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있는삶/사설 노트'에 해당되는 글 715건

  1. 2013.01.04 [동아광장/홍성욱]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것을 보여준 나로호
  2. 2013.01.04 [송호근 칼럼] 몽땅 해드립니다!
  3. 2013.01.04 [이명수의 사람그물]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4. 2013.01.04 [왜냐면/김동규] 서울시 관악구 서림동
  5. 2013.01.04 [강호정의 애고에코/12월 3일] 경쟁이냐 협력이냐
  6. 2013.01.04 [초대석]대기업의 스크린 독점에 반발 조기종영 선언… 민병훈 ‘터치’ 감독
  7. 2013.01.04 [중앙시평] 땀 흘리지 않고 거두는 열매는 없다
  8. 2013.01.04 [세상 읽기/ 장덕진] 우리는 두 번의 민주정부를 필요로 한다
  9. 2013.01.04 [토요에세이/12월 1일] 두 후보의 글쓰기 검증
  10. 2013.01.04 [중앙시평] 저성장 시대로 접어드는가
  11. 2013.01.04 [삶과 문화/11월 30일] 그래 나 골초다! 자학 개그의 맛
  12. 2013.01.04 [임철순 칼럼/11월 30일] 감동 없는 우리 대선
  13. 2013.01.04 [중앙시평] 안철수 현상만 남았다
  14. 2013.01.04 [광화문에서/신석호]‘MB 정부 남북관계’ 아쉬웠던 순간들
  15. 2013.01.04 [한혜경의 ‘100세 시대’]<4>70대의 ‘위험한’ 순정
  16. 2013.01.04 [노트북을 열며] ‘좋아요’가 싫어요
  17. 2013.01.04 [싱크탱크 시각/ 이창곤] 2012 대선 후보 선택의 기준
  18. 2013.01.04 [성한용 칼럼] 박근혜 후보의 결핍에 관하여
  19. 2013.01.04 [사색의 향기/11월 27일] 강의의 시대를 통과하며
  20. 2013.01.04 임박한 파국, ‘바이블’의 귀환
2013. 1. 4. 13:38

대규모 연구비와 인력이 동원되고 10년이 넘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진행되는 거대 과학기술 프로젝트는 ‘양날의 칼’이다. 이런 프로젝트는 언론의 주목을 받고 국민적 관심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추진하는 전문가 그룹과 연구소, 프로젝트를 기획한 관료, 그리고 이를 지원한 정치인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3차 발사도 실패땐 책임추궁 예상

이명박 대통령은 제1차 발사가 실패한 후에 나로우주센터를 방문해서 연구원을 격려했고, 2차 발사 때에는 정운찬 전 총리가 나로우주센터에서 관계자들과 함께 발사를 지켜보았다. 최근에 두 번 연기가 됐고 향후 일정도 불투명하지만, 만약에 3차 발사가 성공한다면 그동안의 실패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들은 눈 녹듯이 사라지면서 프로젝트의 주역들은 국가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것이다.



양지가 밝으면 음지는 더 어둡다. 거대 과학기술 프로젝트는 그것이 성공하지 못했을 때에 받는 비판과 비난이 상대적으로 더 심하다. 지금까지 5000억 원 이상의 예산을 사용한 나로호도 이번 마지막 발사마저 실패한다면 국민들의 실망이 극에 달할 것이고, 이에 대한 책임 추궁이 거세질 것이 분명하다. 더 나아가서 2021년으로 예정되어 있는 한국형발사체 개발 계획에도 적신호가 켜질 공산이 크다. 얼마 전에 항공우주연구원의 연구원들이 머리도 감지 않고 손톱도 자르지 않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졌는데, 아마도 실패에 대한 부담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로호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한국적’이다. 로켓 기술은 미사일 협정 등의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이유 때문에 미국이 우리나라에 이전하기를 극도로 꺼리는 기술이다. 게다가 2002년에 본격적으로 우주개발에 뛰어든 우리는 몇 년 내에 발사체를 만든다는 계획을 서둘러 세웠다. 이를 위해서 러시아와 기술개발 협정을 맺었고, 러시아에서 로켓 추진체의 핵심인 하단(제1단) 로켓을 통째로 들여왔다. 우리는 상단(제2단) 로켓을 만들었다. 분리되어 개발된 두 기술이 무리하게 합쳐지다 보니 예기치 못한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했다. 발사가 실패한 뒤에는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나로호의 성공이 2조 원의 경제효과를 가진다는 분석은 꼭 황우석 사태 때 줄기세포 연구가 30조 원의 경제효과를 가진다는 얘기를 다시 보는 듯하다. 언론은 하나같이 우주개발의 경제적 효과를 과장해서 선전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이 너무나 ‘한국적’이다.

우주개발 경제적 효과 과장

우주개발 프로젝트는 여러 가지 정치적 의미가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지금 로켓을 쏘아올린 ‘스페이스 클럽’ 9개국에는 러시아 미국 프랑스 일본 영국 중국만이 아니라 인도 이스라엘 이란이 있다. 나라의 면면을 보면 그저 잘사는 나라만도 아니고, 또 우리보다 과학기술이 뛰어난 나라만 가입한 것도 아니다. 로켓의 종주국이며 과학기술 선진국인 독일이 빠져 있고, 이란과 인도가 들어 있다. 북한도 이에 들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 핵무기 보유국을 보자.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북한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고, 이스라엘도 핵보유국임을 감안하면 스페이스 클럽은 핵무기를 가진 나라와 그 명단이 상당히 겹친다. 이란의 핵무기 개발은 국제적으로 의혹의 대상이다. 우리는 지금 북한과 10번째 스페이스 클럽 가입을 두고 경쟁을 하고 있는데, 북한은 올 4월에 광명성 3호 발사에 실패함으로써 선점할 기회를 놓쳤다. 북한의 실패에 대해서도 미국과의 교류를 위해서 정치적으로 일부러 실패했다는 음모론이 제기되었을 정도였다.

우리보다 잘살고 과학기술 수준도 높은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스페이스 클럽에 안 들어 있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만하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자적으로 로켓을 발사해서 인공위성을 궤도에 진입시켰는데, 그 이후 독자 로켓 개발을 중단하고 유럽 10개국이 출자해서 설립한 아리안스페이스사의 상업용 로켓을 이용해서 위성을 발사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독자 발사체를 만들기 위해 2조 원 가까운 예산을 사용하려는 이유는 더 많은 위성을 궤도에 올릴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훨씬 더 많은 위성을 사용하는 유럽 각국이 상업용 서비스를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대 과학기술 프로젝트 하나에는 매년 1000억∼2000억 원이 넘는 돈이 들어간다. 대학의 실험실에서는 1000만∼2000만 원의 연구비가 없어서 하던 연구가 중단되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 정치적인 거대 과학도 나름대로의 중요성이 있겠지만, 과학 연구의 꽃은 실험실에서 연구자의 손을 이용해 이루어지는 벤치 과학(bench science)이다. 이번에 나로호 발사가 조속히 확정되어 성공하기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 염원한다. 그렇지만 그 뒤에 한국형 거대 과학기술 프로젝트의 미래에 대해 더 활발한 공론장이 만들어져 우리의 미래를 위해 우주 로켓이 꼭 필요한지를 진지하게 토론해 봐야 할 것이다.

 


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http://news.donga.com/3/all/20121204/51286730/1

 

 

Posted by 겟업
2013. 1. 4. 13:37

대선 벽보가 나붙었다. 1번은 ‘준비된 여성 대통령’인데 ‘여성’만 빼면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이 있고, 2번 ‘사람이 먼저다’는 교통경찰 준칙 같다. 3번 ‘상상하라 코리아연방’은 논술 문제로 딱이다. 벽보는 조금 싱거운데 현수막은 온통 공짜 메뉴다. ‘65세 정년 연장’ ‘무상의료’ ‘반값등록금’ ‘고용지원금’ ‘정규직화’ ‘청년고용할당제’, 곧 공짜천국이 도래할 모양이다. ‘사교육비 해소’ ‘중산층을 두 배로’ ‘일자리 혁명’-이제 나올 것은 다 나왔다. 그런데 왜 허전하지? 살림살이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없어서다. 이런 대한민국을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 큰 그림을 보여주질 못해서다.

‘몽땅 해드립니다’를 합창하는 두 후보를 정책 차별성으로 판가름하기에는 조금 어려워졌다. 한 손엔 복지, 다른 손엔 경제민주화를 들고 전장을 누비는 두 후보가 헷갈린다. 차별성이 없는 것은 아니건만 신경 곤두세운 유권자는 별로 없다. 단지 그 외침, “다 해줍니다”에 마음이 얼핏 쏠리고, 각자의 절실한 형편에 와닿는 후보가 누군지를 가려낼 뿐이다. “다 해줍니다”가 호소력을 잃는 듯하자 양 진영은 아예 격투기로 나섰다. 실정(失政) 공방전이다. ‘노정권 실정의 책임자’에 ‘MB실정의 공모자’, 이런 원색적 비난은 아마 곧 ‘친노의 얼굴마담’ ‘유신의 딸’로 맞받아치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정당의 품위, 캠페인의 수준이 요만하다.

 지난 단일화 TV토론 한 장면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안철수 후보가 문재인 후보에게 물었다. “시대정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문재인 후보 왈, “복지와 경제민주화지요.” 필자는 그 지점에서 절망했다. 정치철학과 세계관을 멋지게 피력하도록 깔아준 그 절호의 기회를 문재인 후보는 상식적인 답변으로 날려버렸다. 박근혜 후보라고 다를까? 지난 나홀로 토론에서 그는 ‘국민 대통합!’이라고 했다. 상처 치유, 갈등 해결로 협력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그 구호가 복잡한 시대방정식을 풀어낼지는 모르겠다. 복지와 경제민주화가 수단이고, 국민 대통합이 가치란 점에서 후자가 논리적으론 ‘시대정신’에 근접하기는 한다. ‘시대정신’이란 우리의 처지를 정확히 짚고 미래 목표를 분명히 지정하는 ‘가치개념’과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실천개념’까지를 포함한 것이어야 한다. 어렵기는 하다. 그게 뭘까?

시민민주주의! 이게 나의 답이다. 모든 정권은 민주적 가치를 표방한다. 그런데 실체를 벗겨보면 허점과 얼룩투성이다. 노무현 정권은 운동권의 리더들로 들끓었던 ‘행동가 민주주의’였다. 격앙된 운동권이 장악한 정치판엔 과잉 호르몬이 흘러넘쳤다. 시민단체를 멀찌감치 내쫓았던 MB정권엔 정치도 국민도 없었다. ‘종업원 민주주의’, 국민은 부지런한 오너에게 박수를 쳐야 하는 종업원이었다. 청와대 뒷산에 올라 목격했던 촛불시위대를 ‘종업원 민주주의’의 오너는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거 뭐지?’

두 후보가 원색적 공방전을 벌이기 전에 자성(自省)부터 해야 한다. 참여정부가 참여라는 아름다운 명분으로 어떻게 시민을 밀어냈는지를, ‘국민을 섬깁니다’라고 맹세한 이명박 정부가 얼마나 많은 서민을 성공의 말안장에서 낙마시켰는지를 말이다. 그러니 통치권을 시민권으로 교체하는 ‘시민민주주의’가 답이다. 시민권에는 좌우가 없다. 민주화 25년, 소득격차와 양극화, 이분법적 아집과 격돌로 너덜너덜해진 시민권의 쇄신을 위한 정교한 사회디자인을 내놔야 한다. 국민 대통합, 복지와 경제민주화는 그 설계도 중심부에 위치할 것이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유럽 노동운동가의 잔잔한 얘기가 감동적이다. 경제가 어려울 땐 십시일반 노동시간을 줄여 해고통지서를 받아든 사람에게 나눠준다. ‘동료가 쫓겨난 작업장에서 마음이 편하겠어요?’ 상식적인 얘기지만 한국에선 이게 안 된다. 시민권의 두 얼굴이 권리와 책임인데, 한국에서는 권리로만 주창했기 때문이다. ‘몽땅 해드립니다!’도 열심히 권리를 편들 뿐 책임질 사람과 일을 지목하지 않는다. 아직 후진정치다. 포퓰리즘을 욕하는 모두가 포퓰리스트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한국은 사회디자인(social design)이 절실한 시대로 진입했다. 여기엔 권리보다 책임을 앞에 두는 시민권이 핵심이다. 예컨대 복지와 경제민주화에서 시민들이 져야 할 책임은 증발됐다. ‘증세와 양보!’ 복지에는 증세가 필수적이고, 경제민주화에는 재벌, 노조, 고소득층의 양보가 우선돼야 한다. 생산시장과 노동시장을 독점하는 집단을 지목해 정치적 양보를 받아내고, 그것으로 혜택받는 집단에게 사회통합에의 헌신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 이게 국민 대통합이고, 자발적 타협을 가동하는 시민민주주의다. 권리장전은 책임선언과 같은 말이다. 시민권은 공감과 양보로 진화한다. ‘몽땅 해드립니다!’가 아니라 ‘위험을 나눕시다!’다. 십수 년 전, 그걸 못해 외환위기에 휘청거리지 않았는가?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066583&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3. 1. 4. 13:36
지극한 평범함이 누군가에겐 비범의 영역이 되기도 한다. 막내 누이에게 내가 그렇다. 30년 넘는 세월 동안 그에게 내 별명은 ‘백과사전’이다. 지금도 누이의 휴대전화 속 내 이름은 ‘나의 네이버’다. 누이의 궁금한 열정은 쌍용차 문제에서부터 대선 후보, 방송사 파업, 가자지구, 동성애, 심지어 연예인 성형 문제에 이르기까지 숨이 찰 정도다. 질문마다 나는 팩트를 몇 번씩 교차확인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의견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 막내 누이의 평범하면서 특별한 이력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다.

