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14. 18:01

오하이오 백인 90%인 작은 대학 아시아 문화엔 무관심하던 곳
'내가 제일 잘나가' 한국말에 '2NE1이다' 손뼉 치며 환호성
순식간에 세계 휩쓴 K팝 열풍 귀중한 한국 가치도 함께 전하길


나는 미국 중서부 오하이오주의 조그만 도시 핀리(Findlay)의 사립대학에서 종교와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학생 열 명 중 아홉 명은 백인이다. 아시아의 문화와 지리에 대해서 '무지'하다기보다는 '무관심'했던 곳이다. 그러니 4년 전 이 학교에 부임했을 때부터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서 아는 학생이 있으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 올봄 학기가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번 학기 초 불교학 수업 시간이었다. 석가모니의 탄생 얘기를 하던 중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의 뜻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자신이 곧 우주의 진리(dharma)라는 형이상학적인 의미입니다…." 따분해하는 학생들 표정이 눈에 띄자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한국에서는 가끔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이 말을 잘못 쓰기도 하지요." 몇 명이 솔깃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내친김에 좀 더 재미있게 풀어나갔다. "아이 엠 더 베스트(I am the best), 한국말로는 '내가 제일 잘나가(naega jeil jalnaga)'가 되겠지요." 내가 가끔 칠판에다 한국말을 알파벳으로 적는 이유는 사실 교수로서는 좀 유치한 행동이지만, 학생들이 모르는 외국어를 양념처럼 쓰면 교수를 우러러보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였다.

그런데 그 순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와우!" 학생들이 돌연 손을 들어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고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져 "왜들 그러느냐"고 물어봤더니 한 학생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2NE1 노래잖아요. 교수님은 교수님 나라 노래도 모르세요?" 미국 중서부 지역에서만 자란 학생들이 한국의 걸그룹 가요 덕분에 '내가 제일 잘나가'라는 한국말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에서도 어렵고 지루하기로 정평이 난 종교학과 철학을 가르치는 나는 하루아침에 'K팝(POP) 전도사'가 돼 버렸다. 수업이 끝난 뒤 한 학생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오늘부터 교수님이 갑자기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소승불교 경전을 읽다가 2NE1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다음 시간에도 한국말 좀 가르쳐 주세요'.

며칠 뒤 수강생들이 나를 '최고의 교수'로 뽑았다는 말을 들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했다. 훌륭한 강의나 논문 때문이 아니라 단지 2NE1 때문에 주가가 올라간 것이니 한류(韓流)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아시아 전역과 유럽·남미는 물론 북미 도시 지역의 마니아층을 통해 확산하고 진화하는 '코리안 웨이브(Korean Wave)'에 대해 익히 들은 바 있지만, 시골이나 다름없는 이 작은 도시에서 내가 직접 그것을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한류 붐은 봄 학기 내내 계속됐다. 한국 학생회가 해마다 여는 '한국 영화의 밤(Korean Movie Night)'에는 참가 인원이 2배 이상으로 늘었다. 김아중이 주연한 영화 '미녀는 괴로워'를 본 많은 학생이 한국에 관해 더 알고 싶어했고, 실제로 한국말을 배우려고 문의하는 학생도 늘기 시작했다. 그제야 캠퍼스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파장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외국어로 일본어를 선택한 학생 대부분이 정작 음악과 드라마·영화 같은 아시아 문화 중에서 푹 빠져 있는 곳은 한류였다.

열성적인 K팝 팬인 그들은 스스로를 'VIP'(빅뱅 팬) '블랙잭(Blackjack)'(2NE1 팬) 'SONE'(소녀시대 팬) 'ELF'(슈퍼주니어 팬)라고 불렀다. "제일 좋아하는 K팝 노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전 클래식이 좋아요. H.O.T의 '캔디'예요"라고 대답하는 학생 앞에서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지금 같은 한류 현상은 과도한 게 아닐까? 그저 반짝 유행으로 끝나는 건 아닐까?' 몇 주 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유학생과 상담을 한 뒤에야 이런 의문이 어느 정도 풀렸다. 정치학을 전공하는 아마드(Ahmad)는 이렇게 말했다. "교수님, 저희 나라의 10대·20대도 거의 다 한류를 즐기고 한국을 동경해요." 과거에 미국 할리우드가 주도한 서양 문화에 대한 동경이 한류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좀 과장된 표현 같기도 했지만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지금 사우디 젊은 애들은요, 모든 종류의 선진 문물은 한국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어요."

앞으로 우리는 더욱 다양한 한류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한류의 경제적 가치는 이미 입증되었다. 나는 한류가 좀 더 귀중한 한국만의 가치를 이끌어내길 바란다. 자연과 동화되고, 평화를 사랑하며, 가족을 중시하고, 성공과 발전을 열망하는 가치 말이다. 그리고 공존과 덕(德)을 존중하는 한국 특유의 시민 정신이 새로운 한류로서 세계 공동체에 이바지했으면 좋겠다. 


이성철 미국 핀리대 종교철학 교수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