 따른 차별에 찬성하는 것을 정당한 능력주의라고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평등주의가 강한 사회라곤 하지만, 평등주의는 위를 향해서만 발휘될 뿐이다. 밑을 향해선 차별주의를 외치는 이중적 평등주의를 진정한 평등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이중적 평등주의는 우리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의 ‘사소한 차이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그 체제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50년 전 시인 김수영이 “왜 나는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물었듯이, 이제 우리도 스스로 물어야 할 때다. 우리가 사소한 차이에만 집착하고 그 차이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것에 분개하는 동안 세상은 점점 더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구조적 불평등과 차별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건 아닐까?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69002.html



Posted by 겟업
2015. 3. 8. 00:32

(한글을 깨친 미취학 자녀가 있는 분은 이 글을 읽는 즉시 가위로 오려내 폐기 처분하시길 권합니다.)

산타의 정체를 알게 된 건 대여섯 살 때쯤이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퇴근한 아빠가 마루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당황하며 무언가를 허겁지겁 장독대에 숨겼다. 지금도 그 장면이 생생한 걸 보면 충격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아, 어쩐지 이상했어. 산타는 아빠였구나…. 물론 지혜로운 어린이답게 아빠에겐 모른 척했다.

지난주 인터넷에서 귀여운 가정통신문을 발견하고 이 기억을 떠올렸다. 한 유치원에서 학부모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Santa 訪問에 관한 안내문’이란 제목이 적혀 있고 다음과 같은 설명이 이어진다. “이 안내문을 英語와 漢字를 섞어서 쓰고 봉해 보내는 이유는 우리 어린이들이 Santa에 대한 神秘感을 지니게 하여 동심의 즐거운 追憶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영어·한자·산타·신비감·추억 등의 단어를 일부러 영어와 한자로 적어 아이들이 혹시 이 안내문을 발견해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배려다. 내용인즉슨, 아이들이 산타 앞으로 쓴 카드를 부모님들께 보내 드리니 카드에 적힌 아이의 희망 선물을 체크해 미리 준비하시라는 거다.

뭐 이렇게까지 하면서 산타의 존재를 믿게 해야 하나, 쿨한 마인드의 부모님이 있을까 봐 덧붙인다. 미국의 뇌과학자 켈리 램버트 박사는 지난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산타의 존재는 아이에게 마음의 예방접종과 같다”며 산타의 선물이라는 픽션을 가능한 한 오래도록 아이의 마음속에 남겨 두라고 조언했다. 사람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허구와 사실을 구분하게 되지만 뇌 속에는 시간여행(mental time travel)을 위한 시스템이 내장돼 있어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행복했던 과거의 감정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되새김할 수 있는 좋은 기억은 많을수록 좋다. 

램버트 박사의 경험을 참고하자. 3세, 7세의 두 딸이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시점 다락에 숨겨 놓은 선물을 발견했다. 엄마는 아이의 믿음을 지키려 필사적으로 둘러댄다. “산타가 등이 아파서 크리스마스이브에 배달할 선물을 미리 소포로 부쳐 줬어. 크리스마스 전에 열어 보면 도로 가져간다고 계약서에 서명도 했단다.” 그러니 올해 크리스마스도 산타 지키기에 전력을 다할 일이다. 조금 더 크면 만나게 될 험한 세상을 견딜 힘을 비축해 주는 것. 그것이 웃을 일 별로 없는 세밑을 사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인 것 같아서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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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5. 3. 8. 00:30

신성장동력은 혁신과 기업가 정신

애플처럼 혁신이 상업화에 성공해야

패자부활이 가능한 벤처생태계 필요


외환위기가 수습되고 벤처 붐이 일었던 2000년 초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 간 적이 있다. 1998년 리스본에서 해양박람회가 열렸고, 한국이 해양박람회 유치전에 뛰어들 채비를 할 때였다. 당시 바다로 통하는 테즈강변에서 ‘항해 왕자’로 유명한 엔히크(Henrique) 왕자 사후 500주년 기념비를 볼 기회가 있었다. 50m이상 솟은 이 거대한 기념비에는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길을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 세계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마젤란 등 포르투갈의 영웅적 탐험가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여행가이드는 “당시 항로와 식민지 개척은 지금으로 보면 일종의 벤처기업의 성격을 가졌다”고 했다. 야심만만한 젊은 인재들이 국왕에게 탐험 계획서를 제출하면 국왕이 검토해 선박과 필요한 자금을 대준다. 목숨을 담보로 탐험을 하지만 성공하면 엄청난 보수를 챙겼다. 당시 농경사회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신산업동력을 발굴한 것이다.


덕분에 포르투갈은 일찍이 ‘대탐험 시대’의 선두주자가 됐다. 엔히크 왕자는 직접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인도로 가는 길을 탐험했다. 이탈리아 출신인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국왕에게 지원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뒤,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의 지원을 받아 대서양을 횡단해 미국대륙을 발견했다. 너무 많은 젊은이들이 불나방처럼 항로 개척에 뛰어들어 희생을 당하면서 포르투갈은 이후 상당기간 인재난에 시달리면서 쇠퇴했다고 한다. 당시 항로개척은 탐험정신을 바탕으로 혁신기술이 동반되어야 가능했지만 벤처기업 마냥 성공확률은 극히 빈약했다. 하지만 불굴의 모험정신 덕분에 포르투갈은 한동안 세계 각국에 식민지를 건설한 해양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요즘 우리 경제계의 화두는 혁신과 기업가 정신으로 요약된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기 위한 것이다. 창업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정주영 이병철과 같은 모험적이고 기업가 정신으로 충만한 인물들을 찾기가 힘들어졌다.