 

그 시절의 많은 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초등학교 졸업 후 14살부터 평화시장에서 미싱사 시다로 일했다. 1970년 재단사 전태일이 분신하던 그 순간에도 그는 평화시장 골방에서 시다로 일하고 있었다. 유난히 지적 호기심이 많은 소녀가 어떻게 그 오랜 세월 자신의 꿈을 골방처럼 꾹꾹 눌러 담고 살았는지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아리다.

 

놀랍게도 그 누이가 올해 초 50대 중반이 넘은 나이에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다. 그가 대학에 간 이유는 간단하다. 늘 조마조마한 삶이 싫었다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이 남들도 대부분 모르는 일인지 자신만 모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는 것이다. 내가 뭘 모르는지를 알아야 조마조마하게 살지 않을 수 있다는 그의 고백은 짠하다.

 

나로호 발사가 실패했을 경우 궁금증이 많아도 그는 그걸 누구에게 대놓고 물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혼자만 모르는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학생이 된 지금도 그의 질문은 끊이지 않는다. 누이가 요즘 의아하게 생각하는 일 두 가지를 물어왔다. 한 대학의 철학과 교수씩이나 되는 이가 학생들에게 황당한 과제를 내줬다. 보수 논객의 누리집에 실명으로 ‘종북좌익을 진보라 부르는 언론사기 그만하라’는 글을 올릴 것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고 교수 개인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학생을 도구화하는 작태지만 정작 해당 교수는 지적 트레이닝 과정일 뿐이라고 강변한다. 그 사안 속에 내포된 황당함과 폭력성을 직감적으론 알겠는데, 교수가 내준 과제를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하는 늦깎이 대학생의 처지에선 소위 종북좌파에 대한 자세를 잡기가 쉽지 않다는 게 누이의 고민이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결정적 순간마다 결심의 근거로 내세우는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라는 비장한 멘트도 누이를 혼란스럽게 하는 모양이다. 박근혜 후보와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누이 같은 이들은 그게 어떤 나라인지 진짜 궁금할 것이다. 나도 그렇다. 박혁거세의 건국신화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면 아버지 박정희가 이룩했다는 산업화된 대한민국을 의미하는 게 틀림없다. 아버지와 자신이 그토록 힘들게 일으켜 세운 나라를 이렇게 거덜내다니,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시절 산업화 역군 중 한 명이었을 막내 누이는 한번도 자신이 그런 주역일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외려 많이 배운 이들이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는 동안 어린 나이부터 미싱만 돌리느라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늘 부끄러워하며 조마조마한 삶을 살았다.

 

반대 세력에 의해 나라가 무너질까 봐 비분강개하는 철학 교수나 박근혜 후보가 말하는 나라는, 막내 누이 같은 이들이 말하는 나라와 같은 나라가 아니지 싶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폭력적이고 권위적이며 배타적인 방법으로 자기들만의 나라를 주장할 리가 없다. 나만 있고, 나만 옳은 나라가 어떻게 100퍼센트 대한민국인가. 진짜, 어떻게 함께해온 나라인데.

 

 

 

이명수 심리기획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63553.html

 

 

 

Posted by 겟업
2013. 1. 4. 13:35

지난해 이맘때부터 지금까지 내 주변에서 세 사람이 목숨을 끊었다. 죽음의 이유는 모두 달랐다. 하지만 자살이 세간의 어느 이야기가 아닌 내 삶에 파고든 현실이라는 점에서 그 무게는 하나같이 무거웠다. 더 이상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마지막에 처했던 상황에 감정이입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맞닥뜨린 것은 그들이 느꼈을 고독이었다. 외로운 인간은 죽을 수 있다는 말이 기억났다.

 

‘어느 영구임대아파트의 자살 행렬’이라는, 몇 달 전에 실린 <한겨레> 기사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다. ‘영구임대아파트’는 그들의 경제적 곤궁을 보여주지만, 가난이 정작 무서운 것은 그것이 가져오는 고독일 것이다. 물론 모든 고독을 경제적 문제로 환원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살아갈 힘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사실은 저마다의 고독을 달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비용을 지출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면, 고독과 비용이 갖는 그 밀접한 상관관계를 완전히 부정하기도 어렵다. 내 경우가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나는 만 서른다섯, 미혼의 자영업자다. 거의 매일 혼자 밥 먹고, 혼자 일하고, 혼자 잠자리에 든다. 그러나 이 상황이 그렇게 외롭지는 않다. 아이패드가 있고, 시간을 보낼 만한 게임 앱 구매에 비용을 지불하기도 한다. 한달에 책 서너권을 사서 읽고, 취미에 지출도 하고 있으며, 온종일 제대로 대화 한번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는 퇴근길 아는 선배의 술집에 들른다. 남들은 이런 생활을 ‘여가’라고 부르지만 내게는 외로움을 달래는 것이고, 불행히도 그 모든 행동에는 돈이 든다. 내가 고독을 달래려고 지출하는 비용, 여기에 난 ‘고독비용’이란 이름을 붙였다.

 

우리 대다수의 고독비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독은 기본적으로 관계의 문제라 이런 땜질식 비용 지출이 외로움의 근본적 해결방안이 될 수는 없다. 문제는 우리가 이미 관계의 형성과 유지에도 상당한 비용을 요구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를 부양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부모를 찾을 수 없고, 자식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부모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재력과 능력은 결혼의 필수 조건이 되어 아파트 전셋값을 마련하지 못한 내 친구는 아직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있다. 번듯한 직업이 없다는 이유로 모임을 기피하며 홀로 방 안에 틀어박히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돈은 이미 가족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관계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

 

영구임대아파트의 자살 사건은 관계 유지 비용이 없는 사람들의 고독 문제다. 그들은 가난했고,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다. 일면식조차 없는 사람들의 죽음을 이렇게 논하는 것은 불경스런 일이 될 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담고 있는 이 사건을 애써 외면하는 분위기에 동조할 수도 없다. 이 사건을 보며 복지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본다. 복지란 주린 배를 채워달라는 동물적 요구가 아니라, 우리를 외롭지 않게 해달라는 인간으로서의 요구다. 우리가 자살률 수위의 국가에서 살고 있는 것은 우리 주변의 고독을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외로움의 고리를 끊는 데는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사적 영역의 의무일 수만은 없다. 복지가 우리의 고독에 관심을 가질 때, 이 불편한 한국 사회의 복지 체계가 조금은 더 새롭게 변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563566.html

 

 

Posted by 겟업
2013. 1. 4. 13:34

오래 전 영국 유학 시절, 학과 대학원생들과 함께 처음 간 펍에서의 실수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서양 사람들은 각자 돈으로 자기 마실 것만 산다고 알고 있던 이 서울 촌놈은 다른 학생이 권한 맥주 한 잔을 얻어먹고는 피곤하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나중에 알게 된 영국의 술 문화에 따르면 각자가 새 술을 주문할 때 잔이 비어가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술을 한잔 사는 것이 예의였다. 따로 순서를 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서로에게 술을 돌리다 보면, 술자리가 끝나갈 때는 대략 비슷한 정도로 술값을 내게 되는 것이었다. 이러다 보니 약삭빠른 사람들은 술 마시는 속도를 조절해서 남에게 대접만 받고, 자신은 베풀지 않는 이기적인 행동도 가능하다. 내가 무지해서 했던 행동처럼 말이다.

'현대는 경쟁 사회다'라는 명제에 반론을 제기하기는 쉽지 않다. 협력하고 이타적인 행동을 하면 손해보고, 경쟁하고 남을 이용해야 성공한다는 주장이 뭔가 불편은 하지만 말이다. 생태계 연구의 기반이 되는 다윈의 진화론은 이런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잘 이용된다. 다윈 이론의 근본 아이디어에 따르면 개체들은 변이를 통해서 조금씩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자연선택' 이라는 필터과정을 통해 환경에 잘 적응한 놈들이 자손을 많이 남기게 된다. 다윈의 뒤를 이은 스펜서와 같은 학자는 '적자생존'이라는 좀 더 무서운 용어를 사용했고, 대중들은 이를 '약육강식'이라는 단순한 방식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이 사회에 위험하게 적용되어 제국의 식민지 침탈이나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서는 강한 것이 절대선이고, 이기적인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 믿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과연 협력하며 사는 세상은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들이나 이상주의자들의 꿈에 지나지 않을까?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 협력과 이타성은 생태계 존재의 필수조건이다. 우리 세포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미토콘드리아도 아주 오래 전에 외부에서 유래한 세포가 우리 세포와 협력해서 안정화 된 것이다. 세포의 문제가 너무 단순해 보인다면, '죄수의 딜레마'로 알려진 게임 이론의 경우를 보자.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여기 참여한 개개인은 상대방을 배신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그런데 만일 이 게임이 한번이 아니고 매일매일 벌어지는 일이라면 어떠할 것인가? 반복되는 게임에서는 배신보다는 협력이 더 좋은 전략이다. 생물들은 자기와 가까운 유전자를 가진 친족들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기도 하는데 이를 혈연선택이라 부른다. 인간이 유지하는 복잡한 사회체계에서도 협력과 이타성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사회적으로 좋은 평판 그리고 집단을 위한 희생이 장기적으로는 자신의 생식 성공률을 높인다. 또 인간은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 어느 생물들도 이루지 못한 정보 공유를 실현하고 있는데, 이런 사회적 활동의 근저에는 협력과 이타적 기작이 내재되어 있다. 오래 전 다윈이 제안했던 진화의 기작은 단순한 경쟁뿐 아니라, 이타적이고 협력하는 개체나 집단의 성공을 고려해야만 성립되는 개념이다.

선거장에 가서 투표하는 행위도 대표적인 이타적인 행동이다. 왜냐하면 귀찮게 투표장에 가는데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내가 던진 한 표가 나에게 주는 단기적 효용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것은 자신의 평판을 높게 만드는 행동일 뿐 아니라, 내가 속한 혈연 혹은 집단의 존속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결국에는 나에게 이익으로 돌아오는 행동이다. 투표소 앞에서 인증샷을 올려 남에게 보이거나, 선거 결과가 개개인에게 큰 영향이 있다는 점을 널리 알리는 것 등이 투표 참여를 증대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인 이유다. 얼마 후 있을 대선 선거장에서 우리 국민들의 높은 이타성을 직접 관찰하게 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투표장 가는 것은 장기적으로 나에게도 이익이 되는 사회적 협력 행동이다.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2/h20121202210202121780.htm

 

Posted by 겟업
2013. 1. 4. 13:31

민병훈 감독(43)은 자신이 만든 영화 ‘터치’를 지난달 15일, 개봉 일주일 만에 스스로 조기 종영했다. 상영관을 제대로 내주지 않은 대기업 영화관들에 대한 반발의 뜻에서였다. 민 감독은 지난달 8일 ‘터치’가 개봉된 뒤 전국 12개 극장에서 하루 1, 2회 교차 상영되는 것을 확인하고 배급사에 종영을 통보했다. 교차상영이란 다른 영화와 섞어서 띄엄띄엄 상영하는 이른바 ‘퐁당퐁당 상영’을 말한다. 민 감독은 또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에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의 불공정 거래 실태를 신고했다.

