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15. 22:15

2007년 한 토론회에서 이명박 대통령 후보에게 물었다. 공식적인 전과 기록이 만만치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학생들은 무엇을 보고 배울 것인가? 대답은 간단했다. ‘그래도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낫다.’ 더 이상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 뒤 4년 반 동안 이 사회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기막힌 일들이 숨가쁘게 터졌건만, 좌절과 고통의 비명들이 곳곳에서 들려왔건만, 나는 식물인간처럼 살고 있었다. 촛불광장의 뜨거운 열기를 급냉동시켜버리는 몸으로…. ‘냉소주의’로 비난받아도 상관없었다. 따져 묻지도 않았고, 분노하지도 않았다. 침묵은 길어졌다. ‘정치’라는 이름으로 사회를 농락하고, 역사를 비웃고, 자폐증 환자들을 양산하는 놀음들에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살아야 했다. 최소한의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서.


‘안철수’는 생소했다.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미래를 저당 잡힌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또 하나의 ‘신바람’ 정도로 가볍게 넘기고 싶었다. 어차피 이 땅의 ‘정치’는 그 어떤 것이든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릴 테니까. 역겨운 패거리 싸움들만 난무하게 될 테니까. 더 큰 절망만 주면서도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소모전으로 끝날 테니까. 그래도 한구석 궁금은 했다. 큰마음 먹고 생전 외면해온 예능 프로에 눈을 돌렸다. 설사 웃음과 이미지 선전을 위한 프로였다고 해도, 가식과 진면목을 구별할 수는 있었다. 안철수는 ‘인간성’, ‘진정성’에서 큰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사람’ 그 자체를 믿게 하는 진지함도 느껴졌다. 장인정신으로 엄청난 열정과 공을 들이고, 개인의 이름보다는 미래에 유용하게 쓰일 ‘어떤 흔적’을 남기는 것에서 의미를 찾아왔다고 했다. 그의 행적에서는 삶과 역사를 대하는 보기 드문 신중함과 성실함이 묻어났다. 지금까지 ‘사람’이 문제로 드러나곤 했던 바로 그 지점들에서 안철수는 거꾸로 ‘사람이 희망’임을 보여주었다. 반가웠다.


그런데 그 ‘희망의 사람’이 무참하게 짓밟힐까봐 걱정이 된다. 그러나 한편 그가 정치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는 걱정보다는 정치권이 사람에 대한 희망을 또다시 저버리게 할 수 있다는 우려가 훨씬 더 크다. 정치권이 ‘희망의 사람’을 외면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희망 자체를 버리는 ‘식물정치’를 지속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단칼에 내치는 것은 ‘쇄신’과 ‘수혈’을 공허하게 외치는 정치권을 정당화하는 것일 뿐이다. 이는 권력놀음이 아닌 장인정신으로 걸작의 공동체를 만들어보겠다는 사람들을 영원히 추방시켜버리겠다는 것과도 같다. 이 문제가 더 엄중하다.


그래서 안철수가 고맙다. 사람과 정치를 새로운 희망으로 만드는 역사적 실험에 자신을 바치려는 아주 큰마음을 먹고 있기에 든든하기만 하다. 그가 후보로 나선다면, 그 정치판은 불가피하게 기성정치와는 완전히 다른 문법과 상상력을 담아내야만 할 것이다. 지금까지 희망을 주는 사람들이 정치판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면, 바로 그 때문에 안철수가 절대로 필요하다. 진작에 폐기처분되었어야 할 현실정치의 횡포로 새롭게 태어나야만 할 미래정치의 소중한 싹들을 잘라버리게 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 약자를 배려하고 사람의 가치를 드높이고 사람과 소통하는 정치를 창조하는 지난한 작업에 감히 도전해보겠다는 그 의지를 꺾지 말자. 그는 지금 국민에게 절박하게 묻고 있다. 진정 정치를 살리고 싶은가를.



이영자 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4487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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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2:11

최고경영자(CEO) 후보가 100명이라면? 자질만 갖췄다면야 나쁠 게 없다. 오히려 인재가 넘쳐흘러 좋은 일이다. 잘되는 기업엔 인재가 즐비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KT는 앞으로 크게 성장할 것 같다. KT 안팎에 ‘백인회’가 있으니까. 오랜만에 만난 이석채 KT 회장. “마지막 봉사라는 심정으로 일한다”며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백인회가 나를 흔들고 있습니다.”

KT CEO가 되고 싶은 100명을 일컫는 말이다. 그만큼 회장 자리를 원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었다.

CEO 후보가 많기로 유명한 기업은 GE다. 사업부마다 매니저와 리더급 이상 가운데 두세 명씩 의무적으로 후계자로 선정된다. 리스트에 들어간 인재들은 집중 관리 대상으로 분류돼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다. 잭 웰치는 1994년 23명의 후보를 검증했다. 4년 뒤 여덟 명으로 압축하고, 그해 연말 다시 세 명을 추렸다. 이후 완벽에 가까운 경영능력 평가를 했다. 2001년 최종 낙점된 사람은 당시 45세의 제프리 이멜트. 강성욱 GE코리아 총괄대표는 얼마 전 필자와의 점심식사 때 GE의 기업문화를 이렇게 표현했다.

“People first, strategy second.”

사람이 우선이고, 전략은 그 다음이란 얘기다.


조선왕조 역사에서 여러 명의 왕 후보가 나선 때가 명종이 후계자를 고를 무렵이다. 명종은 왕비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가 있었다. 그러나 열세 살 때 병으로 사망했다. 명종은 다른 왕과 달리 후궁도 한 명밖에 두지 않았는데, 그나마 아들이 없었다. 후사가 없자 과음하는 일이 잦았다. 조그만 일에도 벌컥 화를 내며 내관들을 벌주기 일쑤였다. 결국 위로 거슬러 올라가 왕 후보를 찾아야 했다. 그중 선택된 후보들이 중종의 7남 덕흥군의 세 아들이었다.


어느 날 명종은 이들을 대궐로 불렀다. 왕은 정무를 볼 때 머리에 쓰는 익선관을 벗어 “너희들의 머리가 큰지 작은지 알아보려고 하니 써보아라”고 권했다. 위의 두 형은 아무 생각 없이 썼다. 막내 하성군은 “이것이 어찌 신하 된 자가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라며 어전에 도로 갖다놓았다. 얼마 뒤 명종은 위독할 때 하성군을 불러 간병케 하면서 후계구도를 암시했다. 하성군이 바로 조선 14대 왕 선조다. 영리한 그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왕권을 거머쥔 것이다. 하지만 선조는 최악의 임금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당쟁과 왜군 침입을 불러일으킨 무능한 군주로 낙인찍혔다.

국가 CEO, 대통령을 뽑는 작업이 한창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대선 후보로 나선 숫자가 제법 된다. 저마다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어 지켜보는 국민은 즐겁다. 반대로 누굴 찍어야 할지 헷갈린다. 이럴 때는 대통령이 돼선 안 될 사람부터 솎아내 보자. 말하자면 ‘선조형’ 후보를 골라내는 것이다. 대통령으로서의 자질도 없이 머리 회전과 눈치만 빨라서야 나라를 망칠 가능성이 매우 크니 말이다. 명종이 후계자를 선택할 상황은 누가 차기 왕이 돼야 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되지 말아야 하느냐가 더 중요한 순간이었다.

IBM을 비롯한 세계 정상급 기업들은 입사 인터뷰보다 퇴사 인터뷰를 보다 중시한다. IBM의 한 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임직원들이 회사를 떠날 때는 거의 퇴사 면접을 봅니다. 만약 퇴사자가 재입사를 원할 경우 받지 말아야 할 사람을 구별해내기 위해서입니다. 매니저는 해당자에게 X 표시를 해두죠. 그 사람은 다시는 못 돌아옵니다.”

전 세계가 위기다. 차기 대통령은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될 것이다. 기업 CEO들 역시 절체절명의 순간에 당면할 것이다. 잘나갈 때라면야 모르겠지만 요즘 같아서는 기교만 부리는 리더는 곤란하다. 나라를 도탄에 빠뜨리고 기업을 망하게 한다. 누구를 뽑을지보다 누구를 뽑지 말아야 하느냐가 더 요구되는 시기다. 100명의 KT CEO 후보와 십 수 명의 대통령 후보에서 ‘하성군들’을 걸러내야 할 때다. 유능한 후보들이 많이 경쟁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영 아닌 사람부터 GE처럼 솎아내고 IBM같이 X표 치고 볼 일이다.



정성구 산업부장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8901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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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2:01

유신 때 만들어진 긴급조치들은 하나같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력하고(수업거부를 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조항이 있다), 믿을 수 없이 뻔뻔스럽고(긴급조치에 의한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비판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지만(유신헌법의 개정을 주장하면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수색하여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역시 백미는 고려대학교에서 집회나 시위를 하면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조항이 아닐까 한다.


언젠가 잡지에 연재하던 칼럼에 이 조항을 인용했더니 오타가 아니냐는 반응이 많았다. 독재정권이 대학교에서 데모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 수는 있었겠지만 설마 특정한 대학을 꼭 집어서 그 학교 교내에서의 집회·시위를 처벌하는 규정을 두었겠느냐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이 촌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인 조항은 1975년 4월8일 제정된 긴급조치 7호에서 찾을 수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은커녕 서글플 정도로 상식에 맞지 않는 법이 존재하던 때가 유신시절인 것이다.


이미 폐지된 지 오래된 긴급조치 얘기를 꺼내게 되는 것은 5·16에 대한 몇몇 인사들의 언급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분들은 “쿠데타가 아닌 군사혁명”이라고 하거나, “우리 사회에 혁명적인 변화를 줬다. 쿠데타이면서도 동시에 혁명이다”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현역 군인들이 총칼로 정권을 탈취했다는 점에서는 쿠데타로 보아야 하지만, 그 후 산업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는 부정적인 평가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유신을 낳은 5·16에 대해서 이런 평가를 하는 것이 어떻게 보수주의와 통할 수 있는지 지극히 의문이 든다.