짐 클리프턴 갤럽 회장이 저서 ‘일자리 전쟁’에서 주장하는 혁신과 기업가 정신의 상관관계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는 세계 곳곳에서 혁신은 드물지 않지만, 많은 혁신들이 상업화에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진단한다. 미국과 인류를 발전시킨 것은 인터넷의 발명보다 인터넷의 상업화였고, 뛰어난 기업가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고 수요와 소비를 증가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찾기 어렵고, 부족하며, 보기 드문 에너지와 재능은 바로 기업가 정신”이라며 “이를 희귀한 세일즈 기술, 천재적인 비즈니스 모델 설계, 혹은 레인메이킹(rainmaking)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했다. 원래 가뭄 때 비를 오게 하는 인디언 주술사라는 뜻의 레인메이커(rainmaker)는 신규사업으로 대박을 터트리는 존재를 일컫는다. 미국 애플의 스티브 잡스나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중국 알리바바그룹의 마윈,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등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 경제를 이끌어가는 쌍두마차는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다. 세계 경제전선에서 매우 선전하고 있으나 이들 기업에서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의 그림자를 찾기는 쉽지 않다. 하드웨어는 강하나 소프트웨어는 맥을 못 춘다. 그렇다고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새로운 기업이나 인물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이영환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저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vs 코리아 프리미엄’에서 “재벌의 압도적인 우위는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새로운 기업이 등장하는 데 커다란 장애물이다”고 주장한다. ‘샐러리맨의 신화’ 팬택 박병엽의 몰락이 하나의 사례다. 휴대폰 업체 경쟁력이 기술력이나 품질보다 브랜드파워와 대기업의 보조금 위력에 좌우됐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재벌의 후예들은 모험정신은커녕 사고만 치고 다니고, 선대가 쌓아놓은 명성에 먹칠이나 하고 있다.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우리 벤처기업 생태계도 큰 문제로 지적된다. 한번 실패하면 영원히 나락으로 떨어진다. 물론 모험이 없으면 대박도 없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의 성공은 수많은 실패 경험의 축적을 통해 가능했다. 혁신과 기업가 정신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생태계를 조성해야 레인메이커가 등장할 수 있다.


조재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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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8. 00:29

두 달 전 학교비정규직노조 파업 때의 일이다. 공립유치원에 다니는 큰 아이의 급식실 조리원들이 하루간 파업에 들어가니 도시락을 싸서 보내달라는 통신문이 나왔다. 유치원에서 빵과 우유를 나눠주기는 하지만 한 끼 식사로는 부족하니까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게끔 집에서 준비해달라는 것이었다. 담임선생님은 네이버에 개설된 학급 밴드를 통해 “도시락을 싸올 수 있는 친구들은 좀 넉넉히 싸와 형편이 여의치 않은 아이들과 나눠먹으면 좋겠다”면서 자신도 푸짐하게 준비해 아이들과 특별한 기분을 내보겠다고 공지했다. 한번도 김밥 재료들이 정중앙에 위치하게 말아본 적이 없는 형편없는 솜씨이건만, 나 역시 한 보따리 싸서 보내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던 것도 잠시. 나는 그 밑에 달린 댓글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파업을 하더라도 애들 밥은 줘가면서 했으면 좋겠다는 불만, 도시락업체와 김밥 체인점이 그렇게 많은데 애들 배고프게 빵과 우유가 웬 말이냐는 항의가 담임교사에게 빗발쳤다. 급식실 조리원이 밥을 하면서 파업을 하면 그게 무슨 파업이며, 하루쯤 도시락 싸는 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지만, 선생님마저 “어머님들 심정 십분 이해한다”며 어르고 달래는 어리둥절한 광경이 펼쳐졌다. 함께 아이를 키워가는 동반자적 관계 같은 것은 거기에 없었다. 그들은 다만 유치원의 고객이었고, 유치원의 서비스가 엉망이었으므로 항의는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가 고객과 고객센터 직원의 관계로 치환돼버린 현실을 목격한 나는 그저 씁쓸한 기분으로, 역시나 재료들이 한쪽으로 치우쳐버린 김밥을 찬합 가득 쌌을 뿐이다.

그간 한국사회의 제반 관계는 가족을 원형으로 하는 유사 가족체제였다. 학교 선배는 오빠고, 윗집 아이엄마는 언니며, 육아 도우미는 이모였다. 유교적 가족질서를 무한히 확장해나가는 한국 사회의 인간관계에 갑갑함을 느끼며 오빠를 선배로, 언니를 ○○엄마로, 이모를 아주머니로 부르는 대신 갑절로 깍듯하고 상냥하려 애써왔다. 그런데 이 모든 기성체제를 무력화하는 가공할 형태의 새로운 관계 원형이 세계를 석권했다. 이름하여 ‘고객주의’. 돈 내면 고객이고, 고객은 왕이다. 돈으로 매개되지 않는 관계가 거의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음만 먹으면 ‘갑질’할 곳은 도처에 널렸다.

내가 지불하는 돈은 내가 제공받는 재화 및 용역과 정확한 등가가치를 이룬다. 그 가격이 적절하게 책정됐든 아니든, 나는 화폐 지불을 통해 재화와 용역이라는 상품만을 구매할 뿐, 판매자의 인격까지 사는 것은 아니다.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 인간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 인간적인 거래 형식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상호간의 호의와 호혜에 기반해야 한다. 친절이라는 것은 판매자가 구매자에게 일방적으로 제공해야 하는 서비스가 아니라, 개인과 개인이 만나 “나는 인간이라는 종을 신뢰한다” “나는 당신이 이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서로간에’ 전달하는 일이다. “사랑합니다, 고객님”이 거북한 것은 이 일방적이고도 기계적인 언설이 발화자의 인격과 주체성을 말살했으므로 한낱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친절은 단지 허위와 허식인 것이 아니라 위험과 악의가 잠복해 있는 이 세계에서 조금이라도 더 넓은 안전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인류가 개발해낸 유구하고도 세련된 생활양식이다. 나는 내 발을 밟고 놀란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말하는 여인에게서, 아이를 위해 미지근한 물로 핫초코를 탔다는 카페 직원에게서, 계단에 얼음이 얼었다며 조심하라는 경비원 아저씨에게서 세계의 온기를 느꼈다. 그들에게 화답하며 나라는 인간이 이 낯선 세계에서 호의와 선의에 둘러싸여 있다는 확신에 가까운 감정을 얻었다.경비원에게 상한 음식을 던져준 압구정동 아파트의 할머니도, 주차요원의 무릎을 꿇린 백화점 VIP 모녀도, 땅콩회항의 히로인 조현아씨도 모두 촌스러운 사람들이다. 세계가 진심으로 자신을 환대한다고, 기꺼워한다고 느껴본 적이 아마도 없을 것이다. 촌스러운 것도 지나치면 사악한 것이 된다. 비유와 직설도 구분 못하는 이들을 위해 분명히 말하자면, 고객은 왕이 아니다. 너도, 나도, 누구도 왕이 아니다.