감독이 자기 손으로 작품을 내린 일은 이례적이어서 영화계도 충격에 빠졌다. 지난달 30일 청룡영화제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최민식은 수상 소감으로 “우리는 주류에서 화려한 잔치를 벌이고 있지만 동료 감독 누구는 쓴 소주를 마시며 비통해하고 있을 거다”라고 말했다.

올해 관객 1000만 명 이상이 든 영화가 ‘도둑들’ ‘광해, 왕이 된 남자’ 등 두 편이나 나왔고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영화의 최고 호황기라는 말도 들리지만 그만큼 그늘도 깊다. 작은 영화들이 상영관을 잡지 못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더욱 심각해졌다는 것이 영화계의 목소리다.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민 감독을 만났다.

 

 

 

―영화 종영 이후 어떻게 지냈나.

“6년을 준비한 영화다. ‘자식을 내 손으로 죽이고’ 편하게 못 잤다. 하지만 내 자식을 죽여 이슈화해야 다른 자식들이 차별받는 시스템이 바뀔 것 같았다.”

―유준상, 김지영 등 배우들도 많이 섭섭했을 것 같다.

“둘 다 흔쾌히 ‘종영합시다’라고 하더라. 미안하고도 고마웠다. 지영 씨는 마음이 보석 같은 사람이다. 최고의 배우로 만들고 싶었는데 미안하다. 유준상은 동갑내기로 17년 친구 사이다. 드라마 스태프로 일할 때 그도 무명 배우였다. 성실하고 열정적인 모습에 반해 친구가 됐다.”

‘터치’는 민 감독의 4번째 장편이다. 무능한 사격 코치로 알코올의존증 치료를 받고 있는 동식(유준상)과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환자들을 무연고자로 속여 요양원에 입원시키고 돈을 버는 아내 수원(김지영)의 이야기를 담았다. 생명의 존귀함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인정받아 부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받는 등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김지영과 유준상 연기의 재발견’이라는 찬사도 따랐다.

―영진위는 어떤 조치를 내렸나.

“(‘터치’를 상영한) 모든 극장들이 불합리하게 상영했다고 봤다. 영진위가 표준상영계약서에 따라 교차상영 일수의 2배 기간의 추가 상영을 하든지, 아니면 부금률(극장과 투자, 배급사 등이 수익을 나누는 비율)을 10% 상향 조정하라고 권고했다. 권고여서 법적 효력은 없다. 극장이 이 권고안을 따르지 않으면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할 계획이다.”

영진위가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에 따라 2009년부터 운영하는 불공정행위 신고센터의 접수 건수는 민 감독의 경우를 포함해 단 3건이다. 감독이나 제작사는 영화계의 ‘슈퍼 갑(甲)’인 극장의 보복이 두려워 신고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차별을 받았나.

“‘터치’는 전국 97개 관에서 개봉했지만 이는 대부분 허수(虛數)다. 실제로 50개 관도 안 된다. 충북의 한 소도시 멀티플렉스(복수의 스크린이 있는 상영관)에서는 7관에서 이른 아침에 한 번, 3관에서 오후에 한 번. 1관에서 심야에 한 번 상영됐다. 명목상으로는 3개 관이지만 실제로는 합쳐서 하루 종일 4번도 상영이 안 되는 거다. 서울 강남에서는 2개 관에서 이른 아침과 늦은 밤 한 번씩 상영했다. 인터넷 예매의 경우 대기업이 투자한 대형 영화는 일주일 전 예매가 가능한데 내 영화는 목요일 개봉임에도 화요일 밤에야 열어 줬다. 그러고는 예매율이 낮다며 주말이 지나고 상영관을 더 줄였다.”

―대기업이 투자한 영화가 극장을 다 차지한다는 지적이 있다.

“CGV의 계열사인 CJ E&M이 투자 기획한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지금까지 20만 회 가까이 상영됐다. 한 회에 10명만 들어도 200만 관객이다. 전국 2100개 스크린 중 ‘광해’가 1000개 넘게 차지했었다. 영화의 품질보다 공급과 유통이 모든 걸 좌우한다. 대기업이 제작, 배급, 유통까지 수직계열화로 영화계를 독점하고 있다. 멀티플렉스 10개 상영관에 대기업 영화가 7, 8개를 차지하는 형국이다. 프랑스, 일본, 미국 등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런 경우는 없다. 멀티플렉스의 원래 취지는 관객에게 다양한 선택권을 주자는 것이다. 영화는 문화 상품이다. 서점에 갔는데 책 하나로 절반이 채워져 있다면 그건 공포영화다.”

프랑스는 극장에 세제 혜택을 주는 대신 스크린 독점을 규제한다. 멀티플렉스는 한 영화의 프린트(상영 필름 또는 디지털 파일)를 두 벌 이상 보유할 수 없으며, 특정 영화가 전체 스크린의 30%를 초과할 수 없다.

―‘터치’는 지금까지 관객 1만4539명이 들었다. 원래 목표는….

“나는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이 아니다. 제작비가 5억 원 정도 들었다. 20만 명이 목표였다. 15만 명만 들면 배우, 스태프와 파티를 하려고 했다. 약간 어렵지만 의미 있는 이 영화를 볼 만한 사람이 그 정도라고 봤다. 이창동 감독의 ‘시’가 20만 명이다. 차기작은 23만 명, 다음은 28만 명 이렇게 잡았다. 소박한 꿈이었다. 200만 관객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조금만 상생하자는 것이다. 경제계에서는 대형마트의 영업시간까지 규제하며 작은 가게들을 살리자고 한다. 문화계도 이렇게 하자는 것이다.”

―영화 제작자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영화 만들기는 어떤가.

“대기업 투자사의 입맛에 안 맞으면 투자받기가 힘들다. 한국 영화가 단순화되는 이유다. 상업영화는 넘쳐 나지만 좋은 영화는 안 나온다. 똑같은 영화가 쏟아지고 있다. 품질에 자신이 없으니 마케팅비를 엄청나게 쓴다. 50억 원 들인 영화면 광고비가 20억 원이다. 그만큼 스태프의 인건비가 줄어든다.”

―대기업이 영화판에 들어오면서 순기능도 있었다.

“극장이 늘고 영화 편수가 늘어 관객이 증가했다. 나도 이런 점은 고무적이라고 본다. 하지만 문화적 다양성은 크게 위축됐다. 문화는 다양성이 힘이다. 다양한 사상과 이야기가 존립해야 성장도 가능하다. 규모가 큰 영화, 오락영화만 승리하는 구조로는 얼마 못 간다. 한국 영화 전성기라는데 극장에 가면 볼 거 없다고 한숨쉬는 분이 많다.”

―러시아에서 공부한 이력이 특이하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다. 신학대를 나와 신부가 되고 싶었지만 어쩌다 삼수를 했다. 군 제대 뒤 러시아로 영화를 공부하러 갔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영화가 신비로웠다. 당시 공산국가가 무섭기도 했지만 예술의 기초가 잘된 나라라고 생각했다. 음악 미술 무용 영화 등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더라. 타르콥스키 감독 밑에서 촬영감독을 지낸 바딤 유소프 교수에게 배웠다. 7년간 예술의 풍요를 마음껏 누렸다.”

―당시는 모두 미국, 유럽에서 영화를 공부했는데….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남들과 똑같은 미국, 유럽 유학이 싫었다. 내 데뷔작(‘벌이 날다’)은 타지키스탄에서 찍었다. 세 번째 작품(‘포도나무를 베어라’)은 남들이 어려워하는 종교 영화다. 변방을 떠돌며 도전하는 게 좋다.”

―러시아의 관객과 영화는 어떤가.

“문화적 다양성이 살아 있는 나라다. 러시아 사람도 다 문화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다양성을 인정한다. 타르콥스키 영화를 어려워하지 않는다. 지상파에서도 그의 영화를 튼다. 백남준의 미술이 재미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저런 사람도 있네. 뭘 말하는 걸까’라고 의문을 갖고 즐기면 되는 거다. 김기덕 감독은 ‘뭐 저런 영화를 만드느냐’라는 반응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 한국 영화 관객은 익숙하지 않은 영화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려워한다. 타르콥스키 영화의 전 세계 누적 관객이 10억 명이다. 벨기에 다르덴 형제 감독 영화도 100개국에 수출돼 1억 명이 봤다.”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 같다.

“지금은 1인용 캠코더로 영화를 만드는 시대다. 올해 한국 영화가 400편이 넘는다. 그런데 극장은 한계가 있다. 유통망을 열어 줘야 한다. 마을회관, 기업체 연수원 등 전국 어디에나 영사기가 있다. 이런 시설을 활용하면 독립영화, 작은 영화도 상영할 곳을 찾을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얼마 전에 이런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안다. 문제는 실천이다.”

―앞으로 영화를 계속 만들 것인가.

“물론이다. 나는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이다. 벽을 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게 영화는 삶을 치유하고 새 생명을 얻고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다음 목표는 아예 내리지도 못하는, ‘절대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오전 1시에도 사람이 꽉꽉 차는 영화를 만들 것이다.”

 

 

 

○ 민병훈 감독 프로필

△1969년 서울 출생 △대일외국어고 졸업
△러시아 국립영화대에서 촬영 전공으로 학사, 석사 학위 취득
△작품 및 수상 경력
―‘벌이 날다’(1998년·이탈리아 토리노 영화제 대상, 그리스 테살로니키 영화제 은상)
―‘괜찮아, 울지마’(2001년·체코 카를로비바리 영화 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언급상, 비평가상)
―‘포도나무를 베어라’(2006년·부산국제영화제 PPP 코닥상)
―‘터치’(2012년)

 



민병선 기자

 

 

http://news.donga.com/3/all/20121203/51262683/1

 

 

Posted by 겟업
2013. 1. 4. 13:30

“진리를 찾겠다는 사람은 믿을지언정 진리를 찾았다는 사람은 믿지 말라.” 『좁은 문』의 작가 앙드레 지드가 귀 엷은 이들에게 주는 충고다. 누군가 진리를 찾았다고 펄펄 뛰며 좋아하고 있는데 굳이 나서서 핀잔을 주거나 어깃장을 놓을 이유는 없겠다. 지드의 충고는 무언가를 찾았다는 사람들이 자기의 신념을 마치 절대적 진리처럼 우상화하는 오만을 경계하는 뜻일 게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했던가. 비록 무슨 깨침을 얻고 어떤 신념에 이르렀다 한들 그것을 늘 입술에 매달고 다니면서 언제나 어디서나 분별없이 외쳐댄다면, 그 깨침은 얼마나 초라하고 그 신념은 얼마나 얄팍한 것인가.

이성이 늘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공동체와 소통하지 못하는 ‘닫힌 이성’은 그 자체로 비이성적이다. 폐쇄된 성 안에서 저 홀로 고고하게 빛나는 신념은 독선의 도그마에 지나지 않는다. 신념은 겸손해야 하고, 이성은 늘 열려 있어야 한다. ‘열린 이성’이란 획일주의에 얽매이지 않는 소통과 다양성의 지혜일 것이다.

획일주의에 휘둘리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파시즘의 불행을 겪게 된다. 파시즘은 처음부터 거칠게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전체주의는 부드러운 이념으로 시작되며, 뜻밖에도 가치 지향적이다. 그 가치가 이성을 짓누를 때 도그마의 그늘이 덮쳐온다. 국민투표로 권력을 잡은 히틀러는 ‘아리안 민족의 영광’을 이념으로 내걸고 끔찍한 나치 독재를 펼쳤다. 선거와 투표만으로 밝은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지도자의 어떤 신념이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는가가 국민의 삶을 좌우한다. 자칫 아리안 민족주의처럼 ‘정신 나간 시대정신’을 선택하는 날에는 끝장을 맞게 된다. 옛적의 일만이 아니다. 이성과 과학의 첨단시대인 21세기에도 여전히 보고 듣고 겪는 일이다.

전기 끊긴 방의 촛불화재로 가난한 할머니와 어린 손자가 목숨을 잃는 현실에서도 부잣집 아이들의 공짜 점심, 공짜 기저귀까지 ‘평등’하게 챙겨주겠다는 무상급식·무상보육, 요람에서 무덤까지 몽땅 국가가 책임지겠다면서 그 재원조달 방안은 우물쩍 넘겨버리는 보편적 복지, 입만 열면 인권을 외치면서 북한 인권운동의 열정을 ‘이상한 짓’이라고 빈정대는 그야말로 이상한 인권의식, 30여 년 전 유신독재에는 지금껏 이를 갈면서 현재진행의 세습독재에는 턱없이 너그러운 청맹과니의 민족주의, 북핵을 제어할 아무런 경륜 없이 입술로만 불러대는 평화의 노래…, ‘평등과 복지’ ‘민족과 평화’의 따뜻한 이념들이 온 사회를 싸늘한 대결구도로 몰아가는 모순의 시대다.