보수와 진보를 구별하는 기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보수주의를 전통적인 가치와 권위를 존중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보수주의자들은 대체로 절대적 진리 혹은 선의 존재를 믿고 현존하는 통치체제와 법질서를 긍정한다. 철학적으로 불가지론적 성향을 가진 진보주의자들이 기존 질서의 전복을 꿈꾸는 데 비해서 보수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체제 내에서 해법을 찾으려고 애쓴다. 나는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러한 사고방식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해 강한 믿음을 가진다는 점에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용기있는 행동일까. 겁에 질려 미지의 해안으로 달려가는 것인가. 아니면 그전부터 가치있었고 아마도 앞으로 영원히 가치있을 것들을 위해 제자리를 지키는 것인가.” 이 말처럼 보수주의자가 가질 수 있는 긍지를 잘 표현한 것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쿠데타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어떻게 ‘그전부터 가치있었고 앞으로도 가치있을 것들을 지키는’ 행동이 될 수 있을까.


새는 양 날개로 난다는 진부한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진보와 보수는 때로는 서로 대립하고 때로는 서로 조화하면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제시할 수 있는 두 개의 유효한 시각이다. 어느 한쪽이 완벽한 해답을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편협한 생각이다.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강력한 진보가 필요한 것만큼 건강한 보수가 필요하다. 선거에 의해 구성된 정부를 폭력으로 전복하고 법질서를 근본부터 부정하는 쿠데타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보수를 자임하는 모습은, 고려대학교에서 집회를 하면 처벌하겠다는 ‘법’을 보는 것만큼 슬픈 일이다.



금태섭 변호사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447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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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1:58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보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약한가를 실감케 하는 일화가 나온다. 어린 주인공 마르셀은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작가가 좋아하는 여배우 베르마의 연극 공연을 관람하지만 실망한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 식탁에서 연극 관람평을 솔직하게 털어놓지만 아버지와 식사에 초대된 손님 노르푸아 씨는 베르마의 연기에 대해 온갖 수식어를 동원하며 극찬한다. 

다음 날 신문에서도 베르마의 연기를 극찬하는 평이 실린다. 결국 마르셀은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 베르마의 연기를 극찬하고 다니게 되는 것이다. 애초에 가졌던 평가를 주변 사람들의 평가가 바꾸어 놓은 셈이다. 

이런 예는 미술과 문학, 건축 등 다른 예술 작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이 읽은 소설이 처음엔 실망스럽다고 느꼈다가 평론가들이 극찬해 마지않는 것을 보면서 평가를 바꾸고 그 소설이 명작이라고 선전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한국의 명작 소설로 꼽히는 작품 중에도 이런 소설이 꽤 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에 대해 처음에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자꾸 부정적인 평가를 하게 되면 애초에 가졌던 인상을 버리고 사람들의 평가를 따른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어떤 경우에는 한 사람을 향한 미움이 그 대상을 미워할 이유가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로 전염된다. 심지어 그 대상과 안면도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미움이 전염된다. 

조직력이 강할수록 집단적으로 한 사람에 대한 미움을 순식간에 전염시킬 수 있고 그 영향력은 대단하다. 소위 집단 감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을 희생양 삼아 자신들의 조직을 유지하려고 하는 저의가 강하면 강할수록 미움의 심도는 깊어지고 전염 속도는 빨라지는 법이다. 특히 종교단체에서 그런 수법들을 많이 쓰는 것을 보게 된다. 심각한 지도자의 과오를 한 회원에게 뒤집어씌워 집단 따돌림을 함으로써 조직을 견고히 해나가는 것이다. 

공자 선생은 ‘논어’ 위령공편에서 말하기를 ‘중호지필찰 중오지필찰(衆好之必察 衆惡之必察)’이라고 했다. 뭇사람이 좋아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봐야 하고 뭇사람이 미워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봐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나 매스컴들이 명작이라고 떠들고 베스트셀러라고 떠들어도 자신이 반드시 살펴본 후에 판단을 내려야 하듯 아무리 다른 사람이 누구를 크게 칭찬하더라도 자신이 반드시 살펴본 후에 판단을 내리는 게 좋다. 제품 구입에서도 이런 원칙을 적용하면 남들이 좋다고 해서 무조건 사들이는 쓸데없는 낭비를 줄일 것이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 누구에 대한 악소문을 내고 다니더라도 자신이 반드시 살펴본 후에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진위를 판단하기 힘들 때는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 말아야 한다. 

최근 SBS ‘힐링 캠프’에 출연한 고씨 성을 가진 두 여배우가 터무니없는 악소문에 시달린 일화를 털어놓았다. 제주도 출신인 중견 여배우는 너털웃음으로 웃어넘겼지만 또 한 배우는 그때 상처가 되살아나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화려하게 보이는 인기 여배우들에 대한 시기심 등이 보태져서 악소문들은 날개를 타고 금방 퍼져 나간다.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면 상대방이 받게 될 상처가 얼마나 클 것인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악소문은 번져 나가고 미움을 전염시키는 바이러스로 활동하게 된다. ‘중호지필찰, 중오지필찰’의 자세를 가질 때 근거도 없는 미움을 퍼뜨리거나 그런 미움에 전염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성기 소설가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http://news.donga.com/3/all/20120728/481198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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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1:51

모든 의견이 반영된 결정은 혼란과 오류를 낳을 수 있고 창의적 신제품 개발 어려워
다른 목소리 듣는 건 중요하나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면 곤란… 혁신은 '독단적 결정'에서 나와


광고회사에서 일한다고 하면 흔히들 "연예인 많이 만나겠네요"라며 호기심 어린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정작 내가 자주 접하는 사람은 늘 중요한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최고경영자(CEO)들이다. 30년간 광고 일을 하면서 수많은 CEO들의 의사결정 과정을 지켜봤다. 벤처기업·중소기업·대기업·공기업 등 기업의 규모와 성격에 따라서, 그리고 기업인·관료·군인 등 출신에 따라서 다른 성향을 보였다. 이처럼 CEO들의 다양한 의사결정 과정과 그 결과를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제는 CEO의 의사결정 과정과 행태를 보면 그의 역량과 결과물의 운명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됐다.

사람들은 대체로 CEO의 독단적 결정보다 민주적 의사결정이 더 바람직하다고 믿는 성향이 있다. 민주적 의사결정을 중시하는 CEO들은 광고를 제작할 때 이른바 '광고위원회'라는 것을 구성한다. 홍보, 영업, 마케팅, 제품개발자, 외부 자문교수, 임원, CEO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발된 위원들이 각자가 의사결정에서 행사할 수 있는 지분만큼 발언하고 영향을 미친다. 절차적으로는 매우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결과까지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광고회사가 열심히 준비한 4~5개의 광고안을 광고주 회사의 CEO를 포함한 광고위원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나면 잠시 침묵이 흐르고 사장이 입을 연다. "돌아가면서 의견을 말씀해보세요.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말해주세요." 이어 연령대별로, 분야별로, 직급별로 돌아가면서 느낌과 의견을 얘기한다. 그 후 CEO는 표결로 결정하자고 말하고 표결을 통해 그중 한 개의 안(案)이 채택된다. 마지막에 CEO는 "아까 나온 얘기들을 잘 반영해서 모두가 좋아하는 광고를 만들어 주세요"라고 말하고 박수를 치며 프레젠테이션은 끝이 난다.

모든 의견이 반영된 결정은 모든 의견을 채택하는 것과 다름없다. 광고에서 모든 것을 말한다는 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광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이비드 오길비는 "사공이 많은 위원회를 상대로는 좋은 광고를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민주적이란 미명 아래 기계적인 다수결로 의사결정을 하면 큰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는 특히 창의적인 의사결정이 필요한 광고나 신제품 개발 때 더욱 그렇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애플에 위원회가 몇 개나 있을 것 같나요? 하나도 없어요"라고 말했다. 다수의 평범한 의견보다 자신의 통찰력을 믿고 의사결정을 내렸기에 지금의 애플 신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도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성공한 광고들은 통찰력 있는 CEO의 '독단적 결정'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최근 기업에서 '열린 소통'이 강조되고 있다. 의사결정을 내리기 전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의사결정 자체를 남에게 맡기는 것과 의사결정 과정에서 남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세상이 변화하는 방식마저 바뀔 정도로 경영환경은 급변하고 미래는 불투명하다. 이러한 시대에 민주적 의사결정이란 대체로 안정적인 선택이 될 가능성이 크다. 변화와 혁신을 즐기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시장조사 자료에 의존한 의사결정을 한다든가 위원회식 다수결로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는 것은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밝히는 데 바람직하지 않다. 광고뿐 아니라 기업경영에서 다수결로 결론을 내는 것은 잘못된 결과로 이어지거나 누구도 의사결정에 책임을 지지 않는 자기도피에 가깝다.

펩시콜라의 전 CEO 로저 엔리코는 "가장 좋은 것은 올바른 결정이고, 다음으로 좋은 것은 잘못된 결정이며, 가장 나쁜 것은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올바른 결정의 바탕에는 CEO의 창의적인 판단력이 있고, CEO의 창의적인 판단은 끊임없이 통찰력을 쌓아야 가능하다. CEO 자신이 통찰력이 없다고 생각되면 통찰력을 가진 전문가에게 의사결정권을 과감히 넘겨주어야 한다.

아직도 통찰력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의사결정을 내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것이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리더라고 생각하는 CEO가 있다. 그런 방식이 직원들에게 혼란을 가중시킨다는 사실은 모른 채 항상 최선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으며, 더불어 직원들의 존경과 인기도 따라올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런 CEO를 볼 때마다 "인기는 리더십이 아니다"라고 한 피터 드러커의 말이 생각난다.



고영섭 오리콤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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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1:47

특파원 3년간 한국에 큰일이 일어날 때마다 ‘미국에선?’ 하고 들춰보곤 했다. 그때마다 ‘환경과 시스템이 너무 달라 비교가 힘들다’고 손을 놓았던 적이 많다.


