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값을 리터당 100원씩 내리고 휴대전화요금을 1,000원씩 깎아줘서 경제가 좋아졌습니까, 정부 지지도가 올라갔습니까?"
최근 만난 전직 경제 관료가 현 정부의 원칙 없는 경제정책에 대해 비판을 쏟아냈다. "휴대전화 5,000만대 시대에 연간 1대당 1만2,000원씩 총 할인액은 무려 6,000억원입니다. 하지만 한달 휴대전화료 1,000원 깎아준다고 누가 고마워나 합니까. 대신 그 돈을 통신업계가 투자하도록 유도했다면 국가경쟁력과 일자리가 얼마나 많이 늘었을까요."
연륜이 묻어나는 날카로운 지적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긴축이냐, 성장이냐'를 놓고 고민하는 유럽과 미국 상황으로 생각이 이어졌다. 프랑스 대선 이후 유럽ㆍ미국은 모두 '성장 우선' 쪽으로 경제정책의 중심을 옮기고 있다. 유럽연합(EU) 내 채권국 입장에서는 빚으로 흥청망청대다, 마지막에 탕감해달라고 버티는 그리스가 괘씸해서라도 긴축의 고삐를 더 죄고 싶지만 그러다 자신들마저 위험해질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히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청년 실업자들이 끝내 제대로 된 직장을 얻지 못하는 '잃어버린 세대'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도 최근 "올해 선진국과 유럽의 청년실업률이 18%에 달할 것이며 2016년까지 16%선을 유지할 것"이라며 " 잃어버린 세대 젊은이들로 인해 사회 결속과 미래 경제성장이 위협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나라 청년(15~29세) 실업률은 4월 기준 8.5%로 선진국보다 양호해 보이지만 '그냥 쉰다'는 청년이 29만6,000명으로 청년실업자 35만7,000명에 버금가는 등 안심할 수준이 결코 아니다.
청년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주려면 무엇보다 기업이 투자를 늘려야 하고, 기업이 투자를 늘리려면 향후 경제성장 전망이 밝아야 한다. 결국 실업률과 경제성장률은 밀접한 관계인 것이다. 이미 케네스 로고프 미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를 비롯한 많은 경제전문가들은 "물가 목표를 현행 2%대에서 4%로 상향해 인플레를 감수하더라도 성장률을 높여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7% 경제성장'을 앞세워 집권한 이명박 정부는 거꾸로 성장보다 물가안정에 목을 매는 듯하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앞세우던 현 정부가 MB물가지수를 만드는 등 느닷없이 물가안정을 경제정책의 최우선 순위로 삼은 변신은 이해하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정부가 물가를 잡는다며 주유소업과 설탕 수입업에 뛰어들고, 통신업체와 정유업체를 찍어 누르면서 그나마 있는 일자리와 생길 일자리를 없애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현 정부에도 일자리 정책이 있긴 있다. 하지만 시대착오적 토목공사나 당장의 성과를 노리는 근시안적 대책에 매달려 있다. 최근에는 영세상인 일자리를 지킨다며 반강제적으로 기업형 슈퍼마켓(SSM)과 대형마트 강제 휴무를 실시했다. 하지만 부처님 오신날 연휴 때 드러났듯이 그 혜택은 대부분 규제에서 제외된 하나로마트나 대기업 계열 편의점에게 돌아갔다.
다시 통신료 인하 문제로 돌아가자. 초고속 정보망과 K팝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의 강점이다. 무엇보다 이 분야는 젊은이들이 열망하는 일자리를 만들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물가를 잡는답시고 통신사를 윽박질러 매년 6,000억원의 투자 재원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단순하게 계산해서 그 돈이 만일 초고속통신망 연구원을 늘리고 스마트폰으로 다운받는 음악 제작자에게 저작료를 지급하는데 사용됐다면 연봉 5,000만원을 받는 정보통신(IT) 전문가와 음악 관련 일자리가 1만개 이상 생길 수 있었을 것이다. 휘발유값 인하 역시 결국은 미래에 꼭 필요할 대체에너지 개발 인력의 일자리를 줄이는 효과가 있다.
전직 관료는 자신의 주장을 이렇게 매듭지었다. "푼돈을 모아 목돈을 만들어 꼭 필요한 곳에 투자하는 것이 경제정책의 기본입니다. 반대로 목돈을 풀어 국민들에게 푼돈으로 나눠주는 정책은 수준 낮은 포퓰리즘입니다."
정영오 경제부 차장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5/h201205312152022442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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