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휴대폰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삼성은 지난달 애플과의 미국 특허 전쟁에서 완패했음에도 글로벌 시장 판매는 물론 미국 시장 마케팅에서도 거의 타격을 입지 않고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10억 5,000만 달러(1조2,000억원)에 달하는 특허소송 사상 최대 규모의 배상금, '베끼기 대장(Copycat)'이라는 미 배심원단 평결의 낙인이 언제 내려졌냐는 듯싶다. 지금 삼성은 1988년 휴대폰 사업에 뛰어든 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지난해 스마트폰 판매량에서 애플을 제친 데 이어 올 들어 일반폰까지 합쳐 노키아를 밀어내고 사상 처음 글로벌 정상에 올라섰다.
3년 전 모습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양지차다. 2009년 아이폰쇼크가 몰아쳤을 때 '삼성 휴대폰은 끝났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스마트폰 시장이 열리는 것을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삼성은 허겁지겁 옴니아 시리즈를 내놓았지만 망신만 당했다. 제품 구동이 제대로 안돼 스마트폰이 아니라 '잡폰'이라는 비아냥이 잇따랐다. 하지만 갤럭시S를 통해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필사적인 노력 끝에 2010년 6월 안드로이드 운용체제(OS)를 탑재한 갤럭시S를 내놓아 시장의 평가를 일시에 바꿔놓았다. "외관으로나 기능에서나 이제 아이폰과 경쟁해볼 만한 제품을 갖게 됐다"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삼성 애니콜이 1990년대 중반 15만대의 불량 휴대폰을 운동장에 쌓아놓고 화형시키는 극적인 이벤트로 품질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면, 갤럭시(시리즈)는 불과 2년도 안돼 기적처럼 애플을 제친, 더 드라마틱한 케이스라고 봐야 한다. 더구나 상대는 혁신의 대명사격인 아이폰이 아닌가.
하지만 눈물겨운 '애니콜 신화'는 있어도 빛나는'갤럭시 신화'는 보이지 않는다. 성적만 보면 애니콜을 훨씬 능가하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의 일부는 어쩌면 지난달 평결이 내려질 때까지 삼성이 미국 법정에서 벌인 애플과의 공방에서 찾을 수 있을 것같다. 예상대로 애플 측의 스토리텔링은 강력했다. 잡스가 얼마나 디자인과 사용자 경험을 중시하고, 이를 제품에 구현하기 위해 고심했는지, 그렇게 5년여 동안 공들여 내놓은 아이폰을 삼성이 3개월 만에 어떻게 베꼈는지를 자료를 제시하며 배심원들을 설득했다.
반면 삼성은 방어적 태도로 일관했다. 애플의 디자인과 일부 기능들이 그 이전에도 있던 '선행 기술(prior art)'이라고 강조했지만 증거나 증인을 통한 효과적 대응은 하지 못했다. 삼성전자 수석디자이너가 출석해 하루에 2~3시간 자면서 갤럭시S 개발에 몰두했다고 증언했지만 큰 울림은 없었다. 설령 그보다 더한 스토리가 있었다 해도 삼성의 캐치업(catch-upㆍ따라잡기) 과정이 새 시장을 열어 제친 애플의 이야기만큼 감동적일 리 없었을 것이다.
어찌 됐든 삼성은 '애플 베끼기 대장'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물론 특허소송의 패배가 시장에서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같은 낙인을 지우지 못한다면 장기적으로 치명상이 될 수밖에 없다. 삼성이 아무리 멋지고 기능이 좋은 물건을 만들어도, 특정 제품을 가장 많이 판매해도 위대한 혁신 기업, 존경 받는 기업의 반열에 오르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삼성은 끊임 없이 진화하는 기업이다. 지난해 나온 갤럭시S2, 그리고 최근 한층 업그레이드된 모습의 갤럭시S3가 이를 말해준다. 하지만 생태계를 바꾸는, 판을 뒤집는 파괴적 혁신은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 이제 특허소송 역사에 쓰여진 주홍글씨보다 더 굵고 선명하게'혁신 삼성'의 이름을 새겨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갤럭시 신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첫 출발은 다소 어설펐지만, 사람들을 열광시키고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는 감동적인 스토리로 채워지고 완성되어야 한다. 이것이 어쩌면 1년4개월 넘게 진행돼온 특허소송에서 1조원대의 수업료를 치르고 삼성이 얻은 값진 교훈이 아닐까 싶다.
박진용 산업부차장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9/h201209110241042442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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