한국에 다녀온 한 미국인 친구는 가장 이색적인 것으로 두 가지를 꼽았다. 사람들이 다 똑같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음주운전 검사 장면이다. 한국인들에게 ‘다양성이 부족하다’는데, 어릴 때부터 다양한 인종을 접하며 자연스레 다양성을 체득하는 미국인과 다 커서 의식적으로 다양성을 이식하려는 한국인은 출발선부터 다르다. 그런데 미국에선 다양성이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한국보다 훨씬 더 심각한 소득불평등 상황을 겪고 있지만, 갈등은 덜하다. 인도식 운명론을 받아들이는 건 아니지만, 소득불균형마저도 ‘그는 그, 나는 나’라는 사고가 영향을 끼친 듯하다. 그러니 ‘한국인들도 미국인처럼 여유를 가져라’고 하는 게 옳은 일일까?


미국에 살면서 느낀 또다른 하나는 미국인들이 매우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황무지에서 ‘나 스스로’ 삶을 개척해야 했던 선조들의 피가 녹아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광우병 소가 발견됐을 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알지도 못했지만 “한마리 아니냐”며 확률을 들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미국은 ‘위험 감수’(risk taking) 사회다. 위험성을 줄여 불편하게 살기보단, 위험을 감수하고 편하게 살기를 원하는 쪽이다. 미국 스키장을 가면 양쪽 귀퉁이에 안전울타리를 설치해 놓은 곳이 많지 않다.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다. 스키장이 워낙 커 안전울타리를 촘촘히 설치할 수 없다. 대신 워낙 넓어 일부러 귀퉁이로 가지 않으면 떨어질 가능성이 작다. 귀퉁이로 가 떨어지면 ‘자기 책임’이다. 이를 좁은 한국 스키장에 적용할 순 없다.


음주운전 검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미국인 친구는 “한 명의 음주운전자를 색출하기 위해 수백, 수천 명이 차를 세워야 한다”며 “매우 잘 훈련된(disciplinary) 사람들 같다”고 했다. 음주운전 사고를 감수하고서라도 그 불편을 겪지 않는 쪽을 미국인들은 택한다. 이런 ‘독립성’은 정부에 대한 기대도 낮춘다. “국민을 성공시키겠다”, “행복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식의 거창한 구호보다 “세금을 깎아주겠다”, “의료보험료를 내리겠다”는 식의 약속이 더 소구력이 큰 이유다. ‘메시아 대통령’을 기다리지도, 정부가 ‘모든 것’을 책임지라고도 않는다. ‘내가 스스로 사는데 귀찮게 말라’는 게 공화당이요, ‘내가 스스로 살지만, 힘드니까 조금 도와달라’는 게 민주당이다. 이를 한국에 적용해 ‘미국인처럼 스스로 살겠다는 마음을 가져라’고 하는 게 옳은 일일까?


경제부에서 자동차업계를 취재할 때, 산지가 많은 한국은 코너링 좋은 소형차 위주의 유럽형이 더 맞는데, 장거리 운전에 적합한 서스펜션(승차감)과 대형차 위주의 미국형 모델이 먼저 도입된 게 은근히 아쉬웠다. 한국의 사회모델도 거대한 영토, 풍부한 자원, 이민자로 구성된 미국이 아닌, 유럽이 더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엉뚱하게 미국에서 해본다.


사족. 워싱턴에서 버지니아주로 향하는 66번 고속도로는 오후 4시부터 6시30분까지 ‘나홀로 차량’은 진입금지다. 이때가 퇴근시간이기 때문이다. 미국을 떠나면서, 그래도 가장 닮고 싶은 모델 하나가 이 ‘저녁이 있는 삶’이다.


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4336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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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1:44

문재인 후보의 미소는 충혈된 눈을 감추지 못했다. 손학규 후보의 웃는 얼굴도 평소와 달리 어색했다. 김두관 후보는 아예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해찬 대표가 “정권”을 외치자, 8명의 후보들이 주먹을 쥐고 “교체, 교체, 교체”라고 합창을 했다. 카메라 플래시 소리가 요란했지만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23일 국회 민주통합당 대표실에서 열린 대선후보 공명선거실천 협약식은 그렇게 15분 만에 끝났다.


민주당이 질식사 위기에 처했다. 두 개의 바위에 눌려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세론’과 ‘안철수 현상’이다.


비극은 2010년 6·2 지방선거, 2011년 4·27, 10·26 재보궐선거 승리에서 비롯됐다. 야권연대만 성사시키면 총선 승리와 정권 교체가 가능하다는 낙관론이 판을 쳤다. 연말 연초 시민통합당과 합당에 성공하고 정당 지지율이 한나라당을 추월하자 총선·대선 승리는 기정사실화됐다. 기득권 세력의 견고한 카르텔과 박근혜를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는 ‘근거 없는 비관론’으로 비판을 받았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그게 세상의 이치다. 민주통합당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제 정파는 배지에 눈이 멀어 밥그릇 싸움을 벌였다. 그사이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꿨고 ‘경제 민주화’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총선 결과는 투표일 한참 전에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민주당이 총선에서 패배한 뒤 정당 지지율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대선주자들도 문재인 후보만 겨우 10%대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을 뿐 김두관·손학규 등은 한자리에 머물고 있다. 민주당은 이제 끝장난 것일까? 아닌 것 같다.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다. 그게 세상의 이치다. 중요한 것은 언제 바닥을 치느냐일 것이다. 지금 민주당 대선주자들은 절박하다. 문재인 후보가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지 못하거나, 안철수 원장에게 야권후보를 넘기게 된다면, 또는 본선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패한다면, 대한민국에서 ‘노무현 정치’는 최종적으로 실패하는 것이다. 어쨌든 문재인 후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계승자이기 때문이다.


김두관 후보도 갑갑하기는 마찬가지다. 지금처럼 지지율 답보로 허덕이다가 경선에서 지게 된다면, 경남지사 자리만 여당에 헌납하고 그 책임을 몽땅 뒤집어쓰게 될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 재기가 어려울 것이다. 손학규 후보도 이번에 실패하면 대통령 꿈을 접어야 한다. 그가 평생 쌓아온 경륜이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 마지막이라는 얘기다.


민주당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서 열린다. 정치생명을 담보로 건 이들의 절박감이 민주당을 살릴 수 있다. 절박감에서 열정도 나오고 아이디어도 나온다. 런던올림픽과 휴가철이 끝나고 민주당 순회경선이 본격화하는 8월 말~9월 초가 되면 지금과 분위기가 달라질 것이다. 대선 전에 한두 차례 지지율 교차를 예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런데 새누리당에서는 정반대 흐름이 잡힌다. 총선 승리에 취한 박근혜 후보는 지키려고만 한다. ‘지금 이대로 주욱’이 전략인 것 같다. 경선규칙을 양보하지 않은 것, 이한구 원내대표를 주저앉힌 것이 이런 맥락이다. 심지어 5·16 쿠데타를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했다. “다시는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바란다”는 아버지의 인식에도 못 미친다. 비난이 쏟아지자 “저처럼 생각하는 국민도 많다”고 했다. 국민들과 싸우겠다는 자세다. 텔레비전에 비치는 얼굴 표정도 좀 살벌해졌다.


오만과 방심은 패배로 귀결된다. 1997년과 2002년 한나라당이 정권을 놓친 이유가 그것이었다. 최근 강남의 눈치 빠른 유권자들이 “박근혜 되긴 되겠어?”라고 걱정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박근혜 후보와 다른 맥락이지만, 안철수 원장의 한계도 보인다. 안 원장은 “제가 정치에 참여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제 욕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아니다. 정치 참여는 개인이 욕심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다. 안 원장의 말에는 수동형이 너무 많다. 정치의 본질은 능동이다.


성한용 정치부 선임기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4386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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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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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1:42

며칠 전 연세가 있으신 내 어머니뻘 되시는 분께서 내가 최근에 진행하는 마음치유 콘서트에 오셔서 물었다. “최근에 암 판정을 받았는데요, 제가 지금 너무 외롭고 죽음이 무서워요. 스님, 저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말씀하셨다. 그 질문자께 마이크를 드렸는데 그분은 양손을 부들부들 떨고 계셨고 목소리와 얼굴엔 두려움과 슬픔이 가득하셨다. 아, 뭐라고 말씀을 올려야 하나? 그 순간 머리가 하얗게 비고 솔직히 무슨 지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나의 몸은 한걸음 한걸음 그분 가까이 가고 있었고, 그분 앞에 서자 어머니 같으신 그분을 꼭 껴안아드리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한참을 서서 그분을 붙잡고 같이 엉엉 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파서 울었고, 그분이 내 어머니와도 같아서 또 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조금 진정이 되면서 그분께 “괜찮아지실 거예요, 괜찮아지실 거예요”를 몇번 되뇌면서 다시 강연석으로 돌아왔다. 주변을 보니 또 많은 분이 붉어진 눈시울을 닦고 계셨다. “그래요, 우린 몸이 있는 이상,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어요. 안 그래요? 누가 조금 일찍 가고 조금 늦게 가고의 차이일 뿐이에요. 사실 저도 생사문제 해결하려고 승려가 되었어요. 그런데 있잖아요, 한가지만 좀 기억해 주세요. 우리는 절대로 혼자가 아니에요. 힘들고 외로운 순간 나 혼자뿐이라고 생각이 되어도 내 주위를 가만히 살펴보면 나를 항상 아껴주고 걱정해주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있어요. 그렇지 않은가요? 그리고 혹시 성당이나 교회에 다니신다면 항상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껴보세요. 우릴 어느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사랑하시는 그분이 계셔요. 혹시 절에 다니신다면 내가 어려울 때 자비하신 관세음보살님을 생각하면 바로 그 순간 관세음보살님도 우리를 생각하시고 걱정하세요. 정말이에요. 틀림없어요. 그러니까 혼자가 아니에요. 너무 무서워하지 마세요.”


