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25. 13:00

태풍 때문에 여행에서 돌아오는 여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경유지였던 중국 베이징에서 이틀을 묵어야 했다. 항공사가 제공한 공항 근처 호텔에서는 나를 포함해 네 명의 한국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베이징 시내를 함께 구경하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넓직한 신작로를 달렸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중국은 부자인가 봐요."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화려한 건축물과 대형 상가와 유흥업소가 즐비한 동네를 통과했을 때였다. 베이징은 깔끔하게 발전된 국제 도시 그 자체였다. 그렇지만 택시에서 내려 골목골목을 걸어다닐 때에는 그 모습이 다는 아니었다. 뒷골목에는 여전히 가난에 찌든 채 살아가는 고달픈 사람들이 길고 긴 그림자를 짊어지며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식으로 터키를 한 바퀴씩 돌고 집으로 돌아가던 여행자들이었다. 우리는 집으로 가는 길이었지만, 우리의 대화는 여전히 터키에 머물러 있었다. 터키의 어떤 도시가 특히 인상적이었는지, 여행을 하며 어떤 재미있는 일들을 겪었는지 등에 대해 담소를 주고받다가 한 사람이 질문을 내놓았다.

"터키랑 우리나라랑 어느 쪽이 더 잘 사는 나라죠?", "잘 산다는 게 기준이 뭘까요?"

조금 더 자세해진 질문을 놓고 네 사람은 토론을 벌였다. 누군가는 거지가 눈에 띄지 않으면 잘 사는 것이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거리가 깨끗하고 번화하면 잘 사는 것이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대중교통이 잘 발달됐으면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내놓은 자기 의견에 우리들은 조금씩 생각을 보태어갔다. 다시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복지가 잘 이루어진 나라가 잘 사는 나라 같다고 했고, 누군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서도 넉넉한 표정이 읽히면 풍요로운 나라라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고, 누군가는 그게 행복지수라고 단정하게 덧붙였다. 우리는 이즈음에서 합의를 했다. 윤택하고 편리한 도시환경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잘 사는 것의 척도가 아니겠느냐고. 

우리의 이 합의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반성의 뜻이 전제돼 있었다. 우리는 모두 어렸을 때보다 지금이 생활은 더 윤택해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삶은 풍요롭지가 못한 쪽이었다. 언제나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서 풍요를 누릴 수가 없고, 언제나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감에 짓눌린 채 살아가다가 우리는 모두 여행을 떠났던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나는 줄곧 '잘 산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이어갔다. 여러 가지 조건들이 덧붙여져야 하겠지만, 우선 나는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가 잘 사는 사회라고 말하고 싶다. 직업으로부터, 학벌로부터, 성별로부터, 나이로부터, 입장으로부터 제한받지 않고 평등하게 자기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사회. 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작은 목소리들, 소외된 입장들을 놓치지 않고 챙겨서 발전해가는 사회. 그래서 개개인의 인권이 확보된 사회. 나는 우리 사회가 인권지수에 관하여는 아주 못 사는 나라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다. 인권을 노골적으로 유린하는 사건들은 물론이고, 은근하게 조성된 채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어 우리가 무감각해져 버린 비인권적 가치관도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남과 다르다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고 거기서 결핍감을 느낀다.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편견으로 바라보고 시선으로부터 시작된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남과 같아지려는 노력을 하느라 우리는 이토록 윤택해졌는데도 이토록 허하고 불안하다. 우리 사회는 경제발전도 중요하지만, 관습을 발전시키는 게 먼저다. 같아지려는 노력보다 달라지려는 노력이 더 좋은 삶이라는 관습,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경험 속에서 다양한 생각들을 키워온 사람들이 사회적 역할을 골고루 담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관습. 예외적 인간의 예외적 사고와 행동을 반가워하는 관습. 브레히트가 <예외와 관습>이라는 희곡에서 한 사회의 비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예외가 관습을 수정한다."



김소연 시인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9/h2012092021012181920.htm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