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있는삶/사설 노트'에 해당되는 글 715건

  1. 2012.09.23 [도정일 칼럼/9월 12일] 김기덕 감독의 수상 소식에 부쳐
  2. 2012.09.23 [시론] 복지 선진국 정답은 없다
  3. 2012.09.23 [윤희영의 News English] 재치있고 사려 깊은 부모 Brilliant and thoughtful parents
  4. 2012.09.23 [편집국에서/9월 11일] 삼성 '혁신의 신화' 필요하다
  5. 2012.09.23 [사설] '8년째 OECD 자살률 1위' 원인을 찾아야 할 때다
  6. 2012.09.23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178] 애플과 새누리
  7. 2012.09.23 [서화숙의 만남] 유진룡 가톨릭대 한류대학원 원장
  8. 2012.09.23 [기고] 복지·경제 민주화보다 지식창조사회 전환이 우선
  9. 2012.09.23 [문화산책/9월 8일] 대통령 후보, 창의적 유머를 보여라
  10. 2012.09.23 [경제 view &] 최고 신용등급(Aaa) 국가의 조건
  11. 2012.09.23 [삶의 향기] 책 없는 거리
  12. 2012.09.23 [시론] 애플, 마법은 끝났다
  13. 2012.09.23 내 사랑 동남아, 유럽과 안 바꾼다네
  14. 2012.09.23 [Why] '김용(세계은행 총재) 엄마' 따라잡기… '강남 엄마' 스타일론 어림없다
  15. 2012.09.23 메가스터디 만든 손주은, "차라리 깽판을 쳐라”
  16. 2012.09.23 난 우주관광객임을 거부했다 스파이說 전혀 근거없는 얘기 '창업전도사'로 또 다른 도전 중…
  17. 2012.09.23 남들처럼…상식·영어만 매달렸다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 카피 나왔을까…
  18. 2012.09.23 美뉴스위크 “한국 베스트국가 15위 선정”
  19. 2012.09.23 외규장각 처음으로 발견한 박병선 박사의 못다한 이야기!
  20. 2012.09.23 미국과 한국의 온정 넘치는 판사 이야기에 감동
2012. 9. 23. 03:09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았다는 소식은 우리 사회에 몇 가지 외면할 수 없는 질문들을 던진다. 예술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너무도 힘들고 고달픈 일이 되어 있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김 감독은 어떻게 그 허다한 어려움들을 뚫고 나가 '베니스의 영예'를 안을 수 있었는가. 초등학교 졸업이 공식 학력의 전부라는 그를 독창적 예술가로 키운 것은 무엇인가. 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역경 속에서도 묵묵히 예술영화와 독립영화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은 김기덕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제2, 제3의 김기덕, 다른 수많은 영화예술인들이 김기덕 못지않은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하자면 사회가 신경 써야 할 일은 무엇이고 정책, 시장, 제도, 문화가 해결해주어야 할 일들은 무엇인가. 사회만이 아니다. 영화를 키우는 것은 결국은 관객이다. '관객 1,000만 시대'의 영화관을 드나드는 당신과 나, 우리들 관객 모두에게 김기덕의 '황금사자상'은 무슨 질문을 던지고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가. 

이런 질문들 앞에서 우리가 냉소적이고 문제회피적인 답변을 듣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다. 이를테면 이런 식의 답변들이 가능하다. 예술가를 키우는 것은 돈이 아니라 고난과 굶주림, 광기와 집념 아니던가? 예술이 사실상 불가능한 시대에 예술을 하겠다고 달려드는 집념 자체가 광기다. 그 광기의 예술가는 카프카의 <굶는 광대>처럼 쫄쫄 굶는 것이 옳다. 햇살과 바람만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나는 바람을 먹는다/ 돌을 먹는다/ 흙을 먹는다'고 읊었던 시인 랭보의 노래를 기억하라. 남들이 먹지 않고 먹지 못하는 것으로 배를 채우고 그 먹을 수 없는 것들로 축제를 벌이는 것이 예술가 아니던가. 사회가 할 일이 있다고? 꿈 깨라, 궁핍한 예술가여. 사회는 독창적 예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예술은 불온하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시장? 시장이 예술을 배려하고 지원하는 일이 이 땅의 시장바닥에서 가능할 것 같은가. 시장은 돈에만 반응하고 돈 되는 것에만 투자한다. 예술은 오늘날 '돈 안 되는 것'의 대명사 아닌가. 관객? 지금의 관객은 유행 좇아 다니고 트렌디한 것에 쏠리고 재미와 오락에 중독된 지 오래다. 그런데 예술은 유행을 거부하고 트렌드를 따라가지 않는다. 그런 예술을 좋아할 관객이 몇이나 될 것 같은가.

이 칼럼의 독자들은 그러나 이런 씨니시즘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반론은 대체로 이런 노선을 따를 것이 분명하다. 문명의 아침이 열린 이후 지금까지 인간이 자랑할만한 가장 창조적인 성취들을 내놓은 것은 과학과 예술 두 분야 아닌가. 문자를 발명하고 제도를 만들고 국가를 구성하기 훨씬 전에, 지금부터 3만 5,000년 전부터 동굴벽에 그림을 그리고 장신구를 만들고 상징적 조형물들로 무덤을 가꾼 동물이 인간이다. '예술'은 진화과정의 우연한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진화를 가능하게 하고 진화를 추동하고 진화의 방향을 안내한 힘이다. 그 예술이 정지되거나 예술창조의 능력이 쇠퇴한다는 것은 진화의 정지나 다름없다. 사회가 예술을 높이 평가하고 교육이 예술에 투자하는 것은 할 일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의 핵심부에 예술이 있다. 예술행위를 빼고 나면 인간에게 뭐가 남을 것인가. 

예술은 과학과 반대의 충동을 따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방법적으로 예술과 과학의 실천 방식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위대한 과학적 발견들의 뿌리지점을 보라. 그 발견들을 가능하게 한 것은 '상상력'이라는 창조의 동력이며, 이 차원에서 예술의 상상력과 과학의 상상력은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과학적 발견들을 가능하게 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상상력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 상상력은 시적 은유적 상상력이고 예술적 상상력이다. 

지금은 과학의 시대다. 그런데 그 과학의 시대가 예술적 상상력을 우습게 알아도 된다고? 

시장이 예술을 홀대하고 예술을 말라죽게 한다면, 그 시장은 제 무덤을 파는 것이다. 창조성의 뿌리가 말라버린 곳에서는 어떤 대중예술도 가능하지 않다. 교육은? 한국에서처럼 예술교육을 변두리로 내몰고 아이들을 오로지 시험준비에만 매달리게 하는 교육은 창조력을 죽이는 교육, 그러므로 가장 반인간적이고 반사회적인 교육이 된다. 김기덕의 수상 소식은 참 중요한 얘기들을 들려준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9/h20120911210827121730.htm

Posted by 겟업
2012. 9. 23. 03:06

요즘 한국에서는 복지에 관한 논쟁이 뜨겁다고 한다. 나라 밖에서 보니 내심 반가운 일이면서도 늦은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 사회에서 일고 있는 복지 논쟁의 이념적 전제는 무엇일까. 흔히 말하는 서구의 선진 복지국가들을 모방해 뒤따르려는 꿈이 있는 것은 아닐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한국이 본받을 만한 복지 선진국은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는 것이다. 복지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복지제도는 애당초 자신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제를 자신들의 문화에 맞게 해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개발되고 발전됐다. 복지는 지극히 지역적이며, 문화적인 면이 강한 사회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른 나라에서 배울 만한 복지제도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선진 국가들의 사회적 문제들을 먼저 살펴보고, 그 문제에 대응하는 제도들을 배운다면 그야말로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뉴질랜드를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겪어 왔던 사회적 문제들을 현재의 한국 실정에 맞춰 전망해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선 향후 수년 이내 아동학대 문제가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이슈로 등장할 것이다. 한국에서 아동학대는 가족과 교육을 중요시하는 문화적 배경에 가려져 등한시돼 왔다. 하지만 이혼과 재혼가정의 증가 등은 가족의 의미를 변화시키고 아동학대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서양에서 아동학대 문제는 이혼의 증가로 인한 가족 형태의 변화에 따라 급속히 증가했다. 뉴질랜드에서 동양적 전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가족공동체회의와 같은 제도는 아동학대와 청소년 문제에서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이 매우 크다.

둘째, 이민·난민 또는 외국인 노동자 등과 관련된 문제들은 한국의 사회복지 분야에서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 사람들의 국가 간 이주는 상품이나 문화의 국가 간 교류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지닌다.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 거주민들은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으로 전락하기 쉽고 그들에 대한 인권 및 정의는 사회 통합의 실현에 중요한 도전으로 작용할 것이다. 특히 한국의 사회복지는 남북통일을 대비해야 하는 큰 과제를 안고 있다. 이는 곧 북한 이주민에 대한 복지서비스를 얼마나 발전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뉴질랜드나 호주 등 이민으로 국가를 이루는 나라들로부터 그들이 겪고 있는 소수민족의 문제와 해결책 등을 잘 살펴보고 준비할 필요가 있다.

이 밖에도 노인문제와 자살 등 정신건강 문제 등 사회복지 이슈는 끝이 없다. 복지 이슈는 인류의 끝없는 도전과 응전의 대상이 돼왔다. 이는 곧 복지가 수당이나 경제적 논리에 의해 좌우되는 ‘퍼주기식’ 기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지구상에 복지 선진국이 있다면, 그곳에서는 모든 사람의 인권이 보장되고, 사회정의가 실현되며, 소외된 계층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복지가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이 온전히 뒤따를 만한 복지 선진국은 단연코 없다. 단지 앞선 나라들이 겪고 있는 문제로부터 배우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사회적·문화적 배경에 맞는 제도를 발전시키는 것이 복지 선진국을 이루어 가는 길이다.

에치오니(Etzioni)라는 학자의 말에 몇 자를 더해 본다. “동양은 끝없이 서양을 배우려 하고, 서양은 늘 동양에서 무엇인가를 찾으려 한다.” 동·서양이 어우러진 글로벌 시대에, 적합한 복지제도를 발전시켜 가는 것은 우리 세대의 엄연한 책임이다. 하지만 우리가 동·서양을 넘나드는 것은 색다른 복지제도를 찾으려 함이 아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찾으려 함이다. 그것은 사람, 사람, 그리고 사람이다.


박홍재 뉴질랜드 오클랜드대 교수 사회복지학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301698&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2. 9. 23. 03:01

미국의 소셜미디어 '레딧(Reddit)'에 과자 봉지 사진 한 장(a picture of a goody bag)이 올라왔다. 생후 14주 된 쌍둥이 형제와 함께 비행기를 탄(take flight with their 14-week-old twin boys) 젊은 부부가 다른 승객들에게 일일이 나눠준(hand out one by one to other passengers) 것이라고 했다.

비닐봉지에는 쪽지 하나를 붙여 놓았다(stick a note on the plastic bag). 아기들이 비행 중 난리를 피울 것을 예상해(in anticipation of the infants wreaking havoc while in flight) 양해를 구하는(ask to be excused) 글이었다. 만약을 위해(for caution's sake) 선제 조치를 해놓은(launch a preemptive strike) 것이다.

과자 봉지 사진과 쪽지 내용을 올린 승객은 "재치있고 사려 깊은 부부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며 "아기들은 기대 이상이어서(be better than expected) 승객들에게 아무런 폐도 끼치지 않았고(do not cause the passengers any trouble), 부부는 분명히 초조하고 피곤했을 텐데도(be obviously nervous and tired) 주변 모든 사람에게 극히 다정하게 잘 대했다(be extremely nice to everyone around them)"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give unstinted praise). 쪽지 글은 부모가 아닌 쌍둥이 아기들의 시점으로 쓰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처음 비행기를 타 보는 쌍둥이 형제입니다(be twin baby boys on our first flight). 생후 14주밖에 안 됐어요. 얌전히 있으려고 노력하겠습니다만(try to be on our best behavior), 혹시 저희가 귀가 아프고 겁에 질려(get our ears hurt and scared) 침착성을 잃을(lose our cool) 수도 있어 미리 사과 말씀을 드리려고(apologize in advance) 해요.

우리 엄마와 아빠(우리의 휴대용 우유 기계와 기저귀 교환기·our portable milk machine and our diaper changer)는 여러분이 필요할 경우 이용 가능한 귀마개들을 준비해 놓았습니다(have ear plugs available if you need them). 저희는 좌석 20E와 20F에 앉아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가지러 와주세요(come by to get a pair). 그럼 멋진 비행기 여행 되시길(have a great flight) 바랍니다!"

이 글과 사진에는 3000건 이상의 댓글이 달렸다(garner over 3000 comments). "멋진 부모를 닮아 쌍둥이 아기들도 올바르게 잘 자랄 것" "나도 저런 부모가 돼야지" 등 칭찬 일색이었다(be full of praise).

글과 사진을 올린 승객은 "짐 찾는 곳에서 할아버지·할머니를 만나는 쌍둥이 아기들을 보았다(see the twins meeting their grandparents at baggage)"면서 "갓난 손자들을 처음 보는 할아버지·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get teary) 기뻐 어쩔 줄 모르는(burst with joy)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http://www.dailymail.co.uk/news/article-2197969/Parents-young-children-hand-candy-sweet-message-flight.html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9/11/2012091102661.html

Posted by 겟업
2012. 9. 23. 02:58

삼성이 휴대폰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삼성은 지난달 애플과의 미국 특허 전쟁에서 완패했음에도 글로벌 시장 판매는 물론 미국 시장 마케팅에서도 거의 타격을 입지 않고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10억 5,000만 달러(1조2,000억원)에 달하는 특허소송 사상 최대 규모의 배상금, '베끼기 대장(Copycat)'이라는 미 배심원단 평결의 낙인이 언제 내려졌냐는 듯싶다. 지금 삼성은 1988년 휴대폰 사업에 뛰어든 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지난해 스마트폰 판매량에서 애플을 제친 데 이어 올 들어 일반폰까지 합쳐 노키아를 밀어내고 사상 처음 글로벌 정상에 올라섰다. 

3년 전 모습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양지차다. 2009년 아이폰쇼크가 몰아쳤을 때 '삼성 휴대폰은 끝났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스마트폰 시장이 열리는 것을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삼성은 허겁지겁 옴니아 시리즈를 내놓았지만 망신만 당했다. 제품 구동이 제대로 안돼 스마트폰이 아니라 '잡폰'이라는 비아냥이 잇따랐다. 하지만 갤럭시S를 통해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필사적인 노력 끝에 2010년 6월 안드로이드 운용체제(OS)를 탑재한 갤럭시S를 내놓아 시장의 평가를 일시에 바꿔놓았다. "외관으로나 기능에서나 이제 아이폰과 경쟁해볼 만한 제품을 갖게 됐다"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삼성 애니콜이 1990년대 중반 15만대의 불량 휴대폰을 운동장에 쌓아놓고 화형시키는 극적인 이벤트로 품질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면, 갤럭시(시리즈)는 불과 2년도 안돼 기적처럼 애플을 제친, 더 드라마틱한 케이스라고 봐야 한다. 더구나 상대는 혁신의 대명사격인 아이폰이 아닌가. 

하지만 눈물겨운 '애니콜 신화'는 있어도 빛나는'갤럭시 신화'는 보이지 않는다. 성적만 보면 애니콜을 훨씬 능가하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의 일부는 어쩌면 지난달 평결이 내려질 때까지 삼성이 미국 법정에서 벌인 애플과의 공방에서 찾을 수 있을 것같다. 예상대로 애플 측의 스토리텔링은 강력했다. 잡스가 얼마나 디자인과 사용자 경험을 중시하고, 이를 제품에 구현하기 위해 고심했는지, 그렇게 5년여 동안 공들여 내놓은 아이폰을 삼성이 3개월 만에 어떻게 베꼈는지를 자료를 제시하며 배심원들을 설득했다. 

반면 삼성은 방어적 태도로 일관했다. 애플의 디자인과 일부 기능들이 그 이전에도 있던 '선행 기술(prior art)'이라고 강조했지만 증거나 증인을 통한 효과적 대응은 하지 못했다. 삼성전자 수석디자이너가 출석해 하루에 2~3시간 자면서 갤럭시S 개발에 몰두했다고 증언했지만 큰 울림은 없었다. 설령 그보다 더한 스토리가 있었다 해도 삼성의 캐치업(catch-upㆍ따라잡기) 과정이 새 시장을 열어 제친 애플의 이야기만큼 감동적일 리 없었을 것이다. 

어찌 됐든 삼성은 '애플 베끼기 대장'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물론 특허소송의 패배가 시장에서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같은 낙인을 지우지 못한다면 장기적으로 치명상이 될 수밖에 없다. 삼성이 아무리 멋지고 기능이 좋은 물건을 만들어도, 특정 제품을 가장 많이 판매해도 위대한 혁신 기업, 존경 받는 기업의 반열에 오르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삼성은 끊임 없이 진화하는 기업이다. 지난해 나온 갤럭시S2, 그리고 최근 한층 업그레이드된 모습의 갤럭시S3가 이를 말해준다. 하지만 생태계를 바꾸는, 판을 뒤집는 파괴적 혁신은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 이제 특허소송 역사에 쓰여진 주홍글씨보다 더 굵고 선명하게'혁신 삼성'의 이름을 새겨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갤럭시 신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첫 출발은 다소 어설펐지만, 사람들을 열광시키고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는 감동적인 스토리로 채워지고 완성되어야 한다. 이것이 어쩌면 1년4개월 넘게 진행돼온 특허소송에서 1조원대의 수업료를 치르고 삼성이 얻은 값진 교훈이 아닐까 싶다.



박진용 산업부차장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9/h2012091102410424420.htm

Posted by 겟업
2012. 9. 23. 02:57

2010년 한국에서 하루 평균 42.6명씩, 연간 1만5566명이 자살했다. 인구 10만명당 31.2명으로 OECD 평균(12.8명)의 2.4배나 된다. OECD 국가 가운데 2·3위인 헝가리(23.3명)·일본(21.2명)과 큰 격차를 두고 8년째 '자살률 1위'라는 기막힌 기록을 갖고 있다.

우리의 세계 최고 수준 자살률은 경제 변수를 갖고는 설명이 안 된다. 1인당 GNI가 2000년 1만1292달러에서 2010년 2만562달러로 1.8배로 높아졌지만 인구 10만명당 자살률은 2000년 13.6명에서 2010년 31.2명으로 되레 2.3배가 됐다. 복지 혜택도 아직 선진국에 비해 뒤떨어지지만 2000년 기초생활보장제가 도입되고 2008년 기초노령연금제·장기요양보험제가 시행되는 등 주요 제도가 정비됐다. 복지 선진국인 스웨덴의 자살률(10만명당 11.7명)도 OECD 평균과 비슷한 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복지 제도가 시원찮아 자살률이 높다고 하기도 어렵다.