그분만을 생각하고 입을 열기 시작하니 나도 모르게 말이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점을 꼭 기억해 주세요. 우리 현대인들은 병이 없는 채로 오래 사는 것이 아니고요, 병이 있어도 그 병을 잘 관리해 가면서 오래 사는 것이에요. 예전에 미국의 어느 신문에서 읽었는데요, 현대인들이 예전 세대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산다고 해요. 그런데 그 이유가 예전부터 있었던 병이 없어져서가 아니고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병들을 잘 관리해 가면서 오래 사는 법을 알아서 그렇대요. 누구나 크고 작은 병을 가지고 살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병을 잘만 관리해 가면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 살 수 있어요. 이 점이 통계로 나왔어요. 그러니까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고 용기를 내세요.”


감사하게도 청중들을 살펴보니 모두 머리를 끄덕이시며 아주 주의 깊이 듣고 계셨다. “마지막으로 종교가 있으시면 이렇게 한번 기도해 보세요. ‘언제나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사랑하심과 불보살님들의 자비하심 안에서 내가 비워지고, 비워지고, 또 비워져서, 앞으로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나든 심하게 저항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다 수용하게 해주세요’라고요. 물론 병마와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셔야 하겠지만, 이 모든 힘든 일을 나 혼자 다 하고 있다 생각하면 힘들어요. 그분과 함께 하시고 결과를 있는 그대로 수용할 자세를 가지시면 이 경험 안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게 돼요. 그리고 또 필요없는 고통을 스스로 만들어서 나와 주위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게 됩니다. 제가 오늘부터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용기 내세요!”



혜민 미국 햄프셔대학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4386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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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1:36

25일자 A29면 '여수엑스포에서 만나는 특별한 수궁가'를 읽고 궁금했던 의문이 풀렸다. 1년 전 바로 그 독일인 아힘 프라이어가 연출한 수궁가를 보고 조금은 걱정스러운 바가 있었는데, 이제 보니 그가 수궁가 내용을 잘 몰랐기에 그런 상황으로 연출했다는 것이다. 판소리 수궁가를 30여년 연구, 창작, 공연해온 이수자로서 그 연출가가 몰랐던 부분을 알려주고 싶다.

그가 연출한 수궁가를 아픈 용왕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자라가 자신의 욕심 때문에 토끼 간을 구하러 간다고 나서는 그 순간부터 우리 판소리의 핵심인 혼이 이미 날아간 것이다. 우리 판소리는 하나같이 오륜(五倫)정신이 핵심으로서 교육적 가치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춘향가는 열녀(烈女)정신이, 심청가는 효(孝)사상이, 수궁가 역시 충성(忠誠)이 그 핵심이다. 그래서 고(故) 정광수 명창도 애초 '판소리'라는 이름 대신 '오륜가(五倫歌)'라고 불러야 한다고 했다.

물론 독일 연출가가 시도한 신선하고 파격적인 무대장치는 관객의 시선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판소리를 잘 모르는 국민이나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정통 판소리가 잘못 알려질까 봐 걱정이 앞선다. 또 무대에 흩어져 있는 페트병들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가 기고를 보고서야, 내용을 모르는 연출가가 용왕을 탐욕적으로 묘사했고, 바다의 쓰레기 공해로 인해 용왕이 병이 났다는 설정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나 답은 판소리에 나와 있다. 남해 용왕이 한여름 천열풍(天熱風)을 쐬어 복병(腹病)이 든 것으로 나온다. 지금도 남쪽 바다에는 가끔씩 이 열풍에 의해 녹조니 적조니 하여 바닷고기들이 떼죽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판소리는 우리 민족의 지혜, 용기, 해학을 녹여 소리로 노래했다. 수궁가 속 용왕은 인자하고 사려 깊은 왕으로 묘사돼 왔다. 자라 또한 오직 용왕의 병을 낫게 하려는 충심으로 세상으로 나와 죽을 고비를 몇 번이고 넘긴다. 이러한 인자한 용왕과 충신인 자라의 인품이 훼손되지 않았으면 한다.



이용수 판소리 수궁가 이수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02/20120802030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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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1:33

2012 여수세계박람회에서는 참가국별로 국가의 날이 지정되어 매주 독특한 문화행사가 열린다. '한국의 날'이 진행되는 8월 첫주는 여름휴가 피크기간이다. 이 주간 행사 중 국립극장이 제작한 창극 '수궁가'가 무대에 오른다. 마침 수궁가의 배경도 남해다. 

그 남해에서 한국 판소리 '수궁가'를 극화한 창극을 세계인들 앞에 올리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수궁가'는 판소리 5대가 중 하나로 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설화다. 우리 조상의 풍자와 상상력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번 '수궁가'는 한국 유일의 국립창극단과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자 아힘 프라이어(Achim Freyer)가 2011년 함께 만든 작품이어서 더욱 특별하다. 판소리 시작을 17세기 말~18세기 초로 보면 300년 만에 최초로 외국인이 연출한 작품이다. 프라이어는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을 로스앤젤레스 오페라에서 연출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유일한 생존 제자이며 독일 표현주의 화가이기도 하다. 그가 연출, 무대미술, 조명, 의상디자인을 모두 수행한 '수궁가'는 지금까지 국내 예술가들이 상상하고 표현했던 것 이상을 만들어냈다. 그가 수궁가의 내용을 읽고 한국에 와서 제일 먼저 물은 것은 "용왕이 왜 아프냐?"였다. 

우리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용왕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고 단지 백약이 무효인데 토끼의 간만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상황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힘은 며칠 고민하더니 용왕을 탐욕적이고 부도덕한 왕으로, 토끼는 서민을 대표하는 지혜로운 동물로 표현하겠다고 했다. 또 용왕은 바다가 오염되어 병에 걸렸다는 설정을 했다. 그래서 무대의 바다 장면을 표현할 때 플라스틱 페트병을 주렁주렁 걸어 놓았다.

아힘은 남해를 배경으로 한 창극이 여수엑스포 한국주간에 오를 것을 예견이라도 했을까? 그는 '수궁가'를 만들면서 바다 오염의 심각성을 표현하고 2012년 대선을 앞두고 권력의 탐욕과 정치 상황을 풍자하는 장면들을 만든 것이다. 

이는 우리만의 전통과 창조적 아이디어가 합쳐진 한류의 또 다른 전형으로 한류도 다양한 장점들의 퓨전을 통해 진화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한다. 한국만의 독특한 공연예술 장르인 창극은 바로 한국의 공연예술 국가 브랜드이다. 독일의 노(老)연출자가 참여한 그 작품이 여수엑스포 무대에 오른다. 



임상우 국립중앙극장 기획위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7/24/20120724028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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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1:31

“다음 휴가엔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에 가고 싶어.”

 -터키?

 “아니,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라니까.”

 -이스탄불이 터키에 있는 도시잖아.

 “이스탄불이 터키에 있는 거야?”

지난주 친구와 이런 ‘사오정’ 같은 대화를 나눴다.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패션 비즈니스를 하는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휴가 얘기를 하던 중에 나온 말이다. 그랜드 바자는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400년도 넘은 큰 재래시장이다. 터키 고유의 그릇·카펫·장신구·옷·잡화 등을 판다. 최근에 이곳을 다녀온 후배에게 소감을 물었더니 “무지하게 넓고, 복잡하고, 관광객이 많고, 바가지가 난무한다”고 정리했다.

어쨌든 친구가 무턱대고 가고 싶다기에 물었다. “터키에 있는 것도 모르면서 그랜드 바자는 어떻게 아느냐”고. 친구가 대답했다. “요즘 뉴욕 패션피플들 사이에 휴가 때 그랜드 바자에 가자는 게 유행이야.” 뉴욕 패션피플들이 느닷없이 ‘그랜드 바자’에 꽂힌 이유를 캐물었더니 최근 뉴욕에서 출판된 『그랜드 바자』라는 럭셔리 화보책 덕분이라고 했다.

이 오래된 터키의 재래시장은 주로 에르메스·샤넬·루이뷔통 등 명품업체들이 ‘테이블 북’을 내는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어 뉴욕에 출판했단다. 그리고 각종 패션 명가들의 책과 나란히 맨해튼 플라자 호텔의 북 부티크에 진열해놓고, 이곳에 들락거리는 입 싸고 소문 잘 퍼뜨리는 뉴욕의 패션피플들을 공략한 거다. 국내에 한 권 있다는 책을 수소문해서 빌려 봤다. 도입부에 그랜드 바자의 그림들과 함께 엄마에게서 들었다는 옛날이야기, 할아버지가 숨바꼭질을 하며 뛰어놀았던 드넓은 시장의 추억으로 10여 쪽에 걸친 ‘스토리텔링’이 이어졌다. 그 뒤는 모두 시장에서 팔리는 물건과 상점과 상인들의 모습을 담은 화보다. 이 책 한 권이 뉴욕 패션피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것이다.

10년 넘게 경제 현장기자를 하다 보니 세계 각국의 시장을 꽤나 섭렵했다. 그런데 내게 가장 역동적이고 어메이징(amazing)한 시장을 꼽으라면, 남대문과 동대문 시장이 으뜸이다. 아동복·액세서리·그릇·잡화 등이 집결한 남대문 시장엔 좁은 점포마다 각자 제작하거나 조달한 각기 다른 물건들이 넘친다. 순대고무줄이나 깃털볼펜 등 남대문표로 출발해 세상에 흔해진 상품들도 숱하고, 요즘도 늘 새로운 아이디어 잡화들이 나온다. 발품을 파는 만큼 새로운 물건들을 접하게 되는 이 드넓은 시장엔 지방 소매상인들뿐 아니라 멀리 남미에서까지 전 세계 상인들이 물건을 떼러 온다.


거대한 의류 도매시장인 동대문의 역동성도 말할 것 없다. 최근 패션계의 리더로 떠오른 패스트패션계가 매달 서너 번의 신상품을 출시한다지만 동대문의 신상품 회전주기는 하루다. 카피캣 논란도 있지만 유학파 디자이너들까지 합세해 새로운 패션을 제안하는 곳도 이곳이다. 물론 동대문 시장은 관광명소다. 요즘도 외국에서 온 관광객과 소매상들이 많이 찾는다. 또 외국에서 온 손님을 동대문 야간시장에 데려가면, 그 넘치는 상품과 활력과 도소매를 함께하는 능동적 상술에 매혹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 두 시장은 알고 보면 이렇게 외국인에게도 꽤 알려져 있고, 매력과 경쟁력도 있다.