박선영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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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8. 00:19

한 번도 만나본 적은 없지만 만나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왠지 즐겁고 유익하고 행복해질 것 같은 사람이 있다. 나에겐 김정운 교수님이 그런 분이었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에서부터 『남자의 물건』 『노는 만큼 성공한다』까지 김정운 교수님의 책은 유머러스한 제목만큼이나 흥미로우면서도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 어느 순간 나는 교수님의 팬이 되었다. 최근 『에디톨로지』라는 책을 내고 일본 유학 중에 잠시 귀국한 김정운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하얗게 눈이 내리는 날, 빨간색 머플러를 두르고 나타난 김정운 교수님은 삶의 재미와 포인트를 정확히 아는 분 같았다. 과거에 비해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즐거움을 모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위한 좋은 조언의 말씀을 듣고 싶었다.

-교수님 반갑습니다. 일본 생활은 어떠신지요?

 “일본에 있으면 좀 쓸쓸하고 외롭다가 한국에서 바쁘게 지내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면 ‘여유가 있는 여기가 좋구나’ 하고 느껴요.”

 -처음에 어떻게 일본 유학을 가시게 되셨지요?

 “나이가 만 50세가 되었을 때 내가 다 소진된다는 느낌이 들어서 일본으로 안식년을 신청해서 갔어요. 그해 다이어리 첫 장에 ‘한 해에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써보았는데, 나도 모르게 ‘올해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한다’라고 쓴 것이에요. 왜 그런가 보니 제가 그동안 하기 싫은 것을 너무 많이 하고 살았더라고요. 하기 싫은 일을 하고, 만나기 싫은 사람들을 만나고, 읽고 싶지 않은 책들을 읽고. 하기 싫은 일은 가능하면 그만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자고 생각하니,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전문적인 화가는 못되더라도 글과 그림을 같이하면 내가 남들과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더 많아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중에게 항상 유쾌한 모습만 보였던 교수님이었기에 조금은 의외의 답이었다. 아마 인지도가 높아질수록 찾는 곳이 많아지고, 넓어지는 관계와 모임 속에서 자신이 소진된다고 느끼셨던 모양이다. 지금은 삶의 주도권을 되찾으셨다고 하니 다행이다. 최근엔 글과 함께 그림을 같이 그리시면서 논리로만 쓰는 글이 아닌 감성을 공유하는 글쓰기로 행복하시다 했다. 그래서 이번엔 행복에 관해 여쭈어 보았다.

 -매년 조사에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부탄이나 필리핀보다도 낮게 나옵니다. 그리고 집단 불안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심리적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교수님이 보시기에 왜 그런 것 같습니까?

 “한국 사회가 옛날과 비교해서 경제 수준이라든지, 정치적 민주화라든지 이런 형식적인 틀은 어느 정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그 틀을 채워나갈 수 있는 ‘삶의 내용’들이 풍성하지 못해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면 즐거운지 모르는 채로 그냥 살다 보니, 자기가 느껴지지 않아 불안하고, 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괜한 적을 만들어 정치적 이념을 가지고 싸우거나, 아니면 연예인 이야기하는 것밖에는 대화거리가 없는 삶을 살고 있어요.”

 -어떻게 해야 풍성한 삶의 내용을 만들어 갈 수가 있을까요?

 “삶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서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주체적으로 공부해보는 것입니다. 내 삶의 관심사들이 다양해지는 공부를요. 제가 독일에서 13년간 지내면서 가장 부러웠던 문화는 그들이 주말판 신문을 여유롭게 읽는 모습이었습니다. 그곳의 주말판 신문은 책, 음악, 미술, 여행 등의 여러 주제를 담아 책 한 권 두께로 나옵니다. 카페에 앉아 여유롭게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를 읽고 저녁에는 친한 친구들을 만나 낮에 읽었던 재미있는 내용을 이야기하며 보냅니다.”

 -제가 미국에 살다 중국 유학을 하며 느꼈던 것이, 미국에서는 수많은 이야기가 사방팔방에서 다양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한곳으로 시선이 모아지기 힘든 반면, 중국에서는 누굴 만나도 다들 비슷한 관점에서 제한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해서 좀 답답하더라고요.

 “한 사회의 성숙도를 잴 수 있는 척도는 그 사회 안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삶의 주제가 얼마나 다양한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서양식 파티가 이루어지기 힘든 이유도 우리나라에선 반드시 그 파티의 주인공이 있어야 하고, 그 주인공이 가운데로 나와서 노래나 발언을 해야 하고, 결국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이게 됩니다. 각자 삶의 주제가 풍부하면 다양한 이야기가 그 파티 구석구석에서 펼쳐질 텐데 그 삶의 내용이 빈곤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단순화됩니다.”

 두 시간이 넘는 대화의 시간 동안 김정운 교수님이 강조한 것은 삶의 의미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공부’였다. 그는 자신이 교수를 그만둔 것도 그 공부를 위해서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도 교수직을 내려놓고 잠시 동안 불안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현대인들의 고질적인 문제, 불안에 대해 물어보았다.

 -지금 현대인들은 많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텐데요, 심리학자이신 교수님 관점에서 한번 분석해 주시지요.