2010년 한국 근로자의 연간 평균 근로시간은 2193시간으로 멕시코의 2242시간에 이어 세계에서 둘째로 길다. 그러나 우리보다 근로시간이 더 긴 멕시코는 10만명당 자살 숫자가 우리의 6분의 1도 안 되는 4.8명인 걸 보면 근로시간도 자살률과는 직접 상관이 없다. 빈부 격차가 작고 사회 안정도가 높은 일본도 자살률은 OECD 3위 국가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이슬람교 등 세계의 주요 종교는 모두 자살을 가장 큰 죄(罪)로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 절대다수가 자살을 죄로 여기는 세계 주요 종교를 믿고 있다. 이런데도 자살률이 세계 1위다. 정말 무엇이 국민의 행복도와 자살률을 결정하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갤럽 여론조사에서 '삶이 행복하다'고 대답한 국민 비율을 보면 GDP가 8402달러이던 1993년이나 2만2489달러가 된 2011년이나 똑같이 52%였다. OECD가 지난 2월 발표한 우리의 국민 행복지수(幸福指數)도 회원국 32개국 가운데 31위로 바닥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숨 가쁜 경제성장 끝에 우리 제품과 K팝이 세계를 휩쓸고, 국가신용등급이 일본보다 높아지고, 올림픽 금메달 순위로 5위에 오르게 됐지만 국민 행복도와 삶의 질이 개선됐다는 느낌을 갖기 어렵다.

국가 운영의 최고 목표는 국민의 삶을 인간답고 풍요롭게 만드는 데 있다.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기에 경제와 국력 상승에도 불구하고 국민 행복도는 꼴찌에서 헤매고 자살률은 세계 최고인지 범사회적 수준에서 토론해봐야 할 때가 됐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9/10/2012091000936.html

Posted by 겟업
2012. 9. 23. 02:56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꿀벌이 춤을 추며 동료에게 꿀이 있는 곳을 알려준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1973년 노벨상을 수상한 카를 폰 프리슈(Karl von Frisch)에게는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사사건건 문제 제기를 하던 에이드리언 웨너(Adrian Wenner)라는 젊은 학자가 있었다. 꿀벌이 추는 일명 꼬리춤(waggle dance)에 꿀을 따온 꽃밭까지의 거리와 방향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다는 폰 프리슈의 주장에 웨너는 끈질기게 동료가 다녀온 꽃의 냄새를 맡고 그 방향으로 날아나가는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몇 차례 이 같은 논쟁을 거치면서 웨너는 단숨에 폰 프리슈와 마주앉을 수 있는 지위로 뛰어올랐다는 점이다.

애플이 삼성전자 캘리포니아로 끌고가 유치할 정도로 편파적인 법정 모의를 연출해내곤 쾌재를 부르고 있다. 적지 않은 벌금을 내게 될지도 모르는 삼성으로서는 심기가 불편할 수 있겠지만, 길게 보면 삼성에 더할 수 없이 훌륭한 호재였다고 생각한다. 애플이 삼성을 가장 껄끄러운 상대라고 만천하에 공표함으로써 이제 삼성은 노키아나 소니를 확실하게 따돌리고 오로지 애플만 상대하면 되는 국면을 맞았다. 게임이 훨씬 쉬워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애플의 집권이 그리 길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덧 지킬 게 너무 많아진 애플은 그 옛날 그들을 성공의 길로 이끌어준 '유저 프렌들리(user-friendly·사용자 친화적인)' 정신을 내팽개친 지 오래다. 아이폰은 애플이 깔아준 멍석 위에서만 잘 놀 수 있다. 일등 자리에 오를수록 두루 품어야 하는데 고독해지기 시작하면 내려올 일만 남은 셈이다.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애플은 삼성을 애써 링 위에 올려준 걸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다.

최근 새누리당 안철수 교수에게 사뭇 어설프게 싸움을 건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조금만 더 영악하게 생각했더라면 안철수 교수는 슬쩍 모른 체하고 지금 여론조사에서 훨씬 뒤처져 있는 야권 후보 중의 다른 한 사람에게 싸움을 거는 척했어야 한다. 침팬지 사회의 으뜸 수컷은 아무리 버금 수컷들이 날뛰더라도 좀처럼 먼저 집적거리지 않는다. 권좌를 넘볼 만큼 막강한 버금 수컷을 건드리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 게다가 안철수 교수는 웨너가 아니라 삼성전자 급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9/10/2012091002375.html

Posted by 겟업
2012. 9. 23. 02:55

문화부 차관 사퇴 후 학계로
사회에 받았던 것 돌려주자 생각… 대학 여가디자인학과서 강의… 문화 관련 사회적기업 키우는 꿈

한류대학원
한류를 비즈니스로 활용 연구… 美·日과 달리 멀티유즈 안돼… 문화업체·中企 이종결합 절실

다음 정부에 바라는 일
'한류' 표현 문화침략주의 오해… 긴 호흡으로 한국문화 알려야… 정부는 가치·비전 소통해야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가 올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대상을 탔다.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은 유튜브에 오른 뮤직비디오가 전세계에서 1억회 이상 재생되었다. 전세계에 한국문화의 자리가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한국문화에 쏟아지는 관심을 한국사회는 어떻게 소화해내야 할까. '한류'라는 이 바람은 제대로 흘러가는 것일까. 9월에 문을 연 가톨릭대 한류대학원 유진룡(56 전 문화관광부 차관) 원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2006년 청와대쪽의 인사청탁을 거절한 후폭풍으로 차관직을 자진사퇴하다시피 한 유 원장은 1979년 행정고시를 통해 문화공보부에 첫발을 디딘 후 27년간 문화행정에만 전념한 문화전문가면서 퇴임 당시 후배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공무원의 전범이라는 칭찬을 들어왔다. 이번 정부에서 문화부 장관으로도 거론됐던 그에게 정부는 어떤 역할을 하는 게 좋은가도 당연히 물었다. 

_어떻게 지내셨어요? 

"그동안 사회에서 받은 것을 되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우선 북한을 돕는 사단법인 봄의 이사를 맡아서 지원활동을 살짝 도왔고요. 을지대에서 와달라길래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야 한다, 공부해야 한다는 해도 놀아야 한다 쉬어야 한다는 없어서 그런 전문가를 키우는 학과를 만들자고 했어요. 2007년부터 신입생을 뽑았는데 여가디자인을 하려면 스스로도 잘 놀아봐야 하는데 학교가 그런 걸 체험시키는 투자에 너무 인색해요. 실습비 타낼 때마다 매년 학교랑 실랑이를 하는 데 지쳐서 첫해 입학생이 졸업하는 걸 보고는 (부총장까지 되었지만) 그만뒀습니다. 그리고는 서울사이버대학 사회복지대학원 사회서비스과정에 입학을 했어요. 사회적 기업을 키우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딱 그런 걸 가르쳐요. 세스넷이라는 단체를 통해 사회적 기업 만들려는 이들을 돕는 멘토링도 하고 있어요." 

_왜 하필 사회적 기업이요? 

"흔히들 문화산업을 키우면 부가가치가 커지고 고용이 창출되고 그러는데 실지로 고용이라는 게 불량고용이에요. 고강도 노동에 저임금인 자리가 대부분이에요. 관광이나 여가, 문화예술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이고 사회적으로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본인에게 경제적 기여는 적다면 그게 사회적 기업이지요. 을지대에 있을 때도 학생들에게 너희들이 벤처를 해서 큰돈을 벌 수도 있겠지만 보람을 느끼고 재미있는 일을 하는 것도 생각하라고 강조했어요. 영국에서는 공예가들의 사업을 지원하는 콕핏아츠라는 사회적 기업이 아주 잘되고 있어요. 베네수엘라의 엘시스테마도 일종의 사회적 기업으로 성공한 사례인데 우리나라는 몇 십억을 들여서 악기를 사주는 시도를 하는데 중요한 것은 엘시스테마를 만들기 위해 예술가들과 지역사회가 청소년들을 설득해서 예술활동을 하도록 설득하는 과정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결과만 보고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서두르고 과잉투자를 하니까 걱정이 듭니다. 몇 년전부터 청년인턴지원사업이니 사회적 기업에 대해 여러 부처에서 돈을 쏟아 붓는데도 정부 지원이 끊어지면 사회적 기업도 함께 망해버려요." 

_한류대학원은 뭘 가르치는 건가요? 

"한류를 어떻게 비즈니스로 접근하고 활용할 것인가를 가르칩니다. 수강생도 무역회사 관광회사 제조회사 사람들이에요. 2년짜리 MBA과정과 한학기짜리 일반인을 위한 과정이 있습니다. 내년 3월에는 한국내 외국인만을 대상으로 영어로 한국문화를 일러주는 최고위과정을 만들 계획입니다. 한류컨텐츠 산업 자체가 미국이나 일본과 달리 내부적으로는 멀티유즈가 안되고 외부적으로는 이종결합이 안돼요. '겨울연가'도 드라마보다 관광산업의 부가가치가 더 컸는데 이런 게 계속 나오도록 중소기업에서 협업을 요청하면 케이팝이나 케이드라마를 만든 문화업체에서 거절을 해요. 타협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가격을 부르거나 '우리가 만들겠다'고 해요. 알고보니 케이팝이나 케이드라마를 힘들게 띄울 여타 업체들이 아주 시큰둥했다는 거에요. 피해의식이 남아있어서 이종간의 협업이 잘 안됐던 겁니다. 그게 안타까워서 이종결합을 돕는 플랫폼 구실을 저희 한류대학원이 해보려고 합니다. 코트라, 관광공사에 협력을 제안하니까 진작에 이런 것이 필요했다고 하네요." 

_그런데 한류라는 표현은 올바른 거예요? 

"사실 한류라는 표현을 안 좋아해요. 영어로 하면 웨이브(wave 파도)인데 그건 잠깐 생겼다가 없어지는 일시적 현상이라는 개념이잖아요. 일본문화나 중국문화가 인기를 끌 때 재패니스웨이브나 차이니스웨이브라는 말을 하지 않았잖아요. 되려 혐한류가 반작용으로 생길 수도 있고요. 우리나라의 유명한 정치가가 외국인들 많이 모인 자리에서 '한류가 얼마나 인기인지 중동국가 가니까 여자들이 히잡을 벗어던지고 춤을 추더라' 그래서 이슬람 국가 사람들이 엄청 화를 냈다고 하더군요. 한류라는 것은 어찌 보면 세계 문화가 미국 일변도를 벗어나 다문화주의로 가는 흐름 속에서 한국의 어떤 문화컨텐츠들이 그들의 입맛에 맞았거나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한국의 문화컨텐츠가 관심을 끄는 것인데요. 나라마다 그 관심사나 취향은 다 다른데 정부에서 한류를 이야기하면서 공급자 중심으로 소개한다는 식으로 가면 문화제국주의나 문화침략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어요. 긴호흡을 갖고 문화적 다양성 안에서 한국사회 한국문화를 알리자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_그런데 한류에도 싸이는 성공하고 원더걸스는 실패했어요. 왜 그런 차이가 생길까요? 

"사실 문화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도 왜 성공하는지 몰라요. 결과를 되짚어보면서 어떤 게 그들의 정서에 받아들여졌다는 걸 파악할 뿐이지요. 문제는 우리가 싸이가 성공한 이야기는 많이 해도 원더걸스가 실패한 이야기는 없어요. 그걸 알아야 똑 같은 실패는 하지 않을텐데요." 

_실패로부터 배운다, 원론적인 이야기는 많이 하지요. 

"그런데 현장에서 실제로 원인을 찾지는 않아요. 작년 겨울에 재팬파운데이션 초청으로 보름간 일본을 가볼 기회가 생겼어요. 원하는 것은 다 보여준다길래 미안하지만 일본의 실패한 사례를 보고 싶다고 열 몇 군데를 적어냈어요. 그랬더니 그들 스스로 더 얹어서 스무군데를 보여줬어요. 그 중에는 나가사끼에 있는 하우스텐보스라고, 한국에는 '꿈의 테마파크'로만 알려져 있는 곳도 있었어요. 알고보니 여기가 만든 이후 한번도 흑자를 내본 적이 없대요. 여기 뿐 아니라 테마파크 가운데 도쿄디즈니랜드하고 오사카의 유니버설스튜디오 말고는 다 적자를 보거든요. 오사카도 최근에야 흑자로 돌아섰고요. 문제의 핵심은 과잉투자였어요. 지금 우리나라에도 제주도 같은 데서 나타나거든요. 일본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첫 마디가 그거에요. 자기네는 정치인하고 지역관리들하고 결탁을 해서 시설에 과잉투자를 해서 망했다. 불필요한 도로와 시설을 경기가 한참 좋을 때 마구마구 지었는데 경기가 나쁘니까 관리비만 들어가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걸 똑같이 따라가고 있어요. 여수엑스포 끝난 다음에 과잉투자된 시설을 어떻게 운영을 할 것인가. 일본에서 성공했다는 나오시마와 니카다의 산골마을인 에티고쯔마리인데 여기는 과잉투자를 하지 않고 지역민들이 원하는 것을 해줬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거대시설을 만들면서 지역민들을 쫓아내요. 일본내 스키리조트도 경기가 좋을 때 과잉투자되어서 운영하지 못하는 데가 대부분이었어요. 평창 올림픽 준비를 할 때도 참고해야 해요. 제가 공무원 그만 둔 해부터 방학 때면 도로를 따라 걸었어요. 강릉에서 동해안을 따라 걷는 7번 국도가 있어요. 옛날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놔두고 새로 고속도로를 냈어요. 옛길을 따라 걷다 보면 문닫은 가게가 3분의 1이 넘어요. 여수도 여수엑스포 한다면서 고속도로 냈잖아요. 그 도로는 누구를 위해서 뚫은 거지요? 우리나라를 구석구석 보자, 캠페인 아무리 해도 천천히 살자, 천천히 살아도 좋다고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거에요. 관광도 계속 거대한 리조트 개발하는 식으로 하는 건 폭탄 돌리는 짓이에요. 우리 국민들이 그걸 막아야 한다는 보편적인 인식을 갖는 게 중요해요." 

_그런데 사대강도 그렇고 사실은 가장 강력한 파괴자들이 정부잖아요. 

"맞습니다. 공무원들이 지역업자하고 결탁해서 과잉투자를 해요." 

_사람들은 의식이 높아졌는데도 공무원들이 계속하는 건 어떡해야 하지요? 

"그걸 막아야지요. 그런데 이 정부에서는 막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봐요. 그런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정부에 없어요. 그러니까 다음 정부는 그런 정부가 들어서게 만들어야지요. " 

_그래서 이번 정부의 홍보수석과 문화부 장관을 거절한 겁니까? 

"(희미한 웃음) 장관은 그 사람들이 인선에 올렸는지는 몰라도 제가 들은 말은 없고요. 홍보수석은 거절했어요. 제가 79년에 문화공보부를 들어갈 당시 행시 출신은 주로 공보파트로 보냈어요. 정권 홍보가 중요할 때니까. 그런데 저는 신념에 어긋난 일은 하고 싶지 않아서 문화행정만 하겠다고 했고 다행히 상사들이 받아줬어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일반직은 보내지 않던 국어연구원에 보내더라고요. 그건 보통 나가달라는 뜻이라는데 저는 거기 있다가 교육을 받으러 나갔다 왔어요. 왔더니 박지원 장관이 부임해서 저를 공보관으로 부르셨어요. 그 때 공보 일을 처음 했어요. 장관과 공보관은 서로 판단이 다를 수가 있어요. 그걸 일일이 물어볼 수도 없고 판단이 다르게 발표를 하면 장관이 막 화를 내요. 나중에는 '일은 잘하는지 몰라도 충성심이 부족해.' 이래요. 제가 두번까지는 참았는데 자꾸 그러길래 '저한테 국민이나 국가, 정부에 대한 충성심을 이야기하는 거면 받아들이겠다. 그런데 정권에 대한 충성심, 정치적인 충성을 이야기하는 거라면 못 받아들이겠다' 그랬어요. 이 양반이 화를 내고 나가라고 하더니 30분 뒤에 다시 불러요. '내가 생각해보니까 당신 말이 맞다. 내가 앞으로 정치적인 거는 충성 이야기 안 하겠다.' 그때부터 서로 진짜 신뢰하게 됐어요." 

_여러 장관 모셨는데 어떤 장관을 좋은 장관으로 기억합니까? 

"최병렬 김영수 박지원 정동채 장관을 존경해요. 그러고 보니 노태우정권 때부터 노무현 정권 때까지 정권마다 다 존경하고 좋아하는 장관들이 있었네요.(웃음) 이 분들을 꼽은 이유가 직원을 신뢰하고 외부의 부당한 압력에서 방패가 되어주고 직원들이 소신을 갖고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게 해주거든요." 

_다음 정부, 다음 문화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공무원과 국민의 신뢰를 받는 정부가 되었으면 합니다. 노무현 정부에서 공무원들한테 혁신을 강조했는데 성공하지 못했거든요. 내부에 신뢰를 통한 소통이 되지 않으면 그래서 자발적인 협조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방법만을 강요해요. 그 때 해양경찰청이 우수혁신부서로 꼽혔는데 바다에 많이 나간 게 아니라 책상에 앉아서 보고서를 열심히 썼어요. 노무현 정부 시절에 국민들의 의식이 많이 올라갔다는 것은 동의해요. 그런데 (권력을 잡은) 그들 스스로는 의식이 올라가지 않아서 문제가 생겼던 것이라고 보거든요. 대통령은 인사청탁을 거절하라고 말했지만 제가 인사청탁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뒷조사를 받았을 때도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노무현 정부는 기본 가치관을 외쳤지만 속으로는 지키지 않았고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기본 가치관을 아예 겉으로도 패대기를 쳤어요. 심각한 문제에요. 다음 정부가 할 일은 다시 공동체가 지켜야 할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런 비전을 제시하는 정부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도덕적 기준은 엄격해야 한다, 그건 기본이지요."




