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맘때부터 지금까지 내 주변에서 세 사람이 목숨을 끊었다. 죽음의 이유는 모두 달랐다. 하지만 자살이 세간의 어느 이야기가 아닌 내 삶에 파고든 현실이라는 점에서 그 무게는 하나같이 무거웠다. 더 이상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마지막에 처했던 상황에 감정이입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맞닥뜨린 것은 그들이 느꼈을 고독이었다. 외로운 인간은 죽을 수 있다는 말이 기억났다.
‘어느 영구임대아파트의 자살 행렬’이라는, 몇 달 전에 실린 <한겨레> 기사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다. ‘영구임대아파트’는 그들의 경제적 곤궁을 보여주지만, 가난이 정작 무서운 것은 그것이 가져오는 고독일 것이다. 물론 모든 고독을 경제적 문제로 환원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살아갈 힘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사실은 저마다의 고독을 달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비용을 지출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면, 고독과 비용이 갖는 그 밀접한 상관관계를 완전히 부정하기도 어렵다. 내 경우가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나는 만 서른다섯, 미혼의 자영업자다. 거의 매일 혼자 밥 먹고, 혼자 일하고, 혼자 잠자리에 든다. 그러나 이 상황이 그렇게 외롭지는 않다. 아이패드가 있고, 시간을 보낼 만한 게임 앱 구매에 비용을 지불하기도 한다. 한달에 책 서너권을 사서 읽고, 취미에 지출도 하고 있으며, 온종일 제대로 대화 한번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는 퇴근길 아는 선배의 술집에 들른다. 남들은 이런 생활을 ‘여가’라고 부르지만 내게는 외로움을 달래는 것이고, 불행히도 그 모든 행동에는 돈이 든다. 내가 고독을 달래려고 지출하는 비용, 여기에 난 ‘고독비용’이란 이름을 붙였다.
우리 대다수의 고독비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독은 기본적으로 관계의 문제라 이런 땜질식 비용 지출이 외로움의 근본적 해결방안이 될 수는 없다. 문제는 우리가 이미 관계의 형성과 유지에도 상당한 비용을 요구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를 부양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부모를 찾을 수 없고, 자식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부모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재력과 능력은 결혼의 필수 조건이 되어 아파트 전셋값을 마련하지 못한 내 친구는 아직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있다. 번듯한 직업이 없다는 이유로 모임을 기피하며 홀로 방 안에 틀어박히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돈은 이미 가족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관계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
영구임대아파트의 자살 사건은 관계 유지 비용이 없는 사람들의 고독 문제다. 그들은 가난했고,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다. 일면식조차 없는 사람들의 죽음을 이렇게 논하는 것은 불경스런 일이 될 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담고 있는 이 사건을 애써 외면하는 분위기에 동조할 수도 없다. 이 사건을 보며 복지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본다. 복지란 주린 배를 채워달라는 동물적 요구가 아니라, 우리를 외롭지 않게 해달라는 인간으로서의 요구다. 우리가 자살률 수위의 국가에서 살고 있는 것은 우리 주변의 고독을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외로움의 고리를 끊는 데는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사적 영역의 의무일 수만은 없다. 복지가 우리의 고독에 관심을 가질 때, 이 불편한 한국 사회의 복지 체계가 조금은 더 새롭게 변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56356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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