제18대 대통령 선거전이 권력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고속열차처럼 질주하고 있다. 『미국 민중사』를 쓴 하워드 진은 “달리는 열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 말했지만, 열차는 앞으로 달려도 우리의 눈은 좌우 옆과 뒤편까지 두루 살피는 반성과 배려, 소통과 균형의 성찰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떠나온 곳에 남겨둔 애환(哀歡)의 기억들, 스치고 지나쳐온 곳곳에 영글어 가는 숱한 인연들, 그 기억과 인연 속에 생생히 살아 숨쉬는 뭇 생명의 관계성…, 그 소중한 가치들을 깡그리 외면한 채 오직 눈앞만 보고 내달리는 일방통행의 달음질은 삶과 역사에 대한 인식의 빈곤이자 공동체를 불행으로 이끄는 포퓰리즘의 어리석음일 따름이다. 때로는 열차의 속도를 늦추거나, 멈춰서 기다리거나, 방향을 바꿔야 할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선거 캠프마다 폴리페서들로 넘쳐나건만 포퓰리즘의 오류를 꾸짖는 지성의 고뇌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조금만 찬찬히 살펴봐도 금방 허풍으로 드러날 공약들이 무슨 진리나 되는 듯 선거판을 마냥 휘젓는다. 땀 흘리지 않고 열매를 얻게 해준다는 맹랑한 공약(空約)들이.

땀 흘리지 않고 거두는 열매는 없다. 증세 없이 복지 없고, 성장 없이 일자리 없으며, 관용 없이 통합 없고, 안보 없이는 평화도 없다. 진리를 찾았다는 말을 믿지 말라는 지드의 충고가 “정치인들이 펼쳐 보이는 나른한 무지갯빛 환상에 속지 말라”는 경고처럼 들린다.

이번 대선은 두 전직 대통령의 정치적 유산을 상속한 남녀 후보의 대결로 좁혀졌지만, 과거 싸움으로 미래를 그르칠 수는 없다. 달리는 열차 위에서 필요한 것은 분노의 감성이 아니라 냉철한 이성이다. 포용의 여성성과 투지(鬪志)의 남성성, 점진적 개혁과 급진적 변혁, 단계적 균형복지와 전면적 무상복지, 전천후(全天候) 대북정책과 외곬의 햇볕정책, 자유민주 헌정체제와 낮은 단계 연방제…, 새 시대를 가늠할 역사적 갈림길에서 나라의 오늘과 내일을 고민하는 ‘열린 이성’의 선택이 절실히 요망된다.

 


이 우 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055063&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3. 1. 4. 13:24

한국 사회의 특징을 나타내는 여러 경제·사회지표들을 시계열적으로 놓고 보면 2012년과 2017년의 대선이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다는 점을 실감하게 된다. 지금부터 10년이야말로 향후 수십년간 한국의 운명을 가를 전환의 시기이고, 그래서 우리는 두 번의 진정한 민주정부를 필요로 한다. 여기에 실패할 경우 예상되는 일들은 이런 것들이다. 이미 심각한 지경에 이른 ‘시장에 의한 사회의 포획’은 거의 완결단계에 이를 것이고, 사람들은 무한경쟁에서 매번 승리함으로써 제자리에 있거나 아니면 뒤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고령화로 인해 세금 내는 사람은 줄어들고 부양받을 사람은 늘어나는 인구구조의 변화를 체감하기 시작하는 시점이 약 10년 뒤다. 제대로 된 한국형 복지국가의 틀을 만들 유일한 기회가 지금부터 10년인데, 복지 포퓰리즘으로 나라 망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이 일을 해낼 리는 만무하다. 세대 갈등은 세대 전쟁으로 비화할 것이다. 한국의 2030세대는 심각한 세대 차별을 겪고 있고, 이번 대선에서 세대별 지지후보는 40대를 변곡점으로 해서 뚜렷하게 갈린다. 만약 2030세대의 미래가 50대 이상의 표심에 의해 선택‘당한다면’ 10년 후 그들은 자신들의 우울한 현재를 기어코 선택해주었던 선배들을 힘들여 부양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객관적인 조건들이 지금보다 훨씬 나빠지기 때문에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도 훨씬 적어질 것이다. 한국 사회가 가진 희망의 크기가 작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두 번의 진정한 민주정부를 필요로 한다.

 

진정한 민주정부란 개혁과 진보의 두 바퀴로 굴러가는 정부이다. 개혁이란 투명성과 효율성, 그리고 그 결과로 얻어지는 신뢰가 핵심이다. 진보란 다른 무엇보다도 국가가 국민 전체의 삶을 제대로 보호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삶의 뿌리인 노동을 정당하게 대우하고, 언론과 사상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하며,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이 다시 한번 도전하여 공동체에 기여할 기회를 가지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진보이다. 개혁과 진보가 두 개의 바퀴가 되어 굴러가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변화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정권교체가 된다 하더라도 다른 세상이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지지 않는다. 어제보다는 조금 더 진보된 세상을 만들고, 투명하고 효율적인 개혁을 통해 그 달라진 세상에 대한 신뢰를 얻어내고, 그만큼의 신뢰를 자산으로 삼아 또 조금 더 진보된 세상을 만드는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어야 비로소 세상이 달라진다. 그래서 개혁과 진보는 함께 가야 하고, 신뢰가 없으면 세상의 진보도 없다.

 

안철수 현상이 처음 등장할 무렵인 2011년 10월30일치 <한겨레> 보도를 보면 정치세력 선호도에서 한나라당 40.0%, 제3세력 39.3%, 민주당 11.1%라는 결과가 나왔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 사람들은 안철수를 비롯한 제3세력이 민주당보다 훨씬 더 개혁적이라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개혁의 내용을 이루는 투명성과 효율성, 그리고 신뢰는 문재인보다 안철수의 자산이다. 집권 경험과 제1야당이라는 제도적 자산은 문재인의 것이다. 안철수의 개혁과 문재인의 제도적 자산이 합쳐질 때 비로소 한국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진보의 내용을 채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실패한다면 희망의 크기가 훨씬 작아진 2017년은 두 사람에게도, 혹은 제3의 후보에게도 한층 더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다. 남아있는 유일한 과제이자 유일한 희망은 두 사람의 지지층이 화학적 결합을 완결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번의 민주정부를 필요로 한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63369.html

 

 

Posted by 겟업
2013. 1. 4. 13:23

그는 스스로 기자라 자칭했지만 기자들은 그를 줄곧 '왕초'라 불렀다. 기자치고는 생긴 것이 조폭 두목인데다, 평소의 언행이 언제 어디서건 기자들의 폐부를 찌르고 위압적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발행인 고 장기영 사주를 일컫는 이야기다.

70년 초 내가 김포공항을 출입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출국 차 공항에 나타난 왕초가 출국대합실을 통과하던 중 'LADIES'라 쓴 여자 화장실 간판을 흘깃 보더니 눈빛이 바뀌었다. 하필이면 간판 중간의 I자가 빠져 있었다. 이를 본 왕초, 벽력같은 쇳소리로 공항 측의 태만과 무관심을 질타했다.

그의 탑승을 돕던 김포공항장과 항공사 지점장들의 얼굴이 순간 흙빛으로 바뀌었다. 왕초는 이어 나를 부르더니 "이봐, 그것도 하필이면 한가운데 글자가 빠졌지 않았나 말이야! 저 경우 한 가운데가 제일 중요한 부위야!"라 호통 쳤다. 그를 수행하던 공항직원들 모두가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기자들이 당시 왕초를 무서워한 건 평소 그의 엄청난 독서에 기가 질렸기 때문인데, 당시 한국일보 도쿄특파원의 고정 업무가운데는 일본에서 화제에 오른 신간이나 베스트셀러를 구입, 서울의 왕초한테 당일로 직송하는 일이 포함돼 있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던 왕초 명언과 기략은 바로 이 독서의 산물이었다. 다음은 그 명언 가운데 한 토막.

"일본 한 지방의 번주(藩主)가 다른 쪽 번주한테 서찰(書札)을 보낸다. 서찰을 품에 넣은 졸(卒)은 사흘 밤 사흘 낮을 쉬지 않고 달려, 저쪽 번주한테 전한 후 탈진상태로 죽어간다. 그러자 서찰을 받은 번주는 졸을 당장 목 베라고 호통 친다. 하루 반이면 충분히 올 거리를 사흘 걸려 왔다"는 죄다.

그러나 이 호통으로 그 졸은 살아났다는 것이 왕초의 요지다. "가만 놔두면 그 졸은 과로와 기아로 십중팔구 죽게 마련이라는 것". 목 베라고 호통치고 기압을 넣었기에 살아났다는 얘기로, 3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내겐 두고 두고 기억에 남는 사자후였다. 그는 스스로가 신문에 글쓰기를 즐겼고, 휘하의 기자를 평가하는데도 그 기자가 쓴 글로 평가했다. 심금을 울린 기사를 읽었을 경우 주석(酒席)이든 꼭두새벽이든 가리지 않고 즉석에서 전화를 걸어 그 기자를 격려했다. 이런 풍조는 자칫 기자들에게 역기능으로까지 번져 글 못 쓰는 사람은 아예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는 묘한 악습까지 낳았지만, 왕초가 그 정도로 글을 중시했다는 반증도 된다. 이 점,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와 흡사한 대목인데, 리콴유 역시 자기를 만나려는 숫한 외국 원수 가운데 그 흔한 자서전이라도 한 권 쓰지 않은 지도자는 면담대상에서 아예 제외시켰던 인물이다.

대선이 정확히 3주 후로 다가왔지만 나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정작 누굴 찍어야할지 판단을 유보한 상태다. 이 딜레마를 풀 해법이 있다면 딱 하나, 여야 후보가 쓴 수필을 단 한편만이라도 읽었으면 싶다. 사람의 분별력이 글을 통해 나타남을 왕초를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여야 후보 모두 독서를 통해 상당한 지식을 쌓은 데다, 한 후보는 퍼스트레이디를, 다른 후보는 청와대 도승지까지 역임한지라 둘 다 경륜이나 사고의 깊이 면에서도 이미 검증을 거친 걸로 볼 수도 있다. 문제는 분별력이다. 더구나 지난 6월 말 세계 일곱 번째의 '20-50그룹' 반열에 성큼 진입한 지금의 우리 입지에서 지도자가 지닐 분별력이야 말로 지식이나 경륜을 훨씬 웃도는 가장 절박한 덕목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분별력이라는 것이 글쓰기를 통하지 않고는 쉬 검증이 되지 않다는 걸 왕초는 그의 가장 협객다운 쾌변(快辯)으로 남긴 것 같다. 그 왕초의 표현대로, 지금의 한국 상황에서 '빠트려서는 안 될 제일 중요한 부위'가 바로 지도자의 분별력이라 생각이 들기에 하는 말이다.

 


김승웅 전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1/h20121130210115115780.htm

 

 

Posted by 겟업
2013. 1. 4. 13:22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올해 우리 경제성장률이 2.2%, 내년 성장률은 3.0%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얼마 전 한국은행이 하향 조정한 전망치보다 더 낮은 것이다. 지난 3분기 성장률은 전년 동기 대비 1.6%에 그쳤다. 과거에도 우리 경제가 이 같은 저성장을 기록한 적이 있으나 당시에는 오일쇼크, 외환위기, 카드사태, 글로벌 금융위기 등 뚜렷한 계기가 있었다. 지금 상황은 결정적 계기도 없이 서서히 성장이 주저앉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 경제는 이제 저성장 시대로 들어서는 것인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최근 우리 경제의 저성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추세적 성장률 하락이다. 우리 경제는 한창 활기차던 청장년의 시대를 지나 이미 초로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민주화 이후 노태우 시대 8.7%, 김영삼 시대 7.4%, 김대중 시대 6.0%, 노무현 시대 4.3%, 이명박 시대 3.0%라는 숫자가 이런 추세적 하락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 공급과 투자 증가율이 점점 둔화돼 현재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은 이미 4% 아래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순환적 요인에 의한 저성장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는 침체를 지속해 왔다. 미국·유럽에서 위기가 발생한 것은 가계·금융기관·국가의 부채가 과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기극복을 위해서는 이들의 부채 감소와 대차대조표 조정이 일어나야 하나 이것이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이들 나라에서 팽창적 재정, 통화정책으로만 위기를 극복하려 했지 근본적 구조조정은 외면함으로써 앞으로 상당기간 부채 조정이 더 지속돼야 하고 따라서 회복도 지연될 수밖에 없다. 위기 직후 세계경제를 견인했던 중국마저 최근 성장률이 크게 내려앉아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가 저성장을 면키 어렵게 됐다.

