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여름 유럽 연수 시절, 가족과 함께 노르웨이에서 자동차 여행을 했다. 시골길을 달려가는데 길가에 체리 과수원에서 체리를 내다 파는 무인(無人) 판매대가 줄지어 나타났다. 한 봉지당 2유로(약 3000원)라는 안내판과 동전함만 있고 사람은 없었다. 한 봉지 사면서 동전함을 힐끗 보니 동전과 지폐가 가득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시골길을 가다 보면 농민이 참외, 수박 등을 내다 파는 광경을 자주 보게 되는데, 무인 판매 방식은 상상하기 어렵다. '우리도 무인 판매로 운영할 수 있다면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해 생산성을 더 높일 수 있을 텐데….'
2011년 5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2018년 동계올림픽 후보지에 대한 평가회를 취재하느라 스위스 로잔에 갔을 때 겪은 일이다. 예약한 호텔에 체크인하니 종업원이 투숙객한테 제공하는 지하철 승차권이라면서 명함 크기 종이 카드를 꺼내선 유효기간을 볼펜으로 써 주었다. '최고 선진국에서 종이 카드에 수기(手記)라니….' 그런데 지하철을 이용해 보니 개찰구도, 역무원도 없어 카드를 내보일 일이 없었다. '이런 시스템이라면 요금 징수 시스템, 개찰구 같은 시설을 안 갖춰도 되고, 그 돈을 다른 데 투자할 수 있겠다….'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지만, 돈만 자본이 되는 게 아니다. 사회·문화 자본도 있다. 사회 구성원 간 신뢰는 사회자본에 속하고, 경제 자본과 달리 아무리 많이 써도 고갈되지 않는다(프랑스 철학자 부르디외의 주장). 미국의 정치사상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신뢰'의 가치를 특별히 중시해서 "한 국가의 경쟁력은 한 사회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신뢰의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고 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5020클럽(인구 5000만명,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에 진입했다고 자랑하지만 신뢰 자본 면에선 아직 갈 길이 멀다.
신뢰가 없을 때 사회가 어떤 비용을 치르는가는 밀양 송전탑 사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주민, 한전, 여야가 추천한 전문가들이 '전문가 협의회'를 구성해 40일간 연구 검토했고, 여러 전문가가 '우회 송전'과 '지중화(地中化)'는 기술적으로 어렵다는 결론을 제시했지만, 주민들은 보고서 내용을 불신하며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 결과 내년 3월쯤 완공될 새 원자력발전소가 송전선이 없어 무용지물이 될 처지에 놓여있다. 40일 동안 공사가 중지된 데 따른 손해만 2800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 돈을 신용불량자 구제에 쓰면 2만2000명(국민행복기금 신청자 1인당 부채액 기준)을 빚의 구렁텅이에서 탈출시킬 수 있다. 신뢰 자본을 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후쿠야마가 '신뢰'에 대해 내린 정의에 답이 있다. "신뢰란 공동체에서 다른 구성원들이 보편적 규범에 기초해 규칙적으로 정직하고 협동적인 행동을 할 것이란 기대이다." 신뢰의 출발점은 구성원들이 법(최소한의 규범)을 지키는 것이다. 상식적 얘기라고 할지 모르지만, 상식이 존중되는 사회가 선진국 아닌가.
김홍수 경제부 차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7/15/20130715030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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