Posted by 겟업
2012. 9. 23. 02:53

지식창조시대 도래했지만 우리는 제대로 대응 못해
중화학공업, 전자산업 등 산업화 비결이 이젠 장애로
산업사회적 구태 혁파 없이는 제로섬게임밖에 되지 않아

 이병기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

우리나라가 G20 회의 개최를 앞두고 한창 들떠있던 2010년 11월 8일,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 특집에서 '기적은 끝났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이 칼럼은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20개국을 맞이하면서 불편한 진실에 직면하게 된다"고 전제하고 "그것은 경제 기적을 낳은 전략이 수명을 다해가고 있고, 이것을 대체하는 새 전략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라고 썼다. 그리고 "한국은 농업경제를 산업력으로 전환함으로써 고속 성장을 했는데 그 성장을 지속하려면 어떤 근본적이고 힘든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에는 남의 잔칫상에 재를 뿌리는가 싶어 못마땅했지만, 한국의 산업 현실을 객관적으로 짚어주는 정확한 진단이었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국가적 노력을 총집결하여 전통적인 농경사회를 산업사회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바로 '한강의 기적'이다. 그래서 철강·자동차·조선 등 중화학 산업이 세계 속에 우뚝 서게 되었고, 반도체·휴대전화·디스플레이 등 첨단 전자산업이 세계시장에서 앞서가게 되었다. 그리고 산업화의 성공을 밑거름으로 민주화가 급진전했는데 그 와중에 다음번 기적을 일구어낼 동력을 상실했고 방향감각마저 잃어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지식 창조 시대가 도래했다. 1970년대에 퍼스널컴퓨터(PC)가 출현한 이래 지식의 역할이 꾸준히 확대되어 왔고, 산업사회의 중심축이 지식 창조 산업으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5년 전 애플의 아이폰 출현과 함께 '스마트 빅뱅'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식 창조 시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1997년 IMF 사태 이후에도 여전히 '정부 주도, 제조업 중심'의 산업시대 패러다임에 젖어있었고, 누구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산업화 성공에 안주하면서 민주화 성공으로 다양하게 분출하는 국민과 유권자들의 욕구 충족에 전전긍긍했을 뿐이다. 산업자원부를 지식경제부로 개칭하는 정도의 변죽을 울렸을 뿐 정부 구조와 운영 개혁, 공무원의 의식 전환, 산업 구조 개편 등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근본적인 변혁이 없었다.

이제 지식 창조물은 글로벌 산업 경쟁의 최전선에 포진하고 있다. 지식 창조 사회로 전환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역사적 과업이 되었다. 이를 성사시켜야만 중화학공업·전자산업의 두 엔진과 함께 지식 창조 산업이란 세 번째 엔진을 가동해 미래 경제를 견인할 수 있다.

문제는 산업사회적 구조와 의식의 혁파 없이는 지식 창조 사회를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 산업화를 성공으로 이끌었던 비결이 다음 단계의 진화에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정부가 소프트웨어나 콘텐츠 산업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했음에도 성공시키지 못한 것은 제조산업적 방식으로 지식 창조 산업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두뇌로 만들고 인터넷을 통해 유통하는 지식 창조물을 기계로 만들고 물품 유통망을 통해 유통하는 제조 상품과 같은 방식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지식 창조 사회를 향한 패러다임 전환이 바로 월스트리트저널이 지적했던 '어떤 근본적이고 힘든 변화'이다. 이것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상응하는 국가적 결집 노력과 대통령의 강력한 추진 의지 없이는 불가능한 대변혁이다. 요즘 정치권이 경쟁적으로 복지와 경제 민주화 공약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제로섬게임밖에 되지 않는다. 지식 창조 사회로 패러다임 전환을 추진하여 산업사회적 구태(舊態)를 혁파하고 지식 창조 산업을 발전시키면서 복지와 경제 민주화를 함께 이루어나갈 때 우리나라는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다. 지난 50년간 일구어낸 산업화·민주화 기반 위에 '지식·문화 산업 강국(强國)'의 새 세상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9/09/2012090901229.html

Posted by 겟업
2012. 9. 23. 02:53

1912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고 있을 때,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선거본부는 매우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선거 팸플릿 300만 부에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인물 사진이 실린 것이다. 시세대로 하자면 300만 달러 이상을 물어주어야 할 판이었다. 선거본부장은 숙고 끝에 저작권자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당신을 전국에 알릴 수 있도록 당신 사진을 우리가 팸플릿에 실어주면 얼마를 낼 용의가 있는가?"

그 편지에 이런 답장이 왔다. "기회를 줘서 고맙다. 250 달러 내겠다." 기막힌 반전이었다. 300만 달러짜리 손해를 250 달러의 이익으로 뒤집은 셈이다. 거기에 궁벽한 상황의 전후 문맥을 잘 파악하여 적절하고 순발력 있는 조치를 통해 전혀 새로운 길을 열어 보인 지혜가 잠복해 있다. 창의적 아이디어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런데 그 창의력이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다. 평범한 일상의 표층 아래에 숨어 있는데도, 다만 우리가 잘 찾아내지 못할 뿐이다.

우리나라도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로 접어들었는데, 내친 김에 선거 얘기를 하나 더 해 보기로 하자.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73세의 로널드 레이건과 그의 측근들은 '대통령이 되기에 너무 늙었다'는 대중적 인식을 극복하는 것이 선거전의 가장 큰 과제라고 판단했다. 경쟁자인 월터 먼데일 후보가 줄곧 레이건의 고령을 문제 삼고 나섰다. 이 과제가 반전의 계기가 된 것은 두 후보의 TV 토론에서였다.

먼데일이 먼저 이렇게 물었다. "대통령의 나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레이건이 전혀 엉뚱한 답변으로 맞받았다. "나는 이번 선거에서 나이를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먼데일이 어이가 없어 "그게 무슨 뜻입니까?"라고 다시 묻자, 레이건은 이렇게 응수했다. "당신이 너무 젊고 경험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정치적인 목적에 이용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모든 청중은 박장대소하며 웃었고 먼데일도 결국 따라 웃었다. 그리고 그는 두 번 다시 나이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이 예화의 교훈은 단순히 대통령 선거에서 수준 있는 유머를 보았다는 의미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유머가 얼마나 참신하고 감동적인 창의력을 바탕에 두고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프랑스 속언에 '유머 감각이 없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생각을 하지 말라'는 표현법이 있다. 창의력이 있는 유머는 그것을 발화하는 사람 자신만이 아니라 널리 주위와 세상을 이롭게 한다. 반면에 마른 장작 같이 딱딱한 언사로는, 아무리 논리 정연한 주장을 내놓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아 감응력을 일으키기 어렵다.

미국 대통령들의 일화를 살펴보던 중이니 거기에 하나를 더 보태기로 하자. 한국 식탁의 김치처럼 서양 식탁에 빠지지 않는 것이 브로콜리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얘기이다. 부시 대통령이 어느 날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면서 자기 음식에 브로콜리를 넣지 말라고 부탁했다. 이 일은 곧 입소문을 타고 널리 퍼졌다. '부시는 브로콜리를 싫어한다'는 풍문과 더불어 브로콜리의 판매량이 급감했다. 애꿎은 피해를 본 브로콜리 재배 농장주들이 모여서 대책을 논의하고 놀라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미국 농민들은 거친 항의나 데모 대신에 한 통의 편지와 함께 대형 화물차에 가득 실은 브로콜리를 백악관에 선사했다. '대통령님! 미국 사람들이 즐겨 먹는 영양분 많은 채소입니다. 지금까지의 생각을 바꾸셔서 즐겨 드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사건이 다시 언론에 크게 보도될 때, 부시는 이렇게 입장을 밝혔다. "나는 그때 브로콜리를 너무 많이 먹어 잠시 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화를 복으로 바꾸었다. 엄청난 홍보 효과와 더불어 급기야 브로콜리는 외국 수출의 효자 품목이 되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감동이 살아 있는 유머는 물리적 계산이나 이성적 판단을 넘어서는 기적을 창출한다. 꼭 100일이 남은 이번 대통령 선거가 예전처럼 이전투구의 늪으로 침몰하지 않도록, 예선이나 본선의 후보들이 이 대목을 조속히 깨우쳤으면 한다.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하는 후보가 당선되었으면 좋겠다.



김종회 경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9/h20120907210543121770.htm

Posted by 겟업
2012. 9. 23. 02:51

지난달 두 가지 낭보가 날아왔다.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 더위를 식혀주기에 충분했다. 런던 올림픽 종합순위 5위와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의 국가신용등급(Aa3) 상향 조정이 그것이다. 이는 한국이 스포츠 강국이자 신용등급 강국으로 도약했다는 의미다.

둘 중 무엇이 더 의미 있을까. 경중을 논하기엔 두 가지 모두 기쁘고 축하할 일이지만 필자의 입장에선 후자가 훨씬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무디스는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던 한국의 신용등급을 Baa3까지 떨어트렸다. Baa3는 투자하기엔 위험한 나라라는 의미다. 당시 필자는 옛 대우증권의 런던 법인에서 일했다.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자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거래처도 일방적으로 거래 중단을 통보해 왔다. 네트워크는 모두 망가졌고 필자도 런던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4년이 지난 지금, 일본과 같은 등급이 됐다니…(또 다른 신용평가사 피치는 한국이 일본의 신용등급을 추월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마냥 이런 상황에 취해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최근 세계 경제는 마치 초대형급 태풍 ‘볼라벤’이 한반도를 덮치기 직전과 같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특히 중국 쪽이 심상치 않다. 상하이종합지수는 2008년 12월 이후 최저점에 머물고 있다. 중국 경제의 연착륙 가능성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부각되고 있다.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모습이 많이 퇴색했다.

그동안 중국 경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한국은 그 덕을 톡톡히 봤다. 문제는 중국이 지금까지처럼 고성장을 얼마나 더 이어갈 수 있으며, 한국 경제와 동반자적 관계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중국은 이미 3월 전국인민대표자대회(전인대)에서 원자바오 총리가 경제성장 방식을 ‘수출’ 주도에서 ‘내수’ 확대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과 일본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나타났던 현상이다. 일본은 수출을 통한 성장이 한계에 부닥치자 73년을 전후해 내수시장 위주의 산업구조로 바꿨다. 한국도 97년을 전후로 소비재산업의 성장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국과 일본 모두 산업의 구조적 변화를 통해 성장을 이어가긴 했지만 경제성장률은 과거 8~9%대에서 3~4%대로 둔화됐다. 중국도 한국이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경제성장률이 과거 10%대에서 6%대 이하로 둔화할 것이다. 주변 수혜국의 앞날도 같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섣부른 비관론에 빠질 필요는 없다. 지난 10여 년간 중국을 지렛대 삼아 경제를 발전시킨 것처럼 중국의 변화에 한국이 잘만 대응한다면 미래의 10년도 밝아질 수 있다. 그동안 중국을 산업재 수출기지로 활용하는 데 주력했다면 이제는 최종 소비재 수출과 문화·관광·의료 등 고부가가치 산업을 개척할 수 있는 시장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중국에 대한 소비재 수출이 강화돼야 한다. 과거 한국 수출의 대부분은 원재료와 자본재였으나, 향후 소비재 기업의 적극적 진출로 제2의 락앤락·이랜드와 같은 기업이 계속해서 나와야 한다. 둘째, 최근 한류나 K팝 열풍 등에 힘입어 한국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 수가 급증하고 있는 점을 활용해야 한다. 2009~2011년 한국을 찾은 중국인 관광객의 연평균 증가율은 20%를 웃돈다. 올해는 중국인 관광객 수가 270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전체 중국 해외 관광객의 5%에 불과하다. 더 많은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호텔 등 관광 인프라를 중국인의 기호와 눈높이에 맞춰 확충하고 개선해야 한다. 또 ‘쇼핑 한류’를 발판 삼아 중국인에게 인기 있는 한류 브랜드를 육성해야 한다. 싱가포르의 사례에서 보듯이 카지노 산업 활성화를 위해 규제를 완화하고 고부가가치 산업이자 한국이 국제 경쟁력이 있는 의료관광산업을 적극 육성해야 한다.

무디스는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높인 이유로 수출을 동력으로 한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꼽았다. 한국이 10여 년 동안 중국 경제 고도성장의 기회를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잘 활용해 왔다는 의미다. 따라서 한국의 미래는 변화하는 중국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한국은 지속적인 성장을 통해 결국 최고 신용등급(Aaa)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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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2:07

2006년 노벨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무크는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에서 이렇게 썼다. “코쿠가 평생 동안 썼던 미완의 『이스탄불 백과사전』이 헌책방 구석에 쌓여 있었다. 독자는 고사하고 폐지로 사려는 사람도 없었다.”

파무크는 불운한 작가가 공들여 쓴 책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묻히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나는 이스탄불 거리의 헌책방이 파무크라는 거장을 만든 자양분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서울에서 사라진 헌책방을 떠올려 보았다.

거리의 책방이 사라지고 있다. 전국의 서점은 2000년대 서서히 줄다가 2007년 이후 매년 200개 이상 없어져 2009년 2850개만 남았다. 이는 인구 1만7000명당 한 개꼴이며 이웃 일본의 절반 수준이다. 서울시 한 개 동의 평균 서점 수는 한 개가 안 된다. 그나마 수험생 참고서와 가벼운 베스트셀러가 대부분이라 다양하고 깊이 있는 책들을 찾기가 어렵다. 서점이 줄어드는 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서점의 대형화, 양극화와 더불어 온라인 서점으로 무게 중심이 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 현재 온라인 서점의 시장 점유율은 35%를 넘어섰다.

그런데 우리나라 동네 서점을 더욱 옥죄는 것이 있다. 바로 온라인 서점에서 제값 받고 책을 파는 ‘도서 정가제’를 지키지 않는 것이다. 독자는 쉽고 싸게 책을 사는 혜택을 누리는 것 같지만 컴퓨터 화면에 뜨는 소수의 베스트셀러를 편식하게 되고, 출판계는 할인액만큼 책값에 거품을 넣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진다. 출판사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신간을 펴내려 하지 않고, 독자의 선택권은 점차 줄어든다. 하지만 출판·서점계의 항의와 절규는 규제개혁과 공정거래를 내세운 논리 속에서 파묻히고 있다.

책값을 시장에 맡기자는 무한경쟁 논리는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 국가가 주도한다. 이들은 거대 경영을 통해 출판 산업을 전 세계로 확장할 수 있다. 묵직한 전문 서적을 펴내도 영어를 읽는 수억 명의 잠재적 독자가 있다. 또한 동네 서점이 사라지는 문제보다 서점의 대형화로 얻는 이익이 크다.


반면 인구 500만 명이 조금 넘는 덴마크와 같은 작은 나라에서 국민이 다양한 책을 제값 주고 사주지 않으면 자국어로 쓴 문화콘텐트는 소멸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동네 서점을 지키고 도서 정가제를 고수하는 이유다. 인구 1억2000만 명이 넘는 일본도 마찬가지다. 세계 최대 온라인 서점 아마존닷컴은 일본에서 도서 정가제를 지켜야만 한다.


한편 동네 서점이 사라지고 있는 미국의 경우 마을 단위의 공공도서관이 출판계를 지탱한다. 미국을 비롯한 G8 국가에는 인구 6000명당 공공도서관이 한 개 이상 있다. 일본은 G8에 속하지만 4만 명당 한 개로 평균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7만 명당 한 개가 있다. 서점이 사라져 가는 마당에 이를 보완하는 공공도서관마저 턱없이 부족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과연 서점과 도서관이 없는 거리에서 도시 경쟁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그런 사례를 보거나 듣지 못했다. 경제와 문화가 결합되어 경쟁력을 지닌 세계적 도시는 모두 보행문화가 정착된 곳이다. 이런 거리에서 무목적 배회를 허락하는 책방과 도서관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저장고다.

지난여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근교에 있는 알메르에 갔었다. 바다를 메워 만든 이 신도시의 중앙 광장에는 크고 근사한 공공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땅값이 가장 비싼 곳에 교육문화시설이 자리 잡은 도시 구조는 도심을 상업건축이 차지한 우리의 신도시와 극명히 대비되었다.

경제학자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도시의 승리』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도시는 작지만 창의적인 기업이 살아있을 때 번성한다. 거대한 기업들은 단기적으로 생산성이 높지만 역동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작은 서점과 도서관은 창의적 도시 네트워크의 접점이 되어야 한다.

서울에서 이름난 가로수길, 홍대앞, 인사동길, 북촌길, 서래마을길에 서점이 몇 개나 있나 검색해 보았더니 통틀어 두 곳이었다. 걷고 싶은 거리에서 느끼는 왠지 모르는 빈곤함은 이 때문이 아닐까.

김성홍 서울시립대 교수·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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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2:05

‘기술(technology)과 인문학(the liberal arts)의 만남’. 2011년 3월 스티브 잡스는 아이패드2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애플이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 내는 지향점을 이렇게 밝혔다.

단순히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채 깨닫기도 전에 그들이 원하는 바를 미리 파악해 전혀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주는 것. 예컨대 ‘더 빠른 말(馬)’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말과는 전혀 다른 ‘자동차’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게 애플의 비결이었다. 그러니 ‘와’ 하는 환호성은 절로 따랐고 ‘애플 빠’가 만들어진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단순함 혹은 간결함(simplicity)으로 대표되는 애플 제품의 디자인 역시 ‘가슴을 울리는 깊은 인간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애플은 불과 다섯 가지 품목(아이팟·아이폰·아이패드·맥북·맥피시)으로, 엑손모빌을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기업이 됐다. 또 아이폰 출시를 계기로 모바일혁명의 새로운 시기를 열었다. 정말 위대한 기업이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2011년 10월 잡스의 죽음을 계기로 그 위대함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 ‘애플 빠’는 ‘스티브 잡스 빠’다. 현재 애플의 최고경영자(CEO)인 ‘팀 쿡 빠’가 아니라는 것이다. 잡스는 이윤이나 돈보다는 최고의 제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팀 쿡은 스티브 잡스라면 결코 하지 않았던 일-현금 배당·자사주 매입-을 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잡스와는 다른 방향으로 제품을 바꾸기 시작했다.


뉴아이패드는 아이패드2에 비해 51g이 무겁다. 해상도가 증가하고 배터리 사용시간이 늘었다지만 잡스라면 결코 무게를 늘리지 않았을 것이다. 601g이라는 아이패드2의 무게는 손목에 부담을 주지 않고 누워서 빈둥거리기에 딱 좋은 무게이기 때문이다. 또 있다. 곧 출시될 아이폰5의 화면은 기존의 3.5인치가 아닌 4인치일 가능성이 크다. 잡스가 3.5인치 화면에 집착한 이유는 한 손으로 조작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이즈이기 때문이다.


이런 잡스의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 이뿐 아니다. 아이패드 미니가 나온다. 킨들파이어나 갤럭시 노트에 대항하기 위해서라지만 잡스라면 이런 일은 하지 않는다. 지금의 애플은 제품과 함께 ‘돈’과 ‘시장 지배율’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애플 제품은 아이튠스(i-tunes)를 축으로 하는 매우 폐쇄적인 생태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디지털경제의 역사상 폐쇄성은 결코 개방성을 이기지 못했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소니의 베타 방식이 마쓰시타의 VHS 방식에 굴복한 것, 애플의 맥 컴퓨터가 IBM 호환 PC에 굴복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 폐쇄성에도 불구하고 애플이 잘나간(나가고 있는) 것은 잡스가 가졌던 인간 중심의 철학, 그리고 거기에 열광한 소비자 때문이었다.