셋째, 세계경제의 구조적 성장률 하락이다. 세계경제의 고성장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분석이 최근 나오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성장에 익숙해 있지만 과거 세계경제는 정체를 지속했던 기간이 훨씬 길었다. 지난 약 200년간의 높은 성장세는 경제사적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예외다. 노스웨스턴대의 로버트 고든 교수는 세계경제가 가장 빠른 성장을 지속하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약 25년간이며 이는 19세기 초 증기기관 발명에 의한 1차 산업혁명보다 전기, 내부연소엔진의 발명, 그리고 상하수도를 실내로 끌어들여온 2차 산업혁명의 효과가 시차를 두고 인간생활에 훨씬 더 큰 변화와 생산성 향상을 가져온 때문이란 분석을 최근 내놓았다. 이에 비해 주로 정보기술(IT) 분야에 국한된 3차 산업혁명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약 10년간 생산성과 성장률을 반짝 높였으나 2차 산업혁명의 효과에는 훨씬 못 미친다고 한다. 상하수도 없는 집에서 살 것인지 아니면 페이스북 없이 살 것인지를 물으면서 그는 어느 쪽이 인간생활에 더 큰 폭의 변화를 가져왔는지 설명하고 있다. 새로운 기술혁신과 발명의 개척지가 줄어들면서 이제 세계경제의 성장세는 서서히 꺼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내·외부적 요인에 의해 지금과 같은 저성장이 지속된다면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양극화, 가계부채 등 내부적 문제가 점차 악화돼 결국 경제사회적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큰 과제다. 두 가지 측면에서 대응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경제가 잠재성장률 이하로 성장하는 것을 최선을 다해 막아야 한다. 재정 지출을 늘려 경기를 일단 부양할 필요가 있다. 지금 여야 대선후보가 모두 복지지출을 늘리겠다고 하니 이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증세를 통해 복지지출을 확대하더라도 재정 승수효과에 의해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보육, 간병, 의료 등 복지서비스 부문의 일자리를 늘려 복지전달체계와 소득분배를 개선하게 되면 사회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중장기적으로 잠재성장률의 빠른 하락을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광범위한 제도적·구조적 개편이 필요하다. 임금체계의 개선, 정년 연장과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확대를 유도해 노동 공급 하락을 막고, 교육 개혁과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를 늘려 생산성을 높여나가야 한다. 지식기반 서비스 산업의 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 지식 수준과 사회적 합리성을 제고해야 한다. 지식은 합리성 위에서만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의 체질과 구조는 과거에 비해 크게 달라졌다. 세계경제 환경도 그렇다. 이제 경제정책도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복지 확대를 포퓰리즘이라고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얼마나 성장과 분배에 도움이 되도록 설계하는지를 모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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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4. 13:16
나도 어지간히 '개그콘서트'를 즐겨보는 국민의 일원이다. 그걸 챙겨 보야야 하는 이유 가운데엔 어영부영 몇 주 건너뛰었다간 눈 뜬 소경이 되기 십상인 탓도 있다. 물론 대중문화가 언어의 생태를 좌지우지할 만큼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야 상식이지만, 개콘 만한 위력을 가진 것도 없을 것이다. 단지 몇 주 개콘을 걸렀단 이유로 말귀가 어두워져 눈만 끔벅대는 처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 별난 한국 사회의 단면 중의 하나일 것이다.

요즘 개콘에서 가장 큰 인기몰이를 하는 코너는 단연 '네 가지'일 것이다. '여배우들'과 짝을 이루는 이 신종 '자학 개그'는 통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보는 이를 시원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자신의 열등함 혹은 그들의 말을 빌자면 '없는' 것, 갖지 못한 것을 당당하게 밝히고 그게 뭐 그리 대수냐고 역설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통쾌한 기분이 없지 않다. "누굴 진짜 돼지로 아나! 오해하지마라. 마음만은 홀쭉하다"고 을러대는 개그맨의 호통은 후련하다. 그렇지만 '네 가지'의 인기를 가능케 한 세태를 생각하면 그리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는 노릇이다. 우리가 자학 개그에 열렬히 호응하기까지엔 그만한 찝찝한 사정이 없지 않을 것이다.

짐작컨대, 자학개그의 재미는 부족한 것을 가진 자들이 느끼는 주눅든 심정을 속 시원하게 해소해 준다는 데 있을 것이다. 키 높이 깔창을 신고 다녀야 하는 단신의 사내의 눈치이든, 시골 출신이라 아무래도 사투리에 신경 써야 하는 촌놈의 눈치이든, 눈칫밥을 먹고 살던 이가 외려 당당한 체하는 장면은 보는 이를 짜릿하게 해준다. 굳이 내가 그런 처지가 아닌데도 개그맨들의 넉살좋은 입심에 공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따져본다면 그것은 아마 자신을 닦달하면서 살아가게 만드는 세태에 대한 반동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열심히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자기를 키우고 다듬어 가는데 열중하든, 설령 그런 매뉴얼은 거들떠도 본 적이 없어도 스펙을 관리하고 연봉을 올릴 방안을 궁리하든, 이 모두는 '자기'라고 불리는 것을 현명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우리 시대의 윤리적인 명령과 상관이 있을지 모른다.

자기관리라고 부르는 이 윤리적인 협박은, 물론 그에 서툰 이들을 향한 혐오와 원망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 "찌질하다"란 말 자체가 암시하듯 어느새 달갑지 않은 사람은 자기관리에 허술한 인물로 바뀌고 말았다. 낯빛 좋고 몸 좋고 매너 좋은 사람은 물론 그럴 만큼 열심히 노력을 한 사람이란 대접을 받기 십상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보았을 때 건네는 말이 "자기관리 열심히 하였네요"란 걸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자기관리의 윤리가 최고의 윤리로 자리 잡았을 때, 그 윤리적 자세는 당연히 규탄해야 할 적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자기관리라는 윤리적 덕성을 위반한 못난 자들의 역은 누가 떠맡아야 할까. 그 자리를 맡을 최고의 후보는 단연 뚱보와 흡연자일 것이다.

타인에 대한 관용과 배려를 으뜸으로 치는 세계에서 은밀하게 그리고 음험하게 창궐하는 이러한 혐오와 환멸은 자신을 돌볼 줄 모르는 무능한 자를 향해 흘러들어간다. 뚱보가 왜 환멸스런 사람일까. 비만한 사람이 아름답지도 성적인 매력도 없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할 것이다. 뚱보와 흡연자는 자기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인물의 전형인 셈이기 때문이다. 뻔히 건강을 해칠 것을 알면서 극구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야말로 너무나 역력히 자기관리의 윤리를 위반하는 악인 아닐까. 그런 탓에 송구한 낯빛으로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빨다 보면, "그래, 나는 골초다"라고 어깃장을 부리고 싶은 심정이 고개를 쳐들지 않을 수 없다. 실은 자학개그의 주인공들은 '네 가지'가 아니라 '다섯 가지'여야 옳을 지도 모른다. 자기도 제대로 못 가누는 찌질한 윤리적 패배자의 이름, 골초를 덧붙여서 말이다.

 

 

 

서동진 계원예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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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4. 13:15

모든 선거판은 말싸움 판이다. 말싸움은 이름에서 시작된다. 1970년대에 경찰관 출신 박병배 씨가 총선에 출마했을 때, 상대 당은 박씨를 '박살 났다 박병배!'라고 불렀다. 언론인 출신 국회의원 박실 씨는 선거 때 '박해 받은 실력자'라고 이름을 알렸다. 이름을 이용한 홍보나 비난 사례는 수없이 많다.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반대세력은 박근혜가 '나그네'가 될 거라고 말한다. 또 나라를 보수ㆍ독재 시절로 되돌릴 것이라며 '빠꾸네'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문재인 후보를 빨갱이도 아닌 '빨괭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더하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에 책임이 있다고 문재인을 '문죄인'이라고 쓴다. 또 1주일을 '월화수목김정일'이라고 표기한 문죄인 내복까지 인터넷에 올렸다

안철수가 사퇴한 이후에는 "'안'이 안 보인다고 '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문'을 열면 그 '안'에 더 크고 넓은 세상이 펼쳐집니다."라는 말을 쓴 트위터리안이 있다. 안철수가 이미 건너온 다리에 불을 질렀다고 하자 '안철수'는 원래 절대 철수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좋아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름장난은 재미있고 기발하기도 하지만, 정작 후보들의 말솜씨는 어떤가? 한 원로 언론인은 최근 어떤 글에서 세 후보(안철수 포함) 모두 어쩌면 그렇게도 감동을 주지 못하는 연설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썼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의 두 남성 후보, 초등학교 저학년 담당 여교사가 교과서를 읽는 듯한 여성 후보, 그들은 단조로운 연설로 유권자들의 감동을 사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철수의 사퇴 회견도 감동적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지만, 그 내용에 어울릴 만한 정도의 극적 긴장과 감동까지는 아니었다. 사퇴가 일정한 격식을 갖춘 단일화의 한 과정이 아니라 정치에 갓 입문한 사람의 일방적 철수선언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목소리와 어조, 입 모양부터가 대중연설에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최근에 끝난 미국 대선을 떠올리게 된다. 오바마 대통령과 공화당 롬니 후보는 멋진 웅변 대결로 유권자들을 흥분시켰다. 특히 오바마의 랩 송과도 같은 힘찬 연설은 그가 어떻게 매력 있는 정치인이 됐는지 알게 한다. 요즘 일본에서는 하시모토 토루(橋下徹) 오사카 시장이 명쾌한 화법과 독특한 제스처로 유권자들을 끌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 때 히틀러의 연설하는 모습을 영화에서 보고 전율을 느낀 일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타계 이틀 전인 1956년 5월 3일 한강 백사장에서 사자후를 토한 해공 신익희의 연설이 명연설로 기록되고 있다.

지금은 과거와 같은 현하웅변(懸河雄辯)이 대세를 좌우하는 시대는 분명 아니다. 하지만 내용을 떠나 연설은 청중을 사로잡는 데 목적이 있는 만큼 연사는 기술과 연습이 필요하다. 타고난 목소리야 어쩔 수 없다 해도 일국의 대통령이 되려고 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유권자들에 대한 무례이며 경시행위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가끔 어법이 안 맞거나 맞춤법이 틀리는 엉뚱한 휘호로 구설수에 올랐는데, 대중연설과 휘호는 모두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해서 적확한 메시지를 던지는 효과를 거두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후보들과 그 캠프 참여자들은 말을 잘 못하기도 하고 잘못하기도 한다. 안철수 후보가 사퇴하자 새누리당은 놀라면서도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안철수의 정치쇄신 공약을 흡수하겠다고 하는데, 사퇴에 대해 아쉬움을 표시하면서 좀 어른스럽게 통 큰 논평을 할 수는 없었을까. 그런 점은 민주통합당도 마찬가지이다. 통합진보당의 행태야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웅변도, 감동도 없고 상대를 비난하는 험한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 과거나 계속 들추는 대선 판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임순철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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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4. 13:11

23일 오후, 안철수 후보 사퇴 직후. 카카오톡 문자가 하나 날아들었다. “안철수 후보 사퇴했어요.” 대학생 아들이었다. 평소 정치 얘기를 별로 하지 않는 아들이 문자까지 보낸 걸 보면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밤늦게 퇴근하자마자 아들은 안철수 얘기를 꺼냈다.

종로에서 친구들과 만났는데 갑자기 “안철수, 안철수”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 가봤단다. ‘안철수로 단일화됐나’ 하고 기대하다 사퇴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실망해 돌아서는데 옆에서 누군가 “이제 문재인 찍어요”라고 홍보하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들은 “문재인은 아닌데…”라며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들이 막상 투표장에서 박근혜를 찍을지, 문재인을 찍을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안철수 지지자들은 상당 기간 공황 상태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다.

