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 영세 자영업자가 동네 상권을 나눠 갖고 있다고 칩시다. 경쟁력 있는 업체 하나가 성장해 시장을 많이 차지하면 다른 업자 몇몇은 문을 닫아야 합니다. 당하는 사람은 괴롭지만 시장경제 체제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겁니다. ‘동반성장’ 정책은 이와 달리 잘하건 못하건 10개 업체 모두 근근이 생존하게 하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특출 난 업체와 아닌 업체를 시장이 가려내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는 거죠.”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경제부처 고위 공무원은 요즘 생각이 복잡하다고 했다. 사회 양극화에 따른 동반성장의 필요성을 수긍하지만 시장경제 발전에 경쟁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는 터라 딜레마를 느낀다는 고백이다.
요즘 정부와 정치권이 골목상권의 영세자영업자들에게 쏟는 애정은 각별하다. 동반성장위원회는 제조업에 적용하던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제도를 유통업 등 서비스업 분야로 확대해 일정 규모 이상 기업이 도소매, 음식·숙박업종에 진입하는 걸 막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여야가 19대 국회 개원 첫날 내놓은 ‘1호 법안’들을 보면 차기 정부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것 같다. 새누리당은 5년간 중소도시에 대형마트 대기업슈퍼마켓(SSM) 신규 입점을 금지하는 법안을 냈다. 민주통합당은 월 2회인 대형마트 등의 의무휴업일수를 3, 4일로 늘리고 영업제한시간도 확대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모두 영세자영업자 보호를 위해 대기업이 넘을 수 없게 장벽을 쌓는 정책들이다. 무분별하게 점포를 확장한 대형 유통업체들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하지만 이런 정책들이 시장경제의 기초 동력인 경쟁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시장경제의 관점에서 보면 백화점 대형마트 편의점을 장악한 대형 유통업체들이 골목상권에 진출할 때 가장 큰 위험은 자영업자의 피해가 아니라 독점에 따른 경쟁 약화다. 업종은 달라도 같은 회사 계열인 유통업체들이 지역상권을 장악하면 담합을 통한 가격인상 등 반(反)시장적 유혹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지역에서 백화점 대형마트 SSM 편의점 등 다양한 판매채널을 전혀 다른 기업이 운영한다면 얘기는 다르다. 업체간 경쟁이 치열해져 소비자들은 싼값에 좋은 제품을 살 기회가 늘어난다. 자영업자의 피해가 있더라도 자영업체보다 처우가 나은 ‘양질의 일자리(decent job)’가 늘어나는 효과를 포함해 사회 전체가 얻는 이익은 더 클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일정 수준 이상 자본과 연구개발(R&D) 능력을 갖춘 중견기업의 진입을 촉진해 기존 대형 유통업체와 경합시켜 ‘유효 경쟁’이 이뤄지도록 하는 게 맞는 정책이다. 급성장하는 인터넷쇼핑몰의 활성화를 통해 견제하는 것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정부와 정치권은 지금 영세자영업자와 대형 유통업체의 대결구도에 지나치게 눈길이 팔려 있다. 의지가 선한 정책도 경제원칙을 무시해 도그마로 변질되면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요즘 TV의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끊임없이 스타를 양산한다. 그 과정은 경쟁의 연속이다. 열심히 노래한 사람을 탈락시키는 게 잔인하다고 이런 프로그램을 모두 폐지한다면 최고의 가창력을 갖춘 신인 가수의 노래를 들을 기회는 사라진다. 골목상권을 보는 시각이 이와 달라야 할 이유가 없다.
박중현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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