 “우리가 불안한 이유를 단순히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만 돌리는분도 많습니다. 물론 사회 구조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하고 다 같이 노력해야 합니다. 다만 구조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조적인 문제의 해결은 수단적 가치이지 내 삶의 궁극적 가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수단적 가치들이 제대로 안 되어 있어 궁극적 가치에 도달하지 못하니 자유를 이야기하고 민주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즉 내 삶의 궁극적 가치에 대한 고민과 노력도 동시에 진행돼야 합니다.”

 - 그러면 궁극적 가치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왜 사는가? 이 질문에 대한 개인들의 성찰적 대답입니다. 저는 심리학을 전공했으니 명쾌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행복하려고, 즐겁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꾸 부정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 그런데 정치적으로 어두웠던 시대를 보내셨던 제 앞 세대들은 본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약간의 죄의식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세대만 하더라도 대학생 때 연애하면 나쁜 사람이었어요. 사랑도 동지적 사랑을 해야 한다 해서, 내가 감옥 가면 옥바라지해야 하는 그런 사랑,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랑도 제대로 한번 못해보고, 공부하면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여겨지고, 재미있으면 불안하고,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면 죄의식을 느끼고. 이것이 압축성장과 시대가 남겨놓은 어두운 측면입니다. 형식적인 민주주의는 이루어졌고 경제적 성장도 세계 10위권까지 이뤄냈지만 내 안을 들여다보면 아무 내용 없이 텅 빈 것 같고 불안한 거예요. 수단적 가치가 이뤄지면 궁극적 가치도 실현될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에요.”

 -혹자는 삶의 내용을 풍성하게 하고 행복하기 위해 재미있는 무언가를 배우라고 하면 배부른 소리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셔요. 하루하루 살기도 바쁘다고요.

 “저 역시도 한때는 정말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빴나를 보니까 최소한 절반은 제쳐낼 수 있는 일들이었습니다. 먹고살기도 바쁘다고 내 삶의 내용을 채우지 못하는 것을 합리화하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그렇게 합리화하면 내 미래의 삶은 누가 책임질까요? 앞으로는 은퇴하고도 30년은 더 산다고 하는데 나중에 늙어서 어떻게 하시려고요? 우리는 불안하면 관계 속으로 도피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꾸 퇴근 후 저녁 약속, 술 약속 만들어서 관계로 도피하려 하지 말고 주체적으로 자신이 즐거운 일을 찾아서 한 가지씩 배워보세요.”

 관계 과잉 사회. 김정운 교수님은 우리의 불안이 관계로의 도피를 만들고, 그 관계 의존적 문화가 자기 스스로를 잃어버리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가 잘나가던 교수 자리를 내려놓고 일본 유학을 떠난 것도 새로운 공부를 통해 삶의 내용을 좀 더 풍성히 채우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은퇴까지 30년의 시간을 일합니다. 하지만 은퇴 후 30년의 시간이 더 남아 있어요. 우리는 그 나머지 30년의 시간을 위해 무슨 준비를 하고 있나요?” 자신에게 되묻는 듯 말하는 김정운 교수님. 이번엔 그의 최근작 『에디톨로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새로 내신 책 『에디톨로지』를 보면 창의적 아이디어는 기존에 있는 데이터와 데이터 간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통해 편집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나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주 훌륭한 통찰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쉽게도 쌓아놓은 데이터는 많지만 정작 창의적 아이디어는 잘 나오지 않는 것 같아요. 왜 그런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삶이 여유롭지가 않아서 그래요. 각 데이터 간을 연결하는 새로운 메타언어는 미학의 분야이지 논리의 분야가 아니거든요. 즉 삶이 즐겁고 재미있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때 창의적 아이디어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사회 지도자들부터 여유를 가지고 좀 쉴 줄 알아야 변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 열심히만 하자’ 하는 구호는 평균 연령 50세 때 맞는 구호였지 지금처럼 100세 시대에 맞는 구호가 아닙니다.”

 -경직된 사회에서 자라서 그런지 지금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자기 본인 생각을 창의적으로 잘 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은가요?

 “제가 독일에 가서 보니까 학생들이 수업 중에 노트 필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카드에다 필기를 하더라고요. 노트는 한번 써놓으면 찢을 수가 없기 때문에 여러 데이터 간의 관계를 주체적으로 새롭게 설정하는 편집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카드에다 필기를 하면 그것이 가능해집니다. 그것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카드를 사용하게 되면 카드 위에 본인의 언어로 키워드를 쓰게 되고 그 키워드를 가지고 또 자기 식으로 정리를 하게 됩니다. 바로 이 과정에서 본인만의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고 실력이 쌓이는 것입니다. 데이터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키워드를 뽑는 것, 그것이 진짜 실력입니다.”

 -제가 『에디톨로지』를 읽으며 공감했던 부분이 ‘일관된 자아에 대한 요구가 심리적 억압을 낳는다’라는 부분이었습니다. 인간은 원래 모순적인 존재이지만, 본인이 때론 받아들이기 힘든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면도 같이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발견했을 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안의 여러 가지 나를 용납하지 못하고 억압하면 다른 사람들을 못 받아들이고 억압하려고 합니다. 반대로 성찰을 통해 내 안에 다양한 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면 타인을 좀 더 너그럽게 대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심리학에서는 내 안의 다양한 모습들 간의 관계가 나와 다른 사람들 간의 관계와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여기 오는데 앞에서 차를 막고 안 비켜주더라고요. 이럴 때 ‘저 사람은 왜 저럴까?’ 하면서 화만 내지 말고 생각을 돌려 ‘나는 안 그랬나?’ 하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수님은 삶의 어느 순간 행복하다고 느끼시나요?

 “저는 음악을 좋아합니다. 음악을 듣다 감동해서 눈물이 날 때가 있는데 그때가 저는 제 삶 속에서 큰 행복의 순간입니다. 특히 산책할 때 음악을 들으면 나에게 처해진 상황과 내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이 음악과 함께 가슴이 트이면서 새롭게 보이는 순간들이 있는데 이때가 참 행복합니다.”