 부자가 망하면 삼대는 간다. 스티브 잡스는 죽었어도 애플은 최소 2년은 간다. 하지만 잡스가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제품에 대한 철학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애플은 결코 과거와 같을 수 없다. 잡스가 살아 있다면 삼성과 애플의 특허전쟁은 더 치열했을지라도 혁신적인 제품의 출시 가능성은 줄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은 줄어들면서(애플 TV 혹은 애플 자동차는 어느 정도 혁신적일까) 특허전쟁을 빌미로 ‘돈’과 ‘시장 점유율’에 천착한다면, 그리고 그 폐쇄성을 유지해 간다면 애플의 마법은 끝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삼성을 특허전쟁에서 이긴 지금 애플은 마법이 스러지기 전 마지막 불꽃을 찬란히 불태우고 있다. 그러니 나라면 지금 당연히 애플 주식을 팔겠다.

김기홍 부산대 교수·경제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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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2:02

[매거진 Esc] 박정석의 오리엔탈 스타일 제1회 
모범생 내 친구와 사사건건 달랐던 취향에 관하여

아시아를 꾸준히 여행한 소설가 박정석씨가 타이, 인도네시아, 베트남, 인도 등을 여행자의 시점에서 풀어냅니다. 그동안의 여행기와 다른 스타일로 아시아를 보여줄 박정석의 오리엔탈 스타일은 5회 연재됩니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아무리 하찮아도 서론-본론-결론이 있고, 지금 이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처음은 중요하다. 마지막에 할 수 있는 것은 잊는 것뿐이지만 처음은 마지막을 결정할 수 있으니까. 세상의 모든 일이, 단추 끼우는 것이, 연애가, 인생이, 그리고 여행이 그렇다.

여행도 정말 그렇다. 처음 발을 디딘 외국 땅은 향후 오랜 시간에 걸쳐 그 사람의 고향처럼 되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인도의 시장에서 아시아의 생동하는 문화를 느낀다. 시장 사이에 숨은 뒷골목은 시장의 또다른 풍경이다.
대학 가면 학원 등록할래 여행 떠날래


내가 처음 간 곳은 동남아였다. 고등학교 졸업 뒤 떠난 생애 최초의 외국 여행이었다. 홍콩에서 시작해 대만까지, 첫 경험치고는 무지하게 긴 일정이었다. 고생스러웠지만 무엇에 홀렸는지 돌아오자마자 다시 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 나라면 차라리 유럽에 한 번 더 가겠어.”

그때 내 두 번째 여행 계획을 듣고 어느 친구가 한 말이다.

그 애는 중학시절 나의 ‘베스트 프렌드’였다. 아주 모범생이었다. 누구라도 그런 딸을 원했을 것 같다. 지각도, 결석도, 2등도, 절대 하지 않는 애였다. 목표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재수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생관의 소유자였다.

나는 허위허위 팔자로 걸었지만 그 애는 전족이라도 한 것처럼 종종 걸었다. 나는 빨간색을 입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았지만 친구는 그 색깔을 즐겨 입었다. 나는 잘생긴 남자를, 그 애는 공부 잘하는 남자를 최고로 쳤다.

“대학에 입학하면 제일 먼저 뭐 할 거니?”

“나는 해외여행.”

내 대답이다. 바다 건너 저편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나는 학원에 등록해서 뭐든 열심히 배워보고 싶어.”

그 애가 대답했다. 우리는 서로 달랐고 그것이 우리 우정의 기반이었다.

지금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 애의 양 갈래 머리-한 올도 삐져나오지 않고 극히 단정했다-와 웅변대회에 나가기 위해 방과 후 빈 교실에 남아 연습하던 모습이다. “이 연사, 힘차게 외칩니다!”

친구는 진지했다. 허공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그 애 앞에서 메롱, 아무리 기를 쓰고 웃겨도 웃지 않았다. 먼저 한 주먹, 그리고 나머지 주먹.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마무리를 하면 나는 저도 모르게 짝짝 손뼉을 쳤다. 학교 대표로 앞에 나가 저렇게 고함칠 용기가 있다는 것이 대단하게, 거의 기묘하게 느껴졌다. 부럽고도 무서운 확신이여.

“네가 아직 안 가봐서 그렇지, 동남아도 꽤 좋아.”

내가 대학생이 되던 그해 그 애는 재수생이 되었다. 생애 첫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두 번째 입시 준비에 시달리는 친구를 위해 모험담을 들려주었다. “카오산 로드라는 곳에서 잤는데, 닭장처럼 좁은 방이 1박에 단돈 3천원이야. 싼 게 비지떡이라고 창문도 없는 방이라 질식할까 봐 선풍기도 못 틀었지.”

‘볼리우드’의 산실답게 인도 문화에서 영화는 가깝다. 종교의식에 필요한 꽃을 파는 꽃장수도 흔히 보인다.
“타이가 좋다고? 거긴 더럽고 가난하잖아”

하지만 세계 각지에서 온 반나체의 남자애들을 실컷 봤단다. 나는 내가 홀린 것처럼 친구를 매혹시키고 싶었다. 잘 익은 망고가 얼마나 황홀한 맛인지, 연푸른 열대 바닷가에 누워 바람결에 잠이 드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대학생이 되면 함께 가자.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타이가 좋다고? 내가 듣기로는 거기 우리나라 1970년대 같다던데. 더럽고 가난하고 ….”

친구는 내 이야기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난 동남아보다는 유럽에 가고 싶어. 우리 언니가 그러는데, 그렇게 멋있대.”

이듬해 친구는 무사히 대학생-희망하던 의대에는 결국 가지 못하고 약대에 입학했다-이 되었다. 여행 자유화와 함께 유럽 배낭여행이 붐을 이루던 시절이었다. 나와 친구도 시간차를 두고 각각 유럽을 다녀왔다.

유럽은 과연 근사했지만 그것으로 그뿐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타이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지를 여행했다. 맹세컨대, 싼 물가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기 갈 시간과 돈이면 난 차라리 유럽에 한 번 더 가겠다” 친구가 말했다.

“그러니까, 뭔가 보고 배울 만한 가치가 있는 선진국 말이야. 유럽이 역시 최고지.”

대학 4년 내내 우리는 한 학기에 두어 번씩 꾸준히 만났다. 변화가 곧 성숙으로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귀를 뚫고, 파마를 하고, 화장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최대 고민은 연애 문제였다. 우리는 예쁘지도, 그렇다고 착하지도 않았다. 눈은 높고 남자는 없었다. 시집이라도 가기 전에는 처녀성을 잃을 날이 요원해 보였다.

“내가 남자였다면, 그렇다면 우리 둘이 사귀는 것도 괜찮을 텐데.”

어릴 적부터 이상한 소리 잘하기로 소문난 내가 말했다.

“우린 잘 통하고 생전 싸우지도 않으니 남녀였어도 분명히 사이가 좋았을 거야.”

“그래 … 어쩌면 … 그럴지도 … 모르겠다.”

깊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나를 보던 친구는 곧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네가 남자라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학벌이 나보다 좋았어야지. 이를테면, 의대에 들어간다거나 ….”

서로 연락이 뜸해진 것은 내가 유학을 가면서부터였다. 우리는 가끔 안부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 애가 마지막으로 보낸 것은 청첩장이었다. “나 결혼해. 몇 달 전에 선으로 만난 남자야. 네가 보면 매력 없다 하겠지만, 나한테 잘해주고 에스(S)대 의대 출신이란다.”

나는 축하카드를 보냈다. 새색시는 바빴고 유학생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 뒤 내가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우리는 연락하지 않았다. 세월은 술술 잘도 흘렀다. 강산이 변하고 대통령이 바뀌고 내 주소와 몸무게도 변했다. 그러나 전화 몇 통이면 친구의 연락처를 알아내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전화는 필요도 없다. 인터넷으로 못 하는 것이 없는 요즘이다. 작정하고 찾으려 든다면 우리는 아마 이번 주말에라도 당장 대학시절 자주 만나던 압구정 모처에서 십 몇 년 만에 감격의 재회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베트남 중부에서 스친 푸른 논.
어느 새 내 주변은 비슷한 사람들로 우글우글

구차한 핑계가 다 그러하듯 내가 친구를 찾지 않는 이유는 하나가 아니다. 늙은 얼굴 보이기 싫어서, 만나면 어색할 것 같아서, 소득 격차가 창피해서, 그 애가 나를 먼저 찾지 않는 것이 서운해서 등등.

그리고 또 하나. 만나봤자 예전 같지 않으리라는 것, 그 만남은 아마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것이 매력이 되던 시절,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신기함이 순수한 호감으로 이어지던 시간은 이미 끝났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에 대해 성숙한 우리는 보통 망각으로 대처한다. 저 사람은 왜 저래, 하는 혐오감이나 일지 않으면 다행이다. 어느새 내 주변은 나 비슷한 사람들로 우글거린다.

과거에 훌륭한 학생이었던 내 친구는 이제 훌륭한 시민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유능한 중견 약사에 돈 잘 버는 의사의 현숙한 아내, 그리고 현명하고 열성적인 학부모가 되어 있을 것 같다. 그동안 유럽에 몇 번쯤 더 다녀왔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시간과 함께 사람은 변한다. 나도 변했다. 이젠 빨간색이 없어 못 입는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팔자 걸음걸이 같은 것. 그리고 지금 든 생각인데, 내가 여행지로 아시아보다 유럽을 더 좋아하게 될 일은 앞으로도 어지간해서는 없을 것 같다.

버마 동북부의 핑우린. 화사한 마차가 서 있다.

글·사진 박정석/ 소설가·<내 지도의 열두 방향> 저자

여행과 완고한 아빠의 추억

어린 처녀들이 처음 떠나면서 극복해야 했던 것들

곱게 자라난 어린 숫처녀가 물 건너 먼 곳으로 여행을 가기 위해서는 우선 다음의 세 가지를 극복해야만 한다. 비용 문제, 강간에 대한 공포, 아버지의 반대.

나의 첫 여행.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고 친구 한 명과 동행하는 것으로 앞선 두 문제를 거뜬히 해결했다. 마지막 난관은 우리 아버지. “가긴 어딜 간다는 거냐! 절대 안 돼!” 아버지는 펄펄 뛰며 화를 내셨다. 세상은 너무 위험하며 안전한 곳은 오직 집뿐이라고 믿는, 워낙에도 모험이나 자유정신, 여행과는 상극인 분이었다.

동행인 친구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마침 말레이시아 피낭의 어느 한국 공장에서 책임자로 계셨다. 우리가 숙소로 찍어 둔 홍콩의 청킹맨션을 미리 가서 답사하는 열성을 보이셨다. “그런 곳에서 하루쯤 자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더라.”

마침내 우리는 길을 떠났다. 홍콩에서 시작, 타이로 가서 말레이시아를 거쳐 싱가포르까지 이동, 대만을 들렀다가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은 복대에 넣어 배 속 깊숙이 차고, 강도에게 몽땅 털리면 비상금으로 쓸 100달러 지폐도 한 장 신발 속에 깔고 다녔다.

비용을 아끼느라 날마다 볶음밥을 먹었고 잠은 가장 싼 숙소에서 잤다. 모처럼 탄 비행기에 비즈니스석이 텅텅 빈 것을 보고 잽싸게 달려가 앉았다가 쓸쓸하게 일어난 적도 있었다. 이국에서의 하루는 고생과 실수, 학습과 깨달음의 연속이었다. 호랑이연고를 사고, 팟타이를 먹고, ‘코사무이’의 ‘코’(Koh)가 섬을 뜻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집 떠난 지 3주쯤 지나니 교양과목 몇 개를 수강한 것보다 더한 교양을 쌓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말레이시아 국경을 넘어 피낭에 도착했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조지타운 매음굴의 값싼 여인숙에 투숙,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일어나 인력거를 잡아타고 친구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아빠!” 친구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울었다. 부녀의 감격적인 상봉 모습을 목격하자 맥이 풀렸다. 친구의 아버지는 다정하고 합리적이었고, 고국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집 나간 딸 돌아오기만을 몽둥이 들고 벼르고 있었다. 어쨌든 그때 나는 열아홉 살이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내가 어딜 가든 여전히 아버지는 싫어한다. 영원히 그럴 것 같다. 행선지를 말하지 않은 지 아주 오래되었다. 어느새 아버지는 칠순이 넘었고 딸인 나는 당신에게 허락 받지 못해 울던 그 시절이 그립다. 이젠 괜찮아요, 아빠.

글·사진 박정석/ 소설가·<내 지도의 열두 방향> 저자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27548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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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02:00

"어머니는 늘 '위대한 것에 도전하라'고 하셨지요. 나의 꿈은 마틴 루터 킹처럼 세상의 불평등을 없애는 데 기여하는 것이었습니다."(김용 세계은행 총재) "실력은 기본입니다. 인격과 헌신이야말로 세계화 시대를 앞서가는 인물로 성장하기 위해 갖춰야 할 덕목입니다."(강영우 전 백악관 국가장애인위원회 정책차관보) "인간성이 결여된 엘리트주의는 사회의 리더를 만들지 못합니다. 자신의 풍족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강조되어야 합니다."(전혜성 전 예일대 교수)

 한국계 미국인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왼쪽부터 6자녀를 각 분야 엘리트로 키워낸 전혜성 전 예일대 교수, 고경주 미국 보건부 차관보, 김용 세계은행 총재, 강영우 전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 / 조선일보DB

지난달 김용 전 다트머스대 총장이 세계은행 총재로 선임되면서 국내 학부모들 사이에 '글로벌 인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김용 총재를 비롯해 얼마 전 작고한 강영우 전 백악관 장애인위원회 정책차관보, 그리고 형제지간인 고경주 미국 보건부 보건담당 차관보·고홍주 국무부 법률고문 등 한국계 미국인들이 그 관심대상이다.

'인재혁명'의 저자로, 한국 교육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실천전략을 제시해온 조벽 동국대 석좌교수로부터 이들을 모델로 한 글로벌 인재론을 들었다. 그는 미시간공과대학에서 20년간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수를 가르치는 교수'라는 별칭을 얻었을 만큼 교수법의 권위자다. 조 교수는 "김용 등 한국계 미국인들의 눈부신 성공은 '인성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은 한국 부모의 교육열과 미국의 열린 교육시스템이 서로 시너지를 일으켜 만들어낸 결실"이라고 말했다. 그 점에서 우리 교육의 새로운 방향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글로벌인재, 가정교육이 만든다

조벽 교수는 글로벌 인재에게 필요한 세 가지는 '창의성' '전문성' '인성'이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인성'이다. "인성은 글로벌 인재가 가져야 할 매우 중요한 능력입니다. 인성이 바탕이 돼야만 창의성과 전문성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성이란 도덕 혹은 윤리적 개념이 아니다. 삶에 대한 열정, 모험심, 호기심, 자신감, 가치관 등을 포함하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다. 조 교수는 그 전형적인 사례로 김용 총재를 꼽았다. 이는 김용의 세계은행 총재 선임 과정에서도 화제가 된 바 있다. 경제전문가가 아닌 그가 세계은행 총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비영리 의료봉사기구를 조직해 활동하면서 세계보건기구와 공동으로 결핵과 에이즈 등 저개발국의 질병 퇴치를 위해 오랫동안 '헌신'해 온 삶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중요한 것은, 봉사와 헌신에 삶의 가치를 둔 인성 교육을 그가 '가정'에서 받고 자랐다는 점이다. "오늘의 나를 만든 가치는 아버님의 실용성과 어머니의 헌신하는 삶에 대한 강조"라고 했을 만큼 김용 부모의 가정교육은 철저히 인성을 토대로 이뤄졌다. 특히 어머니 전옥숙 씨는 미국에서 퇴계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학자로, 아들에게 늘 '나 자신은 누구인가, 내가 세상에 무엇을 줄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면서 '위대한 것에 도전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퇴계와 마틴 루터 킹을 가슴에 품고 자란 김용은 '세상의 불평등을 없애고 사회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자고 결심했다.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해서 모두 김용처럼 성공하진 않지요. 100명 중 1명에 불과할까요? 한국 부모 특유의 교육열로 많은 한국계 미국 학생이 고등학교까지는 각종 상을 휩쓸며 수재로 자라나지만, 대학에 들어가 홀로서기를 시작할 때 인성적 토대가 허약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육열보다 교육의 방향이 중요

글로벌 인재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삶의 목표가 뚜렷했다는 점이다. 고경주 미국 보건부 보건담당 차관보, 고홍주 국무부 법률고문 등 6명의 자녀를 각계 엘리트로 키워낸 전혜성 전 예일대 교수는 "아이들에게 삶에 대한 뚜렷한 목적과 열정을 갖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걸 해야겠다는 열정이 생기면 공부하지 말라고 해도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한다"는 것. 실제로 장남인 고경주 차관보는 "어머니는 항상 우리에게 개인적인 성공보다는 많은 사람을 위해 일하라고 했다. 내가 공중보건학을 전공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잘 세운 보건정책 하나가 수백만, 수천만 명의 건강과 생명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조벽 교수는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의 교육열을 부러워하지만, 교육열보다 중요한 것은 교육열의 방향"이라고 지적한다. "인공위성을 쏘아올리려면 우주선을 받쳐주는 발사대 시스템, 로켓과 연료, 그리고 방향을 정하는 조정실이 필요한 것처럼 인재교육도 교육시스템, 교육열, 교육방향이 삼박자를 이뤄야 가능합니다."

조벽 교수는 또 글로벌인재들은 단지 IQ가 높은 사람들이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하버드대 출신 학생들과 보스턴 빈민가 출신 젊은이들의 삶을 72년간 추적연구한 결과를 들려줬다. "단기적으로는 하버드생들이 훨씬 성공하지요. 하지만 장기적으로 가면 하버드생 그룹에서도 빈민층 그룹만큼이나 마약중독자, 알코올 중독자 같은 실패자들이 나옵니다. 사고력·판단력·분석력 같은 인지적 능력 이상으로 가치·태도·감성을 다루는 정의적(情意的) 능력이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뜻이지요."

개같이 공부하면 정승된다? '짐승' 된다
김용母 "1등보다 위대한 것에 도전하라"
큰 꿈 심어주며 풋볼·농구 마니아로 키워
백악관 입성 고경주·고홍주 형제母
"목숨 바칠 대상 찾아주면 알아서 공부해"

첫째도 둘째도 '인성교육'… IQ는 잊어라
하버드생 그룹·빈민층 그룹 삶 72년 추적
하버드생도 마약·알콜 중독자 분포 비슷해
지능보다 모험심·배려심 등이 인생 좌우
세상에 주려 공부할 때 성공도 찾아와

캘리포니아의 영재 1528명의 삶을 90년간 추적한 연구도 마찬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IQ가 145 이상 되는 영재 집단에서도 다른 집단과 마찬가지로 성공한 사람, 실패한 사람의 분포가 비슷하게 나타났다. "IQ지수 위주로 디자인된 대중교육, 두뇌에 누가 더 많이 저장할 수 있느냐를 따지는 교육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여실히 느끼게 하죠. 인간의 IQ란 지능의 아주 작은 부분, 수치로 보면 겨우 5%에 불과합니다. 당장 학교에서는 성공할 수 있겠지만 훨씬 복잡한 사회로 나와서는 정의적 영역, 감성적 영역에서의 능력이 더 중요해진다는 겁니다."

