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의견이 반영된 결정은 혼란과 오류를 낳을 수 있고 창의적 신제품 개발 어려워
다른 목소리 듣는 건 중요하나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면 곤란… 혁신은 '독단적 결정'에서 나와
광고회사에서 일한다고 하면 흔히들 "연예인 많이 만나겠네요"라며 호기심 어린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정작 내가 자주 접하는 사람은 늘 중요한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최고경영자(CEO)들이다. 30년간 광고 일을 하면서 수많은 CEO들의 의사결정 과정을 지켜봤다. 벤처기업·중소기업·대기업·공기업 등 기업의 규모와 성격에 따라서, 그리고 기업인·관료·군인 등 출신에 따라서 다른 성향을 보였다. 이처럼 CEO들의 다양한 의사결정 과정과 그 결과를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제는 CEO의 의사결정 과정과 행태를 보면 그의 역량과 결과물의 운명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됐다.
사람들은 대체로 CEO의 독단적 결정보다 민주적 의사결정이 더 바람직하다고 믿는 성향이 있다. 민주적 의사결정을 중시하는 CEO들은 광고를 제작할 때 이른바 '광고위원회'라는 것을 구성한다. 홍보, 영업, 마케팅, 제품개발자, 외부 자문교수, 임원, CEO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발된 위원들이 각자가 의사결정에서 행사할 수 있는 지분만큼 발언하고 영향을 미친다. 절차적으로는 매우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결과까지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광고회사가 열심히 준비한 4~5개의 광고안을 광고주 회사의 CEO를 포함한 광고위원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나면 잠시 침묵이 흐르고 사장이 입을 연다. "돌아가면서 의견을 말씀해보세요.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말해주세요." 이어 연령대별로, 분야별로, 직급별로 돌아가면서 느낌과 의견을 얘기한다. 그 후 CEO는 표결로 결정하자고 말하고 표결을 통해 그중 한 개의 안(案)이 채택된다. 마지막에 CEO는 "아까 나온 얘기들을 잘 반영해서 모두가 좋아하는 광고를 만들어 주세요"라고 말하고 박수를 치며 프레젠테이션은 끝이 난다.
모든 의견이 반영된 결정은 모든 의견을 채택하는 것과 다름없다. 광고에서 모든 것을 말한다는 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광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이비드 오길비는 "사공이 많은 위원회를 상대로는 좋은 광고를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민주적이란 미명 아래 기계적인 다수결로 의사결정을 하면 큰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는 특히 창의적인 의사결정이 필요한 광고나 신제품 개발 때 더욱 그렇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애플에 위원회가 몇 개나 있을 것 같나요? 하나도 없어요"라고 말했다. 다수의 평범한 의견보다 자신의 통찰력을 믿고 의사결정을 내렸기에 지금의 애플 신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도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성공한 광고들은 통찰력 있는 CEO의 '독단적 결정'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최근 기업에서 '열린 소통'이 강조되고 있다. 의사결정을 내리기 전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의사결정 자체를 남에게 맡기는 것과 의사결정 과정에서 남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세상이 변화하는 방식마저 바뀔 정도로 경영환경은 급변하고 미래는 불투명하다. 이러한 시대에 민주적 의사결정이란 대체로 안정적인 선택이 될 가능성이 크다. 변화와 혁신을 즐기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시장조사 자료에 의존한 의사결정을 한다든가 위원회식 다수결로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는 것은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밝히는 데 바람직하지 않다. 광고뿐 아니라 기업경영에서 다수결로 결론을 내는 것은 잘못된 결과로 이어지거나 누구도 의사결정에 책임을 지지 않는 자기도피에 가깝다.
펩시콜라의 전 CEO 로저 엔리코는 "가장 좋은 것은 올바른 결정이고, 다음으로 좋은 것은 잘못된 결정이며, 가장 나쁜 것은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올바른 결정의 바탕에는 CEO의 창의적인 판단력이 있고, CEO의 창의적인 판단은 끊임없이 통찰력을 쌓아야 가능하다. CEO 자신이 통찰력이 없다고 생각되면 통찰력을 가진 전문가에게 의사결정권을 과감히 넘겨주어야 한다.
아직도 통찰력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의사결정을 내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것이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리더라고 생각하는 CEO가 있다. 그런 방식이 직원들에게 혼란을 가중시킨다는 사실은 모른 채 항상 최선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으며, 더불어 직원들의 존경과 인기도 따라올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런 CEO를 볼 때마다 "인기는 리더십이 아니다"라고 한 피터 드러커의 말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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