 김정운 교수님과의 만남은 예상대로 유익하고도 즐거웠다. 새해를 맞아 한번 올해에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 한 가지와 ‘정말로 하기 싫은 일’ 한 가지를 다이어리에 적어보자.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그것들을 내 삶 가능한 범위 내에서 노력하고 실천해보자. 그저 남들의 요구만 들어주면서 끌려다니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닌, 김정운 교수님처럼 내 인생의 주도권을 내가 갖고 남의 시선을 덜 의식하며 사는 것이 바로 행복의 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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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5. 3. 8. 00:09

얼마 전 수업 시간에 한국의 미래와 통일에 관한 토론 시간을 가졌다. 통일로 가는 올바른 길이 무엇이냐고 묻자 한 학생은 확신에 찬 듯 “엄청난 통일비용을 감안할 때 우리 세대에는 통일을 선택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수업을 마치고 학생의 말을 오랫동안 곱씹어 봤다. 혹시 많은 한국인이 그 학생처럼 역사가 우리에게 그런 선택을 제공한다고 여기는 건 아닐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 운명에 대한 선택지는 여러 가지일지라도 통일은 결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통일에 관한 불후의 문구는 중국의 『삼국지』 서문에서 찾을 수 있다. 나라의 존망이 위태롭던 한(漢)조 말에 쓰인 그 유명한 역사소설의 서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分久必合, 合久必分(오랫동안 분열된 나라는 반드시 다시 통일되고, 오랫동안 통일된 나라는 반드시 분열한다)’.

 이 말의 함축된 의미는 국가의 통일과 분열은 본질적으로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통일이냐, 실패한 통일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통일 자체는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 과정은 이미 시작됐다. 한국이나 미국의 정책과 무관하게 북한은 글로벌 경제 속에 계속 편입되고 있다. 평양의 특권층은 이미 베이징이나 모스크바에서 명품을 구입하고, 외화를 획득하거나 심지어 해외 계좌를 통해 전 세계에 은밀한 투자가 가능하다. 중국의 대규모 북한 투자도 북한의 세계 경제 편입을 촉진한다. 다시 말해 남북한의 경제·금융 통합은 수면 아래에서 꾸준히 계속될 것이다.

 남북 간의 이념 장벽도 무너지고 있다. 20년 전만 해도 옷과 표정만 봐도 북한 사람을 분간할 수 있었지만 그런 차이가 갈수록 무뎌진다. 북한 지도자 김정은의 말·몸짓·복장은 베이징이나 서울에 사는 또래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공산주의 이념에 지배되던 당과 군이 사익을 추구하는 과두집단으로 변모하면서 문화와 가치관의 차이도 계속 흐려질 것이다.

 만일 남북의 통합 과정이 은밀하게만 이뤄진다면 정부나 민간의 정상적인 채널보다는 비정상적인 채널을 통해 통합될 위험이 있다. 이렇게 되면 향후 100년간 한반도를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후퇴시킬지 모를 비극을 맞을지 모른다. 통일 자체보다 통일 방법이 중요한 이유다.

 이처럼 잘못된 통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문화적·제도적 통합을 위한 실질적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우리의 책임도 결코 포기해선 안 된다. 이를 방기한다면 통일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매우 위험한 상태가 될 수 있다. 

 남한과 북한은 비무장지대(DMZ)로 나뉘어져 의사소통과 인적 교류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DMZ가 한국의 유일한 장벽이라는 생각은 금물이다. 남한과 북한에는 저마다 경제적·이념적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이 이미 등장해 공통의 미래를 방해하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한 장벽이다. 1960~70년대 한국의 발전을 이끈 놀라운 공동체의식도 허물어지고 있다. 이런 이웃과의 문화적·사상적 장벽은 DMZ 보다 더 무섭다.

 최악의 경우 남북은 돈과 재화의 흐름에서만 통합된 나라로 귀결될 수도 있다. 남북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양국에 투자 중인 중국·러시아 또는 다른 나라의 발전 전략에 휘말려 통합되는 경우도 상정이 가능하다. 그런 식의 통일이 이뤄진다면 스스로 새로운 통일 한국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만들지 못한 채 모든 수준에서 여러 세대 동안 갈등을 부추기는 엄청난 분열이 뒤따를 것이다.

 우리 사회 모든 수준에서 통합을 실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 통해 남북 모두가 동등한 시민이 되고, 공통의 가치관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만일 남과 북이 문화적·사회적 통합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현재진행형인 경제적 통합 흐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통일은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처럼, 지금의 DMZ가 매우 착취적이고 부정적인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다. 

 환경적인 문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은 이미 과도한 경작과 삼림 파괴로 토양이 피폐해지고 있는 데다 기후변화까지 겹쳐 상당한 면적이 끔찍할 정도로 사막화되고 있다. 이 건조지역이 DMZ를 넘어 남한 땅에 영향을 미치면 가뜩이나 부족한 물 부족 사태를 부채질할지도 모른다. 남한 정부가 아무리 노력해도 한반도의 사막화를 막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결국 긴밀한 협력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통일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고, 그 과정을 성공적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정책을 수립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만일 지금 이 순간 한국 사회의 내적 통합에 신경 쓰지 않는다 해도 경제적 통합은 계속 이뤄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책임한 통일은 우리 사회에 분열을 초래할 수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분열은 DMZ보다 훨씬 더 비극적이고 위험하다.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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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5. 3. 7. 23:47

찻잔을 사이에 두고 앉았습니다. A대학의 교수가 말했습니다. “저는 정말 행복할 줄 알았어요.” 학창 시절, 세 가지 꿈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외국으로 유학을 가서 5년 안에 박사 학위를 딸 것. 그 다음에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교수가 될 것. 마지막으로 대학 근처의 백인들이 사는 근사한 동네에다 집을 장만할 것. “이 세 가지를 이루는 날, 저는 행복하리라 생각했어요.” 