물론 아직 그랜드 바자에 못 가본 터라 우리 시장이 더 낫다고 우기진 못하겠다. 하지만 우리 시장이 역동성과 부지런함, 상품의 다양성에서 세계 여느 유명 시장과 견주어도 손색없다는 것은 안다. 그런데 그랜드 바자는 터키도 모르는 뉴욕의 패션피플에게서 ‘꿈같은 재래시장의 명품’으로 대접받고, 우리 남대문·동대문 시장은 그냥 변방의 시장일 뿐이다. 뉴욕 패션피플에게 인정받는 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이들이 떠들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온갖 패션잡지와 매체들이 따라서 움직인다. 매체들은 스토리를 발굴하고 이야기를 이어가고, 이것이 대중에게 퍼지고, 그러다 보면 어느덧 명소가 된다. 세상의 명성이란 이런 과정을 통해 쌓이는 거다. 재래시장을 명품처럼 포장해 홍보한 발상의 전환, 그 한 끗이 이렇게 ‘명성’을 가르고 있다.



양선희 논설위원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8812313&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2. 8. 15. 20:24

얼마 전 만난 한 교사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대화는 한 토막짜리 도돌이표 노래 같다고 말했다. 교무실에서 교사들이 학생들을 혼내거나 훈화하는 내용을 보면 토시 하나 안 틀리고 매일 똑같은 내용이 무한 반복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이 지각을 했다. 상습적인 지각생이다. 교사는 지각한 학생을 교무실로 불러 이렇게 말한다. 왜 지각했냐. 늦잠 잤습니다. 늦잠 자면 돼, 안 돼? 안 됩니다. 잘못했지? 네. 내일부터는 늦지 마라. 네. 그리고 이 대화는 또 다음날 반복된다. 똑같은 말을 하는 교사나 똑같은 말을 듣는 학생이나 지겹지도 않은지 모르겠단다. 그 말을 하는 당사자들의 표정을 보면 지겹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 무표정일 때가 많다. 둘 다 사실은 자기들이 하는 말에 아무 의미부여도 하지 않는다. 다만 '학교'이기 때문에 일어나야만 하는 '의례'에 가깝다.

그 교사에게 그럼 선생님은 지각하는 학생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물어보았다. 사실 우리 일상생활은 무의미하지만 의례처럼 반복되는 것이 더 많지 않은가. 저 위의 대화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무의미하고 멍청해 보이지만 저 의례적인 언어의 바깥을 생각하고 실천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자 그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겁니다. 자기가 교직 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 학생에 따라서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란다. 어떤 학생들은 아무리 야단을 치고 때린다고 하더라도 잠 조절이 안 되는 학생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 학생들은 집에 전화를 해서 상의를 해 보면 집에서도 노력을 해봤지만 안 돼서 부모님도 손을 놨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이 교사는 안 되는 것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되는 길을 택했다. 지각하는 학생과 함께 반에서 다른 학생들과 같이 상의를 했다고 한다. 누구누구는 잠 조절이 안 되니까 우리가 같이 신경을 쓰자고 말했다. 등교 할 때 그 친구의 집 근처에 사는 학생들은 핸드폰으로 전화라도 한 번 하거나 집을 지날 때 "누구야, 학교가자!"라고 한 번 불러주고 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효과를 봤냐고 물어봤더니 피식 웃으면서 그런다고 잠 조절이 안 되는 학생이 하루아침에 고쳐지겠냐고 대답하셨다. 대신 다른 효과를 하나 봤단다. 그 전에는 지각을 하더라도 교실 문을 열고 들어 올 때 별로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단다. 그냥 자기가 지각한 거고 그건 자기가 교사에게 야단맞으면 되는 거니까 다른 학생들에게 미안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야, 학교가자." 이후에는 지각을 하면 교실 문을 빠끔히 열고 다른 학생들에게 미안해하며 들어오기 시작했단다.

이 교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게 교육이다 싶었다. 그가 한 일은 한 교실에 있는 모두가 만년 지각하는 이 친구와 어떻게 더불어 같이할 수 있는지 지혜를 모으는 것이었다. 혼자서 '안 되는 것'은 다함께 감싸는 거다. 이 과정에서 모두가 당사자가 되었다. 한 교실에 앉아 있지만 무관하던 사이를 상관있는 관계로 만드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면 무엇이 교육이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학교에서 보통 생각하는 교육이란 '관계의 확장'이 아니라 그저 지각한 학생, '당사자 한 명'을 혼내서 태도를 교정하는 훈육이다. 그 순간 나머지들은 그 '당사자'와 무관해진다. 이렇게 되면 지각한 학생도, 그 주변의 나머지 학생들에게도 '고마움'과 '미안함'과 같은 주변 사람을 향한 마음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당사자는 자기만 겪으면 그만이고, 나머지는 당사자가 아니니까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교사들을 만나 성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관계의 확장'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 자기만 생각하고 살다가 주변을 돌아보게 되고 나아가서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고려하게 되는 것이 성장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관계의 확장이란 우리 모두가 당사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교실 문을 열 때 이전과는 달리 미안해하며 살짝 여는 것, 그 집 앞에서 '누구야, 학교가자!'고 한 번 외치는 것, 이것은 보통 큰 성장이 아니다. 이 교사처럼 사람과 사람을 엮지 못하면서 요즘 학생들 자기만 알고 남을 생각할 줄 모른다고 백날 이야기해봤자 헛방인 셈이다.


엄기호 교육공동체 벗 편집장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7/h201207182103288192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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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0:23

러시아의 천년 고도 모스크바. 도심 한복판의 크렘린궁을 출발해 모스크바강을 따라 서쪽으로 20분쯤 달리면 푸른색 유리로 된 독특한 원통형 건물이 나온다. 200년 전인 1812년 9월 러시아군이 나폴레옹의 15만 프랑스군과 싸웠던 보로디노 전투 기념관이다.

이곳에서 러시아의 명장 미하일 쿠투조프 장군은 12만 명을 이끌고 나폴레옹군과 격전을 벌인다.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에서 묘사됐듯 전투는 더없이 처절했다. 양쪽 모두 3만~4만 명씩 7만여 명이 몰살당했지만 결론은 러시아의 승리였다. 쿠투조프는 모스크바를 몽땅 불사르고 퇴각하는 초토화 작전을 폈고 이로 인해 나폴레옹군은 영하 30도의 혹한과 굶주림 속에서 궤멸됐다.



이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리는 기념관에 지난 3월 7일 예기치 않은 귀빈이 찾아왔다. 사흘 전 대선에서 승리한 ‘현대판 차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었다. 퍽이나 바쁘련만 그는 대형 그림들 앞에 서서 긴 상념에 빠졌다고 한다. 이 중에는 푸틴이 아끼는 코사크족 기마병들의 그림도 있었다. 우크라이나 초원에서 살아온 코사크족은 나폴레옹 전쟁에 이어 제1, 2차 세계대전 등 위기 때마다 러시아를 위해 싸웠던 용맹한 유목민이다. 16세기말에는 시베리아 정복에 나서 러시아 동진정책의 첨병 노릇을 했다. 푸틴은 이런 코사크족의 역사를 칭송하며 이들의 업적을 부각시켜왔다. 대선 직전인 지난 2월에는 한 일간지 기고문을 통해 코사크족 젊은이들을 잘 교육시켜 중요한 군사임무를 맡기자고 촉구했다. 2005년엔 코사크족을 징집해 이들로 꾸려진 특수부대를 창설하는 법안을 내기도 했다.

푸틴의 보로디노 전투 기념관 방문과 코사크족 예찬은 단순한 개인적 취향 때문인가. 물론 그럴 리 없다. 서방 언론들은 두 사안 모두 강력한 러시아 제국을 재건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의도된 제스처로 분석한다. 무릇 국가 지도자의 성격과 취향은 구체적 정책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카리스마가 강할수록, 민주적 견제장치가 약할수록 더더욱 그렇다. 터프한 푸틴의 성향이 앞으로 러시아의 외교, 특히 한반도 정책에 어떻게 투영될 것인가는 그래서 관심을 끈다.

