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3. 16:42

집에 들어온 딸이 엄마한테 투덜댄다. “데모 때문에 차 막히고 난리 났어요.” 엄마가 딸에게 핀잔을 주며 말한다. “불쌍한 간호사들이 파업도 못하니? 여긴 미국이 아냐.” 프랑스 영화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의 한 장면이다. 파업을 하면 불편이 따를 수밖에 없고 파업한다고 불평하는 것은 천박한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나 가능하다는 의미다. 어느 강연에서 하종강 선생이 소개한 이 장면이 불현듯 다시 떠올랐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을 보면서 말이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지난 금요일 하루 총파업에 나섰다. 파업에 참가한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는 조리사, 청소원, 행정보조원 등 전국 3443개 학교 총 1만5897명에 이른다. 이에 대한 언론의 보도는 뻔하다. “학교급식 중단”, “급식대란, 학생들 빵·김밥 들고 등교”, 심지어 “빵만 먹으니 배고파”라는 제목의 기사도 보인다. 교육과학기술부도 “아이들의 교육 활동에 지장을 주는 파업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며 엄정 대응하겠다는 방침이다. 여론도 다르지 않다. 아이들의 밥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거나 능력이 없어서 비정규직이 되었으면 참고 일할 것이지 욕심부리지 말란다. 교과부, 언론, 그리고 무턱대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한마디 하겠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을 불법으로 몰아가는 교과부의 태도는 치졸하기 짝이 없다. 교사와 달리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는 파업을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파업에 앞서 조정과 조합원 찬반투표 등 필요한 모든 절차를 거쳤다. 그런데도 교과부는 아이들의 교육에 지장을 주는 파업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두루뭉술한 말로 파업을 호도하고 있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의 파업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파업이 가져오는 불편함에 대해서만 원색적으로 보도한다.

 

이런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중교통의 파업에 대해서는 ‘교통대란’, 화물노동자 파업에 대해서는 ‘물류대란’이라는 표현을 고유명사처럼 사용해왔다. 교과부와 언론의 농간에 넘어가는 사람들은 어떤가. 아이들 밥이 귀한 만큼 그 밥을 지어주는 노동자의 소중함을 이번 기회에 깨달을 수는 없는 노릇인가. 밥하고 청소하고 업무를 보조하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학교에서 학생들은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는가. 능력이 없어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학교 비정규직 조리사도 기능직 공무원인 조리사, 소위 정규직 조리사처럼 국가기술자격인 조리사 자격을 따야 한다. 공무원 총정원 제도가 도입되면서 정부가 정규직 조리사를 뽑지 않았을 뿐이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을 한 주된 이유에는 ‘교육감 직접고용’과 ‘호봉제 실시’가 있다. 원래 학교 비정규직은 교육감이 선발했다. 지금도 학교 비정규직의 노동조건은 교육감이 결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파업에 앞서 고용노동부 역시 단체교섭의 주체는 학교장이 아니라 교육감임을 분명히 했다. 상황이 이렇다면 노조법상 사용자로 해석되는 교육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호봉제 실시’는 어떤가. 같은 업무를 하는 정규직 노동자는 ‘호봉제’의 적용을 받는다. 그래서 근무연수가 늘어감에 따라 이들의 임금도 올라간다. 그러나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는 그렇지 않다. 1년 일한 조리보조원과 10년 일한 조리보조원의 임금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불편함을 이유로 파업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능력이나 노력이 부족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비정규직을 이유로 차별하는 것은 법으로도 금지되어 있다. 타인을 향해 겨눈 화살은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윤지영 공익변호사그룹 공감변호사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60177.html

 

 

Posted by 겟업
2013. 1. 3. 16:41

뛰어난 여성은 남성적인 공격성으로 판단되는 게 아니다
힘들 줄 알면서도 옳은 일 실천하는 행동이 여성성의 표상

 

 

대표적인 여성 과학자를 꼽으라 하면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퀴리 부인'의 이름을 들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라는 명성뿐 아니라, 어린이들의 교과서나 위인 전집에 퀴리 얘기가 자주 언급된 까닭이리라.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레이첼 칼슨'도 이에 못지않은 대표적 여성과학자라 생각된다. 특히 우리가 '여성'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는다면 말이다. 최근에 대선 후보를 둘러싸고 '여성성' 논란이 불거진 시점에서 칼슨 여사의 삶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잘 알려진 바처럼 칼슨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침묵의 봄>이라는 책을 집필한 저자다. 칼슨 여사는 이 책에서 생태계 연구의 중요한 발견 중 하나인 '생물농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람들은 술을 엄청나게 마시지만 병으로 발전할 정도만 아니라면 대부분 몸에 알코올이 남아있지 않다. 그 이유는 술은 물에 녹는 '수용성'이라 몸에서 분해도 되고 땀이나 소변으로 쉽게 배출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물에 녹지 않고 지방에만 녹는 '지용성' 물질의 경우에는 생물체 몸 안으로 소량만 들어와도 몸 속 지방에 차곡차곡 쌓이다. 또 생태계에서는 '먹이망'을 통해서 식물플랑크톤은 동물플랑크톤에게, 또 이들은 작은 벌레, 물고기, 큰물고기 등을 거쳐서 새나 더 큰 동물에게 잡아 먹히는 순차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이런 지용성 물질들은 각 먹이 단계에서 계속적으로 농축되기 때문에 먹이망의 위로 올라갈수록 생물들은 고농도 지용성 물질을 먹게 된다. 이런 대표적인 지용성 물질이 농약을 비롯한 대다수의 합성 화학 물질이다. 이 책에서 다룬 DDT라는 화학물질은 원래 해충 방제를 위해 사용한 약이다. 과거 미국에서는 공중에서 비행기를 통한 대규모 살포가 이뤄졌다. 인간에게 직접적인 해가 없다는 이론과 벌레들은 모두 박멸해야 한다는 공격성이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물농축을 통해 DDT는 새의 몸에 높은 농도로 쌓이고, 그 부작용으로 새알의 껍질이 얇아져 결국 봄이 되어도 새 지저귀는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는 경고를 이 책은 담고 있다.

칼슨 여사는 대학에서 해양생물학 석사학위를 받긴 했지만 이 화학물질을 직접 분석한 과학자는 아니다. 그보다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과학책 집필로 유명해졌다. 그녀의 능력은 어려운 과학적 발견을 대중 특히 가정주부까지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아름답고 강력한 필치로 표현한 점이다. 그보다 더 주목할 점은 그녀가 가난한 환경을 극복하고 성장했으며, 수많은 병마와 싸우며 자신의 일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또 이 책이 나오면 벌어질 소동을 예상하면서도 인류 전체와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이 위험을 꼭 알려야 한다는 큰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예상대로 책이 나오자마자 재벌 화학 회사와 이들의 지원을 받는 과학자들의 공격, 비판 그리고 소송에 시달렸다. 이 비난들 중에는 칼슨이 살충제 사용에 반대하여 벌레가 창궐케 하고 이를 통해 미국의 농업 생산성을 낮추려는 소련의 음모에 따라 책을 집필한 '빨갱이'라는 것도 있었다. 미국에서 50년 전에 있었던 이런 유치한 비난이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세세한 부분의 오류에 대한 계속되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침묵의 봄은 여전히 선진국 대학에서는 현대 환경문제의 이해를 위해 꼭 읽어봐야 할 고전으로 손꼽힌다. 이 책을 통해 환경과 생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혁명적으로 변화했고, 미국 환경청 신설이나 다양한 환경법령의 제정도 이루어 졌다. 어떤 이는 아직도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칼슨 여사의 책 때문에 DDT 생산이 중단되어 아프리카의 말라리아가 번창했고, 이 때문에 죽은 사람의 수가 히틀러가 학살한 사람의 수보다 많다고 말이다. 만일 누군가가 항생제의 오남용이 위험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항생제 부족으로 아프리카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고 되묻고 싶다.

칼슨 여사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출산의 경험도 없었다. 그러나 고아가 된 친척 아이를 양육했으며, 여성성의 상징인 가슴을 수술로 제거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뛰어난 필치로 큰 업적을 남겼다. 뛰어난 여성은 남성적인 공격성이나 생물학적 특성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는 칼슨 여사가 보여준 바와 같이 약자에 대한 이해와 고려, 자연에 대한 경외와 조화, 그리고 힘들 줄 알면서도 옳은 일을 실천하는 행동이 진정한 여성성의 표상일 것이다.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1/h20121111210235121780.htm

 

 

Posted by 겟업
2013. 1. 3. 12:50

1960년대 말 미국 디트로이트의 허름한 클럽 ‘하수구’. 훗날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등을 키워낸 세계적인 프로듀서 마이크 시어도어가 한 뮤지션을 찾아간다. 한 구석에서 객석을 등진 채 노래하는 남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신선한 목소리였다. 외모는 부랑아 같았다.