정말 최선을 다해 뛰었다고 합니다. 네 시간 이상 잔 날이 없었답니다. 결국 5년 만에 박사가 되고, 미국에서 손꼽히는 대학의 교수가 되고, 멋진 집을 장만했습니다. “그날만 기다렸어요. 그 집으로 이사했어요. 정말 행복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달랐습니다. 굉장히 허한 감정이 밀려오더군요. 거기에 행복은 없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가 저는 ‘매화’가 떠올랐습니다. 밖에는 찬바람이 쌩쌩 붑니다. 겨우내 쌓인 눈은 녹지도 않았습니다. 발목까지 푹푹 잠깁니다. 우리의 삶입니다. 삶은 늘 춥고 수시로 고달픕니다. 그 눈길을 뚫고 사람들은 떠납니다. 매화를 찾아서. 겨울 끝, 봄의 시작을 알리는 꽃. 내 인생의 겨울이 끝나고, 내 삶의 봄이 시작됨을 알려줄 꽃. 그 찬란한 ‘터닝 포인트’를 찾아서 말입니다. 

산과 들을 뒤집니다. 공간뿐만 아닙니다. 시간까지 뒤집니다. ‘옛날에는 행복했던가, 미래에는 행복할 거야.’ 그래도 매화는 보이지 않습니다. 뒤지고 뒤져도 없습니다. 대체 매화는 어디에 숨은 걸까요. 사람들은 지칩니다. 결국 기진맥진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랬더니 내 집 뜰에 매화가 피어 있습니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매화가 말입니다. 

다들 아는 이야기라고요? 아니요. 사실은 모르는 이야기일 걸요. 왜냐고요? 우리는 지금도 집을 나가 눈 속을 헤치며 매화를 찾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행복을 찾고 있으니까요. 

사람들은 ‘먼 곳’에 익숙합니다. 늘 먼 곳을 바라보고 먼 곳을 동경합니다. ‘님은 먼 곳에’란 노래도 있잖아요. 매화도 그렇게 멀리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처럼 말입니다. 숱한 예술가들이 먼 곳을 노래했습니다. 별들이 울어대는 고흐의 그림을 봐도,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을 읊조려도 그렇습니다. 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여기에는 없는 별. 먼 곳에는 있는 별.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이사를 하면 찾을 것만 같은 별. 여기서 우리가 빠트린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달에 가서 보면 어떨까요. 화성에 가서, 목성에 가서, 아니면 더 먼 우주에 가서 보면 어떨까요. 그렇습니다. 지구가 그런 별입니다. 그토록 동경하던 별. 그토록 가고 싶던 별. 우리가 바로 그 별에 살고 있습니다. 그게 지구입니다. 당신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지금 여기’입니다. 

그러니 매화는 언제 필까요. 겨울의 끝자락, 아니면 봄의 초입에만 필까요. 아닙니다. 행복의 매화는 사시사철 피어납니다. 내 집 뜰 앞에 지금도 피어 있습니다. 고통의 순간, 슬픔의 순간에도 매화는 지지 않습니다. 쉬지 않고 피어납니다. 하루 네 시간씩 자며 공부하던 시절. 힘들고 고달팠던 순간들. 그곳에 정말 매화가 없었을까요. 

과거의 나는 기억이고, 미래의 나는 꿈입니다. 진짜 나는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 행복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맞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 행복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정말 행복해질 테니 말입니다. 거기가 바로 지금 여기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중요한가요. 내게 이미 주어진 행복을 깨닫는 일. 그걸 이해하면 눈밭은 순식간에 매화밭이 됩니다. 우리의 일상, 내 집 뜰에는 매순간 매화가 피어나니까요.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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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5. 3. 7. 23:30

"이제 세상은 새로운 천년을 맞지/하늘의 별까지 닿고 싶은 인간은/유리와 돌 위에 그들의 역사를 쓰지/돌 위엔 돌들이 쌓이고, 백년이 지나 또 한 세기가 흐르고….”

빅토르 위고 원작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는 ‘대성당들의 시대’란 노래로 시작한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은 루이 7세 시절인 1163년부터 짓기 시작해 1345년에 완성됐다. 짓는 데 182년이나 걸린 셈이다. 하늘에 가까이 닿고자 하는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대성당은 이후 850년이 넘도록 보존되면서 파리 한복판에서 수많은 전설을 만들어냈다.

외신에서 꼽은 올해의 ‘10대 뉴스’ 중 하나는 유럽우주기구(ESA)가 발사한 로제타호의 로봇탐사선 필레가 최초로 혜성 착륙에 성공한 것이었다. 로제타호는 2004년 3월 프랑스령 기아나 우주센터에서 발사돼 10년 8개월 동안 65억 km를 날아갔다. 로제타호의 여정은 영화 ‘인터스텔라’ 열풍과 함께 온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영화 속에서 우주선이 블랙홀의 중력을 역이용했듯이 로제타호도 지구와 화성의 중력을 모두 4차례 역이용했고 영화에서 우주인들이 산소와 식량을 아끼기 위해 동면에 들어간 것처럼 로제타호도 전원을 끄고 운항하다가 3년 만에 깨어나 혜성에 안착했다.

20년 넘게 준비해 온 로제타 프로젝트의 성공에 대해 유럽 언론들은 “대성당 정신(Cathedral Spirit)의 복귀”라며 환영했다. 대성당 짓기처럼 우주 탐사도 내 생애에 목표를 이루기보다는 세대를 이어서 실현해야 하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로제타 프로젝트에 들어간 돈은 약 14억 유로(약 1조9000억 원). 그러나 문제는 예산이 아니었다. 정책적 의지가 관건이다.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 간의 인공위성 발사와 달 착륙 경쟁을 씁쓸한 눈빛으로 바라봤던 유럽의 과학자들은 1975년 ESA를 설립했다. 본부는 파리에 있지만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 등에 수많은 연구시설이 분산돼 있다. 유럽의 기술이 총집결된 에어버스 항공기가 동체는 프랑스에서, 날개는 영국에서, 수평꼬리는 스페인에서, 도색은 독일에서 맡아 생산되는 것과 비슷하다.