그의 외교 방향을 짐작하게 해주는 일화 중에 이런 게 있다. 1990년대 초 소련이 해체되자 러시아 공무원들은 레닌의 초상화를 떼고 옐친 당시 대통령 사진으로 바꿔 달았다. 그러나 상트페테르부르크 고위 공무원이던 푸틴은 달랐다. 주변 시선에도 아랑곳 없이 그는 광대한 러시아 제국의 기틀을 닦았던 표트르 대제 그림을 걸었다. 푸틴과 표트르 대제 모두 강력한 러시아 건설이라는 꿈을 지닌 야심가들이다. 차이라면 표트르가 서구화 정책을 밀어붙였던 데 반해 푸틴은 동쪽으로 눈을 돌렸다는 점이다. 실제로 푸틴은 지난 5월 내각을 짜면서 시베리아 발전계획을 전담하는 극동개발부를 신설한다. 그러고는 빅토르 이사예프 극동연방관구 대통령 전권대표를 임명해 책임을 맡겼다. 이사예프는 18년간 하바롭스크 주지사를 네 번 역임한 동아시아통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취임 당일 외교 기조를 밝히는 대통령령을 발표하면서 아시아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숨기지 않았다. 러시아에 있어서 극동 개발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가난한 동토의 땅에서 탈출하려는 이주민들이 속출해 이 지역 인구는 격감하고 있다. 91년 860만 명이던 극동연방관구 인구는 2010년 650만 명으로 210만 명이 줄었다. 19년 만에 인구의 4분의 1이 증발한 셈이다. 이대로면 극동 러시아의 황폐화는 시간문제다. 게다가 최대 교역 파트너였던 유럽의 경기가 꺼지면서 동아시아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다음으로 눈여겨볼 대목은 지하자원에 대한 푸틴의 각별한 관심이다. 표절 논란에 휩싸이긴 했지만 97년 제출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시장관계 형성하에서 지역자원 이용 계획’이었다. 러시아가 극동지역의 황폐화를 막으려면 지역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 외에 도리가 없다. 그러나 상용화할 만한 첨단기술도, 풍부한 인적자원도 부족한 터라 당장 손쉽게 쓸 수 있는 카드는 자원 개발뿐이다. 특히 시베리아엔 천연가스가 풍부하다. 세계 1위인 러시아의 천연가스 매장량은 44.6조㎥. 전 세계의 5분의 1 이상으로 절반 이상이 러시아 우랄산맥의 동쪽에 묻혀 있다. 천연가스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려면 가스 파이프만 한 게 없다. 따라서 활력 넘치는 동아시아 시장 공략을 원하는 러시아로서는 한반도 가스관 설치사업이 중대 사안일 수밖에 없다. 이 계획이 실현되려면 남쪽으로의 안정적인 가스 공급을 보장하겠다는 북한 정권, 그것도 최고위층의 다짐이 필수적이다. 많은 싱크탱크에서 벽에 부닥친 가스관 사업을 위해 푸틴이 남·북·러 3국 정상회담을 추진할 걸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푸틴이 연출하는 남·북·러 정상회담은 머잖아 성사될 것인가. 러시아 현지 전문가들은 다소 부정적이다. 저명한 국제정치학자인 상트페테르부르크대 콘스탄틴 후돌리 교수는 시기상조론을 폈다. 그는 “현재 러시아는 여러 경로로 북한 새 지도부의 동향을 파악 중인 상태”라며 “젊은 새 지도자가 실질적인 파워를 확보했다는 걸 확인한 뒤 구체적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게 개인적 소신”이라고 밝힌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푸틴의 대권 복귀 이후 극동으로 향한 러시아의 관심이 고조됐다는 거다. 갈수록 요긴해지는 러시아라는 지렛대를 이용해 꽉 막힌 남북관계를 돌파할 기회도 한층 커졌다는 의미다. <모스크바에서>



남정호 순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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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0:19

이명박 정부에서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대통령의 형 이상득, 그의 보좌관 출신으로 ‘왕차관’이라 불리며 승승장구하던 박영준. 두 사람은 지금 서울구치소에 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질수록 더 아픈 법이니, 이들이 느끼고 있을 참담함을 일반인들이 상상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또다시 이들에게 가슴 아픈 말을 전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짚고 싶은 게 있다.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이 이들의 추락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 국민들이 대통령 친인척·측근들의 운명에 정통해져서일까. 정권 말기마다 반복되는 현상이니 그럴 만하다. 하지만 의구심을 확신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은 바로 당사자들의 입이었다.

2008년 2월 대통령 당선자 비서실 박영준 총괄팀장은 정권 인수위 출입기자들을 만나 “장·차관 후보자 5000명의 자료를 훑었다. 이제 사람 이름만 봐도 지겹다”고 말했다. 인선작업의 고충을 토로하는 취지였다지만 듣는 쪽은 달랐다. ‘내가 실력자다’라고 만천하에 공개한 셈이었다. 권력에 민감한 공직사회와 기업은 새 정부의 실세가 누구인지 금세 알아챘다. 어디에 줄을 대야 하는지 숨죽이며 지켜보던 사람들의 고민을 일거에 날려버렸다. 그 후 이 정부 내내 그에게 사람이 몰려들고 “일이 되려면 박영준을 만나야 한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떠돌았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아예 입을 다물거나 “그저 실무작업을 도왔을 뿐”이라고 말했어야 했다.

2008년 3월 이상득 의원은 포항에서 지지자들을 모아놓고 “이명박이가 내 말을 들을 것 같으냐” “대통령이 내 형이냐”고 말했다. 그의 총선 불출마를 요구하는 한나라당 의원들의 집단성명 직후 터져나온 격정 발언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 맥락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제 막 출범한 정권의 힘이 서슬퍼런 상황에서도 대통령의 이름을 직함 없이 마구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경우에 따라선 대통령에게도 호통칠 수 있는 사람. 국민들에게 각인된 인식은 이랬다. 그러니 정권 내내 만사형통(萬事兄通)이란 말이 떠도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대통령에 대해 각별한 예의를 갖췄어야 했다.

두 사람의 말은 결국 두 사람에게 벗을 수 없는 족쇄가 됐다. 실제와 상관없이 비리 의혹이 터져나올 때마다 그들의 이름이 거론됐다. 이 같은 발언이 없었더라면 결백을 주장하는 그들의 말을 믿어주는 국민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을 게 틀림없다. 이 정부에서 각각 원로그룹과 실무그룹의 좌장격이었던 두 사람이 보다 언행에 신중했다면 잇따라 터져나오는 청와대 주변 비리 역시 크게 줄었을 게 틀림없다. 화(禍)는 입으로부터 온다는 옛말은 여전히 과녁을 찍어 맞힌다.


이명박 정부의 또 다른 창업공신 정두언 의원의 발언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는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오면서 이상득 전 의원 등을 겨냥해 “그분들은 다 누렸지만 나는 이 정부 내내 불행했다”고 말했다. 정 의원이 느끼는 불행을 국민들은 공감할 수 있을까. 김영삼 정권의 몰락을 가져온 한보사태 때 “나는 깃털에 불과하다”는 홍인길 전 총무수석의 말이 떠올라 뒷맛이 씁쓸하다.



김정욱 정치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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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0:16


저녁 무렵 슬그머니 풀잎 정상을 향하는 개미들이 있다. 그들은 새벽까지 풀잎을 꽉 깨물고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뭔가 이유 있는 행동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행동 때문에 개미는 풀을 뜯기 시작한 양이나 소에게 잡아먹힌다. 마치 ‘나 잡아 드세요’라는 자살 행동 같다. 개미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행동이다. 비밀은 ‘창형 흡충’이라는 기생충에게 있다. 이 기생충의 ‘꿈’은 번식의 파라다이스인 양의 위장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혼자서는 그 꿈을 이룰 능력이 없다. 그래서 개미의 뇌를 감염시켜 양에게 쉽게 잡아먹히도록 개미를 조종하는 것이다.


이 무서운 이야기는 곤충을 넘어 포유동물까지 이어진다. 톡소포자충에 감염된 쥐는 심하게 용감해진다. 대개 고양이 오줌 냄새를 맡은 쥐는 고양이의 존재를 느끼고 도망가는데 이 감염 쥐에게는 그런 공포감이 발현되지 않는다. 고양이의 위장에 가서 맘껏 번식하는 것이 최종 목표인 톡소포자충이 쥐의 행동을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까?


요즘 극장가에 <연가시>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 영화는 꼽등이나 사마귀 같은 육식 곤충의 뇌를 감염시켜 물가에 빠뜨리게 하는 기생충 연가시에 대한 실제 사실을 모티프로 삼았다. 그리고 연가시가 사람의 뇌를 감염시켜 물속으로 뛰어들어 자살하게 만든다는 허구를 만들어냈다. 실제로 곤충의 내장을 파먹으며 성장하는 연가시는 번식을 위해 물가로 가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운반자들이 자발적으로 물가로 가줄 리 없다. 기생충학자들에 따르면 이때 연가시가 곤충의 신경계를 조작하여 물속에 뛰어들게 만드는 특수 단백질을 분비한다고 한다. 영화 관객들은 이 기생충이 실제로 사람의 행동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조종할 수 있을지 궁금해한다. 물론 이런 비슷한 사례가 보고된 바는 없다. 아직은 그럴듯한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이 영화는 우리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우리의 마음을 감염시켜 결국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연가시 같은 생물 기생충 말고 ‘멘탈 기생자’ 같은 것은 없을까? 멀쩡했던 사람을 비상식적 고집불통이 되게 한다든지, 목숨 건 투사로 만든다든지, 심지어 자살 테러리스트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말이다. 종교와 정치가 아닐까?


물론 종교의 모든 교리들이 멘탈 기생자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것은 정말 그렇다. 세상의 지식이 어떠하든 자신들의 종교적 교리만이 진리라는 믿음은 ‘멘탈 연가시’다. 이른바 사이비종교 단체에 몸과 마음과 가정을 모두 빼앗긴 분들도 감염자들이지만, 종교적 교리와 열정 때문에 과학교과서에서 진화론을 삭제하는 일에 삶을 헌신하고 있는 ‘멀쩡한’ 분들도 사실상 감염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보수에 대한 비판은 곧 빨갱이 짓이라는 생각, 세상의 현실이 어떠하든 시장(市場)은 옳다는 믿음, 절차가 어떻든 목표가 완수되면 정당하다는 관념,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멘붕에 빠뜨리는 ‘멘탈 연가시’다.


해결책은 있는가? 영화에서처럼 연가시에 모든 사람이 감염되진 않듯이, 멘탈 기생자에 노출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감염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희망이 있다. 사실, 인류의 진화에서 큰 뇌가 출현한 이후에 멘탈 기생자가 없는 지적인 환경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의 뇌는 그만큼 취약하다. 그러니 멘탈 기생자에 능히 견딜 수 있는 지적 강인함과 감성적 면역력을 키우는 일이 중요하다. 특히 온갖 현란한 구호가 뇌를 유혹하는 요즘에는 말이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4313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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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0:15

2010년 6월 29일 충칭(重慶)에서 중국과 대만은 ‘양안(兩岸)판 자유무역협정(FTA)’인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체결했다. 대만은 당시 중국에서 상당한 양보를 받았다.

그런데도 대만 내의 반대는 거셌다. 야당인 민진당과 농수산업계, 노동단체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대륙의 값싼 농수산물로 대만이 초토화된다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 비준에 반대하며 의회 폭력사태도 발생했다.