멕시코계 미국인 시스토 로드리게스는 그렇게 ‘콜드 팩트’(1970년) 등 두 장의 앨범을 냈다. 공장도시 디트로이트의 암울한 삶과 현실을 시적인 가사와 소울풀한 멜로디에 담았다. “크리스마스 2주 전 일자리를 잃고 시궁창의 예수에게 말했더니 교황은 그의 알 바 아니라고 하네”(‘cause’) 같은 노래였다. 시어도어는 “밥 딜런보다 훌륭하다”며 성공을 확신했지만 결과는 참패. 그는 그렇게 잊혀진 무명가수가 됐다.

이런 그의 음악이 1970년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전해졌다. 극심한 인종차별과 권위주의적 통제 속에서 기성질서에 맞서는 가사가 폭발적 반향을 일으켰다. 정부는 금지곡으로 지정했지만, 그의 음악이 저항의 아이콘이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시위 현장마다 그의 노래가 울려퍼졌고, 수백만 장 음반이 팔려나갔다. 반면 그의 신상은 미스터리였다. 공연 중 관객 앞에서 자살했다는 루머만 무성했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가 철폐된 90년대 어느 날, 로드리게스의 열혈팬 두 사람이 그의 행적을 찾아 나선다. 수퍼스타일 줄 알았는데 막상 미국에서 그를 아는 사람이 전무했다. 가사를 단서로 추적했고, 인터넷에 광고를 올렸다. 그리고 그가 살아 있다는 기적 같은 사실에 함성을 질렀다.

마침내 98년 56세의 로드리게스는 남아공 팬들 앞에 섰다. “남아공에선 엘비스보다 당신이 더 유명하다”는 말을 믿지 못했지만, 수만 명의 관객이 그의 이름을 외치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장면에 목이 메었다. 평생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 “나를 살아 있을 수 있게 해줘 감사하다”고 간신히 말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음악 다큐멘터리 ‘서칭 포 슈가맨’(말릴 벤젤룰 감독)에 담겼다. 지난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선보여 심사위원특별상·관객상을 수상했다. 이후 작은 영화제들을 휩쓸었다. 국내에서도 개봉돼 관객을 1만 명가량 넘겼다.

이후 로드리게스는 남아공에서 40여 차례 공연했다. 공연의 모든 수익을 이웃과 나누었고 여전히 디트로이트 집에서 가난한 노동자로 살아간다. 그의 노동자 친구는 “그의 음악은 잘 모르지만, 그는 현자가 분명하다”고 말한다.

현실은 어떤 드라마보다 극적이며, 진정한 음악(가)의 길은 무엇인지 일깨우는 다큐멘터리다. 음악이 할 수 있는 기적에 대한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이 기적 같은 일을 공유할 극장이 서울에 달랑 8개. 그나마 퐁당퐁당 교차상영이라 영화보기가 기적처럼 힘들다. 일년에 1000만 영화 2편, 스크린 900개 이상 개봉작 6편, 한국 영화인구(한국 영화누적 총관객수) 1억 명 시대의 그늘이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788605&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3. 1. 3. 12:33

녀석의 부고를 받았다. 그와 나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장례식장에 가야 했지만 망설여졌다. 그 장례식장에서 나를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루 종일 망설이다, 마지막은 봐야 한다는 의무감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병문안을 갔을 때 녀석이 나에게 남긴 말이 귀를 맴돌았다. "형 졸업식에 꽃 들고 찾아가야 하는데."

그를 만난 것은 군대에서였다. 나의 후임병이었다. 묘한 친구였다. 한 선임병은 그의 몸에서는 사과 풋 향이 난다고 했다. 생긴 것도 장난스럽게 생겼고 하는 짓도 아주 귀여웠다. 그 바람에 그는 많은 선임병들에게 희롱을 당했다. 안고 뺨을 부비고 냄새를 킁킁대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십년 전에는 이런 희롱을 당하더라도 후임병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볼멘소리로 "하지마시란 말입니다"만 반복했다.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군대에서는 없었다. 그러다 그가 화장실에서 '바위처럼'이라는 민중가요를 흥얼거리다 나한테 딱 걸렸다. 쓱 옆으로 다가가 "너 운동권이지?"라고 물었다. 녀석은 "아닙니다!"며 화들짝 놀랐다. "아니긴 뭐가 아냐 임마. 그거 '바위처럼'이잖아." 녀석은 경계를 다 풀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이 노래 아십니까?" 하하하. "당연히 알지. 임마. 나도 운동권이었거든." 그리고 녀석과 나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별로 말을 나눌 사람이 없던 터라 온갖 이야기를 하며 몰래 술도 마시며 어울려 다녔다.

그러다 녀석과 내가 더욱 각별해진 것은 1996년 연세대 사태 때였다. 부산에서 여전히 학생운동을 하던 녀석도 올라왔다. 서로 반가워하며 밖에서 만나 잠시 술을 마시는 와중에 연세대가 봉쇄됐다. 녀석은 오도 가도 못하게 됐고 연세대 사태가 진행되던 우리 집에 숨어있었다. 매일 헬기 소리를 듣고 그의 친구도, 내 동료들도 잡혀가는 것을 TV로 지켜봐야했다. 큰 상처였다. 이 상처에 대한 공유는 우리를 더욱 각별한 사이로 만들었다. 내가 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울산에 내려갈 때마다 만났고 서로를 격려하고 삶을 나눴다.

그러나 그의 빈소에서 그와 나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그의 가족을 만난 것은 그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어머니를 만난 딱 한번이 전부였다. 그 어머니가 자동차 사고를 내서 경찰서에 끌려갔던 이야기며, 몸무게가 급속도로 늘어서 부인이 된 여자 친구한테 살이 더 찌면 헤어질 것이라는 경고를 들었다는 말도 킬킬거리며 했지만 정작 그의 가족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유족들에게 조문하며 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당황스러웠다. 나는 그의 가족들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나를 알리는 없었다. 길게 설명했으면 그들도 내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겠지만 거기서 그럴 수도 없었다. 더듬거리며 몇 마디로 나를 소개했지만 어쨌든 나는 쌩뚱 맞은 사람이었고 유족들도 뜬금없어 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나의 슬픔과 유족들의 고통이 만날 수가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나오면서 사람의 관계는 나와 너, 둘 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불현 듯 깨달았다. 그와 나의 관계를 알고 있는 제3자가 단 한 명도 없는 그의 장례식장에서 내 존재는 무화되었다. 그러면서 왜 성소수자들이 결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건 흔히 오해하듯 결혼이라는 이성애적 질서에 그들이 편입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은 최소한 세 명이 모여야 비로소 인간이 된다. 이 세 번째 존재가 없다면 나머지 둘은 아직 인간이 아닌 것이다. 성소수자들에게 결혼이란 바로 자신들의 존재를 보증하고 기억하는 이 세 번째를 얻고자 하는 그런 투쟁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그들의 투쟁에 이성애자들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면 그 이유는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보장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성애자들은 성소수자의 투쟁에서 배워야한다. 그들이 잃어가고 있는 세 번째의 의미를 말이다. 이미 우리는 삶의 전 영역에서 세 번째가 급속도로 사라지고 오로지 둘만 남는, 그런 해체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엄기호 교육공동체 벗 편집위원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0/h2012103121004881920.htm



Posted by 겟업
2013. 1. 3. 12:08

‘가해자 한정(限定)’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전후 화해에 대해 논의할 때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전쟁 피해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커진 것은 그리 먼 옛날 일이 아니다. 산업혁명 이후 규모가 커졌고, 피해도 심각해졌다. 19세기엔 식민지 쟁탈 전쟁이 빈발했고, 20세기에 벌어진 두 차례 세계대전은 총력전으로 치달았다. 그 결과 ‘망각에 따른 화해’가 불가능하게 됐다.

망각이 불가능하다면 책임 추궁이 불가피하다. 책임 추궁 없이는 전후 화해가 어렵기 때문이다. 전쟁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서는 가해자를 한정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이를 위해 전범재판이 필요해진다. 국민 전체를 가해자로 하는 전후 화해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인은 능란하게 ‘가해자 한정’을 이뤄냈다.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모든 책임을 히틀러와 나치에 떠넘겼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유대인 말살 등 나치의 범죄는 상식을 벗어났다. 그 책임을 스스로 철저하게 추궁하지 않는 한 독일인은 유럽 세계에 복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폴란드를 방문했던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는 바르샤바의 게토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종전 40년 기념일에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은 “과거에 눈감는 사람은 현재도 보지 못한다”고 연설했다. 그 ‘잊어서는 안 되는 과거’는 히틀러와 나치의 범죄였다. 이를 신랄하게 추궁한 덕분에 일반 독일인은 전쟁 책임을 면했다.