긍정과 소통, 그리고 팀워크의 힘

시각장애인 박사로 유명한 강영우 전 차관보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가난한 소년가장으로 장애를 딛고 미국 피츠버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따낸 뒤 8년간 백악관 장애인위원회 정책차관보로 일한 그의 힘은 '긍정과 소통'에서 비롯됐다. 생전의 여러 인터뷰에서 그는 "시각장애로 할 수 없는 것도 많지만, 그것 때문에 이룬 일도 많다. 시각장애 때문에 오히려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됐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끈기가 생긴다"고 말했다.

강 박사 부부는 자식농사에도 성공했다. 장남 진석씨는 워싱턴포스트가 선정한 최고의 안과의사로 뽑혔고, 차남 진영씨는 백악관 최연소 특별보좌관(입법담당)이다. "부모와의 소통, 지식보다는 인성과 가치교육, 창의성과 집중력을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자녀교육의 핵심이었다. 생전 모국을 방문해 리더십 강의를 했던 강영우 박사는 "21세기 지도자의 본질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그가 내세웠던 '3C형 인재'는 유명하다. 3C란, 실력(competence), 인격(character), 헌신(commitment). "교육열이 뜨거운 한국의 부모들은 이 중에서 자녀의 실력만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던 그는, "이 세상에 주기 위해 공부할 때 자기의 성공도 찾아온다"고 했다.

조벽 교수는 "21세기는 머릿속에 담긴 내용이 얼마나 많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이 체험에 의해 얼마만큼 몸에 녹아내렸는가가 중요한 시대"라고 말했다. 이 또한 인성과 관련돼 있다. "세상에는 혼자 잘나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없습니다. 다양한 지식과 능력을 지닌 전문가가 함께 모여 팀워크를 이뤄야 하는 세상이죠. 노벨상에 공동수상자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의 성공은 그들만큼이나 훌륭했던 파트너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아무도 나와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으면 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개같이 공부하면 '짐승'된다

현재 한국 학생들의 인성 수준은 거의 바닥. PISA에서 수학과 과학은 1·2위를 다투지만 IEA의 국제시민의식 교육연구 조사(2009)에서는 36개국 중 사회성 35위, 협력성 36위로 최하위 수준이다. 조 교수는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려면 '누가 더 똑똑한가', '더 많이 아는가'를 필터처럼 가려내는 우리 초·중·고 교과과정이 전면 쇄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한국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답 지상주의'다. "한국 학생들은 대학입시준비 과정에서 약 100만개의 문제를 풀어본다고 합니다. 더 큰 걱정은 100만개의 문제에 죄다 정답이 있다는 거죠. 실패에 대한 공포와 모든 문제에 정답이 있다고 믿어버리는 닫힌 마음이 문제에요. 교과서적인 지식을 토대로 정답 신봉자를 키우는 교육에서 창의력을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교육의 다양성 부재도 걸림돌이다. '교육=공부=국·영·수·사·과'라는 편견이 지배적. 조벽 교수는 "우리가 하는 공부의 영역을 확장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스포츠, 예술 등 다양한 영역으로 학교공부를 확대시켜야 사고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 실제로 김용 총재는 스포츠 마니아였다. 풋볼팀에선 쿼터백으로, 농구팀에선 포워드로 맹활약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김용 총재로 인해 이른바 '타이거 맘'으로 불리는 아시아계 극성 부모들의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만 잘하는 아이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조벽 교수는 인성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글로벌 인재교육이 가능하려면 교사와 부모들이 '어른십(ship)'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인성을 강조해온 나라입니다. 지혜와 아량, 신뢰가 있는 어른들이 많아져야 가정과 학교에서의 인성교육이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인성과 학습이 상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호기심, 모험심, 배려심 등을 키우는 교육은 아이들의 성적을 향상시킵니다. 학교폭력도 사라지게 합니다. 개같이 공부하면 정승 된다고요? 짐승이 될 뿐입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5/04/2012050401443.html

Posted by 겟업
2012. 9. 23. 01:58



대기업 신입사원 월급이 50만원 하던 시절 연 2억원을 벌던 과외선생, '손사탐'이라 불리며 수천명의 수강생을 몰고 다니던 유명 학원강사, 그리고 지금은 시가총액 8000여 억원의 메가스터디 대표, 손주은 회장(50). 

지난달 27일 기자는 서초동 메가스터디 본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가 마흔 때 했다는 동영상 강의를 보았다. 태어나서 그렇게 색깔분필을 많이 쓰는 선생은 처음이었다. 노랑 파랑 빨강 분필에다, 별표도 한 개짜리, 두 개짜리, 세 개짜리, 거기에다 가는 선과 분필 눕혀서 굵게 그린 선 등 분필들의 호화 경연장이었다. 

"여러 색깔을 쓰면 저 스스로 집중력이 생기고, 그 집중력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거죠. 애들에 대한 안타까움이랄까요? 제발, 너희들은 이거 까먹으면 안돼, 제발 좀 알아줘야 해, 정말 중요한 거야, 뭐 그런 절규에요. 소리치는 거에요." 기자는 이 정도 열정, 이 정도 진정성이면 힘들어 하는 청춘들에게 메시지를 줄 자격이 된다 싶었다. 

"공부로 구원을 받는다? 기득권 뒷다리만 잡을 뿐이다"
동영상 강의 얘기를 다시 꺼냈다. 10년 전 동영상 속의 손사탐은 "공부말고 니들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목숨 걸고 해봐, 이넘들아. 알겠어?" 고교생들에게 거의 '협박'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20대 후반이 돼있을 이들에게 또다시 "취업공부, 고시공부말고는 니들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목숨 걸고 해봐. 알겠어?"라고 협박할 것인가, 기자는 따지듯 물었다. 대답을 듣는 순간, 뒤통수를 한대 맞은 듯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목숨 걸고 공부해도 소용없습니다. 생각이 모자랐어요. 이젠 신자유주의 시대 아닙니까?" 국내 최고의 사교육업체 대표가 "목숨 걸고 공부하지 말라"는 것 아닌가. 다 소용없다고, 그것도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이유로 말이다. 

"취업공부, 고시공부에 목매는 건 두렵기 때문이에요. 경쟁에서 밀리면 끝이다, 안전망이라도 찾자는 거죠. 양극화에서 밀리지 않기 위한 발버둥일 뿐입니다. 공부해서 취업한들 대기업 부속품밖에 더 됩니까. 얄팍한 인생밖에 더 됩니까. 이제 공부는 구원이 아니라, 기득권층 뒷다리만 잡고 편하게 살자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기자는 잠시 멍했다. 사교육으로 돈 버는 회사 대표라면 "신분 상승하려면 공부뿐이다", "몇 년만 참으면 인생 바뀐다"고 해야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 아닌가. 

그는 "메가스터디가 나쁜 기업일 수도 있다"고 했다. "메가스터디는 컸는데 젊은이들이 절망적 상태에서 꿈도 못 꾼다면 엄청나게 나쁜 기업이죠. 몸에 안 좋은 약 파는 짓보다 더 나쁠 수 있죠. 그래서 고민이 많아요. 매출의 덫에 빠지지 말자고 해왔지만 교육보다 기업에 더 관심을 뒀던 것 같고. (인터뷰 하고 있는) 지금처럼 CEO의 가면을 벗고 싶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도 얄팍한 수작일지 모르고…" 


"좀 '깽판'도 치다가 다른 길로 치고 들어가라"
공부해도 소용없는 이유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이랬다. "가진 사람들이 부를 세습하는 장치들이 너무 단단해요. 가진 사람들이 자식들을 위해 너무나 튼튼한 안전장치를 만들어놓고 있어요. 그래서 공부 잘한다고, 명문대 나온다고 중산층으로, 그 이상으로 올라가긴 쉽지 않아요. 대학 잘 가는 건 경쟁력 요소의 하나일 따름이지, 그렇게 큰 경쟁력은 아니라는 거죠." 어차피 바닥부터 시작해서는 아무리 공부 잘해도 중상층 이상으로 올라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대체 어쩌란 말인가. 죽도록 공부해봐야 얄팍한 인생 면하기 힘들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손주은은 스티브 잡스 이야기를 꺼냈다. "마르크스 혁명론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냐?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어떤 기술적 변화, 기술적 혁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잡스가 보여주었던 변화, 남들과 완전히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지적인 능력이 아니라 창의성, 이것이 미래 경쟁력이 아닌가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손주은은 "깽판도 칠 수 있는 젊은이들이게 미래가 있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대학 잘 간 애들이 보이는 행태가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려는 게 아니거든요. 오히려 깽판도 좀 칠 수 있는 애들한테 미래가 있지 않을까요. 정말 성공하고 싶다면 차라리 기득권의 안전장치가 없는 곳, 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고, 넘 볼 수도 없는 다른 길로 팍 치고 들어가라는 거지요. 어차피 그들의 안전장치는 쉽게 풀리지 않거든요. 다른 길에서 승부하라는 거지요." 

그러면서 손주은은 하나 더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성공하면 너무 튼튼한 안전장치는 만들지 마라는 것, 그건 어른으로서의 작은 당부이지요."

손주은은 새로운 사교육 모델을 구상중이다. 학생들 역량을 평가해 공부 잘할 수 있는 학생, 공부는 안 맞아도 다른 걸 잘할 수 있는 학생을 판별해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러면서 이익은 얻지 않는 것. 그가 왜 이런 고민을 하는지, 알만했다. 

"자식 떠나보낼 때까지 내 삶은 엉터리였다" 
손주은은 대학(서울대 서양사학과) 시절 두 번의 실연으로 절망의 선 아래로 떨어지기도 했고, 도박당구에 빠지기도 했고, 졸업도 하기 전에 결혼을 했고, 그러다 덜컥 애를 낳아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 과외선생을 했고, 계속 돈 벌려고 학원 강사를 했다. 그는 "끊임없이 나 자신과 야합하면서 완전 엉망으로 살았다"고 말했다. 

그러다 교통사고로 네 살짜리 아들, 두 살짜리 딸을 몇 달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보냈다. 그땐 그도 세상을 떠나보내고 싶었다. 한강에 몸을 던지지 않는 한, 방법은 '오로지 강의' 뿐이었다. 머리 속에 1%의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수 없도록 죽을 만큼 열정적으로 강의하는 것. 딸아이를 묻은 바로 다음날부터 그는 그렇게 했다.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너무 강한 펀치를 한대 얻어맞고 나니까 고통 같은 건 모르겠더라고요. 그냥 멍한 것, 고통보다 더 큰 멍한 것. 닥치는 대로 강의를 했죠. 잊을 수 있으니까. 그때 이후로 다들 큰일났다고 해도 전 큰일났다는 생각이 하나도 안 드는 거에요. 아주 특이한 경험을 해버려서 그런지, 충격을 별로 안 받는 기제가 만들어진 것 같아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이 때까지도 그의 삶은 '엉터리 삶, 가식적인 삶'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새로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그때서야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집중적으로 고민했다. "이러다간 어이없는 인생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벤츠 타고 살 순 있지만 가진 사람들 뒤나 핥아주는, 그런 인생 말이죠. 전혀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지 생각했는데 전혀 새로운 인생이란 게 저한텐 없더라고요. 가르치는 일을 내가 잘하니깐, 사교육의 현실을 인정하고 차선책을 구하자 싶었죠." 그래서 손주은이 시작한 것이 강남 부잣집 아이들 상대의 스파르타식 사교육대신,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강의와 뒤이어 온라인 강의였다. 


"영혼의 울림에 몰입하면, 상상 이상의 결과가 나온다" 
남들이 안 해본 극한의 경험을 해서 그런지, 청년들에 대한 그의 당부는 철학적이었다. '무엇을 하고 살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지' 천착하는 것, '얄팍한 중독'이 아니라 '영혼의 울림에 몰입하는 것', 그래서 '농구공이 골대에 빨려 들어가듯 자신을 어딘가에 갖다 꽂는 것'이었다. 

"시급알바하며 용돈 벌고, 남는 시간 여자친구 만나고 게임하고, 하루하루 그렇게 보내면서 바쁘다고 하고. 도서관 가서 시험공부 취업공부 좀 열심히 하면 그걸 몰입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얄팍하게 살다가는 답이 안 나옵니다. 젊은 친구들에게 '너희가 지금 하고 있는 경험은 폭도 작고, 엉터리경험, 가짜경험, 기성의 논리에 편입되는 경험이 될 가능성이 많다'고 하고 싶은 거죠."

그렇다면 어떻게 답을 찾아야 할까. "그간의 삶에 대한 반성적 성찰입니다. 난 이렇게 살았다, 저렇게 살았다, 잘했다, 성공했다, 노력을 덜했다, 이런 차원의 반성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인지, '가치'의 문제가 들어있어야 한다는 거죠.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빨리 안전망이나 찾자는 건 아닌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내가 지금 집중하고 있는 게 몰입인지 중독일 뿐인지, 치열하게 고민한다면 바로 거기서 답이 나올 거라 생각해요. 청춘이기 때문에 더 자기인생의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죠." 

자기인생의 본질에 충실한다는 것,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쉽지 않죠. 하지만 8800만원을 벌어도 눈치 봐야 하고 속으로 절망할 수 있어요. 반대로 88만원 밖에 못 벌어도 내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면 당당할 수 있어요. 물론 당장은 큰 결과를 못 만들 수 있죠. 하지만 자기내부에 양심과 영혼의 울림을 가지고 있다면, 그 울림에 귀 기울이고 몰입한다면, 그래서 모든 걸 던진다면, 상상 이상의 큰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거지요." 

청춘들은 많이 불안하고 초조한데, 그렇다고 대기업에 취업하고 고시에 패스하면 그 불안은 가실까. 손주은의 얘기대로 갈비뼈 윙윙거리는 영혼의 울림을 가지고, 그 울림에 모든 것을 꽂을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도 오히려 덜 불안하고, 덜 초초하지 않을까. 

손주은은 기자가 도착하기 전 2시간 동안 앉아서 '이렇게 살아선 안 되는데, 아! 이건 아닌데'하며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최소한 남을 속이진 말자, 아니 나 스스로를 이젠 좀 덜 속이자,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저도 지금 나 자신을 많이 속이고 있거든요." 

인생의 정답은 그의 말처럼 '변증법'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이건 아닌데' 하며 반성하고 고민하는 과정 속에, 끊임없이 영혼의 울림에 모든 걸 꽂으려는 과정 속에 정답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젠 손에서 분필을 놓았지만, 그의 영혼엔 여전히 색깔분필의 열정이 가득했다.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1110416553915832&outlink=1

Posted by 겟업
2012. 9. 23. 01:56

Posted by 겟업
2012. 9. 23.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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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고의 크리에이티브 킬러로 불리는 박웅현 ECD는 “창의성은 들여다보는 힘”이라고 말했다. “창의성은 한마디로 볼 ‘견(見)’ 입니다. 시청(視聽)이 아니라 견문(見聞)입니다. 일반인은 담쟁이를 시청하지만 도종환은 견문해서 시를 씁니다. 그리고 이 見을 예민하게 만들어주는 촉수가 바로 인문학이자 휴머니즘인 것이죠.” /사진= 이동훈 기자 photoguy@


<박웅현의 대표 카피> :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1993)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1995) '잘 자! 내 꿈 꿔'(1999)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2001) '차이는 인정한다 차별엔 도전한다'(2001)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2002) '커피 앤 도넛(2002) '생활의 중심 - 현대생활백서'(2005) '생각이 에너지다-지구 반대편을 찼다'(2007) 'SEE THE UNSEEN'(2008) '진심이 짓는다'(2009)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 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현역 광고인으로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친다는 박웅현(50) TBWA ECD의 4평 남짓 사무실에 붙어있는 시 구절이다. 그의 사무실은 기대와 달리 아주 평범했다. ECD(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면 크리에이티브가 생명인 광고회사에서도 광고제작 실무를 총 책임지는 임원급인데, 특별히 크리에이티브하다거나 튀는 인테리어도 없었다.

하지만 딱 하나 여느 사무실과 다른 게 있었다. 벽마다 닥지닥지 붙어있는 A4, B4, A3 종이들. 붙일 수 있는 데는 다 붙여놓았다. 처음엔 명카피들을 적어놓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장 그르니에의 <섬>에 나오는 구절들, ‘靑山不墨千秋畵(청산불묵천추화(청산은 먹이 없어도 천추에 남는 한촉의 그림)로 시작되는 한시… 
박웅현의 사무실 벽은 인문학 교수의 칠판 같았다. 그는 벽을 가리키며 “다들 ‘어디다 써먹을 거냐?’라고 묻는데, 이게 바로 내 청춘을 지탱했고 지금도 나를 받쳐주는 힘이자 본질”이라고 말했다. 그는 ‘본질’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힘주어 말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사람을 향합니다’ ‘진심이 짓습니다’ 등 그의 카피가 유달리 휴머니즘적인 것도 이런 ‘본질’때문인 듯했다. 

벽만 그런 게 아니었다. 책상 위에 공책은 왜 그렇게 또 많은지. 기자는 그 중에 표지에 ‘젊음’이라고 쓰여진 공책을 볼 수 있냐고 부탁했다. 그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젊은 친구들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틈틈이 적어놓은 것”이라며 펼쳐보였다. 첫 페이지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1.本質(본질)을 봐라 2. 클래식(고전)을 궁금해 하라 3. 强者(강자)에게 강하고 弱者(약자)에게 약해라 4. 동의된 권위에 굴복하고 강요된 권위에 저항하라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 6. 答(답)은 ‘여기’ 있다. 아니면 어디에도 없다 7. 주변의 고수를 활용하라 8. 외로워하지 마라. 다 똑같다. 

벽에 닥지닥지 붙은 ‘본질’의 내공이 느껴지는 메시지였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 박경철 안동신세계병원장이 대한민국 청춘들을 위해 콘서트를 열면서 왜 박웅현을 게스트로 초대했는지 알만 했다. 


◇왕따의 경험, 어느 순간 별이 돼 있었다

기자는 8번을 먼저 골랐다. 아무래도 지금 청춘들에게 위로가 될 것 같아서 였다. ‘외로워 하지 마라’고, ‘다 똑같다’고 했으니 말이다. 박웅현도 젊은 시절 똑같았다. 무섭도록 외롭고 힘든 시절을 보냈다. 대학(고려대 신방과)을 졸업하고 제일기획에 입사했을 때 그는 ‘왕따’였다. ‘회의에 방해만 된다’는 소리까지 들으며 회의참석도 못하고 혼자 사무실을 지켰다. 그것도 3년을 그랬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이 시절 그는 광고계 ‘지진아’였다.