체결 이듬해인 2011년 1월 1일 ECFA가 발효된 후 1년 반이 지났다. 대만 행정원 농업위원회(농림수산식품부 격)에 따르면 지난해 대만 농수산물의 대륙 수출은 전년보다 26% 늘었다. 특히 차(茶) 생선 과일 등 18종은 50%가 증가했다. 올해도 5월 말까지 이 품목들의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16% 늘었다. 이 기간 중국산 농수산물의 대만 수입도 30%가량 늘었지만 대만 농수산업은 별 타격을 입지 않았다. 



올해 한국과 중국은 FTA 협상을 시작했다. 한국도 FTA 협상에서 농수산물이 가장 뜨거운 쟁점이다. 협상이 갓 개시됐지만 가뜩이나 중국산 농수산물로 쑥대밭이 되고 있는 우리 농수산업이 한중 FTA로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위기감이 벌써부터 높다.

한중 FTA 협상에서 중국이 한국에도 양보할까? 이미 한국과 중국에서 중국이 같은 동포이자 특수 관계인 대만에 한 양보를 한국은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2010년 ECFA 체결 직후 베이징에 온 한국의 한 경제부처 장관도 한중 FTA 협상과 관련해 “중국이 대만에 양보한 것처럼 한국에 양보할 것으로는 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자는 생각이 다르다. ECFA에서 중국이 대만에 양보한 배경은 정치적 고려가 컸다. KOTRA 자료에 따르면 중국은 대만과의 ECFA를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었지만 서둘렀다. 또 크게 양보했다. 양안 관계 개선과 글로벌 영향력 확대를 위해서였다. 대만의 최대 고민은 자국 농산물시장 보호지만 중국에서 보면 대만으로 수출되는 중국 농산물은 전체 수출액의 2.4%(2010년 기준)밖에 되지 않는다. 중국이 농산물 분야에서 양보한 것이 대만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물이지만 중국으로서는 별 손해가 아닌 것이다.

한중 FTA는 어떨까? 중국 입장에서 볼 때 전략적 요소가 더 크다. 한국은 중국 주변에서 대만 홍콩 마카오 등 중국권을 제외하고는 중국의 전략적 이해가 가장 뚜렷하게 걸린 국가다. 혹자는 한국의 전략적 위상이 이들 지역보다 더 특별하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미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한국을 끌어안고 싶어 한다. 또 미국과 FTA를 맺은 한국을 ‘교량’으로 삼아 미국과 거래하고 싶어 한다. 지난해 중반 초당파 국회의원 방중단으로 베이징(北京)에 와 중국 고위급 지도자들을 두루 만난 한 국회의원은 “중국이 한중 FTA를 통해 미국의 기술 등을 이전받으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적어도 한중 FTA 협상에서 대만 수준의 양보를 요구하는 게 당연하다. 중국의 농산물 수출 중 한국의 비중은 7.2%(금액 기준·2010년)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2003년 12.1%를 정점으로 한국의 비중은 계속 감소해왔다. 중국이 한국에 농산물 분야를 양보하는 부담이 적다는 소리다. 최근 중국을 다녀간 한국의 한 대선주자도 대만 수준의 양보를 받아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일부 중국 전문가는 더 나아가 한국의 협상 목표를 ECFA보다 중국이 더 많은 양보를 한 중국과 홍콩 간의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CEPA) 수준까지 높이자고 말한다. 협상팀의 활약과 선전을 기대한다.

이헌진 베이징 특파원



http://news.donga.com/3/all/20120716/47788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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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0:01

로런스 서머스 하버드대 총장은 2005년 “여자는 선천적으로 수학과 과학을 못한다”고 말했다가 총장 연임에 실패했다. 하버드대는 그 후유증을 극복하고자 후임 총장에 여성 역사학자인 길핀 파우스트를 선임했다. 서머스 총장은 여자가 수학과 과학을 못한다는 근거로 수학·과학자 가운데 여성이 드물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의 발언은 절반만 맞았다. 과거에 여성 수학·과학자가 적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달라지고 있다. 1970년 미국의 여성 수학박사는 8%에 불과했지만 2009년엔 32%나 된다.

▷남자는 공간지각력이 뛰어나고 여자는 언어이해력이 우수하다는 것은 오랜 통념이다. 하지만 이런 통념은 잘못됐을지도 모른다. 미국 위스콘신대 연구진이 86개국 학생들이 치른 수학시험 성적을 비교했더니 성차별이 없는 나라일수록 남녀 간 점수차가 적었다. 성 평등이 최고 수준인 아이슬란드 여학생은 남학생보다 실력이 뛰어났고 노르웨이나 스웨덴은 점수차가 없었다. 여학생이 수학을 못한다는 고정관념이 여학생의 실력 상승을 가로막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여성이 수학에 약하다는 통념은 뿌리가 깊다. 아인슈타인도 인정한 독일 여성 수학자 에미 뇌터의 강사 임용이 거부되자 그녀를 추천한 수학자가 “대학이 목욕탕인가요”라고 했다는 얘기가 유명하다. 코엑스에서 열리고 있는 제12차 국제수학교육대회(ICME-12)에 참석한 잉그리드 도비시 국제수학연맹(IMU) 회장은 “여자가 계산에 약해 수학을 잘 못한다는 것은 편견”이라고 말했다. 부모나 교사가 여학생에게 수학이 아닌 다른 분야의 직업을 권유하거나 “수학 잘하는 여자는 까다롭다”는 남자의 편견을 여자가 내면화한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수학과목에서는 전통적으로 남학생의 점수가 높다. 서울의 한 명문대학이 여자 신입생을 덜 받으려고 수학문제를 어렵게 냈다는 실화도 있다. 하지만 격차는 좁혀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3년마다 시행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2000년 남녀 간 수학 점수차는 27점이었지만 2009년에는 4점으로 좁혀졌다. ICME 홍보위원장인 박경미 홍익대 수학교육과 교수는 “추상적인 기호나 도형을 쓰는 대신 최근 실생활에의 응용이나 의사소통을 강조하는 수업방식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정성희 논설위원



http://news.donga.com/3/all/20120710/476487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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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5. 20:00

지난 4월 최지성 삼성전자 대표(현 미래전략실장)는 1분기 영업이익이 5조8000억원을 넘자 “스스로 놀랐고, 두려움이 밀려왔다”고 고백했다. 놀란 까닭은 가공할 이익을 낸 스마트폰의 위력이다. 전성기 때 반도체를 뛰어넘었다. 두려웠던 이유는, 우리 사회의 시샘 어린 눈초리였다. 다행히 공포는 하루 만에 기우로 끝났다. 애플이 3배가 넘는 17조5500억원의 영업이익을 공개하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난주 공개된 삼성전자의 2분기 실적은 더 놀랍다. 영업이익이 6조7000억원이나 된다. 삼성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예방주사부터 놓았다. “그룹 전체 이익의 7할을 전자가, 전자 이익의 7할을 스마트폰에 의존하는 구조는 부담이고 숙제다.”


하지만 삼성의 반응은 엄살로 보인다. 스마트폰 편식이 두통거리라면, 애플은 아예 중환자실에 드러누워야 할 판이다. 애플은 아이폰·아이패드·아이팟에만 목을 매는 신세다. 또한 휴대전화는 이미 생활필수품으로 자리잡아 반도체·LCD보다 경기변동에 덜 민감하다. 통신사 보조금 덕분에 위험도 분산된다. 증권가에서 삼성전자 3분기 영업이익 추정치를 8조원 수준으로 올려 잡는 것은 당연하다. 아이폰5가 나오더라도 반도체 수출이 급증하리라는, 밝은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삼성이 지레 고개를 숙이는 것은 ‘질투의 경제학’을 의식한 보호본능으로 보인다. 실제로 2분기 실적이 나온 직후 경제평론가 S씨가 “삼성전자 영업이익의 70%는 내수에서 발생한다”고 비난했다. 한마디로 명백한 오류다. 해외에서 번 수익을 국내로 들여온 것을 놓고, 엉뚱하게 “국민을 상대로 이익을 챙긴다”고 공격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국내에 더 많은 세금을 내는 착한 일을 하고도 욕을 먹었다. 나중에 S씨는 실수를 인정하고 “미안하다”는 글을 올렸다. 하지만 사이버 공간에 “삼성은 우리의 등골 브레이커”라며 난리가 난 뒤였다.

참고로, 애플도 지난 4월 절세(節稅) 꼼수가 드러났다. 이익의 70%를 조세피난처 등 외국에 묻어두고, 미국 내 이익도 법인세가 적은 주(州)로 옮긴 것이다. 애플은 지난해 39조원의 이익을 거두고도 약 3조7000억원의 세금만 냈다. 반면 그 절반도 안 되는 16조원 이익의 삼성전자는 3조원의 세금을 냈다. 애플은 “탈세의 개척자”라는 비난에 “세율이 높아 해외서 번 돈을 못 가지고 들어온다”며 시치미를 뗐다. 삼성이 바보일까, 아니면 애플이 영악한 걸까.

최근 애플이 폭스콘 사태, 일자리 논란에 휘말렸을 때도 마찬가지다. 애플은 중국 등에 7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면서 국내 고용은 4만7000명에 불과하고, 그중 대부분이 연봉 3000만원 밑의 소매점 직원이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애플은 물러서지 않았다. “실업률과 일자리는 정책 문제인데, 왜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느냐”고 맞섰다. 홈페이지엔 이런 글까지 버젓이 올렸다. “…우리 제품을 배달하는 운전사, 그리고 운반 트럭을 제조한 간접인력까지 포함하면 미국에서 51만4000개의 일자리를 만들었다.” 애플이 한국 기업이었다면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얻어맞았을 것이다.