이번 대선의 가장 큰 특징이 안철수 현상이다. 지난해 9월 서울시장 선거 이후 그의 지지율은 고공행진을 계속했다. 지금도 안철수가 문재인을 지지하느냐 마느냐에 정치권이 목을 매고 있다. 이런 안철수 현상은 안철수가 만든 것일까. 아니다. 안철수가 아니어도 안철수 현상은 있었다. 안철수 현상은 우리 사회, 특히 젊은이들에 잠재된 불만이다. 안철수가 그것을 들어주고 달래주는 ‘힐링’을 통해 드러냈을 뿐이다. 안철수가 사퇴하건 말건, 누구를 지지하건 말건 기존 정치권이 변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제2의 안철수가 나오게 돼 있다.

안철수 현상은 왜 생겼나. 한마디로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통계청의 10월 고용동향을 보자. 전체 실업률은 2.8%지만 청년(15~29세) 실업률은 6.9%다. 청년 실업률만 늘어나는 추세다. 청년들은 그 숫자보다 훨씬 더 불안하다. 20대 고용률이 57.0%. 43개월 만의 최저치다.

1997년 외환위기 때와 비교해도 중산층이 74%에서 67%로 줄었다. 빈곤층은 두 배로 늘었다. 그마저 전체 근로자의 3분의 1이 비정규직이라 고용돼 있다고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97년 0.264에서 지난해 0.313으로 나빠졌다.

물론 이런 양극화 현상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가 몸살을 앓는 현상이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기존의 사회 질서, 기득권층, 특히 이런 체계를 만들어온 정치권에 대해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자본주의는 위기를 거치며 발전해 왔다. 1차 위기는 마르크스의 경고와 혁명의 위협을 받으며 넘겼다. 그 과정에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새로운 보호조치들이 따르고, 복지에 눈을 떴다. 그러나 경제가 세계화하고, 지식형 산업이 주도하게 되면서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절실하다.

아이는 아프면 울음을 터뜨린다. 치료를 해야 하는 건 분명하다. 그렇다고 의사가 아이가 원하는 대로 진통제만 처방할 수는 없다. 가진 자에 대한 증오나 재벌 때리기가 당장은 후련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게 해서 일자리가 생기고, 분배 구조가 안정될 수 있을까. 미래에 대한 비전과 큰 그림 없이 내놓는 사탕발림 공약은 진통제에 불과하다.

지난해 가을 안철수와 함께 청춘콘서트를 다니던 시골의사 박경철을 만났다. 그는 안철수를 대통령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 대통령이 집권하면 경제는 더 어려워집니다. 기존 체제로는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민주당이 집권해 진보세력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면 나라가 곧 거덜 납니다. 그러면 정권을 내놓고 30년간은 진보세력이 집권할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국민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집권해 국민에게 고통을 나누자고 호소해야 합니다.”

성장동력을 살려내 일자리를 만들고, 양극화를 완화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선거판에 그는 보이지 않았다.

안철수 현상이 안철수를 통해 터져 나온 건 기존 정당에 대한 실망 때문이다. 힘들게 하는 사회구조를 만든 사람들이다. 이것을 뒤집어 달라는 요구다. 기존 정당은 국민보다는 정파, 국가의 미래보다는 권력 쟁취에 매달렸다. 새로운 비전도 없이 상대방을 헐뜯어 이기려 했다. 결선투표제를 도입해서라도 제3 후보에게 길을 열어줘야 하는 이유다.

기존 정치권은 안철수 현상을 보면서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단일화 협상조차 세력 간 권력투쟁으로 몰아갔다. 옳다고 생각해도 상대 당에 이익이 된다고 판단되면 반대했다. 이념 과잉이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제주 해군기지가 그런 꼴이다. 안철수 현상은 새로운 안철수를 기다린다. 차기 대통령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다면 우리에겐 행운이다.

 

김진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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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4. 13:08

“국민 여러분. 남북은 그동안 비밀리에 정상회담 개최를 논의했습니다. 우리는 평양에서의 정상회담 뒤 국군포로 납북자 10명 이상의 고향방문 또는 송환을 요구했지만 북측은 ‘일단 평양에 오면 우리 장군님이 잘 알아서 해 주실 것’이라는 모호한 약속만 되풀이합니다.”

2009년 10월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이 김양건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과 싱가포르에서 만나 연내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양해각서(MOU) 초안을 들고 왔지만, 다음 달 실무조건을 논의하던 당국 간 개성 회담이 결렬됐을 때 이명박 대통령이 위대한 소통의 리더십을 발휘해 이런 대(對)국민 기자회견을 열었다면 어땠을까.

이 대통령이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의 의사에 반해 북에 살고 있는 우리 국민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고향 구경을 시켜 주고 싶습니다. 제가 휴전선을 넘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어봤다면 ‘별 성과가 없더라도 잘 다녀오라’고 했을 국민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북한 최고지도부를 대화의 테이블에 앉히고 변화를 요구했더라면….



지난해 12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고 북한 지도부가 남측의 조문을 요구했을 때 이명박 대통령이 동양 특유의 ‘조문정치’를 활용했더라면 어땠을까. 류우익 통일부 장관을 정부 조문사절로 보내거나 원하는 모든 민간인의 조문을 허용한다고 ‘통 큰’ 화답을 했더라면 북측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유일 독재자의 사망이라는 정변이 난 판에 남한 사람들이 평양에 한꺼번에 몰려오면 체제가 위험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북한 지도부는 ‘미안하지만 다 오시면 대접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니 (평소 장군님이 좋아했던) 누구, 누구누구만 들어오시면 좋겠다’고 꼬리를 내렸을 것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 있던 ‘진정한 종북(從北) 좌파’의 실체를 확인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올해 6월 4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공개통첩장을 내놓으며 남한 7개 주요 언론사의 좌표를 공개하고 미사일 공격 위협을 했을 때는 어떤가. 남한의 자유 언론이 자신들의 지도자에 대해 곱지 않은 표현을 일부 썼을지언정 청와대와 정부중앙청사, 국회가 있는 서울 광화문과 여의도에 밀집한 언론사들을 미사일로 공격하겠다는 위협은 비록 공갈일망정 대한민국에 대한 선전포고 그 자체였다.

책임 있는 당국자들이 당시 상황을 전쟁 선포로 규정하고 상응하는 ‘군사적 대응 공갈’로 맞받아 북한에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면 북한도 한국 정부를 다시 봤을 것이고 국민들 마음도 든든했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이명박 정부 5년의 남북관계를 돌이켜보면 아쉬운 대목이 적지 않다. 북한은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에 쫓기면서도 대화와 도발의 ‘이중전술’ 시계추를 빨리하며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다. 대북정책의 일관성을 훼손하더라도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회복하겠다던 이명박 정부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근본 원인은 체제 차이에 있다. 독재자가 마음대로 대남정책을 이랬다저랬다 할 수 있는 북한과, 위정자가 국민의 동의를 받아야 뭐든 할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다르다. 하지만 북한의 변화와 바람직한 통일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이제 우리에게도 ‘한국판 이중전술’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다음 정부 대통령과 대북정책 수장(首長)은 대화와 도발의 카드를 양손에 들고 북한을 뒤흔드는, 좋게 말해 ‘영리한’, 좀 거칠게 말해 ‘사악한’ 전략가일 필요도 있어 보인다.

신석호 국제부 차장

 

 

http://news.donga.com/3/all/20121129/51174858/1

 

 

Posted by 겟업
2013. 1. 4. 12:19

얼마 전 연달아 만났던, 배우자 간병을 맡고 있는 70대 남자 어르신들의 인상을 한마디로 말하라 한다면 ‘순정남’이라고 하겠다.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랬다.

순정 다 바치는 70대 남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77세 P 씨였다. P 씨는 파킨슨병과 치매를 앓고 있고 의식마저 불분명한 아내(73)를 10년째 혼자 돌보고 있었다. 다행히 외부 정보에 밝고 주변의 도움도 잘 받아들이는 편이어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작되자마자 등급판정을 신청해 1등급을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방문요양서비스(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1일 4시간)와 방문간호(1주일에 1회)를 받고 있었다.



이 시간 외에는 P 씨 혼자 아내를 돌보는데 수발이 얼마나 극진한지 방문간호사가 “환자가 이런 상태로 10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 자체가 기적 같다. 이 모든 게 할아버지의 지극 정성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더 대단한 것은 병든 아내를 돌보는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아내 옆에서 쓰기 시작한 붓글씨로 각종 상을 휩쓸었고, 요즘엔 심사위원으로 활동할 정도라고 한다. 수지침과 뜸 기술도 익혔고, 책(비망록)도 2권이나 출판했다.

P 씨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다 보니, 주변에서 요양시설 입소를 권유하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있지만 P 씨는 “마지막까지 집에서 아내를 돌보고 싶다”라고 말한다. 아내가 집에 있어야 보고 싶을 때 마음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내가 그에게 “요양시설로 매일 찾아가시면 되지 않느냐”라고 하자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집하고는 다르지요. 안사람을 잠시라도 못 보면 못 견딜 것 같아요.”

어르신들의 집을 직접 방문하여 등급판정 조사를 하는 건강보험공단 직원이나 재가(在家)서비스를 담당하는 사회복지사들에 따르면 P 씨 같은 분이 많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배우자에 대한 70대 남자 어르신과 여자 어르신의 태도가 매우 대조적이라는 점도 지적한다.


마지못해 의리 지키는 여자

 

남자 어르신 중에는 배우자가 누워 있는 침대 옆 바닥에 자리를 깔고 자면서 수발을 하는 등 정성을 다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자 어르신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오히려 거동이 불편한 남편 앞에서 “내 몸도 힘들어 죽겠는데 저 인간 수발까지 해야 하느냐?”라고 넋두리를 퍼붓거나 노골적으로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고, 심지어 남편이 누워 있는 방에 들어오는 것조차 꺼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순정을 다 바치는 남자 어르신’과 ‘마지못해 의리를 지키는 여자 어르신’이라는, 우리의 고정관념과는 사뭇 다른 남녀 관계의 반전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러나 정말 심각한 문제는, 70대 남자들의 ‘순정’이라는 게 매우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순정남의 두 얼굴이랄까?

요즘 세간에 충격을 준 뉴스를 장식한 70대 남자 어르신들을 보라. 치매에 걸린 아내를 살해한 사람은 78세의 남편이다. 얼마 전에는 72세 어르신이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열두 살 난 외손자를 살해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다. 뇌성마비 아들을 두고 고생하는 딸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들은 살인이라는 강력범죄의 가해자이면서도 ‘오죽하면 그랬을까?’라는 동정심도 자아내는 게 사실이다. 끔찍한 행동의 이면에 ‘치매 아내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라거나 ‘사랑하는 딸을 위해 외손자를 데리고 간다’라는 식의 ‘책임감’과 ‘사랑’의 논리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책임감은 과도할 뿐 아니라 시대에 맞지 않는 ‘가부장적’ 책임감이다. ‘파괴적’이고 ‘빗나간’ 사랑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인권에 대한 인식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든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서 소중하고 고귀하다는 사실, 아프고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도 성장의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남편이나 부모(조부모)라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자기만의 잘못된 논리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뇌성마비 외손자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만났던, 20대 중증 장애인 아들을 둔 한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장애인 부모가 모두 똑같이, 매일 힘들기만 할 거라는 생각도 일종의 편견이지요. 그 할아버지는 그런 엄청난 행동을 하기에 앞서서 반드시 딸의 생각을 물었어야 했습니다.”

자기만의 城에 갇힌 파괴적 사랑

우리나라 70대 어르신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오늘날의 경제성장을 이끈 집요함과 고집, 성실성을 가진 세대라는 점에서 존경받아야 한다. 그러나 결핍의 시기를 겪어 오느라 노화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변화나 삶의 위기에 대해 성찰하는 ‘유연성’이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묻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필요하다면 도움을 청하는 ‘사회성’이 매우 부족한 세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제 아무리 대단한 순정이라 할지라도 자신만의 생각에 갇혀 있는 사랑은 누군가의 삶을 피곤하게 하고 심지어 생명까지 위협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70대의 ‘순정’이 위험한 이유이다.

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

http://news.donga.com/3/all/20121129/51174956/1

 

 

Posted by 겟업
2013. 1. 4. 12:18

『티핑 포인트』 등의 저서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맬컴 글래드웰은 2년 전 흥미로운 글 한 편을 잡지 ‘뉴요커’에 발표했다. ‘혁명은 왜 트윗되지 않을까’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은 21세기의 이른바 트위터 혁명을 1960년대 흑인민권운동과 대비시킨다. 필자는 후자가 강력한 연대에 바탕을 뒀던 반면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느슨한 연대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익명의 선의를 집결하는 활동이라면 몰라도,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사회적 혁명은 SNS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흔히 ‘아랍의 봄’ 같은 혁명에 SNS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과 상반된 시각이다.