언뜻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이것이 유럽의 힘이기도 하다. 유럽연합(EU)의 기구들은 수차례 토론을 통해 어렵게 합의를 이끌어내지만 일단 합의만 하면 각국의 정치 변동과 관계없이 프로젝트를 안정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왔다.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창조경제’ ‘디자인 서울’ ‘정보기술(IT) 생명공학 벤처 육성’ 같은 구호가 등장하지만 정권이 바뀌면 쉽게 잊혀지는 한국과는 다르다.


경제위기로 우울한 한 해를 보낸 프랑스인들에게 올해는 몇 가지 자존심을 세울 일이 있었다. 작가 파트리크 모디아노(문학상), 장 티롤 교수(경제학상) 등 노벨상 수상자 두 명을 배출했고 로제타호의 혜성 항해를 지휘한 인물도 프랑스 천체물리학자 장피에르 비브링이었다. 프랑스 일간 레제코는 “전 세계에서 ‘프랑스 때리기’가 유행이지만 프랑스인들은 기초학문 분야에서 묵묵히 저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도 올해는 참담한 비극적 사건이 줄을 이어 전 국민이 집단 우울증 증세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에 ‘대성당의 정신’이 있다면 우리에게도 석굴암 불국사 같은 ‘천년사찰의 정신’이 왜 없겠는가. 내년엔 우리도 자기비하보다는 미래를 향한 큰 꿈을 준비하는 해가 되면 좋겠다. 꼴찌 팀을 맡아 가을야구에 성공한 LG 트윈스의 양상문 감독의 말을 되새기고 싶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하다.”


전승훈 파리 특파



http://news.donga.com/3/all/20141222/687059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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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7. 23:14

정도전, 장영실, 김구, 노무현.

올해 하반기 현대자동차 입사시험에 출제된 에세이 문제의 답으로 많이 거론된 인물들이다. 시험 문제는 ‘본인의 관점에서 역사상 저평가되었다고 생각하는 인물에 대해 쓰시오’였다. 특히 수험생의 절반 정도는 정도전에 대해 썼다고 한다. 상반기 내내 안방극장을 달궜던 TV 사극 ‘정도전’의 영향일 것이다.

과거 에세이를 채점했던 경험을 떠올려 ‘내가 만약 현대차 채점위원이라면 어떻게 점수를 매길까’ 하는 상상에 빠져봤다. 에세이를 채점할 때는 대개 질문 취지에 충실한 답을 하는지, 주제와 소재는 참신한지, 일관성과 설득력은 있는지, 표현력은 좋은지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런데 시험 채점이라는 게 비슷비슷한 내용의 답안지를 수십 장씩 읽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참신성이 없거나 질문의 취지에서 벗어난 답안지에는 아예 눈길이 가지 않게 된다.

이런 연유로 정도전이나 노무현이라는 답에는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을 것 같다. 정도전의 경우, 채점위원이라면 누구나 ‘책을 얼마나 안 읽었기에 TV 드라마 이야기로 답안지를 채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고인이기는 하지만 측근과 추종자들이 현실정치의 최대 세력 가운데 하나다. 그를 역사라고 하기에는 일러도 너무 이르다. 아직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지 않은 인물에 대해 고평가, 저평가를 논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장영실과 김구도 참신한 답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모 기업 면접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낸 사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6·29선언’이라는 대답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는 걸 보면 나름 준수한 답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우리 대기업들이 인문학 비중을 크게 늘리고 난도(難度)를 높인 것은 올 하반기 채용에서 처음 시작된 현상이 아니다. 이미 작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확고한 경향이다. 대응할 시간이 충분했는데도 취업준비생들이 내놓는 답은 기대치와 거리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가뜩이나 ‘스펙’ 쌓기에 바쁜 취업준비생들을 두고 기업들이 역사다 인문학이다 해서 괴롭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해 7월 신한은행이 고졸 고객들에 대해 대졸 고객들보다 비싼 이자를 물리는 등 차별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파문이 인 적이 있다. 당시 신한은행의 한 임원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하소연을 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예금과 대출 등 금융상품을 설계할 때는 수학 통계학 전공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금융권도 이공계 출신 채용을 크게 늘리고 있다. 물론 이공계 출신자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들이 인문학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 보니 큰 문제다.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사람들이 상품을 개발했다면 학력에 따라 대출을 차별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했겠느냐.”

이런 종류의 고민은 비단 금융권만의 몫이 아니다. 한국의 주력 제조업이 ‘빠른 추격자’에서 벗어나 ‘시장 선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술과 함께 ‘인간’을 이해하는 인재가 절실히 필요하다. 최근 기업들이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교육에 공을 들이는 이유도 기술력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기업들의 역사 중시 추세는 결코 일시적 유행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문제의 비중은 점점 커지고, 난도 또한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평소 책이나 신문기사를 꼼꼼히 읽고 자신만의 역사관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스펙이 있어도 대기업 문턱을 밟아보기 어려운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천광암 산업부장




http://news.donga.com/3/all/20141021/673194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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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7. 23:09

과거를 왜곡하고 국방력을 키워가는 일본. 마치 또다시 냉전시대라도 온 듯 주변국들을 위협하는 러시아. 미국과 맞먹는 인공지능 무인정찰기와 스텔스 기능의 5세대 전투기를 개발하며 동시에 북한 미사일 위협에 대응할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를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중국. 주변국들의 행동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매우 편하고 단순한 설명이 하나 있다. 일본인들은 본질적으로 나쁘다고! '더러운 중국' '무식한 러시아' 역시 믿을 만한 나라들이 아니라고! 이렇게 우리는 그냥 우리에게 '편리한' 설명 하나 던지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아무 준비 없이 살아볼 수 있겠다.