사실 삼성전자의 독주(獨走)를 지켜보는 마음은 불편하다. 스마트폰 초호황에 따른 착시현상도 경계 대상이다. 이대로 가면 사회 양극화에 따른 경제 민주화 요구는 더 거세지고, 삼성의 엄살도 더 심해질 것이다. 요즘 핀란드를 예로 들며 “노키아가 무너지자 로비오(앵그리 버드 제작사) 같은 벤처들이 쏟아진다”며 ‘대기업 해체’를 외치는 인사도 눈에 띈다. 한마디로 틀린 이야기다. 지난 3년간 핀란드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1.2%로, 이웃인 스웨덴·노르웨이에 뒤처졌다. 노키아가 잘나갔다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우리 정치권의 경제 민주화도 구체적인 사실 위에서 진행돼야 한다. 진영논리와 편가르기에 치우치면 동반성장이 아니라 동반침몰로 이어질 게 분명하다. 혹시 애플은 마구 존경하고 삼성전자는 무조건 비난하는 배경에, 우리 속의 ‘식민지 노예근성’이 없는지도 살펴볼 일이다. 기업이 더 많은 돈을 버는 걸 겁내는 나라는 정상이 아니다. 병든 나라다.



이철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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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2. 8. 15. 19:54


《 동아일보 오피니언 면이 ‘동아쟁론(爭論)’을 신설합니다. ‘주장은 명확하게 판단은 독자에게’라는 취지로 그때그때 우리 사회를 달구는 뜨거운 이슈들을 잡아서 전문가들로부터 찬반양론을 듣는 여론의 광장입니다. 어느 한쪽의 주장을 담기보다 찬성과 반대라는 양쪽의 입장을 모두 소개해 독자들의 판단에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논쟁적인 도전의 장을 기대해주십시오. 첫 번째 주제는 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로 등장한 ‘경제 민주화’입니다. 찬성하는 쪽에서는 재벌 개혁을 내세우고, 반대하는 쪽에서는 정치적 구호라고 반박합니다. 》



 



▼ ‘힘의 집중’이 재벌문제의 근원 ▼

최정표 경실련 공동대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경제 민주화’란 공정한 경제활동과 공평한 성과배분을 의미한다. 이러한 ‘민주화’는 힘의 분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어느 사회이건 힘이 집중되면 그 힘은 남용되고 사회정의는 훼손된다. 정치적 힘이 집중되면 독재를 낳고 시장의 힘이 집중되면 독점을 낳는다. 그러므로 힘의 집중은 민주사회가 가장 경계하는 악마(惡魔)이다. 민주주의 발전사는 힘의 분산을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힘의 분산은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 

‘경제 민주화’도 정치 민주화와 마찬가지로 힘의 분산을 필수 요건으로 한다. 그런데 한국경제에서는 힘의 집중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5대 재벌의 기업자산은 우리나라 전체기업자산의 25%에 이르면서 국가소유 자산의 절반 가까이 된다고 한다. 5대 재벌의 힘은 다시 다섯 사람의 총수에게로 집중된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경제의 절대적 힘이 다섯 사람의 개인과 그 가족에게 집중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집중된 경제적 힘은 언론, 문화, 스포츠, 광고, 행정, 입법, 사법 등 사회 곳곳에서 그 영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재벌의 힘은 이미 경제영역을 벗어나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그 힘이 남용되고 있다. 그리고 비경제분야에서의 영향력은 다시 경제영역에서의 힘을 추가시키는 데 활용되고 있다. 말하자면 경제영역과 비경제영역 사이에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져 있는 셈이다.

이러한 비정상적 상황을 치유하지 않고는 시장경제도 성공시킬 수 없고 선진국을 달성할 수도 없다. 이런 현상은 후진국에서만 관찰되는 현상이고 선진국에는 없는 현상이라는 데서 그 답은 분명하다. ‘경제 민주화’는 바로 이 문제를 치유하여 시장경제를 복원하고 정상화하는 일이다.

힘의 집중은 또한 시장경제의 최대 적이다. 주식시장에 큰손이 작용하면 그것은 더이상 시장이 아니듯이 경제활동에도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큰 힘이 존재하면 시장은 파괴된다. 재벌은 이러한 집중된 힘의 주체이다. 재벌은 작심만 하면 어느 업종에나 진출하여 쉽게 그 업종을 장악해 버릴 수 있다. 시장경제의 번영을 위해서는 소수 재벌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는 이런 힘을 분산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정치 민주화가 정치권력의 분산에서 시작하듯이 경제 민주화도 경제력의 분산에서 출발해야 한다.

경제력의 분산은 재벌정책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재벌정책이 바로 경제 민주화의 첫걸음이 된다. 현재는 1%의 개인 소유지분으로 50%가 넘는 계열사 지분을 장악할 수 있는 제도를 허용하기 때문에 총수 한 사람이 수많은 기업을 지배할 수 있고 소수 개인에게 막강한 경제력이 집중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적은 돈으로 수많은 기업을 지배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한국의 기업제도 때문에 재벌체제가 가능한 것이다. 이런 비합리적인 소유 지배제도를 개선해야 재벌에 의한 과도한 경제력 집중을 해소할 수 있다.

재벌에서는 총수 돈이 아닌 계열사 자금으로 또 다른 회사를 소유하고 총수가 그 회사의 경영권을 장악한다. 순환출자를 금지하고 지주회사 규제를 강화하고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시행하고 금융계열사와 일반계열사를 분리시키면 이런 과정을 통해 총수가 지배할 수 있는 기업은 많이 줄어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책을 추진하지 않고는 결코 재벌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기업이란 돈을 벌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기 때문에 불법이 아닌 한 끝없이 이윤을 추구하기 마련이고 이것은 나무랄 일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나오는 사회적 폐해를 최소화하면서 경제활동의 과실이 국민 모두에게 고르게 분배되도록 올바른 제도와 틀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입법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그동안 정부와 국회가 재벌과 영합하거나 재벌에 굴복하여 이 일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재벌 중심의 비민주적 비시장적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새 국회와 다가올 새 정권은 소수 재벌에 집중되어 있는 경제적 힘을 분산시킬 뿐만 아니라 그 힘이 남용되지 않도록 하는 제도개혁에 적극 나서야 한다. 이 길만이 한국경제의 살길이고 우리경제의 희망이다. 힘의 집중을 해소하는 데는 많은 난관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일은 결코 미룰 수 없는 시대정신이다.

최정표 경실련 공동대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 필자 소개 ::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산업조직학회장과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을 지냈다.

▼ ‘경제 민주화’는 허울뿐인 구호 ▼

복거일 경제평론가 소설가

‘경제 민주화’는 새로운 용어가 아니다. 19세기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미 ‘부의 평등화’라는 뜻으로 널리 썼던 말이다. 이때 경제 민주화는 ‘경제 민주주의(economic democracy)’의 실현을 뜻한다. 따라서 경제 민주주의의 어원은 바로 공산주의 경제 체제인 것이다.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논파되자, 경제 민주주의도 체계적 이론으로 존재하기를 멈췄다. 

최근 다시 살아난 경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사소한 정책들을 포장하는 말이 되었다. 그런 주장들은 단편적이고 연관성이 적어서 원래 경제 민주주의 개념의 파편에 지나지 않지만 이론적 바탕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노동량 가치설(quantity-theory of value)’이다. 이 이론은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원시적 이론으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도 오래전에 버렸다. 그리고 시장경제는 모든 시민의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므로, 이미 그 자체로 민주적이다. 그래서 주류 경제학자들은 경제 민주주의라는 말을 아예 쓰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우리 사회에서 갑자기 경제 민주화가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떠오를 까닭이 없다. 그것이 매력적인 구호라는 점을 빼놓고는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리 체제에 적대적인 사람들은 그들의 시장간섭 정책을 경제 민주화라는 구호로 포장한다.

그들은 헌법의 119조 2항 중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라는 표현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표현은 아주 애매해서 논란을 부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헌법에 들어가면 안 되는 표현이었다. 게다가 문맥으로 보면, 그것이 당해 조항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알다시피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지향한다. 마르크스주의 경제 이론에 바탕을 둔 경제 민주화라는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데 이질적인 개념이 첨가되면서, 우리 헌법의 일체성이 상당히 훼손되었다. 이에 따른 현실적 해악도 크다. 역사적으로 법은 권력을 쥔 사람들의 자의적 행태를 억제해서 시민들을 보호해 왔다. 권력이 남용될 수 있는 규정들을 품으면, 좋은 법이 될 수 없다. 헌법 119조 2항은 국가가 시장에 자의적으로 간섭할 근거를 마련하면서도 권력이 남용되지 않도록 하는 조치를 빠뜨려 우리 정부는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깊이 시장에 간섭해 왔다.

하지만 어떻든 그 조항이 실재하므로, 우리는 그것을 헌법정신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활동으로 나온 경제 상태에 부정적 측면이 보이면, 국가는 그것을 완화하려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 조항이 마르크스주의 경제 이론에 바탕을 둔 경제 민주주의를 내세웠다는 해석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지금 경제 민주화로 포장된 정책들의 핵심은 ‘강력한 재벌 규제’다. 재벌 규제는 인기가 높지만, 그것은 폐기된 경제 이론의 틀로 경제 현상을 살핀 데서 나왔다. 

만일 재벌 기업이 재벌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묘사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악한 존재라면 소비자들이 재벌 기업의 제품을 찾고, 젊은이들이 재벌 기업에서 일하려 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또 재벌 기업이 수출을 주도해 경제를 이끌고 있는데 강제로 퇴출시키면, 그 자리를 외국 대기업이 차지하는 현상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우리 시장은 이미 너무 많은 규제로 왜곡되었다. 거기서 활동하는 기업도 당연히 왜곡된다. 재벌 기업이 보이는 추한 모습은 대부분 잘못된 규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비현실적 규제를 푸는 것이지 경제 원리를 거스르는 규제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 민주화가 재벌 개혁이라 한다면 그것을 따로 포장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이미 반세기 넘게 재벌 문제와 씨름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모두가 잘 아는 재벌 문제에 관한 낡은 주장을 그럴 듯한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다. 매력적인 구호로 자신의 주장을 포장하려는 충동은 자연스럽지만 중요한 선거를 앞둔 지금 재벌에 대한 거친 공격을 경제 민주화로 포장하는 일은 시민들을 현혹하려는 시도다.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고 현실적으로 해롭다.

복거일 경제평론가 소설가

:: 필자 소개 ::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비명(碑銘)을 찾아서’ ‘자유주의 정당의 정책’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등의 저서가 있다.



http://news.donga.com/3/all/20120705/475670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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