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19. 22:28

2013년 2월, 나는 하버드대에서 공중보건을 공부하는 젊은 마리사 릭스(Mariesa Lee Ricks)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았다. 그녀는 어머니가 한국인이며 한국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한류의 잠재력을 찾고 싶다고 얘기했다. 마침 얼마 후 미국 출장을 가게 돼 보스턴에서 그녀를 만났다. 나도 아내가 한국 사람이라 막연히 내 딸을 마음속에 그리며 약속 장소에 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내 딸 레이첼과 달리 흑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 순간 당황했지만, 그녀는 그로 인해 결코 불쾌함이나 불안감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녀는 매우 차분하고 성숙한 여성이었으며 한눈에 그녀만의 단단한 자아를 갖추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는 한류에 대한 관심이 학문적인 면과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포함하는 것이고, 그녀가 겪었던 경험의 연장선에 있었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나는 마리사로부터 한류의 새로운 종(種)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한류란 가수 싸이의 유행을 훨씬 초월하는 그 무엇이었으며 자기 자신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릇임과 동시에 세계의 다양성을 엿볼 수 있는 창이었다. 예전부터 한국은 아프리카계 혼혈인에 대해서는 불친절한 나라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 여기 내 눈앞에 있는 마리사로부터 나는 이런 인식이 산산이 조각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우린 한국인'이라는 단일민족의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틀이 깨지는 광경이었다.

수시로 인터넷 등을 통해 한국 소식을 접한다는 마리사는 "한국 청소년들의 왕따나 자살 문제를 접할 때마다 마치 중학생인 제 조카가 실제 한국에서 그런 일을 겪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곤 해요"라면서도 "그러나 한국은 지금 민족과 문화가 아주 다양해지고 있으며 과학기술의 발전과 문화의 역동성이 살아 숨 쉬는 곳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한국이 어떻게 청소년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 그리고 한국의 역동성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배우고 싶어 했다. 한류는 그녀에게도 큰 관심사였다. 하지만 미국과 한국을 넘나들며 존재하는 한류, 마리사의 한류는 그저 자동차와 전자제품을 팔고 연예계에 유행을 일으키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형태와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그녀는 설명했다. "아버지의 가족이 어머니를 만나기 전에는 한국 문화를 전혀 접해보질 못했어요. 다행히도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한국 문화를 알리는 데 열심이셨어요. 한국의 재미있는 이야기와 속담을 말해주거나 김치찌개를 만들어 주셨죠. 그래서 전 자연스럽게 새롭게 조화된 음식과 문화를 찾게 되었고, 그것이 제가 경험한 한류의 매력이에요." 동시에 그녀는 "미국식 개인주의의 가치는 저에게 스스로 흥미를 추구하고 위험을 감내하는 법을 알려주었어요"라고 했다. 마리사는 미국과 한국 양쪽의 장점을 취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마리사는 그녀만의 해석으로 한류를 발전시켜 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한국인과 흑인에게는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흑인들은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을, 한국인은 외세의 침략과 일제강점기를 겪었다. 그 고통이 그녀를 키운 원동력이었다. "그 고통 때문에 불굴(不屈)의 정신과 공동체 의식이라는 공통분모가 두 집단 모두의 삶에 녹아 있어요. 그 공통점이 제 가족의 두 문화를 쉽게 섞이게 해 주었죠." 두 문화의 융합에서 그녀는 한국의 중요한 가치를 보게 된다. 그녀는 세상이 좁아질수록 한류는 다양한 세계 인구가 한국 문화의 이해를 통해 하나의 교집합을 찾을 수 있게 해 주는 장이 될 것이라고 했다.

대화를 마치면서 마리사는 강조했다. "끊임없는 도전으로 불가능의 벽을 넘으려고 시도할 때마다, 제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우리 가족의 불굴의 정신이고, 제가 한국인 혈통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저는 언제나 소수민족일 거예요. 그래서 특권을 받은 한 사람으로서, 소수민족이 평등과 기회를 얻기 위해 불가능의 벽을 깨는 것은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저는 평등을 부르짖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 주고 싶습니다. 그들이 자기 생각을 잘 펼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오늘날 한류는 정부 정책이나 문화체육관광부의 의지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흐름은 비슷한 마음을 지닌 전 세계 사람들이 스스로 모여 만들어 낸 진실한 흐름이고, 이 흐름 속엔 전 세계 사람들의 한국 탐험에 대한 욕구가 들어 있다. 필자가 일본과 중국 문화에 대한 탐구를 거쳐 최종적으로 한국에 닻을 내린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교수·한국문화 전공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6/05/2013060501100.html



Posted by 겟업