이상하게도 일본인은 ‘가해자 한정’을 하지 못했다. 도쿄 전범재판에서 많은 전범들이 처형됐고, 중국 정치지도자들이 “나쁜 사람은 소수의 군국주의자들뿐이다”며 ‘구조선’을 내주었는데도 말이다. 연대책임의 집단주의적 문화 때문인지 ‘1억 총 참회’라며 스스로 전쟁 책임을 공유하려고 했다.

그 하나의 일그러진 형태가 A급 전범들의 야스쿠니(靖國)신사 합사(合祀)다. 원래 야스쿠니신사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과 군속, 국민을 봉안하기 위한 종교시설이다. 군사법정에서 심판받은 사람들이 사후에 자신이 신사에 모셔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300만 명 이상의 동포를 희생시키고 아시아 각국에 엄청난 희생과 손해를 안긴 전쟁 지도자들에게는 분명히 일반 국민과 다른 무거운 전쟁 책임이 있다. 하지만 가해자를 한정해 그 책임을 적극적으로 추궁하지 않았다고 해서 일본인이 독일인보다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식으로 보는 것은 오류다. 또 독일과 일본을 그런 틀로 비교하는 것도 정확하지는 않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일본의 책임을 추궁할 때 독일과 비교해 ‘전쟁 책임’을 추궁하기보다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과 비교해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무력 제압에서 시작된 식민 지배는 징병, 징용 등 전시동원에 이르기까지 전쟁보다 더 큰 피해를 안겼다. 그 책임 또한 전쟁 책임보다 분명히 무겁다.

하지만 전쟁 책임 추궁에 열심인 서구 제국도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 책임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 오히려 지금까지도 식민지 지배를 합법화하고 있다. 영국은 아편전쟁으로 빼앗은 홍콩을 난징조약과 베이징(北京)협약에 따라 1997년에서야 중국에 반환했다.

일본의 한국 지배는 이웃 나라를 병합한 무거운 범죄였다. 이에 가장 근접한 예는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일 것이다. 프랑스도 알제리를 병합해 동화시키려 한 흔적이 있다. 하지만 그 후 프랑스가 알제리에 사죄와 보상을 해 양국 간 화해가 성립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식민 화해’는 ‘전후 화해’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오코노기 마사오 규슈대 특임교수 겸 동서대 석좌교수

 

http://news.donga.com/3/all/20121030/50482831/1

 

 

 

Posted by 겟업
2012. 12. 26. 11:40

파출소 공격했던 중장비 기사, '내 차만 불법주차 딱지 끊었다'
그의 행동은 용납할 수 없지만 법 집행 과정 불공정해 보이면
사람들은 결코 승복하지 못해… 관청 일처리 불만, 이것뿐일까

 

지난달 중순 어느 날 밤 경남 진주시에서 만취한 40대 중장비 기사가 굴착기를 몰고 파출소로 돌진해 와서 난동을 부린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람은 굴착기 삽으로 경찰 순찰차를 내리찍은 뒤 거꾸로 들어올려 파출소 건물 벽면에 여러 차례 내던졌다. 순찰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박살 났고 파출소 벽도 파손됐다. 이 사람의 난동으로 파출소 현관문과 파출소 옆 가로등, 가로수, 버스 정류장 표시대, 도로 표지판도 부서졌다. 40여분간의 난동은 이 사람이 경찰이 쏜 총알에 허벅지를 맞고서야 끝났다.

사람들은 언론에 보도된 이 광경을 보면서 "그 양반 참 성질 한번 대단하군" 하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도대체 파출소에 얼마나 억울한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까지 했을까" 하고 의아했을 것이다. 나 역시 그 점이 궁금했다. 이 사람의 가족이 방송기자에게 한 말 한마디가 그 궁금증을 풀어줬다. "(진주시에서 나온 불법주차 단속원이) 우리 차만 (딱지) 끊었어요. 다른 사람들 것은 안 끊고, 다 빼고…."

경찰에 따르면 이 사람은 진주시청 주차 단속원의 불법주차 단속에 걸려 딱지를 떼였다. 그는 시청으로 찾아가 항의하다 주차 단속원을 폭행하고 이를 제지하던 청원경찰의 팔을 물어뜯었다.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파출소로 연행돼 조사를 받고 풀려난 그 사람은 몇 시간 뒤 조사받은 파출소로 찾아와 난동을 부린 것이다. 이 사람은 다른 차들도 불법주차돼 있었는데 그것들은 놔두고 자기 차만 단속해서 불공정하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또 관청의 불공정에 항의하다 시비가 붙어서 일이 터졌는데 시비가 벌어진 원인은 놔두고 그 결과만 문제 삼는 경찰 역시 불공정하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단속 공무원이 정말로 불공정하게 주차 단속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경찰이 조사 과정에서 이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설사 단속이 불공정했다고 하더라도 단속 공무원에게 행패를 부린 것을 옳다고 할 수는 없다. 경찰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파출소를 때려 부수는 걸 용납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사건은 관청의 법 집행 과정이 공정하게 보이지 않으면 당사자는 그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다는 걸 다시 한 번 보여줬다. 미국 교수들이 1984년 경찰 조사를 받았거나 법원 재판을 받은 적이 있는 시카고 시민 1575명을 상대로 어떤 경우에 경찰이나 법원의 조치에 승복하게 되는지를 조사했다. '결과가 나한테 유리하게 나왔을 때'보다 '절차가 공정하게 진행됐을 때'라고 답한 사람이 두 배나 됐다. 어떤 때 절차가 공정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다시 묻자 '경찰관이나 판사가 내게 말할 기회를 충분히 주었을 때'와 '경찰관이나 판사가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중립을 지키려 하고, 나의 권리와 인격을 존중하는 것으로 보일 때'라고 답했다. 교수들은 조사 결과에 이런 해석을 달았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무엇이 공정한가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을 갖고 있다. 법 집행자의 행동이 이 감각에 맞는다고 느껴야 법과 법 집행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승복한다."

주차 단속반원들이 굴착기 기사가 '왜 다른 차는 놔두고 내 차만 단속하느냐'고 항의했을 때 그에게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줬다면, 파출소 경찰관이 이 사람을 조사하면서 왜 단속 공무원을 폭행하게 됐는지, 무얼 억울해하는지 충분히 듣고 그럼에도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폭력을 쓰면 안 된다는 걸 납득시켰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 시청·경찰·검찰·법원·국세청 등 관청의 일처리 방식에 불만을 느꼈던 사람은 이 굴착기 기사만이 아닐 것이다.

 

 

김낭기 논설위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0/15/201210150288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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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26. 11:39

"뉴욕타임스(NYT)는 미국을 움직인다고 믿는 사람들이 읽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구독한다." WSJ가 미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만큼 이 신문에 대한 주목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도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주(主)독자층이라는 점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신문이다.

지난달 말 WSJ에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 인터뷰가 실렸다. 8월 10일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시작된 한일 외교 갈등이 비등점을 찍을 때였다. 노다는 당시 "일본군위안부(성노예)에 대한 배상은 법적으로 완전히 끝났다"고 했다. 우리 정부가 '새로운 배상(new compensation)'을 요구했다는 표현도 세 번 등장한다. 마치 한국이 배상금을 받은 후 다시 무리한 요구를 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 것이다.

노다의 이 '망언(妄言) 인터뷰'에 우리 정부가 대응한 것이라곤 딱 한 가지였다. 외교부 당국자가 청사 1층 기자실로 내려와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체결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됐다는 입장이지만, 당시에 이 사안은 토의조차 되지 않았다"고 비판한 것이 전부였다. WSJ의 노다 인터뷰를 읽은 외국 독자들이 이 브리핑을 접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그런데도 정부는 한국 기자들을 상대로 반박 브리핑을 한 것만으로 할 일을 다 했다는 분위기였다.

2년 전에는 NYT 지면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그해 11월 NYT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남북한 간의) 경계선(서해북방한계선·NLL을 의미)을 다시 그을 직권(職權)이 있다"고 주장하는 칼럼이 실렸다. 한국의 좌파가 자주 인용해 온 셀리그 해리슨 전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쓴 글이었다. 같은 해 8월엔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가 NYT를 통해 천안함 폭침(爆沈) 조사 결과에 대한 불신감을 드러냈다. 외교부는 당시 "이 매체에 반론(反論) 게재를 요청하고, 이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을 방법을 모색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현재의 시스템으로는 외국의 주요 언론 매체가 또 한국과 관련한 왜곡 보도를 하고 우리 정부는 '뒷북'을 칠 확률이 100%에 가깝다. 정부 내에서 외국 언론에 대응하는 주체는 외교부와 문화부 산하의 해외문화홍보원으로 이원화돼 있다. 외국 언론 논조 분석은 해외문화홍보원이, 중요한 정무 사안은 외교부가 담당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민감한 현안과 관련한 유기적인 협조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한일 갈등처럼 폭발력이 큰 사안이 튀어나올 때 우리의 입장을 선제적으로 국제사회에 알리는 기능은 말할 수 없이 취약하다. 최근엔 해외 공관이 한국 홍보를 문화 행사 개최와 동일시하는 경향도 늘고 있다. 일부 공관장은 한류(韓流) 관련 행사 개최에 주력해 인사 고과(考課)를 높이려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문화 외교도 좋지만 해외 홍보 정책의 기본은 외국의 정부와 국민에게 우리나라의 입장과 정책을 정확하고 빠르게 알리는 것이다. 해외 홍보 담당 부서를 통합하고 관련 정책을 전면 개편하는 것이 다른 어떤 정책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18대 대선주자들은 알고 있을까.