“어머니가 표주박을 사주셨죠. 종이컵 쓰지 말라고요. 하루종일 벽보고 있는데 뭐 할 게 있나요. 동양철학서 서양미술사 보면서 박으로 머리나 때렸죠. 깨지면 서랍에서 또 꺼내서 때리고. 한 10개는 깨먹었을 겁니다. 박이 원래 잘 안 깨지는데 제 머리도 단단하거든요.” 얼마나 견디기 어려웠을지 그림이 그려졌다. 

인간이 겪는 고통 중에서 가장 큰 고통이 외로움이라는데, 그는 어떻게 버텼을까. “너무 외롭다고, 왕따라고 ‘어떡하지!’ ‘뭘 해야 잘 보일 수 있지!’ 이렇게 흔들리기 시작하면 중심을 잃어버립니다. 중심을 잃으면 다 무너지죠.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기중심을 놓치면 안 됩니다.” 당시 박웅현에게 ‘박’과 ‘책’은 외로움에 저항하며 자기중심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광고 하기에는 너무 사변적’이라는 말을 들었던 그는 3년 뒤 우연히 새팀에 합류하면서 순식간에 위치가 달라졌다. 한 의류업체 광고가 자신의 카피로 채택된 것.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제일모직의 '빈폴' 광고였다. 동료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하루아침이었다. “그때 드디어 ‘광고를 만드는 사람의 본질은 통찰력과 인문학이다’는 확신을 얻었죠. 내가 그렇게 믿고 살았던 게 확신이 된 거죠. 그래서 젊은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니가 그린대로 인생은 되지 않는다’고 말이죠. ‘왜 그래?’라고 물으면 ‘인생은 원래 다 그래. 답이 어디서 나올지 몰라’라고 말해주고 싶은 거죠.” 

박웅현은 나무 전문가가 된 사학자 강판권 계명대 교수, 국내 지리정보시스템(GIS) 최고전문가가 된 운동권 출신의 송규봉씨 사례를 들면서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살면서 수많은 점(點)들을 뿌리게 되는데, 이런 점들이 싹 깔렸다가 필요한 순간 점 다섯 개가 연결되면서 별이 됩니다. 이 분들이 나무학자가 되고, GIS 전문가가 되기까지 그 그림을 미리 머리에 그려놓고 달리진 않았을 겁니다. 매 순간 자기중심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별을 만들 수 있었던 겁니다.” 박웅현에게 젊은 시절 왕따의 경험과 수없이 읽었던 고전의 점들이 어느 순간 연결되면서 별이 된 것처럼 말이다. 

◇나의 수험서는 상식책, 토플책이 아니라 안나카레리나

흩어진 점들은 언젠간 연결돼 별이 될 수 있겠지만, 그전에 분명히 해야 할 게 있다. 한 점 한 점 찍으며 산다는 것은 청춘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어떻게 살아야 별을 그릴 확률이 높은 걸까. 

“입사 초기에 이런 얘기 많이 들었죠. ‘요새 홍대 뜨는 음악 뭔지 아냐? 그런 것도 모르고 어떻게 광고하냐?’ ‘그런 책이나 읽고 있으면 광고 못해’ 등등 말이죠. 그런데 요즘도 그렇지만 마케팅 서적, 자기계발서 같은 책엔 관심이 안 가요.(기자의 상식으로는 광고가 곧 마케팅인데도 그의 책꽂이에는 마케팅 책이 거의 없었다) 대학 때도 정말 신문사 기자를 하고 싶었는데, 상식책 달달 외우는 게 너무 싫었죠. 스물 일곱 지식인으로서 내 자존이 허락하질 않았어요. 그래서 <안나카레리나>를 집어 들고 줄기차게 읽었죠. 같이 신문사 준비하던 친구들이 뭐라고 얘기하면 ‘(상식책) 그게 상식이냐? (안나카레리나) 이게 상식이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때 내 고집은 당시로서는 의미 없는 하나의 점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의미가 있는 거죠.” 

언젠가 별이 될지도 모를 점을 찍으며 산다는 것, 박웅현에게 그건 바로 자존(自尊)이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죠. 사람은 다 다릅니다. 자기만의 살아가는 과정이 있죠. 그래서 그 사람만의 정답이 있는 겁니다. 그걸 믿어야 합니다. 자기만의 정답을 찾는 과정이 바로 자기 존중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젊은 친구들이 추상적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진심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박웅현은 허전하고 불안하고, 뒤 처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읽었고, 지금도 읽는다. “그렇게 읽었던 게 내 자양분이 됐던 것 같아요. 자양분을 계속 채워넣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힘이 약해지는 것 같죠.” 그가 자기만의 정답을 찾을 수 있었던 자존유지의 방법 역시 바로 책이었던 것이다. 


◇ 창의력은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차고 넘쳐서 나오는 것

박웅현은 신입사원을 뽑을 때도 주로 클래식으로 뽑는다. 그는 자신이 지난해 TBWA 신입사원 선발 때 출제한 문제지를 보여주었다. 

‘제시된 것들에 대해 아는 바를 한 줄로 정리하고 그것들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세줄 이내로 정리하시오.’ 1) 아서 밀러 2) 마이클 샌델 3) 황지우 4) 병산서원 5)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6) 마뉴엘 푸익 7)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8) 브론테 자매 9)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10) G.I.F.T 11) 엘라 핏제랄드 

“바탕에 충실한 친구를 뽑으려 해요. 바탕이란 건 바로 생각이죠. 토플 점수 몇 점 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싶다는 겁니다. 스펙은 포장에 불과합니다. 영화도 ‘해리포터 죽여요!’가 아니라 히치콕이 뭔지, 라쇼몽이 뭔지 알고 있나 그런 걸 보고 싶은 거죠. 생각의 기초체력이 있으면 나머지는 따라옵니다. 카피 어떻게 쓸지는 훈련하면 됩니다. 마케팅 이론도 1년이면 다 가르칩니다.” 

박웅현은 면접도 한 사람 당 1시간씩 카페에 앉아서 한다고 했다. 이력서 보고 질문 하는 식이 아니라 커피 한잔 앞에 놓고 서로 물어보는 식이라고 했다. ‘사회가 만든 취업 매뉴얼대로 준비한 청년들에게 오히려 가혹한 게 아니냐’고 했더니 그는 “TBWA같은 회사가 생기고, 또 생기면 기성세대가 잘못 만든 시스템도 바뀌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웅현이 설명하는 창의력도 이런 맥락과 다르지 않았다. “창의력은 스필오버(spillover, 차고 넘치는 것)가 돼야 나오는 것이지 스퀴즈아웃(squeeze out, 쥐어 짜는 것)한다고 나오는 게 아닙니다. 넣어야 합니다. 스폰지처럼 모든 색깔 잉크를 다 빨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스필오버돼서 나오는 겁니다. 청년들이 취업하려면 뭔가 보여줘야 하니깐 포장하고 계속 짜내는데 그건 아닙니다. 30살까지 살겠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넣어야 합니다. 나중에 짤 기회가 와요. 스필오버하는 사람은 그 기회를 잡는 것이고 짜대기만 한 사람은 못 잡는 겁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하며 등록금 벌어야 하고, 어쩔 수 없이 스펙도 채워야 하는 20대들은 박웅현에게 이렇게 하소연할지 모르겠다. “선배는 이미 성공의 최정상에 섰으니깐 덕담처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루하루 불안에 쫓기는데 느긋하게 클래식 읽을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초조하고 불안할수록 그 시기를 얼마나 묵직하게 자존을 지키며 보낼 수 있냐가 성공의 관건임을 이미 성공한 박웅현을 통해 알아낼 수 있었다. 

이현수 기자 hyde@ 최우영 기자 young@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1092016331580783&outlink=1

Posted by 겟업
2012. 9. 23. 01:49

베스트 국가’를 뽑는 조사에서 15위에 올랐다. 이번 조사에서 한국은 9위를 차지한 일본에 이어 아시아 국가 중 2위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16일(현지시간) 100개 국가를 교육, 건강, 삶의 질, 경제적 역동성, 정치적 환경 등 5개 부문을 평가해 종합평가한 결과, 이중 한국이 평균 83.28점으로 15위에 올랐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번 조사는 '지금 이 순간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면 건강하고 안전하며 적당히 부유하고 신분 상승이 가능한 삶을 영위할 기회가 많을까'라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기획했다고 밝혔다.


한국은 특히 교육 부문에서 세계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뉴스위크는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의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교육 투자가 큰 몫을 했다”고 분석했다.


이번 조사에서 종합순위 1위 국가는 평균 89.31점을 받은 핀란드가 차지했다. 이어 2위 스위스, 3위 스웨덴, 9위 일본, 11위 미국, 16위 프랑스 순이었다.

이와 관련 뉴스위크는 ‘존경받는 10대 지도자’를 선정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을 7번 째로 소개했다.

뉴스위크는 이 대통령을 ‘최고경영자(CEO) 대통령, 이명박’이라며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전직 현대그룹 CEO로서 쌓은 경험으로 한국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경제회복이 가장 빠른 국가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그외 지도자들은 만모한 싱 인도총리,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원자바오 중국 총리, 브라이언 코웬 아일랜드 총리,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 엘렌 존슨-설리프 라이베리아 대통령,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사우디 국왕, 모하메드 나시드 몰디브 대통령 등이 포함했다.



http://www.newshankuk.com/news/content.asp?news_idx=2010081711010356129

Posted by 겟업
2012. 9. 23. 01:41

편집자주: 프랑스가 병인양요 때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를 프랑스국립도서관(BNF)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 바로 박병선 박사다. 재불 역사학자로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큰 힘을 보탰다. 프랑스가 약탈해간 도서 297권 중 75권이 14일(한국시각) 항공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외규장각 도서는 5월말까지 4차례에 걸쳐 옮겨질 예정이다.

이에 프랑스 파리에 살며 도깨비뉴스 통신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파리아줌마’가 지난달 7일 직접 인터뷰 했던 박병선 박사와의 일문일답을 소개한다. 상당히 길지만 적절한 시기라 판단해 그대로 옮겨 싣는다.


145년 만에 외규장각이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비록 영구임대라는 어설픈 딱지가 붙었지만 우리것이 제자리로 돌아간다는건 반가운일입니다. 하지만 그뒤안에는 반평생을 바쳐 직지고증과 외규장각을 발견하고, 연구한 박병선 박사님의 외롭고 지난한 노력이 있었습니다. 

쓴소리 한마디하렵니다. 우리 문화유산 안돌려준다고 프랑스 비난만 할줄 알았지, 이런 분의 숨은 노고가 있는줄은 알았는지요? 알려고는 했는지요? 가끔 제가 프랑스에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관련도 없는 글에다 우리 문서 안돌려주는 프랑스를 비난한 댓글을 남기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무척 씁쓸하더군요.비난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런 분의 노력을 알려고 하는 일은 단순히 비난만하려는 마음으로는 쉽지 않을것입니다. 욕을 해도 전후좌우, 깊은 사정까지 잘 알고 하자고요.

그럼 비난이 비판이 될수 있을것이고, 비판이 된다면 변화할수 있는 힘을 가질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프랑스 유학생 1호 박병선 박사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 고증으로 동백상을 수상한 "직지의 대모", 박병선 박사님은 625전쟁이후인 1955년 프랑스로 유학을 왔습니다.

은사의 부탁으로 파리에 있던 외규장각을 찾아 나라의 어떠한 지원도 없이 외로운 연구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1979년에는 한국에 외규장각을 알렸다는 이유로 질책을 받아 도서관 사서일을 그만두기도 했었습니다.

반평생 연구에만 몰두하여 나라의 잃어버린 역사 한쪽을 찾아주는 업적은 이루었지만 그분은 후회하는게 두가지가 있답니다, 하나는 결혼을 하지 않은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에서 교수제의가 들어왔을때 받아들이지 않은것이랍니다. 그분이 선택한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분의 삶을 대하는 저는 그저 감사하고 죄송스런 마음이 듭니다.

지난해 한국에서 암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여든 연세에 수술이 힘겨우셨지만 다시 일어나 파리로 돌아와 연구하고 계십니다. 어떠한 병마도 그분의 열정을 막을수는 없습니다. 현재1919년 파리 강화회의 당시 독립을 호소했던 김규식 박사 일행의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독립기념관 건립을 계획하고 계시며, '왜 한국 사람들이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해 달라.'고 요구하는지 등을 프랑스어로 자세히 설명한 '조선조의 의궤' 증보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외규장각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이제는 알려도 된다고 생각하셨는지 그간 숨겨왔던 고충을 동포신문을 운영하고 있는 남편에게 털어놓으셨습니다. 지난주 삼일절 기념식이 파리의 한국 문화원에서 있었는데, 박사님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셨다고 합니다. 

다소 길지만 어느 한말씀 놓치고 싶지 않더라고요.

- 박사님, 병을 이겨내시고 파리로 돌아오셨습니다.

파리의 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몰랐어요. 결코 저 혼자 병을 이겨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기도 덕분에 천주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으셔서 ‘그래, 이번 한번만 봐줄게’ 하신 것 같아요. 의사도 수술을 하면서 처음에는 3시간 내지 3시간 반이 예정되었던 것이 7시간이 걸리니까 나중에는 다리에 쥐가 나서 못 견딜 정도였대요. 이 할머니가 이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 수술대에서 죽으려니 각오를 했대요. 그런데 살아나니, ‘참 명도 기십니다’ 하시더라고요 (미소).

내 명이 긴 게 아니라, 여러분들이 정말 진심으로 기도 드려주시고, 도와주시니까, 그 덕분에 천주님께서도 ‘이렇게 까지들 하는데 내가 좀 돌봐주면 되겠다’ 하고 놓아주신 거라 생각해요. 이렇게 지금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것에 참 감사하죠.


- 직지 고증과 외규장각 도서 연구에 거의 30년이 넘는 세월을 매달리셨는데, 그 뒤에 숨은 이야기가 참 많을 것 같아요.


숨겨진 역사가 어디든 다 있죠. 학생신분으로 좋은 조건도 아니었지만, 직지 고증 당시 당했던 고충이라든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외규장각 도서를 연구하면서 겪은 고생 등 에피소드가 너무나 많아요. 이야기 거리가 많죠. 시간과 경우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지만, 이런 것을 이제는 숨겨놓지 않고 공개하고 싶어요. 이런 숨겨진 에피소드들은 하나의 비밀스러운 이야기, ‘비화’란 표현이 맞을 것 같네요.

직지고증과 외규장각 도서를 세상에 드러내기까지 뒤에서 고생했던 이야기가 되겠죠. 지금은 외규장각 도서네, 직지네 결과만 가지고 이야기를 하지만, 당시 학자들의 냉대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요. 어떤 교수님께는 조언을 구했더니 밥 먹고 할 일이 없으면 잠이나 자라고 하신 분도 있어요. 불란서 사람들의 냉대는 이해하지만, 한국 학자들의 냉대는 더 차갑고 매서웠어요.


- 직지고증을 어떻게 시작하시게 되었나요?

직지 고증을 시작한 것은 1972년 때 일이에요. 당시 직지가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이에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불란서 사람들은 “혹시 이것이 진짜 고활자본이라면, 역사적인 공헌이 크다” 라면서, 꼭 ‘-면 Si c’etait’ 이라는 표현을 썼죠. 당시 누구나 조건적으로 ‘면’ 자를 붙였어요. 그러면 좋다, 이 ‘면’ 자를 면하게 하면 되지 않느냐 했지요.

하지만 그 당시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에서 시작을 하려니, 어떻게 하면 이 ‘면’ 자를 면하게 할 수 있을지 그것이 문제였어요. 도대체 한국의 활자사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그것의 흐름을 알아야지 무엇을 어떻게 말을 건넬 수 있을 것 같았죠. 한국의 학자들과 교수님들께 열 통도 넘는 편지를 보냈을 거예요. 한국의 활자사나 활자에 관련된 책이 있다면 알려달라고 요청을 드렸죠.

그런데 이에 대한 답신을 전혀 받을 수 없었어요. 고맙게도 어떤 한 교수님께서는 답변을 주셨는데, 며칠을 두고 찾아봤지만 그런 책이 없다는 대답이었어요. 그렇게까지 라도 알려주신 교수님에게 감사할 수 밖에 없었죠. 당시 불행 중 다행으로, 일본과 중국의 인쇄사 관련 책을 찾을 수 있었어요. 제가 일어도 그렇고 중국 한자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어서, 그때부터 그것을 파고 들기 시작했어요. 거의 매일 밤을 새다시피 했죠. 어떤 때는 눈이 시뻘개져서, 아침에 근무하러 도서관에 가면, “너 어제 울었니?” 라고 묻는 사람도 있었어요. 약국에서 안약을 사서 넣으면 며칠 있다 또 괜찮아지고, 그러한 일상이 반복됐죠.


- 직지 고증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나요?

한 가지, 한국 활자사를 추측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활자사를 참고해야 할지 일본 활자사를 참고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어요. 그때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서 활자사 같은 것은 직접 관계되는 것은 아니니까 놔두기로 하고, 이것이 진짜 고활자본인지 아닌지가 문제니까, 이것이 금속활자라는 것만 고증하면 된다는 생각에 활자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지우개로도 만들고, 감자로도 만들고, 흙으로도 만들고. 그때만해도 불란서에 세라믹을 굽는 오븐을 찾아보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부엌에서 쓰는 오븐에서 구우면, 세라믹 오븐에서 구운 것처럼 되지는 않을지언정 형태가 조금은 나왔어요. 글자 몇 개를 흙으로 만들어서 굽기를 반복했더니 나중에는 오븐이 ‘펑’ 하고 터져서 부엌 유리창이 다 깨지고 얼마나 놀랬는지. 주인에게도 욕깨나 먹었죠.

그런데 그 때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인쇄소에 가면 예전에 금속으로 만들었던 활자들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생각했어요.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을 미리 생각을 못하고 나 자신이 활자를 만들어서 어떻게 해서든 증명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던 거죠.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인쇄소에 부탁한 금속활자를 가지고 직접 잉크에 찍어보면서, 직지에 찍힌 글자를 확대한 것과 내가 찍은 활자를 비교해봤더니 이것이 토활자인지, 사기로 만든 것인지, 아니면 금속이나 납 같은 것으로 만든 것인지를 판단할 수가 있더라고요. 이렇게 쉬운 것을 활자를 스스로 만드느라 죽으라고 고생을 하고 돈은 돈대로 쓰고 화덕을 세 개나 깨트렸으니.


- 직지가 금속활자라는 것을 확증하게 된 것이네요.

