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도 교수에게 연락을 하는 학생들이 있다. 더이상 내 지도를 받는 게 아니니 연락하지 않아도 되는데 가끔씩 안부를 묻는 전화나 메일을 보내 오곤 한다. 그들로부터 그런 연락을 받을 때마다 나는 진심으로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들과의 관계가 단순히 학점을 따고 주는 학생과 강의자의 관계로 끝나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인간적인 맺음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함이 밀려온다. 지금까지 내가 그냥 헛되이 살지는 않았구나 하는 마음까지도 든다.
지난달에는 예전에 지도했던 크리스라는 학생을 만나 점심을 함께했다. 가르쳤던 학생들 중에서 유독 총명하고 성실한 학생이었는데, 뉴욕에 있는 직장에 들어가 넥타이 정장 차림의 번듯한 사회인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번 돈으로 내게 밥을 대접하고 싶다는 의젓한 말을 하는 크리스가 얼마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이 친구가 어디를 가나 사람들한테서 인정받고,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고, 하고자 하는 일들이 무탈하게 이루어지길 마음속으로 소원하였다.
그런데 지난주에는 이와 반대의 상황을 경험했다. 지금 내가 수업을 하는 미국 대학은 학생 수가 적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큰 대학에 비해 학생 한명 한명에게 쏟는 교수들의 관심도 깊고 공부나 진로 관련 상담시간도 많은 편이다. 그런데 그런 시스템에 익숙해진 몇몇 학생들이 교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기도 한다. 그중 한 여학생이 나와의 상담시간을 정하는데, 예정된 시간에는 어려우니 자신이 편한 시간으로 맞춰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다. 물론 사정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니 처음에는 내 스케줄을 옮겨가면서까지 학생이 원하는 시간에 상담을 진행했다. 하지만 그러기를 몇 차례, 이제는 아예 그것이 당연하다는 태도를 보인다.
그 학생의 사정이라는 것은 ‘너무 바빠서’였다. 그 이메일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자기만 바쁜가?’ 하는 소리가 마음속에서 올라왔다. ‘배우는 학생이 노력을 해야지, 어떻게 자기 편한 시간에 맞춰달라고 교수에게 매번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나? 참 예의가 없다.’ 이런 괘씸한 마음이 들면서 그 학생을 향한 내 마음의 문이 점점 닫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그 학생에게 더는 내 스케줄을 옮겨가면서까지 시간을 변경해줄 수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이메일로 답신을 하고 나니, 속이 시원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혹시 메일을 열어 보고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회신도 한동안 오지 않았다. 그러니 기다리는 내내 내겐 이 일이 불편한 마음의 흔적이 되어 남아 있었다. 차라리 이번 상담도 내가 괜한 자존심 세우지 말고 마음을 좀 넓게 써서 학생이 원하는 시간에 진행했더라면 그것으로 끝이었을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나 좋으라고 한 일이 나를 참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람의 행복은, 우리가 홀로 고립된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경험을 했을 때 깊어진다. 그리고 마음공부라는 것도 알고 보면 고행이나 철학을 연마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순간순간 우리 마음이 닫히는 것을 느낄 때 나 자신을 낮추어 그 문을 다시 열려는 노력이다. 졸업한 학생의 연락을 받으며 나와 그들이 지금도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때, 그리고 순수하게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랄 때 나의 마음은 완전히 열려 있고 따뜻하고 행복하다. 반면 내게 ‘예의 없이’ 구는 학생들에게 좀더 인내하지 못하고 마음의 문을 너무 쉽게 닫아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야말로 내 마음공부를 위해 나타난 진정한 스승들인데 말이다.
혜민 미국 햄프셔대학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6206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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