 

 

이하원 정치부 차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0/15/20121015028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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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26. 10:36

문화는 원래 사고파는 상품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품 속에 문화가 녹아있고 또 문화 자체가 상품화되어 전 세계 사람의 삶을 알게 모르게 변화시킨다.

아시아 사회에서 줄 서기 문화는 분명 서구에서 수입된 것이다. 사실 유럽인들이라고 언제나 줄을 잘 섰던 것은 아니다. 1850년대에 독일인 여행자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사람들이 줄을 제대로 안 선다고 개탄했다. 1950년대에는 반대로 영국인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독일인들이 줄을 제대로 안 서는 것을 보고 놀랐다. 21세기가 되자 영국에서 다시 줄 서기 문화가 갈수록 흐려지고 있다고 한다. '본토'에서 줄 서기 문화가 쇠락하는 동안 그것이 아시아로 수출되었다. 중국에서 줄을 제일 반듯하게 잘 서고, 화장실을 깨끗하게 사용하는 곳은 햄버거 가게라는 말이 있다. 작은 예이지만 서구식 가게가 외래문화가 흘러들어오는 창구 역할을 하는 것이다.

브라질의 인구 동향을 연구하는 학자는 20세기 후반에 이 나라의 인구증가율 하락의 중요한 원인이 1970년대에 들어온 미국 연속극이라고 분석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미국 연속극은 중간 계급이나 상층 계급의 도시적 가치를 매우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어 전국에 내보냈다. 시청자들은 이제 그들의 전통문화와는 다른 행동 패턴과 다른 가치에 눈을 뜨게 되었다. 가족 계획 프로그램보다 이런 드라마가 훨씬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서구 영상물의 '파괴적' 효과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은 중동 이슬람 국가들이다. 특히 화면에 보이는 서구 여성들의 의상, 행동 방식, 사회적 지위 같은 것들이 여성 시청자들에게 선망을 불러일으키고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종교인이나 보수적 지도자들이 볼 때 할리우드 영화는 낯선 가치를 숨기고 있는 트로이의 목마나 다름없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입장에서는 서구의 문화적 '공격'이 무슬림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그 대신 세속적이고 심지어 기독교적 정체성을 심으려 하는 것으로 비쳤다. 사실 경제적 경쟁 관계로 보면 서구보다는 동아시아가 이슬람권에 더 위협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서구만큼 공분을 불러일으키지 않은 이유는 지금까지 상품만 수출했지 문화를 수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늘 외래문화 유입의 충격에 대해 우려해 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 문화가 세계로 흘러나가고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가 필요하다.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0/03/201210030181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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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25. 13:35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바로는, 근세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나쁜 일들 대부분은 일본의 제국주의 때문이다. 조선 땅에서 호랑이가 멸종된 것도 일본 포수들 때문이라 들었다. 그러나 호랑이가 멸종된 것은 인간의 포획 때문만은 아니다. 가능하지도 않은 얘기겠지만 지금 깊은 산속에 호랑이를 풀어놓아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노력을 들였지만 아직도 반달곰 개체군 복원이 쉽지 않다는 사실도 이를 증명한다. 이렇게 큰 야생동물의 복원이 쉽지 않은 것은 포획보다는 그들이 살 수 있는 서식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서식지란 넓은 공간보다는 에너지의 문제를 의미한다.

생태계 연구의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자연 내에서 흘러가는 에너지의 흐름을 파악하는 일이다. 태양에서 들어온 빛에너지 대부분은 그냥 흘러지나가고 아주 작은 부분만이 식물을 통해 화학에너지로 변환된다. 즉 식물이 빛 에너지를 붙잡아 다른 생물이 이용하고 저장할 수 있는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식물체를 먹고 사는 작은 동물이나 곤충들이 있고, 이것은 더 큰 생물에게 먹히면서, 소위 '먹이사슬' 혹은 이것이 복잡하게 얽힌 '먹이망'이 구성된다. 그리고 그 가장 위에 호랑이와 같은 동물이 위치하고 있다. 초등학교에서 강조하는 바와 달리, 사실 생태학자들이 알고자 하는 것은 동물들의 식성이나 식탐 여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이런 먹이 단계를 통해 이동하는지 이다.

초기에 먹이사슬을 연구하던 학자들은 생물의 수와 양에 관심을 두었다. 과학시간에 가르치는 '먹이피라미드'와 같은 것이다. 즉 식물체의 양이 가장 많고 먹이 단계 위로 올라갈수록 숫자가 줄어드는 모양이 바로 그것이다. 오래 전 영국의 생태학자 챨스 엘톤이 발견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후에 생물의 양보다는 이들이 지니고 있는 에너지를 파악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분석임을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 어떠한 생태계든 식물에서 초식동물, 육식동물로 먹이 단계가 올라갈수록 보유하고 있는 에너지가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보통 한 단계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약 10%의 에너지만이 남게 된다. 이것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200㎏의 호랑이 한 마리가 생존하려면 먹이가 되는 초식동물은 적어도 2톤 이상 존재해야 하며, 또 초식동물들이 생존하기 위해선 자신들의 먹이가 되는 식물이 20톤 이상 존재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사실을 아주 단순화해서 설명한 것이고, 실제로는 훨씬 많은 식물이 필요하다. 즉 멸종 위기 동물의 복원을 위해선 그 삶을 유지하기 위한 매우 넓은 숲과 풀이 필요하다. 호랑이는 숲을 호령하는 백수의 왕이 아니라 사실은 식물들의 광합성량에 의존하는 존재란 말이다.

나는 생태계의 먹이망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나라 대통령과 이에 대한 국민의 생각을 떠올린다. 물론 인간의 정치체계가 생태계처럼 먹고 먹히는 관계는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조직도 정보 전달과 의사소통이라는 과정을 통해 다층적인 망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유사하며, 이런 측면에서 생태계의 먹이망은 대통령과 국민의 관계에 대한 좋은 유비가 될 수 있다. 대통령이 마치 나라의 모든 문제를 지시 한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구세주나 봉건 제왕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다. 그러나 많은 선진국과 우리나라의 경험을 보면, 그것은 사실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대통령이 모든 사람의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버렸으면 한다. 수많은 상충되는 의견을 어찌 모두 반영할 수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밑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정보를 잘 듣고 이를 소화할 능력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대통령 일인 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람들, 생태계로 비유하자면 주변의 초식동물들을 잘 살펴야 한다. 대통령의 성품과 관계없이, 주변에 부정한 인물들이 보인다면 그 시스템은 부패한 조직이 될 수밖에 없다. 호랑이가 백수의 왕이 아니라 이름 없는 풀들의 에너지에 의존해야 하듯, 대통령은 국민의 왕이 아니다. 그는 수많은 국민의 에너지와 정보에 근거해야만 존재가 확보되는 대상이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서 진정한 대통령은 아직도 복원의 대상이다.



강호정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9/h2012092321035112178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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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25. 13:00

태풍 때문에 여행에서 돌아오는 여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경유지였던 중국 베이징에서 이틀을 묵어야 했다. 항공사가 제공한 공항 근처 호텔에서는 나를 포함해 네 명의 한국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베이징 시내를 함께 구경하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넓직한 신작로를 달렸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중국은 부자인가 봐요."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화려한 건축물과 대형 상가와 유흥업소가 즐비한 동네를 통과했을 때였다. 베이징은 깔끔하게 발전된 국제 도시 그 자체였다. 그렇지만 택시에서 내려 골목골목을 걸어다닐 때에는 그 모습이 다는 아니었다. 뒷골목에는 여전히 가난에 찌든 채 살아가는 고달픈 사람들이 길고 긴 그림자를 짊어지며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식으로 터키를 한 바퀴씩 돌고 집으로 돌아가던 여행자들이었다. 우리는 집으로 가는 길이었지만, 우리의 대화는 여전히 터키에 머물러 있었다. 터키의 어떤 도시가 특히 인상적이었는지, 여행을 하며 어떤 재미있는 일들을 겪었는지 등에 대해 담소를 주고받다가 한 사람이 질문을 내놓았다.

"터키랑 우리나라랑 어느 쪽이 더 잘 사는 나라죠?", "잘 산다는 게 기준이 뭘까요?"

