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점 이른 남유럽 재정위기… 극복 리더십 없어 해결 비관적
한국 금융기관에 대출 많고 거대 수출시장이라 영향 클 것
외환 여유 등 방화벽 안심 말고 戰時 준하는 비상계획 세워야
짐을 잔뜩 실은 낙타가 곧 쓰러질 듯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지푸라기 하나가 낙타 등에 날아와 앉자마자 낙타는 더 이상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진다. 그까짓 지푸라기 하나의 무게가 얼마나 되나 싶지만, 견디다 견디다 못해 마지막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 세계경제는 마지막 지푸라기가 날아오기 직전의 낙타 꼴이다. 남유럽 재정 위기가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 2009년 12월이었다. 그 뒤 그리스의 구제금융 신청, 미국의 국가신용등급 강등 같은 여러 사건이 있었고, 그때마다 세상은 요동쳤지만 그럭저럭 수습하며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낙타가 사막을 걸어가기 시작한 지 너무 오래됐고, 등에 실은 짐은 버티기에 너무 무거워졌다. '그렉시트(Grexit·Greece와 Exit의 합성어로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의미)' 같은 마지막 지푸라기가 등에 앉는 순간 낙타는 쓰러질 것이고, 예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질지 모른다.
이번 위기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로 전염되고 유로화에 대한 의구심으로 발전할 경우엔 파장이 리먼 쇼크 때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다. 그렇게 보는 가장 큰 이유는 지금 유럽에는 위기를 극복할 강력한 리더십이 없다는 점이다. 미국은 전대미문의 금융 위기를 비정통적인 수단까지 동원하는 리더십으로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유로존은 회원국 간의 느슨한 약속에 기반해 있을 뿐, 그 약속을 강제할 힘이 없다. 재정 통합이니 유럽 공동 채권 발행이니 하는 원대한 계획이 논의되고 있지만, 회원국들이 어렵사리 합의에 성공한다 해도 각국 국민이 약속을 못 지키겠다고 버티면 무용지물이다.
또 한국이 볼 때 크기가 똑같은 위기가 유럽에서 닥칠 경우 미국에서 닥칠 때보다 파장이 클 수 있다. 우선 유럽 금융기관이 우리 금융기관에 대출해준 돈이 미국보다 많다. 이 자금을 급격히 회수할 경우 금융시장은 물론 무역 금융 등을 통해 실물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국에 유럽은 미국과 비슷한 거대 규모 수출 시장이기도 하다. 유럽 수출이 어려워도 중국 시장이 있지 않으냐고 하겠지만, 안이한 생각이다. 한국의 중국 수출 품목 중 70%가 중국의 수출용 완제품에 필요한 중간재이다. 유럽이 지갑을 닫으면 중국의 수출이 줄고 한국도 연쇄적으로 어려워지는 구조이다. 중국이 내수 부양을 통해 8% 성장은 지킨다고 해도 우리나라 수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클 수밖에 없다.
다행히 한국은 외부 충격에 대비해 강력한 방화벽을 쌓았다. 미국·중국·일본과 통화 스와프를 확대했고, 3000억달러가 넘는 외환을 축적했다. 금융 당국은 작년부터 일찌감치 외화를 미리 확보하라고 독려해 은행들의 외화 사정도 넉넉하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피치는 한국의 신용등급을 일본 수준으로 올려놓았고, 해외 투자자들은 한국의 국채를 신흥 시장에서 양호한 자산의 하나로 간주하면서 투자하고 있다. 위기 속에서 한국의 위상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시장이라는 파이 전체가 줄어든다면 그 의미가 반감된다. 나아가 아예 판이 깨져 버린다면 더욱 그렇다.
위기는 희생양을 원한다. 위기가 고조되면 한국에 대한 세계 투자자들의 따뜻한 시선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을 수 있다. 경제 규모에 비해 과다하다는 평가를 받는 한국의 가계 부채는 좋은 핑계거리가 될 수 있다. 유럽의 불안은 향후 몇 달간 한국 경제에 생각하지 못한 시련을 가져올 수 있다. 그동안 쌓아둔 방화벽에 안심하지 말고, 전시(戰時)에 준하는 비상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위기에 대비해 낙타 짐을 미리 가볍게 해두는 지혜도 필요하다.
이지훈 경제부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6/03/201206030145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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