이 글을 처음 접한 건 어느 대학 강의실에 청강하러 갔을 때였다. 담당 교수는 굳이 양자택일을 하자면 글래드웰의 반대편에 설 사람이었는데, 학생들의 필독 자료로 이 글을 제시했다. A4 용지로 9쪽 분량의 짧지 않은 글이다.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는 흑인민권운동의 일화와 배경은 물론 자신이 반대하는 주장 역시 풍부하게 소개했다. SNS의 사회적 영향을 토론하는 데도, 그와 다른 생각을 발전시키는 데도 도움이 되기에 충분했다.

SNS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지는 둘째치고 정보의 유통 속도와 확산 방식을 몰라보게 바꿔놓은 건 분명하다. 대선후보 단일화 과정에서도 그랬다. 안철수 후보가 사퇴를 발표한 직후 문재인 후보의 반응은 그의 트위터에서 가장 먼저 확인됐다. 하지만 SNS의 짧은 글이 수시로 촉발하는 논란의 양상은 이번에도 씁쓸했다. 안철수 후보 사퇴 직후 한 연예인은 트위터에 ‘종북’이라는 단어를 섞은 반응을 올렸다 도마에 올랐다. 두둔할 생각도, 나무랄 생각도 없다.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곤 여느 사람들처럼 TV에서 보여준 연예활동이 전부다. 그런데도 집중포화 같은 반응이 빚어지는 건 역시나 놀라운 현상이다. 트친(트위터 친구)이나 페친(페이스북 친구)이 아니라 실제 친구 사이, 친구가 아니라도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하는 자리였다면 같은 경우라도 다른 방식으로 대화가 이어졌으리라고 본다.

얼마 전 아는 이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 ‘좋아요’를 눌렀다가 이내 후회했다. 아주 소중한 그 무엇을 잃고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을 담담하게 표현한 글이었다. 읽는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뭐라도 공감을 표하고 싶었다. 그래서 행동에 옮긴 일이라고는 습관처럼 글 하단의 ‘좋아요’를 누른 것뿐이다. 그때의 심경은 결코 좋지 않았다. ‘나도 슬퍼요’ ‘마음이 아파요’라고 댓글까지 적기가 무안했고, 다시 ‘좋아요 취소’를 누르기도 민망했을 따름이다.

SNS는 광장에서 확성기를 잡지 않고도, 매스미디어에 등장하지 않고도 의견을 전파하는 길을 넓혔다. 하지만 여전히 광장에서 풀어야 하는 일이, 140자의 단문을 쓰고 올리는 것보다 긴 시간을 들여야 할 일이 더 많은 게 인간사다.

 

 

 

이후남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020860&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3. 1. 4. 12:15

누구에게 한 표를 던질 것인가?

 

27일 0시를 기해 대선 레이스의 막이 올랐다. 주자는 7명이다. 새달 19일, 대한민국 유권자는 선택해야 한다. 대다수는 박근혜나 문재인 중 한 사람에게 표를 던질 것이다. 사표일망정 ‘제3의 후보’에게 마음을 주거나, 아예 선택을 하지 않는 이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존중받아야 한다. 문제는 선택의 잣대다. 어떤 ‘감별’의 기준으로 선택을 할 것인가, 그것이다.

 

병아리 감별에도 나름의 관찰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하물며 대한민국호의 선장을 뽑기 위한 감별이다. 그 기회를 헌신짝처럼 버리거나, 아무렇게나 할 수는 없다. 누가 진정 이 나라를 이끌 대통령감인지, 누가 우리 사회를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 인물인지를 가려내는 정성이 필요하다. 좋은 사회, 좋은 나라는 절로 오는 법이 없다. 외모, 느낌, 인격, 공약(정책) 등 저마다의 기준으로 눈을 부릅떠야 한다.

 

나는 그 감별의 잣대로 가장 먼저 ‘인권 감수성’을 들고 싶다. 인권은 모든 것의 대전제다. 시대정신보다 앞자리에 놓인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일자리와 성장 등 우리가 추구하는 정책과 방향은, 궁극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들일 뿐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는 세계인권선언 제1조의 정신에 누구의 삶이, 누구의 행동과 말이 가장 잘 부합하는지, 또 누구의 정책이 그것을 잘 보장하려 하는지, 그것을 따지면 된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 참정권은 물론 노동권, 교육권, 건강권, 주거권 등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인 ‘사회권’의 제도화를 위해 누가 가장 힘쓸 것인가?

 

둘째로 꼽고 싶은 감별의 기준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다. 누가 민주주의에 충실했고, 누가 민주주의를 더 심화시킬 것인가? 민주주의는 부당한 권력으로부터 시민을 지켜주는 한 사회의 주춧돌이다. ‘야만의 체제에 대한 거부’다. 따라서 그것은 투표행위만이 아니다. 경제적 위협과 공포로부터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보장하는 이념이며, 내 삶과 일자리를 결정하는 구체적인 체제이기도 하다. 성장이란 이름으로 결코 저울질할 수 없는 게 자유와 민주주의다. 민주주의가 유토피아를 만들지는 못해도 민주주의 없이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정당정치의 미성숙, 낡은 선거제도 등으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심각한 결함을 지니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 우리는 집회 및 시위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이른바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퇴행할 수 있음을 체험했다.

 

그래서 세번째 감별의 눈이 필요하다. 누가 민주주의의 심화를 위해 시민의 참여를 보장하고 그들과 더불어 하려고 하는가? 누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결함을 치유하고 그것을 뿌리내릴 대안과 능력을 갖고 있는가? 곧 복지와 민주주의가 만나는 복지민주주의를 누가 이룰 것인가? 민주주의의 발전은 인권의 발전이며, 그 제도화가 복지다. 자본주의 체제 속 민주주의는 시민(주체)의 참여와 복지(국가) 없이는 지속하기 어렵다. 민주주의를 유지·발전시키는 건 시민의 참여이며, 복지는 민주주의 심화의 지렛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민주주의 체제나 결함 있는 민주주의 체제의 복지 수준은 뿌리내린 민주주의 체제의 복지수준을 능가할 수 없는 것이다. 인권, 민주주의, 복지는 실상 감별과 선택의 잣대 이전에 우리 사회와 시민이 지키고 가꾸어 나가야 할 우리 시대의 핵심 ‘가치’다. 스무날 남짓한 선거운동 기간, 이 세 가지 눈으로 다시금 후보들을 꼼꼼히 살펴보자. 최종 선택은 물론 자유다.

 

 

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소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62833.html

 

 

 

 

Posted by 겟업
2013. 1. 4. 12:06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다.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무 심하다.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얘기다. 박근혜 후보는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은 집권여당 후보다.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어린 나이에 청와대에 들어갔던’ 사람이다. 전직 대통령의 딸이다. 품격이 있어야 한다. 그의 입에서 그렇게 강퍅한 표현이 나올 줄은 몰랐다.

“안철수 후보가 구태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한다. 문재인 후보와 민주당 구태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짧은 두 마디지만,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지지층의 틈을 벌리려는 정략적 의도가 번뜩인다. 불과 이틀 전 방송기자클럽 토론에서 안철수 전 후보에 대해 “현실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을 하는데 해결책은 국민들께 물어봐야 한다고만 한다. 민생위기와 세계경제위기 상황에서 국민들이 안심하고 맡길 수 있겠나”라고 비판했다. 이제는 안철수가 쓰러졌으니 문재인만 잡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안철수 전 후보에 대한 태도 변화는 그렇다고 치자. 문재인 후보는 이제 박근혜 후보의 경쟁자다. 12월19일 둘 중 한 사람이 다음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서로 품위를 지키며 예우해야 한다. 포용과 아량은 보수의 기본 덕목이다. 더구나 박근혜 후보는 문재인 후보를 구태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집권 전인데도 박근혜 후보와 가까운 인사들이 비리 혐의로 재판을 받거나 기소되고 있다. 박근혜 후보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안철수 후보의 좌절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저를 포함해 기존 정치인들이 잘못해서 나타난 것이 안철수 현상이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겸허히 수용하겠다. 앞으로 문재인 후보와 당당하게 정책 대결을 펼치겠다.”

 

오히려 문재인 후보가 그와 비슷한 말을 했다. 25일 후보등록 기자회견에서다.

“이제 박근혜 후보님과 일대일 맞대결 구도가 됐는데 정말 정정당당하게 좀 선의의 경쟁을 하자는 말씀을 드린다.”

누가 보수 정당의 후보인지 헷갈린다. 박근혜 후보는 도대체 왜 그렇게 살벌한 것일까? 새누리당 사람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렇다.

“온화한 겉모습과 달리 가슴속 한켠에는 적의가 가득하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 감사에 익숙하지 않다. 특히 자신과 가족, 측근들에 대한 비판이나 공격을 참지 못한다. 일종의 피해망상증이다. 보좌진이나 친박 인사들도 일단 ‘내 편’이라고 판단되면 무조건 감싼다. ‘의리가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라는 표현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박근혜 후보가 읍참마속을 한 일이 있던가? 없다. 나이가 12살이나 많은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꿇어앉히기 위해 ‘부하’ 9명을 데리고 출동한 ‘조폭 누님’ 같은 행태도 그런 증상의 일종일 것이다. 김종인 위원장의 ‘재벌 로비’ 발언으로 발끈했다고 한다. 권력자의 피해망상은 독선으로 표출된다.

 

옛날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바로 그랬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조금치도 인정하지 못했다. 야당을 적으로 대했고 빨갱이로 몰았다. 권위에 도전한 여당 국회의원들조차 중앙정보부를 시켜서 두들겨팼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야당의 존재를 인정하긴 할까? 장관들이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는 얘기를 꺼낼 수 있을까? 걱정이다.

 

그래도 박근혜 후보 개인의 자질은 이명박 대통령에 비하면 괜찮은 편이다. 박근혜 후보는 그 나름대로 애국심이 있는 사람이다.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공과 사를 구분할 줄도 아는 것 같다. 하지만 대통령은 혼자 할 수 없다. 박근혜 후보의 진짜 문제는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그래도 상대적으로 괜찮은 사람들이 이명박 후보 쪽에 줄을 섰다. 지금 박근혜 후보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괜찮지 않은’ 사람들이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자리와 권력에 대한 욕심에 눈이 번들거린다. 공인 의식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이 사람들이 정권 실세가 되면 나라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정말 걱정이다.

 

 

 

성한용 정치부 선임기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62384.html

 

 

 

 

Posted by 겟업
2013. 1. 4. 12:05

시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누구에게나 하루 24 시간이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지만, 정작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그 시간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사회적 경쟁이 격화되고 경제적 보상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상황에서, 개인에게 사적으로 허용되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경쟁에서 이겨내기 위해서 남들보다 더 일해야 하고,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과거보다 더 많은 시간 동안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입시에 비유하자면, 입학의 경쟁률과 시험의 난이도가 동시에 치솟는 형국이다.

개인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주관적 시간이 감소함에 따라, 관심 분야의 책을 읽고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은 그에 비례하여 줄어들 수밖에 없다. 올해를 문화체육관광부가 독서의 해로 선포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불행히도 책은 사람들로부터 점차 외면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일만 하는 바보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책을 펼칠 여유를 잃어버린 대신,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지식의 또 다른 소비 형태를 끊임없이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우리들이 찾아낸 것은 소위 '강의' 이다.