조금 더 자세해진 질문을 놓고 네 사람은 토론을 벌였다. 누군가는 거지가 눈에 띄지 않으면 잘 사는 것이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거리가 깨끗하고 번화하면 잘 사는 것이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대중교통이 잘 발달됐으면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내놓은 자기 의견에 우리들은 조금씩 생각을 보태어갔다. 다시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복지가 잘 이루어진 나라가 잘 사는 나라 같다고 했고, 누군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서도 넉넉한 표정이 읽히면 풍요로운 나라라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고, 누군가는 그게 행복지수라고 단정하게 덧붙였다. 우리는 이즈음에서 합의를 했다. 윤택하고 편리한 도시환경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잘 사는 것의 척도가 아니겠느냐고. 

우리의 이 합의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반성의 뜻이 전제돼 있었다. 우리는 모두 어렸을 때보다 지금이 생활은 더 윤택해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삶은 풍요롭지가 못한 쪽이었다. 언제나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서 풍요를 누릴 수가 없고, 언제나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감에 짓눌린 채 살아가다가 우리는 모두 여행을 떠났던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나는 줄곧 '잘 산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이어갔다. 여러 가지 조건들이 덧붙여져야 하겠지만, 우선 나는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가 잘 사는 사회라고 말하고 싶다. 직업으로부터, 학벌로부터, 성별로부터, 나이로부터, 입장으로부터 제한받지 않고 평등하게 자기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사회. 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작은 목소리들, 소외된 입장들을 놓치지 않고 챙겨서 발전해가는 사회. 그래서 개개인의 인권이 확보된 사회. 나는 우리 사회가 인권지수에 관하여는 아주 못 사는 나라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다. 인권을 노골적으로 유린하는 사건들은 물론이고, 은근하게 조성된 채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어 우리가 무감각해져 버린 비인권적 가치관도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남과 다르다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고 거기서 결핍감을 느낀다.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편견으로 바라보고 시선으로부터 시작된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남과 같아지려는 노력을 하느라 우리는 이토록 윤택해졌는데도 이토록 허하고 불안하다. 우리 사회는 경제발전도 중요하지만, 관습을 발전시키는 게 먼저다. 같아지려는 노력보다 달라지려는 노력이 더 좋은 삶이라는 관습,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경험 속에서 다양한 생각들을 키워온 사람들이 사회적 역할을 골고루 담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관습. 예외적 인간의 예외적 사고와 행동을 반가워하는 관습. 브레히트가 <예외와 관습>이라는 희곡에서 한 사회의 비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예외가 관습을 수정한다."



김소연 시인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9/h2012092021012181920.htm

Posted by 겟업
2012. 11. 19. 01:03

당신의 꿈을 믿습니다

당신의 에너지,

당신의 가능성,

당신의 꿈을 믿습니다.

당신의 열정,

당신의 잠재력,

당신의 빛나는 눈빛을 믿습니다.

언제나 가장 먼저 깨어나

새벽이 되고 아침이 되는

당신의 푸른 희망을 믿습니다.

어떤 시련 앞에 서 있더라도

봄처럼 번식해 나갈

당신의 푸르른 용기를 믿습니다.

힘내세요.

당신은

어느 누군가의 희망이고 전부입니다


Posted by 겟업
2012. 11. 19. 00:56

 
1. 따져서 이길 수 없다
2.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도 잔소리는 용서가 안된다
3. 좋은 일만 한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것은 아니다
4. 말에는 자기 체면 효과가 있다
5. '툭'한다고 다 호박 떨어지는 소리는 아니다
6. 유머에 목숨을 걸지 말라
7. 반드시 답변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화를 자초한다
8. 상대편은 내가 아니므로 나처럼 되라고 말하지 말라
9. 설명이 부족한것 같을 때쯤 해서 말을 멈춰라
10.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은 뒤에서도 하지 말라
 
11. 농담이라고 해서 다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12. 표정의 파워를 놓치지 말라
13. 적당할때 말을 끊으면 다 잃지는 않는다
14. 사소한 변화에 찬사를 보내면 큰 것을 얻는다
15. 말은 하기 쉽게 하지 말고 알아듣기 쉽게 해라
16. 립서비스의 가치는 대단히 크다
17. 내가 이 말을 듣는다고 미리 생각해 보고 말해라
18. 지루함을 참고 들어주면 감동을 얻는다
19. 당당하게 말해야 믿는다
20. 흥분한 목소리보다 낮은 목소리가 위력 있다
 
21. 한쪽 말만 듣고 말을 옮기면 바보 되기 쉽다
22. 눈으로 말하면 사랑을 얻는다
23. 덕담은 많이 할수록 좋다
24. 자존심을 내세워 말하면 자존심을 상하게 된다
25. 공치사하면 누구나 역겨워한다
26. 남의 명예를 깎아내리면 내 명예는 땅으로 곤두박질 처진다
27.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면 진실성을 인정받는다
28. 잘난 척하면 적만 많이 생긴다
29.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해야 인정받는다
30. 말의 내용과 행동을 통일시켜라
 
31. 두고두고 괘씸한 느낌이 드는 말은 위험하다
32. 상대에 따라 다른 언어를 구사해라
33. 과거를 묻지 말라
34. 일과 사람을 분리해라
35. 애교는 여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36. 자기 자신을 제물로 사용해야 웃길 수 있다
37. 대화의 시작은 호칭부터다
38. 대화의 질서는 새치기 때문에 깨진다
39. 말을 독점하면 적이 많아진다
40. 무시당하는 말은 바보도 알아듣는다
 
41. 작은 실수는 덮어 주고 큰 실수는 단호하게 꾸짖어라
42. 지나친 아첨은 누구에게나 역겨움을 준다
43.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한 비밀을 털어놓는 것은 무덤을 파는 일이다
44. 악수는 또 하나의 언어다
45. 쓴 소리는 단맛으로 포장해라
46. 말은 입을 떠나면 책임이라는 추가 달린다
47. 침묵이 대화보다 강한 메시지를 전한다
48. 첫 한 마디에 정성이 실려야 한다
49.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면 대화는 저절로 잘 된다
50. 낯선 사람도 내가 먼저 말을 걸면 십년지기가 된다
 
51. 목적부터 드러내면 대화가 막힌다
52.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해서 말하면 큰 낭패를 당하기 쉽다
53. 말을 잘한다고 대화가 유쾌한 것은 아니다
54. 내 마음이 고약하면 남의 말이 고약하게 들린다
55. 타협이란 완승, 완패가 아니라 승&승이다
56. 험담에는 발이 달렸다
57. 단어 하나 차이가 남극과 북극 차이가 된다
58. 진짜 비밀은 차라리 개에거 털어놓아라
59. 지적은 간단하게 칭찬은 길게 해라
60. 가르치려고 하면 피하려고 한다
 
61. 정성껏 들으면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62. 비난하기 전에 원인부터 알아내라
63. 내 말 한 마디에 누군가의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64. 눈치가 빨라야 대화가 쉽다
65. 불평하는 것보다 부탁하는 것이 실용적이다
66. 말도 연습을 해야 나온다
67. 허세에는 한 번 속지 두 번은 속지 않는다
68. 내가 먼저 털어놓아야 남도 털어놓는다
69. 그런 시시한 것조차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70.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어서는 안 된다
 
71. 지나친 겸손과 사양은 부담만 준다
72. 도덕 선생님은 선생님 자리에서 내려올 수 없다
73. 말은 가슴에 대고 해라
74. 넘겨짚으면 듣는 사람 마음의 빗장이 잠긴다
75. 말투는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
76. 때로는 알면서도 속아 주어라
77.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라
78. 정성껏 들어주면 돌부처도 돌아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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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2. 10. 24. 01:42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 유언



Posted by 겟업
2012. 8. 15. 22:48




정말 잘 만들었다. 나도 이런거 만들어야지

Posted by 겟업
2012. 8. 15.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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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2. 8. 15. 22:31

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녹취록

사단법인 한국엔지니어클럽
일 시: 2010 6 17 () 오전 7 30
장 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521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2층 국화룸

저는 지난 6 10일 오후 5 1분에 컴퓨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로호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기에 계신 어르신들도 크셨겠지만 저도 엄청나게 컸습니다. 그런데 대략 6시쯤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7시에 거의 그것이 확정되었습니다. 저는 성공을 너무너무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날 연구실을 나오면서 이러한 생각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제가 그날 서운하고 속상했던 것은 나로호의 실패에도 있었지만 행여라도 나로호를 만들었던 과학자, 기술자들이 실망하지 않았을까 그분들이 의기소침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더 가슴 아팠습니다. 그분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더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어떻게 이것을 학생들에게 말해 주고 그분들에게 전해 줄까 하다가 그로부터 얼마 전에 이런 글을 하나 봤습니다.