물론 단순히 우리에게 쉽고 편하다고 진실일 필요는 없다. 크리스마스에 사주겠다던 자전거.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는 사줄 수 없다고 한다. 화나고 분한 아이는 쉽게 말할 수 있겠다. 약속도 안 지키는 아빠는 나쁘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얼마 전 직장을 잃었고, 대기업 하도급업체였던 회사는 문을 닫았다. 대기업은 해외 바이어들의 주문 80%를 잃었고, 빼앗긴 주문량은 중국 경쟁사가 고스란히 가져갔다. 미국과 경쟁할 전략적 산업을 만들기 위해 경쟁사에 천문학적 혜택과 지원을 퍼붓고 있는 중국 정부…. 세상은 언제나 이렇게 인과관계들의 꼬리 물기다.

대한민국에는 제국적 마인드가 절실하다. 약한 나라를 침략하고 약탈하는 로마·영국·일본식 제국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나에게 지금 일어나는 사건들을 나, 그리고 나의 감정이라는 우연의 한계를 뛰어넘어 수백만개 역사·종교·정치·경제·과학적 변수들을 동시에 고려하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진정한 '제국적 마인드'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아픔을 컨트롤할 수 있는 냉철함. '내가 만약 북한·일본·중국·러시아라면?' 하고 시뮬레이션해볼 수 있는 인지적 객관성. 인정하고 싶지 않은 역사적 진실 역시 받아들일 수 있는 '쿨'한 태도. 이런 제국적 마인드 없는 대한민국은 앞으로도 계속 국제사회라는 서치라이트 앞에 눈부셔 얼어버리는 나약한 사슴 한 마리에 불과할 것이다.

김대식 KAIST 교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1/18/201411180443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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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7. 22:59

기술은 환경 파괴 아닌 환경 保全을 이끈다는 '에코 모더니즘' 확산
히말라야 계곡 입구에 수력발전소 세운다면 경제·생태 이득 아닐까
自然 그대로가 옳다는 근본주의서 벗어나야



어제로 강원도 평창에서 열린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총회가 끝났다. 164개국 2만여명이 모였다.

자연(自然)을 더 풍성하게 만들자는 국제회의가 국내에서 열린 걸 계기로 자연이란 우리한테 뭔가 하는 문제를 한번 생각해봄 직하다. 1990년대 후반 뉴욕에 갔다가 '지구상의 한순간(A Moment on the Earth)'이라는 책을 샀다. 환경 저널리스트가 쓴 두께 10㎝쯤의 책인데, 읽어 보니 자료 축적이 대단했고 관점도 의표를 찔렀다. 저자는 과학기술과 경제성장은 환경 파괴가 아니라 환경 보전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를 폈다. 예를 들어 농약은 환경 파괴를 막아주고 있다. 농약이 없다면 농지 생산성은 떨어진다. 그렇게 되면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숲을 더 베어내야 한다.

저자는 '뉴욕과 방글라데시 중 어느 쪽 환경이 더 잘 보전되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뉴욕이 방글라데시보다 수십 배를 소비하고 에너지도 많이 쓴다. 그러나 뉴욕은 공원이 넓고 하수 처리 시설이 잘 돼 있다. 방글라데시는 공장이 없는데도 강은 더럽고 도시는 쓰레기 천지다. 산은 땔감용 나무를 베어내는 바람에 헐벗었다. 자연에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면 뉴욕과 방글라데시 가운데 어느 쪽을 원하겠느냐는 것이다.

미국·유럽엔 '에코 모더니즘' 또는 '에코 리얼리즘'이라고 해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꽤 늘고 있다. '나무 껴안기(tree hug)' 방식의 환경 운동이나, 인간을 '지구의 저주'로 보는 관점은 한계에 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도시에 밀집해 사는 것도 자연엔 이롭다고 평가한다. 에너지 사용 효율이 높아서다. 그래야 땅이 남아돌고 그 '해방(解放)된 토지'를 생태 보호에 활용할 수 있다. 원자력·유전자조작 같은 기술에도 호의적이다. 지구의 지속 가능성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기술(technology)은 문제(problem)가 아니라 해결책(solution)이라는 관점이다. 다 맞는 것은 아니겠지만 취할 부분이 꽤 있다.

작년에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면서 공상(空想)을 해봤다. 히말라야 짐꾼들은 외국인 트레커들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 산길을 올랐다. 그러고서 하루 10달러씩 받는다. 같이 다니면서 마음이 불편했다. 하나 더 안타까웠던 것은 히말라야 산을 덮은 계단식 밭이다. 고립된 자급자족 생활을 하는 현지인들은 산비탈 나무를 베어내고 계단밭을 조성해 먹고산다. 방글라데시의 잦은 홍수도 히말라야에 계단식 밭이 가득 찼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산속에 수력발전소를 몇 개 세우면 네팔 경제도 일으켜 세우고 히말라야 생태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계곡 경사가 급해 좁은 입구만 막아도 낙차 큰 수력발전소가 가능할 것이다. 대량 전기 공급이 가능해지면 별 몇 개짜리 호텔이 들어가는 산악 휴양도시도 세울 수 있다. 호텔까지는 전기로 움직이는 로프웨이 구간을 몇 곳 만들어 이동하면 된다. 현재의 히말라야 숙박 시설은 사람 몸 하나 누울 정도의 나무 침상이 고작이고 숙박료는 우리 돈 2000원이다.

그럴듯한 휴양 단지가 생기면 선진국 부자들이 모여들 것이다. 현지인들에겐 짐을 지지 않고도 생계를 꾸릴 일자리가 생겨난다. 계단식 밭을 일구는 사람도 산악 도시에 모여 살면서 여러 형태의 경제적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댐으로 인한 생태 파괴도 무시할 순 없다. 그래도 가난을 해결하면서 계단식 경작도 없애는 플러스 효과가 훨씬 클 것 같다. 공상 차원이라서 검증을 하고 들면 허점이 많은 아이디어일 것이다. 그렇지만 자연은 여하튼 손 안 대고 내버려두는 게 맞는다는 천성산 도롱뇽류(類)의 근본주의에선 벗어나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다시 떠올려봤다.


한삼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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