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14. 17:55

작년 말 한 설문조사에서 독일 국민 절반 이상은 “유로화는 계속돼야 한다”고 답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그리스 지원이 논란이 되며 유로존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되던 때였다. 열심히 일해 번 돈을 게으른 이웃에게 퍼줘야 하는 현실에 대한 반발이 컸던 점을 감안하면 예상 밖의 조사 결과였다. “유럽인들에게는 아직 유로화가 통합과 평화를 상징한다”는 해석도 나왔다.

하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독일과 그리스 경제는 유로화라는 거울을 사이에 두고 명암이 엇갈렸다. 그리스가 드라크마화에 비해 강한 유로화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독일은 마르크화보다 약한 유로화로 수출을 늘리며 성장을 거듭했다. 유로화는 “하나의 유럽”이라는 대의를 갖고 거창하게 출범했지만 각자의 속내는 달랐다.

그러면 독일은 그렇다 쳐도 그리스는 왜 유로화를 택했을까. 왜 자기 발로 통화주권을 차버리고 무리하게 강한 화폐를 쓰면서 최악의 경제위기를 자초했을까. 


이쯤에서 유로화가 공용화폐인 나라를 한데 묶어 부르는 말인 유로존의 태동 과정을 다시 살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현재의 유로화는 애당초 잘못된 선택이었다.

원래 유로존의 밑그림은 지금과는 판이했다.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내에서도 일부 ‘모범 국가’만 모여 만들기로 돼 있었다. 그리스 스페인처럼 물을 흐릴 만한 낙제생은 받아줄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유로존에 가입하면 1류 국가로 인정받고, 못 하면 2류 국가라는 낙인이 찍힐 분위기였다.

남유럽의 정치지도자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이탈리아는 “유럽 통합의 기원은 1950년대 ‘로마조약’이었다”면서 자기네야말로 유로화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가 움직이니 스페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재정불량 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포르투갈, 아일랜드도 나섰다. 결국 계획보다 훨씬 많은 11개국이 모여 유로존이 출범했고 나중에는 그리스마저 이름을 올렸다.

‘재정 낙제국’들은 유로존 가입요건을 맞추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정부부채를 줄인다면서 공기업 지분과 통신면허를 허겁지겁 내다팔고 물가 안정을 위해 공공요금을 찍어 눌렀다. 그리스는 아예 재정적자 비율을 낮추기 위해 통계까지 조작했다. 낙제생이 속성 불법과외를 받아 일류대에 들어간 꼴이다. 독일이나 프랑스는 이런 편법을 마뜩지 않게 생각했지만 눈 딱 감고 끼워주기로 했다. 달러화에 경쟁할 만한 막강한 유로화를 만들려면 우선 규모부터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한때 유로존은 모두에 축복인 것처럼 보였다. 저금리로 해외 투자자금이 대거 유입되면서 경제가 제법 굴러가는 듯했다. 그리스는 유로화 도입 직후 4년간 경제성장률이 유로존 평균의 2배를 넘었고 스페인 국민들도 싼 이자로 빚을 내며 집을 늘려갔다. 자국민을 유로화의 세계로 안내한 정치인들은 승승장구했다. 돌이켜보면 탄탄한 경제 발전이라기보다 분에 맞지 않은 거품이었다.

시작부터 정치논리가 지배해서인지 위기해결 과정도 한심하다. 그리스에선 “구제금융을 끊으면 빚을 안 갚겠다”고 협박하는 정당이 많은 표를 얻었다. 이런 뻔뻔함에도 독일이나 프랑스 정치지도자들은 속수무책이다. 행여 회원국들의 ‘탈퇴 도미노’가 현실화되면 경제가 망가지는 꼴을 자기 정권에서 봐야 하기 때문이다.

고도의 정치게임과 농간에 고통 받는 건 유로존의 평범한 국민들이다. 디폴트가 되든, 안 되든 그리스는 10∼20년을 더 갈지 모르는 ‘고난의 행군’을 할 것이다. 잘못된 정치와 정책을 선택한 데 따른 국가적, 국민적 대가는 이처럼 쓰라리다. 올해 대선을 앞둔 한국도 남의 일이 아니다.

유재동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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