1600년대에 프랑스에 라 포슈푸코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그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 그러나 큰 불은 바람이 불면 활활 타오른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우리의 우주에 대한 의지가 강열하다면 또 우리 연구자, 과학자들의 의지가 강열하다면 나로호의 실패가 더 큰 불이 되어서 그 바람이 더 큰 불을 만나서 활활 타오르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 그런데 이 나로호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러한 것도 바로 우리의 역사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실패가 사실은 너무도 당연하고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을 국민이 부끄러움으로 여기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1957 년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라고 하는 인공위성을 발사했습니다. 그 충격은 대단했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학생인 저도 충격을 엄청나게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미국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뱅가드호를 발사했는데 뱅가드호는 지상 2m에서 폭발했습니다. 이것을 실패하고 미국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왜 소련은 성공하고 우리는 실패했는가, 그 연구보고서의 맨 마지막 페이지는 이렇게 끝이 나 있습니다.
‘우리나라(미국)가 중학교, 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꿔야 한다.’ 아마 연세 드신 분들은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것도 독일 과학자들의 힘이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미국이 뱅가드호를 실패하고 그 다음에 머큐리, 재미니, 여러분들이 아시는 아폴로계획에 의해서 우주사업이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미국의 힘이 아니라 폰 브라운이라고 하는 독일 미사일기술자를 데려다가 개발했다는 것도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 중국은 어떻게 되냐면 여기는 과학자들이니까 전학삼(錢學森)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실 텐데요, 전학삼은 상해 교통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캘리포니아에 공과대학에서 29살에 박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교수를, 2차대전 때 미국 국방과학위원회의 미사일팀장을, 그리고 독일의 미사일기지 조사위원회 위원장을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핵심기술자입니다.

그런데 이 전학삼이라는 인물이1950년에 미사일에 관한 기밀문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귀국하려다가 이민국에 적발되었습니다. 그래서 간첩혐의로 구금이 되었고 그때 미국에서는 ‘미국에 귀화해라. 미국에 귀화하면 너는 여기서 마음껏 연구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고 전학삼은 그것을 거절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이 미국 정부에 전학삼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때 중국 정부는 미국인 스파이를 하나 구속하고 있었고, 이 둘을 1 1로 교환하자고 그랬어요. 그런데 미국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전학삼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우리는 너와 우리의 스파이를 교환하지만 네가 미국에 귀화한다면 너는 여기 있을 수 있다.’ 그랬더니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미국에서 전학삼에게 ‘너는 중국에 가더라도 책 한 권, 노트 한 권, 메모지 한 장도 가져갈 수 없다, 맨몸으로만 가라.
그래도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습니다.

나이 마흔여섯에 중국에 가서 모택동을 만났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일화입니다.
모택동이 ‘우리도 인공위성을 쏘고 싶다, 할 수 있느냐.’ 그랬더니 전학삼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것을 해낼 수 있다. 그런데 5년은 기초과학만 가르칠 것이다. 그 다음 5년은 응용과학만 가르친다. 그리고 그 다음 5년은 실제 기계제작에 들어가면 15년 후에 발사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에게 그동안의 성과가 어떠하냐 등의 말을 절대 15년 이내에는 하지 마라. 그리고 인재들과 돈만 다오. 15년 동안 나에게 어떠한 성과에 관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면 15년 후에는 발사할 수 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택동이 그것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재와 돈을 대주고 15년 동안은 전학삼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 나이 61, 1970 4월에 중국이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정부가 이 모든 발사제작의 책임자가 전학삼이라는 것을 공식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중국의 우주과학 이러한 것도 전부 전학삼에서 나왔는데 그것도 결국은 미국의 기술입니다. 미국은 독일의 기술이고 소련도 독일의 기술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선진국도 다 그랬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 한국역사의 특수성

○ 미국이 우주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꾸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은 그것 입니다.

-역사를 보는 방법도 대단히 다양한데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신 분들은 이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나로호의 실패를 중국, 미국, 소련 등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듯이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아야 됩니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 금년이 2010년이니까 한일합방 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 700,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 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습니다. 에스파냐왕국입니다. 그 나라가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어, 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 이거 안 되겠다. 형님, 에스파냐 가서 왕 좀 하세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에 가서 왕을 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이지 단일한 집권체가 500년 가지 못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째 가고 있는 것은 조선 딱 한 나라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려가 500년 갔습니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 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 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과학입니다.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 700, 1,000년을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 700, 1,000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기록의 정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 쓰는 사람만 다냐, 글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조금 김새시겠지만 기록의 문화입니다.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저는 못 가봤지만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 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셨지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 왕이 ‘국민 여러분,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 ‘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앉아있습니까?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 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습니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을 것 아닙니까?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습니다. 이걸 사초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합니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합니다. 4부를 출판했습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쓰는 게 경제적이지요. 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판활자, 금속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6,400만자입니다. 6,400만자 하면 좀 적어 보이지요? 그런데 6,400만자는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생각 안 드세요?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끔 드시겠지요?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리죠.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들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 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놨습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습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 아까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습니다. 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 5,000만자입니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납니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입니다.

○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입니다. 왕들의 일기입니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습니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습니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언젠가는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을 전부 한글로 번역합니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은 개략적이나마 번역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하고 나면 그 다음에 영어로 하고 핀란드어로 하고 노르웨이어로 하고 덴마크어로 하고 스와힐리어로 하고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에 탑재한 다음날 전 세계 유수한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인 여러분, 아시아의 코리아에 150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습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의 일기가 있습니다. 실록이 있습니다. 혹시 보시고 싶으십니까? 아래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당신의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1,000만이 되고,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면 이 사람들은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야,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 우리나라는 뭔가.’이러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면 국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못 하고 있을 뿐입니다.

○ 이러한 기록 중에 지진에 대해 제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155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200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2000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장, 핵발전소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면 세계인들이 틀림없이 산업시찰을 올 것입니다. 그러면 수력발전소도 그런 데 만들어야지요. 정문에 구리동판을 세워놓고 영어로 이렇게 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2,000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단 한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방폐장, 핵발전소, 수력발전소를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2,000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책을 카피해서 기록관에 하나 갖다 놓으면 됩니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 약진입니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습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 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진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 정치, 경제적 문제

○ 그 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다. 세종12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 8,657, 반대 7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 8,000, 반대가 7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그러나 7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법률 문제 

○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과학적 사실 

○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
동양에서는 어떠냐 하면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입니다, 주희. 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지상사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중국 연변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뭘 얻어 옵니다. 다음 해의 달력을 얻으러 간 것입니다. 달력을 매년 중국에서 얻어 와서는 자주독립국이 못될뿐더러, 또 하나는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 집결을 했습니다. 이순지가 이것을 만드는데 세종한테 그랬어요. 
‘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재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안 오는가? 
‘여기는 진급이 느립니다.’ 그랬어요. 
오늘날 이사관쯤 되어 가지고 국립천문대에 발령받으면 물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행정안전부나 청와대비서실 이런 데 가야 빛 봤다고 하지요? 옛날에도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세종이 즉시 명령합니다. 
‘서운관의 진급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어요.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을 어떻게 할까? 
‘강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소서. 
세종이 물었어요. ‘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어요. 정인지가 누구입니까? 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이고 영의정입니다. 

세종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습니다. 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달력이 하루 10, 20, 1시간 틀려도 모릅니다. 100, 200년 가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달력이 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 1일 오후 4 50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 55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세종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라고 붙여줬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합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 5시간 48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 5시간 48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
홍대용이라는 사람은 수학을 해서 ‘담헌서(湛軒書)’라는 책을 썼습니다. ‘담헌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큰 도서관에는 다 있습니다. 이 ‘담헌서’ 가운데 제5권이 수학책입니다. 홍대용이 조선시대에 발간한 수학책의 문제가 어떤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구체의 체적이 6 2,208척이다. 이 구체의 지름을 구하라. cos, sin, tan가 들어가야 할 문제들이 쫙 깔렸습니다. 조선시대의 수학책인 ‘주해수용(籌解需用)’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sinA
를 한자로 正弦, cosA를 餘弦, tanA를 正切, cotA를 餘切, secA를 正割, cosecA를 如割, 1-cosA를 正矢, 1-sinA를 餘矢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있으려면 삼각함수표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 ‘주해수용’의 맨 뒤에 보면 삼각함수표가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옮겨봤습니다. 
예를 들면 正弦 25 42 51, 다시 말씀 드리면 sin25.4251도의 값은 0.4338883739118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왜 다 썼느냐 하면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 있나 보려고 제가 타자로 다 쳐봤습니다. 소수점 아래 열세 자리까지 있습니다. 이만하면 조선시대 수학책 괜찮지 않습니까? 