확실히 최근 눈에 띄는 문화적 흐름 중의 하나는 '강의 열풍' 이다. 그리고 이 열풍의 진원지에 인문학 강의들이 있다. 기업과 정부 부처에서, 그리고 백화점과 구청 문화센터에서 다양한 인문학 방면의 강의들이 넘쳐나고 있다. 텔레비전도 하루 종일 경쟁적으로 유사한 강의들을 방송하고 있다. 바야흐로 강의의 시대이다. 글을 쓰는 사람들도 이제는 필자라는 말보다는 강사라는 말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 우선 수입 면에서 볼 때도 강의 몇 번이면 책을 내서 받는 어설픈 인세를 상회하고도 남음이 있다. 많은 이들이 책 집필 보다는 강의에 집중하고 있으며, 책을 출간하더라도 강사로서 자신의 지명도를 제고하고자 하는 경우가 아주 많아졌다. 물론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원고와 외롭게 몇 달간 씨름하는 것보다 청중들 앞에서 그 반응을 즐겨가며 마음껏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는 것이 훨씬 신나는 일임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렇게 모두들 강의를 찾아나서는 것은 그것이 무엇보다 빠르고 효율적이고 즐겁기 때문이다. 두 시간 남짓 귀를 기울이는 일만으로 르네상스 미술의 흐름을 잡어내고, 서양 철학사에서 자유의 의미의 변천을 이해하며, 바그너의 음악 세계 전체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얻을 수 있는데, 이 보다 더 매력적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만일 이런 주제들에 대해서 책을 골라 읽는다면, 강사가 전해주는 그 명쾌한 결론들을 스스로 알아낼 방법도 없거니와, 설사 찾아낸다고 해도 아주 수고롭고 고단한 독서의 과정을 거친 후일 것이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서, 당신이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두 시간 동안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고 하더라도, 강의실을 나서는 순간, 그것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한 줄기의 바람에도 산산이 흩어져버릴 수밖에 없다. 누가 내 귀에 넣어준 지식은 근본적으로 나의 지식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덧없이 다른 쪽 귀로 흘러 내려 빠져나갈 뿐이다. 그것은 나의 생각 혹은 나의 언어로 다시 작동될 수 없다. 내가 스스로 구축해낸 지식만이 내 지식이며 나에게 힘을 주는 지식이다. 자전거를 잘 타려면, 자전거를 끌고 나가 직접 안장에 올라탈 일이다. 자전거의 생김새와 구조에 대한 강의를 여러 번 들어도 자전거를 능숙하게 탈 수 있게 되지 않는다. 문제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자신이 직접 그 문제와 부딪혀 씨름해야 한다.

물론 훌륭한 강의들을 듣는 것은 언제나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거기에서 답을 찾았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어느 정도 공부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문제이다. 인문학 강의를 듣는 일은 식당에서 메뉴판을 읽는 일과 비슷하다. 강사는 매력적인 설명을 통해서 어떤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는지, 각 음식들의 맛은 어떠한지, 어떤 음식을 권하고 싶은지 이야기한다. 그 다음 당신이 할 일은 직접 그 음식들을 맛보는 일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책을 펼쳐야 한다. 그리고 아주 느린 속도로 거대한 문제들과 당신 혼자의 힘으로 힘겹게 오랜 시간 동안 씨름해야 한다. 그래야 생각의 힘이 자란다. 세상의 어떠한 감동적인 강의도 책과 힘겹게 씨름한 저 세월들을 대신할 수는 없다.

 

 

 

김수영 로도스출판사 대표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1/h20121126210022121760.htm

 


 

Posted by 겟업
2013. 1. 4. 11:58

레드 기획] 1<레미제라블> 필두로 <안나 카레니나> <위대한 개츠비> 등 고전소설 영화 붐… 자본주의 막장서 ‘근대’ 통찰하려는 욕구

 

 

마지막 노래가 울려퍼졌다. “사람들의 노래가 들리는가/ 분노한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이것은 민중의 음악/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으리라는 자들의 목소리/ 그들의 심장 뛰는 소리가/ 북소리가 되어 울려퍼질 때/ 이제 곧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테니/ 내일이 오면.”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개봉 8일 만인 2012년 12월26일 밤 12시를 기점으로 관객 수 200만 명을 넘겼다. 1862년 원작 소설이 처음 출간됐을 때부터 일주일 만에 1쇄가 모두 팔리며 독자를 서점 앞에 줄 서게 했다는 작품은, 150년이 지나서도 뮤지컬·연극·영화 등 다양한 장르로 변주되며 관객을 불러모으고 있다. <레미제라블>을 필두로 2013년은 고전 속 불행한 이들이 스크린에 자주 등장할 참이다. 소재 고갈은 언제나 고전의 귀환을 부르지만 올해 영화로 다시 쓰이는 고전소설들은 유독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와 그 시절을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비극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작품이 많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개봉을 앞두고 있고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는 현재 제작 중이다. 장발장부터 개츠비까지 주인공은 작품 속에서 이미 죽고 사라졌지만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자꾸만 반복하며 무엇을 찾으려는 것일까.

 

 

결박된 민중의 삶, 노래 가사 결결이

대사의 대부분이 노래로 전달되는 송스루(Song Through) 전개 방식의 뮤지컬 영화는 국내에서 흥행한 경우가 드물다. 장르적으로 익숙지 않은 관객이 많아 호불호가 갈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레미제라블>의 흥행은 주목할 만하다. 국내 배급사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코리아의 한 관계자는 <캣츠>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등 걸출한 뮤지컬을 제작해온 캐머런 매킨토시의 1985년작을 원작으로 한 대작이라는 점, 휴 잭맨, 러셀 크로, 앤 해서웨이, 어맨다 사이프리드 등 화려한 출연진이 흥행의 이유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닌 것 같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떠도는 관객들의 평을 살펴보면, 사람들은 프랑스혁명기를 살아가는 <레미제라블>의 비극적 인물들을 보며 강퍅한 우리 현실을 겹쳐 보는 듯하다. 이미 뮤지컬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던 <레미제라블>의 노래가 온라인 음원 사이트 멜론에서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하는 등 새삼 다시 회자되는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결박당한 민중의 삶은 노래 가사 결결이 전달된다.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쳤다는 이유로 5년의 징역형을 받고 탈옥을 시도하다 14년의 형을 더 받은 장발장이 감옥에서의 마지막 부역을 마치고 풀려나는 순간 “자유는 내 것이고, 세상은 그대로다/ 바람을 느끼고, 비로소 숨을 쉬네”라고 노래하지만 그를 감시하는 자베르는 “너는 언제나 노예, 여기는 너의 무덤이나 마찬가지”라고 응답한다. 가석방이 된 장발장의 신분증에는 ‘위험 인물’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해 만들어진 자비 없는 법 앞에서 가난하고 초라한 시민은 무력하다. 장발장은 자신에게 처음으로 따뜻한 음식을 내주고 은촛대를 훔쳐도 눈감아준 주교의 베풂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며 신분증을 찢어버리고 바뀐 이름으로 새 삶을 산다. 공장을 짓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 명성을 얻으며 시장이 된다. 그러나 장발장이 변하는 사이 세상은 변하지 않은 듯하다. 장발장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강퍅한 현실에서 이런 노래를 부른다. “하루가 끝날 무렵 날은 더욱 추워지고/ 걸친 옷으로는 추위를 버틸 수 없네/ 귀하신 분들 서둘러 길을 떠나고/ 그들은 어린아이의 울음을 듣지 않네/ 겨울은 우릴 죽일 작정으로 맹렬히 다가오고/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지네.” 동료들의 오해와 질투로 공장에서 쫓겨나 새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딸을 살릴 돈을 구하려고 성매매 여성이 된 노동자 판틴은 “인생은 살아볼 만하다고/ 사랑은 영원하다고/ 신은 자비로울 것이라고 믿었네/ 하지만 잔혹한 현실은 한밤중에 천둥소리를 내며 들이닥쳤네”라고 절규하듯 외친다.

 

 

사실주의 문학 대표하는 고전들

자본에 포획되고 가난으로 궁지에 몰리는 2013년의 한국 민중의 현실은 ‘일을 해도 더욱 추워질 뿐’인 영화 속 인물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관객은 19세기 프랑스 시민들의 삶에 지금의 삶을 투영했다. 영화평론가 황진미씨는 이렇게 말했다. “들여다보면 영화는 공권력이 민중을 억압하는 시절, 아주 전형적인 근대 시민혁명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부분을 환기해보는 것이 우리에 게 의미 있을 것이다. 특히 대선 정국을 지나온 이 시점에 서 불현듯 다가오는 혁명의 추억, 그걸 보는 심정은 만감 이 교차할 테고, 힘겹게 얻은 자유를 어떻게 다시 번복하 게 된 걸까 하는 슬픔…. (관객은) 시민으로서 혁명군과 의 동일시를 통해 미묘한 카타르시스, 슬픔 등을 느꼈을 것이다.” 덧붙여 “경계에 있는 사람들까지 품을 수 있어 야 시민혁명이다. 우리가 선거를 통해 이뤄야 했던 것이 무엇인가. 시절의 엄중함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반성과 고민이 들게 한 영화”라고 평했다.


문학에서 사실주의가 부각되던 시기는 정치·사회적 으로 격동의 시기였다. 문예사조에서 낭만주의가 점차 쇠퇴하며 당대의 현실 문제를 직접 맞서 고민하는 새로 운 문학 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사실주의 문학의 출발이다. 개봉을 앞둔 <위대한 개츠비>(바즈 루어만 감 독,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캐리 멀리건 주연), <안나 카레 니나>(조 라이트 감독, 키이라 나이틀리·주드 로 주연), 현재 제작 중인 <마담 보바리>의 원작 모두 공교롭게도 19~20세기 사실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고전으로 손꼽 힌다.

세 편의 영화가 소설의 줄거리 중 무엇을 뽑아내 강약 을 조절할지는 개봉 이후 명확히 드러나겠지만 확실한 공통점은 모두 인간 군상을 통해 드러나는 시대의 속성 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에 서 개츠비·데이지·뷰캐넌·윌슨의 사랑과 질투, 오해가 엇갈리는 가운데 두드러지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인들의 삶을 실감 나게 묘사한 장면이다. 피츠제럴 드가 그리는 1920년대 미국은 눈부신 경제성장이 이뤄 지는 시대다. 주가가 뛰고 기업 이익이 유례없이 증가하 는 가운데, 주인공들은 늘 사치스러운 파티를 열고 값비 싼 차를 몰고 다닌다. 그러나 소설은 이들의 화려한 일상 에 스며든 부패와 타락, 물질적 탐닉에서 비롯한 삶의 공 허함을 놓치지 않는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을 이어나가던 안나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던지고 젊은 장교 브론스키와 격렬한 사랑에 빠진다. 톨스토이는 이들의 이야기를 축으로 결혼과 가족 제도, 계급, 종교 등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구조와 여기서 비롯 된 문제들을 꼼꼼하게 짚어나간다. 150여 명의 등장인 물을 통해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를 관통하던 문제인 농노제의 붕괴, 관료 조직의 부정부패 등을 깊이 있게 묘 사했다. <마담 보바리>에서 주인공 에마는 마을의 시골 의사 샤를 보바리와 결혼하고, 결혼 전 그려왔던 낭만적 삶과는 거리가 먼 권태로운 결혼 생활에서 새 삶을 갈구 하다가 여러 남자들의 정부가 된다. 이로 인해 생활이 무 너지고 엄청난 빚을 지게 돼 절망에 빠진 에마는 음독 자살을 하고, 샤를은 남은 딸을 거두며 에마가 남긴 빚 을 갚으며 살려고 노력했지만 파산 지경에 이르러 결국 생을 포기한다.

 

 

우리가 그동안 얻은 것은 무엇인가

100년이 넘도록 읽히고 수차례 영화화하며 변주되는 고전이지만 요약해보면, 어쩌면 신문의 한 조각에서 봄 직한 이야기들이다. 따져보면 실제 <레미제라블>도 1801 년 프랑스의 한 가난한 농부 피에르 모랭이 빵 한 덩이를 훔쳐 4년의 징역을 받았다는 신문의 단신 기사에서 출발 했다. 바꿔 말해 현실을 가장 세밀하게 반영한 것이 가 장 극적인 문학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 영화계는 사실주의 문학을 스크린 에 복기하는 것일까. 영화평론가 황진미씨는 이런 흐름 과 관련해 “근대를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가 있는 듯하다. 자본주의의 막장을 지나고 있는 지금, 그래서 우 리가 그동안 얻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고민에서 출발해 근본적으로 통찰해보려는 욕구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 다. 덧붙인 설명은 이렇다. “동아시아의 경우 민주주의 니 시민사회니 하는 것을 이루려고 애써 살아왔으나 결 국 돌아온 것은 세습 정권이다. 서구에서는 2008년 자기 들이 만든 자본주의라는 구조 안에 결국 갇혀버리고 말 았다. 신념이 무너지고 파국이 임박했다는 것을 느끼고 사람들이 결국 바이블을 찾는 심정이 된 것이다. 그런 점 에서 이 모든 것의 출발이 된 근대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는 고전을 찾는 것이다.”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의 책머리에 이렇게 썼다.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 1885년 눈을 감은 작가는 모를 것이다. 시대의 울적함과 삶의 명암을 담은 고전들 이 21세기에 진입하고 한참이 지나고도 여전히 읽히고, 심지어는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모든 인물이 나타나 더 크고 견 고하게 세워진 바리케이드에 모여 노래 부르는 마지막 장 면에 눈물 흘리고 용기를 얻는 민중이 이토록 오래 역사 에서 반복된다는 사실도.

 

 

신소윤 기자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36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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