인쇄소에서 받은 금속활자를 찍어본 것과 책에 찍힌 활자의 형태가 동일한 것을 보고, 이것이 금속 활자라는 것을 확증을 한 것이죠. 하지만 이것이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어요. 조건이 있었죠. 예전에는 조판이 쉽지 않으니까, 앞의 글자가 뒤의 글자와 물린 것도 있고, 삐뚤어진 것도 있어요. 삐뚤어진 것이나 물린 것을 하나하나 꼬집어서 확대해서 대조해보니, 그것이 모두 정확히 일치했어요. 금속활자가 아닌 붓으로 썼거나 나무로 팠다면 불가능한 일이죠. 그렇게 해서 그 대조표와 사진을 가지고 직지가 금속활자라는 것을 확증을 했죠.

- 그 때는 어떤 심정이 드셨는지.

사실 겁이 났어요.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이것을 그렇게 대담하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당시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도서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대담하게 직지가 ‘1377년에 금속으로 만든 활자본’ 이라고 썼어요. 이제까지 ‘-면 Si c’?tait’ 라는 가정이 붙었던 것에서, ‘Si’를 과감히 뺐더니 도서관에서도 겁이 나니까, 나보고 어떻게 이렇게 대담한 짓을 하는지, 이것이 금속활자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했어요.

도서관 측에서는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도서관 명예로 돌리지만, 이것이 잘못되어 실수라면 그것은 내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겠다는 조건을 붙였어요. 나 개인이야 실언 했다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전시를 하게 된 거예요. 그렇게까지 조심성 있게 전시를 진행했어요. 전시가 시작되고, 이를 본 인쇄업자들이나 그쪽에 관계가 있는 분들로부터 구텐베르그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는데, 그것보다 78년 앞선 시간에 한국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만들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고 항의가 왔어요.

그래서 나는 이것을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나는 이것이 어떻게 해서 금속활자라고 확신할 수 있는지 그 경우만 딱 설명해주었죠. 그랬더니 나중에는 ‘그래, 네 말도 옳다’, ‘알아들었다’ 라는 반응과 함께 처음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어요.


- 직지 고증 3년 동안 정말 많은 노고가 있었을 것 같네요.

나는 그것을 위해 3년 동안 거의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며 지냈어요. 시간이 없는 것을 어떻게 하겠어요. 먹으려면 장을 봐야 하는데 장을 보러 나갈 시간이 없었어요. 그러니 매일 물만 끓여서 커피하고 빵하고 먹는 게 보통이었어요. 머리가 딴 데 있어서 장을 보러 가도 하나만 사고는 다 샀다고 생각하고 돌아오기가 일쑤였죠. 얼마나 나 자신이 답답했겠어요. 너 같은 맹꽁이도 없다 생각했어요. 이렇게 산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어요. 이렇게 살아도 살아는 나더라고요.

- 당시 한국에서의 반응은 어땠나요?

동양학자회의 때 발표를 하고 나니, 한국의 반응은 냉담했어요. 어떤 학자는, 서지학도 안 한 사람이 왜 서지학에 손을 대느냐, 그리고 그런 고증을 한국 서지학자들도 못했는데 어떻게 네가 자신만만하게 그런 소릴 할 수 있느냐, 네가 했다고 하지만 그건 한국 학자들이 다시 보고 판단을 해야 하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한 것이라고, 그렇게 나오더라고요. 그 편지를 가지고 있어야 되는데 당시 너무 화가 나서 찢어버렸어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내가 당시 어떤 기분이 들었겠어요, 몇 년 동안을 고생해서 고증하고 발표를 해서 인정을 받은 다음의 이야기인데, 그런 소리를 하면서 항의가 들어오니.

나중에 직지 영인본을 내기 위해 한국에 갔을 때, 한국 서지학자들에게 내가 고증한 사진을 보여주면서 내가 이렇게 고증을 했다는 것을 발표했더니 그분들이 화를 내는 거예요. 그리고 영인본 서문에는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박병선이 가지고 온 사진을 한국의 서지학자들이 고증해본 결과 이것은 금속활자라고 인정했다” 라고 적었어요. 나는 완전히 심부름꾼이 되고, 그분들이 다 했다고 된 것이죠. 내가 교수님께 가서 너무하셨다고, 그리고 그 한마디만 고치시라고, ‘한국의 서지학자들이’ 아니라 ‘한국의 서지학자들도 금속활자라고 인정했다’고 고쳐달라고요. 하지만 못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아직도 그 해설문이 그대로 남아있어요.


- 프랑스에서의 반응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요.

당시 출판된 영인본이 파리 도서관에 왔는데, 도서관 과장이 불어로 된 해설문을 보더니 이것을 읽어봤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알면서도 안 읽었다고 얘기하니까, 이게 말이 되느냐고, 네가 고생해서 우리 도서관에서 발표를 하고 인정을 받은 것인데 저희들이 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화를 내더라고요. 불어 같은 경우는 말 마디가 시원찮게 번역이 되어 더 심하기도 했어요. 도서관 측에서는 이런 경우가 어디 있냐고, 고소를 하겠다고 나왔어요.

그때 드는 생각이 아무리 그래도 내 나라 교수들인데, 소위 그분들을 국제 재판에 내세우는 것은 너무하다고, 지금 너희들은 영광을 다 차리지 않았느냐, 세계 최고 활자본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있다는 것, 소유권도 너희에게 있다는 것만도 크지 않냐며 설득했어요. 나는 곧 있으면 갈 사람이지만, 그것만은 영원히 남는 것이니, 그것을 봐서라도 참으라고 했죠.

동시에 이것이 서울에 있었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고, 소위 너희 도서관 서고 속에 있었으면 그대로 있었을 걸, 내가 꺼내 고증을 해서 발표를 했기 때문에 이것이 증명이 된 것이 아니냐, 그러니 도서관 쪽에서도 영광이요, 나도 인간적으로 기쁨이다, 그러니 더 이상 말하지 말자고 했죠. 이 후 한국에서도 소식이 없고 해서 일이 일단락 됐어요.


한 식당안에서 찍은 사진.

- 청주에 있는 고인쇄박물관은 어떤 계기로 설립된 것인가요?

이런 일이 있고 난 후에 전두환 대통령이 파리를 방문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엘리제궁에 돈을 빌리러 왔대요. 들어갈 적에는 땅만 쳐다보고 어떻게 이야기를 해서 성공하나 하고 머리를 푹 숙이고 들어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들어갔더니 미테랑 대통령이 직지 영인본을 탁 내놓으면서 이렇게 훌륭한 문화를 가진 국가의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인사를 먼저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전 대통령도 당신도 잘 몰랐다가 용기를 내게 되었고, 회의도 잘 끝나고 결과도 좋았다고 해요. 엘리제궁에서 나오는데 들어갈 때와는 달리 어쩌면 하늘이 그렇게 푸르고 아름다운지 모르겠더라고 하는 회고담을 들었어요. 그런 일이 있고 대통령이 한국에 돌아온 다음에 직지가 만들어진 청주에 고인쇄박물관 설립을 지시하게 된 거예요. 이런 이야기는 못 들어봤죠? (미소)


- 외규장각 도서와 관련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연구에 매달리신 기간만해도 10년이 넘는 것으로 아는데요. 297권에 달하는 외규장각 도서를 정리하는 작업도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외규장각 도서는 너무도 역사가 길어요. 무려 30여 년에 걸친 이야기죠. 외규장각 도서가 있다는 것은 1977년에 알았어요. 1979년도 당시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외규장각 도서 목록과 제목을 정리해서 기자들에게 병인양요 때 약탈된 도서들이 이런 것이다 하고 알려줬어요. 당시 바짝 관심을 갖다 그만이었죠. 하지만 책의 제목만 알았을 뿐이지, 내용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내용을 알고 이를 요약을 해서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렇게 해서 10여 년에 걸친 조사가 시작된 거예요. 그때부터 10년 간을 아침 10시부터 저녁 5시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조사를 하는 거예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지만 문제는 책이 크기도 하고, 297권에 달하는 만큼 장 수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의궤의 내용을 잘 못 알아 듣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소위 이조시대 이두(한글 발음을 한자를 빌려 적은 것)가 섞여 있어서 한문을 아무리 해석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예를 들어 예단 관련 내용에 저고리가 있다면, 저고리의 ‘저’ 자를 한자를 골라서 쓰는 거죠. 빨간 ‘적(赤)’ 자를 쓰고, ‘고’ 자는 고대라는 ‘고(古)’, ‘리’ 는, 몇 리 하는 ‘리(里)’를 적어 ‘적고리(赤古里)’ 라고 써 놓았으니, 이것이 옷 이름이라고 누가 상상을 하겠어요. 이런 것에 하나하나에 잡히다 보니, 10년 이라는 시간이 가는 것이죠.


- 시간뿐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도 고충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이렇게 요약한 내용을 불어로 타이핑을 해야 하는데 당시에는 컴퓨터도 없고, 내가 백만장자도 아니고 돈이 없으니까, 이것을 타이핑하는 분께 맡길 때마다 우리 집 골동품을 한 개씩 갖다 파는 거예요. 당시 내가 알던 골동품 가게가 있는데, 할아버지 세 분께서 계셨어요. 그 중 한 분이 저한테 그렇게 잘해줬어요. 골동품을 의탁을 해 놓으면 팔리면 연락이 오는데, 원칙적으로 당신 몫을 챙기시고 나를 주시는데, 어떤 때는 ‘너를 보니 내가 주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다. 얼마에 팔았으니 다 줄게 가지고 가’ 하시고, ‘네 꼴을 보니 너무 안됐으니까 집에 가서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라’ 고 그러셨죠.

그 분께서 돌아가셨는데 내가 얼마나 섭섭했는지 몰라요. 그 할아버지께서 나를 제일 많이 도와주셨죠. 또 옛날 빨레 후아얄 Palais Royal 근처에 일본 판화 파는 집이 있었어요. 당시 이를 운영하던 분이 국립도서관에 판화가 많으니까 판화를 보러 오셨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내게 통역을 부탁했어요. 이렇게 해서 알게 된 분인데, 판화의 경우 구멍이 있으면 값이 툭 떨어지니까 그것을 감쪽같이 고쳐야 해요. 그것을 내게 해달라고 부탁하셨어요.

그래서 주말에는 그곳에 가서 판화를 고쳐주는 거예요. 그 분도 돈을 벌기 위해 장사를 하기보다는 예술가 기질이 있어서, 오늘은 30유로 줘야 하는 것을 어떤 때는 50유로 주고, 어떤 때는 300유로를 주고 그런다고요. 그리고 당시 일을 하면서 점심, 저녁을 주인이랑 같이 먹어야 하니까 밥을 먹는데, 밥을 안 먹다가 먹으니 크게 배탈이 나는 거에요. 한번 두면 나면 모르는데, 월요일에 도서관에 가서 일을 해야 하는데 화장실을 계속 들락날락하니까 수위가 이걸 보고 약을 줘서 먹고 나은 적도 있어요. 이런 우여곡절 끝에 원고를 완성하게 되었죠.


- 출판은 어떻게 하시게 되었나요?

이것을 요약해놓고 가지고 있으면 소용이 없죠. 출판을 해야 하는데, 그 때 개인적으로 알던 대사관 영사님께 말씀 드리니 다른 방법은 없고 민원을 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민원을 냈더니 규장각에서 이태진 교수님이 이를 받아주셔서 그곳에서 불어판을 출판을 하게 됐어요. 당시 직판사를 지적해주셨는데, 문제는 불어로 된 텍스트라 그들이 찍기를 힘들어 했어요. 그래서 오자가 많았죠.

이것을 한 열 번은 고쳤을 거예요. 그래도 또 틀리고 또 틀리고, 지금도 오자가 투성이예요. 나중에는 할 수 없어 그대로 놔두었어요. 당시 출판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이태진 교수님이 총장께 말씀 드려 반환운동을 시작하게 된 거에요. 그런데 그것도 참 반대가 많고. 처음 시작할 당시 밥 먹고 할일 없으면 잠이나 자라고 하신 분은, 내가 미워 죽겠다고, 하지 말랬는데 이렇게 쓸 데 없는 일을 해서 남 골치 아프게 만든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그 때는 이메일도 없으니까 편지나 전화로 그런 소릴 들어야 했죠. 어떤 때는 아침에 출근하려고 하는데 이런 전화를 받으면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어요. 당시 그렇게 냉대했던 분들이 지금은 그런 말들이 다 없어지고 앞장서시는 걸 보면 사람이 저렇게 간사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 그런 냉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참고 해내셨네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병도 교수님께서 나에게 간곡히 부탁하시지 않았으면 난 중간에 그만 뒀을 거예요. 그 분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을지언정, 생전에 저에게 그렇게 간곡히 부탁하셨던 그 말마디가 저에게 큰 힘을 준 거예요.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하나 못 들어주겠어요. 그래서 끝까지 버텨냈죠.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저도 모르게 갔어요.

저는 아침에서 저녁 밖에는 몰랐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1년이 가고 2년이 가더니,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죠. 하루하루 진행이 되어가니까 나는 계속 파고 있는 거예요. 오죽하면 그 쪽 도서관 열람실에서 내 별명이 ‘파란 책 속에 묻혀 있는 여성’ 이겠어요. 의궤 표지가 파랗거든요. 그리고 책이 크니까 나는 그 책을 펴 놓고 밑에 묻혀 있으니까. 그래서 어디 조금 나가 있으면, 이름도 뭐도 모르고 ‘파란 책에 묻혀 있는 여성 어디 있냐’ 고 그렇게 물었다고 해요. 그렇게까지 됐었어요. 그래도 해냈어요.

시간이 아까워 식사도 못하며 일하고 있는데 어느날 양기섭 문화원장이 방문하여 잠시 나가자고 하여 나갔더니 도서관 근처 까페에서 오믈렛을 시켜주시더라구요. 그 분주하신 분이 도서관에 까지 찾아오시는 것도 고마운데 식사까지 시켜주신 그 마음이 고맙고 잊을 수가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방해하고 냉대하는데 오직 한 분 문화원장님께서 베풀어주신 따뜻한 정을 너무나 감사하며 잊지 못하지요.


- 의궤가 145년 만에 제자리를 찾는 모습을 보시는 기분이 남다르실 텐데요.

우리나라 의궤의 소유권을 못 찾고 대여로 온다는 것이 너무 맘이 아파요. 그 책이 어디 있든 간에 우리나라 것이라는 소유권만은 찾고 싶다고요. 그것이 우리 것이라면 어디에 있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것은 불란서 것을 빌려오는 것 아녜요. 5년 후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요. 정권도 바뀌고, 돌려달라고 하면 돌려줄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서류 상 돌려 달라는 말을 안 하겠다고 썼다고 하더라도 알 수 없는 일이죠.

- 현재는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신가요?

병인양요 1권은 이미 출판이 되었으니, 지금은 2권을 집필하고 있어요. 하지만 애로가 많고, 그것도 쉽지가 않아요. 다행히 문화재청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최대 노력하겠다고 하니까 두고 보는 것이죠. 1권은 의궤에 대한 설명이 주가 되었다면, 지금 하는 작업은 병인양요 발발 전과 그 후 프랑스 정부에 보고된 공문 등을 찾아 번역하고 재확인하는 것이죠.

당시 참전했던 사람들이 와서 쓴 논문과 보도 내용을 몇 개 찾아냈는데, 아직 다 찾지 못했어요. 1866년에서 1867년까지의 신문을 하나하나 보면서 기사가 있나 없나 찾아야 되기 때문에 매우 힘든 작업이에요. 그것을 다 못해서 섭섭한 마음이 들고, 그것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엇보다 이런 것을 전문으로 찾아주는 사람이 있는데 돈이 많이 들죠. 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면, 우선 그것부터 전문가에게 부탁하여 보다 더 충실하게 보충하고 완벽한 책을 만들고 싶어요.


- 외규장각 도서를 찾고 나서 도서관 측과의 갈등으로 결국 도서관을 떠나게까지 되셨다면서요. 그 때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그 당시 도서관하고 한국 정부, 대사관 사이에 있었던 미묘한것을 다른 사람들은 모르죠. 참 복잡해요. 내가 시간적으로 정리를 한 번 해봤는데, 그래도 참 복잡해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이렇게 저렇게 사건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무엇을 어디에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주 미묘한 문제이기도 하고요. 초기에 외규장각 도서를 찾았을 때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지만 제목을 종류별로 모두 정리해서 기자들에게 보고를 해줬어요. 그랬더니 기자들이 거기에다가 제멋대로 '발견'이라는 말을 썼다고요.

당시 도서관에서 한국에서 나온 신문을 일일이 최악으로 번역을 해가지고, 물론 가짜로 꾸밀 순 없지만, 똑같은 말마디라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잖아요, 그래서 도서관에서는 규장각 도서가 있는 것을 네가 <찾은 거지>, 어떻게 그것이 네가 <발견한 것>이냐고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고요. 그래서 기자 분들께 사실 찾은거지 발견이 아니다, 발견 소리 좀 쓰지 말아달라고 하니까, 한국에서는 그 말 밖에 다른 말이 없다고, 그럴 수 밖에 없지 않냐고 말하는 거예요. '찾음'이라고 쓰면 맥이 없는 것 같고, '발견'이란 단어도 한국어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으니까 해석하기에 달렸는데 말이죠.

결국 제가 발견이라고 해서 마치 최초로 찾아낸 것처럼 얘기를 했다고 그것을 가지고 도서관에서는 저를 달달 볶았어요. 외규장각 도서에 관한 언급은 제일 먼저 모리스 쿠랑이 했어요. 당시 모리스 쿠랑도 책 제목과 왕립도서관(Biblioth?que Royale)에 있다고만 썼지, 책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못하고, 제목과 크기에 대한 정도만 이야기를 했다고요. 도서관은 모리스 쿠랑이 이미 발표한 것을 네가 다시 발표한 것이지, 왜 네가 발견한 것이냐고 문제를 삼았어요. 그래서 나는 다른 것 발표한 것 없다, 이 책이 어디에 있고, 그 제목이 무엇인지 알렸을뿐이지 더 구체적으로 말한것도 없다고 말했죠.


얼마전 파리를 찾은 민주당 5선 김영진 의원과 함께한 박병선 박사.

- 직접적으로 도서관과 갈등을 일으킨 계기가 있나요.

도서들이 오래되다 보니 몇 권만 표지가 제대로 남아있었지, 대부분은 모두 상해서 수선을 하게 되었어요. 의궤 표지들이 두꺼운 종이에다가 비단으로 싸여져 있어요. 그런데 아직도 어디서 누가 한 일인지 모르지만, 수선을 맡긴 사이에 누가 의궤에 있는 그림을 면도칼로 잘라갔어요. 그런데 이 양반이 조금 똑똑했으면, 제본을 한 것이기 때문에 장을 모두 빼갔으면 잘라버린 지도 모르고 지나갔을 텐데, 그 옆에 도막을 남겨두고 그림만 가져간 거예요.