다른 문제 또 하나 보실까요?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眞線에 있다. 조선시대 수학책 문제입니다. 이때는 子午線이라고 안 하고 子午眞線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미 이 시대가 되면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線上에 있다. 甲地는 北極出地, 北極出地는 緯度라는 뜻입니다. 甲地는 緯度 37도에 있고 乙地는 緯度 36 30분에 있다. 甲地에서 乙地로 직선으로 가는데 고뢰(?) 12번 울리고 종료(鍾鬧) 125번 울렸다. 이때 지구 1도의 里數와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하라. 이러한 문제입니다. 

이 고뢰(? ) , 종료(鍾鬧)는 뭐냐 하면 여러분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초등학교 때 사회책에서 보면 오늘날의 지도와 상당히 유사하지 않습니까? 옛날 조선시대의 지도가 이렇게 오늘날 지도와 비슷했을까? 이유는 축척이 정확해서 그렇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십리 축척입니다. 십리가 한 눈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왜 정확하냐면 기리고거(記里鼓車)라고 하는 수레를 끌고 다녔습니다. 
기리고거가 뭐냐 하면 기록할 記자, 리는 백리 2백리 하는 里자, 里數를 기록하는, 고는 북 鼓자, 북을 매단 수레 車, 수레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수레가 하나 있는데 중국의 동진시대에 나온 수레입니다. 바퀴를 정확하게 원둘레가 17척이 되도록 했습니다. 17척이 요새의 계산으로 하면 대략 5미터입니다. 이것이 100바퀴를 굴러가면 그 위에 북을 매달아놨는데 북을 ‘뚱’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북을 열 번 치면 그 위에 종을 매달아놨는데 종을 ‘땡’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여기 고뢰, 종료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5km가 되어서 딱 10리가 되면 종이 ‘땡’하고 칩니다. 김정호가 이것을 끌고 다녔습니다. 

우리 세종이 대단한 왕입니다. 몸에 피부병이 많아서 온양온천을 자주 다녔어요. 그런데 온천에 다닐 때도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리고거를 끌고 갔어요. 그래서 한양과 온양 간이라도 길이를 정확히 계산해 보자 이런 것을 했었어요. 이것을 가지면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원주를 파이로 나누면 지름이다 하는 것이 이미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 수학적 사실 

○ 그러면 우리 수학의 씨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것인데요, 

여러분 불국사 가보시면 건물 멋있잖아요. 석굴암도 멋있잖아요. 불국사를 지으려면 건축학은 없어도 건축술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최소한 건축술이 있으려면 물리학은 없어도 물리술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물리술이 있으려면 수학은 없어도 산수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게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졌던 의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지었을까. 
그런데 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선생님을 너무 너무 존경합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에스파냐, 스페인에 있습니다. 1490년대에 국립대학이 세워졌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는 1600년대에 세워진 대학입니다. 우리는 언제 국립대학이 세워졌느냐, ‘삼국사기’를 보면 682,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것을 세웁니다. 그것을 세워놓고 하나는 철학과를 만듭니다. 관리를 길러야 되니까 논어, 맹자를 가르쳐야지요. 그런데 학과가 또 하나 있습니다. 김부식 선생님은 어떻게 써놓았냐면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명산과입니다. 밝을 明자, 계산할 算자, . 계산을 밝히는 과, 요새 말로 하면 수학과입니다. 수학과를 세웠습니다.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안 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졸업하게 되면 산관(算官)이 됩니다. 수학을 잘 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서 찾아보십시오. 수학만 잘 하면 공무원이 되는 나라 찾아보십시오. 이것을 산관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산관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 산관이 수학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됩니다. 산관들은 무엇을 했느냐,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다시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가서 했습니다. 세금을 매긴 것이 산관들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수학 상황을 알려면 무슨 교과서로 가르쳤느냐가 제일 중요하겠지요? 정말 제가 존경하는 김부식 선생님은 여기다가 그 당시 책 이름을 쫙 써놨어요. 삼개(三開), 철경(綴經), 구장산술(九章算術), 육장산술(六章算術)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구장산술이라는 수학책이 유일합니다. 구장산술은 언제인가는 모르지만 중국에서 나왔습니다. 최소한도 진나라 때 나왔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좋은 책이면 무조건 다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 8장의 이름이 방정입니다. 방정이 영어로는 equation입니다. 방정이라는 말을 보고 제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저는 사실은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부터 방정식을 푸는데, 방정이라는 말이 뭘까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어떤 선생님도 그것을 소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보니까 우리 선조들이 삼국시대에 이미 방정이라는 말을 쓴 것을 저는 외국수학인 줄 알고 배운 것입니다. 

9 장을 보면 9장의 이름은 구고(勾股)입니다. 갈고리 勾자, 허벅다리 股자입니다. 맨 마지막 chapter입니다. 방정식에서 2차 방정식이 나옵니다. 그리고 미지수는 다섯 개까지 나옵니다. 그러니까 5원 방정식이 나와 있습니다. 중국 학생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말을 모릅니다. 여기에 구고(勾股)정리라고 그래도 나옵니다. 자기네 선조들이 구고(勾股)정리라고 했으니까. 
여러분 이러한 삼각함수 문제가 여기에 24문제가 나옵니다. 24문제는 제가 고등학교 때 상당히 힘들게 풀었던 문제들이 여기에 그대로 나옵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삼국시대에 이미 교육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전부 서양수학인 줄 알고 배우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밀률(密率)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비밀할 때 密, 비율 할 때 率. 밀률의 값은 3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수학교과서를 보면 밀률의 값은 3.14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이순지의 칠정산외편, 달력을 계산해 낸 그 책에 보면 ‘밀률의 값은 3.14159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다 그거 삼국시대에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오늘날 플러스, 마이너스, 정사각형 넓이, 원의 넓이, 방정식, 삼각함수 등을 외국수학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이런 소망을 강력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초등학교나 중·고등 학교 책에 플러스, 마이너스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우리 선조들은 늦어도 682년 삼국시대에는 플러스를 바를 正자 정이라 했고 마이너스를 부채, 부담하는 부()라고 불렀다. 그러나 편의상 正負라고 하는 한자 대신 세계수학의 공통부호인 +-를 써서 표기하자, 또 π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682년 그 당시 적어도 삼국시대에는 우리는 π를 밀률이라고 불렀다, 밀률은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뜻이다, 오늘 컴퓨터를 π를 계산해 보면 소수점 아래 1조자리까지 계산해도 무한소수입니다. 그러니까 무한소수라고 하는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이 말은 철저하게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밀률이라는 한자 대신 π라고 하는 세계수학의 공통 부호를 써서 풀기로 하자 하면 수학시간에도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없는 것을 가지고 대한민국이 세계 제일이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선조들이 명백하게 다큐멘트, 문건으로 남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그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서양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것이 전부 정리되면 세계사에 한국의 역사가 많이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났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인 세계사를 풍성하게 한다는, 세계사에 대한 기여입니다. 

◈ 맺는 말 

○ 결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자료는 한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조들이 남겨준 그러한 책이 ‘조선왕조실록’ 6,400만자짜리 1권으로 치고 2 5,000만자짜리 ‘승정원일기’ 한 권으로 칠 때 선조들이 남겨준 문질이 우리나라에 문건이 몇 권 있냐면 33만권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위에 한문 전공한 사람 보셨습니까? 
정말 엔지니어가 중요하고 나로호가 올라가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 국학을 연구하려면 평생 한문만 공부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이러한 자료를 번역해 내면 국사학자들은 국사를 연구할 것이고, 복제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복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경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경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수학교수들은 한국수학사를 연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이 우리나라에는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문을 공부하면 굶어죽기 딱 좋기 때문에 아무도 한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문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동경대학으로 가고 북경대학으로 가는 상황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되냐 하면 공대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물리학사, 건축학사가 나옵니다. 수학과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허벅다리, 갈고리를 아! 딱 보니까 이거는 삼각함수구나 이렇게 압니다. 밤낮 논어·맹자만 한 사람들이 한문을 해서는 ‘한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회에 나가시면 ‘이 시대에도 평생 한문만 하는 학자를 우리나라가 양성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여론을 만들어주십시오. 이 마지막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런 데서 강연 요청이 오면 저는 신나게 와서 떠들어 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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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생각바꾸기] 뽀빠이와 낙타의 신화  (0) 2011.05.27
Posted by 겟업
2011. 5. 27. 12:57


과 디지털이 하나되는 세상
걸프전 당시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해 대통령궁의 침실을 폭격한 일이 있었다. 그의 침실은 물론이고 침대조차 박살났으나 후세인은 죽지 않았다. 왜냐하면 후세인은 그 침실에서 자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이슬람교도들은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거나 전쟁이 벌어지면 밖에서 천막을 치고 자는 풍습이 있기 때문이다. 알라에게 구원을 청하는 아주 오래된 문걸프전 당시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해 대통령궁의 침실을 폭격한 일이 있었다. 그의 침실은 물론이고 침대조차 박살났으나 후세인은 죽지 않았다. 왜냐하면 후세인은 그 침실에서 자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이슬람교도들은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거나 전쟁이 벌어지면 밖에서 천막을 치고 자는 풍습이 있기 때문이다. 알라에게 구원을 청하는 아주 오래된 문화인데도 미군은 그것을 포착하지 못했다. 정보기술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발전한데 비해 모슬렘의 문화에 대한 정보는 거의 백지나 다름없었다는 것이다.

