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19. 23:06

연구란 무엇인가? 연구란 특정한 현상이 시간 및 공간에 어떻게 분포하고 있는가를 관찰하는 작업으로부터 출발한다. 이에 더해 그 현상을 만들어낸 원인은 무엇이고 또 그 현상이 가져올 결과는 무엇일지를 따져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학자'라 부른다. 학자의 관찰 대상은 물론 자연현상일 수도 사회현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연구를 하는 학자들은 무엇을 연구해야 하는가?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경우에 따라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과 동일할 수도 혹은 다를 수도 있다. 또한 현상은 달리 보여도, 결국에는 본질이 같은 경우도 있다. 역으로, 본질이 달라도 현상이 같게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는 남극이나 북극과 같은 극지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연현상을 관찰할 방법이 없다. 그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그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으로 가서 연구를 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 연구의 결과로부터 추출된 자연과학적 지식은 우리나라의 자연현상에도 얼마든지 적용이 가능하다. 우리나라가 극지에 과학기지를 운영하는 까닭이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만약 계절에 따른 생태계의 변화에 관심이 있는 학자라면 우리나라는 연구를 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가진 셈이다. 사시사철 춥거나 덥기만 한 나라의 학자들은 우리나라에 와서 계절의 변화를 관찰하여 자신의 나라에서 활용할 수 있는 자연과학적 지식을 축적할 수 있다.

연구 대상의 상대적 가치에 대한 평가는 비단 자연과학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사회과학에서는 그러한 차이가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예컨대 근대화, 다시 말해 산업화와 민주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러한 현상이 벌어진 서유럽, 북미, 일본을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미처 충분히 진행되지 않아 관찰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대화에 관한 연구는 대부분 선진국 중심의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면서 지식이 축적되어 왔다.

연구 대상의 가치라는 맥락에서 우리나라의 근대화 현상 즉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취는 매우 높은 중요성을 차지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그리고 가장 빨리 또 최근에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를 입체적으로 완성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복지제도의 전면적 도입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사회과학에서 우리가 비교우위를 누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연구의 대상은 바로 한국 현대사가 아닐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학자들은 한국의 사례가 가지는 연구대상으로서의 중요성을 애써 외면한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성공을 우리나라 학자들은 관찰하고 분석하고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유럽의 200년에 걸친 산업화와 민주주의에만 주목한다. 30여 년 만에 전면적인 복지를 시행하고 있는 한국은 폄하하고, 100년에 걸쳐 발전한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 복지에만 눈을 돌린다.

나아가서 한국의 사회과학을 지배한 연구의 대상은 대부분 한국 현대사의 문제를 지적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80년대 중반부터 유행하던 '종속 심화·독점 강화' 테제가 대표적이다. 만약 당시의 한국이 대외적으로 종속이 심화되고 대내적으로는 독점이 강화되는 사회였다면, 90년대 혹은 2000년대 한국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한 사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로서 드러난 사실은 대외적인 종속이 지속적으로 약화되는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독점을 규제하는 경제 민주화가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학자들은 이런 한국의 현실을 외면한다.

오히려 다른 나라에서는 우리나라를 매우 귀중한 연구 대상으로 주목하고 있다.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물론이고, 새마을 운동을 공부하러 오는 개발도상국의 학자와 공무원들이 대표적인 예다. 이들은 마치 우리가 자연과학의 발전을 위해 남극에 과학기지를 운영하듯이, 한국을 연구하여 자신들의 발전에 도움을 얻고자 우리나라로 몰려오고 있다.

그런데 막상 전 세계가 주목하는 성공을 스스로 만들어 낸 대한민국의 학자들은 대한민국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작업이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작업을 통해서는 절대 대한민국의 성공을 설명할 수 없다. 연구 대상으로서 한국 현대사가 가지는 가치를 우리나라 학자들만 외면하는 역설이야말로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한 연구의 대상이다.


류석춘 연세대 교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6/30/2013063002388.html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