당시 무엇보다 도서관 측에서 예민했던 부분은 한국 대사관 사람들이 알게 될 까봐, 그것을 무척 신경을 썼던 가봐요. 저는 내용적으로 그들이 겁냈던 것을 알 수 없었죠. 그들은 그것을 수선을 해서 파리 국립 도서관으로 옮겨오겠다고 계획을 짰겠지요. 그 당시 수선을 한 다음에 종이에 싸 놓은 것을 제가 제일 먼저 열었다고요. 내용을 보는데 그림이 잘려 있으니까 이건 수선소에서 잘린 것 같다고 바로 말을 해줬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잘라간 것처럼 오해를 받을 테니까요. 도서관쪽에서는 이게 국제문제가 될까봐 겁을 낸 거예요.

그런데 내가 도서의 존재를 기자들에게 얘기했기 때문에 책임이 저한테 전가된 거예요. 그 전에는 과장님과 아주 가까이 지내고 친했다고요. 그런데 하루 사이에 사람이 싹 변하는데, 저 멀리에서 나를 보면 돌아서서 딴 길로 가고 그 정도로 냉담해졌어요. 그리고 또 한국 외무부에서는 저보고 가만히 있지 않고 이런 것을 자꾸 끄집어 내서 자기네들 골치 아프게 하냐고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고요. 당시 의궤를 찾았을 때에 대사관에 제가 매일 같이 출근하다시피 했어요. 대사님께 지금 이것이 창고 속에 있으니 우리가 가져가는 것은 문제가 간단하다, 보통 서적도 아니고 파지로 분류되어 있으니까 찾는 것이 간단할 테니 어떻게 좀 힘을 써달라고 했죠.

그런데 대사님 말씀은 한불관계가 지금 묘하고 그리 좋지 않기 때문에 이 사람들 비위를 건드릴 수 없으니까 당신이 말할수가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저한테 참 잘해주신 분인데, 그 문제만큼은 본인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사실 우리가 가난할때니까 문화재 같은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죠.

대사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 본국에 보고를 하셨는데 본국에서 묵살을 했는지, 그 분께서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시고 가만히 계셨던 것 같아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거든요. 당시 제가 매일 대사관에 출근하다시피 하니까, 대사님께서는 '병선이 왔으니까 나랑 가서 점심이나 먹어' 하시면서 매일 같이 쌩 미쉘에 있는 우동집에 갔어요. 가서 먹으면서 저는 또 '대사님, 이 우동이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이 문제가 더 중요한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하면, '그 얘기는 그만 하고 밥 좀 먹자' 하시면서 넘어가시고 (웃음).


- 도서관에서 나오시게 된것은 그 후의 일인가요?


그 때에도 보도 기관 사람들이 '발견' 소리를 빼달라고 했는데 계속해서 그 말을 쓰는 거예요. 난 그 말 때문에 있는 대로 당하고 있는데. 그리고 나서 도서관 내에서 냉전이 일어난 거예요. 도서관 측하고 나하고. 도서관에서는 나를 반역자 취급을 했어요. 국립도서관의 비밀을 외부에다 누설시켰다는 죄목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백 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도서관에 책이 있다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공고를 해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도서관의 임무라 생각하는데, 제가 반역을 한 것도 아니고, 또 도서관에 있는 책이 있다고 말을 한 건데 그것이 왜 비밀이냐, 뭐 때문에 비밀이라고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죠.

그리고 당시 도서가 있으면 카드가 있거나 대장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 카드도 없고 대장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고요. 그런데 한국 기자들은 강화도에서 가져간 외규장각 도서가 국립도서관에 있다고 떠들기 시작하고, 한국에 신문기사가 하나라도 또 나면, 그 신문을 번역을 해서 도서관 내 보도 담당실(service de presse)에 보고가 된다고요, 이런 기사가 또 나왔다고. 이 사람들은 이를 계속해서 문제로 삼으려고 충동을 한 거예요. 이렇게 몇 달이 계속 됐어요. 그 다음부터는 제가 도서관에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를 하는 거예요, 뭘 어떻게 하는지. 그것까지도 좋아요. 제가 뭐 나쁜 짓 하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문제 될 것은 없었죠.

그런데 하루는 관장님께서 저를 호출을 하시더라고요. 생각해보세요. 도서관에는 천 여명이나 되는 직원이 있고, 나는 당시 정식직원도 아니고, 말단에 말단, 그야말로 임시기간 직원(saisonnier)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런데 관장님이 직접 호출을 해서 사표를 내라고 하는 소리를 하는 것은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니었던 거죠. 직원이라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거예요, 비서를 시켜서 해결을 했겠죠. 호출을 해서 갔더니, 이 사건이 어떻게 된 거냐고 직접 물으시더라고요. 과장도 같이 갔는데, 과장이 제가 오랫동안 그 책을 찾았다는 것을 말하고, 동시에 이것을 도서관 측과 상의하지 않고 외부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듣고 있다가, 도서관에 책이 있는 것을 보고, 어떤 책이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데 일일이 과장하고 상의를 해야 하느냐, 또 어떻게 그것이 도서관 비밀로 들어갈 수 있느냐, 나는 이해를 못하겠다고 하니, 관장님도 머리골치가 아프신 모양이에요.

옆에 있는 관장님 비서도 진정하라고, 결국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그리고 일을 좋게 해결하기 위해서 하는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처음부터 내가 그 책을 찾고 있는 것을 과장이 알았으면, 이 책을 찾으면 자기한테 먼저 말을 해달라든지, 또는 외부사람한테 말을 하면 안 된다든지 했다면 나도 말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그런 말은 일언반구도 않고 자기도 함께 협조해주면서 그 책을 같이 찾았던 사람이 나를 반역자로 모니까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어요.

그 때 도서관 측에서는 저에게 다른 취직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일년 봉급을 준대요. 그것도 그때서 알았죠. 그런데 저는 그 때 이미 꼴레쥬 드 프랑스(Coll?ge de France)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필요없다고 했어요. 비서는 나보고 실직자가 아니고 옆에 다른 직장이 있으니 다행이라고 위로하더라고요. 말은 사표지만 쫓겨난 것이나 마찬가지죠 (웃음).


- 처음 반환 교섭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아시나요?

그 도서에는 카드도 없고, 대장도 없어요. 그것만은 알아야죠. 처음에 프랑스에 반환 교섭을 오신다기에 그 분께 그것을 충고해 드리고 싶었다고요. 왜냐면 아무 소리 말고 도서관에 가서 너희들 카드 좀 보자 하면, 없는 카드를 어떻게 갑자기 만들어 주겠어요. 그리고 대장은 외부사람들한테 안보여주는 것이지만 대장 좀 보자, 그렇게 하라고 부탁을 하려고 했는데 그분이 저를 만날 필요 없다고 안 만나고 그냥 갔다고요. 그러니까 처음에 교섭을 하러 오신 분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내용은 모르지만 나는 이쪽 사람들한테 간접적으로 들었어요.

교섭 온 분이 책 내용도 모르고 와서 책만 내놓으라고 그러니 말이 되냐, 그러면서 툴툴거리는 소리를 제가 들었거든요. 그래서 이게 또 무슨 말인가 했어요. 한국 측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은 것이 없어 모르고, 이쪽 사람들을 통해 들은 것이죠. 당시 회의에 있었던 사람들은 절대 내용을 외부에 말하지 말라고 그렇게 규칙을 세웠대요. 그런데 툴툴거릴 수는 있잖아요, 혼자서 중얼거리듯이. 그러니까 회의에 갔다가 나와서 내가 옆에 있으니까 '골치 아파' 그러면서 혼자서 툴툴거리더라고요. 그러니까 나를 보고 말하지 않고 자기가 툴툴거린 것을 제가 들은 거예요. 그 사람도 비밀을 지키라는 것 위반한 거 없고요.


- 지금은 외규장각에 대한 관심이 높지만, 그 긴 시간을 혼자 이겨내시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한국 학자들의 냉대. 그리고 불란서 도서관 쪽에서 당한 냉대는 정말 지독했어요. 제가 잠을 참 잘 자는 사람이에요. 불면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인데, 그 때는 정말 잠이 안 오더라고요. 그래서 불면증이라는 것이 이렇게 힘든 거구나, 그 때 처음으로 경험해보고 알았어요. 주변에 계신 분들도 많이 안타까워하시고 저 때문에 고생들 많이 하셨죠.

한국에 가면 한번씩은 예전에 저한테 그렇게 냉대하신 분들께 전화를 드렸어요. 그러면 한번 만나자 하셔서 다방에서 얘기를 나누는데, 그 때는 커피를 마셔도 커피 맛이 나지가 않아요. 그 교수님도 그 때 얘기는 꺼내시지도 않고 지금 뭐하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만 물으시죠. 그래서 한번은 제가 그랬죠.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말씀 드리면 전과 똑같이 말씀하실 것 아녜요' 하고 웃었다고요. 그러니까 '그건 잊어버려' 그러고 마시더라고요. 어떻게 하겠어요. 그게 세상이고, 그게 인심인가 그렇게 생각해요.


- 박사님 제일의 마지막 소원은 파리 독립기념관 건립이라고 들었어요.

이제 갈 때도 됐고, 빨리 빨리 일을 정리하고 원고도 마쳐야죠. 그런데 가기 전에, 제가 눈감기 전에 한가지 소원이 있어요. 샤또덩 가에 독립기념관을 만들어 놓고, 아니면 만드는 기세라도 보고 죽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몇 십 년 동안 입이 마르도록 독립기념관 만들어야 된다고 했는데, 이제까지는 파리 교민들이 너무도 냉정했다고요. 거기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고, 만들어 뭐하냐는 식으로 그랬었죠. 그대도 지금은 조금이나마 독립기념관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이 시작되어 다행이에요.

- 독립기념관 설립은 왜 중요한가요.

김규식 박사의 활동이 외교 활동의 시초라 할 수 있어요. 파리에 오셔서 몇 달 밖에 안 계셨지만, 같이 일하시던 분이 샤또덩 가의 그 집에서 2년간 버티셨잖아요. 집세가 없어서 방 한 칸에서 지내시면서, '자유한국'도 발행하시고, 꾸리에와 팜플렛도 발행하시고, 회의에도 참석하시고 하셨다고요. 불어를 한마디도 못하시는 분들이. 제 추측인데 여기 사용했던 사무실이 크지도 않았을 거예요. 낮에는 사무실로 쓰고, 저녁에는 그곳에서 주무시고 그러시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무엇보다 그 분들이 그렇게 활동하지 않았다면 불란서에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리지 못했을 거예요. 한국을 처음으로 소개하고 한국을 알리신 분들은 그분들이에요. 나는 그렇게 봐요. 더군다나 구라파 쪽에서는 더더욱 그렇죠. 독일에도 가셨었고, 영국, 이태리에도 가셨어요. 이곳 저곳 다니시면서 회의에도 참석하시고 한국을 알리셨죠. 이런 일들을 잊지 않아야 해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참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아요. 제 제일 큰 소원이 바로 이러한 것들을 한 데 모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파리 독립기념관을 건립하는 거에요. 우리가 움직인다면 틀림없이 정부도 도와줄 거예요.

프랑스 파리= 동아닷컴 도깨비뉴스 통신원 파리아줌마 



http://news.donga.com/3/all/20110414/36419670/2

Posted by 겟업
2012. 9. 23. 01:29

조국교수 페이스북에 ‘뉴욕 판사 벌금형’ 올려 화제
‘청소년에 자존감 처분’ 한국 판사 이야기도 이어져

15일 트위터와 인터넷에서는 미국과 한국의 판사 이야기가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조국 서울대 교수(법대)가 14일 자신의 페이스북(http://facebook.com/kukcho)에 올린 글이 네티즌과 트위터 이용자의 가슴에 불을 붙인 것이다.

조 교수는 뉴욕시장을 3연임했던 피오렐로 라과디아가 1930년대초 대공항 시기 뉴욕치안 판사 재직시 배가 고파 빵 훔친 노인에게 10달러 벌금형을 내리면서 한 말이라며 판결내용을 소개했다.

“배고픈 사람이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나는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 도시 시민 모두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에게 벌금 10달러 벌금형을 선고하며, 방청객 모두에게 각 50센트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이렇게 걷은 57달러 50센트를 피고인에게 주자, 피고인은 10달러벌금을 낸 후 47달러 50센트를 갖고 법정을 떠났다. 라과디아는 아주 작은 체구의 ‘리버럴’한 공화당원으로 뉴욕시민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공화당원이지만 루즈벨트의 ‘뉴딜’을 지지했구요. 뉴욕 공항의 이름이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지요.”

글이 소개되자 “감동적이다” “법위에 사람 있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약자에 대한 보호망을 만들지 못한 사회와 그 구성원의 책임을 강조한 라과디아의 판결 내용은 법에 앞서 사람을 중시하는 대표적인 판결로 널리 회자되고 있지만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강하고 ‘정의’란 말이 화두로 떠오른 한국사회에서는 새삼 화제가 되고 것이다.

한 네티즌은 서울가정 법원 김귀옥(47) 부장판사의 특별한 판결내용이 실린 <경인일보>의 한 칼럼 내용을 띄워 연쇄반응을 낳기도 했다.

김이환 이영미술관장은 지난해 5월28일치에 쓴 칼럼에서 서울 도심에서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 등을 훔쳐 달아난 혐의로 피고인석에 앉은 A양에게 소년원 시설 감호 위탁 같은 무거운 보호처분이 아니라 과감하게 불처분 결정을 내린 사유를 자세히 소개했다.


김 관장은 한 신문에서 읽었다는 김판사의 판결이야기를 자세히 소개했다.

A양은 2009년초까지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다 남학생에게 집단 폭행당한 뒤 그 후유증으로 병원치료를 받으면서 학교에서 겉돌면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아이는 가해자로 재판에 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이 망가진 것을 알면 누가 가해자라고 쉽사리 말하겠어요? 아이의 잘못이 있다면 자존감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존감을 찾게 하는 처분을 내려야지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렴. 자, 날 따라서 힘차게 외쳐 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생겼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김 관장은 칼럼에서 라과디아 판사 이야기도 소개하면서 “법과 법조인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 더할 수 없이 깊은 우리 사회에 이런 명판결이 더 많이, 더 자주 나오기를 기대한다”면서 “그러려면 법을 다루는 분들의 사람에 대한 애정과 고뇌가 더 깊어져야 할 것”이라고 끝맺었다.

<경인일보 칼럼>

참 아름다운 이야기 - '法廷에 핀 法情' 
소녀 망가뜨린건 사회 불처분결정… "나는 혼자가 아니다" 감동의 외침 

김이환

벌써 한 해의 허리에 접어드는 초여름이 다가들고 있다. 유난히 변덕이 심한 날씨여서 개나리, 벚꽃, 목련이 앞뒤 없이 피고지더니 어느새 모란도 꽃잎을 뚝뚝 떨어뜨렸다. 고개들어 미술관 주변 산을 둘러보면 온 산자락에 흰 아카시아 꽃잎이 눈송이처럼 날리고 있다. 봄이 떠난 것이다. 이런 초여름 아침 나절 몸에 밴 습관대로 일주일치 신문을 정리하다가 '法情에 울어버린 소녀犯'이란 5월17일자 ㅈ신문의 기사가 눈에 띄어 단숨에 읽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는 건 이런 것일까? 아카시아꽃 향기를 먹먹한 가슴 깊숙이 들여마셔 보았다. 그날 따라 아카시아 향기에는 전에 없이 신선함이 가득했다.

내 심금을 울린 그 기사를 요약하면 이렇다.

지난 4월초 서초동 법원 청사 소년 법정은 감동의 눈물에 젖었다. 서울 도심에서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 등을 훔쳐 달아난 혐의로 피고인석에 앉은 A(16)양에게 서울가정법원 김귀옥(47) 부장판사가 내린 특별한 처분 때문이었다. 김 판사는 법적으로는 아무 처분을 하지않는 불처분 결정을 내리는 한편 피고로 하여금 '법정에서 일어나 외치기'라는 특별한 처분을 내렸다고 한다. A양은 작년 가을부터 14건의 절도 폭행을 저질러 이미 한 차례 소년법정에 섰던 전력조차 있었다. 법대로라면 소년보호시설 감호 위탁같은 무거운 보호 처분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김 판사가 과감히 불처분 결정을 내린 연유는 무엇일까? A양은 작년 초까지만 해도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면서 간호사를 꿈꾸던 발랄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남학생 여러 명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면서 삶이 바뀌었다. 그 후유증으로 병원 치료도 받았고 죄책감에 시달려 학교에서 겉돌면서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김 부장판사는 법정에서 말했다.

"이 아이는 가해자로 재판에 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이 망가진 것을 알면 누가 가해자라고 쉽사리 말하겠어요? 아이의 잘못이 있다면 자존감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존감을 찾게 하는 처분을 내려야지요." 그러면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렴. 자, 날 따라서 힘차게 외쳐 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생겼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라고 A양에게 따뜻하게 말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A양이 나직하게 "나는 세상에서…"라며 입을 뗐다. 그리고 판사를 따라 점점 더 크게 외쳤다. A양은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고 외칠 때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법정에 있던 A양의 어머니도 울었고 재판 진행을 돕던 참여관도, 법정 경위의 눈시울도 젖었다.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얼마 전 이 '금요산책'란에도 소개했던 미국의 라과디아 판사가 떠올랐다. 대공황으로 피폐할대로 피폐해진 1930년대 뉴욕의 치안법정에서 라과디아 판사가 빵을 훔친 한 가난한 할머니에게 내렸던 감동적인 판결을 기억하시는지?

"법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정이 딱해도 죄를 지었으면 벌금을 내야 합니다. 그렇지만 가난으로 굶주리는 어린 손녀들을 먹이기 위해 늙은 할머니가 빵을 훔쳐야 하는 이 비정한 도시의 시민에게도 죄가 있습니다. 그동안 좋은 음식을 많이 먹어온 저에게 벌금 10달러를 선고합니다. 할머니의 벌금을 대신 내겠습니다. 그리고 이 법정의 뉴욕 시민 여러분에게도 각기 50센트씩을 선고합니다."

김귀옥 부장판사의 '대처분'과 라과디아 판사의 판결은 우리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깊고 크다. 법과 법조인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 더할 수 없이 깊은 우리 사회에 이런 명판결이 더 많이, 더 자주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러려면 법을 다루는 분들의 사람에 대한 애정과 고뇌가 더 깊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부디 A양이 모성의 판결을 한 김 부장판사의 '대처분'대로 자존감을 회복하여 건실한 숙녀로 성장하기를 빈다.

[출처: 경인일보 홈페이지(http://www.kyeongin.com/)]

디지털뉴스팀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73200.html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