정보기술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유도탄 같이 기계를 다루는 하드웨어의 정보기술이요, 또 하나는 상대방의 문화나 인간의 마음을 읽는 소프트 콘텐츠에 관한 것이다. 전자를 기계기술, 후자를 지식기술이라고 구별하기도 한다 



Posted by 겟업
2011. 5. 27. 12:14


누에가 빗소리를 내며 뽕잎을 읽는다. 개구리가 가갸거겨 무논을 읽는다. 배추 흰나비가 여름 배추를 듬성듬성 읽는다. 말매미가 미루나무를 수액째 읽고 쓰르라미가 버드나무 초서를 낭랑하게 읽는다. 벼메뚜기가 서슬 푸른 볏 잎을 읽는다. 가으내 귀뚜라미가 달빛 전집을 읽는 동안 독서광인 바람은 여름내 독파한 팔만사천 나뭇잎 장서를 모두 단풍 불에 살라버리고, 강물과 바다에 이는 파랑을 읽으러 달려간다. 세상은 온통 읽고 읽히는 것 천지이다.

 

Posted by 겟업
2011. 5. 27. 11:59
‘ 뽀빠이’라고 하면 시금치를 생각한다. 그 만화를 모르는 사람들도 시금치에는 철분이 많아 아이들 건강에 좋다고 믿는다. 하지만 시금치에는 다른 식품들보다 철분이 적으면 적었지 결코 많지 않다. 발터 크레머와 괴츠 트렌클러는 그들의 ‘상식의 오류사전’에서 ‘뽀빠이가 철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통조림 시금치보다 차라리 그 깡통을 먹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비웃는다. 그들의 설명을 들어 보면 뽀빠이 신화는 순전히 타이핑을 잘못 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식품의 성분분석을 할 때 실수로 소수점 자리가 한 자리 위로 잘못 찍히는 바람에 시금치의 철분 함유량이 10배로 불어나게 된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이 실수 하나로 미국의 시금치 생산지인 텍사스 크리스털 시티에는 ‘씩씩한 뱃사람 뽀빠이 덕분에 미국의 시금치 소비량이 33%나 증가했다’는 기념비가 세워졌고, 2차대전후 독일에서는 수백만 명의 어린아이들에게 시금치를 먹였다.

그러나 우리를 정말 놀라게 하는 것은 시금치의 실제 철분 함유량이 100g당 2.2mg으로 계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착오가 1930년대에 밝혀져 수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뽀빠이 신화가 오늘날까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점이다. 시금치를 과도하게 먹으면 근육이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신장에 결석증이 생긴다는 의학적 진실 앞에서도 뽀빠이 신화는 꺾이지 않고 세계를 제압한다.


만화가 성경으로 옮겨오고 점 하나가 문자 하나로 바뀌게 되면, 이번에는 낙타의 신화가 등장한다. 마태복음 19장 24절과 마가복음 10장 25절을 펼쳐 보라.


거기에는 분명히 ‘약대(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I say unto you, It is easier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a rich man to enter into the kingdom of God)라고 되어 있을 것이다. 부자가 천국으로 들어가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서커스단에 소속된 것도 아닌 낙타가 무엇 때문에 바늘귀로 들어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이 성경 구절만큼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그토록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드물 것이다. 더구나 많은 연구가들이 이 성경 말씀이 오역이라는 사실을 누누이 지적하는데도 말이다. 원전대로 하자면 그것은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라는 것이다. 아랍어로 밧줄은 ‘gamta’고 낙타는 ‘gamla’다. ‘T’와 ‘L’의 글자 한 자 차이로 밧줄은 낙타가 될 수도 있고, 낙타는 밧줄로 변할 수 있다. 결국 그 한 자 차이의 잘못으로 ‘부자가 하늘나라로 들어가기보다 밧줄이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우니라’라는 말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으로 오역된 것이다. 과연 그렇다. 낙타를 밧줄로 돌려놓으면 그 비유는 자연스럽게 들리고, 그 논리는 비로소 합리성을 띤다.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은 실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바늘귀와 실의 관계에 대비되는 것은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바늘귀의 크기에 대응하는 실과 밧줄의 차이가 생겨나게 된다.


그것이 오타요, 오역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뒤에도 여전히 뽀빠이는 시금치를 먹고 괴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사막을 건너야 할 낙타는 2,000년 동안이나 바늘귀 앞에서 점프를 계속한다. 사실과 과학이 지배하는 사고의 세계에서는 벌써 폐품이 되었어야 할 시금치 통조림과 낙타의 곡예가 어째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흔들고 흥분시키고 현실 이상의 힘으로 우리 앞에 군림하는가. 정말 놀라운 힘으로 뽀빠이가 거인 블루투스를 때려눕히고, 가난한 자가 부자의 부러움을 사는 허구의 그 힘은 대체 어디에서 오고 있는 것일까.


만약 사실에 입각하여 뽀빠이가 먹는 시금치를 홍삼이나 비타민제로 바꾸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낙타를 원전대로 정확하게 밧줄이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아이들은 금세 만화책을 덮고 뽀빠이의 곁을 떠나게 될 것이고, 밧줄이 바늘귀로 들어가는 대목에서 목사님의 설교는 갑자기 그 빛을 잃게 될 것이다. 오히려 사실과 논리에서 일탈한 초현실적인 비 합리성의 엇박자의 힘이 있기 때문에 그 이미지와 상징성은 강렬한 감마선을 띠게 된다. 만화나 신화의 공간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은 사실이나 논리가 아니다. 시금치가 갑자기 불로초 같은 환상의 빛을 발하고 사막을 건너는 대상들의 낙타가 바늘귀만한 천국의 문 앞에서 금빛 머리를 치켜세우고 우는 그 충격은 우연과 허구의 세계에서만 가능해 진다. 소수점이 한자리 잘못 쳐지고 글자 한 자를 바꿔 읽는 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없었던 허구의 세계가 창조된다. 그러한 사실들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사람들이 바로 셰익스피어가 정의한 꿈꾸는 인간 ─ 미치광이와 연인과 시인들이다. 3F 시대에는 허구적 발상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은 예술의 공간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적 공간에서 매일 사용하는 3M의 메모지 ‘포스트 잇’이나 음악팬들을 열광시킨 소니의 ‘워크맨’을 보면 안다. 풀은 무엇인가를 붙이는 접착력이 생명이다. 붙지 않는 풀은 이미 풀이 아니다. 그러나 약품을 잘못 혼합하여 붙었다가도 떨어지는 불량 풀이 만들어졌을 때 3M 같은 메모지용 풀이 발명된 것이다. 떨어지는 풀의 약점과 역기능을 창조적으로 살리면 종래의 접착제와 전혀 다른 신상품이 태어난다. 붙일 수도 뗄 수도 있는 융통성 있는 새로운 풀의 발상은 풀이라는 개념자체를 바꿔놓았으며, 붙다/떨어지다의 정반대되는 대립항의 경계와 그 체계를 파괴한다. 풀이 붙는 것처럼 녹음기는 소리를 기록하는 작용을 한다. 그런데 공장장이 우연히 한 공원이 녹음기에서 녹음장치를 떼어내고 대신 재생장치를 첨가하여 스트레오 음악을 즐기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녹음이 안 되는 이 녹음기, 말하자면 녹음기를 재생기로 패러다임을 바꾼 그 발상에서 소니는 세계 최초로 워크맨을 개발하게 된다.붙지 않는 풀, 녹음이 안 되는 녹음기 ─ 그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성경 귀절처럼 오역이 창조로 변하고, 잘못 찍힌 소수점이 블루투스를 때려눕히는 뽀빠이의 놀라운 힘이 되는 기적의 파편들이다. 달리나 뒤샹과 같은 초현실주의 화가처럼 혹은 신문지의 글자들을 주어모아 시를 쓴 미래파 시인들처럼 우연을 잡아라. 그리고 허구의 F를 향해 낚싯줄을 던져라. 시인처럼 연인처럼 혹은 광기 어린 사람처럼 일상성에서 탈출하는 탈영병이 되어라. 그 행복한 우연의 오타와 오역 속에서 당신은 때때로 바늘귀를 향해 뛰어오르는 낙타의 놀라운 천국을 볼 것이다.


그것이 오타요, 오역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뒤에도 여전히 뽀빠이는 시금치를 먹고 괴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사막을 건너야 할 낙타는 2,000년 동안이나 바늘귀 앞에서 점프를 계속한다.

 월간중앙 [이어령의 생각바꾸기]


http://magazine.joinsmsn.com/monthly/article_view.asp?aid=211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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